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6/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복음과 믿음

야고보서 2:1-4 / 외모(망가진 얼굴의 영광)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야고보서

야고보서 2:1-4 / 외모(망가진 얼굴의 영광)

정인순 2026. 4. 19. 13:22

 음성 동영상 Youtube

 

야고보서 2:1-4  외모

 

이근호

‘예를 들면’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마음 속에 담긴 원칙대로 이 세상을 펼쳐집니다. 따라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원리’의 드러내는 예에 해당됩니다.

‘외모’로서 사람을 평가하는 그런 경우들이 비일비재한다는 사실을 이미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이 반(反)-율법적 경우를 보여주기 위해 이 지구상에 인간들이 출현했다가 사라지고 그 위에 다시 다른 인간들이 등장합니다.

모두들 한결같이 타인을 평가하는데 외모를 통해서 시작한다는 점에서 예외가 없다는 점을 너와 나가 인정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를 들면’이 이 표현이 실제적인 것이 됩니다.

그 어느 누구도 오로지 성경에 준해서 평해야 함에 이의를 달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이외의 것으로 세상을 평하려고 하게 되면 항상 온전한 진실에 이르지 못하고 억지스러운 주장을 늘어놓는 바가 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일체 사람의 외모로 시작하지 않고 사람을 평가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굳이 성경에서 ‘인간은 필히 외모로 남을 평한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성경만이 진실이 되기 위해서 성경이 표현하는 세상사에 대해서 군소리하지 말아야 하고 그 지적을 우리는 순순히 받아들어야 합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이렇습니다. 왜 사람들은 남들을 외모로 평하고 싶어하느냐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외모에 대해서 객관적인 인식에 문제가 지닌 채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이유도, 근거도 없이 자신을 최종 판단자로 간주하고 세상을 대합니다. 하늘이 두 조각 난다 할지라도 자신은 두 조각나고 싶지 않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은 성경 말씀을 외면하고 갈수록 자기 철저함을 다지는 쪽으로 남은 생을 보내려 합니다. 단순히 고집이 아니라 ‘거역’ 혹은 ‘반항심’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반발력에 해서 생긴 결과 안에서 자신을 다시금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최종적인 타인, 그분은 바로 예수님 뿐입니다.


망가진 얼굴의 영광

2026년 4월 26일               

 

본문 말씀: 야고보서 2:1-4

(2: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2:2)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2: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2:4)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교회, 소위 모임의 허점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좀 부유해 보이는 자가 오면 환대하고 가난하게 보이는 자가 오면 천시당하는 일반 상식적 본성에 대해서 교회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점에 초점을 모으면 결국 교회 자체가 위선적 교회로 전락합니다. 진짜 문제는 야고보서 2:1에 나옵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여기에 나오는 ‘형제’라는 개념이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개념이나 ‘믿음’이라는 개념은 결코 인간들의 상식선에서 수용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완전히 다른 차원을 말해주십니다. 곧 ‘인간들의 하나님의 복수(復讐)의 대상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하나 뿐인 아들을 이 땅을 보내셨는데 그 아들을 죽인 이들은 사람들입니다. 곧 아담의 자손들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묵과하지 아니하시고 영원히 그 신랄하고 잔인한 보복을 시행하십니다. 그래서 생긴 공간이 지옥입니다. 단순히 교도소가 아닙니다. 몇 년 살다 나오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영원히 나올 수 없는 곳입니다. 영원한 분의 영원성을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을 근거로 두어야 비로소 ’죄‘의 개념이 완전히 정립됩니다. 자신의 아들의 죽음에 대한 분노는 인간의 선한 행위나 업적으로 지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는 이런 죄개념을 갖고 있기에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시 65:3) 그리고 “우리 열조의 죄악을 기억하여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시 79:8) 즉 자기가 누구인지 주제 파악이 되는 것과 관련지어서 죄사함을 알아야 합니다. 죄사함을 요청하는 것으로 자기 죄가 사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무시하고 신경 쓰지도 않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보는 눈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눈은 우리 내부의 마음을 밖으로 쏟아내는 창구가 됩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마 6:22-23)

즉 인간은 눈의 시선으로 외부를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은 그 사람 속의 마음의 본질이 작용하는 징후로서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신의 판단이 상당히 중립적이고 중성적인 입장에 있다고 자부합니다. 마냥 옳지도 않고 마냥 나쁘지도 않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바로 이런 외부는 천국에 거부당하는 외부입니다.

진짜 천국에서 받아주는 외모든 다음의 외부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사 52:14) 그리고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3,7)

예수님께서 십자가 돌아가시므로서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의 판단은 모두 거꾸로 되어 있으며 죽을 때까지 그동안 반대로 살아온 삶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만큼 악마와 동행하는 삶을 살아온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천국이 받아준 외모의 소지자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는 모세입니다.

출애굽기 34:29-34에 보면,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모세가 그들을 부르니 아론과 회중의 모든 어른이 모세에게로 오고 모세가 그들과 말하니 그 후에야 온 이스라엘 자손이 가까이 오는지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다 그들에게 명하고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더라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씀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인간으로는 도저히 생존할 수 없는 구역인 하나님께로 갔다가 다시 인간들이 사는 곳으로 내려온 사람입니다. 내려오면서 그는 빈손으로 온 것이 아니라 율법을 들고 왔습니다. 그 율법이 제시된 그 영역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들어 살 수 없는 세계라는 것은 모세의 얼굴에서 빛나는 영광의 차이에서 드러납니다.

즉 모세는 이미 죽은 자입니다. 하지만 그가 사는 것은 그와 함께 하는 말씀의 영광, 곧 죽은자로 살리시는 능력이 발하는 것은 영광 안에서 살아 있는 겁니다. 산 밑의 백성들은 자신들이 속한 상식으로 사는 세계에서는 이 영광을 감당할 수 없어 말씀을 접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얼굴에 수건을 씌었습니다.

즉 수건+영광으로 모세는 백성들이 사는 곳에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의 영광을 스스로 삭히는 독생자의 영광으로 오신 예수님의 몰골이요 형상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의 집회나 모임에서 인간들이 정책적으로 해내는 식으로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지상을 다녀가신 그 과정이 각자 내부에 작용할 때, 이것이 바로 진정한 천국에서 받아주는 외모요 얼굴입니다.

그 이유는 말씀이 들어와서 인간의 마음을 주님의 십자가 지신 마음을 바꾸시는 작업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17) 말씀은 땅에 오셨지만 땅에 그냥 떨어지지 않고 그 완성도를 챙겨서 하늘나라로 들어가셨습니다.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삼상 3:19) 이는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하나님의 무섭고 맹렬한 보복의 대상인 줄 모르고 안일하고 거꾸로 된 사회생활로 가득 찬 땅을 위한 삶에 기대걸지 않게 하려 하심입니다. 시작은 죽음이지만 끝은 감사에 닿아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세상 보는 시선에서 주님의 심정이 반영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1강-야고보서 2장 1-4절(망가진 얼굴의 영광) 260426-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야고보서 2장 1-4절입니다.

야고보서 2:1-4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 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이 본문을 보면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 대목입니다. 이게 매일 같이, 항상 불가능한 일이거든요. 이 세상 모든 것은 사람이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있는 겁니다. ‘있다’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경우에 ‘있다’는 말을 붙이거든요. 저기 사람이 있네, 여자가 있네, 남자가 있네, 아이가 있네, 어른이 있네…, 이게 다 눈에 보이는 겁니다.

그런데 본문 1절에 나오는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예수님이 보입니까? 안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야고보서 2장 1절이 성립이 되면, 그 뒷부분 2절, 3절, 4절은 하나도 어려운 게 없어요. 그런데 1절이 안 되면, 그러니까 ‘주님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못 믿겠다’라고 하는 사람들은 2절, 3절, 4절에 대해 흉내 내기에 들어가요.

교회 지어놓고 좌석이 죽 있는데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왔다. ‘헌금 좀 내겠구나.’ 해서 ‘좋은 인상 남겨야지.’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세요” 하고, 허름하고 가난한 자가 오니까 ‘저건 짐 되겠네. 오든지 말든지.’ 이렇게 할 수 있는 것, 이런 자질과 능력이 인간에게 이미 장착되어 있습니다.

2절, 3절, 4절에 나오는 이 예가, 도리어 2장 1절의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이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감추는 용도로 사용하는 거예요. 그래 놓고 반대로 어려운 사람이 오게 되면 좋은 자리 내주고, 부자가 오면…, 사실 부자를 냉대할 자는 없어요. 부자를 냉대하지는 않지만 ‘우리 교회는 말씀대로 움직이는 교회기 때문에 관심을 안 보이더라도 알아서 돈 좀 내세요.’ 이렇게 은근히 기대함으로써 교회 내부를 말씀으로 조작하는 그런 재주들이 인간에게는 있어요.

야고보서 2장 1절이 안 되니까요. 이게 안 믿어지니까 눈에 보이는 걸로 때우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야고보서 2장 1절에 나오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분이 어떤 분으로서 보이지 않는 것인가? 지금 야고보는 보이지 않는 분은 내세움으로써 모든 보이는 자들을 제껴버려요.

특히 이 ‘외모’라는 게 등장함으로써,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이 ‘외모’라는 말을 야고보가 등장시킴으로 말미암아 지금 ‘모든 인간의 외모를 제끼고 예수님의 외모를 여기에 세우자’ 이 말입니다, 예수님의 외모를.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저 사람을 보니까 이렇게 화려한 옷을 입었구나.’ 그건 외모 아니에요? 그것도 외모잖아요. ‘저 사람 옷차림 보니까 돈이 없어 보인다.’ 이것도 외모잖아요. 그러니까 외모와 외모를 우리가 판단하는 것, 그 판단하는 나의 외모, 나의 그 자질을 예수님의 외모와 바꾸자는 그 말입니다. 바꾸자!

이게 안 바뀌면요, 야고보서 2장 2-4절을 흉내 내기를 한다니까요. 교회가 흉내 내기를 해서 말씀대로 하는 참된 교회라고 그렇게 본인이 조작해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를 속입니까? 야고보서 2장 1절이 되느냐 안 되느냐에 따라서, 2장 2-4절은 인간이 해낼 수 있는 내용이 아닌 거예요.

다시 말씀드려서 야고보서 2장 1절은 그냥 모르겠고, 그냥 넘어가고 ‘2절부터 4절까지’ 이것은 교회가 얼마든지 마음먹으면 해내는 거예요. 쓰레기도 재활용하는데 사람 재활용을 못 할까요? 재활용할 거랑 종량제 봉투에 넣을 것과 구분 못 합니까? 할 수 있거든요. ‘저 사람 같으면 쓰레기 같은 인간, 저 사람 같으면 쓸모 있는 인간’ 이렇게 구분하고 판단하는 것, 쓰레기 구분하듯이 구분하는 거요.

성경에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니까 바꿔치기 해서 잘난 사람에게 일부러 냉대하고, 없이 보이는 사람에게 일부러 잘해 보이는 것, 쓰레기 치울 줄 아는 사람은 다 그렇게 할 수 있어요. 그게 바로 엉터리라는 뜻이에요, 그게! 2장 1절을 빼먹으니까요. 2장 1절의 내용은 이거에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여러분이 다 아는 이야기 할게요. 믿는지 안 믿는지 그건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다 아는 이야기 할게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실 때 하나님의 아들을 누가 죽였는가? 사람들이 죽였어요.

자기 아들을 학교 보냈는데 누가 죽였어요. 그러면 여러분 같으면 그 복수를 안 하겠습니까? 복수 하죠. 그다음부터는 복수심에 넘쳐서 살아가겠죠. ‘내 아들을 누가 죽였느냐?’ 이태원에서 내 아들을 누가 죽였고, 또 세월호에서 누가 죽였고, 무안 공항에 착륙하던 내 아들을 누가 죽였나, 그 원한이 있겠죠. 그래서 정권 바뀔 때마다 그거 가지고 따지겠죠.

하나님도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죽인 자에 대해서 잔혹하고 철저한, 신랄한 복수를 하겠다.’ 이게 하나님 뜻입니다. 뭐 입 닦고 그냥 넘어갈 줄 알았어요? 사람들이 자기 아들이 죽은 게 아니니까 그냥 뭐 하나님이 별 감정도 없이 넘어가는 줄 알고 있어요.

죄라는 게 뭐냐? 죄라는 것은, 예수님이 죽을 때 비로소 죄가 궁극적으로, 최종적으로 다 드러나는 거예요. “내 아들 누가 죽였어?” 하나님께서 이야기할 때 “저 안 죽였어요. 저한테 자꾸 묻지 마세요.” “그렇다면 내가 따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 누가 따먹었어?” 사람들은 말합니다. “제가 안 따먹었어요.” 이것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고, “선악과 따먹으면 죽는다는 것은, 성경이라는 조작된 책에서 이야기하는 거짓말이잖아.” 이것은 불신자가 하는 이야기고요.

“성경 자체가 거짓말이다. 그거 믿지 말자. 내가 교회 한 50년 다녔는데 백날 믿으려고 애썼거든? 애를 썼는데도 안 믿어져, 안 믿어진다고! 이제 와서 난 발을 빼겠어. 정말 안 믿어져.”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사람에게 사형당해서 죽었잖아?” 그렇게 물으면 “그건 알죠.” “그런데 그분이 사흘 만에 부활 됐다는 건 알아요?” 교회 다녔으니까 들어봐서 그것도 알아요.

그러면 예수님의 아버지 입장이 한번 되어 봅시다. 자기 아들을 누가 죽였는데 그걸 쉬쉬하고 넘어가겠습니까, 지옥 불에 처넣어서 끝까지 그 책임을 묻겠습니까? 본인이 예수님의 아버지라는 심정으로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나 같으면 끝까지 갈굴 겁니다. 영원토록 갈굴 겁니다. 하나님을 죽였으니까.

그 하나님의 복수 앞에서 당신은 어떻게 처신하려고요? 처신 못하죠. 당하면 당할 수밖에 없죠. 당하면 당할 수밖에 없는데 시편 79편 8절에 보면 이상한 이야기가 있어요. “우리 열조의 죄악을 기억하여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시편 65편 3절에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여기서 어떻게 죄 문제가 해결되는지부터 먼저 생각하지 말고, 도대체 죄라는 게, 인간이 생각하는, ‘내가 생각하는 죄’와 ‘하나님이 예수님 보내서 그 책임을 영원토록 지옥에까지 넣어서 묻는 그 죄’와 차이가 어떻게 나는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인간은 수습하기 바빠요. 나는 선악과를 몰랐습니다, 십자가 현장에는 나는 있지도 않았습니다, 저 같으면 주님 살렸습니다…, 자꾸 자기 자신을 주섬주섬 어떻게 방어하려는 태도를 갖고 있는데 반해서, 여기 시편에 나오는 신앙인의 죄는 방어가 안 되는 죄에요. 우리가 대책을 세울 수 없는 죄.

왜? 이미 메시아는 죽게 되니까요. 메시아가 죽음으로서 어떤 인간도 메시아의 죽음과 무관한 인간은 없는 상황에서 시편 65편 3절처럼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하나님 아들을 죽인 데 있어서 내가 발을 빼려야 뺄 수 없는 그런 속성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으니, 그것이 바로 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주여, 이 죄는 주님 쪽에서만 해결이 됩니다.’ 주님 쪽에서만 해결이 되는 거예요.

아까 들었던 이야기에 의하면, 전에는 도가니탕을 그렇게 좋아하다가 지금은 청국장을 그렇게 좋아하시는 분이 있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복수하려고 달려드는데 지금 청국장이 문제입니까, 북어국이 문제겠습니까, 도가니탕이 문제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게 뭐냐 하면, 지옥을 왜 만들었냐는 거거든요, 지옥을.

지옥은 그냥 감옥소가 아닙니다. 감옥은 한 10년이나 20년 살다가 나오라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지옥은 감옥소가 아니고 바닥이 없어요. 영원한 저주예요. 영원한 저주, 거기에 누굴 집어넣느냐? 사람들을 집어넣고자 하는 겁니다. 왜?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살해했으니까요. 그 책임을 영원토록 묻는 거예요.

성경책이 있고, 성경이 기록된 이유가 이런 뜻입니다. “이래도 야고보서 펼칠래? 이래도 히브리서 볼래? 창세기 볼래? 뭣도 모르고 지금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지, 그렇지?” 청국장 먹고 싶으면 먹고, 도가니탕 먹고 싶으면 먹고, 먹고 싶은 것 골라서 먹는 이런 입장에서 하나님을 대할 수는 없어요.

인간은 중성적이고 중립적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천국 갈까, 지옥 갈까? 난 천국 가야지.’ 지금 이럴 잽이, 이런 형편이 못 된다니까요! 하나님의 그 취지가 쉬지 않으니까요. 하나님 쪽에서의 활동이 멈추지 않고 있으니, 우리 쪽에서 어떤 식으로 남들 보기에 또는 하나님 보기에 자기가 마음가짐을 어떻게 먹는다고 해서 그게 내 운명에 어떤 영향력도 주지를 않습니다.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죠.

제가 장례식에 여러 번 참석했고, 돌아가신 분 운구할 때 여러 번 했어요. 운구하는 내가 오히려 운구 당하는 순간이 왔을 때 우리는 모든 것을 반대로 살아왔다는 사실이 밝혀질 거예요. “이건 내 거야”라고 하는 말을 그만둘 때가 올 겁니다. 이건 내 식구야, 내 가족이야, 내 아들이야, 내 집이야, 내 아파트야, 내 교회야, 내 재산이야…, 라는 말, 그게 전부 다 새까만 거짓말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그때가 내가 운구 당하는 그 순간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거짓이 아닌 순간이 없었고 다 거짓되고, 그 거짓말에 맞춰서 사는 것이 인간이 인간답게 열심히 사는 것인 양 여기면서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살아가고 있어요. 주님께서 성경 말씀을 통해서 제대로 하나님의 뜻을 남김없이 - 얼마나 친절하십니까 - ‘모르겠다’가 아니라 남김없이 주의 뜻을 그 뜻대로 다 우리에게 공개했어요, 다 털어놨습니다. 어느 하나도 숨기지 않았습니다.

‘너희들은 마귀와 함께 동행하며 살고 있고, 성도만큼은 내가 그 성도와 함께 동행해서 살아간다.’ 따라서 그 동행의 결과가 뭐냐? 인간의 외모로 나타난다는 거예요. 주님께서 분명히 그렇게 이야기했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자기가 어떤 중립 지역에 있는 것처럼 ‘나는요, 내가 알아서 살아요.’ 이런 마음을 가지고 성경을 백 독을 하고 천 독해도 그게 전부 다 거짓말이라니까요! 성경이 거짓말이 아니고, 성경을 보는 내가 거짓된 거예요.

우리의 외모는 그냥 눈에 보이는 것만 관찰하고 그것을 파악하는 외모로 작동하고 있어요. 그런데 야고보서 2장 1절에,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이것은 전부 눈에 안 보이잖아요. 이게 어떻게 현실 속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현실은 2-4절까지 그게 현실이잖아요.

2-4절은 내 마음먹기에 따라서 내가 하면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나 2장 1절은 인간의 힘으로 될 수가 없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분을 어떻게 믿습니까? 보이는 걸 믿는 게 익숙해졌는데 보이지 않는 분을 어떻게 믿어요? 야고보서 2장 2-4절의 이야기는 쉽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그게 현실의 전부’ 이 뜻이에요.

눈 뜨고 해 질 때까지 누구와 상대하느냐? 사람하고 상대해요. 그것은 아주 잘하니까요. 야고보서에서 2장 2절에 “만일 너희 회당에” 여기에 ‘회당’이 나와요. ‘회당’이라는 것은 옛날 유대인들이 율법을 가르치고 여호와께 예배드리는 장소였어요. 야고보가 1장 1절에서 ‘흩어진 열두 지파에게 문안한다’라고 할 때 야고보가 항상 단어를 사용하고 용어를 사용하는 그 사용법이, 옛날 이스라엘이 또는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율법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기도하고 찬양했던 그 관행을 그대로 가져와요.

회당이 있다, 그 건물이 있다고 봅시다. 회당이 있다면 거기서 성립되는 게 뭐냐 하면, 모임이 성립돼요, 모임. 회당이 있다, 모임이 있다. 오늘날 이 시대에는 그것을 회당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기독교에선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교회’라고 이야기해요. 야고보서 2장 2-4절을 교회에 집어넣으면 이렇게 돼요.

예배당 지어놓고,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측)’ 간판으로 이것 하나 붙여서 프랜차이즈 만들어 놓고, 그다음부터 어떤 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신앙생활 하겠다는 거냐? 그 예배당에 사람을 모아요. 사람 모아놓고 그냥 가만히 있습니까? 순서에 따라서 개회, 송영, 신앙 고백, 교독문, 찬송, 기도, 광고, 설교…, 이런 순서로 해서 뭔가 이벤트가 있어야 하잖아요.

이벤트를 하는 동안 여러분들은 휴대폰도 못 보고 그냥 꼼짝없이 앉아 있죠. 대부분 졸기도 하고요, 어쨌든 앉아 있는 거예요. ‘빨리 끝나기나 해라. 오늘 결혼식 있다.’ 이런 식으로. 어쨌든 간에 모임이잖아요. 그런데 ‘교회 안 나오던 사람인데 비싼 옷을 입고 왔다.’ 교회 재정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이번 달은 재정이 좀 낫겠네.’ 해서 “아이고, 어서 오세요(몇 평짜리 집에 사시는지?)! 여기 앞자리에 앉으세요” 하는데, 그 뒤에 좀 허름한 사람이 오니까 ‘오든지 말든지, 점심이나 먹고 가세요.’ 이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그래 놓고 ‘야, 우리 교인들이 너무나 믿음이 좋아서 방금 야고보서 2-4절의 말씀, 이걸 실행에 옮겨서 성취했으니 말씀만 믿는 게 아니고 행위로 주께 영광을 돌리는 참된 교회 참된 모임이다’라고 자부하겠죠. 그거 거짓된 겁니다, 거짓된 거예요. 어디에서 사달이 났는가?

외모, 그 사람은 그런 아이디어를 가지고 그런 식으로 교회를 운영하는 그 외모가 어디서 나왔는가를 본인이 감추고 있습니다. 인간의 외모는 인간의 내면에서 스스로 우러나오는 겁니다. 그걸 ‘징후’ 또는 ‘증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따라서 증상과 징후는요, 인간이 조작이 안 돼요. 자기 내부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되는 이 마음가짐은 얼굴에 증상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6장 21-23절에 보면,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눈은 어디에 달려있는가? 눈은 발에 달린 게 아니죠. 눈은 등짝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눈이 달렸다는 것은 얼굴을 이야기하고, 그 얼굴은 그 사람의 내부를 비춰주는 표정을 통해서 자기 마음 상태가 어두우냐, 밝으냐의 증상이 거기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내과 의사가 진찰을 처음에 어떻게 합니까? “혈압부터 잴게요.” 그다음에 “열이 있나 봅시다.” 하지요.

열이 눈에 보입니까? 안 보이지요. 혈압이 보입니까? 안 보이죠. 인간의 보이지 않는 부분이 얼굴에 표정으로 나온다, 이 말이죠. 그게 뭐냐? 마음은 얼굴의 표정으로 나오는 거예요. “수심이 가득하다.” 사람들이 그런 표현을 해요. 얼굴에 뭐가 묻었다는 뜻이 아니잖아요. 세수하면 그만이니까요. 마음이 어둡다는 뜻이잖아요.

야고보서 2장 1절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왔을 때, 사람들이 눈이 있어요. 사람마다 보는 눈이 있다고요. 보는 눈이 있는데 인간들은 자기가 눈으로 보는 것으로 판단하면서 자기 마음에 아무 이상이 없고 문제성이 없다고 여겼던 겁니다. 그런데 이사야 52장 14절을 보게 되면,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그리고 이사야 53장 2절에 보면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우리의 보기에’, 우리의 보기에, 눈이 있으니까, 눈이 달렸으니까 본다는 말이죠.

3절에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이것이 하나님의 외모에요, 이게! 이 땅에 온 하나님의 외모에요. 누가 알아봤습니까? 그분이 죽어서는 안 되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라고 누가 믿었습니까?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야고보서 2장 1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정말 이것은 놀라운 일이에요. 인간의 힘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거예요, 있을 수 없는 일이! 2장 1절이 안 되는데 2-4절이 돼요? 그것은 위선입니다. 교회라는 게 위선이에요.

오늘날 교회가 이 본문 가지고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 잘 대해준다고 좋은 자리 주고, 잘 사는 사람에게는 ‘알아서 하세요’ 이런 식으로 스스로 마음에 내키지도 않는 그런 태도를 보이는데, 이것을 현대적으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주님의 외모는 인간의 눈으로는 알 수가 없고, 우리 속에 과정으로서만 나타난다. 모임보다도 과정이 더 크다.” 과정, 과정입니다.

더 간추려 이야기하면 천국에 들어갈 만한 외모 따로 있고요, 지옥에 들어갈 외모 따로 있습니다. ‘나 믿음 좋지?’ 그게 외모가 아니라 나 사는 꼬라지 그 과정이, 예수님께서 지옥 갈 나를 천국 갈 나로 바꾸는 그 잔혹한 과정이 얼굴에 나타나면 그 사람은 천국 갈 외모에요. 주님이 이 땅을 다녀간 과정이 나오니까요.

그런데 지옥 갈 외모는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산다.’ 이거에요. 그게 외모에요.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한다.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선택하고 결정한다. 왜? 나는 혼자 있으니까.’ 혼자 있는 게 아니죠. ‘누가 감히 날 심판해? 예수님이 죽은 것과 난 무관해. 난 태어나지 않았을 때니까. 하나님이 복수하든 말든 난 모르겠고 난 내 인생만 근사하게 남한테 인정받으면 그걸로 족하다. 나의 모든 것이 내 것이다. 난 죽는다고 할지라도 살 때까지 살 거야. 운구 당하기 싫어. 지금의 나가 나야. 죽을 때의 그 나가 내가 아니고 지금 살아있는 내가 나야.’

이게 바로 아들 죽었다는 그 기준이 빠져있는, 지옥에서 영원히 처벌받는다는 그 내용이 빠져있는 지옥 가는 외모입니다. 천국과 지옥 이야기가 빠져있는 모든 대화는요, 무의미해요. ‘예수님이 죽어서 우리는 그 처벌을 받아야 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수하겠대.’ 그런 취지가 빠져있는 대화는 백날 들어도 아무 의미가 없는 대화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땅을 친히 방문했거든요. 사무엘상 3장 19절에 보면, 어린 사무엘이 나오는 대목인데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하나님의 말씀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말씀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땅이 그만큼 위험하다는 거예요. ‘나는 땅에 사니까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쳐 줘.’ 이것은 굉장히 위험한 생각이라는 거예요.

‘말씀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라는 말은, ‘주님이 땅에 왔지만, 땅에서 떠난다’는 이 말이거든요. “그렇다면 너희는 땅에서 살래, 하늘에 살래?” 그걸 묻고 있는 거예요. 말씀이 이 땅에 와서 땅으로 추락하는 게 아니고, 땅을 거쳐서 땅 처리하고 복수를 마감하기 위해 하늘로 가시는 그 말씀의 과정에서 주께서 말씀하시는 거예요. “말씀은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묻는다. 넌 땅이 좋아, 하늘이 좋아? 어느 것이 더 좋아? 말씀도 없는데, 떨어지는 말씀도 없는 그 땅이 더 좋아?” 그걸 우리에게 묻는 겁니다.

비슷한 말씀으로 이사야 55장 11절,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그 성경 말씀을 이렇게 문자로 구약에는 했는데 신약에 오면 예수님께서 직접 하나님이 되셔서 모든 율법을 만드신 출제자 당사자가 이 이야기를 유대인들에게 그 당시 사람들에게 외쳤고, 그 기록이 신약 성경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문제를 문제 삼는 거예요. 주께서 우리에게 시비를 거시고 문제 삼는 것은 딱 하나에요. ‘타인으로부터 판단 받을 내 마음을 아직도 네가 갖고 있느냐’를 묻습니다. “이제는 네 마음을 네 속에 갖지 마. 그 마음 바꿔줄게.” 무슨 마음으로? “내 마음으로 바꿔줄게.” 이게 하나님께서 아들을 죽인 것에 복수할 때, ‘주여, 죄악이 나를 이겼사오니 용서해달라’고 시편에서 이야기할 때 그 해결책이 뭐냐?

‘마음 바꾸기’에요. 마음만 바꾸면 외부도 바뀌어요. 이제는 내 마음이 있던 자리에 누구 마음이 들어온다? 주님의 마음이 들어오면 되는 거예요. 외부에서 들어온 그 마음이 나의 내부를 거쳐서 나가면서, 내 죄악 된 마음과 결합한 주님의 마음이 여기서 우리의 용모로 바뀌어 우리가 이 땅을 떠날 때까지 우리의 용모로서 표현이 되는 거예요.

두 개의 천이 있을 때 어떻게 합니까? 실로 꿰매서 두 개의 단을 한 단으로 꿰매잖아요. 그럼 두 단이 헤어지지 않고 둘이 단단히 하나가 된 것처럼 그런 식으로 해야 우리의 용모가, 다시 말해서 우리 내부의 것이 용모라는 증상으로 나오는 거예요. 그 얼굴에 뭐가 박혀있는가? 눈이 박혀 있잖아요.

그다음부터는 우리의 눈으로 보는 시선에서 바로 예수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예수님 관점으로 다시 볼 수 있는 그런 결과물이 생긴다, 이 말입니다. 어떤 모임에서 뭐 부자라고 해서 의식적으로 천대하고 가난한 자를 의식적으로 우대하는…, 참, 이게 쇼죠, 쇼! 쇼를 벌이는 그것까지 파악할 수 있는 눈이 열리는 거예요.

어떤 교회가 그렇게 한다. “그래서? 그래서 뭘 얻고자 하는데요?” “그래야 우리 교회가 아름다운 교회가 된다.” 교회? 모임? 그거 다 날아가는 거예요. 모여서 뭐 할 건데요? 위선자들이 모여서 뭐 할 건데요? 모였다고 주께서 구원하는 그런 기준은 주께서 세운 적이 없습니다. 개인마다 주께서 하나의 과정을 거쳐요. 그 과정을 거치는데 여기서 제가 소개할 수 있는 인물이 있습니다.

누구냐? 모세입니다. 모세의 외모가 얼마나 특별했는지를 제가 출애굽기 34장 29-35절까지를 길지만 읽어드리겠습니다.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자기 얼굴이 그렇게 빛나는지를 몰랐어요.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하기를 두려워하더니….” 겁나 무섭죠, 겁나. ‘야, 저게 사람에게서 날 수 있는 광채냐? 왜 사람한테서 빛이 나지?’ 모세의 얼굴에서 빛이 나는 이유는, 모세가 인간이 살 수 없는 지역에 갔다가 다시 인간이 사는 쪽으로 왔기 때문에 그래요. 막 구워낸 찐빵처럼, 방금 살 수 없는 곳에, 죽음의 곳에 갔다가 사람이 사는 지역으로 내려왔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모세가 놀란 것은, 내가 죽어야 되는데 살아서 돌아왔잖아요. 그러면 모세 안에는 뭐냐, 나는 죽고 주님께서 살아계신 증상과 징후를 자기의 얼굴, 외모의 빛으로 나타내고 있는 그 움직임을 보이는 거예요. 나는 죽었고 내 마음은 이제 없어요. 내 마음은 죽었는데 예수님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을 담고 옛날에 살던 고향으로 내려오니까 사람들이 깜짝 놀라더란 말이죠.

“네 얼굴이 그 얼굴이 아니네?” 이럴 때마다 생각나는 광고가 있어요. “공기가 다르네…!” 하는 거예요. 분위기가 달라요. 아무도 모르는 모양이네요. “공기가 다르네, 공기가!” 모세 입장에서는 공기가 다른 거예요. ‘도대체 이 동네가 썩은 동네네’ 이러한 안목을 가지고 살아가는 거예요, 모세가. ‘이게 내가 살 만한 동네가 아니네.’ 이게 얼마나 특이합니까, 여러분!

세상에 나와서 만날 사람과 사람끼리 만나니까 그 인간이 맨 그 인간으로만 보이죠. 성경에 보면 모세라는 이 기준, 엘리야라는 기준…, 엘리야 그 사람은 불 수레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다니엘 세 친구는 불 속에서 살아났어요. 다니엘은 사자 굴속에 들어갔습니다. “공기가 다르네!” 분위기가 달라요.

그래서 모세가 말을 못 합니다. 말을 못 하니까 모세가 아이디어를 낸 것이 34-35절에 나옵니다.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씀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며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는 고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씀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더라.”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으면 말을 못 하니까 수건을 약간 들추고 말한 뒤에 다시 후딱 수건으로 가리고. 자기가 시내산에서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이 그대로 들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백성들에게 나올 때는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 말하고 난 뒤에는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저게 사람이냐, 하늘나라 하나님이냐?’ 그 중간 지점에 새로운 형의 인간을 그들의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민수기 12장에, 모세 누나 미리암이, 모세가 장가가는 것을 두고 잔소리를 했어요. 그랬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서 문둥병에 걸렸어요(10절). 문둥병에 걸렸다는 것은 외모상 저주받은 모습이잖아요. 그런데 모세의 누나가 저주받게 된 이유가, 모세가 그냥 보통 사람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모세 얼굴의 광채가 나중에 사라지니까 보통 사람처럼 됐는데, ‘모세가 그냥 보통 사람이다’라고 생각하고 모세에게서 나오는 말을 두고 ‘이것은 인간에게 나온 말’이라고 가볍게 여기다가 자기가 평소에 갖고 있던 인간의 외모가 문둥병 외모로 바뀌면서 기존에 있던 인간의 광채마저 날아가고 저주받은 얼굴 되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모세 같이 온유한 사람은 이 땅에 없다. 왜 모세는 직접 하나님과 대면했던 사람이다.’(민 12:2-3) 하고 모세의 특수성을 계속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걸 볼 때 예수님께서 하늘의 영광이 아니라 아까 이사야 53장 얘기한 것처럼, 심지어 이사야 53장 7절에 보면요, 예수님은 보통 인간 정도가 아니고 아주 도살할 양같이 되었다고 했어요.

아무 매가리 없고 너무나 약하고 약한 모습으로 왔을 때 사람들이 쉽게 ‘우리가 저 사람을 죽이자’라고 할 만큼 가볍게 예수님을 평했다는 말이죠. 그게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득 품은 그 모습이었어요. 평소의 보통 사람보다 더 못한 그런 형상을 갖고 이 땅에 왔다 이 말이지요.

그러한 우리들의 내면의 모습이 결국 예수님이 하늘의 독생자의 영광, 그걸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해요, 피폐한 영광, 쭈그러진 영광, 아무것도 아닌 영광, 그 영광으로 왔을 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자기 아들이 하늘의 영광을 포기했을 경우, 다시 말해서 죄짓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너희들, 너희들, 너희들, 너희들의 죄를 짊어졌을 때 ‘주님께서 너희를 어떻게 처분하고 어떤 식으로 너희들을 심판할 것인가’를 예수님이 미리 자신의 외모로, 형체로 우리에게 보여줬습니다.

십자가 달릴 때 그때 함께 있던 백부장은 이렇게 했습니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막 15:39). ‘저분은 진정한 하나님이시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어떻게 압니까? 가난한 자와 부자 자리 바꿔주는 것, 이거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예요.

성경 말씀을 주는 것은, 우리가 평소에 반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우치기 위해서 말씀이 우리 내부에까지 들어오는 겁니다. 지적하기 위해서 심판이라는 자극을 주면, 그 자극에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우리가 거꾸로 살고 있구나. 내가 뭣도 모르고 뭐나 된 줄 알고 살고 있구나.’

내가 복수의 대상이라는 것은 모르고, 이것은 내 거고, 저것도 내 거고, 이것은 내 자식이고, 내 가정이고… 이런 식으로, 운구 당할 줄도 모르고 아직도 내 것이라고 여기고 살아가는 그 모습, 내 것이라고 그렇게 살아서 뭐 어떻게 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나한테 들어온 이익은 뭔데요?

나 잘났다, 그것밖에 더 돼요? 그게 신앙입니까? 잘못된 시선을 자기 눈으로 지금 뿜어내면서, 잘못된 안목을 발휘하면서, 자기가 심판받는 것도 모르고 그렇게 살아가잖아요.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야 해요. 내가 지키려는 내 목숨보다 더 큰 대가가 지옥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 마음을 내가 지킨다.’ 이것은 무식해도 보통 무식한 게 아니에요.

인간의 마음은 이미 마귀와 동행해서 나오는 마음이라서 ‘누구든지 내 것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는다’라는 이 복수심, 반발심으로 무장돼 있습니다. 교회 나와도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모임에 참석해도 달라질 것은 없어요. 중요한 것은, 주님이 거쳐 간 그 과정이 우리 속까지 말씀으로 파고 들어와서 실 꿰듯 해서 우리의 이 마귀적 마음이 질질 바깥으로 끄집어냄을 당해야 됩니다.

그게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이게 과정이거든요. ‘우리의 겉 사람은 후패한다.’ 이것은, 주께서 손대고 있다는 뜻이에요. 말씀이 말씀대로 우리의 껍데기를 가지고 주께서 바꿔치기 된 그러한 마음으로의 징후와 증상을 보이기 위해서 다루고 있다는 뜻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에 보면 방금 이야기한 출애굽기 34장에 나오는 그 말씀을 신약적 입장에서 이렇게 사도 바울이 해석해 놓았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 7절부터 보면,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우리에게 복수하는, ‘우리를 죽이는 그 말씀의 영광도 이렇게 너무나 대단하거늘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더 영광이 있지 않겠느냐?’ 곧 ‘정죄의 직분, 우리의 내부에 사탄이 함께 있고, 지금 반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능력도, 영광스러운 말씀이 작용한다면 거기서 죽은 우리를 끄집어내는 영광의 말씀은 죽게 하는 영광보다 훨씬 더 월등하게 대단하다’는 거예요.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고후 3:9-11).

지적하기 위해서, 즉 우리를 죽여야 더는 내 행동으로 내 죄를 씻는다는 그러한 마귀적 사고 방식이 없어질 게 아니겠습니까? 마음을 죽이는 그 일로 영광이 스톱되는 게 아니고, 그다음부터 죽었던 내 마음을 예수님의 마음과 결합시켜서 천국으로 데려가는 그 능력의 영광이 얼마나 크겠느냐 이 말이죠.

이걸 제대로 여러분이 받으면요, 이래야 해요. “야호~!” 해야 해요. 환호, 환호를 보내야 합니다. 왜? 내가 그걸 못 했으니까요. 여기서 잠깐 여러분에게 질문하겠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외모가 말씀이 들어온 외모인지, 튕겨 나간 외모인지 구분이 안 돼서 내가 질문을 하겠어요.

요한복음 2장에 보면, 물이 포도주 되었습니다. 물이 어떻게 포도주 됩니까? 주님께서 그냥 포도주 주면 되는데 왜 물을 길어다가 현장에 가서 포도주 되게 했습니까? 그것은, 물 같은 우리 안에서 포도주라고 하는 것은 예상치도 못한 거예요. 예상치도 못한 포도주가 물 안에 잠복 돼 있다가 성도에게만 이것이 얼굴로 펼쳐지는 거예요. 성도에게만 말씀이 펼쳐지는 겁니다.

그 당시에 거기 있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어떤 일을 했느냐’ 하는 것은 모르고, ‘야, 이거 주최 측에서 어디서 이렇게 맛있는 포도주를 가져왔지?’ 꼭 눈에 보이는 것을 따져요. ‘이 좋은 포도주를 어디서 가져와서 이 끝장에 내놓느냐?’ 어떤 과정을, 과정을 몰라요. 그 포도주가 어디서 나온 포도주입니까? 물에서 나왔어요. 주께서 물을 집어놓고, 끝까지 물이어야 될 우리를 위해서 포도주를 끄집어내는 작업을 하십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의 자신에 관한 이야기거든요. 예수님 자기 과정에 관한 이야기인데, 물이 포도주가 되는 과정은 자기가 죽고 사는 과정이거든요. 예수님의 죽음에서 비로소 포도주가 나오는 거예요. 썩어 빠진 우리 마음속에 예수님의 죽음이 들어오게 되면 그때부터 우리의 마음은 우리가 다루는 과정이 아니고, 주께서 자신이 원하는 맛있는 포도주를 만드는 생산 기지가 되는 겁니다.

계속 고린도후서 12-13절을 보면,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것 같이 아니하노라.” 율법의 끝을 구약 때는 몰랐는데 이제는 신약에 가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율법은 끝났다. 율법을 행하고 지켜서 구원받는 것은 끝났다.”

그러면 끝이 뭐냐? 끝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영이 있는 곳,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 이제는 그 자유함이 주는 그 감격, 그 감격에서 나오는 그 징후나 표정은 뭐냐?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모든 범사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왜? 내 마음은 죽었으니까요. ‘내 마음을 죽여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욥기 8장 7절에, 빌닷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그러나 오늘날 성도한테는 말을 바꿔야 해요. “시작은 죽음이었으나 나오는 것은 감사다.” 죽음에서 감사가 나오는 거예요.

끝으로 이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물어요? “목사님, 제가 왜 불행합니까? 내 인생은 왜 이렇게 슬프고 불행합니까? 제 모든 게 왜 실패입니까? 어떻게 하면 불행하지 않고 행복합니까? 목사님, 비결이 뭡니까? 어떻게 하면 됩니까?”

거기에 대한 제 답변은 이거예요. 불행의 반대말은 ‘새로움’입니다. ‘새로움’, 주께서 날마다 함께하셔서 새로움을 주시는데 그 새로움에 대한 고마움이 없고 감사가 없으니까, 과거에 ‘이미 죽어버린 내 마음이 어떻게 회복될까?’ 그것 붙들고 뭘 하려고 하니까 얼굴 표정이 어두워요. 표정이 어둡고 불안하고 그래요. 새로움이 없으니까.

새로움이 어디서 나오는가? 말씀이 거치고 지나가면서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죽어라고 말씀을 안 봐요, 안 듣습니다. ‘이만하면 편안한데 됐죠.’ 이런 식으로요. 늘 말씀을 통해서 ‘내가 알던 것과는 다른, 이렇게 예상 밖의 혜택을 입고 있구나’ 하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불행을 논할 입장이 안 되는데, 인생 비극을 말할 자격도 없는데 누구한테 배웠는지, 누구를 본받고 사는지 감사가 없고 불평이 대신하는 우리에게 이제는 주님의 복수 대상이라는 처음 자리부터 다시 다져서 더는 나 자신을 챙기지 않는 자유함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