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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사도행전 5:34 / 말씀에 실려 / 251021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사도행전

사도행전 5:34 / 말씀에 실려 / 251021

정인순 2025. 10. 22.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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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홍민희

강남-사도행전 5장 34절 (말씀에 실려) 251021a-이근호 목사



사도행전 5장 21절 "저희가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오라 하니" 사이즈를 키웁니다. 사람들의 평가를 소수인 어떤 소수 행정가가 일방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아니고 이 일을 모든 사람이 책임질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도 여기다 참여시키는 겁니다. 우리가 결정한 것이 그렇게 과했는지 아니면 정당했는지 보다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렇게 보편적인 평가를 받음으로써 그것이 일 끝나고 난 뒤에 자기 책임을 들 수 있고 자기 정당성을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재판에 참여하는 것이죠. 배심제 같은 거죠. 그만큼 일이 커졌다 이 말이죠. 일이 커져서 그 타이밍에 17절에 보면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가두었어요. 그래서 그 공회 재판을 연 사람들은 아직도 사도들이 옥에 갇힌 줄 알고 있어요. 옥에는 못 빠져나오니까. '가두었다/갇혔다' 이 차이가 사도에게 있어서 성립 안 됨.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자신이 어디 가두어지는 걸 제일 싫어해요. 왜냐면 사람은 자율성이 있어야 사람 답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야 그게 사람다운 행세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가두어 둘 때는 이게 누구한테냐 하면은 남들에게 피를 입힌 죄수에 대해서 감옥에다가 이걸 가두어 두는 거예요. 그러면 그 상대는 갇혔다. 가두어둔 사람에 비해서 너는 인간도 아니다. 가두어둔 사람은 자유를 행세하고 자기 뜻대로 살 권한이 있지만 너는 이 사람과 같이 이 땅에서 네 하고 싶은 대로 할 권한은 없다를 분명히 합니다. 이게 뭐냐면 옥의 기능이죠. 감옥의 기능입니다. 근데 사도는 그 옥에서 나왔어요. 가두는 인간들이 가두고 인간들이 투옥시키고 재판을 벌렸다. 재판을 열었다. 인간들이 재판을 열었다. 이제 더 많은 숫자를 끌어 모아서 사도들을 옥에 갇힌 것이 얼마나 옳은 행정 처리인가를 알리기 위해서 재판을 가두고 재판을 열었다 이 말이에요.


그럼 이 재판을 연 것은 지금 사도들이 어디에 있다 말합니까? 갇힐 만해서 가두어 두었다가 되죠. 그러면 이거 가두었다 한 사람은 뭐가 되냐면 정의로운 사람, 정의로운 존재 갇힌 사람은 정의가 없으니까 이거는 뭐가 되냐면 불의한 자가 되죠. 이 정의로움과 불의를 인간들이 설정하고 그것이 얼마나 옳았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재판을 열었는데 이 사도가 옥에서 어떻게 돼요? "주의 사자가 천사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가로되 가서 성전에 가서 이 생명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말하라 하매 저희가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이래 되어있어요. 뭐가 무산 됐어요? 뭐가 무의미하게 된 것입니까? 감옥에 가두었는데 감옥에서 탈출했으니까 인간들이 설정하는 감옥이라는 이것이 누구한테 안 통한다? 천사한테는 안 통한다. 인간들에게는 자기끼리는 통할지 모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의 감옥은 이거는 인간 네 마음대로 정한 것이지, 하나님 보시기에 그 감옥은 유효하지 않아요. 의미 없습니다.


감옥에서 탈출했다는 말은 감옥에 가두었다도 의미가 없어요. 가둠으로서 정의를 실천하는 이 정의 실천이 이게 전부 다 무산됩니다. 그 다음에 갇힌 자였던 사도는 이게 갇히지 않았으니까 갇힌 자가 없지요. 갇힌 자가 없어요. 가두는 자는 있는데 갇힌 자가 없다. 그렇다면 여기 갇혔다가 빠져나온 자가 뭐가 돼요? 정의로운 자고 이 정의로운 자를 굳이 감옥에 집어넣었다 하는 이쪽이 뭐가 됩니까? 불의한 자가 되겠죠. 그럼 누가 가둬져야 돼요? 불의한 자가 하나님이 생각하는 영원한 감옥에 갇혀야 됩니다. 갇혀야 돼요. 여러분 신나지 않습니까? 이 반전에 역전이. 인간의 판단에 의해서 잘못됐다 했는데 그 잘못됐다 한 그 자가 잘못된 자고 잘못 됨을 받는 자가 오히려 옳은 자가 된다면 결국은 이것은 뭐냐하면은 인간 세계는 모두 갇혀 있고 하나님이 개입한 천사니까 하나님이 특별히 개입한 자만 뭐냐면 자유인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여기까지 이야기했으니까 여러분한테 쓸데없이 물어보나 마나예요. 여러분들은 인간 세계에서 있는 인간 세계에 살고 싶습니까? 하나님이 개입한 자유인이 되겠습니까? 지금 묻는데 의도가 있죠? 예. 인간 세계에 갇혀 있지 않고 자유인이 되겠죠. 그러면 이제 진짜 본격적으로 묻습니다. 인간 세계에서 가르치는 그 기준을 여러분들이 마다하고 싶습니까? 거부하고 싶습니까? 인간 세계 너도 알고 나도 아는 다 상식적인 그 상식에 머물러 있으렵니까? 아니면 과감하게 상식을 뛰어 나가고 싶습니까? 어떻습니까? 그 인간들의 평소에 있는 상식이 어느 정도로 하나님의 뜻과 대치가 되고 다르다는 사실을 우리가 일상 생활 가운데서 그것을 감을 못 잡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왜 분명히 이렇게 하나님의 관점은 인간 세계가 손잡을 필요. 없이 그냥 탑출하면 돼라고 이렇게 편하게 이야기해도 우리 마음은 인간 세계에 적을 두고 그들과 똑같은 생각으로 살고 싶은 그 이유가 뭐냐? 그걸 지금부터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은 싫고 그냥 다른 사람들 보기에 내가 어떻게 보이는가 그 관점을 공유하고 싶은 거예요. 같이 그걸 갖고 싶은 이유가 뭐냐? 이거는 바로 '상실' '상실의 개입'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이미 생명 나무가 없죠.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생명나무 없지요. 생명나무 있는 곳에 살았는데 그 안에서 하나님 만들었는데 생명나무 없는 곳으로 왔을 때 인간은 상실한 겁니다. 생명을 상실한 거예요.


자, 인간은 어디에서 만들어졌다? 생명 나무도 있고 선악과 나무도 있는 곳에서 유독 인간이라는 것이 만들어졌습니다. 생명나무도 있고 선악과 나무 있는 곳에서 인간이라는 개념은 규정이 돼요. 인간은 이런 배경 생명나무 선악과 없는 데서 인간이라 하면 안 됩니다. 생명나무 선악과와 관련지어서 인간이라는 게 있다 이 말이죠. 근데 인간들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생명 나무가 없지요. 그러면 뭡니까? 인간에게 생명이라는 것은 결여된 상태입니다. 결여된 상태를 저는 오늘 뭐라고 이야기하냐면 인간에게는 상실되었다. 생명나무 자리가 상실되어있다. 그러면 인간 속에 뭐냐면 구멍이 생긴 거예요.


생명나무 있는 자리가 없어지고 구멍이 생긴 겁니다. 이거는 뭐냐면 결핍이에요. 결핍이니까 결핍된 상실을 인간은 무엇으로 자꾸 채우려고 해요. 뭔가 인간의 상실과 결핍을 채우려고 한다는 자체가 더욱더 나는 지금 정상이 아니고 상실 돼 있는 상태라는 것을 티를 내는 겁니다. 이 뭐로 채우느냐? 선악 지식을 따먹었잖아요. 선악 지식으로 생명나무에 있는 결여된 그 빠져 있는 부분을 선악과로 생명나무 결여를 마저 채우려고 하니까 이게 이제 문제가 점점 더 골치 아프게 되는 거예요. 선악과와 생명나무를 대체할 수 있습니까? 대체 못 해요. 왜? 나무가 하나가 아니고 둘이기 때문에 따로따로기 때문에 서로 다른 나무로 다른 나무에 비어있는 자리를 대신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들어갈 수가 없어요. 생명나무는 이제 물 건너가 끝났고요. 그러면 인간은 이 결핍을 채우는데 뭘로 채우는지가 여기 또 뒷부분에 나와요.


사도행전 5장 34절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교법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는가 조심하라" 쭉 이야기하면서 39절 "만일 저들의 소행이 사람에게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하나님께 났으면 저희가 도리어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붙들어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여 놓으니" 이렇게 돼 있죠.


자, 문제 나갑니다. 이 가말리엘의 주장이 복음적입니까? 이게 옳은 주장이에요? 막 하나님만 동원시켜 가지고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로 나온지 아닌지 우리가 모른다 유보한다면 그냥 건드리지 말고 놔두면 하나님이 알아서 건드리면 되잖아. 근데 하나님께 났는데 우리가 하면 대적하는 게 되니까 우리 손해니까 그냥 내버려 두고 내 보내자. 그러니까 사람들이 내보내되 예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여 놓았다 하는데 이 가말리엘 교법사 이게 사도 바울의 스승이죠 옛날에. 이 가말리엘 교법사가 하는 말이 이제 제가 묻는 것은 이게 진리입니까? 복음이에요? 복음 아니에요?


이 가말리엘 교법사의 사고방식은 이겁니다. '정신병자'입니다. 정신병자의 특징은, 이 상실. 아담이 범죄하고 난 뒤에 모든 인간은 상실 되어 있어요. 결핍되어 있다. 아까 이야기했죠. 생명나무가 없으니까 구멍이 뚫린 거예요. 이 구멍이 뚫린 것을 거기 인간들은 뭐로 구멍을 때우느냐 하면 이겁니다. '큰 어른' 어르신. 이걸 정신 분석학에서는 이 단어를 뭐라 하냐면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정신분석학에서 이렇게 근거한 근거는 모든 민족의 공통점이 있어요. 그거는 뭐냐면은 '이미 죽은 자의 추도식을 통해서 후손들이 결집 단계를 도모한다.' 이거를 가지고 조상숭배 문화거든요. 모든 인간이 조상숭배 문화예요. 조상숭배를 왜 하느냐 하면은 조상숭배를 안 하면 인간들이 혼란이 벌어져요. 구심점이 없으니까.


아버지 돌아가시고 난 뒤에 이제 첫 제사가 왔다. 1년밖에 안 됐다 또는 첫 명절이 왔다 또는 첫 추석을 맞이했다. 그러면 아버지 돌아가시고 난 뒤에 형제 한 다섯 명 온다고 합시다. 아들 셋에다가 딸 둘 그래 가지고 아버지 이제 첫 번째 기일 돼 가지고 다 모였다 합시다. 그러면 이제 둘째가 셋째 넷째 다섯째 대표해서 첫째한테 뭐라고 합니까? "형은 그러는 게 아니야" 일단 제사 드리고 제사다리 물러 놓고 이제 술 한 잔 해가면서 "형은 그런 게 아니야. 어떻게 그 성산을 형이 혼자 다 차지하냐" 이렇게 시작되죠. 그러면 형이 말하기를 "내가 아버지 10년 모셨다. 나도 도시에 가서 사업하다가 아버지 들어오라 해가지고 들어가가지고 못 짓는 농사 지으면서 아버지 10년 모셨다. 성산 나 혼자 할 만 하잖아" 그러면 이제 막내 딸이 "오빠는 그래 하면 안 돼“


왜 이런 형제 간에 형제 난이 분란이 일어나는 겁니까? 누가 없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셨잖아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돌아가시는 분으로 처리하면 되는데 문제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면요. 형제 다섯 명의 구심점이 날아간다니까요. 중심점이 날아가요. 큰 어른이 없어요. 어른 의식을 분배받아야 돼요. 가말리엘 교법사와 모든 이스라엘에서의 큰 어른은 누구냐 하면 하나님입니다. 지금 가말리엘 주장이 옳은가 그른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뭐냐면은요. 가말리엘 이 사람이 그냥 일반 서민입니까? 아니면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큰 어른입니까? 살아 있는 큰 어른이죠. 살아 있는 큰 어른의 의식에 존경받으니까 모든 백성들 가운데서 민주당 국민의 힘 관계없이 모든 국민들부터 존경을 받는 교법사 가르치는 사람이 가말리엘이에요. 그렇다면 평소에 가말리엘의 이 의견에 대해서 모든 백성들이 큰 어른으로 따랐다는 이야기잖아요.


무슨 말이냐 하면 이 가말리엘이 자기가 아는 하나님을 근거로 해서 율법을 가르친 것에 대해서 모든 백성이 그다지 큰 반항이나 반발을 안 했다는 거잖아요. 그럼 뭔가 공유한 거죠. 정신적인 지주고 구심점을 갖고 있죠. 그러니까 백성들이 그 말을 따랐잖아요. 그럼 가말리엘 본인은 뭡니까? 본인은 지금 자신의 상실을 뭘로 채우는 거예요? 하나님으로 채우잖아요. 큰 어른 어르신 내가 하나님이다 이 말이에요. 왜 채우는가? 이래야 유대 나라가 나라 꼴이 된다는 겁니다. 유대 나라에 왕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왕 없지요. 유대나라 왕이 있으면요. 국민들 그 백성들 세금을 누구한테 바쳐야 해요? 왕에게 바쳐야 되잖아요. 근데 지금 유대 나라는 세금을 누구한테 바칩니까? 가이사에게 바치죠. 로마의 통치를 받으니까 실질적으로 그 세금을 로마 당국에게 준다 이 말이죠. 그것 때문에 호적을 했고.


여기 36절에 "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서 스스로 자랑하매" 했지요. 37절 "갈릴리 유다가 백성을 꾀어 쫓게 하다가 그도 망했다"고 돼 있어요. 그러면 갈릴리 유다가 뭐 하는 사람이냐면은 로마가 유대 나라의 호적을 한 것에 대해서 선동해 가지고 호적 받지 말자. 호적을 하겠다는 것은 우리의 돈을 갈취를 하려는 이거는 횡포다. 따라서 여기서 내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은 광화문에서 태극기 한번 흔듭시다. 우리는 국민적 저항을 합시다 라는 자가 누구다? 갈릴리 유다였어요. 근데 그 유다에 대해서 반대 의사를 둔 자가 누구냐 하면 가말리엘이라니까요. "봐 망했잖아. 망했잖아. 내 망할 줄 알았어" 그런 뜻이에요. 그럼 가말리엘 이 사람의 어른, 모시는 하나님은 뭡니까? 이런 뜻이에요. 비록 우리가 세금 로마한테 뺏기고 땅도 뺏기고 모든 치안이나 행정국도 로마 권력 상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거는 하나 잊지 말자. 우리의 마음에 정신적인 지주는 옛날부터 있었던 여호와 하나님인 것을 놓치지 말자. 이거 주장하는 게 누구다? 가말리엘입니다.


근데 그게 왜 정신병자냐? 이게 정신병자의 특징이에요. 정신병자의 특징은 자기의 상실을 어떤 다른 요소를 가지고 그것을 메꾸려고 시도하는 거예요. 그래서 가말리엘만 정신병자가 아니고 가말리엘 말 듣는 모든 백성이 다 정신병자고 모든 인류가 다 정신병자예요. 이미 에덴 동산에서 나와서 자기의 치부, 자기의 약점 그런 것은 본인이 용납이 안 돼요. 용서가 안 된다고요. 그러면 자기가 자기 행함으로 메꾸면 되지 않느냐? 그러면 자기 몸이 피곤해요.


'몸은 아파도 정신만큼은 아프지 말자' 몸은 감기 들려도 정신 바짝 차리자. 제 정신으로 살자. 제 정신으로 살자는 말은 이 뭔 뜻입니까? 제 정신이 아니다는 고백하는 거예요. 몸은 그냥 바쁘게 노동하면 잊을 수 있지만 정신만큼은 나중에 퇴근하고 혼자 있으면 이게 허전하고 허무하고 견딜 수가 없어요. 그래서 술 먹고 담배 피고 하는 이유가 이 정신만큼은 지가 온전치 못하는 걸 아는 거예요. 그래서 정신만큼은 어찌 못하니까 자기의 상실과 결핍이 있으니까 뭘로 메꾸느냐? 1번 하나님 2번 남자나 여자 3번 친구 4번 친척 5번 식구 5개 있는데 이거 성공합니까? 친구 만나면 술 사 줘야 되지 지가 불렀으니까 술값 지가 내야 돼지. 친척? 먼 친척은 지 이용할 말만 하고, 식구는? 자꾸 불러내면 짜증나요. "너는 그렇게 할 일도 없나? 자꾸 전화질 하지 마" 남자나 여자 이 밑천 너무 많이 들어요. 그럼 남는 거 뭐가 남아요? 돈도 안 들고 남는게 뭐가 됩니까? 하나님. 하나님으로 상실을 메꿀 수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주변에 주님이 일으킨 사건이 터지기 때문에.


왜냐하면 예수님의 아버지는 아무도 몰라요. 예수님의 아버지가 하나님이잖아요. 근데 그걸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왜 그러냐? 모든 인간은 예수님이 하나님 이야기하기 전에 지가 알아서 하나님을 큰 어른 어르신으로 이미 자기 정신에 집어넣어서 정신의 안정감을 위해서 지금 혼신의 노력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 가말리엘의 이야기 지난번인가 이걸 약간 언급했죠. 가말리엘의 이 사상 이 신학은 '하나님 주권사상'이에요. 이걸 약간 길게 하면 '개혁주의 신학'이에요. 모든 일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니까 우리는 그냥 쳐다보면 된다. 그게 하나님이다. 맞습니까? 진짜 하나님은 우리의 결핍과 상실을 노출시킵니다. 너는 정상이 아니야. 따라서 네가 하나님으로 결핍을 메꾼다 해서 그 하나님으로 메꿔진 너를 우리 천국에서 안 받습니다. 받지 않습니다. 너 같은 인간 안 받습니다. 구원은 없습니다. 이 뜻이에요.


정신병자를 구원해서 뭐 할 건데요? 받지 않습니다. 이 가말리엘이고 가말리엘의 말을 듣는 모든 백성이고 오늘날 이 모든 인간들의 공통점이 있어요. 그건 뭐냐? 자기의 결핍과 상실이 노출되는 것을 죽기보다 더 싫어해요. 그게 사실인데. 이미 성경에서 이야기했잖아요. 성경에서 이야기하기를 아까도 이제 처음에 이야기를 다시 하게 되면. 늦게 오신 분이 있어서.


인간이라는 규정은 선악과 생명나무와 연관 지으면서 '인간'이라고 한 거예요. 생명나무는 따먹되 선악과는 따먹지 말라는 그 규정에 입각해서 인간을 만들어 놓은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사단 나가지고 선악과는 따먹고 생명나무 있는데 쫓겨난 이상은 인간은 이미 결핍된 존재고이 결핍된 존재는요 인간이 아무리 딴 걸로 대체해서 결핍 채우려 해도 인간은 제 정상이 아니에요. 정상이 아니니까 정상이 아닌 이것을 인간은 선악과로 선악으로 메꾸는데 선 중에 최고의 선이 누구죠? 하나님이잖아요. 이 하나님을 믿음으로서 자기의 결핍과 상실을 메꿀 수 있다고 여긴다 이 말이죠. 인간은 그런 땜질을 한 것에 대해서 일단은 안심을 하는 거예요. 왜? 모든 인간이 자기 이 모든 게 서로 거기 공유하고 동의하고 있으니까 다른 대책이 없으니까. 누가 오기 전에? 예수님이 오기 전에 다른 대책이 없는 거예요.


근데 예수님이 오셔 가지고 뭘 끄집어내냐면 "네가 아는 하나님은 그거는 하나님이 아니고 네가 정신병 걸려 가지고 네 땜방 땜질한 하나님이다 이거 엉터리 하나님이다" 이 말이죠. 5장 40절 보세요. "저희가 옳게 여겨서" 지금 가말리엘 의견을 옳게 여기서 "사도들을 붙들어 채찍질하며" 지금 자기들에게 문제 있음을 인정을 안 하고 있죠?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한다" 했어요. 예수 빠진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우리는 오케이 하겠다. 우리는 우리 자비와 배려에 의해서 당신을 우리는 우리 뜻이 아니고 하나님께 옳게 보기 위해서 당신을 죽일 수도 있고 한데 우리는 너무 너그러워서 우리 하나님이 내가 믿는 우리들의 하나님이 너무 착해서 당신들을 이렇게 봐줘서 하니까 이 착한 하나님을 착한 하나님으로 같이 인정하고 다만 예수 이름으로 전하지 마라 이 말이에요. 야, 이거 뭐 종교계 실상 다 나타나죠.


어떤 교회에 복음을 아는 집사가 있다고 칩시다. 없는데 있다고 일단 칩시다. 그 사람이 목사의 설교에 대해 사사건건 다 시비 거는 거예요. "왜 납득되는 하나님을 왜 이야기합니까? 왜 우리의 상실을 노출시키지 않아요? 우리의 치부를 왜 드러내지 않고 자꾸 하나님 주권으로 덮으려고 합니까? 예수님이 어떻게 이야기했는데요?" 라고 이야기하면 당회 열어 가지고 큰 이제 재판 사이즈를 당회 열어 가지고 그 집사를 어떻게 부르겠어요? 그냥 부르는 게 아니고 종용히 불러요 종용히. "너 말한 취지는 알겠는데 입 안 다물래? 좋아. 네가 여기서 활동하는 건 좋은데 그 십자가라는 건 빼고 하나님하고 성경대로 바르게 살기 선악 체계가 있으니까 선악 기본 자질이 있으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성경 말씀대로 착하게 살자 그것만 이야기하면 안 되겠니?" 나오죠. 타협하는 걸 제시합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또 이야기할 건 사도는 멀쩡하냐? 이걸 따져봐요. 아까 가말리엘 이 사람을 뭐라 했습니까? 정신병자라 했죠. 정신병을 추종하는 모든 백성들 정신병자예요. 메꿀 수 없는 것을 메꾸었다고 여기니까 정신병자예요. 나는 정상적으로 산다고 하는 겁니다. 정신병자 아니고 정상이다. 하나님 믿고 내 착함으로 내가 혹시 행여나 악한 일 할 수 있는 것을 선행으로 커버하며 사는 것이 이게 얼마나 정상적인 인간의 모범적인 인간의 삶의 태도냐 이겁니다. 근데 이 사람들이 발작을 하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면 바로 십자가 예수님의 복음 앞에서 이들은 이제 발작을 하는 거예요.


왜냐 하면은 십자가라는 것은 뭐냐 하면은, 우리 보고 너의 약점을 메우지 말라는 거예요. 너의 치부를 네가 메우지 말라는 거예요. 이게 십자가 주님이 우리한테 요구하는 겁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는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는데 왜 자꾸 너는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그 고백으로 네 진짜 죄를 왜 가리려고 하느냐?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그거는 맨날 바리새인이 주특기에요. 나는 부족합니다. 나는 죄인이다 를 왜 가지고 네가 죄인이라 하면 너 진짜 네가 죄인임을 아는 것처럼 주변에서 착각하잖아. 하지 마 그런 짓 하지 마. 가만히 있어도 죄인이야 자꾸 죄인이다 하지 마 이 말이에요. 가만히 있어도 죄인인데. 어떤 사람이 뭐 이렇게 잘잘못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따라가면서 잘못됐습니다. 잘못됐습니다. 고만해라 고만. 자꾸 잘못됐어 하니까 너 잘못된 게 자꾸 가리워지잖아. 그냥 가만히 있어. 잘못됐으면 가만히 있어 줘. 용서 그것도 하지 마. 잘못된 자가 무슨 용서를 구해. 용서를 구할 자격이 있다는 주장인데 그건 모순 되잖아요. 내가 잘못됐지만 용서는 구할 수 있다 그건 온전히 잘못된 게 아니에요. 용서조차도 안 될 정도로 잘못된 거예요 인간은.


왜냐하면 인간이 잘못된다는 것은 돌이킬 수 없어요. 돌이킬 수 없습니다. 이미 생명이 누락되었는데 이건 돌이킬 수 없어요. 회개하고 반성한다고 그것이 회개 반성이 생명을 대체물이 안 돼요. 여러분들 성경에서 주님이 끝까지 애쓰시는 게 뭐냐 하면은 열매예요. '열매' 이 열매 맺기는요 주님의 일방적인 참여로 되는 거예요. 내가 성령의 열매를 못 맺어요. 성령의 열매는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내가 나한테 아무 짓도 못할 때 그때 열매가 맺히는 겁니다. 이거는 뭐 믿고 자시고 아니라 논리를 따져도 그래요. 자꾸 성경대로 성령의 열매 맺고자 하니까 이거는 뭡니까? 자기의 상실을 분명히 본인이 느끼고 그 상실을 내가 노력으로 그 상실을 메꾸려고 하니까 점점 더 정신병자의 정도가 더 심한 거예요. 최고의 정신병자는 가말리엘이에요. 가말리엘 가만히 있어. 교회 목사님들 설교하면 지금 정신병자들이에요. 사람을 자기만 지옥 가면 안 되고 남들까지 지옥을 다 보내요.


상실은 인간에게 애초에 들어있습니다. 인간의 자아는 상실의 결과입니다. 결핍이 인간을 주도하고 있어요. 모자라니까, 두려움과 불안과 불안 증세와 항상 놀랄 준비를 하고 있어요. 깜짝깜짝 놀라고 두렵고 무섭고 행여나 내가 망하면 어떨까. 참 웃긴 이야기에요. 이미 망했는데 또 뭘 더 망할 게 있어요. 아 내 인생 여기서 조지고 무너지면 안 돼. 뭘 무너지면 안 돼요. 이미 바닥인데 이미 쓰레기인데 뭘 무너지면 안 되는데요. 그러면 여기서 주님의 대책이 뭐냐? 주님의 대책이 나와야 돼요. 우리가 하는 대책은 이거는 이건 다시 돌이킬 수가 없어요. 주도권을 내가가지고 있는 게 아니고 상실이 내 자아권을 지금 갖고 농락하고 있어요. 무서움과 두려움이 나를 갖고 논다고요.


지금 하나님의 대책은 뭐냐? 있지요. 사도행전 2장을 봅시다. 20절에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이게 대책입니다. 이게 뭐냐 하면은 아무리 인격적으로 훌륭하고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아도 해가 변하고 달이 변하고 피색깔로 변하는 그 천기의 대자연의 몰락, 달의 몰락이 아닙니다. 완전히 별의 몰락 해의 몰락, 몰락 앞에 자신의 인격으로 그걸 저지할 수 있습니까? 안 되죠. 인간들이 뭘 모르냐 하면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지금 인간 주변을 완전히 무대 세트장으로 세팅돼 있어요. 무대가 무너지면 그 무대 위에서 까불락 까불락 90 80 까불락 거린 것은 무대 넘어지면 다 깔려 버립니다. 못 빠져나와요.


인간은 자연에 갇혀 있는 꼴이에요. 그 자연을 하나님께서 뭐냐? 그 무대 세트를 건드려 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개인적으로 인격이 훌륭하다, 뭘 했다, 착한 일 했다. 지금 해와 달이 무너질 판에 개인적으로 뭘 훌륭하게 열심히 하는 거 자기의 그 자존심을 지키고 자기의 그 선함을 유지한 거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소용 없지요. 그럼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연 자체가 무대 자체가 무너지게 하느냐 하면은 '이 상실에 대해서 마땅히 응당한 처벌이 합당하다' 이 말입니다. 상실에 대해서 주님의 조치는 너무나 냉정해요. 마땅히 심판 대상이고 심판받는 것이 이게 필수적이다.


제가 오후 설교 때 했는데 리튬 배터리 이야기했죠. 제가 그거 준비하면서 개한테 은혜 받기 처음이었어요. 못 들은 분들 위해 다시 말씀드릴게요. 개가 어느 소방관 집에 소방관 이제 출타하고 개 혼자 있으면서 리튬 배터리를 갖고 놀다가 물어뜯다가 폭발해버렸어요. 개가 얼마나 놀래 가지고 도망치고 벌써 거실 불 났어요. 그게 왜 중요하냐 하면은 주님의 모든 조치는 리튬 배터리에요. 개인적으로 개든 고양이든 인간이 됐던 그런 건 묻지도 않아요. 주님의 진노와 주님의 심판은 이미 리튬 배터리 가지고 이미 결정된 거예요. 착하게 살자 바르게 살자 이게 아무 짝에도 소용 없어요. 그냥 그대로 폭발해 버립니다.


그러면 인간로서는 그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에 대책이 있다? 없다? 대책 없습니다. 근데 대책 없는 게 주님께서 유일한 대책입니다. 왜냐 하면은 사도행전 2장 1절에 "오순절 날 저희가 모이매 모였더라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가 있어 저희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이 혀같이 갈라지는 것들이 저희에게 임하더라 저희가 다 성령 충만을 받아 성령으로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이렇게 되어있죠? 이 오순절 2장 1절에서 4절 이야기에 대해서 다시 사도행전 2장 18절에 "그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주리라 저희가 예언하리라" 돼 있죠. 성령이 왜 왔습니까? 성령은 아까 20절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이르기 전에 누가 먼저 왔어요? 성령이 먼저 와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그 다음에 나온게 21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런 하나의 메커니즘 절차 일방적으로 누가 만든 거예요? 주님이 일방적으로 만들었어요. 주님이 마지막 때에 전체적으로 무대 세트 무너지는 총체적인 저주의 날이 오기 전에 먼저 뭘 주셨다? 성령을 줘 버린 거예요. 인간들은 왜 성령이 오는지도 몰라요. 물론 오고 난 뒤는 알게 되죠. 오고 난 뒤는 알아요. 아 성령이 이것 때문에 왔구나.


요한복음 15장 26절, 27절은 오늘 강의를 하면서 여러분들이 외워볼 만합니다. 뭐 모든 성경이 다 외워 볼 만하지만. 특히 유념할 필요가 더 있어요. 자 제가 읽겠습니다. 15장 26절 27절 "내가 아버지께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그가 누구냐 하면 성령이에요 성령이 나, 나는 예수님이죠. 성령께서 하는 일은 누굴 증거한다? 예수를 증거하듯이 "너희들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으므로 증거하느니라" 그러니까 사도의 개인적인 상실을 메꾸고 이런 건 없어요. 그거는 본인 개인적인 희망 사항이에요. 지금 주님의 스케줄에는 내가 얼마나 행복하냐 이런 건 하나도 없습니다. 성령님이 오로지 예수님만 증거하듯이 성령님 받은 너도 성령의 하는 일에 이끌려서 오로지 뭐만 하면 돼요? 예수님만 증거하면 돼요. 내가 정신병자든 내가 상실하든 결핍을 졌든 내가 뭐가 됐든 그거는 일체 주의 일에 상관 없습니다. 내가 치사하든 내가 비겁하게 살든 아무 주님과 관계 없는 거예요.


자, 여기서 그렇다면 나의 상실과 치부와 내 노출 이런 것이 무섭고 떨리고 하는 것은 "누구야 너?" 누가 나를 이런 식으로 벌벌 떨게 만들었어요? 성령의 반대는? 악령이죠. 악령은 이미 모든 인간에게 왔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악령의 지시에 따라서 선악과 지식 가지고 각자 자기의 부끄러움과 치부와 상실과 결핍을 메꾸기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가말리엘처럼 온갖 일과 열성을 다한 겁니다. 비록 하나님 안 나와도 선악이 있어서 착함으로 자신의 악을 메꿔 보려고 아주 노력 그 치열한 삶의 투쟁을 하는 겁니다.


비록 내가 어릴 때 철딱서니 없어 내가 돈 벌이 간다고 내 너 좀 소홀히 했지? 걱정하지 마. 내가 다시 오게 되면 네가 원하는 장난감 사 주고 옷 사 주고 너 하고 싶은 학원 보내고 좋은 대학 내 다 보내 줄게. 아버지 노릇 톡톡히 한번 할게 그러면 그런 이야기를 듣던 딸이 뭐 그런 일 잘 없는데 만약에 성령을 받았다 칩시다. 그러면 그 딸이 하는 말이, 아버지! 장난감 받고 좋은 옷 받고 좋은 대학 가면 그것으로 해와 달이 무너지는 걸 커버할 수 있습니까? 너 어디서 그런 거 배웠냐? 좋은 남자 시집 보내주고 다 해 줄게 그러면 그게 구원입니까? 그게 하나님 저주와 상실을 결핍을 그걸 메꿀 수 있어요? 안 되잖아요. 안 된다 이 말이죠. 세상은 이걸 모르는 게 전부 정신병자예요.


아버지 돌아가시고 기일 와 가지고 "오빠는 그런 게 아니야." 벌써 싸움을 보세요. 지금 정신병자 아닙니까 전부 다? 어떻게 형님은 혼자 아버지 재산을 그 과수원 2천평을 혼자 다 가집니까? 우리 n분의 1 합시다. 여러분 우리가 몸이 아픈 거예요? 정신이 아픈 거예요? 우리가 어느 쪽이 지금 문제입니까? 어느 쪽이 아파요? 몸 아프면 병원에 가면 되잖아요. 그럼 정신 아픈 것은? 의사 지도 정신병자인데 뭐. 성경은 말합니다. 하지 마라 이 말은 아무도 구원받을 자격이나 구원받을 사람 아무도 없다 이 말이에요.


자 그래서 여기서 문제 하나 나갑니다. '육신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반납합시다' '열매 맺도록' 여기에 뭐가 등장해요. "잠깐" 하고 또 이제 악령이 악령도 일 해야 되고 노는 악령은 없습니다. '자아'를 집어넣어요. 또는 자기 자아를 집어넣어요. 주체적으로. 뭐라고 하냐 하면, 우리의 육신은 하나님 것이지 나의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내가 잘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갑자기 '내가 잘되기 위해서'가 들어가요. 그래서 우리가 열매 맺혔냐 안 맺혔냐 내가 확인합시다. '내가' 또 들어가요. 그래서 사도는 성령을 통해서 자기를 비운 사람, 반면에 가말리엘과 그 작당들은 일당들은 뭡니까? 자기를 비우지 못한 사람. 그걸 어떻게 아느냐? 이 작당들이 하는 말이 하나님은 전하되 뭘 전하지 마라? 예수 이름은 전하지 마라. 이제 예수 이름이 뭔가 윤곽이 드러나죠. 그 자세한 윤곽은 다음 시간에. 10분 쉽시다.


강남-사도행전 5장 34절 (말씀에 실려) 251021b-이근호 목사



악령이 존재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활동 중에 요소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악령은 말하기를, 하나님 전하는 걸 악령은 말리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 말이죠. 악령이 그렇게 했으니까 사도는 자기 할 일이 명백해졌습니다. 뭐만 전하느냐 하면 예수의 이름만 전하면 돼요. 악마가 가르쳐준 거예요. 예수의 이름만 안 전하면 된다잖아. 그러니까 예수의 이름만 전하면 돼요. 예수 이름만. 고맙다 마귀야. 사람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요 죽은 자가 뭐냐 하면 죽은 자의 특징은 하나님 관점에서 보면 죽은 자의 특징은 인간의 관점은 숨 안 쉬는 게 죽은 자다, 하나님 관점에서 죽은 자는 일이 없는 자예요 '일이 없는 자'. 예수님께서 일이 없을 때가 있었는데, 그거는 사흘 동안 일이 없었어요. 왜? 그건 죽은 채로 있었고, 그 다음에 그 일은 죽었다가 살려내는 일은 그거는 아버지의 몫으로 넘어가요. 아버지께서 또는 아버지가 보낸 영께서 죽은 자를 살려냅니다. 일이 없는 자예요.


그런데 성령이 함께 있는 사람은 일이 없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성령께서 일을 시키니까 일이 끊어질 데가 없어요. 그러면 성도는 뭐냐? 성도는 '주님의 작업 지시의 수용자' 주님의 작업 지시를 받는 자가 성도입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성도가 주의 작업 지시를 받을 때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할 때에 성도 자체 내에서 어떤 갈등이 생기냐 하면 1번 '이 주님의 지시가 혹시 내가 나보고 지시한 것일 수 있잖아' 하는 거예요. 내가 나 보고 지시해놓고, 주님의 지시라고 내가 우길 수도 있다는 문제. 그렇죠? 그 다음에 2번 '진짜 주님의 작업 지시' 이 두 가지가 있겠죠. 그러면 나는 그러면 1번 안 하고 2번 할래. 진짜 작업 지시에 따를래 하는데 2번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모든 작업 지시는 주님의 작업 지시라고 시도해놓고 따지고 보면 자기가 자기한테 내린 작업 지시예요.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주님의 지시를 받으면서 뭘 하냐? 미리 예상합니다. 미리 예상한 것은 주의 작업이 아니고 내가 상상한 거예요.


그러면 진짜 주님의 작업 지시는 뭐냐 하면 주의 작업 지시라고 여겼던 것이 내가 상상한 것입니다 라고 기쁘게 인정할 때 그게 주님의 작업 지시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의 작업 지시라고 해가지고 한 100명을 전도했다. 그런데 보니까 '그거는 주님의 작업 지시를 빙자해서 내가 나한테 지시를 내린 거야' 이거 안 하면 나는 주님께 매 맞을 수 있다고 생각해 가지고 안 처맞으려고 이렇게 100명 전도했다 합시다. '아 이건 내가 나한테 지시한 거구나' 아는 그것이 바로 뭐냐? 주님이 그 일을 시킨 이유가 사후에 일 터지고 난 뒤에 비로소 아는 거예요. 목사님은 그걸 어떻게 장담합니까? 따지면, 바로 십자가의 전후가 십자가의 사건을 반복하기 때문에 그래요.


십자가의 반복이란 뭐냐 하면은 십자가 지기 전까지는 몰랐는데 십자가 지고 난 뒤에 진짜로 부활할 줄은 아무도 예상한 사람 아무도 없어요. 심지어 막달라 마리아도 예상 못 했어요. 시체 잘 있는가 구경하러 갔지. 부활한 걸 확신하고 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부활은요. 부활은 주님이 주님 쪽에서 움직여서 찾아와야 부활을 알 수 있어요. 그러면 인간이 아는 부활은 뭐냐? 미리 예상하는 부활이에요. 예상하는 부활은 그건 부활이 아닙니다. 내가 예상하는 일은 주의 일이 아닙니다. 부채표가 없는 것은 뭐다? 활명수가 아닙니다. 유사품에 주의하세요. 인간은 종교를 만들어낼 수 있는 재주가 있는 자들이에요. 복음을 제조하는 재주가 인간에게는 마귀와 더불어서 복음을 만들어내요. 제조한다고요.


스스로 사기 상실을 감추는 방법에 기독교 QT가 들어가는 거예요. 우리 교회에 누가 질문을 해가지고 갑자기 QT가 떴던데 QT가 생각 나는데 김양재 여자 목사 설교 듣고 설교를 요약을 누가 올려놓으니까 어떤 장로님이 이거는 왜 목사의 검증, 교과서 검증 안 거치고 올려놨냐 하는데. 그 김윤수 집사님이 올린 이유는 들어가서 한번 보면서 이게 우리의 평소에 밑바닥에 녹아있는 이런 신학적인 바탕을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스스로 점검하라고 올려놓은 거예요. 신학이라는 건 뭐냐 하면 생명을 죽여놓고 내 것으로 만드는 작업이 신학이에요. 그거 죽은 거예요. 여러분 이순신 장군 귀신 만날래요? 아니면 이순신 장군 그림 볼래요? 어느 것이 마음 편합니까? 한산도 이순신 장군 그림 아이고 잘생겼네. 이거는 이것 때문에 밤잠 못 자고 그러지 않아요. 그런데 어젯밤에 새벽 2시 45분에 이순신 장군 귀신 찾아오면 이거는 기절합니다. 말씀은 생명이지 신학이 아니에요. 신학은 다루기 쉬운 거예요. 기성품이에요. 인공품이라고요. 요래요래 해가지고 이거 하면 나는 오늘 죽어서 천당 간다. 이거는 체제 이성과 논리로 집어넣는 것은 이건 죽은 거라고요. 산 게 아니고.


왜 그러냐 하면은 진짜 생명은 내가 죽은 자로 만드는 게 생명이에요. 죽은 자가 무슨 내 자존심을 챙기고 나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주님 나 구원받을까요? 덜 처맞았구나 이게. 니 죽고 살고 천당 지옥은 주님 생명 앞에서는 그런 소리 하는 게 아니야. 뭐냐?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그러고 끝나는 것이지. 직접 주님을 안 만나니까 요모조모 따져가지고 가면서 계속 어느 신학이 나한테 유리한 신학이고, 어디 백화점 쇼핑 왔어요? 어디 신학 쇼핑 왔습니까? 십자가라 하는 것은 십자가 전에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예수님만 구원받겠다는 것 또는 예수 이름으로만 구원받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취지입니다.


그 내용은 제가 어제 대구 강의에서 했어요. 바늘 가는데 실 간다. 따라서 인간의 이름은 탈락, 주의 이름에 합세해서 구원되는 거예요. 주의 이름은 십자가를 통해서 보면 어떤 인간의 이름도 주의 이름이 하는 일을 예측하거나 예상한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결과로서 성령을 통해서 결과로 주어지니까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성령은 뭐만 이야기한다? 주님의 하신 일만 증거하듯이 성령 받은 사람도 주님의 하신 일만 성령 받았기 때문에 성령은 일 시키기 때문에 성령의 일은 "이것조차도 주께서 십자가를 증거하는 용도로서 벌어진 사태입니다." 하고 증거하는 거예요. 나의 존재까지 포함시켜서. 내가 해외여행을 간다? 이거 무슨, 놀러 갔지? 하는데 이게 십자가의 일입니다.


놀러 해외여행 가보세요. 특히 추석 명절 가보세요. 고생 얼마나 했습니까? 그 고난, 하지만 현재 고난은 장차의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 매사가 여행 가는 것 해서 캄보디아에 가서 참 피곤합니다. 매사가 '너 이미 죽은 자야' 라고 알려주시는 우리가 예상 못한 주님의 십자가 일인 것을 아는 기회가 되는 겁니다. 물론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죠. 제가 지난 여름에 책 사러 서울에 오는데 책 제목이 이래요. '색을 입힌 사진관' 가격부터 미리 참고를 해드립니다. 3만 8천원. 비싸요. 4만 8천 원. 홈쇼핑 안 나옵니다. 그냥 시중에 교보문고 가서 사야 돼요.


뭐냐 하면 1907년부터 1970년대까지 지나간 흑백사진을 칼라로 색을 입혀서 그때 그 당시에 우리나라 구한말 조선 시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고 일제시대 때 6.25 때 어떻게 살았는지를 책으로 내가 보기엔 귀한 자료예요. 이렇게 시대별로 해가지고 보게 되는데 그 사진책을 보면서 뭘 생각했냐 하면 저 백발 노인 또는 저 1900년대에 구한 말에 있는 그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어떤 세계관이 있었을까? 그게 궁금한 거예요. 참고로 4살부터 노인 때까지 담배 다 피웠어요. 곰방대, 긴 담뱃대 해가지고 4살 다 피운 거 아니지만, 4살부터 해도 식구들은 안 말렸어요. 도대체 어떤 사고방식, 어떤 인식이 들어있기에 그야말로 해맑아요. 해맑고 평화로워요. 일제가 오든 미제가 오든 북한제가 오든 러시아제가 오든 그들은 서민들은 아무 상관이 없어요. 해맑고 곰방대에 담배 피면 끝나요. 아프다? 죽으면 끝나요. 무슨 병명을 만들어내 가지고 이거는 무슨 필요 없어요. 그냥 아프잖아요. 그러면 그냥 그냥 아파요.


도대체 그들의 사고방식은 뭐가 들어있었느냐 이 말이에요. 그런데 그 사진 찍어보니까 개도 나와요. 개는 요즘 개하고 똑같아요. 똑같은데, 요즘 개의 정신은 벌써 달라졌어요. 이미 많이 세속화 되었는데 그 당시에 개는 순수해요. 주인 닮아서. 뭘 믿느냐? 이걸 믿었어요. '운명'을 믿었어요. 종교, 불교, 도교 관계없어요. 천주교 관계없어요. 인간은 1차적으로 운명을 믿습니다. 운명을 믿는데 조물주의 운명을 믿거든요. 이게 뭐냐 하면 아까 얘기한 거, '큰 어른'이 있어요. 그 운명의 큰 어른을 나타난 자가 누구냐 하면 '임금님'입니다. 임금님이에요.


전에 이야기했지만, 이순신 장군이 민족을 위해서 싸웠습니까? 임금님을 위해 싸웠습니까? 임금님, 이순신 장군의 사고방식에 민족 같은 개념 없어요. 백성 개념도 없어요. 오직 임금이 살아야 그 다음에 이 큰 어른이 있어야 우리가 산다는 아닙니다. 우리가 산다는 건 근대 개념이고 큰 임금이 존재해야 나의 의미가 살아요. 비록 나는 죽더라도 내가 지금껏 살아왔던 의미는 임금님만 멀쩡하다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거예요. 그걸로 충분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옛날 사람들은요. 60, 70 안 살아도 괜찮아요. 임금님 밑에서 산 그걸로 행복해요.


이걸 아까 첫 시간에 얘기한 이게 뭐냐? '아버지 이름으로 사는 것' 비록 아버지 이름이 보이지 않고 추상적이고 상상적이지만 그 추상화가 그들의 세계관을 평화롭게 붙잡아 주었어요. 나는 그 큰 어른 앞에 임금님 앞에 나는 진상 보통 진상 같으면 안 좋은 의미잖아요. 그런데 옛날에는 진상 같으면 제일 좋은 걸로 바치는 거예요. 요즘 진상이 나쁜 의미가 된 것은 좋은 걸로 바쳤는데 가짜가 되가지고 "어디 이런 걸 바쳐?" 할 때는 요즘 말로 "이 진상이" 진상하는 게 좋은 바침이다 어쨌든 진상은 바치는 거예요. 바치는 걸 영광으로 여겼던 겁니다. 임금님을 위해서 바쳐지는 것.


여자가 태어나서 궁녀가 되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던 거예요. 그때는 전부 다 정신병자 맞아요. 상상에 어른 될 자격도 없는데 그런 거 묻지도 않아요 자기 인생 문제가 아니라 임금님 그 자체로서만 충분해요. 임금님이 폭군이 되든 폭군의 셰프를 현대에서 불러오든 상관없어요. 그냥 임금님 존재 자체로서는 행복해요. 이 정신병자가 어떤 정신병자냐 하면 구한말 전부 다가 행복한 정신병자예요. 그런데 우리나라에 드디어 근대 사상이 들어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민주주의예요. 인간 위에 인간 없고 인간 밑에 인간 없다. 여기서 생긴 것은 뭐냐? 모두 다 '불행한 정신병자'예요. 왜? 아버지가 없어. 결혼식 해도 주례 없어요. 없애버려요. 젊은 아들 태어나도 소용 없어요. 지 개성 찾고 있어요. 말도 안 돼. 남자가 이런 거 하고 여자는 코에다가 입에다가 방울 달고 문신해가지고 어깨에 용이 막 올라와서 승천해 호랑이 있고. 왜 그럽니까? 나한테는 아버지 같은 거 필요 없으니까 내가 아버지니까 내가 신이니까. 내 돈 내 쓰고 내가 뭐 고급 차를 몰든지 간섭하지마 내 돈 내가 쓰는데 간섭하지 마라. 여러분 몸이 아픈 건 아무것도 아니죠?


엎어져가지고, 아야 이거 무릎 깨진 거 여러분들 관절 안 좋은 거 가가지고 주사 맞고 아프지만 근본적으로 지금 마귀가 병 정도 관절 뭐 이렇게 종기 난 거 이 마귀가 그런 정도 다루는 게 아니에요. 마귀가 노리는 건 따로 있습니다. 성경 마태복음 15장 봅시다. 오늘 가말리엘 욕 많이 먹을 거예요. 15장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17절에서 18절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내어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뭐가 더럽다 했습니까? 마음이 더러운 거예요. 마음이 더럽기 때문에 더러운 마음으로 더러운 마음을 고칠 수는 없다. 이건 당연하잖아요. 더러운 마음에서 나온 게 무슨 더러움을 고칩니까?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 마음은 영원토록 더러운 거예요. 그렇다 것은 마귀가 다루면 다루어지는 거예요. 어쩔 수가 없어요.


그 다음에 누가복음 이거는 다른 분 한번 읽어보세요. 누가복음 12장 4절요.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5절에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이렇게 되어 있죠. 아까 오순절날 성령이 올 때에 인간은 예상 못한 게 왔어요. 인간은 나를 지킬 수 있도록 평소에 지킬 만한 힘과 권세를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온 것은 나를 지키는 거와 전혀 상관없어요. 오히려 지키려는 나를 없애줘 버립니다. 왜냐하면, 내가 있으면 주께서 일하시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에.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힘을 주는 것도 아니고 권세 주는 것도 아니고 행복을 주는 것도 아니고 성령이 와서 하는 것이 너는 이제부터 네 생각하지 말고 예수의 증인이 되어라 이걸 주신다 이 말이에요. 왜 그걸 주시는가? 이걸 주신다는 말은 예수님 증인된다는 말은 아무리 예수님을 따르고 연구해도 내 마음속에는 예수님 증인될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것을 내 마음이 이미 확정되기 때문에 내 마음에서 예상 못한 것을 주께서 주십니다. 이게 기이한 구원이라, 구원이란 기이할 수밖에 없어요.


내가 이런 인간 된다는 것은 내가 상상도 못했다. 뭐 이런 게 있어야 되죠. 만약에 여러분들이 예수의 증인이 되면 이렇게 해야 돼요. 스스로 "미쳤어? 미쳤어. 왜 이래? 돈도 안 되는 거" 하면 주께서 "원래 미쳤어 네가. 원래 맛이 갔어. 원래 간 거야. 원래 맛 간 걸 내가 지금 보람 있게 사용하고 있는 거야. 너 이래도 미쳤고 저래도 미쳤어" 다시 말해서 이래도 갇혔고 저래도 갇힌 거야. 독자적으로 자율성? 아니야. 끝까지 의존성. 자율성 아닌 끝까지 의존성. 전에는 악마의 의존성. 이제는 전에는 권세의 의존성 지금은 예수님의 의존성. 주님 없이는 못 사는데. 그렇게 만들 거예요. 그러면 그 이야기 듣고 사람들이 "정신 바짝 차렸어요. 주님 증인이 되도록 바짝 해서 나를 비우고 주님만 생각해야지" 주께서 뭐라 하냐? "하지마. 하지마. 그게 네 힘으로 안 된다니까" 우리는 백날 해놓고 그거는 주께서 하셨다고 지가 예상을 하니까 우리는 내가 예상한 것 밖에 못해요. 항상 이렇게 실패를 경험하고 사단이 나야 그 짧은 순간만 정신 차리고서 '아 주께서 나를 가지고 사용했구나' 이래야 알지. "주께서 저를 사용하여주시옵소서" 백날 해도 사용 안 합니다.


특히 이 누가복음 12장 대목에서 마태복음 10장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오는데요. 주께서 우리를 살려주지 않는다는 거예요. 왜? "네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하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라" 이렇게 되어있거든요. 이 말은 우리를 안 죽인다는 말이 아니고 우리를 죽여서라도 그 네가 죽음을 당함으로써 비로소 이 세상보다 더 센 세계가 있다는 것 지옥이 있다는 것을 네 죽음 자체를 가지고 내가 너를 증거토록 하겠다. 세상에다가 증거하도록 하겠다는 거예요. 주님은 참 잔인한 주님 주인이십니다. 왜? 끝까지 우리 죽음까지 딸딸 다 긁어서 우리 죽음까지 낭비 없이 사용하시는 주님이에요. 아 독해. 정말 너무너무 독한 거예요.


자 그렇다면 여기서 곧 이야기 계속 해봅시다. 조선시대에 이제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 합시다. 우리나라는 예를 들면 쉬워요. 뭐냐 하면은 임금님이 있었죠. 임금님이 있었고, 구 한 말의 모든 충성스러운 그 의병들, 이 사람들은 뭘 지키기 위해서? 큰 어른을 지키기 위해서 싸웠어요. 그래서 고종 죽을 때도 크게 울었고 아들 순종 죽을 때도 크게 울었고 순종 죽으면서 등장한 게 뭐냐 하면 바로 1919년 3.1운동이 등장했죠. 임금님 없이는 내가 살아도 산 게 아니에요. 우리의 정신을 잡아줬으니까요. 나를 가볍게 여길 수 있도록 해준 큰 그 비중을 차지하는 무게 중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데 현대인들은 뭐가 없어요? 임금님이 없어요. 네가 왕이야? 우리는 왕이 필요 없다. 트럼프 지금 시위하고 있고요. 윤석열 지가 왕인 줄 알고 계엄하다가 걸려가지고 술도 못 먹고 하여튼 했지요.


임금이 없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그 절차를 그 과정을 유심히 색을 입힌 사진관을 통해서 조사해 보면 임금님 대신에 있는 게 뭐냐? 임금님보다 더 높은 게 드디어 조선시대 때 찾아왔어요. 그게 뭐냐 하면 '권세'였습니다. 비로소 권력 정치권력이라는 거예요. 정치 권력이 들어오면서 누구든지 이제부터는 상놈이든지 양반이든지 이 권력의 약점만 노리면 이 권력 자리에 자기가 차고 들어갈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상놈이든 신분이 없어지고 자기가 머리 똑똑하고, 머리만 똑똑하면 안 되지요. 편당, 여기 보고 저기 보고 자기 패를 만들어야 돼요. 자기 패를 만들면 이 권력은 이게 고정적인 것이 아니고 늘 유들유들한 유동적인 권력이다 이 말이에요. 권력이 되면 자기가 아버지가 돼요.


자 그럼 여기서 제가 오후 설교에 했던 거 다시 한번 잠깐 해봅니다. 마야 종족이 2700년 거의 3천 년까지 이루어진 이유는요. 설교 시간에 잠깐 언급했지만, 지도자란 신의 아들인데 신의 아들 지도자의 특징은 뭐냐? 나 죽을게, 너희 살아라 이런 정신으로 그 문화는 유지했습니다. 왜? 죽은 자의 영웅적인 죽은 자를 추도하는 그것이 큰 어른이기 때문입니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이걸 대타자다. 프로이드 이론이 여기서 나왔어요. 아버지 이름으로 아버지 이름이 대타자인데 큰 타자 존재하지 않죠. 큰 타자. 다만 상상할 뿐이죠. 신데렐라의 대타자가 현실로 나타난 게 바로 왕자님이죠. 12시에 딱 등장한. 12시에 만났던 그 왕자님이 신데렐라의 대타자입니다. 백설공주의 대타자도 역시 잠자는 공주에 뽀뽀해서 병을 낫게 한 그 대타자. 대타자는 그쪽이 희생해서 누가 산다? 내가 산다. 이게 바로 대타자. 이게 왕이고 신은 우리를 살리는 신인데 누가 희생자가 누구냐? 왕이 희생자가 되면서 우리를 살릴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은 왕을 영웅증을 대대로 기르면서 후손들에게 우리는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우리 민족을 잡아주는 그런 영웅이 있다는 쪽으로 해서 인간들이 범할 수 있는 모든 정신병을 사전에 예방이 가능했던 거예요.


그러면 이것이 국가 단위로 이렇지요. 이걸 가족 단위에서 보이지 않는 큰 어른은 누굽니까? 엄마가 아니고 누굽니까? 아버지죠. 가족 단위에요. 그래서 가족들은 어디 하느냐 하면은 촌에 있다가 누구를 살리기 위해서? 병든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서 공양미 바친다는 정신으로 여기 있다가 서울역에 가면 뭐가 있냐? 그 봉고차가 대기돼 있고 어디로 갑니까? 오라이 하죠. 차장. 차장 해서 돈 벌면 어디 가요? 촌으로 가는 거예요. 필리핀 네팔 베트남 아가씨 시집와서 남편 돈 어디로 보냅니까? 필리핀 베트남 친정 보내잖아요. 캄보디아. 네팔 보낸다고요. 외화를 빼돌리는 거예요. 우리나라 옛날에 일제시대 때 멕시코 하와이에 가는 돈을 해가지고 어디 보냈습니까? 그 돈 벌어가지고 어디로 오냐 하면 우리나라 큰 어른 독립운동하는데 보태 썼어요. 그게 선이었고 그게 정신이었고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정신적 지주였습니다. 요즘 아가씨들 청년들 돈 벌면 뭐합니까? 지 배낭여행 가지.


도대체 지금 그때 그 사람들 머릿속에 도대체 무슨 세계가 들어있느냐 이 말이죠. 큰 어른이 들어있는 거예요. 따라서 그들은 종교 이전에 기독교 이전에 이미 종교인들이었어요. 그 종교를 근본적으로 그걸 다 딱딱 끊어서 박탈시킨 것이 뭐냐? 근대 과학정신이었습니다. 근대과학정신은 권력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네가 힘 세우면 네가 언제든지 권력자 될 수 있고 누굴 의지할 필요 없이 너는 남들이 너를 의지하도록 할 수 있는 것에서 네가 아는 것이 중요하다. 아는 것이 힘이다. 공부 열심히 안 할래? 수학 성적 꼬라지 봐. 이래가지고 빌어먹지. 니. 왜? 네가 신이 되어야지. 우리 가정에 네가 큰 영웅이 되어야지.


이게 아직도 우리 마음속에 누구 하나 대신 희생해서 우리 집안을 살리기를 원하는 겁니다. 재벌집 가성 재벌집하고 결혼했던 그 여자 보디가드가 무창에 가가지고 무창에서 유치원 선생님 하잖아요. 부세미인지 수세미인지 아무도 안 봤구나 아버지를 복수하기 위해서 했는데 잘 안 됐을 때 갑자기 우주라는 남자친구하고 가상혼인이 돼가지고 하는 있어요. 전부 다 뭐냐 하면은 그 드라마가 언젠가는 우리 뭔가 낙이 있어야 되지 않느냐 우리에게 희망을 있어야 되는게 아니냐 왜 그런 드라마가 인기가 있느냐 하면 이미 우리 자신이 힘에 부치기 때문에 나는 신인데 돈이 있어야 신이죠. 돈도 없는데 뭔 신입니까? 우리는 이 자리에서 벗어나기를 원하기 때문에 기독교, 불교, 종교 대신에 힘을 직접 끌어모으면 내가 우리 집안의 교주가 될 수 있고 종교가 될 수 있고 부러움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난관을 극복하는 영웅이 되기 위해서 업 업 업~ 해가지고 내가 어떤 영웅이 돼야 된다는 그런 사고방식 하는 것은 스스로의 정신병을 상실을 어떤 영웅적인 꿈과 희망으로 그걸 대체하려는 시도인 거예요. 디모데후서 2장 9절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내 몸은 갇혀 있다는 거예요. 너희들 보기에 내 몸만 갇히면 복음이 전파 안 된다고 생각되고 말씀이 전파 안 된다고 생각해? 그거는 오산이야. 내 몸은 비록 갇혀 있지만 죄인 취급하고 갇혀 있지만 뭐는 매이지 않습니까? 하나님 말씀은 매이지 않아요. 이 말 두 개를 이 본문에 있는 말씀과 결합해버리면 전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도 내가 전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복음을 전한 게 아니고 그냥 말씀이 전한 거예요. 말씀은 컨베이어 벨트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저장하는 게 아니고 말씀이 움직이는데 우리가 올라타면 돼요.


말씀이 이렇게 우리를 운반해줘요. 어떤 사건의 어떤 현장에 말씀이 들어가게 되면 남들 보기에 우리가 말씀을 전한 것 같지만 이거는 내가 한 게 아니라 내 속의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이고. "나를 묶어봐. 잡아가. 날 죽여봐" 그런다고 해서 리튬 배터리는 안 터지는 게 아니에요. 터지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이걸 안다면 십자가의 그 취지를 안다면 사도들은 오늘 본문의 사도들은 예수 이름으로 전하지 마라 했잖아요. 아까 끝에 보면 전하지 마라 했는데 전하지 마라는 것을 아주 기쁘게 여기면서 "알았어" 해놓고, 전해버려요. 왜냐하면, 본인이 전한 게 아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어요. 내가 입을 다물 수가 없어. 입을 다물 수가 없다고 내가. 사실이 사실인데 내가 중간에 입 다문다고 복음이 안 전해지는 것도 아니고. 우리는 복음의 과정이니까.


지금 1970년도까지 사진이 쭉 오면서 그때 그 당시에 어떻게 했는가 쭉 나온다는 거죠. 그러면 우리가 넣을 수 있는 것은 1970년부터 2025년 지금 이 시대에 우리의 머릿속에는 뭐가 들어있느냐? 우리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큰 어르신은 뭐냐? 이걸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큰 어르신은 뭐냐? 성도라 하면 우리 안에는 뭐가 있냐 하면은, '십자가 사건'이 들어있어요. 이 설명하는 데 아마 강의 끝날 겁니다. 이게 어려워요. 뭐냐 하면 '주님의 존재'가 아닙니다. 주님의 존재가 아니에요. 십자가 사건이에요. 왜냐하면, 주님의 존재가 되어버리면 나의 존재가 계속 살아있어야 돼요. 그런데 주님의 사건이 되어버리면 사건 안은 뭐냐 하면 일단 우리는 죽은 걸로 간주되고 죽은 나에게 살아계신 주님만 홀로 존재해서 죽은 우리를 주님의 자기의 사건이 드러날 경우에만 벌떡벌떡 살아서 일을 하는 거예요.


아까 '일하지 아니하면~' 죽은 것이죠. 이 일은 내 일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주께서 일하기 위해서 죽은 나를 주의 일에 편입시켜서 살려주는 거예요. 살려주게 되면, 여기서 산다의 개념 또는 삶의 개념이 두 개로 쪼개지죠. 첫 번째는, 주님 살리기 위해서 내가 살아야 된다. 이거 틀린 거죠? 이거 아닙니다. 내 존재가 여기서 사라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주님 살리기 위해서 내가 살아야 된다. 두 번째는, 내가 살아있는 것은 주님의 일하시는 조건으로 규정된다. 이 말은 주님의 일하심을 드러내지 않으면 나는 살아도 이거는 죽은 것이다 이 말이에요. 왜냐하면, 자기 존재가 계속 부각되어서 자기를 전도하게 된 거기 때문에 성령께서 상당히 괴로워하셔요. 섭섭해 하시는 거예요 성령께서.


여기서 마태복음 27장 25절 한번 보겠습니다. 이게 존재가 아니고 뭐라고 했습니까? 사건입니다. 사건의 특징은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사건은 존재가 아니에요. 설명을 했는데 사건은 과거 현재 그게 없어요. 사건은 시간에 개입되지 않아요. 사건은 반짝 터지고 난 뒤에 시간 바깥으로 시간 속에 섞이지 않고 날아가 버려요. 다만 사건 전과 후가 나타날 뿐인데 어쨌든 사건 자체는 없어요. 주님 자체는 없어요. 왜? 이 세상은 인간 존재의 세계이기 때문에 존재의 세계에서는 사건을 존재에다가 품거나 붙들 수가 없어요. "주님 가지 마세요" 할 수가 없어요. "저랑 살아요" 가 안 된다고요.


1972년도에 나오는 하남석이라는 가수가 불렀어요. 어릴 때 이걸 보면서 우리 형님이 하남석 가수의 노래를 굉장히 좋아하는데 특히 좋아하는 노래가 뭐냐 하면 '바람에 실려' 예요. 뭐 숙제는 아닙니다만 심심하거든 찾아보세요. 외국노래 번역한 '바람에 실려' 이 바람에 실려를 제가 허락도 없이 바꾸겠습니다. '말씀에 실려'. 왜냐? 바람과 말씀과 비슷한 것이 전부 다 이거는 붙잡을 수가 없어요. 성령 마찬가지예요. 성령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것은 마치 바람이 어디서 오는지 붙잡을 수 없듯이 존재는 바람을 못 붙잡습니다. 사건을 붙잡을 수 없어요. 붙잡으면 안 돼요. 붙잡으면 내가 신자 돼버려요. 내가 예상하는 신자가 된다고요. 우리는 내가 예상되는 신자 되면 안 되고 주님의 사건의 증인 되면 그게 신자의 조건은 오직 그것밖에 없습니다. 자꾸 내가 신자 되려고 하는 것도 마귀의 유혹이에요. 내가 어제는 신자인데 오늘은 왜 이 모양이냐? 어제 신자는 자기를 상실하는 것을 메꾸다 보니까 정신병자가 된 거죠.


바람에 실려 라고 노래가 있는데, 이걸 말씀에 실려버립니다. 그런데 이 사건의 특징을 무시한 자가 유대인들이었어요. 얼마나 무시하고 무시한 게 두려운 결과가 나왔는데 겁나는 결과가 나왔는데 마태복음 27장 25절에 나옵니다. 24절부터 보면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해서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이 빌라도가 원래 잔인한 자예요. 굉장히 잔인한 자인데 이때는 쫄았어. 예수님 앞에서 쫄았어요. 그래가지고 후딱 세숫대여 갖고 와가지고 손을 씻기면서 뭐라고 하냐면, "이번 사건에 대해서는 나 빼줘" "나 이거 빠진다 내가 한 거 아니다. 너희들 요구해서 들어준 것 뿐이지" "나는 마약 운반체지. 마약 계획해서 운반체로 캄보디아 갔지. 내가 이건 아니다" 이래서 빠지는 거예요. 그럴 때 한번 보세요. 그럴 때 백성들이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아주 겸손한 고백을 했어요. "이 백성이 다 말하되 이 피를" 이 피가 누구 피입니까? 예수의 피. 예수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자신만만하다 이 말이죠.


아직 우리의 결정은 역사적으로 온전한 역사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만만하게 "그래 그래 저주받을게" 아주 객기를 부리는 거예요. 지금 유대인의 문제가 뭐냐 하면, 오늘 제일 어려운 겁니다. 사건을 역사화시켰다는 거예요. 사건을 역사화시키면 이 역사는 가짜가 돼요. 사건은 역사화 될 수가 없습니다. 사건을 역사화시킨 게 오늘날 뭐냐면 이게 신학이에요. 신학. 예수님의 사건을 성경신학, 조직신학, 목회신학, 역사신학, 신학은 말로 왜 붙입니까? 지금 주님이 죽어서 우리가 제사 지냅니까? 지금 주님 일 안 해요? 거짓 선지자도 보통 거짓 선지자들이 아니죠? 존재는 사건을 품거나 소지하거나 내 것 만들 수가 없어요 사건은.


직원도 없고 돈도 없고 거래처도 없고, 있는 것은 태풍 상사 이거 하나뿐이잖아요. 아니면 낙담을 했죠. 태풍 상사 하나 뿐이다. 왜? 부도나기 직전이니까. 이 사건은 정답이 이렇습니다. '이 사건은 반복적으로 사건만 만든다.' 역사를 만들지 않습니다. 25년 전에 너무 은혜 받았어요. 그거 역사입니다. 그러면 오늘은? 오늘 소식이 없네. 우리가 지금 숨 쉬는 것도 주님이 주신 사건이고요. 감기 걸린 것도 지금 오늘 나올까 말까 하다가 억지로 나온 것도 사건이고 '아 오늘 집에 있자' 이것도 사건이고 어떤 사건도 내가 예상 못했는데 주께서 결과적으로 일하셔서 나한테 감기 들리고 몸 아프고 이렇게 일어났습니다. 그 사후적이고 예상 못한 것을 사후적으로 우리가 받아들인 그것이 예수의 증인,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사도가 지금 고난 받았죠. 옥에서 갇혔는데 도로 잡혔어요.


그런데 사도 입장에서는 자기를 비웠기 때문에 옥에 갇혀도 주께서 하신 일, 옥에 갇혔는데 도로 잡혀 와가지고 재판받는 것도 주의 일, '우리가 인간성 좋아서 풀어주는데 앞으로는 예수 이름은 전하지 마라' 라고 하는 것도 주의 일, 그 소리 듣고 예수만 전한 것도 주의 일, 그런데 '그 주의 일을 하니까 나는 신자다.' 그거는 역사죠. 그거는 역사예요. 우리는 그냥 매일같이 처맞아야 돼요. 쉼 없이 처맞았는데 그 처맞는 데서 오는 것이 바로 모든 일에 우리는 죄인 되어 '처맞는 일'. 우리가 이걸 가지고 '범사에 감사한다.' 미쳤지 미친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예상도 못한 일, 전세 사기 나와가지고, 3억 날리고 난 뒤에 우연히 주택 회사에서 당첨되어 가지고 56억짜리 집을 공짜로 얻었을 때, 드라마 이야기입니다. 우주 나오는 그 사람. 예상 못하죠.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에게도 그러한 예상 못한 불상사 갑자기 56억이 날라오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이거는 내가 기도 많이 해서 역시 복음 아니깐 주께서 가만 있지를 않지 이런 식으로 보상해 주는구나' 역사입니다. 또 처맞았네. 덜 맞았구나. 우리는 죽을 때까지 덜 맞았어요. 감사라 하는 것은 미리 감사하는 것은 감사 아닙니다. 예상도 못한 구석에서 감사가 나오는 거예요. 내가 예상한 감사가 진짜 감사를 가렸어요. 약간 기대한 그 고마움이 진짜 고마움을 우리는 위장했습니다. 색을 입힌 거예요. 주께서 성령께서는 그것을 뜯어내요. 내가 한 것을 뜯어내요.


끝으로 한 번만 더 하겠습니다. 도대체 오늘날 우리 머릿속에는 뭐가 들어 있는가? 우리 머릿속에는 우리 역사가 들어 있습니다. 20살 때 있었던 기쁜 일 당했을 때 30살 때 기쁜 일 당했을 때 우리는 그때마다 이렇게 외쳤어요. "주여 더는 소원이 없습니다" "아이고 내가 장가를 가다니 이제는 몸 바쳐서 주를 위해서 살겠습니다" 이런 다짐을 했던 것이 벌써 몇 번째였습니까? 얼마나 많은 다짐을 했습니까? 더는 소원이 없다는 고백을 몇 번 했어요? 그런데 엉뚱한데 사태 터져버리니까 다 날아갔잖아요. 감사하고 뭐고 간에. 와이 미? 세상에 이렇게 나오기에요? 이런 게 또 몇 번이었던가요? 거기에 대한 그 롤러코스터를 통해서 존재를 뜯어내고 그렇게 하게 하신 주인공은 바로 성령께서 주님만 증거한 것처럼 오늘날 자기를 비운 이 사도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건은 그때 그 당시에 사도들에게는 주님의 사건이 그들에게만 살아있었던 겁니다. 우리의 머릿속에 주께서 쓰레기 같은 이 죄인을 가지고 주께서 십자가를 증거하는 용도로 사용하시는 것에 대해서 일어난 모든 일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버지, 우리 피를 그 피를 우리에게 돌리라고 장담했던 그들 그 유대인의 운명이 민족의 사태가 얼마나 처참하게 깨어진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 모든 것은 함부로 이야기할 수 있어도 십자가 그 사건의 피는 누가 감히 그 내용을 알겠습니까? 우리가 망가지고 우리가 실패하는 것을 통해서 감사로 그 사건이 튀어나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