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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 한 것 다시 한 번 정리를 해 봅시다.
자아로부터 시작되면 이것은 반성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시도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반성, 회개, 뉘우침 등을 통해서 자기 몸을 구원시키려 하는데 이런 구원은 永?바울이 없다고 했지요?
특히 교회에서는 반성을 하는데 반성의 기준으로 동원되는 것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아, 잘못 되었구나!’ 깨닫고 예수 믿고 구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도 자아 구원을 포기하지 않는 상태에서 예수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서 예수 믿는 사람으로 만들어요. 원래는 안 믿는 사람인데. 예수 안 믿을 사람인데 믿는 사람으로 만든 이유는 자기 지체이기 때문에 그 사람 속에 말씀을 담아 움직일 때마다 말씀이 출렁이고 그 말씀이 폭발하도록 하셨어요. 말씀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터져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말씀으로 구원 하신다고 했지요. 그러기에 개별자는 있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자, 이제 두 번째 시간 공부합시다. 고린도전서 6장 19절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이 구절을 좀 설명해야겠습니다.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는 이 말씀은 논리상 문제점이 있지요? ‘너희 것이 아니’라면 ‘너희’라는 말이 아예 없어야 해요. ‘너희는 주님의 것이다.’고 해도 이 말도 문제가 있어요. ‘예수님의 것은 예수님의 것이다.’라고 해야 맞는 말이에요.
‘예수님의 것이기에 예수님의 것이다.’라고 해야 되는데, 왜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인간 자체가 평생을 살면서 ‘나는 내 것이다.’는 것을 포기 못합니다. 나는 주님의 지체라는 것을 알면서도 평소에 살아가는 가운데서 ‘이러면 안돼. 그것은 나쁜 거야. 그것은 죄야.’라는 성경 말씀이 나오지요. 이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옵니까, 안 들어옵니까? 들어오지요. 이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와야 말씀의 ‘쌈지(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좋은 것만 골라서 담는 것이 아니고, 나쁜 것도 들어옵니다. 그 들어오는 것 중에 하나가 ‘내 몸은 내가 알아서 구원 받습니다.’ 라는 생각도 들어와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너희 몸은 너희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생을 살아도 ‘내 몸은 내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는 이런 말씀까지 우리 속에 들어와 있어야 우리가 평생을 두고 자기 힘으로 구원 되지 못하고 주님의 능력으로 구원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 이해되십니까?
그래서 우리는 우리 능력으로 구원 받지 못하고 말씀이 우리 속에 역사해서 구원 받습니다.
뒤에 오신 분들을 위해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는 이 문장 자체가 사실은 논리상 성립이 안 됩니다.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 쓸 것이 아니고, ‘ --는 내 것이다.’ 이렇게 하든지, 너희가 너희의 것이 아니라면 ‘너희’라는 말을 쓸 필요도 없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꽃아, 너는 사람이 아니야.’ 원래 꽃은 사람이 아닌데 이런 이야기 왜 합니까? 이런 말 할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늘 ‘내 것은 내 것이다.’고 우기고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으로 다그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나는 항상 내 몸은 내 것이라고 다짐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라는 본성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내 것은 내 것이다’라면, 내가 천국 가고 구원 받는 것은 내가 알아서 구원 받아야지 누가 나를 구원 하겠습니까? 내 구원은 내가 알아서 해야지.
이런 생각 자체가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는 말씀에 저촉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쉽게 설명하려고 했는데 더 어렵게 되었습니다. ‘내 것은 내 것이기 때문에 내 구원은 내가 알아서 구원해야 돼.’ 라는 사고방식 자체가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는 이 말씀에 저촉되고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에 어긋나든 말든 우리의 본성은 어디까지나 ‘내 것은 내 것이다.’ 라는 생각 밖에 못합니다.
우리가 내 것이기 때문에 내가 예수 믿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믿게 하셨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주님이 믿음을 주셨다고 생각해야 되는데, 우리는 그런 생각 하면서도, ‘그래도 그런 생각까지 내가 믿어 주어야 구원 받지요.’ 하면서 내 것을 포기 못해요. 그런 말씀조차도 내 것으로 만들어야 안심을 하겠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말씀 앞에 맨날 깨져야 해요.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그러면 어떤 사람은 목사님 물어봅시다. 물어보든지 꼬집어보든지 마음대로 하세요. ‘그러면 가만히 있으면 구원 받습니까? 가만히 있으면 구원 받는다는 것이 성경에 있던가요? 가만히 있는 내가 가만히 있다는 내 행동으로 구원 받습니까? 구원 못 받지요. 왜 그런가 하면, 가만히 있는 내가 누구의 것입니까? 내 것이지요. 내 것이 내 것으로 구원 받는 식의 구원은 없습니다.
내 것을 내 것으로 여기고 그런 방식으로 구원 하는 것은 구원되지 않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구원 받습니까?’ 라는 것도, 내 것을 내 것이라고 여기는 원칙에 놓여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너희들이 가만히 있든, 까불든, 뭘 하든 간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란 말이야.’
사람들과 대화를 해 보면 항상 ‘나는 내 것입니다.’라는 것에서 출발해요. 이렇게 시작하기 때문에 나중에 어떤 결론에 도달하더라도 둘 다 헤어집니다. ‘나는 내 것이야.’ 하면서. 그래서 이것은 한 몸이 될 수 없습니다. 부부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식 할 때는 ‘아플 때나, 괴로울 때나, 슬플 때나 서로 사랑하겠느뇨? 예’ 했지만, 나를 위해 결혼한 이상은 항상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야 내 욕심으로 결혼했건 말건, 그 결혼을 성사시키신 분은 주님이시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 가정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 결혼 한 것입니다. 이것이 정답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뜻은 없고, 자신에게 유리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기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의 바탕에는 ‘나는 내 것입니다.’라는 것이 깔려 있습니다. 우리는 평생을 이렇게 삽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 공격을 해 대지요. 이렇게 평생을 주님과 우리가 싸웁니다.
주께서 어떻게 일하시는가 하면, 너희 몸을 너희 것으로 간주하지 못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분별하는가 하면, 내 몸이 내 몸이 아니라고 느껴질 때는 하나님의 뜻이고, 역시 내가 잘 났어. 내 몸이 나의 것이라고 여기지면 이것은 마귀의 시험입니다.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주님은 항상 우리의 예상 밖의 일을 하십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 몸이 자기의 것이라고 간주하기에 항상 자기 일을 예상하고 그 예상에 맞추어서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한 수법으로 벌벌 떨면서 미래에 대해 두려워하면서 일합니다.
사도 바울은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왜 두려움이 없었는가 하면, 자기 몸이 자기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몸이 자신의 것이기에 스스로 관리해야 하기 때문에 항상 조마조마하게 삽니다. ‘저런 일은 일어나면 안 되는데, 저것이 내가 바라는 것인데’ 하면서. 이런 자들은 주님께서 친히 나를 다루신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0장 19-20절에 보면,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고 되어 있지요.
성령께서 나타날 때는 항상 ‘너희가 아니라’고 되어 있지요. 그런데 평소에 우리가 살아가는 태도는 모든 일의 책임을 내가 지는 쪽으로 일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늘 성령님과 다투지요. 우리는 항상 예상 문제를 내 놓고 걱정을 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목사들이 설교 후에 사모한테 잔소리를 듣습니다. ‘왜 오늘 그런 설교했어? 그런 말 하면 김집사 상처 받고, 이 집사도 싫어 할거야!’ ‘나는 그런 뜻으로 설교한 것이 아닌데’, ‘당신이야 그런 뜻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듣는 사람은 아니야’
그런데 다음 주에 정말 김집사가 출석하지 않았습니다. ‘그 봐, 당신이 함부로 말해서 그 사람 상처 받았잖아’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말씀에 상처 받아 안 나온 것이 아니고 집안에 잔치가 있어서 갔답니다.
하나님은 내 몸을 자기 것으로 사용하시는데, 나는 내 몸을 내 것으로 여기고 평생을 삽니다. 이런 습관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습관은 충동에서 나오고, 충동은 동물적인 본능에서 나옵니다.
이것은 고칠 문제가 아닙니다. 고친다는 자체가 걱정을 사서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고치십니다. 이게 안 믿어지십니까? 여러분이 스스로 자신을 고치려고 생각하지 마세요. 주께서 고치십니다.
우리는 평생을 두고 나 밖에 모르는 인간입니다. 이것을 너무 위험스럽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성이에요. 성경에서는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우리는 평생을 살면서 내 몸은 내 것이기에 내가 알아서 합니다. 이것을 수정하거나 고쳐서 내 몸을 내 것이 아니라고 거부하려 한다면 그 자체가 내 몸을 내가 구원하려는 방식입니다.
날씨가 왜 덥습니까? 주님의 뜻에 따라 더운 것입니다. 저 이단은 왜 설치는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모든 것이 주의 은혜입니다. 내 옆에 나쁜 놈이 왜 이사 왔는가? 이것도 주님의 은혜입니다. 저런 인간은 내 곁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는데 하는 생각은 내 몸을 내 것으로 여기기에 나오는 발상입니다.
이제 고린도전서 6장 봅시다. 20-21절입니다.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우리 힘으로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지요. 그러나 되게 하시지요. 우리 힘으로는 안 되지만 반드시 되게 하십니다. 누가요? 우리 몸의 주인 되신 주님이 되게 하시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밖에 없어요.
어떤 식으로 됩니까?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는 말씀에 충격을 받고, ‘내 몸이 내 것인 줄 알고 염려하고 챙기려 했는데 그것이 잘못이었구나’ 회개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와 점집의 차이점이 뭡니까? 차이점이 없어요. 요즘 교회가 점집이 되었어요. 가짜 대나무 꽂아 놓고 점치잖아요. 십자가 꽂아 놓았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몸은 내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는 한 교회 와도 점집에 가는 것과 차이가 없습니다.
교회는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만들게 하시지요. 복음 안에서 모이게 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언제 그런 이야기 했어요. [우리교회]는 없고, 매주 모이면 모이는 그것이 교회지요. 그리고 우리는 영적으로 함께 있지요. 몸은 떠나 있어나 영적으로는 함께 있어요. 광주랑 대구가 먼 거리여도 함께 있어요. 이것이 믿어져야 예수님과 내가 함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요. 같은 성도끼리 함께 있다고 믿어지지 않는다면 보이지 않는 예수님과 내가 함께 있다는 것이 믿어질 수 있겠습니까?
제가 지금 너무 높은 신앙 수준을 요구한다고 불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보면, 제 이야기 정도가 아니라, 성령 받지 않으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씀들만 나열되어 있어요.
7장 봅시다. 1절에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결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혼 안 하는 것이 좋지만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좀 전에도 이야기 했듯이 하나님은 뭐 밖에 모른다? 말씀 밖에 모릅니다. 말씀을 말씀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사용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씀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중요시 여기는 것이 아니고 생명나무를 중요시여깁니다. 생명나무 지키기 위해 우리 인간을 쫓아내 버립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 예수만 사랑합니다. 인간은 사랑하지 않습니다. 단, 예수를 사랑한다는 조건 하에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기존 교회 목사들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음행해서는 안 된다는 이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 결혼 제도가 있다고 사도 바울은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우리 생각은, 결혼해 놓고, 결혼 생활을 행복하게 영위하기 위해서 음행을 해서는 안 된다고 여깁니다. 음행하면 결혼 생활이 엉망진창이 된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음행을 방지하기 위해서 결혼을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교회가 하도 장사가 안 되니까, ‘행복한 가정 만들기’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이것이 마치 복음인 냥 가르치고 있습니다. 창세기 2장을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은 국가나 민족보다 가정을 우선시 한다고 주장합니다. 가정이 파괴되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깨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좋은 아버지 되기. 좋은 엄마 되기. 부부 십계명’ 이런 것을 만듭니다. 현재 있는 십계명도 못 지키는데 부부 십계명 만들어서 어쩌자는 것입니까?
[지옥의 하나님] 읽어보셨습니까? 그기에 보면 나오는데, 인간은 법이 없으면 꼼짝도 안 합니다. 왜냐하면 법에서 힘이 나오거든요. 무슨 힘인가 하면, 자기 의로움의 힘이 나옵니다. 자기 행동의 정당함의 힘이 법에서 나와요. 법을 만들어서 그 법을 지키면서 나는 정당하다고 합니다. 스스로 자기에게 힘을 부여할 수 있는 근거로서 자신이 법을 만듭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바리새인이 아니고 뭡니까?
하나님이 주신 법은, 우리가 법의 저주에서 못 벗어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법을 주신 것입니다. 십계명을 준 것은,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법을 준수했다고 해서 여름이 지나가던가요? 지난 수요일 설교시간에 제가 좀 더러운 예를 들어서 설교했습니다. ‘독가스가 사람 수 적다고 해서 안 퍼집니까? 독가스가 퍼지는 것은 사람 수와 관계없습니다. 지하철에 사람 몇 명 있노? 250명 있다. 아이구 너무 많네. 독가스야 딴 곳으로 가자. 다음 지하철에는 몇 명 있노? 20명. 아 여기서 퍼지자.’ 이런 독가스 봤습니까?
엘리베이터에서 방귀를 꼈는데 사람 많다고 냄새가 안 퍼집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독가스예요. 사람 수와 관계없어요. 노아 홍수 때 몇 명 구원 받았습니까? 8명 구원 받았습니다. 구원 받을 수가 너무 적다고 홍수 안 일으킵니까?
옛날에 3류 극장에 가면 사람 수가 적으면 영화 안 돌렸습니다. 그러나 일류 극장은 관객 1명 있어도 영화 상영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뜻은 두 명이냐, 한 명이냐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서 돌립니다. 사람 위주가 아니고 말씀 위주입니다.
행복한 가정을 위해서 주께서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니고, 결혼 제도를 바울은 뭐로 보느냐 하면, 옛 언약으로 봅니다. 옛 언약은 뭔가 하면, 육에 대해서 육적으로 제한을 거는 시대가 옛 언약입니다. ‘봐라 안 되잖아! 행복한 가정 못 만들지. 내가 음행하지 말라고 했는데 너 음행 했지. 살인하지 말라고 했는데 남을 미워했지.’ 옛날 언약에 대해서 항상 시비를 걸고 너는 아담의 후손으로서 계속 육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까발리는 그런 기능을 하기 위해서 율법을 준 것입니다.
율법을 준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더욱 더 짓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율법을 왜 주었는가? 우리의 육적인 본성을 더욱 더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간음하지 않고, 살인하지 않고, 술도 안 먹고 훌륭하게 산 것 같은데, 항상 온유를 유지하지 못했다. 이것은 소용없습니다.
온유한 것은 성령이 와야 온유하지 육적인 것에서는 온유가 안 나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시기하고 질투할 수밖에 없어요.
어제 YTN을 보니까,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에 최고 기온이 47도에요. 여기에 누가 가 있습니까? 자이둔 부대가 가 있지요. 월급 200만원 정도 받고. 이야 이거 정말 힘듭니다. 대구 오늘 낮 기온이 37도입니다. 광주는 35도 정도 되고. 바그다드는 10도 더 놓아요. 무슨 이야기하다가 이런 이야기가 나온지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사람이 아무리 고생한다, 고생한다 해도 더 고생하는 것을 보면 결국은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선교사 이야기 했지요. 기온 47도 정도 되는 곳에서 선교한다면 얼마나 자부심을 갖겠습니까? ‘광주 사람들아 너희들은 35도가 덥다고 야단치는데 나는 47도 되는 곳에서 선교한다.’ 라고 큰소리치는데, 그 옆에 영하 50도 되는 곳에서 선교하는 사람이 나오면, 여기에서 뭘 느끼는가 하면, 시기심과 질투심이 생기겠지요. 이렇게 되면 이 사람은 육적인 사람이에요.
죽도록 선교하는데 자기보다 더 고생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갑자기 부화가 나면서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됩니다.
선을 행하는 그 자리에 반드시 뭐가 온다고요? 시기, 미움, 질투가 동반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선을 행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헌금을 해도 그렇고, 뭘 해도 그렇습니다. 이것을 뿌리칠 수 없습니다. 왜? 이것이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의 육적인 본성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은 이 본성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못 벗어난다고 율법을 준 것입니다. 율법을 줌으로 악을 더욱 악 되게 하지요.
그런데 인간이 무슨 수로 이런 시기와 질투를 이긴단 말입니까?
결혼이란 제도는 옛 언약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무슨 기능 때문에 그런가 하면, 두 사람이 한 몸 되는 기적을 보여 주기 위해서. 그런데 죄 짓고 난 후에는 두 사람은 두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남자 따로, 여자 따로.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결혼 제도를 가지고 뭘로 삼았는가 하면, 모형으로 삼습니다. 예수님과 그 신부된 교회가 너희들이 이루지 못한 결혼 제도를 완성시키는, 창세기 2장의 완성이 너희들 신혼 재미가 완성시키는 것이 아니고, 행복한 가정 만들기가 완성이 아니고, 예수님과 교회가 한 부부되는 것이 창세기 2장 말씀을 완성시킵니다.
그러니까 성경 말씀은 누가 지킵니까? 주님이 지키지 우리는 못해요. 계시록 21장에 하늘에서 뭐가 내려옵니까? 신부가 내려와요.
제가 서울의 어느 친척 결혼식에 갔더니 신부가 입장하면서 아버지 손잡고 들어가면 되는데, 요즘 신부는 하늘에서 내려와요. 수레를 타고. 나는 엘리야인줄 알았어요.
모형입니다. 모형. 구약은 처음에는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 하지만, 따지고 보니 아무것도 지킬 수가 없어요. 못 지키는 줄 알고 말씀을 주신 이유가, 못 지키는 것 까지 포함해서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심을 보여주는 모형으로 사용하는 거예요. 그 전체가.
[트루만 쇼]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그 영화가 상당히 화제작 이었습니다. 왜냐 하면, 어떤 사람을 어릴 때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쇼 무대에 등장시켜 전 세계 사람들이 구경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무대의 크기가 몇 Km인가 하면, 약 40Km 됩니다. 여기 바다도 있고, 섬도 있고. 그 사람이 태어나서 성장하고, 연애하고, 사랑하는 것 전부 다를 보여주는 거예요. 나중에는 주인공이 탈출하지요. 문 열고 탈출해서, ‘인간은 감시받고 있다’는 그것을 고발하는 영화인데 --
마치 구약 성경과 같아요.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죽인다고 해 놓고는 안 죽이고 계속 살려두고 번식케 하는 것은, 그들이 따 먹은 선악과가, 악마의 술책이 어떤 양상으로 번지는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마지막 그 죄가 어디까지 미칩니까? 하나님을 죽이는데 까지 나가지요.
인간들이 이렇게 실패했다고 해서 주의 뜻이 실패할까요? 천만예요. 이 전체를 뭐로 만드느냐? 전체를 모델로 만들어요. ‘인간은 못하지만 하나님은 하신다.’ 그러니까 우리는 바비인형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조종 받는 바비인형입니다.
이런 식으로 남자, 여자관계를 설명하는데, 이것을 바울이 알고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음행을 하지 말라.” 왜 하지 말라고 하는가 하면, 우리 몸이 우리의 것이 아니고 주님의 지체이기 때문에, 주님의 영이 함께 있기 때문에 내 개인적인 몸이라고 생각해서 개인적인 차원에서 굴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약에 내 몸을 내 마음대로 굴리면 어떻게 됩니까?’ 라고 질문하는 사람이 있는데, 우리는 평생을 내 몸을 내가 굴리고 있습니다. ‘하지 말라’는 말은, 그렇게 굴리는 줄 알면서도 그것이 잘못이란 것을 고발하면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이렇게 말하면, 또 ‘그러면 굴려도 되겠네요?’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더 이상 너희 몸은 너희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희 몸이 너희의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아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주께서 우리를 다루십니다. 여기에 대해 우리가 저항할 수 없습니다. 항거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몸이 우리 것이 아닌 것을 확인시키면서 계속 사용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계속 내 몸은 내 것이라는 식으로 살아가고 이렇게 두 고집에 맞서는데 결국은 주님이 이기지요. 고린도전서 10장 22절 끝에 보면,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고집을 부려도 주님을 이길 수 있나요? 없지요. 주님은 우리보다 더 강해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내십니다. 이것 믿어진다는 것이 인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계속 결혼 이야기 해 봅시다. 7장 14-15절에 보면,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 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예수 믿는 형제와 자매, 즉 성도에게는 꼭 이혼을 안 할 필요는 없다는 말입니다. 이혼을 해야 할 때는 이혼해도 상관없다는 말입니다. 결혼에 얽매이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거 참 기쁜 소식 아닙니까?
그런데 그 앞에 말을 봐야 되요. 그 앞의 말이, ‘아내는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자식들은 그 부모로부터 거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결합해 보면 이런 결론이 나옵니다. 남편이 복음을 알기 때문에 아내는 반드시 복음을 아는 자라야 하는데, ‘남편이 복음을 아는데 아내가 복음을 모른다는 것은 남편 책임이다.’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큰 일 납니다. 이것은 말도 안 됩니다.
반대로 ‘아내가 복음을 아는데 남편이 복음을 모른다. 따라서 아내가 복음을 알면 남편도 반드시 복음을 알고, 그 자식도 복음을 알게 되어 있다.’ 라는 해석도 잘못된 것입니다.
둘 중 한 사람만 복음 알아도 전염이 되어 같이 복음을 안다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되면 갈라질 이유가 없지요.
남편이 복음을 알게 되면, 아내가 남편으로부터 복음을 듣게 되니까 거룩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가정을 뭐라고 했습니까? 모형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가정을 만들 때, 결혼을 할 때, 결혼 하는 것이 누구의 뜻이라고 했습니까? 좋아서 결혼을 했든 어떠했든 결혼하는 것은 하나님 뜻인데, 하나님의 뜻이란 것은 결혼만 시켜놓고 나머지는 알아서 행복한란 말이 아니라, 결혼 시키신 후에도 계속해서 그 가정에 관여를 합니다. 말씀으로 관여합니다. 그 말씀 중에 뭐가 들어있는가 하면, ‘남편으로 인하여 아내가 구원 받을 수 있고, 아내로 인하여 남편이 구원 받을 수 있고, 부모로 인하여 자식이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주께서 실행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이 가정은 내 것이 되면 안 됩니다. 이 결혼이 내 결혼이 되면 안 되지요. 그렇게 되면 처음부터 다 틀립니다. 결혼을 시키는 것은 주님의 뜻인데, 결혼 자체를 통해서 내가 만났던 아내가 나로 인해서 구원 받을 수 있는 그런 길을 제공하려고 주께서 그렇게 하시고, 구원 안 시켜도 할 수 없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결혼을 했습니다. 이 말의 뜻은, 그 가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도 이미 깊숙이 주님이 개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으로 결혼했다고 하면서, 결혼식 까지만 주님께서 이끄셨고 그 이후는 본인들이 성심성의껏 그 결혼을 유지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것은 마치 무엇과 같은고 하니, 예수 믿는 것 까지는 주님이 하시고, 예수 믿은 후 천당 가는 것은 자신이 성화되어 가는 것으로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결혼해서 아내나 남편을 내 원하는 대로 이끌려고 하면, 그것은 근심거리가 되고 걱정거리가 됩니다. 그렇게 하지 말고, 주님께 맡기세요. 그러면 주님께서 알아서 가정을 잘 꾸려나가는 것을 우리가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특히 여자들은 생각하기를, 내가 간섭 안하면 남편이 남편 노릇 제대로 못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이 있어요. 왜 그런 생각 하는가 하면, 여자가 할 일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집에서 살림만 하고 별 할 일이 없으니까 24시간 집 나간 남편만 생각해요. 그래서 저녁 시간 되면 ‘빨리 안 들어오나’ 하고 기다려요.
여자가 직장생활 하고 남편이 놀면요, 이제는 반대가 되어서 여자에게 전화해서 ‘당신 언제 들어오는데?’ 하면서 기다려요. 그러면 아내는 ‘여장부가 밖에서 일하는데 자꾸 전화할래!’ 하면서 화를 내지요.
아내든 남편이든 다 주께 맡기세요.
여기에서 좀 더 어려운 이야기를 좀 해야겠습니다. 존 듀이 이야기를 해야겠는데, 윤리라는 것은 공동선이지요. 공동선의 최고 이상은 재물, 경제적 발전인데, 이 윤리를 누가 가르치느냐? 바로 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의 안목, 시선, 평가, 여론 등이 그 인간의 윤리를 결정한다고 합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가정생활을 하는데 헤어지고 싶어도 쉽게 못 헤어져요. 헤어지게 되면, 우리 결혼한다고 부조 낸 집안 식구들과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 파렴치한 인간으로 생각할거야!
그런 사회적인 윤리가 이혼을 막아내는 공동선을 이룬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존 듀이는 자기 일만이 아니라 남의 일에도 참견해서 공동선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공자, 맹자 윤리와 비슷하지요? 개인보다 국가가 우선이고, 사회가 우선이고, 집안이 우선이란 것입니다.
존 듀이의 윤리관에 대해서 성경은 동의합니까, 반대합니까? 반대해요. 그러니까 성경이 어려워요. ‘사랑 한다’고 할 때, 지금 현재 있는 자기 본처와 남편이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고, ‘남편이 아내 아닌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라고 할 수 있는 기준이 너무나 인위적인 기준이지요. 결국 뭐냐 하면, 이 여자는 내 남편을 소유하는 것이 하나님의 진리이고, 하나님의 선이라고 여기면 그것은 대단히 곤란하다는 말입니다.
남자는 여러 여자를 내 것으로 갖고 싶고, 여자는 한 남자를 온전히 자기가 다 독차지하고 싶은 그런 차이가 있어요. 이것이 창세기 3장에 나오는데-- 남편을 소유한다는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왜냐 하면, 남편과 아내를 양쪽 다 소유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주님이 십니다. 따라서 주님 보기기에 음행이란 것은 옛날 언약에서는 결혼한 남자가 다른 여자, 또는 결혼한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음욕을 품는 것을 음행으로 봤는데, 신약에서는 ‘내 남편이 내 것이다.’라는 것이 음행입니다. 내 남편은 누구 것입니까? 너희 몸은 주님의 것이고, 아내의 몸은 누구 것입니까? 역시 주님의 것입니다. 둘이 만나게 한 것은 모두 다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도록 하기 위해서 결혼하게 한 것입니다.
이런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은, 예를 들어 남편이 복음 모르는 사람인데 “당신은 복음을 믿는다면서. 난 복음 몰라. 그래서 나랑 해어지자고. 나는 못해. 당신은 내거야!” 이렇게 나오면, 여기에 대해 성도는 구애받을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까 이 구절이 가정 파탄 내는 구절로 여겨지지요. 그런데 여기 본문에 보면, “구원 받지 못한 아내가 헤어지기 싫어하거든 같이 살아라.” 고 합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구원 받을 기회를 주기 위한 조치지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결혼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고, 결혼을 통해서 어떻게 하든 복음이 전달되는 계기로 삼고자 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이야기입니다.
한 가지만 더 하고 좀 쉽시다. 그래서 결혼 안 했느냐? 혼자 살아라.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고, 남편 있는 자는 남편 없는 자같이 살고, 만약에 결혼을 하게 되면, 그동안 ‘주님을 위해 어떻게 살까?’ 하다가 이제는 ‘남편을 위해 어떻게 살까?’ 하고 마음이 나뉘어 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도 섬기고, 남편도 섬기는 이런 것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나 남편이나 둘 중 하나를 골라잡아야 합니다. ‘이것이 결혼 제도의 한계이다. 결혼을 하려거든 이것을 알고 해라’ 라고 바울은 외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음행의 생각이 들거든 차라리 결혼해서 주를 섬기고(결혼해서 음행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혹 결혼을 안 하더라도 이러나저러나 주님만을 섬기라는 것이 고린도전서 7장의 결론입니다.
10분 쉽시다.
(2005년 8월 22일 17시 02분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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