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야고보서 1:22-24 / 죽은 거울(예수님의 재해석) 본문
야고보서 1:22-24 죽은 거울
이근호
사람들은 거울을 찾습니다. 자신을 보다 정확하게 알고 그 알게 된 것을 나와 일치시키기 싶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굴까? 나는 어떤 자라고 남들에게 말해줄까?’세상을 살면서 자기 자신이 어느 정도며 어떤 자인지를 분명히 남들에게 밝히는 것으로 안정적인 삶의 기본이라고 여깁니다.
흔들리는 자신의 모습을 타인들이 거부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 ‘거울 보기’에서 빠질 수 없는 태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보이는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런 사람이고 싶어”라는 기대치를 가지고 거울을 본다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람들이 거울을 보는 것은 자기 오류를 아는데 도움이 안된다고 말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자아상을 거울을 통해서 획득하고서는 쉽게 단정내리고 잊어버릴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내가 기대하는 나의 모습을 얻었다고 여기는 순간, 일단 만족하고 거울 앞에서 금방 돌아서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진실된 나는 내가 경솔하게 결정내리는 바가 됩니다.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나는 사회에서 누구나 인정하는 자격증을 얻고 싶다” 그래서 노력해서 그 자격증을 얻었다고 해봅시다. 이때부터 이 사람은 이 자격증을 바탕으로 해서 자신이 누군지를 구축하려고 합니다.
즉 남들로부터 인정받다자 기대하는 모든 시도가 인간 내부에서 나온다는 말은 자기 안에 있는 부정성을 자신의 노력으로 후벼 파 낼 수 없는 시도 자체가 점차 사라지게 만듭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이런 인간들의 본성을 집요하게 공격하면서 찾아듭니다. 말씀의 능력은 우리 안에 ‘내가 되고 싶은 것’을 공격해서 파괴시킵니다.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마 11:7-8)
광야에서 예수님과 연결된 예언의 말씀을 전하는 세례 요한은 결코 사람들이 기대하는 잘난 모습이 아닙니다. 죽은 자신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재해석
2026년 4월 12일
본문 말씀: 야고보서 1:22-24
(1:22)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1:23) 누구든지 도를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1: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복음 속의 구약을 전제로 해서 도(道), 하나님의 계시를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흩어졌다는 말은 이스라엘에게 문제 있었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도가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문제점을 이방민족 전부에게도 이미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약시대에 주어지는 도는 이미 인류 전체를 멸망시킬 근거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인정하고 반복적으로 회개하고 반성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가상히 여겨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결국 망했다는 이 엄연한 사실을 외면하는 생각입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의 율법이나 도에 대해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 개인의 자질과 능력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약에 와서 알려진 바에 의하면 모든 인류는 악마에게 단단히 정신적으로 붙잡혀 살고 있는 중이었던 겁니다. 악마는 하나님의 도에 대해서 왜곡된 해석으로 대체해주므로서 진정한 도가 인간에게 전달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즉 악마의 작용에 의해서 인간은 “천국가는데 무엇이 필요하지?”하든지 “내가 지옥가는 이유는?”을 생각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을 ‘생계형 인생’으로 전환시켜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로서 인간들은 알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으로 자신의 의미, 가치, 명예에 안 좋은 일이 생길까봐 전정긍긍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자기 인생을 근사한 인생이 되고 싶어합니다. 이런 인생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성경까지 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도를 보고 해석하는 것은 이미 악마의 본질 대변자로서 발설할 뿐입니다. 악마는 인간은 근원적으로 회개를 못하는 존재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점을 우리 주님도 너무도 잘 아시기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성경을 부지런히 연구하고 있는데,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증언하는 것이다.”(요 5:39)
즉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도, 즉 율법을 재해석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동안 인간들은 자기 자신을 파악하는 데 있어 자기 내부에 거울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 거울은 바로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은 인류의 조상 아담입니다. 기존의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눈 인식을 가지고 감히 하나님의 도, 말씀과 율법을 해석하기 그 결과는 뻔하게 악마가 원하는 해석이 되는 겁니다.
이점을 감안해서 주님께서 말씀에 대해서 재해석을 하십니다. 그 방식은 모든 말씀에 ‘악마의 존재와 활동’을 집어넣고 해석하는 겁니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는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마 13:19)
여기에 나오는 ‘악한 자’는 누가복음 8:12에 의할 것 같으면 마귀입니다.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예수님은 이 악마와 싸우시는 분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겁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마귀가 인간에게 잘못 심어놓은 기본 의식은 ‘있음’과 ‘살아있음’과 ‘죽음’입니다. 인간들은 자신 내부의 거울을 보면서 자신이 살아 있음을 생각의 기본으로 삼게 됩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눅 12:19-20)
인간에게 ‘없음’이라는 인식을 엉터리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이 없을 때의 경험을 가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실은 인간이 있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있음이며 인간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살아 계신 것이며 인간이 죽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만이 죽음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참된 죽음을 가질 수 없기에 참된 부활도 해당되지 않습니다. 영광스러운 부활은 오로지 주님의 십자가에 합류된 자에게 해당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아버지 하나님과 더불어 짝이 되는 일을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요 5:17)
성경에서는 그냥 인간이 숨끊어진 것을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지시를 따라 밝혀진 재해석 차원의 죽음만이 죽음이라는 겁니다.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 15:24-26)
이 작업을 위해 율법, 즉 도(道)가 하늘에게 주어진 겁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55-56) 따라서 성도에게는 기존의 아담말고 새로운 쌍둥이가 되고 거울이 되시는 예수님이라는 아담이 주어지신 겁니다.
창세기 25:21-23에 보면,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더니 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가로되 이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참된 성도라면 자기 내부에 계시는 중보자를 늘 제시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시니라”(마 8:4) 성도의 특징은 증거하는 겁니다. 즉 자신이 악마에 붙잡혀서 내렸던 세상에 대한 해석과 예수님에 재해석에 의해서 내렸던 해석의 차이를 통해서 왜 모든 해석과 현실이 십자가 사건에서 비롯되는지를 알리는 것입니다.
이로서 성도는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보잘것없은 모습으로 예수님이 이 죄악된 세계 속으로 들어오신 이유를 한시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녹취:오용익
9강-야고보서 1장 22-24절(예수님의 재해석) 260412-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야고보서 1장 22-24절입니다.
야고보서 1:22-24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말라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도(道)’가 나오는데, 이 ‘하나님의 도’는 옛날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안에 들어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계속해서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로 해서 이스라엘에게 적용했던 그 원칙이 오늘날 동일하게 주어진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적용된 그 도(道)가 지금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실 때 멈추지 않은 것처럼 지금도 주께서 쉬지 않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도’를 주시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이 우선이 아니고 하나님의 도, 하나님의 율법이,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계시가 우선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의 도를 이스라엘은 어떻게 받았는가? 복음 안에 이미 구약이 들어있고 이스라엘 역사가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 자체가 이스라엘을 망하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리 망하자. 망하자!” 이렇게 결심해서 망한 게 아니고, 그들에게 줬던 하나님의 도의 일관성이 이스라엘을 망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도(道)가 오늘날 흩어진 이스라엘뿐만 아니고 이 세상 모든 인류에게, 인류의 남은 역사에 고스란히 주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이 너무나 합당한 것처럼, 오늘날 그 도(道)에 비춰볼 때 합당하지 않으면 필히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뭐 가봐야 알지. 아직 우리가 멀쩡한데 망하기는 뭘 망해?’라고 안일하게 생각할 수가 있는데 신약 성경의 특징은 뭐냐? 망하는 게 벌써 시작이 되었다는 겁니다. 마지막이 벌써 시작이 된 거예요. 이 말은 ‘잘하면 안 망한다’가 아니라 이미 모든 인간은 망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그 시작을 그 도(道)에 의해 펼쳐내고 있는 겁니다. 안 망하는 사람은 없다는 거지요.
쉽게 예를 들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나는 나쁘다. 정말 나는 나쁜 사람이다.” 이런 이야기는 이제 신약에서는 소용이 없습니다. 나쁘다고 한다고 해서 인간이 달라질 게 없어요. 내가 나쁘다, 죄인이라고 해서 우리의 사정이 개선될 여지는 없습니다. 인간은 죽어도 회개 안 합니다. 아니, 인간은 죽어도 회개를 못 하죠.
이스라엘이 말씀을 듣고 ‘어떻게 지켜서 하나님의 백성이 돼 볼까?’ 하는 기대감 같은 게 있었는데 그 기대감 자체가 이스라엘을 통해서 좌절됐잖아요? 그러면 이스라엘에게 좌절된 구원이 이방인이라고 성사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그 도(道)가 이스라엘이 망하고 난 뒤에 이방 민족에게 왔을 때는, 본격적으로 ‘인간은 어떤 식으로도 구원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지금 주님의 도(道)가 하시는 활동이고 일이 되는 겁니다. 이 활동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야고보나 신약 성경에 와서 ‘도(道)를 들여다보라. 들여다보면서 자기를 속이지 말라’라고 당부하는 이유가 어디 있느냐? 이 율법에 대한, 이스라엘을 멸망케 한 그 도(道)의 해석은 이미 인간의 선에서는 떠났고, 주님이 직접 그 도(道) 대해서 해석해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나름대로 율법에 대해서 한 그 해석과, 마지막 때에 메시아로 오신 주님이 이 율법을 해석하는 데서 차이가 나면서 ‘아, 이스라엘은 멸망해야 마땅하구나’ 하는 것을 발견해야 됩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나쁘다’라고 한다고 해서 그걸 회개로 쳐달라고 할 수가 없어요. ‘아, 내가 나쁘구나. 내가 참 죄인이구나.’ 이게 또 하나의 자기 잘남이 되고 자기 의를 내세우는 것밖에는 되지를 않아요. 그래서 신약에서는 ‘내가 죄인입니다’라는 것을 주께서는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죄인이다’라는 것과, 그 도(道),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주님이 ‘너 같은 죄인을 어떻게 다루는가?’ 그 차이를 네가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주여, 저 죄인 맞습니다. 그러니까 용서해 주세요.” 이것은 소용없어요. 그것은 바리새인들이 다 했고 이스라엘이 했던 거예요. 그것은 해봐도 소용없어요. 2초, 3초 지나면 마찬가지 됩니다. 신약에서는 주님이 이 도(道)를 가져가셔서 ‘주님이 이 도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관건입니다.
그게 요한복음 5장 39절에 나와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이 모든 말씀은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기 때문에 여기서 우리는 이걸 알아야 해요. 모든 성경을 예수님이 가져가서 예수님이 해석하는 것과, 성경 말씀을 보면서 내가 이 성경 말씀을 이해하는 것과의 그 차이를 분명히 하라는 거예요, 그 차이를!
주께서 해석하는 그 해석, 우리가 해석하는 그 해석, 우리가 해석하는 것은 망했던 이스라엘이 했던 것과 동일한 해석이 될 수밖에 없어요. 인간은 어떤 책을 보든지, 뭘 보든지, 성경을 보든 불경을 보든, 아니면 세상에 나오는 모든 시사 방송, 뉴스를 보든지 모조리 다 해석해요. 그 해석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전부고 그게 옳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 해석, 자기가 이해한 것을 받아들이면서 예수님의 해석은 거부해요. 이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이게 문제에요. 왜 인간들은 예수님의 해석을 강하게 밀어내고 거부하는지? 교회 안 나오는 이유가 뭡니까? 사람들이 지금 교회 안 나오고 바깥에 있는 이유가, 주님의 해석을 듣기 싫다는 거예요. ‘내 인생은 내가 바라본 해석으로서 알아서 살아가겠다.’ 그걸 가지고 ‘생계형 인생’이라 합니다.
밤이 되나 낮이 되나 24시간 생각하는 것은 뭐냐? 내가 어떻게 밥 먹고 사느냐, 이게 전부예요. 그게 세상을 향한 내 해석입니다. 뭐가 빠져있겠습니까? 뭐가 빠져있는 거예요? 뭐가 빠진 줄도 몰라요. 왜냐? 예수님의 현실 해석은 인간이 집어넣을 수 없는 다른 것을 집어넣고 해석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씨 뿌리는 비유입니다. 교회 좀 다녔으니까 씨 뿌리는 비유 얼추 들어본 기억이 나죠? 농부가 씨를 뿌렸다는 이 말입니다. 길가에 던지고, 돌짝밭에도 던지고, 가시덤불에 던지고, 옥토에 던졌는데 거기서 열매가 나왔다는 그 이야기인데요, 여기서 제자들이 해석해달라고 요구하니까 예수님이 이런 해석을 해줘요.
18-19절에 보면,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여기에 ‘악한 자’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말씀에 관심이 없어요. 유대인들도 마찬가지고 말씀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말씀에 관심이 있는 자가 있는데 누구냐? 악한 자에요.
여기서 악한 자가 누군지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데, 마가복음 4장 15절에도 나와 있어요. “말씀이 길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여기 악한 자는 사탄으로 분명하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8장 12절에도 이런 말씀 나와요. “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악마의 적극적 활동을 여기 기재해 놨어요. 생계형 인생살이에서는요, 말씀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식이 중요하죠. 가족이 중요하고, 자기 몸이 중요하고, 자기 몸의 건강이 중요해요. 제가 여러 번 이야기 했습니다만, 지난주에도 이야기했어요. 사람과 대화할 때 그 사람에게서 중보자 스토리, 중보자 이야기가 나오는 대화인지, 중보자가 나오지 않는 대화인지를 보라고 했어요. 직장에서 누구를 만날 때 “우리 중보자께서 이렇게 했습니다.” 그 이야기가 나오는지, 아예 안 나오는지를 한 번 보세요.
이스라엘에게 말씀을 준 이유는 이거에요. “네가 천국 갈 때 이런 걸 준비해야 한다.” 이런 이야기거든요. 그런데 세상에서 생계형 인간들이 만났을 때 ‘우리 천국 갈 때 이런 걸 준비해야 한다’라는 그런 이야기를 여러분 동창생이나 가족 가운데서 하는 사람이 누가 있던가요? 맨날 이란과 미국 전쟁 이야기, 기름값 이야기밖에 안 나오잖아요.
마귀는 눈치가 빨라요. 마귀가 인간에게 지옥에 대해서 말 못 하게 만들고, 천국 갈 때 이런 걸 준비하라는 그 이야기를 못 하도록 합니다. 마귀가 그런 마음을 갖고 있고, 그런 말을 못 하게 하는 방법은 말씀을 무조건 뺏으면 돼요. 말씀 안에는 중보자가 하신 일이 담겨 있기 때문에, 중보자를 내 인생에서 제거하면 돼요. 그게 생계형 인생입니다.
생계형 인생의 특징은, 범사에 감사가 없어요. 범사에 감사가 없는 이유는, 불안하기 때문에. 마귀는 인간을 인질로 잡았어요. 인질로 잡힐 수밖에 없는 인간, 자기를 위해서 사는 인간이 생계형 인간이기 때문에 행여 나에게 나쁜 일, 안 좋은 일이 생길까 봐 염려하기 때문에 그건 마귀의 밥입니다. 뭐 인질이 안 될 수가 없죠.
나의 명예, 나의 의미, 나의 가치 이걸 마귀가 다 쥐고 있었던 거예요. 범사에 감사가 아니고, 모든 범사에 안 좋은 일이 생길까 봐, 행여 나쁜 일이 생길까 봐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 이게 생계형 인간의 주요 특징이에요. 여기 무슨 개선의 여지가 있습니까? 바들바들 떨고 있는데요. 교회 나와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예수님의 성경의 재해석은, 악마와 인간이 어떤 관계, 어떤 고리로 묶여 있는가를 파악하는 식으로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해석은, ‘악마가 인간을 어떻게 다뤄왔는가?’ 하는 사실을 말씀에 집어넣고, 그 악마의 일과 예수님 자신의 일이 어떤 식으로 차이 나는지 보여주는 것이 도(道)에 담긴 내용입니다. 쉽죠? 굉장히 쉬운 거예요.
이게 창세기 3장 15절에 이미 예언되어 있어요. 오실 메시아인 여자의 후손은 누구하고 상대한다? 인간하고 상대한다? 인간은 마귀의 밥입니다. 상대할 가치도 없어요. 뭐하고 상대한다? 뱀의 후손, 마귀하고 상대해요. 이게 성경을 주신 하나님의 해석이고 안목이에요. 해석을 이렇게 해야 해요.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인간의 처지가 어떤 처지인지를 아주 노골적으로 쉽게 설명했어요. 정말 이 말씀을 듣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한다면 진짜 의도적으로 반발하는 것인지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어요. 마태복음 12장 28절에,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늘나라 가는 게 아니고 하늘나라가 너희에게 친히 방문했다는 그 말이죠. 29절에,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강한 집주인을 결박해야 물건을 훔치든, 강탈하든, 세간살이를 빼 오든지 할 게 아니냐?’ 주님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지금 내 논리가 잘못된 거야? 도둑질을 해도, 그 집에 있는 냉장고나 좋은 보석을 훔쳐도 집주인부터 묶어야 그다음에 자유롭게 물건을 훔쳐 갈 수 있지 않느냐? 내 논리가 틀렸느냐?’ 그 말이지요. 안 틀렸죠. 그러면 인간들이 왜 예수님을 못 알아듣는가? 인간들보다 강한 자가 멱살을 쥐고, 목숨을 쥐고 있으니까, 인간은 이 하나님의 도(道)에 접근을 못 하는 거예요.
이 논리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잘못된 논리예요? 누가복음 12장 19-20절에서 또 쉬운 예로 설명을 해줘요. 어떤 농부가 농사를 잘 지었어요. 밖에 그냥 두면 곡식이 썩을 것이니 창고를 지은 겁니다. 창고를 지어놓고 곡식을 거기에 다 저장하고 보니 흐뭇한 거예요. 흐뭇하니까 그 본심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지금 자기가 자기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또 생계형 인간이에요. 하나님의 도(道)를 보지 않는, 그 도를 빼버리는.
‘내가 내 영혼에게 말한다’는 이걸 오늘 야고보서 본문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그것을 ‘거울’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볼 때 거울 보듯이 본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까 제가 말씀드렸듯이 인간 속에 악마가 이미 인간을 인질로 잡고 있단 말이죠. 인간은 바들바들 떨고 있고요. 인간은 항상 자기 안의 거울을 보면서 자기가 자기보고 주고받으면서 살아가고 있어요.
일상에서 그런 현상 중 하나가 연못 같은데 보면 수면 위에 얼굴을 비춰봐요. 연못의 수면은 내가 보는 것을 반사해서 보여주니까 나에게 거울 효과를 가집니다. 내가 나를 발견하는 것은 내 모습을 비추는 어떤 무엇이 있을 때, 내가 이렇다고 자꾸 자기를 검증하고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식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돈 많은 동창을 만났을 때 그 돈 많은 동창은 내가 보는 하나의 거울이 돼요. ‘학교 다닐 때 넌 공부도 못했는데 신수가 훤한가 봐? 내 영혼아, 평생 넌 뭐하고 살았지?’ 결국 내가 나한테 이야기하는 거예요. 타인이, 동창생이 다가와도 내가 나를 비추는 하나의 거울 용도로 사용하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한테 갇혀 있는 거예요. 전부 다 자폐증 환자 같아요. 자기 바깥으로 벗어날 방법을 모른다니까요! 마귀가 그렇게 꽉 잡고 있기 때문에 진짜 거울로 진격하지를 못해요. 다가서질 못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구약 때부터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말씀을 주실 때…, 구약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어요. 성경 백날 봐도, 율법을 백날 봐도 몰라요. 모르기 때문에 주님 자신이 이 도(道), 이 말씀을 주님 자신이 지킨다는 그 차원에서 친히 그 말씀을 가지고 우리에게 접근을 시도했는데, 그것이 이미 구약 때부터 시작이 된 거예요.
우리가 밝힐 수 없는 우리 내부에 악마가 집어넣어 준 쌍둥이가 있는 거예요. 짝을 이룬다, 쌍둥이다, ‘너와 내가 얼굴이 똑같네’ 이런 거죠. 그 쌍둥이 요소를 집어넣습니다. 창세기 25장 22-23절에서 이삭의 부인이 원래는 아기를 못 낳는데,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며 쌍둥이를 낳습니다.
“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가로되 이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라고 되어 있어요.
엄마 리브가 뱃속에서 태어나기도 전에 둘이 붙어서 싸운 거예요. 싸웠다는 말이지요. 누가 이렇게 싸움을 유발했습니까? 하나님이 유발했죠. 주님이 유발하신 거예요. ‘주님이 이 세상에서 사람을 쥐고 있는 악마와 싸움해야 이것이 천국이 되고 생명이 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싸우는 내용의 계시를 하나님 쪽에서 리브가 속에 심은 거예요. 그래서 쌍둥이예요. 짝을 이룹니다.
이 말은 곧 뭘 뜻하느냐? 우리에게 오신 우리 주님이 우리와 쌍둥이로 오셨다는 말입니다. 그동안 인간들은 개체적인 자기와 누구하고 쌍둥이냐 하면, 자기의 선조인 아담이 우리의 쌍둥이였어요. 쌍둥이가 뭡니까? 동일한 DNA를 품고 있을 때 쌍둥이잖아요. 아담의 유전 인자가 대대로 계속해서 우리 자신에게 개인에서 개인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우리의 원조가 되는 아담에게서 우리는 발을 뺄 수가 없었던 겁니다.
아담에게 만약에 저주가 임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저주가 임하는 것이고, 아담에게 이마에 땀이 흐르도록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 된다면 그것은 곧 우리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너도 아담 꼴 난다. 아담 그 짝이야, 너는! 아담의 운명에서 넌 못 벗어나’라는 인간, 저주받은 그 인간 속에, 하나님께서 이제는 아담이 쌍둥이가 아니라 새로운 아담인 예수님이 쌍둥이가 되어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이 바로 야곱과 에서의 관계입니다.
에서는 지옥 가고, 야곱은 천국 갑니다. 에서가 지옥 가는 걸 너무 신기하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에서가 지옥 가는 것을 신기하게 여기지 마시고, 야곱이 천국 가는 걸 더 신기하게 여겨야 해요. 왜? 우리 안에는 우리 선조 아담이 들어있는데, 그것도 저주받은 아담이 들어있는데, 흙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아담이 들어있는데 어떻게 야곱이 여기서 천국을 갑니까? 말이 안 되죠.
마태복음 14장 28절 말씀을 들려드릴 테니까 이게 말이 되는지를 여러분이 생각해 보세요. 마태복음 14장 29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대요. 여러분들도 뭐 가끔 해 보는 일입니까? 해봐요? 도(道)가 있는 성경에 이게 왜 나옵니까? 사람이 물을 걷는 이야기가 왜 나옵니까? 나오는 이유가 뭡니까?
생계형 인간에게 이런 일이 생깁니까? 있을 수가 없잖아요. 베드로도 생계형 인간이었어요. 고기 잡는 것으로 생계를 생각하는 그것이 자기 삶의 의미고, 목적이고 전부였어요. 그 베드로가 갑자기 물 위를 걷기는 왜 걸어요? 왜 걷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생긴 현상이잖아요? 예수님께서 죄 있는 그 베드로의 행적에 재해석을 한 겁니다.
해석을 다시 한 거예요. 베드로가 믿음 좋고, 이런 것은 없어요. 베드로가 “저 죄인입니다.” “알았어, 알았어, 알았어! 이제부터 내가 널 다룰 거야.” 회개고 자시고, 우리는 회개하는 자체가 위선입니다. 우리는 위선하는 것도 모르고 위선해요. 위선이 뭔지 알아요? 내가 갖고 있는 걸 가지고 버티는 게 위선입니다.
“도(道)도 필요 없고, 주님도 필요 없고 나 갖고 있는 걸로 내 인생 끝내겠습니다.” 이게 위선이에요. 지금 몇 번째 이야기하는지, 그게 생계형 인생입니다. 나이 들었다고 해서 이 생계형 인생이 바뀌는 게 아니에요. ‘너 이번에 전쟁 기금 얼마 받아? 나는 얼마 받는다.’ 이게 뭐냐? 아까 제가 ‘내가 누구냐’를 점검하는 차원에서 남과 나를 비교하는 것, 비춰보는 것, 거울이죠, 거울, 이스라엘의 거울은 깨졌습니다.
주께서 깼어요. 주께서 깨주시고 깨진 그 자리에 깨진 모습으로 찾아온 거예요. 이미 구약의 도(道)에 그게 나옵니다. 창세기 19장 1절에 보면 “날이 저물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리어 절하여.” 우리가 알다시피 소돔과 고모라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롯의 가정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롯이 구원 받았다’ 여기에 관심을 두는데 관심을 살짝 한 번 돌려봅시다. 여기 천사가 왔다, 그 천사의 기능에 관심을 둬봅시다. 옛날에는 도시가 성이었으니까 성문 바깥에는 외곽이고 농토, 농지고 성문 안은 사람들의 마을이 돼요, 시가지가 나온다고요. 천사가 성문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왔을 때 그걸 누가 아느냐? 성문에서 천사가 들어오는 것을 롯이 기다렸어요.
소돔과 고모라에서 일어나는 이 모든 일에서 롯에게 어떤 마음이 있었는지를 베드로후서 2장 6-7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 6-7절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졌다’는 말은, 곧 롯이 이 사태를 어떤 식으로 해결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이 땅에 머물 때…, 잘 들으세요. 굉장히 복잡하고 어렵지만 중요한 겁니다.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 우리가 사는 곳을 심판하실 때 심판주가 저 성문 바깥에서 안쪽으로 들어온다’는 거예요.
그렇게 들어오는데 롯이 무엇을 간파했느냐? 천사는 하늘나라에서 얼마나 눈부신 형상을 가지고 있겠어요? 그런데 그 천사가 아주 초라한 행세로, 일반적으로 생계형 인생을 살아가는 이 인간 세계에 초라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합류한다는 것을 롯이 발견한 거예요.
왜? 경계선이에요, 경계선. 심판받아야 할 장소와, 심판을 해야 할 바깥쪽이 경계 지어있고, 그 경계선에서 롯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 바깥에서 천사가 롯의 마중을 받고 만나서 롯의 집에 들어간 겁니다. 롯은 천사인 줄 알고 있었고, 다른 사람은 천사인 줄 알지 못했습니다.
자, 우리 일상을 한 번 돌아봅시다. 참, 이것은 좀 어려운 이야기인데 여러분 참을성 있게 한 번 들어보세요. ‘있다’라는 것에 대해서, ‘내가 여기에 있다’라는 것에 대해서 ‘내가 있다’를 해석하는 게 있어요. 뭘 보고 아느냐? 거울 보고 움직이잖아요. 저게 누구예요? 내가 있잖아요. 그러면 내가 여기 있잖아요. 거울에 움직이는 거 보니까 분명히 있잖아요. 그러면 이게 거짓이 아니고 참된 현상이라고 간주하죠.
그다음에 두 번째, 그냥 있는 것 정도가 아니고 살아있어요. ‘있다’도 내가 해석하고,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살아 있다’도 누가 해석하느냐? 내가 살아있어요. 그 해석도 내가 내려요. 나이 많아서 몸이 아프다 죽어요. 우리 주변에 죽는 사람 많잖아요. 죽는 사람 봤으니까 ‘아, 저것은 죽은 것이다’라고 누가 해석하느냐? 내가 해석을 해버려요. 그리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마귀의 생각이고 그게 거짓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도(道)를 밀어버리고 생계형 인간으로 사는 인간에게는 그게 누구에게도 파악이 안 돼요. 그러니까 도(道)를 아는 사람은, 주님의 재해석이 있는 사람은 대구에 살든, 울산에 살든, 서울에 살든 이곳이 바로 소돔과 고모라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있다’에 대한 주님의 해석은 어떻게 되느냐? 주님이 있는 게 ‘있다’에요. 제가 너무 어려운 이야기를 해서 미안해서 웃는데요, 왜 그러냐? 인간의 해석에서는 ‘없다’가 해석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가 없을 때에 대해서 자기가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태어났기 때문에 ‘있다’에서 시작이 되잖아요.
그 ‘없다’를 인간은 경험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생각은 ‘여기 있다’에서 시작하는 거예요. 과학이든 철학이든 뭐든, 경제학이든 그리고 이란과 미국의 전쟁이든, 이스라엘의 전쟁이든 그 모든 시작이 ‘있다’로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이게 벌써 마귀의 생각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거예요. 모든 내 생각은 다 마귀에서 나온 생각입니다.
왜? ‘내가 여기 있는 것은 옳다’고 우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있다가 늙어 죽으면 되지.’ 죽는 것도 ‘내가 있음’에서 나온 잘못된 해석이 죽음인 거예요. 그러나 성경에서는 주님이 어떻게 해석하느냐? ‘있다’는 ‘없다’에서 출발해야 그게 제대로 된 해석이라는 거예요. 이걸 이해하시겠어요?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거짓말 좀 하지 마. 너는 지금 ‘있다’는 말을 하면 안 돼. 어디서 마귀 주장을 나한테 하고 있어?”
“여기 있는데요. 지금 몇 번지에 살고 있어요. 주민 등록 깔까요? 저 여기 있습니다.”
“없어. 넌 없는 거야.”
“주님, 제가 늙어 죽습니다.”
“어디서 거짓말을 하고 있어? 넌 산 적이 없어. 살아본 적이 없어.”
주님이 살아있는 게 ‘살아 있다’의 주님 재해석이에요. 우리가 살아있는 것은 ‘살아 있다’에 해당이 안 됩니다. 여러분, 교회 몇십 년 다녔어요? 차이를 보여주세요, 차이를. ‘그래, 내가 엉터리구나.’ 또 그렇게 삐지지 마시고요, 차이만 보여주면 돼요. 내가 나에게 내리는 해석은 ‘내가 인생 살다가 자식 키우고 늙어서 이제 죽는다.’ 그게 다 잘못된 해석이고, 그게 엉터리에요. 그것은 마귀의 주장을 그냥 대변해 주는 것밖에 안 돼요.
우리는 그런 적이 없어요. 우리는 산적도 없고, 있은 적도 없었어요. 따라서 우리는 죽는 적도 없어요. 진짜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이 죽음이에요. 이게 아버지가 예수님을 다룰 때 한 해석이었습니다. 성령의 해석이었어요. 그게 성경에 나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5-26절,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다시 말씀하겠습니다. 아버지는 예수님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죽음이 뭐지? 사는 게 뭐지? 있는 게 뭐지? 없는 게 뭐지?’를 마귀에 속한 인간들의 해석 말고, 그 해석을 심판하기 위해 소돔과 고모라 바깥에 있는 하늘나라에서 ‘이렇게 해석해서 너희들을 심판하겠다’라는 근거를 바로 이 도(道)의 재해석에서 마련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을 보내서 ‘사망이 무엇인지, 사는 게 무엇인지, 있는 게 무엇인지, 없는 게 무엇인지?’를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재 펼쳐주는 겁니다. 이게 도(道)에요. ‘마지막 원수는 사망이라.’ 이게 인간의 어느 철학책에 나옵니까? 어느 과학책에 나옵니까? “살다 보면 죽는 그 현상 현상을 사망이라고 하는 거야.” 우리가 배운 건 이겁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만이 사망이라는 것, 우리가 죽는 것은 죽음 축에도 들어가질 못해요. 인간은 안 죽습니다. 아니, 못 죽습니다. 죽어도 그 죽음을 주님이 갖고 해석할 때, ‘인간이 죽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누가 인간을 죽이느냐, 무엇 때문에 죽이느냐가 이 땅에 없는 네가 태어난 의미’라는 거예요. 그 의미를 너희들은 그동안 악마와 한통속이 되어 의도적으로 가렸고, 막히게 하면서 위선자로 살아왔다는 거예요.
자꾸 해석을 내가 하기 때문에 암 걸렸다고 무서워하고 두려워 떠는 거예요. 내 본래 존재의 의미는 ‘예수님이 누군가,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는가,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는가?’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없는 데서 태어났는데 마귀가 그걸 뭐로 싹 바꿨냐 하면, 생계형 인간형으로 다 바꿔 놓은 거예요, 생계형 인간형으로!
‘나만 행복하면 되고 나만 자식 잘 키우고 살면 되지.’ 모든 생각하는 것이 거기에 집중돼 있어요. 교회도 그냥 나와주는 것이고요. 안 나와도 되는데 너무 인간성이 좋아서 나와주는 거예요. 죽음의 주체가 나한테 있는 게 아니고 따로 있다는 걸 아는 것, 바로 우리의 부활의 주체도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십자가, 곧 제대로 재해석된 죽음 안에 들어갈 때만 비로소 부활이 주어지지, 그 외에는 영생의 부활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 외에는 지옥에 관한 부활만 있을 뿐이에요.
구약을 통해서 생계형 인간의 자기 해석, 그리고 진짜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준 그 해석의 차이에 대해서 짧은 시간이나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5-56절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먼저 주었던 율법입니다. 오늘날의 ‘도(道)’, 도를 말하는 거예요. 혹시 여러분이 잊었는가 싶어서 다시 말씀드립니다마는, ‘우리가 잘못됐다.’ 지금 그걸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죄인입니다.’ 그걸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너는 그냥 가만히 있어. 너의 죄를 이 예수님이 어떻게 활용하는가?’를 네가 발산하라는 것, 그걸 고백하라는 겁니다.
설교 끝나고 나면 은연중에 저한테 묻는 게 있어요. “그러면 목사님,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라는 말입니까? ‘성도는 이렇게 사는 것이다’라고 딱 정답을 말해주면 우리가 받겠습니다.” 그렇게 하는데 예, 그렇게 해 드릴게요. 마태복음 8장 4절에 문둥병자가 나오는데 저주받은 자죠. 예수님께서 와서 그 문둥병자를 낫게 해줬어요.
그때 예수님은 딱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문둥병자를 낫게 해놓고 하는 말이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시니라.”
‘나 문둥병자인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찾아오셨다.’ 그걸 대외적으로, 그동안 내 거울로 사용했던 그 거울 말고, 주님의 거울 가지고 그들에게 눈부시도록 비춰버리라는 그 말이죠. 예수님의 빛으로서 ‘나는 너하고 똑같이 생계형 인간이었는데 예수님 찾아오셔서 이제는 내 안에 예수님이 있다. 내 안에 중보자가 계시다’라는 이 중보자 스토리, 중보자 이야기를 펼치면 되잖아요.
그게 성령 받은 사람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모든 일에 대해서, 범사에 대해서 염려하는 것이 아니고, 공포스러운 게 아니고 감사가 이어지죠. 이 이야기가 되려면, 구약에서 생계형 인간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이용해 먹으려고 하다가 걸려들었는지, 거기에서 인간이 자기 문제 해결하는 데 얼마나 무능한지를 아울러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사기 17장 1절에서 6절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사기의 내용 전체는 ‘그 당시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자기의 소견대로 했다’는 겁니다. 사사기 17장 1절에,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더니”라고 이야기를 시작하거든요. 어머니와 미가라는 아들이 같이 사는데 어머니가 은화 1,100을 잃어버리고 난 뒤에 “내 돈 훔쳐 간 놈은 하늘의 저주를 받아라” 하고 저주를 선포해 버렸어요. 이 아주머니가 성질이 급했던 모양이죠.
저주하고 난 뒤에 딱 보니까 그 돈을 가져간 게 자기 아들이었잖아요. 어머니가 식겁한 거예요. 그 저주가 자기 아들에게 임했다 이 말이죠. 그래서 빨리 사태 수습을 해야만 되었어요. 수습하는 방법이 뭐냐? “내가 이제 다시 말할게. 내 아들아, 네가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한다”(삿 17:2). 여기에 여호와가 동원돼요.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한다.
그리고 사사기 17장 3절에 “미가가 은 일천일백을 그 어미에게 도로 주매 어미가 가로되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 차로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이 은을 네게 도로 돌리리라.”
신상을 만들었어요. 그것 가지고도 저주가 해소 안 될까 싶어서 레위인을 제사장으로 세워요. “이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또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제사장을 삼았더라…미가가 레위인을 거룩히 구별하매 소년이 미가의 제사장이 되어 그 집에 거한지라”(삿 17:5,12). 그리고 사사기 17장 6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다’는 그 예시 중 하나로 어떤 가정 단위의 이야기를 끄집어낸 겁니다. 한 가정에서 일어난 이런 소소한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 가정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이야기와 유사하죠. 쌍둥이예요. 같은 아담의 흐름에서 먼저 된 선배니까 그쪽 흐름이, 미가 가정의 이야기가 우리 내부까지, 우리 DNA, 유전 인자 속에까지 들어와서 우리 일상이 되어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 레위인이 동원되거든요. 레위인이 뭡니까? ‘성스러운 직책의 기도발, 내 기도발보다도 목사님의 기도발이 더 유효하다.’ 그거잖아요. 신상, 마리아상 만들어 놓고 뭐 하냐? 여호와께 빈다는 거예요. 빌어서 여호와께 복을 원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여호와의 용도가 뭐죠? 우리 가정에 혹시나 있을 수 있는 안 좋은 일, 나쁜 일, 액운 같은 것을 떼 내기 위해서 ‘저 진짜 참신인 여호와 믿었습니다’ 하는 그걸로 그걸로 때우려고 하는 거예요.
그 당시에 뭐가 없기 때문에? 왕이 없기 때문에. 왕이 없기 때문에 누가 한다? 본인이 본인 인생을 내가 알아서 한다. 이게 뭐냐? 여호와의 도, 율법은 있으나 마나 한 겁니다. 백날 율법을 봐도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은, 바로 옴팍 마귀를 뒤집어쓴 일이 되는 거예요. 그 당시에 레위인들의 생계가 이런 식이었어요. 사람들 복 빌어 주는 점쟁이 수준,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레위인의 생계 수단이었습니다. 그 당시 레위인도 생계형 인간이었습니다.
왜? 사람들이 십일조를 안 내니까 먹을 것이 없어요. 레위인은 토지가 없었으니까 외판원 하는 거죠. “혹시 복 빌어 드릴까요? 우리 교회 오시면 복 많이 받습니다.” 이런 식이죠. 간증 집회에서 “우리 교회에서 기적 많이 받았습니다. 우리 교회에 기적이 있으니까 당신이 천국 가는 것도 우리가 책임지겠습니다.” 목사가 이런 식으로 자기 생계유지 하는 거예요.
그 당시에 왕이 없으므로 생긴 예를 또 듭니다. 사사기 19장 1절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때에…” ‘왕이 없을 그때’입니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세우고자 하는 왕은 도대체 어떤 왕이어야 하는가?’라는 것을 나중에 다윗을 왕으로 세우면서…, 사사기는 다윗 이전이거든요. 이후에 다윗 왕을 세우면서 그 이전에 사사기의 예를 든다는 말은 ‘새로운 왕은, 기존에 인간이 자기의 소견대로 사는 그것이 저주를 유발하고 옴팍 저주를 뒤집어쓰는 행위라는 것을 고발하는 왕이 장차 오실 왕이라는 거’예요.
심지어 다윗도 저주받을 짓을 했어요. 사무엘하 24장에 보면, 다윗이 이스라엘의 인구 조사를 하면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습니다. 다윗 본인이 인구 조사해서 저주받았어요. 그럴 때 저주받은 다윗이 어떻게 했는가?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을 사서 거기서 제사장의 역할을 해버리니까 그 저주가 떠나갔어요.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은 오십 세겔로 타작마당과 소를 사고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삼하 24:24-25).
저주의 요소 그리고 그 저주를 제하는 복의 요소, 그걸 위해서 다윗은 심지어 자기 자신이 왕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그 변화의 요소, 그 세 가지 요소를 다 합한 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나오는 도가 신약의 도, 우리가 들여다봐야 할 도가 되는 겁니다.
사사기 19장 1-5절에 보면,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우거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취하였더니 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 그 아비의 집에 돌아가서 거기서 넉달의 날을 보내매 그 남편이 그 여자에게 다정히 말하고 그를 데려오고자 하여 하인 하나와 나귀 두필을 데리고 그에게로 가매 여자가 그를 인도하여 아비의 집에 들어가니 그 여자의 아비가 그를 보고 환영하니라 그 첩장인 곧 여자의 아비가 그를 머물리매 그가 삼일을 그와 함께 거하며 먹고 마시며 거기서 유숙하다가 나흘만에 일찌기 일어나 떠나고자 하매 여자의 아비가 그 사위에게 이르되 떡을 조금 먹어 그대의 기력을 도운 후에 그대의 길을 행하라.”
어떤 레위인이 북쪽의 에브라임 산지에 첩을 들이고 살고 있었어요. 그 첩의 친정은 베들레헴이에요. 거리가 한 50km쯤 떨어진 곳에서 시집와서 살다가 그 첩이 행음을 했어요. 남편 버리고 ‘더는 당신하고 같이 안 산다’ 하고 친정에 내려와 버렸다는 그 말이죠. 그래서 그 레위인이 아내 찾으러 장인 집에 온 거예요.
장인은 왜 자기 딸을 레위인의 첩으로 들어가게 했느냐? 그 시대가 자기의 소견대로 한 거예요. 돈은 좀 있으니까 ‘하나님의 복을 유발하는 성직자 집안의 사람을 내 사람으로 삼으면 나에게 어떤 액운이나 죄도, 어떤 저주도 커버 된다’라는 생각을 한 거예요. 어떤 장로 집에 돈이 많은데 딸이 하나 있다. 그러면 시집을 누구한테 보낼 가능성이 있어요? 신학교 출신을 사위로 삼아서 액땜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왜 그렇게 안 해요? 그만큼 돈이 없는 거예요. “돈 걱정하지 마. 너는 목사 일이나 잘해. 개척교회 자금 다 대 줄게.” 이럴만한 돈이 없어서 그런 거예요. 아담과 우리가 맨 쌍둥이 아닙니까? 그 나물에 그 밥인데요. 사사기 19장의 레위인의 장인이 그 짓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사위가 왔을 때 5일씩이나 붙들었어요. 자기 딸을 달랜 것이 아니에요. 사위를 달랬지요. “우리 딸이 철이 없기는 진짜 없지, 그렇지? 그러니까 네가 풀어!”
우리 관계, 그 정략적 관계 유지해야 한다는 거지요. 가려고 하면 붙들고, 또 가려고 하면 붙들었어요. 5일째, 또 붙드는데 “이제 진짜 가야 됩니다” 해서 집으로 돌아가는데 여부스라는 동네에 갔어요. 여부스는 ‘예루살렘’ 그 동네입니다. 그때는 아직 다윗이 정복하기 전이기 때문에 거기가 이방 민족이 살던 땅이에요.
사사기 19장 10-16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여부스에 가까왔을 때에 해가 지려하는지라 종이 주인에게 이르되 청컨대 우리가 돌이켜 여부스 사람의 이 성읍에 들어가서 유숙하사이다 주인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돌이켜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하지 아니한 외인의 성읍으로 들어갈 것이 아니니 기브아로 나아가리라 하고 또 그 종에게 이르되 우리가 기브아나 라마 중 한 곳에 나아가 거기서 유숙하자 하고 모두 앞으로 행하더니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 가까이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기브아에 가서 유숙하려고 그리로 돌이켜 들어가서 성읍 거리에 앉았으나 그를 집으로 영접하여 유숙케 하는 자가 없었더라 이미 저물매 한 노인이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오니 그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 산지 사람으로서 기브아에 우거하는 자요 그곳 사람들은 베냐민 사람이더라.”
그러니까 ‘이방인들이 있는 이곳은 위험하니 다른 데로 가자’ 해서 찾아간 곳이 베냐민 지파가 있는 기브아라는 곳이에요. ‘여기는 나그네를 대접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대접은커녕 겨우 어떤 노인의 집에 묵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믿는다는, 율법이 있는 그 도시가 소돔과 고모라처럼 깡패들이 있어서 여자도 아니고 남자를 내놓으라고 난리예요.
동네가 위험한 것을 미리 알았던 그 나이 많은 노인네가 막아섭니다. “집 주인 그 사람이 그들에게로 나와서 이르되 아니라 내 형제들아 청하노니 악을 행치 말라 이 사람이 내 집에 들었으니 이런 망령된 일을 행치 말라 보라 여기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이 있은즉 내가 그들을 끌어내리니 너희가 그들을 욕보이든지 어찌하든지 임의로 하되 오직 이 사람에게는 이런 망령된 일을 행치 말라”(삿 19:23-24).
할 수 없이 레위인이 자기 첩을 내어주게 되는데 그 깡패들이 그 첩을 밤새 욕보였어요. 아침에 레위인이 비겁하게 혼자 길을 간다고 나서는데 보니까 문지방에 뭐가 걸리는 게 있어요. 보니까 간밤에 깡패에게 내어줬던 자기 여자가 남편 찾아 몸을 질질 끌고 와서 어디서 죽었느냐? 자기 남편 만나기 직전에 문지방 앞에서 죽어 있었어요.
“무리가 듣지 아니하므로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무리에게로 붙들어내매 그들이 그에게 행음하여 밤새도록 욕보이다가 새벽 미명에 놓은지라 동틀 때에 여인이 그 주인의 우거한 그 사람의 집 문에 이르러 엎드러져 밝기까지 거기 누웠더라 그의 주인이 일찌기 일어나 집 문을 열고 떠나고자 하더니 그 여인이 집 문에 엎드러지고 그 두 손이 문지방에 있는 것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우리가 떠나가자 하나 아무 대답이 없는지라”(삿 19:25-28).
그걸 보고 화가 난 레위인 남편이 일단 그 시체를 나귀에 태워서 자기 집 에브라임 산지에 데려옵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첩의 시체를 12토막으로 내서 택배로 이스라엘 전 지파에 보내버립니다.
“이에 그 시체를 나귀에 싣고 행하여 자기 곳에 돌아가서 그 집에 이르러서는 칼을 취하여 첩의 시체를 붙들어 그 마디를 찍어 열 두덩이에 나누고 그것을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 보내매 그것을 보는 자가 다 가로되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날까지 이런 일은 행치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하였도다 생각하고 상의한 후에 말하자 하니라”(삿 19:28-30).
‘이 나라가 이 꼬라지다. 율법이고 나그네 대접이고 뭐고 하나도 없는 이런 세상이다’라는 것을 시위하듯이 그 시체토막들을 사방에 보냈습니다. 그로 인하여 되지도 않은 의구심의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은 12 지파가 되어 있어야 복을 받는데 그 전쟁을 벌인 후에 깡패 짓 한 그 베냐민 지파 자체가 날아가 버려서 지파 하나가 없어졌어요(삿 21:3, 5).
그러면 여기서 아곱의 언약은 끝났습니다. 이런 지경이 되어버린 거예요. 왜 사사기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 이게 도(道)입니다. 이게 도예요. 생계형 인생, 자기밖에 없는 인생, 벌벌 떨면서 범사에 감사할 줄도 모르고 항상 철저한 자기방어, 발발발 떨면서 내 위치, 내 명예, 내 존재의 가치를 지키겠다는 것, 잘못된 해석, 마귀의 해석이에요.
그런데 십자가에서 그 도가 새롭게 우리를 다시 해석하게 되면, 우리는 주님에 의해서 다루어지는 겁니다. 이제는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고, 말씀이 나로 하여금 예수님을 증거하는 해석으로서 ‘내가 훌륭하다’가 아니라, ‘잘났다’가 아니라, ‘내 해석은 이렇고 주님의 십자가 해석은 이렇다’라는 그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 이미 구원받은 성도의 해야 할 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얼마나 나 편한 대로 살았는지 내 것만 멀쩡하고 내 것만 안정되면 만사 오케이라 여기는 이 안일한 생각, 그러면서도 내부적으로서는 죽을까 싶어서 벌벌 떠는 마귀의 앞잡이. 주여, 이런 내 모습을 재삼 밝혀주고 들추어주는 성령의 역사를 또 한 번 범사에 감사하고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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