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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6장 15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성경 어느 구절도 쉽지 않습니다만 오늘 이 대목도 만만치 않습니다. 우리 몸이 개별적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상식과는 전혀 딴판입니다. 부모로부터 태어난 나는 독립된 몸으로 출생한다. 그래서 ‘나’라고 할 때는 내 몸을 지칭합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치면 “네가 왜 나를 치냐?” 이렇게 나오지요. “네가 왜 그리스도의 지체를 치느냐?” 이렇게 말하지는 않습니다. 배가 고프면 내가 배가 고픈 것이지, 그리스도의 지체인 내가 배고픈 것은 아니잖아요.
‘그리스도는 그리스도고 나는 나다.’ 이것이 우리의 일상적인 사고이며 버릇이고 습관이지요. ‘버릇’은 존 듀이의 철학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해요. 그의 주장은 ‘사람은 충동이 발생하고, 충동이 경험을 만나면 반성이 생기고 그 반성이 습관이 되고, 이 습관에서 쌓이면 성격이 되고 이 성격에서 행동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존 듀이는 현재 미국에 있는 모든 민주주의 정치와 교육을 연계시킨 최초의 사람입니다. 존 듀이는 제임스라는 사람의 실용주의 바탕 위에서 시작 되는데, 이 사람을 ‘도구주의’라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의 몸은 전체 인류의 발전을 위해서 수단이 되어야 하고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이 우리나라의 기본적인 교육 철학이기도 합니다.
존 듀이가 주장하는 윤리, 도덕에 의하면 공동선을 위해서 우리는 이바지해야 한다는 것이 이 사람의 도구주의 윤리관입니다. 흔히 목사님들이 설교할 때 “너는 인류와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큰 일군이 되어라.”는 식으로 하는데, 이것이 바로 존 듀이의 도구주의입니다. 목사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존 듀이가 주장한 공동선입니다.
존 듀이의 교육이론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충동은 동일하지만 어떤 가정환경과 어떤 교육환경에 주어지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훌륭한 도구가 되느냐 나쁜 도구가 되느냐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학교 교육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동일한 충동을 느끼기 때문에 좋은 경험을 만나면 좋은 사람이 되고, 나쁜 환경에 빠지면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굳이 교육철학을 공부하지 않아도, 우리가 가정교육을 하다보면 상식이란 것이 있지요.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방금 제가 존 듀이의 철학을 이야기했지만 이 사람의 주장과 비슷하게 우리가 자녀를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까? “네 친구 부모님은 어떤 분이냐? 친구를 보면 너를 알 수 있어. 나쁜 친구 사귀면 안 돼. 좋은 친구들 만나야 해.” 흔히 그렇게 말하지요.
존 듀이의 ‘공동선’에서 과연 ‘선’이 무엇인가 하면, 이 사람은 실용주의를 들고 나옵니다. 실용주의는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면, 돈을 많이 벌게 하면 그것이 좋은 것이고, 돈을 못 벌게 하면 나쁜 것이라는 것입니다.
동물과 사람의 DNA를 조사해 보면, 원숭이와 사람이 99.8% 동일해요. 겨우 0.2% 달라서 한쪽은 사람이 되고 한쪽은 원숭이가 되었어요. 그러니까 인간 내면에는 동물적인 성향이 있는데 번식욕, 공격(방어)욕, 식욕, 사회성 등 이러한 기본적인 욕구가 동물에게도 있고 동일하게 사람에게도 있습니다. 다만 동물과 사람의 차이점은 동물은 충동적으로 이런 욕구를 이뤄가는 반면에 사람은 충동대로 행동하지 않고 이성이 있어서 반성 한다는 것이 다릅니다.
사람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할 때는 ‘내가 짐승이냐? 이런 짓 하게.’ 하지만, 갑자기 부도가 나고 살기 어렵게 된다면 아무 생각 없이 돈 되는 일이라면(욕구를 충족시키는 것) 내가 무슨 짓이든 다 하겠다는 것입니다. 일단은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한 이후 사람으로서의 인격을 갖추면 된다는 것이지요.
동물을 통해서 인간의 내부적 속성을 파악하고자 하는 행동심리학적인 것이 그대로 이어져서 기본욕구를 보장받는 것을 한 글자로 “돈”이라고 합니다. 돈이 생명이고, 생명이 돈입니다. [지옥의 하나님]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돈이 생명이다.
그러니까 존 듀이가 한 이야기를 한 마디로 하면, 어찌했든 간에 최고선이 돈이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하든 환경에 잘 적응하고, 돈 되는 쪽으로 반성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최고의 교육이란 것입니다.
학교 선생님들은 많은 업무와 여러 학생을 지도한다고 바쁘니까 수업에 충실할 수 없어요. 그런데 학원 선생님은 강의를 너무 잘 합니다. 아주 흥미롭게 그리고 쉽게 잘 가르쳐요. 그래서 아이들이 밤늦게 까지 학원에서 수업하고 학교에 가서는 자요. 학교는 내신을 위해서, 학원은 입시를 위해서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어느 편이 돈을 벌수 있는 최고의 선이냐는 것이지요. 내가 자식을 어떻게 가르쳐야 생명 되는 돈을 벌수 있나? 이쪽으로 모든 것이 움직이는데, 존 듀이가 이렇게 주장하는 토대가 뭔가 하면, 자본주의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학자의 주장에 의하면, 자본주의 사회는 두 번 다시 이 자본주의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욕망의 맛을 보았기 때문에 그 어떤 인간도 자기 욕망을 스스로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참 힘듭니다. 그래도 해야지요.
지금 “그리스도의 지체”란 말이 무슨 뜻인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렇게 길게 나왔습니다. 왜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가 아니면 구원 받지 못하는가 하면, 인간이 선을 행하게 되면 반드시 그 옆에 언제 등장했는지 모르게 죄가 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등장합니다. 마치 술집에 가면 부르지도 않았는데 여자가 들어옵니다. 룸 살롱에 가면 그렇데요. 나는 안 가봤지만.
나는 지금 선을 행하고 있는 중인데 갑자기 내가 원치 않는 죄가 등장해요. 이것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어요. 그러면 선을 안 행하면 될 것이 아닌가 하지만 사람은 선을 추구하게 되어 있어요. 이게 미칠 지경이에요. 마태복음 7장 11절에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이런 말씀 있지요.
구체적인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6장 9절에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구절을 보면서, “나는 불의를 안 행할 거야. 불의하면 천국 못가.” 하면서 굳은 결심을 하지요. 계속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음란하는 자나 유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했기에 이런 짓 안 해야 천국 갈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가 선을 추구하는 마음보다 죄의 유혹이 훨씬 고단수입니다. 우리가 죄를 이기지 못합니다. 위의 말씀을 안 들었으면 착한 것이 뭔지도 몰랐는데 이 말씀을 듣고 난 뒤에 우리는 말씀대로 살려고 시도하는 그 현장에 죄가 강렬하고 역사합니다. 이렇게 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가 하면, 술이 어떤 것인지 맛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주께서 먹지 말라고 하셔서 안 먹고 버팁니다. 그런데 버티면 버틸수록 더 술을 먹고 싶은 마음이 강렬해 집니다.
달리 표현하면 이런 것입니다. “하늘나라 가고 싶다. 하지만 이 땅에서도 잘 살고 싶다.” 하늘나라 가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이 땅에서 행복하게 잘 살고 싶은 마음이 더 강렬해요. 그래서 이 땅에서 살고 싶다는 것이 나의 근본적인 행동이 되어서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핑계를 대는가 하면, “그래도 제 마음은 하늘나라를 사모합니다.” 이런 식으로 자꾸 하나님의 입을 막으려고 합니다. “그래도 저는 선을 추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면서.
마음은 원이로되 또 다른 마음이 오는데 그것이 계속해서 나를 사로잡아 마음이 불편한 것입니다. 성도 - “주님! 나 술 안 먹었습니다.” 예수님 - “술 안 먹은 것 왜 자꾸 강조해.” 성도 - “글쎄, 저는 술 안 먹었단 말이에요.” 예수님 - “아니 그걸 왜 강조하는데?” 이것은 결국 술 먹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 가기 위해서 참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편한 마음이고, 조마조마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예라 모르겠다. 먹어보자. 마음껏 한 번 취해보자. 이근호 목사님 말씀 들으면 예수의 피로서 구원 얻는다고 하는데, 예수의 피를 믿는 이상 술 먹었다고 해서 구원 못 얻을까’ 하면서 가만있는 제 핑계대고 술을 마시지요.
그런데 그 다음날에는 어떻게 나오느냐 하면, ‘한번만 먹었습니다.’하고 버티는 것입니다. ‘한번만 먹고 난 뒤 회개 했습니다. 두 번째는 절대 안 먹겠습니다.’
칸트의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많이 나와요. 그의 윤리학을 보면 굉장히 예리하게 지적해 놓았어요. 모르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말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미 죄를 안 이상은 자꾸 핑계를 대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미 죄에 대해서 끌리고 있기 때문에 안 가려고 하는 거예요. 이미 끌리고 있다는 말에 대해서는, 이 끌리고 있음을 우리 힘으로 잘라내면 되는데 잘리지 않고 계속해서 죄로부터 영향을 입기 때문에 자꾸 죄를 의식하면서 ‘두 번 까지는 봐 줍니까? 이번에는 독한 소주는 안 먹고 가벼운 맥주 한 잔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자꾸 뭔가 끌려가면서 변명을 한다는 것은 이미 술 마시고 싶다는 영향권 속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벌어진다고 칸트는 이야기합니다.
칸트 이야기는 나중에 8월 초에 상세히 이야기할 테니까 지금 다 이야기하면 그 때 밑천 떨어져서 안 됩니다.
고린도전서에서 십자가 이야기할 때 1장부터 신나게 잘 읽다가 6장에 “불의한 자는 하나님의 유업을 받을 수 없다”는 대목에 오면, 그동안 알고 있던 십자가가 와르르 다 무너지고 ‘이제는 어찌 하오리까’ 이런 쪽으로 정리를 해요.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11절) 이 대목을 사도 바울이 갔다 붙여도 사람들은 기쁨이 없어요. 왜 기쁨이 없는가 하면, “사람들이 염치가 있지 성령에 의해 씻음 받아놓고 또 다시 하늘나라 갈 수 없는 짓을 또다시 되풀이 하는 나는 앞으로 도대체 어떻게 살란 말인가?” 이런 고민에 빠져서 어쩔 줄 몰라요.
앞 장에서 아무리 십자가를 이야기해도, 그 때는 지금 당장 천당 갈 것처럼 여기다가, 갑자기 고린도전서 6장에 와서는 좌절하고 좌초해서 믿음의 파선이 일어납니다. “몰라, 몰라 나도 몰라. 난 내 마음대로 살거야! 해도, 해도 안 되는 것을 어쩌란 말이야? 이 조항을 어떻게 다 지켜. 예수 피도 믿고 이 조항들도 지켜야 통과돼? 그렇다면 난 자신 없어.” 이렇게 하면서 낙담을 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은데,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면 앞에 있는 십자가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
십자가에 대해서 광주에서 그렇게 외쳤건만, 모두가 십자가 안다, 복음 안다고 해 놓고 다 떠나가요. 지금 겨우 몇 명 남았네요. 십자가에 대해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뜸 드리지 말고 산듯하게 결론부터 말씀드릴게요. 고린도전서 6장에 나오는 이 말씀 전체가 우리 속에 들어옵니다. 우리 속에 들어오는 이것을 가지고 지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에요. 우리는 마치 뭐와 같은가 하면, 설날 세뱃돈 주려고 할아버지가 허리에 찬 쌈지에서 돈을 꺼내 주시지요. 이 쌈지가 지체에요. 허리에 매여 있어요. 그래서 달아날 수가 없어요.
십자가에서 아무리 달아나려고 해도 달아날 수 없어요. 쌈지 안에 뭐가 담겨 있는가 하면 고린도전서 6장이 다 담겨있어요. 그대로 들어와요. 들어오게 되면,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은 뭐만 들어오는가 하면 “불의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9-10절)는 말씀이 들어오고, 그 뒤의 구절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11절)는 말씀은 안 들어와요. 이것이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이 모두가 다 들어와요. 우리는 쌈지에 불과합니다. 내 안에 9-10절도 들어 있고, 11절도 들어오고. 양쪽 다 쌈지 안에 담겨요. 다 담겨서 우리를 걸어 다니는 고린도전서 6장으로 만듭니다. 이해 안 되십니까?
우리가 어떻게 구원 받는가가 문제가 아니고, 우리 자체가 걸어 다니는 고린도전서 6장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린도전서 6장 9-10절을 벗어날 수 없어요. 음란과 간음과 토색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에서 벗어나서 구원 받고자 하지요. 왜? 이런 짓 하면 하늘나라 기업을 얻지 못하니까. 그런데 이것이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는 하늘나라 기업을 얻을 수 없음을 우리 속에서 발생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 지켜서 우리 힘으로 하늘나라 갈 수 없음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 속에서 계속해서 되풀이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11절도 반복시킵니다.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이것도 옆에서 같이 반복시킵니다. 그러니까 한 번 씻어주는 것이 아니고 매일같이 씻어주시지요. 이것이 뭐냐 하면, 성령이 우리 속에 역사하는 방식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 발을 씻는 대목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지요. 왜 발을 씻어 주실까요? 이미 너희 몸은 씻을 필요도 없이 깨끗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발을 씻어줘요. 이 말이 참 어렵지요? ‘씻을 필요 없습니다.’하는 뜻에서 발을 씻어 줍니다.
어떤 부자에게 ‘당신은 집에 돈이 많지요?’ 예 많습니다. ‘그러면 내가 돈 천원 줄게요.’ 이런 뜻이란 말이지요. 그 부자는 천억을 소유한 사람인데 그에게 천원을 주는 것은 내가 주는 천원으로 당신 재산에 하등의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지에게 천원을 주면 반가워하지요. 그 천원으로 호떡을 사서 굶주린 배를 채울 수도 있지요. 그러나 이미 큰 부자에게는 돈 천원이 의미 없지요.
성도에게 ‘선해라, 착해라’고 하는 것은 ‘너는 안 착해도 착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이게 머리 좋은 사람에게만 이해되면 큰 일 나는데.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베드로 이야기 다시 합시다. 온 몸이 이미 깨끗하게 되었기 때문에 발만 씻어 주는 것입니다. “베드로야 내가 네 발을 씻었는데” 하니까 베드로가 “내 발은 이제 깨끗하게 되었지만 나머지는 더럽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야 그런 뜻이 아니다. 내가 발만 씻어주니까 발만 깨끗해 졌고 나머지는 더럽다고 여기는데 그것이 아니다. 내가 발을 씻은 것은 네가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발만 씻어주었다.”
성경에 보면 명령법이 나오지요. 우리보고 ‘착해라, 거룩하라, 기도하라’ 등등.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이미 너는 이런 말씀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이 적용되는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남들에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구원 받은 자들에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너는 쌈지야! 쌈지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요? 쌈지를 다른 말로 하면 ‘지체’. 초등부처럼 한 번 따라해 봅시다. “쌈지는 지체” “너는 왜 안 따라 하니?”
성도는 예수님의 말씀이 담겨있는 쌈지입니다. ‘지체’라는 말이 참 어렵지요? 왜 어려운가 하면, 사람들은 개별적이기 때문입니다. 내 몸은 내 것입니다. 이것은 타고 났어요. 동물들도 그래요. 사실 동물은 안 그런데 우리가 보기에 그렇게 보이지요. 인간들의 사고방식이 잘 못 되었으니까 그렇게 보지요.
동물을 움직이는 것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잖아요. 공중의 참새를 누가 먹이십니까? 시편 19편에 보면 모든 자연만물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데 유독 인간만 거기에서 탈락해서 인간 스스로 잘났다고 날뛰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셔서 제 잘났다는 인간을 제대로 된 인간 만들어내기 위해서 자기 지체로 만든 거예요.
참새는 얻어먹으면 되고, 들풀은 그냥 자나라면 되지만 인간은 동물과 다른 사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 나라와 의를 증거해야 합니다. 이 증거를 위해서는 지체가 되어야합니다. 지체가 되어야 증거할 수 있지 따로 독립해서는 안 된단 말입니다.
오늘날 엉터리 교회의 설교나 주장을 들어보세요. ‘자아가 말씀을 지켜서 어떻게 구원 받는가? 천국 가는가?’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니까 뭘 포기 못합니까? 자아를 포기 못하지요. 이렇게 되니까 ‘내가 말씀 지키면 죄가 나가 떨어진다’고 생각해요. 말씀을 점점 더 잘 지키면 죄가 점점 더 없어지고 자신은 의롭게 된다고 여기지요. 이것이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고 오늘날 교회들입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자아가 어떻게 구원 받겠는가 하는 것은 베드로, 요한 이런 자들이 이미 실패했어요. 베드로가 어떻게 말했습니까? ‘내 목숨 바쳐 주를 따르겠습니다.’ 라고 했지요. 그 때 예수님은 ‘아무도 나를 따라 올 수 없다.’고 하셨지요.
‘자아’란 원래 죄로부터 안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7장에, 내가 말씀을 지키고자 한다면 그 현장에 오히려 죄가 지배하고 있어요. 그러기에 구원은 불가능합니다. 고린도전서 6장 지켜서 구원 받는다면 아무도 구원 못 받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출발점을 ‘자아’로 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말씀을 지키는데 여기에 동원된 지체가 누구냐로 구원을 말씀합니다. 즉 예수님께 붙어서 구원 받는 식으로 구원 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구원관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죄인 중에 괴수로다” 라고 했지요. 죄인 중의 괴수인데 어떻게 구원 받았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바울을 자신의 지체로 만들었기 때문에 구원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 방식 외에 다른 구원 방식이 있습니까? 성경에 다른 방식으로의 구원이 있습니까? 없다는 것이 바울의 주장입니다. 내 힘으로 구원 받을 방법이 일체 없다는 것이 사도 바울이 증거하는 내용입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것도 예수님께서 힘을 주셔서 일어났고, 간수가 구원 받은 것도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이기에 구원 받은 것이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이 바울의 일관된 주장입니다.
구원 됐냐, 아니냐는 어떻게 아는가? 예수님의 지체라는 의식이 있으면 구원 받은 사람이고, 예수님의 지체란 의식은 없고 자아가 출발점이라면 그 사람은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보시면 틀림이 없습니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힘들지만 옛날 교회를 생각하면서 인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아가 예수님의 지체가 될 방법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아를 지체로 만들 때는 성령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면 구원 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한결같이 성령의 세례를 받아요. 성령의 세례를 받게 되면 예수의 사람이 됩니다. 이런 사람은 자아가 없어지고 예수님의 지체로 삽니다. 지체가 되면 말씀이 폭발합니다.
고린도전서 6장을 예로 들면,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했는데 이것은 바로 나 자신을 향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11절을 보니까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이것도 역시 내 이야기입니다.
내 안에서 이 말씀이 평생을 두고 되풀이 되면서 살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보너스 받았다고 좋아하는데 문득 내 안에서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니라’는 것이 튀어 나와요. 길 가는 걸인을 보면서 ‘어떻게 저런 식으로 구걸하면서 사나. 차라리 죽고 말지.’라고 생각하다가 갑자기 누가복음 16장에 있는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 품에 안긴 말씀이 떠올라서 ‘나도 은근히 부자를 꿈꿨구나’ 하고 깜짝 놀라게 되지요.
말씀의 사람, 그리스도의 지체는 이렇게 늘 말씀이 폭발합니다. 주님과 한 통속이 되었기 때문에 주의 말씀이 내 안에서 퍽, 퍽 터지는 폭발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내게 사기를 쳤습니다. 분노하면서 복수의 마음이 피어나는데 갑자기 로마서 12장 19절 말씀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는 말씀이 생각나서 분노의 마음이 가시게 되지요.
제 청년 시절에 목사의 설교를 들어보면 기가 차지요. 그런데 목사 설교에 은혜 받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에 은혜 받는 것입니다. 청년시절 안암제일교회 나갔는데 부활절이 되어 목사가 설교를 하는데(이 사람은 복음도 모르고 부활의 의미도 모르는 사람인데) 설교 중에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라는 말을 해요. 물론 그 뒤의 내용은 순 엉터리 말을 했지만, 저에게는 그 말이 들려오고 난 후 나 자신에게서 연이서 생각나는 것이,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 죽으셨으면 나는 이제 더 이상 죄가 없네.’ 이런 깨달음이 오고 은혜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로이드존스의 로마서 강해를 읽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연결되는 설교가 너무 은혜롭게 와 닿았어요. 우리 죄가 어떠해도 오직 십자가 피로 구원 된다는 내용이었어요. 물론 로이드존스 로마서 뒷부분에서는 엉터리가 많았지만.
이것이 지체입니다. 본인이 구원 받고 싶어서가 아니고 주님께서 자기 지체기 때문에 자신의 말씀을 계속해서 심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이 성경 책이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성경 말씀이 옮겨지는 것입니다.
로마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일하실 때 말씀을 앞장세워 일하십니다. 말씀이 온 세계에 퍼졌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말씀보다도 자기 경험을 앞장세웁니다. 저도 방금 제 경험을 이야기했습니다만 그것은 말씀에 해당 안 됩니다. 어쨌건 하나님은 말씀은 일체 양보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성경 말씀을 반드시 듣도록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이 우리의 바람 때문에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난데없이 구원 받는 것처럼, 하나님이 구원 받을 자에게 말씀 주시는 것도 난데없이 주는 것입니다.
제가 좀 전에 이야기했지요. 목사는 설교를 엉터리로 해도 나는 나름대로 은혜 받는 겁니다. 목사님들은 자기 설교에 욕심 내지 마세요. ‘내가 이렇게 귀한 말씀 전하고 있는데 왜 사람들이 말씀을 소홀히 듣지. 저 성도는 꼭 이 말씀 들어야 하는데.’ 이런 생각은 안 됩니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힌 목사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네 성도 아니고 내 성도다.” 라고 하시지요.
고린도전서 6장을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지켜달라는 것이 아니고, ‘너희는 그리스도의 지체니라’ 하고 단언하고 시작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지체이기 때문에 14절에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분명히 나와 있지요.
사도 바울이 무슨 취지로 이런 이야기합니까? 이 말은 우리 보고 뭘 하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주님은 자기 몸을 안 놓친다는 뜻입니다. 자기 몸을 잊을 그런 주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체는 몸에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몸이 부활되었으니까 지체는 같이 부활되게 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바울의 주장이 이런 뜻입니다. 그 부활의 능력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그러니까 우리하고 주님하고는 헤어질 수 있다, 없다? 헤어질 수 없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개별자가 아니지요. 철학에서 말하는 개별자, 단독자, 독립자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항상 우리 속에는 말씀이 담기는, 우리는 주머니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사도 바울이 염려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마음대로 내 몸을 주관하는 것을 염려합니다. 그래서 15절에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함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우리가 지금 덥다고 해서 이 말씀을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한 가지만 더 하고 첫째 시간은 마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 3절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여기서 뭣과 뭣을 대비시키고 있습니까? 영이 할 수 있는 것과 몸이 할 수 있는 것을 대비시키지요. 몸이 떨어져 있어나 영은 절대로 안 떨어진다는 것이 바울의 주장 아닙니까? 지금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있지 않아요. 그러나 그는 영으로 고린도교회와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바울이 왜 하는가 하면, 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자꾸 자기 몸을 자기가 관리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몸을 자기가 관리 하려고 하면 영적으로 관리가 안 되고 몸적으로만 관리가 되요. 그래서 바울은 이것을 고치기 위해서 영적인 몸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몸은 우리가 생각하는 몸과 달라서 한 번 붙으면 떨어지지 않는 그런 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과 한 몸 된 사람은, 바울이 ‘내가 영적으로 너희들과 함께 있는 것처럼, 너희들도 영적으로 그렇게 좀 생각해 다오.’ 라는 것입니다.
내가 사창가에 가도 주님이 함께 있다는 것을 좀 알라는 것입니다. 이것 하고 끝내려고 했는데 도저히 못 끝내겠어요.
16절 끝부분을 한 번 보세요.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17절에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결국 17절을 이야기 하려고 창기 이야기를 한 거예요. 주와 합하는 자는 이미 한 영이고, 그 다음에 주님 보시기에 한 몸이고, 주님 보시기에는 한 몸이고 한 영이지만, 현재 인간들은 영 따로 몸 따로 생각하더란 말이지요. 누가? 고린도교회 사람들이.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들 관점에서 ‘그래, 몸은 떨어져 있어나 영은 하나다.’ 라고 이야기를 시작한 거예요. 그리고 결론은 뭡니까? 주와 합하는 자는 몸도 영도 둘이 아니고 이미 한 통속 한 지체로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손이 몸에서 떨어져 따로 놀 수 있습니까? 몸 가는데 손도 따라가야지.
이미 너희들은 주님과 한 통속이기 때문에 이런 고린도전서 6장 말씀, 성령의 씻음이 무슨 뜻인지 다 납득이 되도록 여러분을 이끌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Do you understand?
10분간 쉽시다. (2005. 8. 9. 12:05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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