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사도행전 5:16 / 소리 기계 / 250916 본문
녹취:홍민희
강남-사도행전 5장 16절 (소리 기계) 250916a-이근호 목사
오늘은 사도행전 5장 12절에서 16절까지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기존 종족과 다른 새로운 종족, 사건의 종족이 출현하는 현상을 보여줍니다. 기존의 종족과 새로운 종족이 출현하니까 그 둘 사이에는 어떤 장벽 같은 게 있겠지요. 사건의 혜택을 입은 종족은 사건의 종족 새로운 종족이고 사건의 혜택을 입지 못한 종족은 기존의 종족이 되는 겁니다. 이처럼 기존의 종족을 두고 새로운 종족이 출현하는 것을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종말이라고 합니다. ‘종말’. 새로운 인류의 출현. 종말 또는 종말의 현상입니다. 종말의 현상이 되면서 새로운 종족이 출현하면서 이것은 하나님과 통한다 하면서 영적 존재가 되고 자동적으로 기존 종족은 뭐가 되느냐 하면은 육이 되겠지요.
우리의 관심사가 기존 종족에서 어떤 새로운 사건의 종족이 어떤 절차를 통해서 추리되는가 이것을 파악하면 되겠지요. 벌써 문제 제기하면 답 풀면 되잖아요. 기존 종족을 알아야 되고 사건 종족 둘 다를 알아서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가 그것만 알면 되는 겁니다. 결론이 궁금한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 미리 또 이야기합니다. 육에서 영으로 넘어갈 때 어떻게 넘어가는가? 기존 종족에서 영의 존재로 넘어갈 때 중간에 기계가 됩니다. ‘기계’. 기계라고 하는 것은 자아가 빠진 거예요. 자아의 누락. 아프면 보통 아프다 하잖아요. 자아가 느끼잖아요. 아프다. 내가 공황장애다 본인이 느끼잖아요. 아프면 자아를 계속 자극해서 자아를 스스로 본인이 방어하는 모습을 아픔을 통해서 노골적으로 나타나죠.
그래서 기존 종족에서 하나님께서 병을 줘버리면 자아가 극대화되면서 나는 내 자아가 건강하기를 원한다. 소중한 것은 나다 이렇게 발악을 하겠지요. 건강할 때는 남에게 베풀고 하다가 본인 아프면 본인 아픈 게 문제 아닙니까. 그렇게 되는데 자아를 더욱더 아프게 만들어요. 더 아프게 만들면 자아는 뭐가 되느냐 하면은 무능력자가 됩니다. 병이 자아를 이겨요. 나는 옛날처럼 건강하고 싶은데 병이 세게 들어오면 아 나 이대로 죽는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지요. 그럼 병한테 자아가 졌지요. 병의 힘이 자아가 버티는 힘을 이깁니다. 무능력 되게 되면 무의미자가 돼요. 아프니까 병 나아서 나도 남들처럼 살고 싶고 인간답게 살면 의미 있는데 앞으로 나의 인생 계획은 이렇다 저렇다 펼칠 수 있는데 너무 아파버리면 자기가 자기를 조절 못하니까 어떻게 대처를 못하니까 나는 있으나마나가 되지요. 의미가 없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누가 해석을 하느냐 하면은 사건의 종족 쪽에서 해석을 해요. 병든 자에게 네가 병든 것은 종말의 현상이다. 종말이라는 말은 다 같이 죽는다. 다 같이 다 죽는 게 종말이에요.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종말의 줬다는 말은 살 가치가 있는 인간은 일괄적으로 아무도 없음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세상을 더 이어갈 이유가 없어요. 싸그리 다 없애버리니까 이게 종말이잖아요. 다 같이 죽는다를 사도들이 말씀 또는 계시 또는 복음. 말씀을 전해요 사도들이. 사도들이 말씀을 전한다는 말은 사도들이 소리를 내는 거예요.
지금까지 한 것을 우리가 단순하게 이해가 되려면 요한복음 1장 23절에 보면 잘 나와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세례 주고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니까 레위인들 제사장들이 하는 말이 너 뭐야 네가 뭐야. 네가 엘리아야?! 라고 묻는 거죠. 반말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르겠어요. 그건 모르겠는데 그대로 달라질 거는 없으니까. 뭐야 엘리아냐? 아니다. 그럼 선지자냐? 아니다. 그럼 뭐야?! 뭔데 네가 광야에서 세례 주고 물세례 주고 말씀을 전하느냐. 그때 세례 요한이 이야기합니다. “나는 소리다” 소리라는 말은요 ‘나는 기계다’와 같은 말이에요. 기계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모든 자아를 없애버리고 하나님은 자기 성도를 소리만 남기는 존재로 만들어요. 그게 사건의 종족입니다. 사도들이 이렇습니다. 사도들이 뭐 힘 쎄고 돈 나눠주고 이러지 않아요. 사도가 해야 될 것은 여러분 배고픈데 오세요. 병 낫게 해줄게요 이런 게 아니에요. 오늘 본문 보세요. 병 낫는 것은 그들이 원했던 거예요 그들이. 사도가 원한 게 아니고 뭔가 얻을게 있어서 따라다닌 그들이 원한 겁니다.
그들은 삶의 자아가 있기 때문에 자아는 뭐가 있느냐 하면은 자기가 기계가 아니고 살아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목표가 있어요. 사람답게 살고 싶은 목표가 있는데 사도가 주는 것은 목표가 아니고 의미입니다. 의미. 그러면 목표가 목표로서 멈추지 않고 어디에 합류되어야 돼요? 의미에 합류되어야지요. 의미라고 하는 것은 소리의 의미. 왜 사도는 남들처럼 살지 못하고 자아 다 잘리고 기계 아닙니까. 소리로만 이 땅에 마지막 때에 소리로만 작동해야 하는가 소리로만 쓰여지는가. 그것은 그 의미가 모든 의미는 말씀이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말씀이 다 가져갔기 때문에 그래요. 말씀이 가져갔거든 말씀이.
제가 하나 예를 들테니까 이 문제를 여러분들이 풀어보세요. 해경이 중국 사람인줄 모르고 물에 빠져있는 것을 보고 자기가 대신 자기 구명조끼 벗어주고 해경이 죽었습니다. 이 죽은 해경의 장례식장에 여러분들이 참석했다 합시다. 참석하고 난 뒤에 여러분들이 떠오른 성경구절 한번 이야기해보세요. 장례식장 갔는데 울고불고 난리 났지요. 여기에 대해서 여러분이 소리라면 소리에 특화된 새로운 종족이라면 종말 때나 나타나는 기계라면 여러분 어떤 성경구절을 그 해경의 유족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조용할 줄 알았어.
두 군데만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소리라고 하는 것은 해경은 죽지 않았어야 돼 하는 이것은 의미에 속하는 거예요? 목표에 속하는 거예요? 개인적인 목표잖아요. 우리 애는 우리 해경은 죽으면 안돼. 살아야 돼. 목표잖아요. 지금 마지막 때는 목표는 없어요. 기계이기 때문에 목표에서 어디로 가야 돼요? 의미로 가야 돼요. 그 의미는 누가 독점하고 있다고요? 말씀이 독점하고 있어요. 말씀에 의해서 의미를 퍼트리기 위해서 어떤 해경이 물에 빠져 죽는 일이 벌어진 거예요.
전도서 3장 1-3절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2절 보세요. 날 때 있으면 무슨 때 있다? 죽을 때 있잖아요. 뭐 문제 있어요? 위로를 하면 안돼요. 인간은 위로를 받을 자격이 없어요. 인간은 위로를 받는 것이 아니고 자아가 삭제가 되어서 목표에서 의미로 넘어가줘야 돼요. 목표에서 의미로. 목표 백날 챙겨 살아봐야 그거 의미 없어요. 의미 없다고요. 그 사람 해경 때 안 죽고 90 되서 죽어도 의미 없어요.
의미라는 것은요 자아가 기계가 될 때 뾰족하게 모습을 드러내요. 자아가 있으면 의미는 의미가 아니고 목표로 바뀌어 버려요. 내가 사는 이유는 내가 사는 목표는 나의 사명은 그건 당신 자아가 살아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잖아요. 그냥 소리라니까요. 소리. 자아가 빠진 상태의 소리라니까요. 사무엘상 2장 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의미는 누가 갖고 있느냐 하면은 어떤 모든 일도 누가 하셨다? 여호와께서 하셨다 그게 의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 의미에 안 들어와요. 안 들어오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나의 목표를 여호와께서 좀 챙겨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자기 목표가 따로 있어요. 그게 기존 종족이잖아요. 기존 종족을 한 자로 뭐라고 했습니까? 육. 육이에요. 그러면 새로운 종족 사건의 종족이 등장한 이유는 이겁니다. 이겁니다. 기존 종족의 한계를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 말씀 사건이 도달되게 만든 거예요. 한계입니다. 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고 여기 장벽이 있어요. 못 건너와요 인간의 힘으로. 장벽을 장벽답게 하기 위해서 기존 종족이 사건의 종족, 하나님의 영의 생활을 하게 된 새로운 종족으로 건너오지 못하기 위해서 이 사건의 종족 영적 존재가 마지막 때 출현한 겁니다. 육의 한계를 보여주기 위해서. 한계라는 말을 왜 집어넣느냐 하면은 내가 잘 했더니 그들이 구원받았다 이건 한계가 아니에요. 꼬신 거지.
한계는 그들이 결국 이해 못 했다에 성공했다. 그게 한계잖아요. 결국 그들은 이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 못했는데 주께서 성공했다. 더 분명히 이야기하면 그들이 중도 탈락하는 그러한 출현에 대해서 즐겁다. 재밌다 또는 고맙다가 되지요. 복음 알려고 애를 쓰는데 땡 탈락. 구원받으려고 애를 쓰는데 도저히 납득이 안돼. 납득이. 어떻게 하나님이 어떻게든 사랑의 하나님이 나를 건지려고 애를 써야지 내가 이해가 안 되는 이야기를 왜 하느냐. 그건 네가 소리가 안 되고 자꾸 자아가 구원받으려고 애쓰기 때문에 그렇게 되어버리는 거예요.
사도행전 5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14절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15절에 뭐라고 나옵니까? 심지어.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할 때에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말에 의미가 뭔지 몰라요. 모르는데 저분한테 가면 못 고치는 병이 없다 해서 중풍병부터 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나왔는데 그 사람들이 고침을 받았지요. 귀신도 나갔지요. 귀신 나가면 멀쩡해져요. 멀쩡하지만 구원이 아니에요. 구원은 소리가 되어야 된다. 나 예수님 덕분에 멀쩡하게 되었어 건강하게 되었어 이거는 역시 자아지요. 소리가 아니라고요. 은근한 자기의 목표를 발산한 거예요. 예수님 만나서 나의 병을 고쳤으니까 나는 구원받았다. 이거는 본인의 목적이에요. 본인의 목적이고 목표고 거기에 하나님을 이용한 거예요. 소리가 아니라고요.
소리가 되려면 앞에 항상 붙는 게 있어요. 나는 아니다. 너 인간이야? 나 인간도 아니야. 인간이 아니면 뭐야? 나는 소리야. 나는 성령이 움직이는 그냥 기계다. 그러니까 자아가 없으니까 어떻게 돼요? 분노하는 게 있습니까? 분노? 없지요. 우리 손자가 가는 유치원에 이번 달 멘트가 있어요. 아침에 데려가면 선생님하고 인사하고 학부모한테 이번 달 다짐을 말하는 거예요. 예의 바른 어린이가 되겠습니다. 이게 이번 달이에요. 지난달은 배려하는 어린이가 되겠습니다. 자, 예의가 언제 깨집니까? 분노할 때 깨지지요. 왜 분노하지요? 자아가 있기 때문에. 자아의 어떤 목표가 있기 때문에.
만약 여러분들이 영적 사람이 되가지고 목표는 없고 기계가 무슨 목표가 있습니까 시키는 대로 하는 거지. 로봇이 목표가 있습니까? 없잖아요. 말씀이 살아있지 인간이 살아있는 게 아니잖아요. 인간은 죽어있고 살아있는 것은 말씀밖에 없어요. 이걸 사도가 전하는 거예요. 그게 종말 현상이에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진짜 주의 말씀을 전하는 소리가 된다면 어떤 혜택이 주어지느냐 하면은 소리한테는 모든 걸 용납해줘요. 모든 걸 용서해주고 모든 걸 용납해줘요. 용납 안되는 게 하나도 없어요. 주님께서 뽑아낼 중요한 것은 소리가 중요하지 너 인간성 인격이 얼마나 훌륭하냐 그런 것은 애초당시 그건 삭제한 거예요. 너 한달 수입이 얼마야? 너 몇 평짜리 아파트 살아? 그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습니다. 몇 평짜리 아파트 묻지 않는다는 말은 200평짜리 아파트 살아도 상관없다는 말이에요. 살짝 기분 좀 좋아지죠.
소리만 뽑아서 사용할 참인데 내가 한 달 수입이 1억이 되든 10억이 되든 그건 아예 고려대상이 안돼요. 전과 7범이 되든 10범이 되든 고려대상이 안된다고요. 네가 살인 강도인지 창기 창녀인지 그런 건 묻지도 않는다니까요. 소리만 뽑으면 되니까요. 세례 요한이 옥에 갇히잖아요. 세례 요한 인생 조졌습니까? 세례 요한이 소리이기 때문에 인생 조졌다는 말은 본인에게 어울리지 않아요. 자기 인생이 없었는데 무슨 조지는 게 없는데. 병 고치려고 온 사람들 그래서 귀신 쫒아내려고 오는 것 이 모든 것은 그들이 그걸 목표로 왔다면 그건 사도의 말씀의 소리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병은 나았는데 그것은 예수님께 병 고침 받고 떠난 사람하고 똑같은 거예요. 그 사건의 반복이에요. 동일한 환경의 반복이니까. 병을 의미 차원에서 봅시다. 병 주시는 분 누구냐? 여호와 하나님이죠. 그렇죠? 그러면 병 고치시는 분이 누굽니까? 역시 하나님이죠. 그럼 병 들었다는 말은 하나님이 지나가고 하나님이 일하심을 보여주는 하나의 재료가 되지요. 이 병 고침. 그런데 왜 하필 병이냐. 모든 인간은 이미 죽어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죽어 있어요. 태어날 때부터 죽어있는데 인간이 이걸 마치 나는 살아야 마땅한 것처럼 오해를 하고 있어요. 자기 인생에 대해서.
그런데 여기에 병을 누가 줬어요? 주님이 병을 줬잖아요. 주님이 병을 줬다는 말은 네 본래의 모습은 살아야 마땅함이 아니고 반대로 죽어야 마땅함이 네 원해 모습이다. 이걸 알려주기 위해서 병을 준 거예요. 그러면 이것은 병 낫기를 목표로 하다가 말씀이 와버리니까 병이 하나의 목표에 소속되는 게 아니고 의미에 소속되지요. 의미에 소속되었으니까 병을 통해서 뭐냐? 나는 애초부터 병 들어야 마땅하고 병 안 들어도 죽고 병 들어도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내 진짜 모습이라는 것을 알지요. 진짜 모습을 알기 때문에 병 낫고 병 안 낫고는 누구 소관으로 넘어갔습니까? 이건 내 소관이 아니고 누구 소관입니까? 주님 소관으로 넘어갔잖아요. 이게 의미잖아요.
이게 주께서 우리에게 병 주시고 살리시고 태어나게 하시고 죽게 하시고 어떤 사람은 50년 살게 하시고 100년 살게 하시고 그 모든 것은 그걸 우리 목표로 삼으라 하지 않고 그걸 의미로 주님의 의미가 나한테 도달했다고 봐야 된다 이 말이죠. 안 찾아오면 이 의미 있는 복음이 안 찾아오면 어떻게 하느냐? 자아가 딱딱해져요. 자아가 딱딱해집니다. 딱딱해지니까 병 낫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는데 병이 안 나았어. 안 나으면 인간은 아 안 나았구나 이렇게 멈출 위인이 아니에요. 왜? 진짜 병은 육체적 병 말고 진짜 병은 바로 원래 바탕 자체가 병 들었기 때문에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주님께 분노를 나타냅니다. 저항합니다. 발작을 일으키죠. 대듭니다.
너희들 말이야 내 가치 모르지? 그렇지? 내 의미 모르지? 자아 중심적 발언들이 막 쏟아져요. 나 소중하단 말이야. 나 귀중해. 갑자기 의미를 드러내야 되는데 자기 목표 자기 희망이 막 나와버렸어. 소리가 되어야 되는데 하나의 기계가 되어야 되는데 괜찮은 인간이 되어 버렸어요. 괜찮은 인간. 어젯밤에 꿈을 꿨는데 실감나요. 진짜 같아요. 바깥에 나가서 교인들하고 집회를 하는데 세상에 담당하는 집사님이 마이크를 안 가져왔네. 마이크를 안 가져와가지고 얼마나 황당한지. 마이크가 없으면 목이 가잖아요. 그때 무슨 생각났느냐 하면은 산상설교가 생각났어요. 오병이어 할 때 남성만 오천명이잖아요. 주님 목 다 나갔나?
집사님 보고 왜 마이크를 안 가져왔습니까? 아 진짜.. 꿈 속에 장소가 포항 쪽이었어요. 그래서 마이크 없이 하려면 어떤 펜션을 가야하는데 헤브론 펜션을 가야되나. 그 근처에 해수욕장 있거든요. 목사님하고 얼마 전에 갔던. 그 펜션에 몇 명 들어갈 수 있는지까지 계산한다고요. 실감 나요 실감 나. 거기서 뭘 느꼈느냐 하면은 깨보니 꿈이에요. 꿈의 특징이 아무 실속이 없다는 거예요. 실속이 없고 무능력한 거예요. 실속 없고 무능력한데 꿈속에서 나는 답답하고 황당했다고요. 그러니까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깨보면 꿈 같은 것을 어떤 답답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깨보면 아무 의미도 없어요 그게.
혼자 호들갑 떨고 혼자 난리친 거예요. 인생 자체가 꿈인데. 실제는 뭐냐 하면은 주께서 필요할 때 태어나게 하고 죽이고 살리고 모든 것은 주께서 하셨는데 이 자아의 존재가 그걸 훼방하고 방해하고 있었던 거예요. 내가 실제입니다 주님. 나 아픈 게 실제고 현실이고 실제입니다. 낫게 해줄 거예요 말 거예요 이러고 주님한테 따지고 있어요. 그러나 주님은 내가 실제야 보이지 않는 내가 실제고 너는 나를 전하는 소리에 불과한 거야. 그러니까 너는 날마다 아니다 아니다를 계속해서 하는 그런 사건의 연발 속에 있어야 한다. 그게 바로 영적환경이에요. 의미의 세계는 아니다만 계속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여기서 궁금한 게 그러면 구약에서 육적과 영적이 같이 접촉했던 그런 경우가 구약 때 있습니까 물으면 전부 다죠. 전부 다인데 그 중에 하나를 뽑으라면 바로 가장 인간이 육적인 것 육의 한계성과 육의 본질을 여과 없이 드러낸 사건이 있어요. 그게 창세기 32장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시거든 창세기 32장에 나오는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우리 대신 다 이야기해주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의 본성은 뭐냐 하면은 이거에요. 싸움입니다. 누구하고 싸움하느냐? 천사.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하나님과의 싸움, 전쟁을 하지요. 거기서 야곱은 뭐가 되느냐? 하나님의 원수. 이게 바로 나입니다. 자아입니다.
성경이 이야기해요. 나의 본질은 뭐냐? 천날 백날 하나님하고 싸우는 거예요. 하나님의 의미와 내 의미하고 갈등을 일으키니까. 나는 어떻게 되는데요? 남은 인생 어떻게 살라고 이렇게 나를 꼴아박게 하십니까. 너무 하십니다 이런 거. 이게 인간의 모습이에요. 인간의 모습은 죽는다고 해서 인간의 모습이 아니에요. 죽음보다 더 내려가야 돼요. 더 깊이 있는 본질은 뭐냐? 하나님하고 맞짱 뜨는 겁니다. 가룟 유다예요. 하나님은 저를 실망케 했습니다. 여기서 창세기에서 얍복 강에서 천사를 만나요. 야곱이란 육이 천사라는 영을 만난 거예요. 얼마나 친절합니까 성경이.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이걸 보여줍니다. 네가 원하는 것과 내가 줄 수 있는 것의 차이.
야곱이 원하는 것을 주께서 주시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야곱에게 심어버리죠. 그것은 바로 건강한 야곱, 하나님을 사랑하는 야곱으로 변하지 않고 야곱이라는 껍질 안에 이스라엘을 심어버려요. 이스라엘을. 그래서 여기서 내린 결론은 성도란 언약의 종입니다. 언약이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가는 거예요. 그 언약의 내용이 뭡니까 물어본다면 신약에 나오지요. 언약의 내용은 아버지에 의해서 죽는 아들의 죽음, 이게 언약입니다. 인간은 죽어도 안 죽어요. 결국은 나중에 지옥 가기 위해서 다 살려냅니다. 그러니까 언약 안에 있는 아들의 죽음, 아버지에 의해서 죽는 아들의 죽음이 같이 먼저 거기에 합류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영원한 지옥에 갑니다.
이것은 뭘 이야기합니까? 나의 죽음은 의미 속에 포함되지 않는다. 나의 죽음은 의미조차 없어요. 의미 속에 포함되지 않아요. 아파죽겠습니다! 죽어라. 아까 그 해경이 자기 구명조끼 주고 난 뒤에 죽지요. 장례식장에서 필요한 이야기한다면 입을 벌려서 소리로서 한다면 어떤 성경구절을 이야기해준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뭐할 때도 있고 뭐할 때도 있다? 태어날 때도 있고 죽을 때도 있다. 또 사무엘상, 그걸 누가 그렇게 하신다? 하나님은 살리시기도 하고 죽이시기도 한다. 이게 바로 나의 죽음과 나의 삶조차도 의미 속에서 포함되지 않고 삭제 당한다. 삭제 당하면 뭐가 되느냐? 하나의 소리가 되고 기계가 되지요. 배알도 없어요 배알도 없어. 내세울 것도 없어요. 몸을 불사를지라도 의미 없어요. 산을 옮길만한 믿음 있더라도 의미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이번 수련회 때 했잖아요. 천사의 말을 해도 의미 없어요. 나는 내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대드는 거예요. 그럼 나의 의미는 뭡니까 그걸 근거로 해서 대드는 거예요. 야곱이 얼마나 씨름 잘하는지 이만기보다 더 잘해. 막 붙들고 나의 의미를 돌려달라는 말입니다. 나의 의미를. 도대체 나는 뭡니까. 때를 쓰지요. 너는 아무것도 아니지 뭐. 아무것도 아니기 위해서는 나를 껍데기로 삼고 나를 대체물로 대신하심으로 예수님이 야곱 속에 들어와버리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야곱 속에 들어오면 돼요. 패티 없는 햄버거가 무슨 햄버거가 되겠어요. 안에 고기 하나 두툼하게 들어가야 되지요. 주님이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무슨 하늘나라에서 받아줍니까. 안 받아주지요. 열심히 뭐 했습니다. 안 받아줘요.
너는 그분 앞에서 너의 무의미에 대해서 기뻐하고 즐거워했느냐? 이걸 물으신다고요. 네 속에 있는 사람 때문에 네가 쪼다가 되고 바보가 되는 것을 네가 얼마나 즐거워했느냐 그걸 물으시는 거예요 주께서. 사도행전 5장 12절에서 16절까지 사도들이 막 기적들을 베풀었잖아요. 그런데 17절부터 23절까지 사도들이 어디 들어갑니까? 감옥에 들어가지요. 한번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그렇게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그 대단한 능력자를 하나님이 교도소 안 가게 할 능력이 있잖아요.
왜 일부러 교도소 가게 하십니까? 그것은 교도소에서 나오기 위해서. 교도소에서 나오는 장면이 사도행전 5장 23절에 나옵니다. 없더이다. 분명히 사람 집어넣었는데 없어요. 그러면 뭐냐? 사도들로 하여금 교도소 들어가기 전에도 사도는 이 감옥 같은 세상에서 맘껏 소리로서 활동했고 교도소 안에 들어가도 그 소리됨의 의미는 사도를 떠나지 않았다. 동일하게 작동하고 정확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영적이라는 말은 언약의 종이라는 말이에요. 그 근거는 창세기 32장, 영적인 존재와 육적인 야곱이 이건 만난 정도가 아니고 한판 씨름을 했잖아요. 그 씨름의 의미를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낮추었다. 씨름 상대가 되도록 그만큼 낮추어서 야곱에게 영과 육의 차이점을 보여주기 위해서 낮추신 거예요 주께서. 그 취지에 따라서 예수님 이 땅에 오신 거예요. 함부로 대해도 함부로 대함을 감수하고 받아주시는 분. 어느 인간이 태어나서 나 죽어야 된다 그런 인간은 없어요. 태어날 때부터 인간은 죽어 마땅한 죄악 된 요소, 다시 말해서 자아를 사수하기 위해서 모든 것들 이용하고 자아 굳히기에 들어가는 인간을 주께서는 구원하기 위해서 낮추고 낮췄다는 이야기가 빌립보서 나오잖아요.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추었다.
그래서 성경에서 재미나는 일은 아버지에 의해서 죽었던 죽음이 십자가죠. 그런데 현상적으로 사람들 눈에 뭐로 보이느냐 하면은 사람에 의해서 죽었던 예수님이 되요. 그러니까 이 육은 아무리 이해해도 영적으로 넘어올 수가 없는 거예요. 예수님 죽은 거 사람이 죽였어. 그러나 성경은 아버지가 죽였다는 거예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나님에 의한 죽음이냐 아니면 사람에 의한 죽음이냐? 요한복음 10장에서는 너희들이 나를 죽이는 게 아니고 내가 알아서 죽는다. 이건 또 예수님이 알아서 죽는데.
내가 성경말씀이 이해해서 구원에 성공했다? 안돼요. 그건 안 됩니다. 어느 인간도 성경말씀 이해해서 그 이해로 구원에 성공한 사람 아무도 없어요. 그건 뭐냐? 우리의 육의 한계가 창세기 32장을 생각해보세요.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주께 항의하고 주께 대들고 나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나의 가치와 자존심과 명예는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이런 식으로 시도 때도 없이 주님 붙들고 싸우고 있는 나의 일상입니다 라고 발견하는 자가 이미 구원받은 자입니다. 아 나는 이 자아가 있기에 내 목표만 챙기고 그걸 내가 존재의 의미라고 착각을 했구나. 따라서 그걸 아는 사람은 주님의 나를 처참하게 파괴하는 자리에 가게 한다 할지라도 그게 바로 예수님 십자가 가신 자리잖아요. 처참하게 파괴했잖아요. 뺨 맞고 옷 벗기고 처참하게 할지라도 주님은 아버지의 아들인 것은 변함이 없지요.
마치 사람들에게 버림받을 때 그 물위를 걸으시고 병든 자를 고치고 내가 구름타고 온다고 큰소리 치고 했던 그 모든 능력은 십자가 현장에 다 어디 갔습니까? 다 없다고요. 야 천사가 와서 구원하는지 보자. 이렇게 놀린다고요 사람들이. 천사 안 왔어요. 그런데 돌아가시고 난 뒤에 무덤에 죽은 자가 살아나고 죽을 당시에는 해가 갑자기 어두워지고 주변에서 난리야. 주님은 지금 매가리 없이 죽는데 약해져서 죽거든요.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주께서 약해져서 돌아가셨다는 말이 나와요. 13장 4장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이렇게 되어있지요. 못 박히심으로서 약하심을 드러냈어요. 하나님의 약하심을.
그런데 이 약하심이 모든 인간은 육이잖아요 육의 힘으로 영으로 넘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성공한 거예요. 어떤 육적인 인간도 구원되지 못하는 방법은 하나님 쪽에서 약해버리는 거예요. 약하니까 그 약함을 선망하고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나보다 더 센 하나님을 믿고 싶지 나보다 더 못나게 내가 하는 것보다 더 약하게 맥없이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을 내가 찾을 이유가 없어요. 왜냐하면 내 자아가 단단해지는데 전혀 보탬이 안 되기 때문에 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도움이 되어야 내 존재 의미와 가치는 더 강화되지 않겠습니까. 내가 강화되는데 필요한 신을 찾는 거예요.
천주교 영화에 이런 게 있어요. 이런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이번 일만 잘된다면 내가 이 동네에서 제일 큰 재단을 바쳐드리겠습니다” 이번 주 인간극장에 천주교 신자가 나왔어요. 엄마도 천주교 신자고 딸도 천주교 신자인데 미국에서 살다가 왔어요. 기도하고 마리아한테 절하고 왜 그런 불교 짓을 하느냐.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예요. 자기 주변 챙기기죠. 신상 챙기는. 왜 챙기는 거죠? 뭘 보존하고 싶은 거예요? 자신의 의미와 가치를 보존하고 싶은 거죠. 그러면 내가 누구하고 상대합니까? 하나님하고 상대하는 거죠.
그러나 나는 누구하고 상대했느냐 하면은 말씀을 상대해야 되요. 말씀을 상대해서 내가 이 말씀을 아무리 해도 이 말씀의 의미에 내가 튕겨져 나오고 들어갈 수 없는 거예요. 여기에 하나님께서 말씀의 운동으로 병이 주어졌다 하면 무능력자가 되지요. 더 이상 내가 붙들 힘마저 쏙 빼는 거죠. 뺄 때 죽이시는 것도, 병 들었다고 구원받는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 자리에 뭐가 들어와야 돼요? 죽이는 것도 살리는 것도 아버지의 뜻이다 라는 말씀이 들어와버리면 이 사람은 병이 나았든 안 나았든 이 사람은 기계가 되고 소리가 되는 거예요. 광야에 외치는 소리가 되죠.
내가 사는 게 기적이 아니라 소리로 사는 게 기적이고 영적이고 단순한 기계가 된 것이 이게 하나님 앞에 횡재한 겁니다. 이거는 왜 횡재냐? 내가 그걸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기계가 이건 내가 원한 게 아니에요. 내가 원하지 않았으면 누가 원했겠어요? 예수님 전하라고 주께서 하니까 세상에 이런 횡재가 어디 있어요. 가만 있는데 성령이 왔잖아요. 가만 있는데 주님의 영이 왔잖아요. 땡 잡은 거죠.
의미에 대해서 한 가지 예를 들고 첫째 시간 마치겠습니다. 코빅이라는 코미디가 있어요. 거기서 여자가 남편 출장가면 자기 애인 불러가지고 부정한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출장 갔던 남편이 갑자기 들어왔어요. 갑자기 뛰어 들어와서 내가 출장갈 때 체크무늬 셔츠 입는다고 했어 안 했어! 화가 이만큼 나가지고 어디 있어?! 어디 있어?! 아내는 아 들켰구나 큰일 났어. 내 셔츠 어디 있어? 그 셔츠를 누가 입었느냐 하면은 벌거벗은 그 남자 셔츠 입고 숨어있으니까. 내 옷 여기 있네! 그렇지 이제 찾았다 하고 옷만 들고 가요. 왜? 자기 의미를 챙겼으니까. 코미디. 바람 핀 거는 관계없고 나는 내 의미만 찾으면 되요. 앞으로 주의해. 앞으로 내 셔츠 주의해. 그러면 아내는 셔츠만 챙기면 아무 문제없어요. 모든 게 용납 돼요. 10분 쉽시다.
강남-사도행전 5장 16절 (소리 기계) 250916b-이근호 목사
성령이 오셨다고 이야기하죠. 왜 굳이 오시죠? 안 오셔도 되잖아요. 도대체 성령은 왜 오십니까? 성령이 오셨다는 이야기는 많이 하는데 안 오셔도 되는데 예수님 십자가 돌아가셨으면 그 예수님을 영웅시하고 그냥 믿으면 되잖아요. 믿고 구원받으면 되잖아요. 성령이 쓸데없이 왜 또 추가적으로 또 오셔야 되느냐 이 말이에요. 이거는 성령 없이 믿는 모든 예수는 우상인 거예요. 가짜죠 성령 없이. 그러면 성령 없이 예수님 믿는다는 표현. 그거는 인간의 육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걸 통해서 예수님을 영웅시하고 충분하게 높일 수가 있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높이고 경배하고 찬양할 수가 있어요. 성령 없이 그게 되는 거예요. 무엇이 빠져 있어요? 이렇게 사람을 높이고 섬기는 이것이 죄라는 사실을 성령 없이는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요한일서 1장 8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여기서 스스로 속인다. 스스로 속인다는 것은 성령이 와야 '아 평생 동안 나는 나한테 속았구나. 내 자아한테 내가 속았구나' 그걸 성령이 와야 알아요. 성령이 없어버리면, 이 '나'를 깨끗하게 보존하려고 애를 쓸 거예요.
나는 부처나 예수님 그리고 하나님 중에서 내가 누굴 믿느냐 할 때 의도 없이 목적 없이 믿는 건 없어요. 그분을 믿는 이유는 나를 아끼기 때문이에요. 나를 아끼고 보존하고 지키기 위해서 내가 지금보다 더 나은 나를 위해서 나는 하나님 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나는 부처보다 예수님이 필요하다. 왜? 예수님 십자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성령이 없어도 육이 성경책 보고 육이 얼마든지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못하느냐 하면은 그런 생각이 이게 나한테 스스로 속아 넘어가는 생각이라는 것을 성령 없이는 알 수가 없어요.
성령이 오게 되면 출발점을 나부터 출발하지 않고 뭐부터 하냐면 죄부터 출발해요 성령은. 죄부터. 왜냐하면 성령은 십자가 지신 분의 영이기 때문이에요. 십자가 졌다는 말은 그 현장에 예수님만 죽었고 현장에 아무도 없었다 이거예요. 제자들 가운데 아무도 없어요. 거처 없이 끌려온 사람은 있지만 끌려온 강도는 있지만 자진해서 붙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멀찍이 쳐다봤죠. 구경했죠.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홀로 모든 인간을 죄인이라고 규정을 하고 홀로 의인으로서 부활하신 겁니다. 지난 그 낮 설교 때 다윗의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을 제가 구분했잖아요. 제가 구분한 게 베드로가 설교 한 거 구분했죠. 그 다윗이 죽을 뻔했습니까? 죽었습니까? 다윗은 죽었죠. 다윗은 죽은 거예요. 무덤이 그대로 있다 했으니까 다윗은 죽고 난 사흘 만에 부활 안 했어요. 다윗은 계속 900년 이상 계속 있어요. 그냥 계속 죽었어요. 인간의 죽음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이라는 것은 의미 없다는 거예요. 의미 없다. 뽑을 만한 의미가 없는 거예요. 따라서 숨 쉬고 살아 있잖아요. 이게 왜 죽은 것이 됐냐 하면은 뽑을 만한 의미가 없어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상대할 만한 가치가 그 안에는 없어요. 하나님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선악과에 정신이 팔려가지고 그 선악과 안에서 잘난 체하는 인간을 죽여서 뭘 그걸 살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죽은 거예요. 죽은 자를 살리고 죽이고 병들고 하는 것도 부하게 가난하게 하고 하는 것도 그 자체에 의미가 없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의미가 없기 때문에 외부에서 언약적으로 다루기 위해서 언약이 찾아오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그 많은 사람 가운데 그 사람에게 부하다가 쪼그라들다가 죽었다가 살았다 하는 그런 일들이 있다 이 말이에요. 그러나 예수님한테는 그들은 죽을 뻔한 게 인간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어요. 그런 일은 없어요. 그냥 처음부터 죽어 있었지. 죽을 뻔한 게 없어요.
따라서 예수님의 성령을 받게 되면 방금 이야기한 거 인간 때에서는 산 적이 없다는 사실을 회고적으로 돌이켜 보면서 그걸 확인하게 되죠. 내가 남들 보기에 내가 숨 쉬고 살아있으니까 살아있는데, 하나님 보실 때는 어떨까?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 안에서 볼 때는 어떻게 됐을까?' 십자가 지으면 예수님만 십자가 지었잖아요. 사도 바울도 뭐라 했습니까? 나는 십자가 안 졌다. 십자가 안 졌기 때문에 남의 구원에 대해서 내가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은 없다. 그냥 주께서 부리는 종에 불과하지 내가 건방지게 남을 구원할 수 없어요. 왜? 십자가를 안 졌기 때문에. 구원의 능력은 내 말의 능력이 아니고 십자가에 능력이 있는 거예요. 내가 전한 것은 성령에 나타나심이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십자가 안에서 주는 능력이 내가 마이크가 돼서 외치면 그 소리를 듣고 지옥 갈 사람은 반대할 거고, 천국 갈 사람 같으면 거기에 반응을 나타낼 거고, 그거는 내 소관 아니죠. 나는 소리로서 스피커로서 할 뿐이고 그 능력은 주님께서 알아서 하시겠죠. 심지어 사도 바울은 나같이 잘린다는 생각을 하고 하라. 그렇게 외쳤다는 거예요. 내가 나한테 복음 전하고 그 복음에 내가 짤릴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하고 했다는 거예요. 이 말은 철저하게 모든 일은 주께서 하셨다는 주님의 주권사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죽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거예요. 나는 죽어 있다. 왜 죽어 있는가? 죄 뿐이니깐요. 그래서 요한일서 1장 8절에 뭐라 돼 있습니까?
만약에 분명히 말씀 안에서 나는 죄 뿐이고 난 죽어있는 게 지당하고 그게 마땅한데 여기에 누가 관여하겠습니까? 죄 또는 악령 또는 악마 악마가 뭐라고 속이느냐 하면은, '너는 의미 있어. 가치 있어' 이런 식으로 평생 동안 우리를 그런 식으로 속여왔고 이제 나는 이제 성령을 받고 난 뒤에 이제는 난 고백한다. 평생 나는 마귀한테 속았고 그런 나에게 내가 속았다는 거예요. 내가 나한테 속은 거예요. 자기 잘난 맛을 그걸 못 놓는 거예요. 그걸 붙들고 어떤 어려움이 오더라도 내 잘난 맛은 이것만 쥐고 있으면 나는 남는 장사다. 이것만 쥐고 살아온 거예요.
그게 바로 그 모습이 뭐냐 하면 영을 성령을 받으니까 비로소 영과 육을 나누었던 하나의 취지가 비로소 알게 된 이게 바로 육이다. 이게 바로 육이다. 내가 나한테 속은 것도 모르고 나 위주로 살아온 이것이 바로 육이었구나. 얼마나 즐겁고 감사하고 기쁩니까? 내가 누군지를 알았으니까. 그런데 병 고치러 온 사람들 우리 가족 귀신 쫓아내러 온 사람들은 뭐예요? 성령을 가지고 그렇게 한다 하니까 그 성령 달라고 했어요. 그 사도행전 나오죠? 시몬 이름도 간단한 시몬 사도행전 8장 18절입니다. 나한테도 성령 주세요. 이러면 성령은 뭐가 되냐 하면 엔터테인먼트가 돼요. 오락 또는 연애, 즐길거리 Entertainment. 성령 받았나? 받았어? 나 안 받았는데 어떻게 하면 돼? 이렇게 하면 성령 받아. 간절히 원하면. 간절히 원하면 악령 받죠.
성령 엔터테인먼트 오락거리 예 손흥민 축구 봤나? 하고 똑같은 거예요. 손흥민 축구 한 골 넣는 거 봤나? 그와 똑같은 거예요. 성령 받았나 하는 게. 이 성령 받았나? 가 오락이 되는 이유는 성령은 누구를 위해 존재해야 성령답다는 잘못된 인식입니까? 나한테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이 성령이다. 잘못 알고 있는 거예요. 내가 뭘 해도 나는 죄만 나오고 나는 마귀한테 속고 있다는 것을 폭로하는 게 성령이죠. 따라서 이거는 이게 오락이 되어버리면 이건 없어도 그만 있어도 그만이지만 이게 진짜 실제가 되어버리면 내가 알 수 없던 나라는 사실을 내가 내 힘으로 몰랐던 속아있는 입장에서 그 속음을 내가 탈출하는 게 불가능하죠?
탈출될 수가 없어요. 속고 있는데, 어떻게 탈출됩니까? 성경에 예수님께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까지. 그런 복음서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 보세요. 예수님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받습니까? 전부 다 지금 앞에 뭐가 들어가요? 나는 나는 '나는' 들어간다고요. 결국은 아버지께서 원하는 사람은 예수님 한 분밖에 없었어요. 제자들도 원하지 않았어요. 제자들은 아버지의 사랑한 사람으로 계약이 되기 때문에 나중에 그냥 두면 안 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 지시고 있었던 성령을 주신 하나님 우편에서 내리는 성령 우편에서 성령을 자기 제자들에게 찾아간 거죠. 이게 내 영이다. 이게 실상이다.
그래서 성령을 말할 때 내가 실상을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가 와서 다른 보혜사로 너희들의 모든 눈을 깨치게 할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에 사도행전에 전에 봤습니다만 4장도 보고 나왔습니다마는 그 초대교회 교인들이 서로 나누어주고 할 때 그거는 흉내 낼 수 없어요. 그건 육적으로 해봐야 의미 없습니다. 하나의 기계로서 내 것이 없는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일은 이건 내가 알아서 하는 일이 아니고 그때그때마다 주께서 알아서 하는 일이에요. 서로 모여서 한 마음으로 서로 제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사도행전 4장 32절. 그렇게 할 때 "목사님 몇 번 했습니까?" 그거는 한 번 할 수도 있고 두 번 할 수도 있고 세 번 하고 좀 오래 갈 수도 있고 그게 얼마나 자주 하느냐가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가 중요하죠.
그들이 물건을 서로 나누고 하는 게 있을 수 없는 것처럼 그보다 더 근원적인 의미 있을 수 없는 것은 '나는 나한테 속아왔다' 그거는 내 힘으로서는 알 수 없는 사실이에요. 그럼 내가 속아 있다 없다를 그걸 파악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속을 하나님께서 살게 하십니다 성도로 하여금. 성도로 하여금 자아가 있을 때 그 자아 중심으로 종교 하나님과 문화 그리고 경제 이 모든 것이 어떻게 각자 자기중심으로 돌아가는지를 평생 동안 그걸 치밀하게 체험케 하는 거예요. 오늘 노래 가사를 제가 한번 적어봤습니다. 이제 뭐 나눠주고 이런 거 해봐야 집에 가져가지도 않고.
나는 유령 같았고 혼자였어요. I was a ghost, I was alone. 하! 이렇게 시작되는 노래예요. 노래 한번 들어볼까요?
Given the throne, I didn't know how to believe I was the queen that I'm meant to be
I lived two lives, tried to play both sides But I couldn't find my own place
Called a problem child 'cause I got too wild But now that's how I'm getting paid 끝없이 on stage
I'm done hidin', now I'm shinin' like I'm born to beWe dreamin' hard, we came so far, now I'll believe
We're goin' up, up, up, it's our moment You know together we're glowing Gonna be, gonna be golden Oh
up, up, up with our voices 영원히 깨질 수 없는 Gonna be, gonna be golden
이거 케대헌, 업!업! 계속 올라가죠. 그 가사 내용이 이래요.
나는 유령 같은 혼자였다. 하지만 나는 양쪽 역할을 하면서 살았다.
그러나 내 자리는 찾을 수 없었다. 문제가 많은 아이라고 불렸죠. 내가 거칠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돈을 벌고 있고 숨는 건 끝났다. 나는 타고난 것처럼 나는 빛나고 있다. 난 이제 빛나고 있어요.
우리 열심히 꿈꾸며 이제는 알아요. 멀리까지 왔고 이제는 알아요.
그래서 나는 황금처럼 빛난다. 골든 황금처럼 빛난다. up! up! 올라가요. 내 목소리와 함께 우리 함께 더 높은 데로 올라가자.
뭐냐면 황금 혼문이에요. 혼이 통과하는 게이트. 혼문이 있는데, 이 혼문은 인간이 육에서 영으로 갈 수 있는 혼문인데 다섯 명의 사자 보이즈가 이걸 막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헌터들이 3인조 헌터들이 그 사자 보이즈를 부수고 혼문을 넓혀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사자 보이스가 사람 영혼을 먹는데 먹히지 말고 통과해 가지고 구원받자는 거예요. up! up! up! 계속 뭡니까? down down 아니잖아요. 위로 가고 위로 가잖아요. 위로 가고 위로 간다. 우리는 아래에서는 사는 게 힘들고 그 힘들지 않은 세상 어디에 있다? 위에 있는 거예요 위에. 그래서 아래에서 위로 가겠다는 거예요.
이게 뭐가 나쁘냐 하는 거예요. 뭐가 나쁘죠? 뭐가 나쁩니까? 이게 누구한테 속는 거예요? 이게 바로 자기가 모르는 채 외부에서 뒤집어 씐 그 의미가 내 의미인 줄 알고 그냥 뒤집어씀으로써 그 의미에 달려서 내가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주께서 우리를 건져주면 구원받는다는데 주께서 그냥 건져주는 게 아니죠. 주께서는 아버지가 죽이시는 인간은 경험할 수 없는 마지막 아들이기 때문에 경험하는 제대로 된 저주 속에 예수님이 죽었습니다. 그 죽음에 합류되지 않은 자는 어느 누구도 죽은 척은 되지만 죽을 수는 없어요. 진정한 부활에 이르는 죽음은 이룰 수가 없습니다.
자 그러면 좀 어려운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인간은 자기 행함을 설명할 때 설명할 때 '추상성'이라는 거울을 이용한다. 말은 어렵지만 쉽게 하면 나 여기 있는데, 추상적인 것을 상상해요. 상상한 것을 뭐로 본다? 나의 거울로 해가지고 거울과 함께 주고받고 하는 거예요. 그럼 이 거울은 어디서 나온 거예요? 거울은 나의 사회에서 나온 거예요. 이 병든 사회에서 날아다니는 기존 세대의 의미들이에요. 나보다 앞서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이 추구하는 그것. 성공했다고 남들 다 동의하는 날아다니는 그 의미가 나한테는 추상이 돼요. 이 거울을 추상이 채우면 나는 신데렐라 공주가 되는 겁니다. 백설공주가 되죠.
이 추상성은 첫 번째는 '사회'에서 와요. 이 사회라 하는 것은 가까운 부모죠. '너는 커서 이렇게 해야 돼. 이건 내 소원이야. 너 때문에 이렇게 밥이나 먹여주고 옷을 입혀준 거야. 다 너한테는 내가 기대하는 바가 있어' 이게 사회 부모로 보는 추상성. 그것들이 애한테 쌓여서 자아를 비추는 거울이 되는 거예요. "너 뭐 될래?" "나는 엄마 소원대로 나는 훌륭한 사람이 되겠어요" 이런 거예요. 지금 그 애가 지금 놓치고 있는 게 뭡니까? 훌륭한 사람 되겠다는 것은 이미 자기 안에 훌륭할 수 있는 씨앗과 잠재력이 본인한테 있다고 여기잖아요. 그게 바로 자기가 자기한테 속아 넘어가는 거예요. 부하게도 하고 가난하게 하는 권한은 누구한테 있다 했습니까? 사무엘상 2장 6절에서. 여호와한테 있죠? 그래서 두 번째 추상성 어디서 오는가? 말씀에서 와요.
말씀은 이 추상성은 이 거울이 이쪽을 공격해버려요.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지? 내가 제일 예쁘지. 그지? 나 잘났지. 그지?" 거울이 "죽을래?" 야곱이 창세기 32장에서 천사와 씨름 했던 것은 그 천사가 자기를 죽이러 온 걸로 여기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 자아가 의미 있는 자아가 무의미로 오늘 이 자리에서 완전히 파괴되는 것을 두려워했던 거예요. 지금껏 하나님의 약속대로 내가 살아야 된다고 악착같이 살아왔는데 내가 여기서 내인생 끝내는구나. 나 이렇게 끝낼 수가 없어. 나 악착같이 내가 이 싸움을 내가 이겨서 나를 지키고 싶다.
그것 때문에 야곱은 밤새도록 시험한 거예요. 나중에는 천사가 가려하니까 이번에는 또 반대로 밤새도록 붙들고 또 뭐합니까? 살려주고 가세요. 축복해 살려주고 내 의미를 돌려놓고 가세요. 하나님이 내 의미를 돌려 달라고 합니다. 주께서는 야곱을 죽이고 그 안에다가 이스라엘을 만들어버리죠.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내가 달라는 걸 주지 않고 주께서 주시고자 하는 걸 줬기 때문에 여러분의 모든 인생은 성령받은 여러분의 모든 인생은 여러분 것이 아니고 주의 것입니다. 그걸 가지고 제가 주일날 설교에 뭐라 했냐 '법인카드'라 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평생 살아오면서 모든 비용 앞으로 70, 90, 100 까지 살 때의 모든 비용은 하늘나라에서 다 댑니다.
이재명 정부의 기초수급 20만 원 꽂아주는 그것 가지고 안 되고 하늘나라에서 다 대줍니다. 죽을 때까지. 내가 산 비용은 하나도 없어요. 다 주께서 주신 거예요. 너무 많다 싶으면 보이스피싱 걸리라고. 그 돈 또 남는다 싶으면 완전히 주식 폭락 시키고. 그런데 이 육적인 인간들은 사회에서 오거든요? 이 추상성이.
지금의 사회가 뭐냐 하면 자본주의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순교자가 있어요. 순교자가 누구냐? 바로 자본가 또는 투자자가 순교자입니다. 그 혜택을 누가 받는가? 노동자가 받아요. 왜냐하면, 투자 자본가는 이거는 되면 되고 안 되면 꽝이거든요. 이게 순교자 모습 아닙니까? 이게 순교자잖아요. 월급하고 일하고 월급 받는 게 이게 무슨 순교입니까? 노동자가 순교자를 이용한 거죠. 너는 죽든 말든 내 월급만 타면 된다. 사대보험하고. 이게 무슨 순교자예요? 순교자는 이번 일만 잘 되면 대박 난다. 그게 순교자 아니에요.
이 자본주의의 사회는 자본주의라는 종교를 위해서 계속 순교자를 양산하고 있는 거예요. 또 순교자끼리도 경쟁하고 난리도 아니에요. 그러나 세례 요한 같은 경우에는 그럴 필요가 없는 거예요. 옥에 갇히던 그냥 소리니까. 세례 요한은 혜택을 입은 거예요. 왜? 순교자는 따로 있어요. 누가 순교자입니까? 감옥 가서 모가지 달랑한 세례 요한이 순교자예요? 누가 순교자예요?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순교자예요. 예수님 때문에 세례 요한은 혜택 입었지요. 반대로 알고 있으면 안 됩니다. 고난 받으면 구원받는다. 이런 거 없어요.
정리해보면 인간은 추상성을 뭐로 사용한다? 거울로 사용하죠. 자기 목표니까요. 난 저 사람처럼 되고 싶어. 난 저렇게 되고 싶어. 그게 어디서 온다? 1번 사회에서 온다고 했죠. 지금 사회는 뭐라 했습니까? 자본주의 다시 말하면 네 번째 짐승이에요. 네 번째 짐승이니까. 259개 나라 이 민족, 민족의 구분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케데헌. 노래로서 귀신을 쫓아낸다. 이거는 우리나라의 무당 사상이에요. 춤과 노래로서 무당 쫓아하는 게 무당이잖아요. 무당 굿하는 거잖아요. 그걸 케데헌이 그대로 K-POP으로 귀신을 헌터, 사냥한다. 이 말이거든요.
그런데 이게 만약에 이것이 떴을 때 사람들은 뭡니까? 거기서 은혜를 받았다.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게 큰 돈으로 오는 거예요. 어떤 경우라도 자본주의의 이 귀신한테 인간은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내가 속았다'가 성립이 안 돼요. 왜 그러냐 하면은 돈 없이 부자 되는 것이 내 욕망을 충족하기 때문에 잠시 실패할 수 있고 내가 낙후될 수 있어도 목표가 이 사회에서 인정받는다는 것은 돈 버는 목표에 남아있는 이상은 나는 열심히 힘들어도 열심히 매진하게 된다. 빨리 돈 모아서 나는 사람답게 살고 싶다. 나도 생활의 안정을 얻고 싶다.
이 목표가 있는 한 속음이 없죠. 왜? 멀쩡한 목표가 있는데, 왜 속아요? 중도에 포기할 필요가 없어요. 돈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여기 자본주의라는 사회 속에 뭐도 포함 돼요? 종교 포함되겠죠. 말씀 계시 이런 것도 종교에서 다 포함됩니다.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천주교에서 이번 일만 잘 성사된다면 제일 큰 재단을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재단 만들면 어떻게 되는가? 사람들 거기 모일 거다 이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 거의 재단하고 모이면서 '나는 나한테 속았어' 라는 말 생각을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할 필요 없지요. 왜? 성공해서 재단을 했으니까 자기는 성공한 사람이니까. 안 속았지요? 실제적으로 성공을 했으니까 이 사회에서 볼 때 성공을 했으니까 안 속은 거예요.
두 번째, 추상성이 오는데 이게 뭐냐면 영적 세계예요. 영적 세계에서 옵니다. 거울이. 아까 이야기했던 이 거울이 오게 되면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창세 32장의 야곱의 경우처럼 너는 너한테 속고 있다. 스스로 죄 없다 하는 자는 속고 있는 자다. 너는 처음부터 죄였어. 네가 뭘 고대하고 뭘 희망하고 기대하든 간에 그것마저 죄였어. 알려주죠. 이 거울이. 이 거울에 오게 되면 이 사람은 내가 거울을 쳐다보는 게 아니고 거울이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게 되면 언약에 의해서 종이 되는 겁니다. 지금 제가 1번하고 2번 나눴잖아요. 2번 영적 세계를 거울로 사용한다 이 점에 대해서 좀 더 한번 그 내용을 살펴봅시다.
이게 뭐냐 하면 아까 그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시므온 8장 17절 "이에 두 사도가 저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했지요. 이 시몬이 귀신 들린 건데 이 시몬이 이렇게 귀신 들린 소리를 했는데 그게 왜 잘못된 것이냐? 이유가 뭐냐 하면, 타인을 거울로 사용했어요. 시므온 보기에 자기는 안 되는데 사도들은 안수하니까 성령 왔잖아요. 자기한테는 멋진 타인이에요.
나 저렇게 되고 싶어 하는 새로운 목표가 생긴 거예요. 새로운 목표가 생기면 내가 나한테 속았다는 사실은 날아가 버리죠. 자기한테 가능성을 안겨주는 겁니다. 할 수 있어. 저 능력만 있다면 마법사 생활 이 시시한 것 실제로 제대로 된 마법 같은 마법을 쓸 수가 있어. 나는 그러면 성공하는 거야. 이 자본주의 사회에 세상에서 성공은 사람들에게 인기 얻는 거죠. 돌이 떡 되게 하고 뛰어내리고 세상 권력 얻고, 마귀가 다스리는 세계 아닙니까? 그 세계에서 사람으로서 인정받는 거죠. 그걸 누가 마다하겠습니까? 마다 하지 않죠. 자진해서 비참한 길로 갈 사람 없다 이 말이죠. 여러분 세례 요한이 자진해서 비참한 길로 갔습니까 광야에? 그렇지 않죠. 건강을 생각해서 벌만 먹고 메뚜기만 먹고 이러지는 않았죠.
도대체 세례 요한의 특징은 그냥 소리예요 소리. 나는 쇠해야 되고 주님은 뭐 해야 되고? 흥해야 된다는, 아주 독특한 사람이에요. 독특한 사람인데 그 독특한 사람이지만 천국에서의 어린아이 보다는 아는 게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세례 요한은 폼부터 해서 이 세상에서 그냥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하면서 소리로서 작동했잖아요. 그런데 신약의 성도는 이 세상 누릴 거 다 누리면서, "나 죄인이야" 여러분 어느 쪽이 더 어렵습니까? 누릴 것 다 누리고 추석 다 챙기고 설 챙기고 보너스도 다 챙기고 기초생활뿐만 아니고 10만 원씩 꽂아준다 하잖아요. 15만원인가 20만원인가? 그거 다 그 카드 챙기면서 "나 죄인이야" 어느 쪽이 불가능합니까? 두 번째가 불가능한 거예요.
세례 요한은 폼만 내면 되잖아요. 사실은 세례 요한한테 미안하지만 폼만 내면 되는 게 아니지만, 폼만 또 그럴싸한 폼만 내고 외투 입고 모피 옷 입고 더운데 돌아다니는 거 힘들긴 하지만, 육으로도 가능은 할 수 있어요. 폼은 낼 수 있잖아요. 신약의 성도는 폼 조차 안 돼요. 내가 나한테 속았다는 것은 마귀한테 속았다는 것은 폼으로 안 됩니다. 그게 성도를 기쁘게 해요. 내가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거예요.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비로소 성도는 다 같이 외칩니다. "성령님이여. 도대체 왜 오셨습니까?" 비로소 기쁨으로 감탄하면서 성령을 언급하는 거예요.
주님이 십자가 지시고 부활한 것. 그거 내가 믿으면 구원받겠다.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걸 알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나에 대해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나를 책망한다는 그 능력이 오지 아니하면 내가 전에 알던 예수님이나 십자가나 부활이 그 부활의 십자가가 아니라는 겁니다. 나의 어설픔과 나의 소급을 당한 것과 결부되어서 나온 십자가일 때 비로소 십자가가 나의 모든 행위에 대해서 이미 용납했다는 거예요. 다 용납한 거예요. 주님께서의 관심사는 내가 무슨 뭘 하든 간에 그걸 하든 그것도 안 하든 의미 없는 거예요.
주께서 의미는 딱 꽂아줬으니까. 이걸 이렇게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살아있다 죽어있다를 주께서는 구분하지 않으신다" 내가 살아있다 죽어있다를 구분할 필요 없어요. 그런데 이 구분을 누가 하느냐? 인간 쪽에서 여태껏 인간이 이걸 구분했어요. 왜냐하면, 정녕 죽으리라 했던 주의 말씀에 대비해서 인간은 자기에다가 뭘 입었느냐? 옷을 입었어요. 죽은 시체 + 옷은 인간에게 갑자기 산 사람 되고 말았습니다. 옷을 입으면 되는데 이 옷이 나중에 뭐로 바뀌냐 하면 이게 의상으로 바뀌어요. 의상 안에 뭐가 들어있느냐 하면 계급 들어있죠. 서열 들어있죠. 권력 들어있죠. 위상 다 들어있죠. 특권 들어있죠?
의상이라고 하는 것은 옷이라고 개인적으로 걸치면 되지만 의상은 이게 바로 '사회성'이에요. 타인이 보기에 어떤 옷을 입으면 내가 얼마나 고급지고 귀한 자식인가를 그들에게 알릴 수 있느냐를 생각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게 문화예요. 문명. 그래서 옛날에 지금도 마찬가지 옛날에 왕들은 서민들하고 백성들하고 신하들하고 의복에 차이가 나요. 의상에 차이가 난다.
이러한 인간의 실정, 죽은 자를 의상 입히면 산 자로 행세하는 이것을 의식해서 이걸 전제로 해서 하나님께서 대제사장에게 특수한 복장을 만들어요. 의상을 만들어버려요. 특수한 복장 의상.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이 모세 율법 대로 의상을 만들었습니까? 안 만들었습니까? 만들었죠. 그 만든 그 복장에 대해서 옷을 입은 제사장이 그 복장값을 못해요. 복장값을 못합니다. 이 옷에 하나님의 율법에서 만든 옷에 맞는 주인공이 마지막 종말 때 나타나야 돼요. 마지막 때 종말 때. 예수님의 옷은 요한계시록 1장에 나옵니다. 이거는 사람이 만든 옷이 아닙니다. 옷을 만들 수 없어요. 그 흰 옷은 유명 디자이너가 옷을 제작할 수 없어요. 일체 인간의 모든 행위에 관여될 수 없는 옷을 걸치고 화려한 눈부신 옷을 걸치고 나타납니다. 제대로 된 제사장의 면모를 보여주죠.
그러니까 그 앞에서 사도 요한은 죽은 자 같이 엎드리죠.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속았다 이거예요. 바로 이 사회성에 속는 거예요. 사회성. 인간들이 작품으로 내놓은 것, 인간들의 솜씨로 뿜어낸 박람회 같은 이 사회 속에서 우리는 그것 중에서 괜찮은 거 내게 나의 가치를 의미를 축적하게 하는 것들을 골라서 내 것으로 삼았던 그 나의 내 모습을 대열해 보여주는 거울처럼 사용했던 그 사회성에 우리가 흠뻑 속은 겁니다.
살아있는 구분 없습니다. 살아있다 죽어있다 구분 없죠.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물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 보존할 가치가 있는가' 질문을 해봐야 됩니다. 사도행전 다시 한번 돌아옵시다 5장 42절 누가 한번 읽어볼까요?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여기서 사도행전 방금 이거 보셨지요? 그거 딱 기억하시고 요한복음 1장 4절을 보겠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지금 이 사도가 베드로와 요한 있겠죠. 그럼 사도 중에 요한도 있죠. 그 요한이 이렇게 날마다 예수를 가르쳤다고 사도 행전에 이야기하는데 그 요한이 가르친 내용은 요한복음에 나오잖아요. 요한 1서, 2서, 3서 요한복음 요한계시록에 나오잖아요. 그렇죠? 사도행전만 이것만 해가지고 아~ 요즘 목사들 예수 잘 아는구나 이렇게 이해하면 안 돼요. 그 깊은 내용은 요한복음 이렇게 친절하게 나와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친절하게 보게 되면 뭐냐 하면 인간 생명이 있는 인간은 누가 친히 오셔야 되냐 하면 빛이 친히 와야 돼요. 빛이.
끝부분인데 난해한 것도 보겠습니다. 빛이 인간 속에 들어오게 되면 여기에 인간에게는 생명이 있어요. 생명이 있는데, 이게 왜 어렵다 한 이유가 빛이 인간 속에 들어오면 이거는 쉽고요. 쉬운데 인간 속에 뭐가 있느냐를 고려를 사람 안 하게 되면 이 말이 뭔 뜻인지 몰라요. 인간 속에 뭐가 있습니까? 어두움이 있어요. 내 속의 어두움을 인간들이 모른다니깐요. 그래서 어려운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전부 다 뭐밖에 없다? 어두움밖에 없는 거예요. 어두움이고 빛이 왔는데 어두움과 빛의 만남이 무슨 사건입니까? 십자가 피흘림이잖아요.
그래서 요한일서 아까 1장 8절에 뭡니까? 인간은 어둠에서 속아 넘어가는데 그 어둠에서 속아 넘어가는 게 뭐냐? 나는 빛이다. 이게 어둠에 속아 넘어간 거예요. 십자가라는 것은 내가 죽을 뻔해서 살리는 게 아니고 확연하게 우리를 나로 취급하지 않고 어두움의 일부로 취급해서 빛과 어두움을 이렇게 잘라내는 거예요. 그 잘라내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나의 자아를 잘라내는 작업을 한다고요. 누가요? 빛이. 그래서 주님은 내빼듯이 간 거예요. 내빼듯이 사람 손 뿌리치고 혼자서 도망치듯이 이 세상을 빠져나온 겁니다. 어디서 감히 어두움이 빛을 붙잡아요? 붙잡을 수 없죠.
제자들은 예수님을 못 붙들었어요. 무서워서도 못 붙들고. 나중에 요한복음 1장에 보니까 그게 왜 못 붙들는가? 자기 인간 속에 있는 인간을 지배하는 어두움이 못 붙들게 했지요. 또다시 뭐가 와야 돼요? 누가 와야 돼요? 성령이 오셔야 되죠. 또다시. 그래서 모든 기초는 예수님이 다 이루었고 이제는 어떻게 적용하고 혜택을 주느냐는 그 몫은 역시 인간 몫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이렇게 하시면 우리가 제대로 정신 바짝 차리고 정결한 마음으로 순수한 마음으로 성경 읽으면서 믿습니다. 믿습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성령이 와야 돼요. 성령이. 성령이 와서 하는 일은 뭐냐? 네가 너 자아에 대해서 모르는 상태에서 구원을 받고자 하는 모든 짓이 마귀 짓이라는 것을 성령이 와서 알려주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하게 되면 많은 분들이 '우리는 그럼 가만히 있으면 되겠네. 가만히 있으면 되지 않겠느냐? 오고 가는 건 주님 소관이니까. 가만히 있으면 되겠네' 하는데 이게 어두움을 모르는 게 어두움은요, 가만히 있는 게 아니고 예수님에 대해서 빛에 대해서 공격하는 성향을 나타내요. 왜 나는 쉽게 말해서 나는 내 나름대로의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착하게 사려고 하는데 왜 이 가치와 의미를 묵살하느냐? 나는 당신 싫어. 나는 예수님만 공경하고 싶어. 여러분 예수님을 공경하고 싶어 노골적으로 하면서 교회 다니는 사람 봤습니까? 아니죠. 그럼 이렇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왜 당신들은 나의 가치를 안 알아주는 거야?" 뭡니까? 이게 뭔 뜻이에요?
그게 뒤에서 누가 조작한 거예요? 어두움이 그렇게 하는 거예요. 스스로 속고 있다는 걸 모르는 거예요. 자기가 어둠 속에 있다는 걸 모르는 겁니다. 십자가 졌어요? 졌습니까? 십자는 이미 한 분 지신 걸로 끝나요. 그걸로 가지고 뭐라 하냐? 주의 이름이라 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이유가 십자가 지신 그분만이 구원될 능력이 있지.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받을 이름이 없어요. 왜 요한복음에서 "빛이 왔으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이렇게 나오면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바보같이 주님 오신 것도 모르고 나는 깨달아야지'
지금 이건 뭐냐 하면 십자가 사건이 왜 일어나는지를 완전히 누락하는 거예요. 십자가 사건은 '그래 나는 바보같이 않고 제대로 내가 예수 믿을 거야' 하는 그 자체가 어둠이라는 거예요. 케이팝 데몬 헌터스, 케데헌이 이게 히트를 쳐서 돈을 버니까 사람들이 우샤우샤 이렇게 하지 만약에 그 영화 해가지고 두 사람 보고 끝났으면 아무 이 땅에 힘이 없어요. 복음도 마찬가지예요. 구원받은 사람이 '나 속았는데 나 어둠인데 예수님이 빛이 오셔서 나 구원받아' 하면요. 사람들이 거기에 대해서 혹하겠습니까? 그걸 무시하겠습니까? 무시하죠. 육은 영으로 넘어올 수가 없기 때문에 이게 무시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그야말로 무시당할 내용이 '야 저게 진짜네' 하고 오는 것은 이건 나한테 설득할 문제가 아니고 나한테 성령이 온 것처럼 그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해야 가능한 문제예요. 그렇게 임하게 되면 나의 의미는 없어요. 주님의 의미가 내 의미를 대신 차지하죠. 우리는 하나의 소리가 됩니다. 소리 된다 해서 up! up! up! 그럴 필요가 없어요. 혼문의 어떤 구원의 게이트 황금문 골든 우리나라의 무당사상에서 나온 거예요.
박혁거세 그리고 고구려의 왕들의 성씨가 해예요. 해모수 해. 해가 밝다. 우리나라 밝은 태양을 의미하는 겁니다. 어두운 세계 빛이 세계에 있는데, 우리는 거기서 이 땅에서 홍익인간으로 살면 혼의 문을 뚫고 갈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게 케데헌의 사상입니다. 우리나라의 배달의 사상, 단군 사상이 무당 사상이 거기 들어가 있는 거죠. 현대 바로 돈만 찾는 이 세상에서 이러한 한국인의 홍익사상에 그들이 정신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효과가 있지 않은가 하고 지금 기대하고 있습니다. 효과긴 뭐 돈 효과죠. 복음은 아무 효과도 없고 케데헌이 효과가 있는 거예요. 왜? 육은 육끼리 통하니까요. 그들에게는 뭐가 있다 했어요? 거울이 있으니까요. 거울은 기존 종족에서 통하는 그것, 그것들이 나의 이상형이다. ego 아이디어 나의 이상형 되니까. 바로 그것과 대조해서 옥에도 가는 이 사도 바울이 전했던 예수님 이야기예요. 이것은 예수님을 본받자가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친히 거울이 되셔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증인 되게 하십니다. 성령을 받으면 너희가 증인이 되라 하는 그 말씀 그대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끝으로 하나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5장 38-39절 "이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했지요. 그 당시 바리새인 가말리엘에는 교법사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자 문제 나갑니다. 이 교법사 구원 받았으니까? 구원 안 받았습니까? 이런 이야기한다고 구원 받았어요? 안 받았어요? 이게 성령의 말로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아니죠. 구원 못 받았지요. 왜 구원 못 받았습니까? 이 교법사는 이런 소리 하면서도 자기가 속고 있다는 것을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모르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을 만약에 교법사가 성령을 받았다면 어떻게 됩니까? 베드로에게 어떻게 해야 돼요? '사도님 제가 죄인입니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는 하늘을 볼 때 하나님 관점에서 볼 때 이렇게 해야 하나님 주권에 산다는 것 하나님이 하나님다운 행동을 보여준다는 이걸 아는 내가 바로 뭐라고요? 죄인입니다. 이게 죄인입니다.
성령은 오직 주께서 빛으로만 있고 어둠을 향하여 빛으로 올 때만 빛이 빛다운 면모를 나타낸다는 것을 우리를 통해서 드러내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인간이 아무리 처참히 망가져도 구원될 수 없고 아무리 몹쓸 병에 걸린다 하더라도 구원될 수 없고 성령이 임해야 비로소 마귀한테 속아 넘어간 우리를 위해서 주께서 대신 희생했다는 사실을 발견함으로써 이제는 내가 어떻게 되느냐가 아니라 주님의 의미만 담기는 그러한 소리로만 외치는 자유로운 기계로서 살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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