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야고보서 2:5-7 / 가난한 자의 믿음(가난이라는 공간) 본문
야고보서 2:5-7 가난한 자의 믿음
이근호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게 오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출애굽기 22:21에 보면,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가난한 자’의 의미는,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서 ‘아들’개념을 지상으로 드러내는 데 구성된 특이한 속성을 가진 자를 의미합니다.
즉 아버지의 보호 속에 있는 자, 전부를 말합니다. 그 원형은 출애굽할 때, 빈 손으로 나왔던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이 민족의 특성이 예수님이란 한 인물에게 집약되어 그 최종 모습이 발현됩니다.
만약에 하나님 아버지의 보호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이 ‘가난한 자’를 외부인이 건드리면 어떻게 될까요? 그 내용이 출애굽기 22:24-27에 나옵니다.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을지라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즉 빈 손으로 애굽에서 나왔던 집단적 가난한 자들의 속성이 이스라엘의 본질로 이어진다는 조건이 유지될 경우에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아버지의 보호 대상이 된다는 말입니다.
잠언 22:22-23에서도 같은 취지로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자를 약하다고 탈취하지 말며 곤고한 자를 성문에서 압제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송사를 변론하시며 그를 탈취하는 자의 생명을 빼앗으시리라”건들지 말아야 될 자를 건드렸다는 겁니다.
잠언 14:31에서는 이점을 보다 포괄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
이러한 취지는 신약에서 이렇게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8-29)
가난이라는 공간
2026년 5월 3일
본문 말씀: 야고보서 2:5-7
(2: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2:6)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2:7) 저희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
세상을 보는 인식의 문제가 단순히 대인관계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하늘 나라에게 안 받겠다는데 인간들이 ’제발 천국에서 날 받아달라‘고 고집 부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안 받아주는 자는 교회가 받아주면 그 교회는 완전히 마귀를 따르는 교회입니다. 신약 시대에 필히 이런 세계가 된다는 점을 성경은 미리 예언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두어 웅큼 보리와 두어 조각 떡을 위하여 나를 내 백성 가운데서 욕되게 하여 거짓말을 지어서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도다”(겔 13:19) 즉 세상이 온통 뒤집혀져 돌아갑니다. 천국에서 안 받아주는 자를 교회가 받고, 천국에서 받아주는 자를 교회가 내치게 됩니다.
그 원인은 세상들이 ‘이 땅에 없는 개념’을 찾지 않아서 그러합니다. 사람들은 기존 사람들의 견해와 의견들이 자기 안에 쌓아서 ‘자아의식’을 구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타인들 속에서 섞여서 ‘하늘나라’의 견해로 오셨습니다. 새로운 타인입니다. ‘가난’이라는 개념도 예외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가난’의 의미는 마귀로부터 흘러들어온 개념입니다. 이 개념의 특징은 인간으로 하여금 수치심을 유발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있어 가난이란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나올래야 나올 수 없는 환경이라고 여깁니다. 여기에 주님께서는 새로운 ‘가난’이라는 공간을 형성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다음과 같은 상태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여기서 천국에서 과연 받아줄 사람인지 아닌지가 직결적으로 연결되는 구절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이 뭐죠? 인간들로서는 아무도 알 자가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아시기에 예수님께서 천국에서 인정하시는 ‘가난’의 첫발을 시작하십니다. 로마서 1:16에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즉 심령한 가난한 자의 상태는 모든 수치심이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사라진 상태를 뜻합니다. 돈없음보다 수치가 인간에게 있어 더 근원적이고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인간에게 수치가 발생하는 이유는 인간이 아직도 자신이 ‘인간’인 줄 압니다. 실은 인간은 악마의 대역(가께무사)입니다.
그래서 ‘가난’에 대해서 인간들은 ‘저렴한 자’와 ‘저렴한 것’의 중간에 위치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즉 “내가 이렇게 가난하게 산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받아주기로 인정하신 것은 자신을 인간으로 여기는 자가 아닙니다. ‘인자(人子)’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룬 인간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제시한 모든 것을 다 이루었기에 하나님 보시기에 더는 수치가 없는 자를 말합니다. 이 작업이 시편 8편에 미리 예언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시 8:4-9)
이것은 창세기 1:28의 법칙을 이행하기 위한 일꾼의 자격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세상을 정복한다는 것은 악마가 지배하는 세상의 현 모습 자체를 발견하는 기쁨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만 ‘인자(人子)’가 되면 안되겠지요. 천국에서 받아주는 다수의 인자의 마음을 품은 자가 필요합니다. 이 일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시편의 말씀을 자신이 품고 그 성취의 길에 나서서 완성합니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히 2:9-11)
이 작업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습니다.(요 19:30) 따라서 이 십자가 속으로 들어오기까지 인간은 기존의 자신의 가치관이 지적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마 18:21)
즉 사람도 아닌 게 사람 구실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즉각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마 18:22-23) 주님께서는 ‘경제문제’로 규정되는 ‘가난’을 ‘죄문제’바꾸십니다.
자신을 잃어버리므로서 자신 죄와 죄에 대한 기억까지 잃어버려서 더는 수치심을 느낀 그 어떤 여지가 없는 자를 ‘심령이 가난한 자’로 규정하시겠답니다. 이것은 새로운 타인, 곧 예수님에 의해서 규정된 그 평가를 수납하는 자아로 인해 매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된 것을 말합니다.
늘 예수님의 희생이 입각해서 세상과 자신을 다시 볼 수 있는 자가 흩어진 12지파에 해당되는 오늘날의 성도입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요 13:3,7)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의 모든 것을 마귀의 세계로 볼 수 있는 안목으로 자유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2강-야고보서 2장 5-7절(가난이라는 공간) 260503-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야고보서 2장 5-7절입니다.
야고보서 2:5-7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찌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저희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
‘흩어진 열두 지파’ 그러니까 오늘날 성도에 대해서 ‘이게 성도냐, 아니냐?’를, 야고보서는 말씀을 가지고 계속 검증에 나섭니다. 쉽게 말해서 천국에서는 그 사람을 안 받겠다고 하는데 교회에서 그 사람을 받아주면 그것은 뭐예요? 하나님께 지금 대드는 거예요? 반역하는 겁니까? 그것은 사기죠. 천국 간다고 속여 놓고 받았는데 하늘나라 쪽에서는 그 사람을 보이콧, 거부해버릴 때 그동안 교회가 했던 짓은 뭐가 됩니까? 큰 문제죠.
그래서 야고보는 기본이, 전제가 이거에요. “하늘나라에서 안 받아주는 사람은 교회에서도 받지 말라. 교회에서 그런 사람 받지 말라. 교인이라고 하지 말라.” 이렇게 해요. 그런데 에스겔의 예언에 의하면 - 에스겔은 예수님 오시기 전의 예언이잖아요 - 그 에스겔에 의하면, 13장 19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가 두어웅큼 보리와 두어조각 떡을 위하여 나를 내 백성 가운데서 욕되게 하여 거짓말을 곧이 듣는 내 백성에게 너희가 거짓말을 지어서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도다.” 이렇게 예언되어 있어요. 이 예언의 말씀은 중간에 쉬쉬하고 날아가는 게 아니고, 신약 성경에 와서 그대로 교회라는 이름으로 현실로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천국에서 저 사람은 안 받는다고 이미 되어 있는데 왜 교회에서 받아주느냐?’ 그 문제와, ‘천국에서 받아주겠다는데 왜 교회가 안 받아?’ 이런 문제도 생각해 봐야 해요. 이 문제의 핵심은 뭐냐? 현재 교회에서 운용되고 있는 기준이 천국에서 운용되는 기준과 일치되는지 너희들이 생각해 봤느냐는 거예요. ‘교회에서 남들이 믿음이라고 하니까 천국 가겠지’라는 것은, 천국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 자신과 눈에 보이는 교회에 관심이 있을 때 이런 사달이 나는 거예요.
그러면 천국에서 받아준다는 사람은 어떤 기준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는가? 이 땅에 없는 개념을 찾아 나서는 사람, 이 땅의 인간들 머리에서 나올 수 없는 그런 개념들, 그러한 의미를 찾아 나서고 그걸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사람, 그 사람은 이미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반대로 뒤집어져 있다는 것을 너무나 명쾌하게 다 알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 뒤집어진 것, 바로 죽지 않아야 될 분을 죽이고, 살지 말아야 할 자를 살리는 그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에요.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세상을 다시 죽 훑어보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십자가 사건을 가지고 세상 기준이 완전히 반대로 뒤집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탄식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세상 사람들 다 거짓말이고 지옥 같아.” 이렇게 하는데 성도는 그것을 탄식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늘 즐기는 사람이에요, 그걸 즐기는 사람이라고요. ‘세상이 뒤집어졌다는 것을, 다 같은 인간인데 하나님이 왜 하필 저에게 그걸 알려주시는지?’ 날마다 그것 때문에 혼자 콧노래 부르면서 흥겹고 신나서 어쩔 줄을 몰라요.
세상이 뒤집어져서 반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 세상은 돈 가지고 협박하고, 권력 가지고 난체하고 으스대고 그렇잖아요. 심지어 교회도 마찬가지고요. 그런 것들이 다가왔을 때 성도는 콧방귀 낍니다. 자칫하면 코가 막 날아갈 수가 있어요. ‘내가 다 알고 있거든 그거! 그게 너희들 한계라는 것을 알고 있거든! 그래서 너희가 잘린 거야, 천국에서. 너희들이 하는 것은 같은 인간들끼리 다 알고 있는 이야기잖아. 시시하지도 않아? 진짜 식상해, 식상하다고!’
뻔해도 너무 뻔해요. 인간들의 뉴스에 나오고 유튜브에 나오는 이야기, 그 나물에 그 밥이에요. 지겹다, 지겨워 정말 그 이야기들. “이 세상에 없는 개념을 너희가 들어봤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개념, 뻔한 것 말고 이 세상에서 아무리 찾고자 해도 찾을 수 없는 지혜.” 그래서 성도의 즐거움은 뭐냐? 진리와 그리고 천국의 길과 영생에 대해서 즐거움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나는 길이요 나는 진리요 나는 생명이다”(요 14:6).
제가 어릴 때 기억나는 것 중 하나가 대구 달성 공원에 문지기가 있었어요. 키가 한 2미터 30센티 이상 되는 거인 문지기가 있었어요. 대구에서 유명한 사람이 딱 두 사람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달성 공원 지키는 문지기. 또 하나는 머리 볶고 다니는 금달래라는 미친 여자가 있었어요. 대구 서문시장에서는 다 알아요. 벌써 50년도 더 된 이야기인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까 달성 공원 문지기가 천국 개념과 일치되는 것이, 그가 문지기잖아요. 그 사람은 달성 공원 정문에 있지 않고 시내에서 돌아다녀도 ‘저 사람은 달성 공원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규정이 딱 붙어 있어요.
성도는 뭐냐 하면, 이 세상 모든 것이 반대로 되어가는 그 사상의 출구, 지옥에서 마귀가 나와서 그렇게 바뀌었다는 마귀의 출구를 키다리 아저씨처럼 지키면서 그걸 보고 흐뭇해하는 사람이에요. ‘너희 마귀 모르지? 나는 마귀 안다.’ 공원 문지기인 키다리 아저씨가 다닐 때마다 달성 공원이 따라다니는 것처럼, 성도가 가는 곳에는 반드시 ‘이것이 바로 악마가 이 세상에서 설쳐대는 지옥의 출입구입니다’라는 것, 그런 인식을 갖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이 계 모임이나 동창회 모임이나 심지어 교회 모임이나 어디에서도 기죽을 일이 없습니다. 세상이 모르는 이야기거든요. 청와대나 용산에 가서도 기 안 죽을걸요? 그 개념 중 하나가 하나님께서 야고보를 통해서 ‘네가 가난에 대해서 아느냐?’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가난에 대해서 여러 가지 길게 설명하기보다는, 성경에서 나오는 그 가난에 대해서 제가 한 번 읽어보고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왜냐하면 이건 천국과 직결된 문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5장 3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자, 여러분한테 물어봅시다. 답변할 필요는 없어요. 심령이 가난한 게 뭐냐는 거예요. “난 몰라.” 지금 모르면 천국을 못 간다니까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했을 때 심령이 가난한 게 뭐냐?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개념을 선포하신 게 아니고 인간이 사는, 모든 것이 반대로 되어 있는, 지옥 가면서 천국 간다고 착각하고 있는 그 회당과 종교 단체 속에 주께서 오셔서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하늘의 개념과 땅의 개념이 얼마나 차이 나는가를 언급합니다. 그중에 하나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어떤 개념의 배경에는, 개인이 갖고 있던 개념은 타인을 경유해서, 타인의 의견을 거쳐서 내 생각, 내가 된 거예요. 항상 ‘난 남은 몰라. 나는 나만 살아’라고 하면서도 남을 의식하지 않는 순간이 한순간도 없어요.
주님께서 이런 지옥 가는 인간들을 천국 보내는 방법은 뭐냐? 타인의 의견을 경유해서만 ‘나’라는 것이 되고, 그래서 내가 ‘나’라는 것을 규정할 수는 없어요. 남들이 뭐라고 하는 것, 그것이 내가 돼요. 그럴 때 새로운 타인을 이 땅에 보내신 겁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세상이 나(인자)를 뭐라고 하더냐?”(마 16:13)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마 16:14).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 제자들이 할 말이 없는 거예요. 주께서는 새로운 타인을 이야기합니다. “내가 이야기한다.” 베드로가 16절에서,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주께서 ‘옳다. 그것을 네가 안 것이 아니고 내 아버지께서 너에게 알게 했다. 이제부터는 남들이 뭐라고 하는 것들을 다 뚝 끊어라. 전부다 반대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천국 간다고 하면 지옥 가고, 지옥 간다고 하면 천국 가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받아주는 개념이 아니고, 악마가 지어낸 개념이 타인을 통해 나에게 평생토록 교육이라는, 양육이라는 방법으로 뒤집어씌워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우리 안에는 천국과 반대되는 가치관이 쓰레기같이 쌓여서 가득 적체되어 있어요. 이거 어쩔 거예요, 이 쓰레기를? 그거 어쩔 건데요?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범죄라든지 사건이 전부 그게 기초가 되어서 일어나요. 경기도에 의왕이라고 살기 좋은 아파트촌이 있어요. 몇 번 거기를 지나갔는데 그 의왕의 아파트에 사는 어떤 사람 집이 경매에 넘어갔어요.
낙찰이 되었으니까 집을 비워주어야 하는데 집을 비워주기로 정한 그 전날에 부부가 생활고로 자살했습니다. 가스통 폭발시켜서 자살했죠. 이것은 뭐냐 하면요, 인간의 개념은, 돈이 없어 가난이 아니고 내가 속해있는 이 사회에서 내가 저렴한 자가 됐다는 것, 저렴한 가치밖에 안 된다는 그 수치심이 돈 없음보다 평생토록 그 사람의 정신을 압박해 왔던 겁니다.
‘가난이 문제가 아니고 남들 앞에 수치스러운 인간은 내가 못 보여주겠다. 차라리 내가 그냥 가스통 터트려 죽는 게 낫다’ 하고 하나는 죽고 다른 하나는 뛰어내려서 죽고 그랬죠. 이게 남의 일이 아니에요. 자꾸 돈 벌겠다는 이유가 뭡니까? 저렴한 인간이 안 되겠다는 거예요. 누가 저렴하다고 하느냐? 남들이. ‘나는 남은 몰라. 나 혼자 산다’고 해놓고는 실제로 행동하는 것을 보면 남의 시선과 의식이 나를 지배하고 있고 통치하고 있습니다.
그런 식이 되면 교회 나와서 성경 알아도 그것은 하늘의 것이 아니고 ‘나’라는 본인 자체가 땅에서 규정 받은 개념이에요. 그래서는 천국이고 뭐고 간에 거기 신경을 안 쓰죠. ‘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남한테 더 이상 어떤 평가 받을 어떤 수치스러울 것이 아무것도 없는 자예요. 누구 앞에서도 안 수치스러워요. 돈이 없어도 수치스럽지 않아요.
왜냐하면 새로운 타자로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서 그 지독한 수치심을, 하늘나라 기준에서 봐서 그것을 없애버렸거든요. 로마서 1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사도 바울이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그 복음, 그 복음의 내용이 이렇습니다.
1장 16절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남들이 나에게 이야기하는 그 ‘저렴하다, 수치스럽다. 아, 난 너하고 안 놀련다’라는 그런 것에 대해서 더 이상 내가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이유가, 내 안이 교체되었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의 마음으로 교체된 거예요.
이 점을 위해서 주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저렴한 분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와도 사람들이 못 알아보죠.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언뜻 보면 우리보고 지시하고 명령하는 것 같죠.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바로 예수님 자신이 이 코스대로 밟아나갔다는 거예요. 왜? 심령이 가난한 자가 이 땅에 아무도 없으니까요. 왜 없느냐? 마귀에 물들어있는데, 수치에 벌벌 떨면서 살아가는데 그게 무슨 심령이 가난한 거예요?
전부 다 땅의 개념, 평생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들어온 것들 모든 것이 다 땅의 개념이잖아요. 직장 생활하면서, 주위 가족들과 대화하면서 전부 다 수치스러울까 벌벌 떨면서 나온 개념들 아닙니까? 그런 단어들이잖아요. 대화 자체가 그렇잖아요. 교회도 마찬가지고요. 사도 바울처럼 복음을 기뻐하면 안 됩니까?
그게 안 됩니다. 고린도전서 1장 27절에 보면,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주님께서는 기가 찬 거예요. 하늘나라 심판대 앞에서 ‘누가’ 부끄러워해야 하는지, ‘누가’ 진짜 자랑스러워해야 하는지, 이 세상에서는 그 하늘의 뜻과는 정반대로 뒤집어놓은 거예요, 반대로! 하늘의 개념을 모르니까 바들바들 한시도 안 떠는 경우가 없어요. 바들바들 떨면서 살아가요.
경매에 낙찰된 사람은 4억 5천 주고 은행에서 대출받아서 집 하나 샀다고 생각했는데, 불에 탄 집을 받게 되었어요. 인간들이 태어나면서 갖고 있는 이 가치들, 이거 뭐 어떻게 조치해야 하지 않습니까? 목숨 끊어지기 전에, 숨 끊어지기 전에 이 세상의 것과 바뀌어져야 하거든요.
그래서 야고보서를 보거나 로마서도 그렇고 고린도전서 1장을 보게 되면, 사람들이 자기의 가치관이나 세상관, 그 바탕과 구조 자체가 뜯겨나가야 하는데 그게 안 뜯겨나간 상태에서 성경 해석을 이렇게 합니다. ‘그래. 가난하게 살자. 가난하게 살면 하나님이 구원하실 것이다. 성경에 나왔잖아.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따라서 내 마음을 가난하게 하기 위해서는 평소에 내가 가난하게 살면 된다.’ 이런 되지도 않는 결론에 이릅니다.
교회도 많이 구제하고, 개인적으로도 아프리카 우물 파기에도 돈 꼬박꼬박 보내고. 아프리카 우물 파기에 돈 보내봐야 중간에서 다 가져가요. 우물은 몇 개 파지도 않아요. 그것은 그냥 폼이나 내는 것이고 중간에서 커미션 다 뜯어가는 거예요.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가진 것들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었다. 그러니까 이 행위에 대해 하나님이 얼마나 대견하게 생각하겠는가?’
마태복음 19장에서,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모든 걸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고 너는 날 따르라’라고 할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을 파는 거예요. 하지만 주님은 못 따라가게 되어 있어요. 그 이야기 뒤에 예수님이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언급해요.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4).
그렇게 하니까 제자들의 사고방식에서 금방 ‘내가 행한 것으로 구원받는다’라는 자기의 기본 전제가 숨겨지지 않고 톡 튀어나왔어요.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겠습니까?” ‘참 절망적입니다’라는 뜻이에요. ‘주님, 그것은 우리가 못합니다.’ 자기 인생관 가치관 자체를 뜯어서 바뀔 생각은 안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으로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할 때 주님께서는 “사람은 아예 못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시느니라”(마 19:36).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요, 사람을 한계에, 절망에 끝까지 밀어붙임으로써 ‘내가 구원받는 것은 내가 뭘 해서 받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 그 경계선을 넘어서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래서 이 ‘가난’이라는 말은, 저렴한 사람에서 어디로 바뀌느냐? ‘저렴한 사람’에서 ‘저렴한 것’으로 바뀌어요.
가난한 것은 사람 취급을 안 하니까, 물건 취급을 하니까요. ‘저렴한 자’에서 ‘저렴한 것’으로 바뀌는 그 경계선상에서 하나님이 특별한 그 가난한 사람을 위치해 주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가 구원 받는 일은 없습니다. 천국 가는 일은 없어요. ‘저렴한 자’에서 ‘저렴한 것’으로 바뀌어야 해요. 나는 인간이 아니고 돌멩이 같다는 것을 인식하는 그것을 체험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장 49-53절에 보면, 마리아가 예수님을 임신하고 출산했습니다. 이제 관심사는 남자 없이 여성이 성령의 힘으로, 기존의 인간군이 아닌 특별한 인간을 하나님께서 출생시킬 때 새롭게 출생된 아이, 그분이 앞으로 무슨 일을 하느냐에 주목해야 해요.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거라는 말이죠. 그분이 어떤 일을 하느냐 하면, 누가복음 1장에 마리아가 찬양하는 중에 나옵니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대목을 보면서 ‘아, 우리 예수님께서는 사회 혁명을 하러 오셨구나. 부자들을 지옥 보내고 부자에 치어서 가난하게 사는 사람을 천국 보내려고 이렇게 오셨구나.’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오해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 세상을 보는 관점의 한계를 말씀 앞에서 노출시킬 수밖에 없게 만들어요.
‘주님께서 부자를 물리치면 가난한 사람은 이제 부자의 그 재산으로 사람 사는 것처럼 살면 되겠네.’ 이렇게 생각하는 신학이 20세기 초반에 등장했어요. 남미에서 유행한 신학인데 그걸 해방 신학이라고 합니다. 그 해방 신학을 도입해서 신학생을 양성한 학교가 한신 대학교, 장신 대학교, 그리고 감리교 신학교, 해방 신학 가르치는 그 교수들이 성경을 이런 식으로 해석해서 가르쳐요. 특히 그 전부터 해방 신학을 직접 받아들인 것이 바로 로마 가톨릭, 가톨릭에서 받아들였어요.
그러면 합동측은 뭐냐?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측은 뭐 하는 거냐? 빌면 복 받는다는 거지요. 다 마찬가지죠. 가난 문제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해 봅시다. 인간은 땅에 속해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도 가난을 이해 못 해요. 가난이라는 개념은 하늘나라에서는 반대 개념입니다. 그런데 진짜 개념, 예수님께서 유일한 가난한 자로 오셨어요.
가난한 자로 오셔서,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난한 자들 있잖아요, 그 가난한 자들도 부자 편에 속한다는 것을 까발리시는 거예요. 집에 돈 한 푼 없어도 이미 심령은 부자예요. 천국 못갑니다. 마음가짐 자체가 그것은 하늘나라에서 요구하는 가난이 아니에요. ‘가난해도 하나님 말씀대로 열심히 살면 주께서 채워주실 거야.’ 그 심보가 하늘나라에서는 더러운 심보예요.
문제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어떤 사람이 되려고 하는 거예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나귀 타고 가실 때 무리가 찬송하니까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눅 19:39) 할 때 주님은 반대로 갑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눅 19:40).
‘누가 반대해도 돌들이 외칠 것이다.’ 여기서 ‘돌’은 물체에요. 사람이 아니에요. 주께서 인간을 ‘돌’로 만들고 그 ‘돌’에 하나님의 ‘언약’을 집어넣으면 그 돌이 ‘말씀을 외치는 돌’로 변하는 거예요. 이게 심령이 가난한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사람은 말씀으로 산다’(신 8:3, 마 4:4) 한 그 취지를 중도에 한 번도 취소한 적이 없습니다.
‘인간도 아닌 게 인간인 척하고 있네.’ 이걸 가지고 ‘카게무샤(그림자 무사)’라고 하는데 이게 대역이에요. 김정은 돌아다닐 때 자기인 것처럼 뚱뚱한 사람 뽑아서 대역이 돌아다니잖아요. 우리 인간은요, 한 번도 ‘나’였던 적이 없어요. 악마의 대역이든지 아니면 성령 받아서 예수님의 카게무샤, 예수님의 대역, 그냥 달성 공원의 키다리 아저씨.
굳이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악마가 집어넣은 수치심에 몸 둘 바를 모릅니다. 항상 자살 대기자들이에요. 걸핏하면 ‘죽을까, 죽어버릴까? 그냥 죽으면 되지.’ 그렇다면 ‘열두 제자는 예수님께 많이 들었기 때문에 천국에 대해서 뭘 알지 않겠느냐, 베드로는 수제자기 때문에 알지 않겠느냐?’
천만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베드로의 사고방식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사고방식은 나중에 사도 바울의 복음의 핵심과 통하는 거예요. 18장 21절에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이것, 이 사상입니다, 사람도 아닌 게 사람 구실을 하려고. 자,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는 ‘가난’ 이야기를 해봅시다. 방글라데시는 수출품의 약 70퍼센트 가까이 되는 가죽을 수출하는데, 동물 벗긴 가죽을 가공하기 위해서는 스무 가지 정도의 유해 약품이 들어가요. 그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의 한 달 월급이 식비 포함해서 20만 원이에요. 그 일 하는 사람들 몸 다 망가져요. 그래서 가죽 가공일에 종사하는 사람은 50을 넘긴 사람이 거의 없어요. 그런데 거기도 취직 못 해서 난리예요.
문제는 공장에서 크롬 같은 유해 물질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폐수를 처리도 안 하고 그냥 방류를 해버립니다. 그래서 강 주변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의 암 발생률이 높아요. 그런데 가죽 공장의 사장이나 직원들이 집에 가면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우리 부부 참 화목해요.” 우리도 평소에 그러잖아요. “우리 부부 참 화목해요.”
그런데 자기가 직장에서 하는 일과 그 뒤치다꺼리가 아무 연관도 연고도 없는 그런 사람들을 병들어 죽게 한다면 이건 살인자에 해당해요. 그래서 다음부터는 환경 운동을 할까요? 공장 짓지 말고? 주님의 뜻은 이겁니다. “네가 사는 것 자체가 죄다.” 네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죄에요. 유기농법 한다고요? 유기농법으로 농사지으면 죄 안 지어요?
농토는 저주를 뿜어내게 되어 있고, 그 저주를 인간이 땀 흘려서 노동으로 극복하려고 하니까 죄를 안 지을 수가 없어요.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죄 덩어리로, 죄의 덩치로 존재하는 거예요. 누구 앞에서 내가 의롭다고 정당화할 이유는, 알고리즘 해서 찾아보면 모조리 나 때문에 피해 본 사람만 계속해서 발굴되게 되어 있습니다.
나 참 착하게 살았다고요? 성실하게 살았다고요? 세상에 착하고 성실한 인간은 없습니다. 남한테 피해주지 않고 사는 사람 우리 가정에 우리 자신 포함해서 한 사람도 없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는 것은 간단합니다. “네가 지금 그 사고방식 가지고는 천국에 불합격이다. 네 사고방식은 안 받는다.”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고…, 그것은 마귀가 그런 짓 했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사상, 우리의 가치관을 한계에 이르게 합니다.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한계에 이르는 것, 그것이 십자가라고요. 십자가로 인하여 이 세상에 부자 편에 서는 사람, 그중에는 가난한 사람도 포함이 돼요, 월급 20만 원 받는 사람도 포함이 됩니다, 전부다 부자를 희망 사항으로 삼고 부자 되려고 애쓰는 그쪽을 부끄럽게 하려면, 십자가를 알게 된 사람은 도대체 뭘 돌파하고 뭘 통과한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십자가를 뚫고, 십자가 안에 사는 사람에 한해서 이 세상이 전부다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즐거워하는 사람이에요. 그걸 가볍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네가 십자가를 알아?” ‘네가 게 맛을 알아?’ 하는 것처럼 “네가 십자가를 알아?”
인간에게는 없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죠. 그러면 ‘심령이 가난하지 않은 자는 지옥이 저희 것’이에요. 마태복음 5장 3절 다시 써야 해요. “심령이 가난하지 않은 자는 지옥이 너희 것임이라.” 같은 뜻이잖아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지금 하시고자 하는 것이 뭐냐?
가난이라는 공간을 새롭게 창출하는 겁니다. 가난이라는 공간을 어떻게 만드느냐? 뭐 가난한 자가 이 세상에 없으니까, 가난한 자도 부자 되려고 환장했으니까요. 권력이 없는 자도 자기 자식은 공부시켜서 권력자 반열에 들어가게 하려고 애를 쓰는데, 그것 때문에 악착같이 교회 와서 기도하고 금식도 하고 이렇게 하는데, 그것은 컷이죠. 하늘나라에서는 “난 너 모른다.” 하고 컷시키는 거예요.
어떻게 가난의 공간을 새로 만드는가? 그 가난이라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바로 히브리서 5장 9-11절에 나와 있습니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주님께서 천하의 가난한 자로 이 땅에 왔습니다. 가난하게 오심으로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그 효시, 그 첫 번째 걸음을 뗐어요. 문제는 예수님만 가난한 자가 아니라 이제는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도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해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해요,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아까 제가 이야기했죠. 세상적인 가난은 심지어 한 달에 월급을 20만 원 받아도 그 사람은 남을 가해하는 가해자에요. 돈 번다는 것은 남을 가해해야 벌어요.
아, 여러분, 이것은 살아보면 알잖아요, 살아보면 안다고요. 남을 학대 안 하고 무슨 돈을 벌어요? 그래 놓고 뭐 가난한 자를 도와주라? 차라리 범죄자를 도와주라고 해요. 사고방식이 바뀌어야 해요, 사고방식이! 사고방식이 바뀌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가난한 분이 이 땅에 오시는데 예수님은 인간이 아닙니다.
뭐냐? ‘인자’가 돼요. 인간은 저렴한 인간인데 복된 인간이 되기 위해 투쟁하고 노력하지만 결국 인간은 죽으면 흙이 되고 돌멩이 같은 물체가 돼요. 저렴한 인간은 인간인 것처럼 대역을 하지만 결국엔 한 줌의 흙으로 전환돼요. 아담이니까, ‘흙이니까 흙으로 돌아가라.’ 주께서 그렇게 하시고 그다음 처리는 주님이 일방적으로 해버려요. 인간이 아니니까 “나 이것 행했습니다, 저것 행했습니다….” 그 입을 다물어야 해요. 돌멩이가 뭘 행해요?
돌멩이가 어떤 힘에 의해서 던짐을 당할 때는 가는 에너지의 흐름대로 날아갈 뿐이지 ‘나 지금 날고 있구나. 아, 신난다.’ 돌멩이가 이 생각을 왜 굳이 해야 해요? 할 필요 없어요. 힘에 이끌려서 우리는 살아갈 뿐이고, 인생이란 떠밀려서 사는 거예요. 물체니까요. 물리학자가 이걸 먼저 알았죠.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을 안 받아줍니다. ‘인자’를 받아줍니다, 인자. 예수님께서는 “너희들 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한 그 인자. 인자라고 하시는 분이 하시는 일은 시편 8편에 미리 하나님께서 계시했어요. 시편 8편 5-9절에 보면,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창조에 대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말미암아 세상 모든 만물을 다스리게 하겠다’라는 것은,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존재물을 말하는 거예요. 이게 창세기 1장 28절에 보면 나오는데, 선교 단체에서 다 이런 식으로 가르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세상을 다스리게 했다’는데 인간이 세상을 다스리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바뀐 자로 하여금 세상을 통치하는 왕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왕이 되려면 적어도 호랑이 한 마리는 잡아야 왕이 돼요. 강원도 영월에 그런 사람이 있었답니다. 단종(왕과 사는 남자, 2026)이 호랑이 잡았대요. 마귀를 잡아야, 마귀 정도는 잡아야 왕이잖아요, 마귀 정도는! 권력을 우습게 여기고 돈을 우습게 여길 수 있어야 정말 왕 중의 왕이라는 주님의 마음으로 교체됐다고 할 수 있고, 그 사람만이 하늘나라에서 받아주는 겁니다.
인자의 마음, 하늘나라에서 인자의 마음을 받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 있어야 하는가? 그 인자를 어떻게 했느냐?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인자가 이 땅에서 가장 낮은 자리로 가요, 낮은 자리로. 지금 가난이라는 공간은 없어요. 없는데 인자가 가장 저렴한 자리로 갑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기의 생활상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어요. 8장 19절에,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참, 말을 너무 쉽게 해요. 어떤 공간에서 공간으로 이동할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 ‘주님을 야무지게, 가열차게 열심히 따라가는 것 그것 저 잘합니다. 우리 선생님 가는 곳에 따라가겠습니다.’
아직도 자기 주제 파악을 못 해요. 주께서 가는 곳에 따라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도중에 전부 다 떨어져 나가요. 요한복음 6장에 나오듯이, 주께서 말씀하게 되면 주님 따라가기를 중도에 포기하고 다 떨어져 나갑니다. 마태복음 8장 20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인간’이 아니고 ‘인자’입니다.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아주 쉽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심령이 가난한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려면, 여러분 집에 비누 쪼가리 있죠, 감사했습니까? 수건을 건조기에서 말리지 말고 햇빛 좋은 날 옥상에 널어서 말리면 뽀송뽀송하죠. 뽀송뽀송한 그 햇빛 냄새, 그걸 맡으면서 뺨에 한번 대 본 적 있습니까? 그거 보면요, ‘주여, 더는 소원이 없습니다.’ 이렇게 돼야 해요. 그 뽀송뽀송함, 그 햇빛 냄새요. 집에 바짝 마른 수건 있지, 때 씻는 비누 있지 뭘 더 원합니까? 뭘 더 원해요?
주기도문에 의하면 가난한 자의 특징이 뭐냐? 하루만 먹고 하루만 사는 사람이에요. 하루만 먹고 하루만 사는 사람이라는 말은 뭐냐? 매일 같이 심판 날이에요. ‘오늘,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날마다, 날마다 심판받는 거예요. 뽀송뽀송한 수건을 뺨에 대고 감사하면서 심판받고, 오늘 하루 비누 가지고 얼굴 씻으면서 감사하다고 하면서 심판받고요. 여러분, 이게 어렵습니까? 이게 어려워요?
그동안 인간들이 생각하던, ‘돈 있는 자는 부자고, 먹을 것 없는 자는 가난하다’라는 그 개념의 틀에다가 주님께서 뭘 집어넣는가 하면, 죄를 집어넣어요. 그렇게 해서 사형수가, 사람 열댓 명 죽인 사형수가 교도소에 있는 비누 하나 보고도 하나님께 찬양한다면 그 사람이 10명을 죽였어도 그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에요. 교도소라도 수건 안 주겠어요? 뽀송뽀송한 수건 준 것만 해도 감사하다면, 그 사람은 그날 치가 주님 만나는 구원의 날이에요, 구원의 날입니다.
이 땅에서 사람 여러 명 죽이고…,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에요. 주께서는 그런 거 보지도 않습니다.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하면 됩니까?” 7번까지 용서하면 참 어지간히 주위에서 인간성 좋다는 소리 듣는데 마태복음 18장에서 주께서 하신 답변이 나옵니다. 22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찌니라.”
그러고 난 뒤에 나온 이야기가, 어떤 임금이 회계하는데 ‘만 달란트 빚진 자와 갚을 것이 없는 자의 대립’이 나와요. 얼마나 주님의 말씀은 주도면밀합니까? 다 스토리가 있어요. 악마가 심어준 그 쓰레기 같은 인간의 가치관 그걸 분명히 지적하고, 그 앞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 천국 가는 유일한 자, 천국을 만드신 분인 주님을 대비시키고 대조시키는 그러한 구조, 틀을 가지고 성경을 짠 거예요.
그래서 우리 인간은 뺍시다. 그냥 하나의 죽을 수밖에 없는 사물로 봅시다. 그동안 인간도 아닌 게 인간인 척하는 이것은 악마가 심어준 거예요. 악마가 심어준 그 가치관을 우리 힘으로 못 빼요. 뺄 수가 없어요. 기껏 아는 가치관이 그게 자기한테 전부인데 이거 빼버리면 자기는 그냥 멍하잖아요.
그래서 주께서는 자기를 잃게 만든 자만이 감사가 되도록 일을 진행합니다. 자기를 잃어버렸다는 말은, 자기를 잃어버렸으니까 자기가 지은 죄도 어떻게 돼요? 날아갔죠. 월급 20만 원 받고 폐수 방류하는 그 자기를 잃어버렸죠. 이것을 위해서 주님 혼자만이 아는 외침이지만, 그 외침이, 그 말씀이 오늘날 성도의 마음에까지 파고들도록 성령께서 역사하는 그 말씀이 있어요.
요한복음 19장 30절입니다. 제가 이야기할게요.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입니다. ‘뭘 다 이뤄? 뭔 혼자 말을 저렇게 해?’ “다 이루었다!” 너를 나와 함께 십자가에 넘겨 죽게 함으로써 네 기억 속에 있는 모든 죄, 네가 하는 모든 행동…, 죄라 하는 것은 딴 게 아니고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죄니까요, 그 모든 죄를 같이 잃어버림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주님의 가치관과 주님의 마음이 그 사람 속에 들어오게 돼 있어요.
실제로 그렇게 들어왔던 사람이 보여줬던 행동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그 행동이 나와요. 거기에 마리아가 나와요. 오빠 나사로가 있고 남매인 동생들이 있는데 그게 마르다와 마리아예요. ‘마리아’가 자기 언니 ‘마르다’ 하고 대조가 됐어요.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신다고 인간적으로 대접을 잘 해줬지요. 그런데 마리아는…, 그게 싸가지가 없는 거죠. 딱 예수님 턱 밑에 앉아서 ‘말씀만이 나를 살린다’ 생각해서 듣기만 하고 있었어요.
물론 들어도 소용없지만 하여튼 듣고 있었어요. 나중에 오빠 죽었을 때 둘 다 마찬가지였어요. 주님 멱살 쥐려고 달려들었으니까. 그랬던 마리아가 죽었던 오빠가 다시 살아나고 난 뒤에는 어떻게 바뀌었느냐?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 12:3).
그런데 그때 가룟 유다가 뭐라고 하느냐?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요 12:4-8).
여기 보면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라의 임금도 가난은 해결 못 해요. 어떤 정치 구조, 사회주의나 자본주의에서도 가난한 자는 발생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 주께서 일으키니까요. 주께서 가난한 자를 일으킴으로써 세상을 볼 때 “이 세상의 가난한 자를 구제할 것이냐, ‘내가 죽었다’라는 사실을 네 안에 품고 너의 수치가 하나도 없이 된 것으로 살 것이냐?”를 묻는 거예요. “어느 쪽이 천국에서 합격이고, 어느 쪽이 불합격이냐?”
남 걱정하지 마세요. 네 걱정이나 하세요, 네 걱정이나! 여러분 걱정이나 하세요. 로마서 8장에도 나오지만, 주님의 사랑이 전부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로마서 8장 35절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 얼마나 가난합니까? 사도 바울이 의도적으로 가난의 리스트를 짜서 거기다 집어넣었어요.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어떻게 일어나는 일이라도, 신상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할지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마귀야, 봤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마귀의 문지기, 달성 공원 문지기죠. “마귀야, 잘 봤어? 너는 이런 혜택 없지?” 성도로 하여금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부끄럽게하기 위해서, 사물인데 주께서 성도로 구성을 한 거예요.
가난한 자는 가난한 자로 구성하고, 부자는 부자대로 구성하신 하나님, 이 마지막 때에 가난하든 부자든, 월수입이 2억이 되든 관계없이 성도로 친히 우리를 ‘구상’하시고, ‘구성’을 해 주신 우리 주님께 부끄러움 없는 넉넉함으로, 뻔뻔함으로 찬미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그동안 무슨 사고방식으로 살고 있었는지 한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곧 닥칠 자기 미래도 생각 못 하고, 남들 보기에 ‘나 어때? 나 어떠냐고?’ 그걸 인생관이라고 장착해 놓고 살아가는 한심스러운 우리의 모습, 이제는 그 한심스러운 모습까지 넉넉하게 즐길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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