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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의 제물에 대해서 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이든 잡수세요.” 하는 뜻입니다. 가려서 먹지 말고, 종교 자체를 무시한 채 자유롭게 먹으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종교가 많습니다. 그 종교적 풍습에 따라 어떤 음식은 부정하다고 생각하는데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먹으세요. 절에 가서도 산채 비빔밥 주면 감사하게 먹으세요.
이것은 복음 외에 세상의 모든 종교는 완전히 무시해도 괜찮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 8장 4절에 보면, “하나님은 한분 밖에 없는 줄 아노라”는 말씀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아는 사람한테는 더 이상 종교라는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하게 된 이유는 기준의 관습, 전통 때문입니다. 이런 것이 사람한테는 굉장히 무서워요. 왜 무서운가 하면 관습, 전통이 사람을 먹여 살립니다. 쉽게 말해서, 돈이 됩니다. 관습이나 전통을 버리게 되면 그 사회에서 추방됩니다. 그래서 전통이나 관습은 생존문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만약, 어떤 회사에서 관행적으로 비자금을 조성하는데, 어떤 신입 사원(기독교 신자)이 와서 “과장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렇게 나오면 그 사람은 그 회사에서 쫓겨나지요. “그게 틀린 줄 알지만 관행이야. 네가 관행을 무시해!”
검사들이 폭탄주를 마시는데, 어떤 검사가 “나는 안 마십니다.” 하고 거부한다면, 그 검사는 출세는 이제 끝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 조직사회에서 왕따 당하고 외톨이로 지내야 합니다. 서로 필요한 정보가 소통되어야 하는데 그 사람에게는 차단되고, 이렇게 되면 그는 무능력자가 되고 결국은 퇴출 대상이 됩니다.
이러한 사회적인 압력은 기존의 종교가 깔려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종교에 눌려있는 사람을 주께서 교회란 이름으로 건지시기 때문에 교회는 기존 종교로부터 이미 탈피했다는 어떤 증거가 있어야 됩니다. 그 증거가 뭐냐 하면, ‘무엇이든 감사함으로 먹어라’는 것입니다. 모든 음식으로부터 자유함, 이것이 기존 종교로부터 벗어난 증거가 됩니다.
‘그러면 목사님, 술은 어떻게 됩니까?’ 성경 전체를 봐서 술은 사람의 정신을 혼미케 합니다. 그래서 외부적으로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술 마시는 사람의 개인 문제일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도 생각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주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아야 하는데 술은 인위적으로 정신을 혼미케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조건을 걸지요. ‘정신을 혼미케 하지 않을 정도로 술을 마시면 어떻습니까?’ 잠언에 보면 아예 술을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성경에 보면, 술을 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술을 드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취하지는 않으셨지만.
그러면 맥주는 되고, 소주는 안 되는가? 몇 병까지 마시는 것이 가능한가? 이것은 규정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 체질에 따라 조금만 마셔도 취하는 사람이 있고, 많이 마셔도 안 취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술 취하지 말고 성령에 충만하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술을 좋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때에 사람들은 쾌락을 좋아한다는 말씀이 있어요. 관심사가 술을 좋아하고 그것을 즐기고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뜻으로 해석합니다.
모든 음식은 감사함으로 먹을 수 있다는 말에서 ‘감사함으로’가 무슨 뜻인가 하면, 음식 자체에 탐닉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없는데 주시면 감사하지요. 그런데 있는데 주시면 감사가 적어지고, ‘또 먹어야 되나’ 이렇게 나오지요.
요즘 얘들 밥 먹일 때, 어른들이 따라다니며 먹입니다. 아이들은 과자봉지 들고 있고, 엄마는 숟가락 들고 따라다니면서 밥 먹이려고 합니다. 이런 아이가 밥을 감사함으로 먹겠습니까?
‘감사함으로’라는 말은, 고마운 마음으로 먹는 것인데, ‘나는 먹을 자격도 없고, 원래 나는 아무 것도 가진 것도 없는데 주께서 이렇게 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라는 심정으로 먹는 것이지, 음식을 탐닉하거나 미식가가 되어서 가려 먹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
결론은 ‘하나님은 한 분 뿐이니까 더 이상 걱정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 것에 대해서 이제는 더 이상 얽매이지 않아도 ‘너는 이미 구원 받았어. 그러니까 이제는 세상 일에 대해 좀 가볍게 생각해! 종교, 음식문제 이런 것에 대해 좀 탈피해!’ 라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음식은 분식, 김밥, 만두, 자장면, 짬뽕, 탕수육 이런 것입니다. ‘미세한 맛’ 보다도 그냥 한 끼 때우면 그것으로 족해요. 그러면 되지 무엇 때문에 음식에 탐닉합니까?
8장 10-12절부터 봅시다.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 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이게 뭐냐 하면, 어떤 음식이든 마음대로 먹는데 그 중에 약한 양심을 가진 이가 있어요. 이번 수련회 주제가 ‘양심’인데, 성경에 보면, “약한 양심”이라고 되어 있어요. 로마서에 보면, “약한 믿음”으로 되어 있어요.
약한 믿음이란 세상 풍습에서 아직도 탈피하지 못한 사람을 말합니다. 약한 양심에 의하면 의로움과 죄를 스스로 판정하고 있어요. ‘내가 절에서 나온 음식을 먹을 수 있나?’ 하면서 거절하지요. 저는 지금도 절에서 나온 음식은 먹기 싫어요. 그리고 통일교에서 나오는 ‘맥콜’이런 것을 의도적으로 사는 것은 싫어요. 그러나 예수님이나 바울 같으면 그런 것에 전혀 구애받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나 사람은 누구든지 습관이 있어서 찜찜할 때는 안 하는 것이 자기에게 유익이 된다는 것이 바울의 주장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그 사람을 다루셔야 하는데, 주위에서 너무 자유의 범람을 인하여 그 사람들이 상처받게 되면 그것은 주님께서 다루는 방식과 다른 방식이라는 것이지요. “너는 고기도 못 먹는데 나는 먹는다. 너는 절에서 주는 음식 못 먹지만 나는 맛있게 먹는다.”고 하면서 상대를 조롱하는 식으로 나오는 것은 상대를 구원하는 좋은 방식은 아니고, 주께서 연약한 자를 다르시는 방식이 따로 있습니다.
만약 주께서 약한 양심에 있는 사람을 다루실 때는 사업을 망하게 한다든지, 자식이 병들게 한다든지 이런 방식을 쓰지 음식으로 약 올리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술 먹는 사람 술 끊으라 한다고 예수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술 마시는 사람에게 술 끊으라고 하는데 이것은 자기 자유를 근거로 한 인간적인 방식입니다. 술 먹는 사람 술 끊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 방식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는데 우리가 금방지게 그 사람 앞에서 우리의 자유를 자랑한다고 해서 좋은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형제를 네 마음대로 혼란케 하지 말라. 이들은 주님이 다루신다.’는 것입니다.
9장에도 이런 말씀이 나오는데, 9장의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냐 하면, 교인들이 사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되는가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이렇습니다. 교인들이 사도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가 교인들 생각하는 것 하고, 교인이 사도를 생각하는 것하고 핀트가 안 맞는다는 이야기를 9장에서 하고 있습니다.
교인들이 사도를 생각할 때는 ‘목자 상, 사도 상’이 딱 구축되어 있어요. 이분은 권위자이기 때문에 세속 일을 해서도 안 되고, 우리가 지급하는 생활비로 살아야 하고, 반드시 결혼도 해야 되고, 등등 기존 인간들의 생각에 종교 지도자들이 가지고 있는 카리스마를 총 동원해서 사도는 이러 이러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사도 바울이 생각하는 사도는 그렇지 않아요. ‘나도 그런 권한이 있지만 사용하지 않는 것이 진짜 사도의 자유의 진 면목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는 교인들에게 자유가 뭔가를 보여주려고 하고, 교인들은 사도의 형식에 바울이 좀 맞춰달라고 요구합니다. “너무 자유롭게 행동하지 말고, 우리가 생각하는 사도 요건에 좀 맞춰주세요.” 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왜 굳이 교인들이 요구하는 ‘사도 상’으로 자신이 따라주지 않고, 사도의 자유로운 모습을 이야기하는가 하면, 이것은 복음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 복음이 뭐냐? 16절을 봅시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이것이 바로 복음 전하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이것을 교인들이 압니까, 모릅니까? 몰라요. 왜 모르는가 하면, 교인들은 교회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교회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중심입니다. 사도는 주님과 한 통속입니다. 그런데 교인들은 교회를 어떻게 잘 운영해 볼까 하는 생각에 치중하고 있는데, 그들이 생각하는 사도와는 전혀 다른 예상 밖의 사도가 등장하니까 우리 교회에 맞는 사도가 되어 달라고 역으로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오니까 사도는, ‘얘들아, 그것이 아니야! 그것은 주님이 원하는 교회가 아니야!’ 하고 나오지요. 교인들은 교회만 생각했지 복음에 대해서는 생각이 없습니다.
사실 제가 [지옥의 하나님]을 쓴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그 책에 보면, 교회란 무에서 유를 만들어요. 있어도 없어져야 해요. 없다가도 있게 되고, 있다가도 없어지고. 교회가 없어져야 한다는 말은 교회를 붙들지 말고 복음을 붙들란 말입니다. 복음을 붙드는 것이 바로 생명의 교회입니다.
교회가 요구하는 그런 사도가 되면, 이것은 교회가 최우선적이고, 교회가 최종적이 되어요. 복음이 최종적인 것이 아니고.
여러분들이 목사를 구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면, ‘복음만 쳐다보고 그냥 사는 사람’ 그리니까, 교회가 어떤 사람을 요구하는가에 전혀 신경 안 쓰고, ‘복음을 안 전하면 제가 화를 당합니다.’ 라는 사람을 초빙하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목사가 있습니까? 없어요. 왜냐하면, 6장으로 돌아가서 “내 몸은 내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가 있어야 밥 먹고 살기 때문에, 그리고 목사인 나의 가치가 드러나기 때문에.
‘너희 몸은 너희 것이 아니라’ 진짜 예수님이 다루시는 그런 식으로 믿는 목사도 있지만, 그 목사는 주께서 그렇게 다루시기 때문에 그렇지, 본 모습은 항상 내가 목사로서 처신 잘해서 살겠다는 그런 생각이 나올 수밖에 없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교회를 왜 만듭니까? 안 만들면 되지. 안 만드는데 복음 때문에 모이게 되면 교회예요. [지옥의 하나님]을 제대로 읽어보셔야 합니다.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의 이 이야기가가 꼭 나와야 될 이유가 그 당시 교회가 사도의 진정한 자유의 복음을 모르고, 교회되기 위한 교회로 나갔기 때문에 사도가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로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당신들이 복음 전한다고 인정해서 내가 복음 전하고, 당신들이 복음 안 전한다고 해서 내가 멈추고, 나는 그런 인간이 아니다. 만약 그러했다면 나는 사도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들에게 매인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 매인 사람이다.’는 것이지요.
‘복음 안 전하면 여러분들이 이야기하기 전에 주님께서 내게 화를 내시고, 따라서 나는 아내를 둘 권리도 있고, 봉급을 받을 권리도 있지만 봉급 안 받겠습니다. 그리고 아내도 없습니다. 왜? 나는 복음이 위주지 여러분들이 원하는 목사의 틀에 맞추는 그런 목사가 아닙니다.’ 라는 것이 바울의 주장입니다. 이것을 두 자로 ‘자유’라고 합니다.
이런 목사를 못 만나면 어떻게 합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주께서 만나게 해 주십니다. 모든 교회는 주님이 알아서 하시기 때문에 반드시 만나게 하십니다.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어느 날부터 복음도 싫고, 성경도 싫고, 복음 전하는 것도 싫고, 이런 생각이 들면 자진해서 그 교회를 사직할 수 있는 목사. 이런 목사를 뽑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복음 잘 전하는가?’로 뽑지 마시고, 복음 전하기 싫거든 금방이라도 사직서 쓸 수 있는 목사를 뽑으시면 100% 정답입니다.
이런 사람은 복음을 전할 때나 안 전할 때나 누구에게 매인 사람인가 하면 주님께 매여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께 매여 있기에 복음 전하기 싫으면 안 전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그만 전하도록 하시면 그만 두어야지요. 주님께 매여 있기에 복음을 전하기 싫으면 안 전하면 되지만 목사는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아! 다른 사람이 준비되어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10년을 전했다. 20년을 목회했다. 이런 것이 소용없습니다. 그 다음 주일 설교하기 싫고, 그래서 설교 준비도 대충하고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그만 두어야 합니다. 이것은 성경 자체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9장 18절을 보겠습니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뭐가 상이라고요? 자신이 알고 있는 복음 다 전하는 것이 상입니다. 보통 받는 것이 상이잖아요? 그런데 바울은 복음을 던져주고 전하는 것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으로부터 상을 받았기에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26-27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두려워한다고 해서 지옥 간다는 뜻이 아니고, 그 정도로 ‘나는 복음 때문에 살지 당신들 때문에 사는 사람은 아닙니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누구에게 말합니까? 지금 교인들에게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내가 복음 외에 다른 소리 하거든 제발 날 쫓아내시기 바랍니다.’라는 뜻입니다. 내가 살도록. 여러분이 날 쫓아냄으로 내가 살게.
사도 바울은 ‘내가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하는 사람인데, 이런 말을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기 위해서 하겠습니까?
바라기는, 여러분들도 이정도로 주님께 매인 성도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무더운 날씨 가운데서도 주의 말씀으로 이렇게 만나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고 이미 우리가 그분의 것이 되었다면 더 이상 세상 일로 걱정하고 염려하는 일이 없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5년 8월 25일 10시 05분 녹취 마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