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사도행전 7:51 / 죽음 속의 생명 / 251216 본문
강남강의 전 어느 집사님의 질문에 대한 목사님 답변
질문: 20251211 서울강의a(세 가지 세례)에서 나왔던 하나님은 한 분이시냐는 질문에 대해 인간 보기에는 세 분, 하나님 보기에는 한 분이라고 하신 부분에 대한 보충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답변: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어떠한 생각도 하나님은 안 받습니다. 인간이 정리할 수 있는 것도요. 삼위일체라는 것을 그동안 교회 역사 속에서 인간의 이성으로 정리해보려고 엄청나게 노력을 많이 했어요. 그 노력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새로운 언어를 도입하는 방법이에요. 새로운 단어를 도입하는 겁니다.
이해는 안 되는데, 이해하기 위해서 기존에 인간들이 사용하는 단어를 거기다가 박아 넣어버리면 이해 안 되던 것이 이해가 될까요? 안 되지요. 위(位)하고 체(體)라는 단어를, 삼(三)은 위(位)에다가, 일(一)은 체(體)에다가 관련지어서 위(位)라는 단어와 체(體)라는 단어는 이미 인간들이 사용하고 있는 단어잖아요. 위(位) 앞에다가 삼(三)을 적용시켰단 말이죠. 체(體)에다가는 일(一)을 집어넣은 거예요.
삼위일체(三位一體)잖아요. 삼위일체 가지고 뭐를 시도하느냐 하면, 삼(三)과 일(一)은 하나라는 사실(3=1)을 끄집어내려고 하는데, 이게 얼마나 억지에요? 지금 위(位)라는 단어의 의미, 체(體)라는 의미의 단어가, 체(體)는 일(一)과 관련되어 있죠. 몸이 하나니까 되는데, 위(位)라는 단어가 삼(三)과 연결되어 있는가? 이런 ‘위’라는 단어는 없어요.
이건 뭐냐 하면, 기능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기능, 세 가지 위치, 직장에서는 우리 아버지는 이발사이고, 집에 가면 아버지고, 교회 가면 장로님이다. 한 사람이지만 세 가지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자다. 그 때, ‘너희 아버지는 어떤 기능을 갖고 있어?’, ‘세 가지 기능을 갖고 있어.’ 할 때 위(位)라는 것이 설명이 되거든요. 위(位라)는게..
그런데 근거는 뭡니까? 세 분이란 뜻이 아니고, 한 사람인데, 세 가지 기능을 한다고 할 때 이렇게 이야기한단 말이죠. 그래서 제가 지금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뭐냐 하면, 단어를 붙인다고 3이 1되는 이런 경우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왜냐 하면, 단어를 따로 설명해야 되니까요. 단어를 또 따로 설명해야 돼요.
안 되는데 억지로 단어를 집어넣어서 안 되는 걸 되게 했으니까 이게 수상하잖아요. 수상하지 않습니까? 왜 이런 반칙을 쓰느냐? 단어를 제 맘대로 집어넣었는데, 이 단어가 위(位)라고 할 때는 일체(一體)를 전제로 한 위(位)이기 때문에 이거는 뭐 세 가지 기능이 있다는 거밖에 안 되는 거예요. 한 분인데, 세 가지 기능을 한다, 이건 성경이 말하는 삼위일체가 아니에요.
그럼, 삼위일체라는 건 뭐냐 하면, 인간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모른다는 이야기예요. 인간의 어떤 단어를 동원하고, 어떤 언어를 동원해도 하나님에 대해서 묘사할 수 있는 방법은 인간에게는 없다, 인간에게 없는 거예요. 더 중요한 것은, ‘3=1’ 이렇게 표시하면 여러분 속 시원하게 잘 이해되죠. 이게 문제가 아니고, 그 방법은 없어요.
없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세 분의 하나님이 나타났고, 하나님 입장에서는 하나라고, 성경에서 ‘나는 하나’라고 이야기 한 그 이유가 뭐냐? 인간들 언어적 입장에서는 하나님을 인간의 이성으로 정리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막으시는 거예요. 단어 조립하고, 지성 동원해서 ‘그래, 이게 하나님이야.’라고 인간이 안심 놓고 정리하는 것을 하나님 쪽에서는 이걸 거부하시는 거예요.
이걸 거부한다는 말은, 인간들이 알아서, 성경을 잘 정리해서, 신학으로 잘 정립해서 구원받는 길은 하나님께서 일체 인정해준 적이 없다. 그럼 뭐냐? 하나님은 하나님 방법대로 구원하는 것이지, 정리해서 그 지식 확보한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헷갈리게 만드는 겁니다.
한 분이라고 하면서, 요한복음에서 분명히 ‘아버지와 내가 하나’라고 이야기 하면서, 실제로 활동하는 것은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이 활동하니까, 이게 3이야, 1이야? 헷갈리게 하는 거예요. 헷갈리게 하는 이유는 인간은 땅에 살고 있고, 하나님은 어디에 살고 있고? 하늘에 계시고. 그러니까 하늘의 생각과 땅의 생각이 같아야 돼요, 달라야 돼요? 마.땅.히. 달라야 되죠.
“너희는 땅에 속하였으니 땅의 말만 하고, 나는 하늘에 속했으니 하늘의 말만 한다.“ 요한복음 3장, 5장에 나오는 말씀 아닙니까? 마땅히 그것은 달라야 되지요. 그게 달라야 된다고 받아들이면 될 걸, ‘알아채야 되겠습니다.’ 이게 무슨 고집이에요? ‘신학적으로 잘 조립해서 알아채야겠습니다.’ 알아채겠다는 의도가 뭡니까? 요 지식 확보해서 지가 천당 갈라고 하는 수작이잖아요. 그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습니다.
지식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선물로 갖다 주신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지, 인간이 신학공부하고 연구해서 구원되는 사람은 제가 장담합니다. 단 한 사람도 없어요.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신학에 대해서 도사입니다. 그러니 신학 연구해서 구원받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 신학을 왜 하느냐? ‘아, 이런 신학으로 구원되는 게 아니구나.’라는 것을 후차적으로 확인하기 위해서 신학 하는 거고, 성경도 공부하는 겁니다.
답변이 됐지요? 아, 우리가 어느 지점에서 나의 자아가 갑자기 돌출되는지, 내가 성경을 보면서 어디에서 돌출되는가를 우리가 스스로 접할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되는 거죠. ‘나는 하나’라 했는데, 보니까 하나가 아니에요.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다.” ‘하나’ 개념을 우리가 어떻게 파악해야 됩니까?
분명히 아버지는 아버지고, 아들은 아들인데, 하나님은 단정해요.”하나다!“ ”두 분이잖아요?“ ”내가 하나라고 하면 하나인 줄 알아. 끽 소리 하지 말고. 그러니까 나는 너희들의 단어를 안 받는 거야. 너희의 개념, 문자를 의미 있게 안 받는 거야.“ 의미 있게 안 받는 겁니다.
녹취:정대은
강남2025121a사도행전7장51절(죽음 속의 생명)-이 근호 목사
그러면 이처럼 삼위일체조차도 이렇게 인간의 이성이 담겨있는 언어로 이렇게 온전하게 삼위일체란 이름으로 해도 하나님께서 그걸 인정하지 않습니다. 삼위일체를 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일체 인간은 안 받습니다. 인간은 받지 않아요. 인간이 신학적으로 증명해버리면 그건 인간들은 뭘로 보느냐 하면 의미 있는 걸로 보거든요. 이게 대표적인 게 삼위일체입니다. 기존 교회에서 삼위일체를 중요시여기는 것은 삼위일체 설명 못하면 이단이고 제대로 설명하면 정통이고 기존 교회에서 이걸 이야기한다니까요.
그러면 기존 교회가 문제가 있는거죠. 그러면 성도는 어떻게 살면 되는가 간단해요. 의미 있는 것을 무의미로 전환되는 것을, 이게 중요해요. 내가 의미 없다는 것을 만끽하면 되는 거에요. 섭섭하게 여기지 말고 짜증내지 말고 난 뭐야 이러지 말고 내가 무의미로 산산조각나게 하시는 그 세상속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을 만끽, 만끽이란 것은 뭐냐? 즐겁다는 센티멘탈이 포함되어 있어요. 감정이 포함되어있다고요. “아 나 기분 되게 좋아.” “왜?” “내가 의미가 없어.”
무의미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 의미가 없는데 거기에 속박될 이유가 없잖아요. 의미가 없는데. 지금 오늘 우리가 해야 될게 뭐냐? 사도행전 7장 전체를 다합니다. 사도행전 7장 전체 내용이 뭐냐? 스데반 집사의 설교에요. 스데반 집사의 설교니까 여기에 나오는 단어를, 우리는 단어만 보고 있잖아요. 스데반 집사는 이걸 하나의 끈으로, 목걸이 끈 있죠. 끈으로 이걸 구슬을 꿰듯이 꿰어버려요. 꿰고 그 줄을 잡아당겨 보입니다. 보이면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역사 속에서 자기 조상들을 해석, 설명한 게 있잖아요. 이스라엘 역사가 그거 했잖아요. 우리 조상들은 이렇고 이렇게 해왔다 이 말이죠. 그 설명한 것이 그들은 설명하면서 인간은 자기의 조상을 설명하면서 의미, 결국은 설명과 해석이 현재 자기 이스라엘에 또는 유다 나라에 의미로 주어졌잖아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지금 스데반 집사는 뭐냐하면 구약에 있는 설명과 해석이 의미 있는 것으로 자처하면서 벌어진 사건이 뭐냐하면, 예수님을 십자가 죽게 될 사건이 일어난 거에요 사건이.
그러면 스데반 집사님은 성령을 받았잖아요. 성령이라는 것은 어느 사건에서 성령이 오죠? 어떤 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면 성령이 안 오게 되어있어요. 무슨 사건입니까? 십자가 사건이잖아요. 십자가 사건이 성령을 통해서 반복이 되어버려요. 반복이 되어버리면 모든 의미 있는 것이 뭐로 바뀝니까? 무의미로 바뀌겠지요. 무의미한 것을 스데반 집사는 그걸 줄로 쫙 꿰어버리는 거에요. 쫙 이렇게 하나의 목걸이로 만든다 이 말이죠. 그러면 여러분한테 물어봅시다. 그렇게 목걸이를 만들어 구약성경에서 새로운 이스라엘 말고 설명과 해석을 무의미의 선에서 이렇게 목걸이를 만들었을 때 거기에 만들었던 스데반 집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도행전 7장 마지막에 스데반이 어떻게 끝납니까? 스데반 집사가 어떻게 되죠? 죽죠. 죽어요.
그러면 이건 뭐냐? 스데반 집사를 반대하는 인간들은 살려고 성경 말씀을 의미 있게 해석해 왔다는 그러한 반칙을 끄집어낼 수 있었던 거에요. 성경을 보면서 내가 왜 죽어야 되는가를 봐야 될 텐데 '어떻게 하면 내가 살지'라는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성경 해석 전체가 나한테 도착할때 의미 있게 도착하는 거에요. 그러나 이미 우리는 죽는 것이 확정 됐습니까 안 됐습니까, 권사님? 확정됐죠? 주님이 우리 인간을 죽이려고 확정됐으면 모든 것은 뭐냐? 왜 죽어야 되는가 만이 의미 있고 죽어야 된다는 의미를 위해서 우리는 여러 가지 지금 죽기전에 여러 가지 사건을 맞닥뜨리는거에요. 그 맞닥드릴 때, 그 줄이 미리 죽음과 이미 확정된 것과 연결시켜버리면 이 의미를 하나님께서 맞닥드리는 이유는 빨리 이 의미를 뭐로 바꿔라? 무의미로 바꿔라는 차원에서 우리에게 사건이 주어지는거에요 사건이. 스데반 집사가 뭐 일부러 죽으려고 한게 아니고 성령으로 하다보니까 결국 결과적으로 스데반 집사에게 죽음이 온 거에요.
그런 실제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에 예가 하나가 뭐냐 하면 장례식장에서 일어나는 일. 반드시 일어나는 일이 뭐냐? 장례식장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살아있는 사람. 또 한 사람은 관 속에 이미 죽은 사람. 두 가지 조건이 있어야 장례식이 성립돼요. 죽은 사람 없으면 장례식 일어나지 않죠. 죽은사람이 있고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그 죽은 사람을 섭섭하게 여겨서 애통하는 살아있는 사람이 돼야 이게 조가 맞춰져야 장례식이 성립되잖아요. 그렇죠? 그러면 한번 생각해봅시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보냅니까 아니면 죽은 사람이 살아있는 자들을 남겨두는 겁니까? 관점이? 발상이 어느쪽입니까? 여러분 죽은 사람이 살아있는 사람보고 "나 먼저 간다. 많이 미안해. 너희들은 내가 죽기 위해서 대기 되어있던 장소를 아직도 떠나지 못하고 있구나. 나 먼저간다. 빠이 빠이야. 이제는 바이바이~ 나 먼저 간다. 니는 고생 많이해." 제대죠. 제대. 더 정확한 말은 뭐냐 하면 출소. "나 이제 출소한다. 아이고 나 먼저 가서 미안해. 나 먼저 간다."
어떻게 해요? 이게 죽은자의 입장에서 뭐냐하면 지옥 대합실이에요. 지옥대합실. 터미널. 지옥가능 지옥 터미널의 대합실에 그들은 아직도 웅성웅성하면서 아직도 여기서 남아있고 자기는 뭐냐? 비겁하게 거기서 빠져나온거에요 이제. 빠져나온거에요. 근데 울기는 누가 웁니까? 죽은 자가 울어야 되는데 산자가 "아이고, 더 살 수 있는데 이거 링거 맞고 호스 꼽고 하면 되는데 더 살 수 있는데" 이래요. 제가 울산에서 차 태워주는 그 권사님. 이미선 권사님이 이런 표현을 해가지고 참 이 적절한 표현이라 했는데, 그 표현을 제가 잊을 수 없어서 메모 해놨어요. 그분이 불쑥불쑥 내미는 그 표현이요 정말 멋진 표현들을 해요. 요양 병원에가면 사람들 이렇게 누워가지고 막 오래살려고 기계 같은 것 꼽잖아요. 그걸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이렇게 표현했어요. "채소“
내혼자만 웃나 지금. 지금 그 바짝 마른 몸을 뭐로 표현했냐하면 채소. 구체적으로 할까요? "오이, 말라비틀어진 오이, 안그러면 말라비틀어진 모과" 차안에 모과놔두고 모과 그대로 썩어서 바짝 말라서 그걸 기계로 둘러쳤다고요. 강제로 살아보려고. 권사님 자기가 친구 집가니까 그 모습이 보니까 그 모습이 도대체 참을 수 없어서 기계로 둘둘 말은 기계로 둘둘 말은 채소같다고 이야기했어요. 제가 근래 들었던 적절한 표현, 아주 감동적인 표현이었습니다. 채소에 뿅 갔어요. 오이.
기계 채소가운데 어디에도 인격성 인간성 존엄성 하나도 없습니다. 의미 없어요. 그런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 중에서 "아 나는 그래도 살아있는 쪽 할래." 이렇게 하잖아요. 이거는 반칙입니다. 왜 반칙이냐 하면 이 살아있는 자는 지금 중간 과정속에 있어요. 지금 멈추지 못하고 뭔가 컨베이어벨트에 실려가고 있는입장인데 이 죽은 자는 뭡니까? 도착했어요. 이쪽은 거북이, 이쪽은 토끼. 토끼가 뭘 알아요. 움직이는 선반에 그냥 가고 있잖아요. 가고있다고요. 쿠팡? 쿠팡 물류센터. 그냥 가고있는거고, 이거는 택배, 하나님이 택배를 받아버린거에요. 어느쪽이 똑똑한사람입니까? 죽은사람이 똑똑하죠.
이미 도착할데를 도착했으니까. 거북이가 가니까 산 위에 가서 깃발 흔들었다니까 "나 다왔다"는 거에요. 다왔다. 지옥대합실 이게 이런 관점에서 스데반집사는 설교하고 죽었다가 우리눈에 보이기는 땅에 있는 인간에게 보이지만 이미 성령받았을 때 그는 죽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이미 죽었어요. 죽었기 때문에 왜 살아있는 인간이 내뱉는 모든 것이 아무 의미없는것인지를 의미없는거로 확정되었는지를 스데반집사님은 구약을 가지고 다시한번 소개하고 설명하고 해석하는 그 대목이 오늘 우리가 보려는 사도행전 7장입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사도행전 7장 스데반집사의 설교 들어가기전에 몇가지 자꾸 전제적으로 예를 들어야 돼요. 두 사람이 길에서 만났습니다. 왜 만났는데? 이쪽이 사람을 잘못보고 "아, 너."이렇게했어요. 그러니까 돌아보면서 "당신 나 알아?" 했어요. 이사람이 "가만히 보니까 내가 착각했네요. 죄송합니다."하고 갔어요. 자 이 두 사람 대화에서 뭐냐하면 나 너 안다고 되어있죠. 나 너 안다. 너는 나 안다 했는데 "진짜 알아요? 당신이 날 알아요?" 했어요. 그럼 이 두사람의 대화는 주인공이 뭡니까? '나'와 '너'죠. 아까 그 강의하기전에 우리가 쉬면서 한 이야기가 있어요. 인간관계에서 제일 상대방을 독려한다 또는 격려한다하는 그 멘트가 뭐라고 했습니까? 당신은 소중한 사람이다. 이거는 긍정적인 표현이고 긍정적인 표현보다 강조하는 표현이 뭡니까? 이렇게 돼있어요. "나 너 없이는 못살아." 그게 돈 보다도 상대방이 살 수 있는 존재의 이유를 준다했죠? 여기서 나하고 너 나오죠. 그렇죠? 그러면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너 나 알아?" 천국은 알아요? 천국 압니까? 지옥 알아요? 왜 이러한 천국 지옥 개념이 왜 일상에서는 왜 이것이 말이 안떠오르고 이것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가 뭐에요? 무엇에 막혀있습니까? '나', '너' 여기다가 막혀있는거에요. 의미없는데 나도 의미없고 너도 의미없는데 의미없는 것이 마치 의미 있는것처럼 그렇게 착각을 해서 "당신 나 알아요?" 이렇게 이야기한다고요. 또 하나의 예를들면 이렇습니다. "엄마, 양말어디있어?" 엄마가 말하길, "둘째 서랍 안에 있어." 일상의 대화죠. "엄마 양말어디있어?" 어디있다고 합니까? 서랍안에 있죠. 그러면 영생은, "엄마 그러면 양말은 서랍에 있는데 영생은 어디있어." 이 말을 지금 양말 이야기 꺼내다가 "엄마 그런데 잠깐만, 저스트 모먼트. 영생은 어디있어?" "영생? 그것 예수안에 있지." 이렇게 대화가 됩니까 평소에?
"쓸데없는 소리하고있네. 빨리 양말 신고 학교나 가라." 뭔가 우리는 본의아니게 자꾸 나라는 존재가 정말 하나님이 하신일을 자꾸 막는 이유가 뭐냐하면 하나님의 일만 의미있다는 것이 스데반 집사님이에요. 성령받은 집사님. 그런데 우리는 습관상 내가 중요해요 내가 의미있어요. 내가 구원받는게 의미있고 내가 지옥 안가는게 의미있고 하여튼 간에 주인공은 나 이어야 한다는 그 고집있잖아요. 그리고 나는 죽으면 안되고 나는 살아야 된다는 나의 이 본능, 본능이 우리의 문제거리가 됩니다. 그래서 이 본능에 대해서 이야기 한 사람이 누구냐하면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가 무엇을 이야기했느냐 하면 죽음본능을 이야기했어요. 죽음 본능하면서 리비도하는 생존 본능과 인간에게는 두종류가 있다고 했어요. 두종류가 있는데 죽음본능은 이거는 잠재되어있다가 생존본능이 잘 안될 때 잠재 돼있는 죽음본능이 타인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난다. 공격. 왜? 나는 죽기싫기 때문에 죽음 본능이 내 생존보다 더 강하게 남아있게되면 나는 살고싶거든요. 에로스. 내가 살고싶은, 또는 리비도, 에로스 나는 살고싶은데 내 안에 행여나 죽을까봐 염려하는 것이 내 본성으로 자리잡았다. 본성으로. 이것은 뭐 통제가 안돼요. 말릴수가 없어요. "아이고 무서워라. 아이고 죽으면 안돼." 이게 본성이 있으니까 본성을 제거 안하면 생존 본능이 피해를 입으니까 이 본능을 "쓰레기통에 갖다 버려야돼." 쓰레기 통에 갖다 버리는 것이 뭐냐하면 타인에 대한 공격 그리고 욕설, 미움 또는 증오. 다른말로 쉽게말하면 욕설, 미움 증오 "니 죽어라." 이게 다 뭐냐하면 "나만 좀 살자." 이거에요. 나 좀 숨좀 쉬고 살자.
이래서 나온다는거에요.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자가. 그렇게 하는겁니다. 그러니까 폭력이니까 이게 뭡니까? 때리는거죠. 때리든지 아니면 화를 내든지 아니면 사람을 못때리면 그다음에 화장지를 던진다든지 앞에 눈에 보이는대로 드라마 보게되면 그 깡패 두목이 마동석한테 당해가지고 잘 안되면 앞에있는 음식있잖아요. 오른쪽에서 이쪽으로 쏵 밀어버리죠. 그런 대목 본 적 있죠. 한다든지 아침드라마보면 김치싸대기를 철썩 하면서 이렇게 "니같은 며느리 때문에 우리집안에 되는게 없어." 친다든지. 이게 뭐냐하면 니가 어떻게되든 나는 모르겠는데 나좀 숨좀 쉬고 살자. 프로이트가 이렇게 묘사를 했습니다.
프로이트가 이렇게 했을 때 죽음 본능을 할 때 다른사람들 이걸 반대했어요. 이건 죽음본능이아니고 죽음 충동이라고 이야기했어요. 죽음 충동. 본능은 잠재돼있기 때문에 못고치는데 충동은 내가 감잡을수있기 때문에 폭력성을 다른쪽으로 돌리면된다는거에요. 다른쪽으로 돌리면 된다. 예를 들어서 치매 환자에게 공격본능을 어디로 돌리느냐 하면 화투를 친다든지 색깔칠하기 한다든지 해서 다른데로 돌리는거에요. 그 다른데로 돌리는 그 사람을 치료한다는 말입니까 남한테 피해를 안준다는 말입니까? 무슨 뜻이에요?
남에게 피해를 안주는거죠. 이게 바로 이스라엘의 구약해석이었어요. 이스라엘 구약해석이에요. 우리 이스라엘만 구원받으면 된다는거에요. 이스라엘만. 이스라엘만 구원받으면 되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뭘 해야 된다? "내가 저지르고싶은 그 폭력성을 하나님이 내 대신 이방민족에게 폭력을 행해주신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을 고대하고 소망하고 기대하고 하나님께 헌신하겠습니다." 이런 조건하에 하나님을 섬긴거에요. 오늘날 교회 교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를 우리 선배격인 유대인들이 다 해오고 있었어요.
정리하면 "내가 편하게 살고 내가 폭력없는 착한 사람이란 것을 의미 있음 나는 이렇게 존재하는 것이 그만큼 당연한 권리야" 라는 것을 증명해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손좀 써달라는거에요. 내손에 피묻히기 전에 하나님 손에 피묻혀가지고 나를 성질내게 만드는 것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중간중간에 개입해서 좀 이렇게 나한테 성질안나도록 해달라는거에요. 어머님 모시는데 동생이와서 월 500 줄게 해서 기분좋게 동생한테 돈받으면서 열심히 봉사하는 이런거.
뭔가 내가 화가 났는데 주께서는 다른걸로 보상해주는거. "아이고 니가 참 고생이 많다. 그러나 내가 다른걸로 보상해주면 니가 이렇게 힘들어도 니는 이제 보람있게 이 일 할 수 있겠지?"라고 그렇게 보상을 해줄때에는 얼추 내 마음속에 죽음본능과 생존본능이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균형상태에 들어가게 되지 않겠는가. 그러면 이게 균형상태에 들어가게되면 우리는 뭐가 돼요? 행복하죠. 우리는 행복할 거에요. 왜냐하면 자기한테 의미가 있으니까. 행복은 뭐냐? 내 존재자체가 이만큼 가치가 있다는 것을 내가 인정할 때 그게이제 행복. 남들이 인정해주고 내가 인정할 때 행복이잖아요. 그러면 스데반집사의 관점에서 설교를 이렇게 하는 것은 결국 딱 한가지에요. 이스라엘 입장에서. "너희가 성령을 알아?"에요.
성령은 하나님이에요 인간이에요? 하나님이죠. 그럼 너희가 성령을 알아 하는 말 앞에서는 뭐냐하면 "인간에 대해서 신경쓰지마라." 이거하고 같은말이에요. 그래서 성령을 받은 입장에서 스데반 집사는 설교를 통해서 아브라함 그다음에 이삭 야곱 그다음에 요셉 그다음에 모세 다윗 이까지. 이것가지고 쭉 설교를 해요. 성령을 받은 관점에서 이사람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설명해주는 것이 스데반집사의 설교입니다. 여러분들이 한번 스데반집사 읽어봤죠. 보면서 뭔가 스데반집사 나름대로의 구속사같은 느낌은 드는데 막상 읽어보게되면요 이 대목에서 이 대목으로 왜 이렇게 이어지는지를 감을 잡을 수가 없어요. 스데반 집사 사도행전을 보게되면.
아브라함 이야기하고 그다음에 야곱이야기하고 요셉이야기할 때 왜 이 이야기를 길게 끌었는지를 이유를 몰라요. 모세 이야기때 모세 뭐 애놓고 죽을 뻔했는데 살았다. 그 이야기가 왜 들어가야 되는지. 그게 왜 꼭 필요한지. 스데반 집사의 설교를 오늘 7장을 쭉 보게되면서 아니 도대체 이 성령받은 집사님이 무슨 이야기하려고 이렇게 산만하기 짝이없는 식으로 이 이야기를 쭉 했느냐 이말이죠. 나같으면 이건 이렇게 줄이고 이건 빼고 이렇게 해야될건데. 여기 아브라함 나오죠 이삭나오죠 야곱나오고 요셉나오고 그다음에 모세나오고 그다음에 짧게 다윗나오고 그다음엔 없어요. 그럼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은 이렇게 표현되어있어요. 이스라엘은 뭐라고 돼있냐하면 이렇게 돼있어요. 43절. "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렇게 돼있어요.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한게 아주 이렇게 압축을 해놨어요.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 레판은 토성인데 토성의 별. 피조물인 그것을 형상화해서 만든게 있어요.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에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 갑자기 광야 이야기하다가 바벨론 바깥으로 튀어나갔어요. 중간이 하나도 없어요. 중간에 하나도 없고 그다음에 42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집이여 사십 년을 광야에서 너희가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없다는거에요. 그럼 희생 안드리고 뭐했느냐? 우상섬겼다는겁니다. 우상을 섬긴 이유도 안나타나고요. 마치 우상섬기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마땅한것처럼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면 인간으로서 우상섬기는 것이 마땅하다면 그럼 앞에나오는 아브라함은 뭐고 야곱은뭐고 이삭은뭐고 요셉은 뭐고 모세 그사람들은 인간 아닙니까? 인간이잖아요.
왜 인간인 이스라엘은 마땅히 우상을 섬기는데 그들은 우상을 안섬기느냐. 그건 이유가 이렇습니다. 오늘 강의 첫 번째나오는 중요한거에요. '하나님은 산 사람과 만나지 않습니다.' 이 원리 때문에. 산사람과 만나지 않습니다. 인터페이스 하는 것. 컴퓨터하고 컴퓨터 연결고리를 인터페이스라고 해요. 하나님의 인터페이스는 반드시 죽은사람 되어야 돼요. 반드시 죽은사람 되어야 돼요. 사람이 죽었으니까 사람의 기능은 있다 없다? 없어요. 사람의 기능은 없어요. 그게 51절에 나옵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그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뭡니까? 너희가 항상 무엇을 거스려? 성령을 거스려. 구약에는 성령이 없습니다. 구약에는 성신이 있지 성령은 없거든요.
성령이라하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주어진게 성령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스데반 집사는 인간입장에서는 반칙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과정에 있었던 일, 이건 이렇게 이렇게 설명해야될텐데 이미 도착지점에 있는 상황을 가지고 거꾸로 그들의 구약을 해석을 해버리면서 인간이라 하는 것은 결국 한계가 드러났다.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받고 뭐 어떻게 아브라함의 조상이다 이삭의 조상이다 해도 결국 그들의 모든 짓은 무슨 짓 이어야 해요? '성령을 거스르는 짓 이어야 한다'로 결론이 나버리는거에요. 일방적으로 결론을 내려버리는 거에요. 인간이 하는 모든 "엄마 양말어디있어?" "서랍에 있다." 이게 성령의 일입니까? 관심사가 양말이잖아요. "그러면 양말 내가 왜 신어야 되는데?" "양말 신어야 발이 안 시려." "발이 왜 안 시려야 되는데?" "발이 아파." "왜 안 아파야 되는데?" "그러면 아프면 내가 죽어." "죽어라 그래." 죽어라 하면 죽으면 안돼가 아니라 죽어야 누굴 만나요? 죽어야. 하나님이 만나는 그 인터페이스. 하나님이 만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에요. 진작에 죽은사람이에요.
산 사람을 죽은 사람 되게 하고 죽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주십니다. 산 사람을 죽은 사람되게하는데 이게 성령이 관여하고 죽은 사람을 하나님 만나는데 누가 관여한다? 성령이 관여한다. 이게 지금 스데반 집사의 신학이에요. 하나의 믿음이에요. 복음입니다. 가만히 있는 사람을 산 사람을 죽은 사람으로 만들어요. 왜? 살아있다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의 무의미를 가리기 때문에 의미 있는 것을 죽은 사람, 무의미로 만드는거에요. 활동은 주님이 하지 사람이 하는게 아닙니다. 그래서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건 크게 쓸게요. "이 세상에는 인간이 필요 없습니다." 이 세상은 인간이 필요 없는 세상을 만들었어요.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지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은 이 땅에선 방해만 될 뿐이에요. 하나님이 필요한 것은 형상이에요.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인간은 없어요. 인간은 없고 뭐가 있었습니까? 흙이 있었잖아요. 흙과 형상을 하나님께서 호흡을 해서 인간을 만든거에요. 인간 되었다고 까불지 말고 어디서 나왔느냐를 돌아볼줄 알아야 된다는거죠. 인간은 어디서 나왔어요? 인간은 인간이 없는데서 인간이 나왔어요.
인간이 없는데서 인간을 만들었다고요. 인간은 일시적으로 있었죠. 어디까지? 선악과 따먹기 전까지 인간이었어요. 그다음에 인간이 없어요. 흙이니 어디로 돌아가라? 흙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자꾸 그것을 인간입장에서 "아깝다. 좀 부탁합니다. 봐주지." 이런생각하면 그건 종교가 돼요. 그런거 하면 안돼요. 그냥 하나님 이 세상 자체가 인간 없이 만들었어요. 그냥 인간없이 누가 만들었다? 누가 만들었어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까 말씀이 계신다 이 자체가 뭐가있다? 말씀이 계시니 모든 생명은 말씀이 계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만들어진게 이 세상입니다. 그중 인간도 포함돼 있고요.
말씀이 등장하기 위한 재료? 전초기지, 전제 더 좋은말은 바탕. 이 세상은 하나의 바탕인데 바탕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는 그 바탕을 하나님께서는 무대 세트장을 만드신거에요. 이걸 한번 체계화 시켜봅시다. '죽음의 공간화.' 이거는 같은 말이 '없음의 공간화'. 하나님은 창조를 없는데서 있게했으니까 출발은 뭐냐? 원판은 뭐냐? 없음이에요. 없다. 이건 이해되죠. 없음인데 없으면서 인간이 있었잖아요. 잠시 인간이 있었다. '있음의 공간'에서 있음이 뭐로 바뀝니까? 있음이 없음으로 바뀌는게 아니고 '죽음'으로 바뀌죠. 죽음으로. 아담이 그 선악과를 따먹고 정녕 뭡니까? 죽으리라. 죽음의 공간되잖아요. 죽음의 공간되고 죽음의 공간화에서 뭐가나오느냐? 생명의 공간화. 이것이 바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꿰는 줄이에요.
그러면 인간은 들러리에요. 중간에 나타났다가 지 할 일 하고 사라져야 돼요. 어떤 할 일? "있네? 오. 죽었네." 이 역할. 이 역할을 앞당겨서 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과 그리고 뭡니까? 모세 다윗 이렇게 스데반집사의 설교에 사람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사람이 등장한다는 말은 인간이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없음의 공간화, 죽음의 공간화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들은 채택된 겁니다. 이걸가지고 사도행전 7장에선 뭐냐? 선지자. 나와같은 선지자. 뒤에 오신, 나와같은 선지자를 예수님으로 소개하거든요. 모세다 예언하기를 나와같은선지자. 그럼 모세는 어디에 속합니까? 선지자에 속하죠. 나와같은 선지자 예수님. 그럼 예수님의 영을 받은 자는 스데반 집사. 그럼 스데반집사가 설교하고 난 뒤에 어디로 갑니까? 마지막에 돌에맞아 죽죠. 그럼 이 말은 뭐냐하면 인간에게는 없음에서 있음을 경유하지않은사람은 뭐가없느냐 하면 죽음 자체가 없어요. 죽음 자체가 있어줘야 그 안에서 생명이 생겨요. 생명은 죽음속에 들어가지 아니하면 생명이 없어요.
근데 인간은 죽는게 아니고 없어져요. 의미있는 죽음에 끼어들지못하고 그냥 쓰레기로 버려진 죽음이죠. 그거는 영원한죽음 지옥으로 가는겁니다. 죽음의 공간화속에서 하나님께서 선지자 찾아오심으로써 하나님과 만나는 죽은자가 아니면 못만난다는 의미있는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의미있는 죽음속에서 그들은 영생을 얻게 되는겁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엘리야 모세 또 누구하고 이야기했습니까? 예수님하고 이야기했죠. 세 분이 이야기 했다는 것은 둘다 공통된 하나님 보시기에 공통된 운명을 공유하게 된 그러한 집단이죠 일종의. 사이. 여기에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이 끼어들어가야돼요.
그래서 그들은 성령받고 뭐해야됩니까? 늙어죽는게아니고 성령받고 죽는 죽음이 돼야 돼요. 그게 바로 십자가 죽음을 안에서 활동하게 된다. 십자가 안에서, 양말은 어디 있다고요? 서랍에 있죠. 영생은 어디 안에 있습니까? 십자가 안에 영생이 있죠. 의미있는 죽음 안에 생명이 있지 의미있는 죽음 바깥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노골적으로 물어볼게요 여기서. 천국이 뭐죠? 천국이 어떤 상태가 천국이죠? 어떤 상태가 천국입니까? "영생이 뭐냐"하고 같은 질문이에요. 천국 간다면서요. 그럼 어떤 상태가 천국가는겁니까? 신앙생활 어떻게 합니까 하면 정답은 이래요. "신앙생활은 복음을 위해서 사는게 신앙생활입니다." 많이 들어봤죠. 성도는 어떻게 삽니까? 복음을 위하여 산다. 복음이 뭔데요? 고린도후서에선 이게 십자가죠. 이번에 수련회 고린도후서 하잖아요.
4장 부분, 5장부분 지금 기대가 돼요. 고린도후서 4장 5장은요 죽음이야기 밖에 안해요. 죽음이야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것을 내몸에 짊어짐은 나는 내 안에서 뭐가 나타난다? 말 참 사도바울이 잘해요. 주님의 죽으심이 생명으로 나타난다했어요. 주님의 죽으심이 생명으로 나타난다. 그러면 내 죽음은 쓰레기 같은 죽음이라 안쳐준다. 쳐주질 안 해요. 내가 늙어죽든 쳐주질 않아요. 그것은 흙이니까. 흙이 죽는다고 애도할 필요는 없어요. 지금 곧 돌아가실 분이 있으면 섭섭할 이야기지만 흙이 죽는 것은 흙으로 환원되기 때문에 애도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이말이죠. 성경에서 진짜 애도하는 것은 성도의 죽는 것은 귀하게 본다. 요한계시록에. 성도가 죽는 것은 왜 귀하게 보는가? 그 안에 성도 말고 흙 요소 말고 다른 성령이라는 다른 요소가 있어요. 여러분들도 복음을 말하는 같은 집사님이나 권사님이나 성도님을 귀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함부로 대하면 안돼요. 그분 혼자 있는게 아니에요. "쥐박아뿌까." 하면 주님께서 "날 칠려고? 비켜봐, 저게 날 치겠대"
사람이 소중한 것. 내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 우리를 자유케합니다. 아까 뭐라했습니까? 내가 무의미한 것을 만끽하라고 했죠. 왜 내가 무의미한 것을 만끽하느냐 하면, 진리는 보석같은것이기 때문에 잠언서에 보면 많이 나와요. 지혜는 뭐 같다? 보석 같다. 이거는 이 보석을 설명하면서 온 천하보다 더 귀한 보석이 금은보다 더 귀한 보석이 바로 지혜라고 했어요. 지혜는 보석인데 그 보석은 금은보화보다 더 귀한 보석이 지혜라는 거에요. 세상은 지혜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따라서 소중한 것이 이미 확정이 된 이상은 그 앞에 얼쩡거리는 나는 소중해요 소중 안해요? 나는 그 소중한 것 비하면 소중한 것도 아니니까 나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비로소 나는 그렇게 평생토록 괴롭히는 나의 이 부담이라는 것, 생의 부담이 이게 증발되고 없는거죠. 왜? 그래야 소중한 것만 드러나고 그 앞에 나라는 것은 개만도 못한 나가 얼쩡거릴 필요가 없거든요. "니 뭐야?" "나 무의미해.“
"니 이름 뭐야?" "나 최 무의미." 박 무의미. 아무 의미없어요. "니 요번에 애가 공부 잘해서 국제학교 들어갔다며." "의미 없어." "의사 됐다면서." "의미없어." "그 어렵다는 불수능 영어 그거 만점했다며. 학교에 5명 있는데 그중 한명이 너희 아이라면서." "의미 없어." 거기다 의미를 안주게된 그것은 왜? "자식 공부하는게 싫어?" "아니 더 소중한게 있어." 그게 진리입니다. 그게 지혜고. 그 지혜는 소중한 것은 확정된거에요. 확정돼서 너무 소중해서 나에게 찾아오니까 나는 무의미라도 좋소. 이상의 시에보면 있잖아요. 한 아이가 무섭다고 그래요. 해놓곤 뒤에 뭐 좋소 있잖아요. 나는 무의미라도 좋소. 상관없어. 이런뜻이에요.
스데반 집사. 아이고 설교 그렇게 해서 나중에 밉보일건데. "나는 죽어도 좋소." 그래서 이 사도행전 7장을 보세요. 제일 어려운 대목이 있다면 뭐냐하면, 이 설교 듣고 왜 그들이 죽일려고했는지 그 이유를 찾아내야 돼요. 도대체 스데반 집사가 설교를 뭐 어떻게 했기에 이렇게 죽였는가? 이것 찾아내기가 굉장히 어려워요. 우리가 이렇게 어떤사람이 이 설교 하면 막 우리가 설교하는사람 때려 죽이려고합니까? 안그러죠. 그래 잘났어요. 하고 피하면 그만이잖아요. 이게 죽일려고 했다고요. 그 이유는 51절에 나옵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할 때 여기 할례라는 말이 나오죠. 할례는 뭡니까? 할례는 하나님 앞에 나를 소중히 여기기 위해서 내안에 친히 실시하는 의식. 할례. 할례 없으면 나는 지옥이고 할례있으면 천국이다. 창세기 17장에 말씀에 근거해서. 누구든지 아브라함 자손이 되려면 뭘 받아야 돼요? 할례. 그 할례가 없다는 것은 이거는 나의 가치를 전면적으로, 근원적으로 모독하는거죠.
그럼 아까 공부한것처럼 의하면 인간속에는 생존 본능이 있다. 생존 본능에 뭔가 건드리면 바깥에 뭐가나온다? 폭력 본능으로 나온다. 그럼 생존본능할 때 생존하기 유리한 것은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율법을 동원시키게 돼요. 할례를 동원시킨거에요. 할례를 동원시켰는데 너희가 마음에 할례를 안받았다고 스데반집사가 하는 순간 "너 뭐야" 하고 "너 뭐야? 집에가자." 이렇면 될텐데 너 뭐야 하면서 돌들고 스데반집사를 죽였습니다. 스데반 집사를 죽였어요. 죽일 때 그 스데반집사가 혼자있었습니까 누구와 함께있었습니까? 그건 여러분들이 답변을 해 줘야 돼요. 스데반 집사가 죽을 때 혼자 있었습니까? 누가 함께 있었습니까? 55절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충만하다는 말은 자기는 의미 없잖아요. 본인은 의미 없어요. 의미 없게 만드신 분이 자기 옆에 있잖아요.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스데반 집사의 목숨이 소중합니까? 예수님이 옆에 계신게 소중해요? 주님이 옆에 계신게 소중하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죽고 사는 것은 이건 의미가 없는거에요. 살아도 의미 없고 죽어도 의미 없고. 중요한 것은 의미 있는 소중한 분이 나와 함께 있다는 이 점이 이거는 내가 이미 확정되어있기 때문에 내가 애써 감출려고해도 감출 하등의 권리와 근거가 없어요 나한테는. "주님 좀 잠깐만 숨어계시고요. 아 내가 나서서 설교하겠습니다." 이게 안된다니까요. 설교해도 의미가 없어요.
복음을 알게 된 사람이 유사복음을 알고있는사람하고 대화를 할 때 대화가 나중에 결국은 분노가 폭발하는 멘트가 이거에요. "그러면 성령으로 기도하고 헌금한 것도 소용없나?" 이 질문. "그럼 찬양하는 것도 죄냐? 예배하는것도 죄냐? 복음을 공부한 것도 죄냐? 복음을 믿는 것도 죄냐?" 막 나 올 때 그 성령 받은 사람의 답변은 굉장히 단촐하죠. 말하기 싫으면 여기 녹음기 버튼 누르면 돼요. "죄다." "죄다." "죄다." 문제는 이거에요. 그 이야기할 때 기쁨, 만끽하고있느냐는거에요. 그 말을 기뻐하고 있느냐. 이론상 말고. 지식상 말고. 이게 만끽한다는 말은 지금 여러번 이야기합니다만은 이해 되시겠죠? 설명 안해도 되겠죠? 만끽. 여름에 바닷가에서 해변가에 가서 해변의 물속에 할 때 물 띡띡 이렇면 만끽이 아니잖아요. 십자가 복음 띡띡 이러면 만끽이 아니라고요. "와, 물이다" 하고 파도에 몸을 맡기고, 그때는 튜브도 해야돼요. 안그러면 큰일나요. 몸을 맡기듯이 그 십자가의 의미 있음에 자기가 무의미로 그냥 파도를 탈 때 그걸 만끽이라고 하잖아요. "삼위일체도 죄다." 할 때 지금 기쁨이 한량없어요. 만끽하고 있는거에요.
나보다도 그리고 너보다도 나보다도 우리 주님이 더 소중하다. 그게 나는 보석도 아니고 주님이 보석이다 지혜다. 이것. 이런 관점이 결국 스데반 집사로 하여금 그것도 잔인하게 돌로쳐서 죽게했습니다. 그러면 스데반 집사의 말대로 뭐냐하면 "나는 없다"가 맞는말이죠. 이 없다에 대해서 좀더 기본을 찾아보면, 처음에 생명나무 있다가 되죠. 그다음에 뭡니까? 선악과나무 있다가 되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선악과 나무가 이게 없어요. 선악과 나무 따먹고 없어져요. 없어지면서 죽음에서 없어진 죽음과 새로 나타난 죽음을 준비했는데 이 나타난 죽음은 생명나무에 있음과 연계되는 죽음으로 새롭게 나타나요. 없어진 죽음은 인간들이 쓰레기 되는 거니까 이 죽음은 아무 의미 없어요. 인간들이 장례식장에서 구경하는 것은 없어질 죽음이에요. "사람은 늙으면 죽는구나. 아 그렇구나." 아무 의미 없어요. 진짜 의미있는 죽음은 생명나무의 있음에서 난 죽음이기 때문에 생명나무 되시는 주님께서 이 땅에서 의미 있는 죽음을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만들어버렸어요.
"니 죽음 말고 니 살말고 니 피말고. 내 피 내 살을 먹어라. 내 피를 마셔라.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니라. 내 살이라."해서 진짜 죽음도 오직 의미있는 죽음도 단 하나의 의미있는 죽음으로 만들어버렸어요. 그래서 인간은 순교해도 그 죽음에 못들어갑니다. 순교의 확장이에요. 순교란 의미없이 죽는다고 순교가 아니고 자기자신을 무의미로 볼 때 그 자체가 순교안게 들어온거에요. 자기자신이 의미없는거에요. 의미없고 아까 말한것처럼 만끽하고 그것을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그런겁니다. 자 의미있는 10분 쉽시다.
강남2025121b사도행전7장51절(죽음 속의 생명)-이 근호 목사
이 세상 살면서 내가 남들보기에는 내가 어떤 사람인가라는 것은 많이 들었는데 정작 살아계신 주님이 나를 어떻게 볼까 그게 계속 모호하게 남아있어요. 지옥은 가기 싫은데 천국에 가고 싶어요. 가고 싶으면 허가를 받아야 되는데 우리 주님이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그것 중요합니다. 반드시 어떤 테스트를 통과 해야 하냐면 마태복음 7장 22절을 통과 해야 되거든요. 여러분 잘 알다시피 이 말씀이에요. 7장 22절에 보면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라고 되어있어요. 이걸 통과하려면 어떻게 통과해야돼요? "맞습니다. 저는 불법행했습니다." 이러면 "너 불법 행했어?" "네" "그러면 천국 못가." 이렇게 되는지 안그러면 "저는 불법을 행한 것이 아니고 저는 많은 권능을 행했습니다." 이렇게하면 또 행했다해서 22절에 걸려요. "니가 내이름으로 복음을 전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했나? 나 니 모른다." 그러니까 뭘 해도 불법을 해도 23절에 걸리고 뭘 열심히 해도 걸리고 농띠 부려도 걸리고. 더 나아가서 궁극적으로 주님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그 문제가 여전히 난제로서 우리에게 남아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보시는 겁니다. 우리가 속해있는 세계는 무슨 세계냐 하면 환상의 세계에요. 가짜라 이 말이죠. 가짜 세계. 가짜 세계가 자꾸 번지고 가짜 세계 밖에 없는 이유를 과학적으로 설명해 드릴게요. 지구에 있는 사람과 지구에서 느끼는 중력과 1G(기가) 가속도를 갖고 달리는 우주선 속에 비행사가 느끼는 중력이 똑같습니다. 1G는 9.8m/s2. 1초당 세컨 제곱에 9.8m. 딱 딱 할때마다 9.8m가 가속해서 주어지는거에요. 이게 1G에요. 자 이렇게 될 때 보세요. 느끼는 것은 똑같아요. 왜? 지구가 그냥 사람들이 지구에 앉아있을 때 살 때 현재 이런 환경속에 있기 때문에 그 환경을 우주선으로 옮겨왔을 뿐이거든요.
그러니까 느끼는 것은 지구에 있을때나 똑같죠? 중력이 가속도니까 똑같은거에요. 그런데 제 3자가 보면 한 사람은 어디있어요? 지구에 있고, 한 사람은 어디 있어요? 우주선 속에 있죠. 그러나 본인이 느끼기엔 똑같거든요. 근데 우주선에 있는 사람이 "나는 지금 지구에 있다." "왜?" "중력을 지구에 있을 때랑 똑같이 느끼니까 지구에 있다." 이렇게 하면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환상이라고 합니다. 환상. 사람은 본인에 대해서 안다고 생각하니까 환상이 있고 본인이 있는 이 조건이 어떤 조건하에 내가 이땅에 태어났고 살고 죽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없어요.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눈에 보이는 대로 어떻게 해요? 본인이 그렇게 자기 편한 대로 세상을 다시 설명하는거에요.
'인간은 행한다.' 아닙니다. 인간은 행하는 존재가 아니고 인간은 설명하는 존재죠. 행하는 존재가 아니고 설명하는 존재에요. 자꾸 인간은 남들에게 설명을 하려고 해요. 설명을. 이게 핑계일 수도 있고 변명일 수도 있고 남들 보면 자기 말을 끄집어내서 나는 이렇다고 이렇게 상대방에게 제시하려고 해요. 제가 상상해보는건데요.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요. 언니와 계모에 구박을 받았더래요. 샤바 샤바 아이샤바 얼마나 울었을까요. 샤바 샤바 아이샤바. 1975년에 이렇게 나온다 이 말이죠. 그게 1975. 1900이 들어가야 자연스럽지 2025년 굉장히 부자연스러워요. 나이 70넘어서요. 자 한번 생각해봅시다. 그 노래를 진짜 계모한테 구박받은 사람이 부르는 것과 줄넘기하면서 저희 엄마 저희 아버지 잘 살아있고 지금 행복에 겨워사는 애가 얼마나 울었을까요 백날 해서 줄넘기 해봐야 그건 뭡니까? 환상이죠.
그거는 환상이라고요. 그걸 설명하는 대목이 성경에 나옵니다. 누가복음 24장 25절에 나옵니다. 한번 보겠습니다. 조건. 인간이 세상을 보는 조건이 어떻게 엉터리냐를 보여주는 것. 누가복음 24장 25절에 보면 나옵니다. 거기서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중간에 끼어요. 끼면서 이렇게 이야기해요. 제자가 하는 말이 " 우리와 함께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예수님의 시체는 보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직접 예수님을 만나 본적은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살아난거에요 안살아 난거에요?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살아났습니까 안살아 났습니까? 답변해보세요. 안 살아났어요. 시체가 없어진 것 까지만 하는거에요.
지금 재판이 그거잖아요. 이게 계엄에 그쳤느냐 내란이냐 그 문제 아닙니까? 시체가 없는 것 까지는 인간이 따라잡을수가 있어요. 시체가 있다가도 없을수가 있어요.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있을수 있는데 부활했다는 것은 인간의 역사상 인간의 지혜상 부활 이것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거에요. 넘어설 때 인간은 어떻게 하느냐? 부활은 되지 않았다가 돼요. 그러면 지금 부활은 되지 않았다는 자기 이성적인 총체, 총 내린 결론은 뭡니까? 환상이 되어버려요. 인간은 평생을 환상속에서 살고 있었던거에요. 인간이 평생을 환상에 갇혀 살았다는 것을 예수님이 십자가와 부활로 주님쪽에서 증명해버린거에요. 이제는 그 주님쪽의 증명을 받아드리는 경우. 다시 말해서 성령받은 경우에만 환상이 아니고 실제의 공간 속에 사는사람이고 그걸 못받아드리는 사람은 여전히 환상 속에서 세상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부질없는 가짜 인간이 되는겁니다. 그다음에 본문 25절에 보면 주님께서 그렇게 이야기 할 때 예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25절에 "가라사대"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뭡니까? "미련하고" 그다음에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그 다음 단어 "더디 믿는 자들" 다시 말해 믿음이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없다.
정확하게 너희들 얘기할게. 너는 미련하고 너는 믿음이 없어. 이런 지적이 우리를 기쁘게 하는지 몰라. 얼마나. 얼마나 기쁘게 하는지 몰라. 누가 나한테 그런 지적을 감히. 경솔한 지적이잖아요. 니가 날 알아요? 내가 평생을 어떻게 살았는지 당신이 알기는 알아? 뭐 이렇게 나올건데 그걸 확정된 지적으로 하는거에요. 너는 믿음이 없다. 그래서 믿음이 없다고 하니까 결국 주님의 모든 약속에 의하면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고 했잖아요. 믿는 자는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잖아요. 이 공식이 어떻게 돼요? 이거는 하늘에서 이야기한 거고. 땅에서는 뭡니까? 어떤 자만 구원받습니까? 믿음이 없는 자가 구원받죠. 믿음 있는 자는 단 한 명도 구원받지 못하죠. 왜? 믿음 없다로 자기를 재해석, 자기를 설명하는 사람. 나는 미련하고 믿음이 없는 사람이란 새로운 고백을 내놓는 사람은 주님이 찾아온 사람이에요.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집에 가서 액자하나 만드세요. 믿음 없이 구원받음. 믿음으로 구원받는게 아니고 믿음 없이 구원 받는 것. 믿음 없이. 신앙생활 어떻게 하느냐 이건 질문 자체가 잘못됐죠. 어떻게하면 신앙없는 생활을 어떻게 할것인가? 나를 안 믿으면 되죠. 간단하죠. 나를 안 믿으면 돼요. 피자를 주문했다. 피자가 올 것인데, 믿지마세요. 이거는 주께서 인도해야 피자가 오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강의 준비하면서 마음속에 이 말은 꼭 하고싶었다라는 말이 있어요. 뭐냐하면 기대하는 것이 죄다. 뭐든 기대하는 것이 죄에요. 왜 기대를 해요? 내가 기대하니까 하나님이 들어줘야되지 않습니까? 이런 말도 안되는 환상, 자기 환상을 진짜라 자꾸 우기는 자들이 하는거에요. 기대하는자가 죄다. 그러면 우리가 기대 할까요 안할까요? 매일 같이 기대하는 것 빼놓고는 아무것도 안해. 매일 같이 기대해요. 매일 같이. 매일 같이 기대합니다. 빨리 김호중이 빨리 풀려나야 할텐데. 지금 김호중이 보라색 김호중 팬들은 빨리 풀려서 나오길 바라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 어떤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해서 저한테 굉장히 의미있게 다가왔어요. 뭐냐하면 중국도 월드컵에 나가게 되었다. 이런 제목이에요. '중국도 월드컵에 나가게 되었다.' 중국의 월드컵 내년 6월달 탈락한걸 다 아는 사실인데 '중국도 월드컵에 나가게 되었다.' 이런 제목의 내용을 보니까 러시아에서 탈락된 팀들만 모여서 월드컵 만든다는 거에요. 이게 오늘날 교회아닙니까? 구원 받지못한 인간이 모여 교회를 만들고 성당을 만드는거에요. 탈락월드컵. 오늘 제목을...
믿음이 얼마나 없었으면 믿음이 있다고 우기고 저희들끼리 모여서 하나님 초빙하고 있는거에요. 믿음 없으면 되는데 기어이 믿음 있음과 누구와 이렇게 엮어요? 내 자신. 이 모든 의미를 자기에게 소환시키는 거에요. 내가 안들어가면 천국도 아닌 것처럼. 내가 빠지면 천국이 아예 없는 것처럼 착각하는 거에요. "내 빠지고 천국가는 것 다 저주 받아라" 이런 식이에요. 그게 아까 무슨 본능? 죽음본능. 폭력으로 "감히 내 기대를 어긋나?" 니 기대가 죄잖아요. "기대에 어긋나? 그럼 저주나 받아라." 이런 식이에요. 그래서 이게 치매걸린 노인들을 보면 내가 인간극장 보니까 노인네들이 이게 많아요.
아까 우리 장로님이 하신 말씀. 치매 아버지를 모시니까 아버지가 형제간에 싸움을 붙여버렸다고... "얘가 막 나 때려." 이래가지고 있지도 않은 얘기를 해서 형제들이 "형님 고생합니다."하고 돈 주러 왔다가 돈봉투 다 들고가요. 아버지 구박하는데 돈줄 필요없다해서... 지금 인간들은 성령을 주지 않으면 믿음이 없어요. 믿음이 없기 때문에 뭘 만들어야됩니까? 바로 믿음을 만들어야 되겠죠. 그 만든 자들은 뭐냐? 그중에 두 제자에요. 예수님 돌아가셨다는 소리 듣고 시마이. 끝났어요. "아 한때 참 즐거웠다. 근데 이제 끝날 것은 뭐 예상 못했지만 현실을 받아들여야지" 하고 예루살렘 빠이빠이. 바이바이 이제 내려가는데 건질 자를 건지겠다고 주께서 끝까지 찾아와서 지적을 해요. "이 미련한 자야. 이 더딘 자야." 그다음에 한번 봅시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그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뭡니까? "자기에 관한" 이 빌립집사하고 똑같잖아요. 성령은. 어떻게 성경이 예수님 한분에서 다 겨냥해서 그것과 연결되어있느냐 어떻게 성경이. 왜 우리가 이렇게 행한다. 왜 그런이야기들만 쫙 깔려놓고 그걸 다 내가 뭘 행하고 뭘 믿고 하는걸 다 빼버리고 그것을 뭐로 교체했습니까? 주께서 고난받으심으로 다 그걸 대체해서 들어간 이유가 뭐냐? 미련하고 더디 믿는 니같은 것을 구원하기 위해서 주께서 우리가 할 행함의 자리에 대신 들어갔잖아요. 그러면 그렇게 구원받은 사람은 더 이상 무의미한 자기 자신을 살 이유가 없겠죠? 이걸 사자성어로 뭐냐 하면 '승자독식'입니다.
한사람이 다 먹는거에요. 모든 영광은 누가 먹는다? 우리 주님이 다 먹는 거에요. 이 기쁨을 만끽하는거에요. 이 기쁨에.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다. 이 기쁨에 만끽하는겁니다. 실컷 잔소리하시고 그다음에 저녁에 가서 떡을 잡수실때에 눈을 띄어주니까 비로소 예수님인 줄 알았다. 그 다음에 알았다 하고 같이 다니시면 되잖아요. 말씀을 풀때에 우리가 뜨겁지 아니하냐? 뜨겁지 아니하냐, 온도가 몇도인지 모르겠지만 뜨거웠어요. 뜨겁고 난 뒤에 계속 뜨거워 주면 안됩니까? 핫팩처럼. 예? 왜 가십니까? 왜 가시는 거에요. 뜨겁게 해주면 계속 뜨겁게 해주면 믿음생활 잘 할건데 왜 떠나버립니까? 떠나는 이유가 뭐죠? 주님이 죽으신 분이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이 죽으신 분이에요. 제대로 죽으신 단 한 분이기 때문에 산 사람과 만날수가 없습니다.
이게 선지자가 그래요. 예언자가. 선지자는 자기 모습을 주님께 이미 바친사람이에요. 그리고 바친사람이기 때문에 성령이 올때에는 원칙이 요한복음 8장 31절, 32절이 원칙입니다. 누가한번 읽어보세요.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내 말이 누구한테 거하면? 주 예수님의 말이 누구한테 거해야돼요? 지켜란 말입니까 말씀이 안에 들어가 삽입된다는 말입니까? 지금 누가 자유해요? 성도가 자유되는건 결과적인 문제고 지금 누가 자유하는 그 원동력 에너지원 엔진은 뭐가 들어와야 돼요? 말씀이 들어오면 말씀 자체가 이미 산자의 손에서 떠났잖아요. 예수님은 죽은자 잖아요. 죽은자가 살아서 다니시거든요. 그때 유일하게 의미있는 죽음. 그러면 그 죽은자가 우리안에 있으면 어떤 산자도 예수님께 대해선 승자독식이라니까요. 이미 게임은 끝났잖아요. 다 이뤘잖아요. 게임이 끝난분을 패배자가 "한판 더 합시다. 삼 세판" 이런 말을 할 수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그리고 그 승자독식의 가마, 또는 그릇, 또는 운반체 그게 누구냐하면 성령받은 성도잖아요. 성도. 내 안에 승자독식하시는 분이 살아계시다. "그럼 너는 뭐냐?" "나는 뭐 인간도 아니지. 소리고 나는 불신앙이고 나는 그냥 미련한자고 죄인중의 괴수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어제 월요일날 우리 다른교회 다니는 숙모님 연락 안하는데 몇십년만에 연락했어요. 그 숙모님을 만나서 이렇게 "말씀을 한번 제가 일목요연하게 성경이야기 해드릴까요?" 제안을 이렇게 하니까. 숙모님 입에서 나오는게 뭐냐하면 연세가 80이 넘으셨어요. 둘인가 좀 넘었어요. "나 이제 공부 그만할란다." 공부라 하는 것은 나는 멀쩡하고 지식을 추가해서 담긴게 공부예요. 나는 멀쩡한데. 지금 이대로 좋다는 거에요. 근데 아까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뭐가 들어가요? 말씀을 공부하는게 아니고 말씀이 그 안에 들어어죠. 멀쩡했던 내가 환상이었습니다. 잘난 내가 환상이었고 믿음좋은 내가 환상이고 그게 다 의미없던 거에요. 무의미로 만드는 것 자체가 의미있는 분이 왔기 때문에 도달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 나의 무의미가 되는 겁니다.
내 이야기가 공부로 들렸구나. 다음에 만날때는 다음 내년 5월달에 또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다른 전략을... 주께서 하기 때문에. 그런 기존교회 사람들은 교회다니면서 "하나님 저를 버리지 마옵소서." 맨날 그 기도의 바탕이 있어요. "하나님이여 저를 버리지 마옵소서."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간단해요. "니가 나를 버렸잖아. 왜 입에서 다른소리하고있어. 니가 나를 버렸잖아 니가. 니가 버린 것은 생각안하고 하나님이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이렇게하는데? 니가 매일같이 나를 버렸잖아" 말씀을 공부할때만 하나님이 들어온다는 말은 "말씀 들어오지마세요. 내가 알아서 공부할때만 하고 또 필요할때만 할테니까 알아서 오지마세요" 그런뜻이잖아요. 그러나 말씀은 우리가운데서 그냥 들어오게 되어있어요.
현재 교회 내에서 일반 교인들은 모르는데 목사가 앞장서서 강단에다가 이렇게 꾸며요. 십자가 이렇게 있는데 천으로. 이렇게 딱 걸쳐놔요. 그러면 앞에서보면 뭡니까? 이거 무슨잡니까? m자가 돼요. 십자가 + m. 이런 장식을 했어요. 이게뭐냐하면 공동구속자. 누구하고? 예수님 + 마리아하고. 마리아는 예수님 엄마니까. 공동구속자. 이게 성당이 아니고 교회에서. 왜 이런 짓 해요. 왜 이런 짓 합니까? 십자가로 그동안 많이 했다. 하니까 교인들이 "많이 먹었다. 고마해라" 하니까 여기다가 예수 엄마니까 이것은 뭐냐? 사랑. "십자가는 이렇게 모든 것을 너그럽게 용서하는 사랑입니다" 하고 이걸 얹어주는거에요. "사랑? 그러면 한번 내가 계속해서 교회갈 마음이 생기지."라는 것을 유도하는거에요.
여러분들이 성당을 안다녀봤잖아요. 혹시 다녀본 적 있습니까? 있어요? 고해성사할 때 신부가 뭐라고하는지 혹시 기억나십니까? 자 고해성사를 했습니다. "지난 주간에 내가 고해성사를 벌써 두달간 못했습니다."하고 고해성사했을 때 신부의 처방전이 어떤 처방전이 있다고 생각해요? 나누기전에 신부들 빨리 해서 잡지 봐야돼. 놀러 가야돼. 빨리 귀찮은 데 빨리하고 빨리 빠지는데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신부가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듣고. 듣는 것은 듣지만 그 처방전은 똑같아요. "주에 기도 다섯 번." 그다음에 이걸로 끝나는게 아니고 "성모송 노래 다섯 번 바치세요." 성모송.
"예수님이여 저 사람 불쌍히 봐서 좀 제 빽으로 그가 결핍된 것 모자란 것 하나님 날 버리지 마옵소서 할 때 좀 이렇게 거둬주세요. 그들은 힘들어합니다. 옆에 예수님의 뜻은 모르겠고 뜻이 있더라도 예수님 어머니의 빽으로 좀 도와주세요." 하고 성모송을 하나님께 바치는거에요. 바칠 때 이러한 처방을 듣고 나갈 때 그 천주교 교인들이 기분이 좋겠어요 편하겠습니까 아니면 우울하겠습니까? 어느쪽이겠어요. 편하죠. 편해요. "아 나는 홀로가 아니구나. 신부님 계시고. 선생님계시고 성모님 계시고 눈에 보이진 않지만 주님께서 계셨으니까 나는 이제는 지금 이순간 내 마음은 편하다"하겠죠. 그게 그 성당 영업의 컨셉이잖아요. 컨셉이죠. 뭐가 빠졌어요? 미련한자야 믿음도 없는자야 이런 지적이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이게 없는거에요.
그리고 올 때 자기중심적이었잖아요 돌아갈땐 누구중심? 더욱더 자기중심으로 강화되어 있습니다. 이걸아까 정신분석학에서는 프로이트가 뭐라고 했습니까? 생존본능. 에로스 또는 리비도. 생존본능. 이 생존본능만 있어야 되는데 프로이트는 몰라요 정녕죽으리라는 것이 인간 내부에 잠식되어있는걸 모르고 그냥 지가 환자 만나 보니까 살고 싶은데 왜 이게 또 끼어가지고 죽을까봐 두려워하는게 왜 끼지? 이렇게 되는거에요. 그러니까 프로이트가 아무리 연구해도 모르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인간은 존재한다. 있다부터 출발하는거에요. 주께서는 있는것도 뭡니까? 지난시간에 서울강의에서 했잖아요. 존재한다 고로 뭡니까? 사라진다. 이걸 확정된걸 누가 말리겠어요? 못 말리죠. 1869년도에 유명한 모네라는 그당시에는 안유명했어요. 모네라는 화가가 있었는데 모네라는 화가가 열심히 그림을 그렸어요. 열심히 그렸는데 도대체 자기 작품이 팔리지 않는거에요. 팔리지 않으니까 자기 부인이 까뮈유에요. 까뮈유가 젖먹이애가 있는데 "여보. 우유가 떨어졌는데 우유좀 사와줘." 자기는 센 강에 가서 옆에 살면서 주변에 보니까 동전하나 딱 하나 있어요. 이 동전 하나가 겨우 우유살 돈 밖에 안되는거에요. 근데 이 신세가 이렇게하면 또 우유 없어요. 하도 답답해서 동전을 그냥 기분드러워서 센강에 던져버리고 자기는 센강속에 들어갑니다. 이 모네라는 화가가. 작품이 돈이 안생기니까. 그래도 소용없어요. 유명인사가 아니니까. 들어가는데 들어가다 보니까 들어가면 흙이 무너지죠. 무너지고 물은 차고. 하는데 물 수면과 자기 눈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빛이 그 수변에 튕기면서 찬란한 빛을 냈다 이 말이죠 그때 모네가 "아, 내가 할 일이 있구나." 뭘 할 일이냐? "저 빛의 튀는 것" 인상주의라고 다른쪽에서 이야기하는데 그 빛이 튀고 물이 사물에 튀는 그것까지 내가 마저 그리고 가야되겠다 해서 자기 해야될 일로 인하여 자기가 우유값이 떨어지고 뭐 아내가 돈있다 없다 그것은 별로 안중요한 문제가 되었어요. 내가 해야될 일이 남아있으니까.
그러니까 그 순간 모네는 지금 제가 이 이야기를 왜하느냐 하면 모네는 뭡니까? 해야될 일이 뭘 삼켰어요? 나는 어떻게 사느냐 죽느냐 그 문제를 이겨버린거에요. 그 문제를. 그러니까 스데반 집사가 제가 묻는 것은 사도행전 7장에서 설명하면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했느냐 이 말이죠. "이 미련하고 더디믿는 인간아" 하는 주님의 그 심정으로 이 설교를 했다 이 말이죠. "너희들이 성경을 봤고 성경을 꾸준히 했는데 그게 전부다 지적하기 위한 용도가 아니고 너희들은 주님 힘으로서 살기위해서 너희들은 그동안 구약성경을 보았다"는겁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자기가 살 가치 있는지 없는지 그것은 분간도 못하면서 그런이야기 한겁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7장 마음자세는 바로 스데반 집사는 인간은 이제 사냐 죽느냐가 안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어떤 일을 어떤 사명을 감당해야 될 것을 주께서 소개했다는 이야기를 제가 말씀드리는 겁니다. 자 7장 봅시다.
6장 끝에서 스데반 집사를 체포하는 사람들이 스데반 집사한테 시비를 걸었는데 뭐냐하면 "너는 모세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게 이제 심문하면서 스데반 집사한테 시비걸던 그 대목이에요. "너가 정말" 모세의 규례니까 율법이죠. "율법을 철회해야된다. 이제는 소용없다."고 이야기했느냐가 심문의 내용이었습니다. 강조점이 모세에 있어요. 모세에 있다고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모세가 선지자 되어서 율법을 전해줬기 때문에 이게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 지키면 모세가 간 그 세계에 합류할 수 있다. 이게 유대인들의 생각입니다. 오늘날 교인들이 교회의 목사들 생각하고 똑같죠? 뭐가 빠졌어요? 그렇게 생각하는 본인이 거짓이고 가짜고 환상이라는 사실을 상상도못하는겁니다. 똑바로 이성적으로 성경을 아까 우리 숙모처럼 공부해야되는데 얼추 이제 천국갈만한 자신감이 생긴거에요. 이제는 이 나이에 공부 그만할란다 이렇게 된거에요. 그 이야기하면서요. 이렇게 생각했어요. '우리교회 교인들은 어떨까? 마찬가지가 아닐까?'하는 이런생각도 들었습니다마는... 7장에 들어가서 아브라함 이야기합니다. 스데반집사가.
아브라함은 세가지에요. 세가지. 하나는 땅, 씨, 의. 세가지입니다. 의는 다른 말로 하면 약속이죠. "새 땅 줄게" 했는데 알수 없는 땅. "씨 줄게" 없는 씨. "의 줄게" 해놓곤 아브라함은 실수투성이. 참 신기하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내 말대로 하라가 아니라 뭐냐하면 내 말대로 순종하라에요. 순종하게 되면 뭐가 등장한다? 알 수 없는 땅. 나는 씨 없다. 그다음에 뭡니까? 나는 주의 말씀에 위반자가 등장하는거에요. 이거는 하나님 내 존재와 하나님 존재를 생각하고 그 중간에 하나님 말씀을 지켰다는 우리의 마귀들린 기본 사고 가지고서는 도대체 이것을 받아들일수가 없어요. 구원받으려는 기대. 아까 기대가 죄라고 했죠. 구원받겠다 천국 가겠다 그 기대 자체에 성경이 어떻게 도울것이냐를 거기에 정신팔려 있는거에요. 성경 말씀이 찾아오게 되면 내가 과연 구원 받겠다는 이것이 내한테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이걸 고발하거든요. "너는 안돼. 너는 갈 수 없어. 천국은 주님이 가신 곳이야. 주님이 가셨어." 다시 와서 너를 데려가는 식이에요.
지난 낮 설교때에 제가 누가복음 15장 언급했죠? 원칙이 뭐냐하면 양을 버려서 양을 구원하는 방식이에요. 그 버린양 숫자가 얼마에요? 99마리에요. 그냥 주님께서 한 마리 어깨에 이고 좋다고 그냥 집에가시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어디로 찾느냐 하면 99마리 양한테 이야기해요. "너희들에게는 회개할 것도 없고 너희들에게는 잃어버렸다 찾은 것이 없잖아."라고 언질 때리고 양 하나 데리고 가요. 99마리를 버리고 한 마리 양을 채택한다는 말은 애초부터 99마리 양을 데려간 이유에 대해서 99마리 양이 몰랐다는거에요. 그 취지를. 목자의 취지를 99마리에서 아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드디어 목자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구나 이렇게 하면서 신바람 났죠. 버리기 위해서 데려온다는 생각을 상상도 못한거죠. 버리기 위해서. 주님 앞에서는 숫자라는게 의미가 없기 때문에. 99이냐 하냐. 의미없어요.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적이 있느냐 없느냐. 잃어버린지를 니가 아느냐 없느냐 그게 중요하지. 99마리 양은 잃어버린 적이 없어요. 없으니까 그제서야 잃어버린게 돼요. 먼저 잃어버리면 되는데 실컷 50년 교회다니고... 아이고 참 진짜 상당히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아브라함 할 때 이걸 언급합니다. 그러면 알 수 없는 땅, 씨가 없는데 생겼다. 그다음에 아브라함은 실수투성이다. 이것을 대대로 그다음에 반복해서 이어지는 이삭과 야곱과 요셉에게 그게 이 원칙이 그대로 복제하듯이 적용됩니다. 오늘날 어디에 적용되겠어요? 오늘날 우리한테 적용되는거죠. 그리고 이렇게 해서 없잖아요. 없잖아요. 실수하잖아요. 그러면 알수 없는 땅에 도착했습니다. 약속의 땅. 그 다음에 없는데서 씨가 생겼어요. 씨가 생겼습니다. 어쨌든간에 그는 이땅에 생긴 나라 이름이 뭐죠? 이스라엘 생겼죠. 자 이스라엘이 할수 있는 오해는? 이스라엘은 아브라함때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돌아가죠. 그냥 얻은 것 챙기죠.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면서. 얻은 것 챙기는거에요.
그 중간에 뭐가 또 들어가냐 하면 약속의 땅 이제는 누가 들어가요? 모세가 들어가죠. 모세가 들어간다고요. 모세가 들어가면서 스데반 집사의 해석에 의하면 모세는 "나 아니야. 나같은 선지자는 최종적으로 따로 마련했다." 모세 이야기는 길어요. 왜냐하면 모세에 대해서 언급했기 때문에 37절. "이스라엘 자손을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라고 했거든요. 그러면 모세가 말하길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운다고 한다면 그 이야기를 듣던 그당시의 이스라엘은 "그럼 너는 뭔데?" 이거는 당연히 나오는 질문이에요. "그럼 너는 뭐야?" 나와같은 선지자를 세운다면 너는 뭐냐? 할 때 이스라엘이 놓친 것이 있어요. 뭐냐하면 지금 모세 덕분에 그들은 광야에서 잘 인도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모세 덕분에 잘 인도하고있는 이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대로 이건 유효하게 남고 장차 이 이스라엘 완성 단계에서는 모세같은 선지자가 등장함으로써 지금은 미완이지만 지금은 완성 안 됐지만 그때는 제대로 완성된 선지자가 나타날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던 겁니다. 그런데 그 생각이 42절 43절에 와서 다 깨졌죠. 모세하고 광야 인도할 때 너희들이 했던 짓은 무엇이냐가 이제 나옵니다. 아까 43절에 봤죠.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렇게 되어있단 말이죠.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했다"했어요. 여기 너희가 현재 스데반 집사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그 너희하고 지금 통하는 후손의 너희에요. 거기에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고 같이 한통속이에요. 지금 스데반 집사가 의도적으로 계속해서 노리고 있는 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힌 너희가 이미 옛날부터 그 뿌리가 시작이 되었다는거에요. 어디? 모세부터 시작된거에요. 그래서 모세는 나와 같은 선지자를 따로 세운다는 취지가 바로 거기에 있다는 겁니다.
모세가 만든 이스라엘 영원무궁할 것이다. 아니 아니야 영원무궁하지 않아. 너희들이 생각했던 모세를 이용했던 너희들은 결국은 중간에 광야에서 광야뿐만아니고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에요. 그 이후에서 그들은 어떻게 했느냐? 그들은 바로 우상을 섬기는 그 본성을 계속해서 전수받게 될 것이다. 그 이야기하는겁니다. 그다음에 아까 그 신문 자체가 뭐냐하면 모세이야기였고 동시에 그당시에 헤롯성전, 예수님께서 결정적으로 십자가에 죽게된 이유가 성전건드려서 그래요. 성전을 건드렸어요.
제가 주일 낮 설교에서 주일 학교에 했는 것. 하나님께서 제가 그런 질문을 했거든요. 주께서 비둘기 쫓아내고 환전소 쫓아냈죠. 그리고 원래 비둘기 상인들 있고 환전소 있었는데 주께서 이 강도의 도적이라고 해서 쫓아냈잖아요. 그러면 상인들 없고 환전소 없는 상태에서 그러면 그 장소는 뭡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집 이어야 하죠. 앞으로도 쭉 계속 집이어야 하잖아요. 하나님의 집을 방해하는 환전소와 비둘기 파는데 있었는데 주께서 채찍 흔들어서 상 뒤집어서 없앴다면 하나님의 집이 안되는 요소가 삭제되었기 때문에 다시 하나님의 집이 되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돼있습니까? 쫓아낼건 쫓아내고 그것은 주께서는 "이 집은 아니다." 그러면 왜 쫓아 냈어요? 어차피 집이 아닌 것. 그걸 왜 쫓아냈죠? "아 여기 음식 냄새나서 문 열어 놔야 돼." 문 닫으니까 냄새난다고 해서 그래서 문 열어 놨어요. 아까 피자 먹고 문 열어 놨다고요. 문 닫았으면 여기는 정상이잖아요. 인간 이치가 그렇잖아요. 그러면 왜 주님께선 이것은 아니다. 따로 있다. 뭐 46년 동안 다 못 지었어 그럼 난 사흘만에 짓겠다는 말을 굳이 그 자리에서 하신 이유가 뭐냐?
이게 바로 표적 때문에 그래요 표적. 인간이 성경 문자를 가지고 환상과 가짜 인간이 따라 잡으려고 아무리 따라잡으려해도 결국은 주님 쪽에서 막히는 곳을 설정했어요. 막히는 것. 딱 막히게 만드는거에요. "니 힘으로 성경 연구해서 따라오는거? 천국은 그렇게 따라갈 곳이 아니다. 가만히 있어. 내가 데려갈게. 좀 나대지마라. 내가 데려갈게. 뭐하고 뭐 바치고 그런 이야기 안 할테니까 내가 데려갈테니까 가만히 있어." 니가 가만히 있을 동안에 주께서 말씀을 주게 되면 그 말씀이 너희가 미련하고 믿음 없고 미련한 자고 믿음 없는 것을 들추는 방식으로 찾아가실거에요. 그래서 여기서 성전 이야기 합니다. 성전 이야기하면서 "솔로몬이 그를위해 집을 지었느니라." 이거는 제가 설명해 드렸죠? 성전을 지을 때 다윗에게 허락하지 않는 이유가 뭐냐? 그거는 수요일 날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오후 설교다. 성전이 부동산이 아니고 집이 아니고 아들이 성전이 되기 위해서 아들 놓는데 개입하신거에요. 주님께서 니가 성전짓는게 아니고 성전 지을 자를 없는데 내가 성전 지을 자는 아들이어야 되고 그 아들은 처녀에서 나온 아들이 성전을 짓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무너질 성전을 짓게 만든거에요. 그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여기에보면, 48절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이것 설명하고 마치도록하겠습니다. 주께서 사람 손으로 지은 것에 왜 안 계십니까? 더럽다고 안 계시는거에요? 이 말은 여러분 잘 알고 있어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에서 인간 쪽에서 조금이라도 뭔가 할 수 있는 행함이라든지 할수 있다가 개입되면 안 받습니다. 아까 왜냐하면 죽음의 공간화니까. 죽을 인간 말고 다른 유일한 죽음에서만 만나요. 유일한 죽음에서. 그래서 52절에 봅시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묻는 것은 핍박을 다 해왔다는거에요. 누가? 조상. 조상 이름이 네자로 무슨 나라죠? 이스라엘. 이스라엘이 있었던 이유는 이스라엘 누구를 분리시킵니까? 선지자를 분리시키는거에요.
예언자는 뭐냐하면 인터페이스. 하나님과 유일하게 만날 수 있는 사람. 주님의 죽음 안에서 유일하게 만날 수 있는 사람. 그것과 그 혜택을 본 이스라엘과 완전히 이걸 격리시킵니다. 혜택을 본 사람은 선지자의 죽음에 참여하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핍박을 해버리는 자라고 스데반이 설명하고있어요. "아이고 나 선지자 고난에 참여해야지." 이런 사람이 아니고 "선지자 죽여버리자." 이런식으로 본색이 나왔다 이말입니다.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스데반 집사는 자기를 고발한 자에 대해서 말 잘꺼냈어. 내가 이제 너희를 심판할게."하고 고발한 자를 도리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중심으로서 도리어 고발했습니다. 이게 뭐냐하면 "우리 갈때까지 가자. 그래 갈때까지 가자.“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이게 이제 지옥의 대합실이죠. 대기소. 지금 스데반 집사님은 빨리 차타고 빨리가야돼요. 차타고 가는데 홀로 있었던게 아니죠. 누구와 함께 있었습니까?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함께 있었죠. 그럼 이 일을 주선하고 이 재판을 의도적으로 유발시킨 분은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그럼 스데반집사님의 이 설교의 핵심은 뭐냐? 바로 예수그리스도께서 이미 구약때부터 선지자를 통해서 시련과 고난을 받았다는 사실을 자기 설교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집사님은 구약때는 원래 교회는 없어요. 교회는 베드로가 첫 번째 반석이 베드로가 교횐데 여기서 스데반 집사님은 그 구약의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로 보지 않고 특정 고난 받는자를 광야교회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광야교회.
그게 38절에 나옵니다.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그다음에 어떻게 되어있습니까? "광야 교회". 이 탕자 교회를 광야 교회로... 광야 교회. 광야교회의 특징은 천사와 함께있어요. 고난받는 모세와 함께하는 것. 광야교회죠. 그리고 이제 광야교회라 하면서 결국 교회의 본질은 이 세상을 지옥의 대합실로 규정하고 본인은 거기서 발을 빼는 거에요. 발을 빼는 것. 그래서 이건 스데반 집사가 순교하기 전에도 이미 성령받은 상태가 예수님의 죽음에 참여해서 스데반은 죽고 그 안에서 예수님의 생명이 나오는 계기로서 계속해서 스데반 집사님의 목숨이 유지되고 있었던거에요. 눈에 보이는 식으로 이어지고 있었던겁니다. 그 마지막은 아주 극적이죠. 주님은 빨리 오라하고. 서서 "이쪽이야." 빨리 오라하고 그 빨리오는데 있어서 누가 협조하고 있느냐 하면 바로 유대인들이 협조해서 재판해서 짱돌 들고 스데반 집사를 때렸습니다. 때렸는데 58절에 보면 거기에 누가 어느 특정 이름이 대표 이름이 등장해요. 옷을 벗어서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에 두니라.
죽음 속에서만 뭐가나온다? 드디어 생명이 나오는 것이 증명됐죠? 스데반집사의 죽음 속에서 사도바울이라는 생명이 나오는 방식. 그러면 "목사님 우리는 세상에 나가 지금 당장 돌에 맞아 죽을까요?" 아니에요. 성령 받은 상태가 이미 죽은 상태기 때문에 예상도 못한 기대도 안했는데 혹시 이 스데반 집사가 믿었던 성령을 받을 자. 받아야 구원받으니까요. 그리스도의 영이 있어야 그리스도의 사람이니까. 받을 자 한테 그들에게 받을 자가 등장하는 기회가 계기를 우리를 통해서 주께서 활용하고 계시는겁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우리 마음대로 안되고 주께서 알아서 하실거에요. 우리가 목숨 끊어지기 전까지 주께서 우릴 쓰실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거는 우리 의미가 아니고 주님한테 의미가 있듯이.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승자독식 이미 게임은 끝나버린 상태. 주께서 십자가의 죄사함으로 이미 구원이 되는 상태에서 다른 군소리를 하지 않게 하여주시옵소서. 주께서만 하셨고 주께서만 건졌다는 말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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