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사도행전 5:3 / 무의미 / 250715 본문
녹취:홍민희
강남-사도행전 5장 3절 (무의미) 250715a-이근호 목사
오늘은 사도행전 5장 아나니아 삽비라, 세 시간의 차이를 두고 부부가 한날 한시에 죽었지요. 남편이 먼저 죽고 아내가 나중에 죽는 그 사건. 그 죽는 사건인데 아나니아 삽비라가 뭐 했던 사람이냐. 소유를 팔아서 값을 얼마를 감추고 사도 발 앞에 두면서 헌금을 한거죠. 헌금을 했는데 그 소유가 뭐냐? 땅이었습니다. 4절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5절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세 시간 후에 아내가 들어오니까 또 베드로가 아내한테도 똑같은 얘기를 하고 그 다음에 10절에 보니까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 부부가 사이좋게 한날 한시에 갔습니다.
이 일을 통해서 우리가 몇가지를 검토하게 되면 약간은 이해할수 있어요. 첫 번째 말(언어)을 베드로가 했다. 이 아나니아 삽비라는 말을 한 적이 없어요.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말은 베드로가 했어요. 그래서 말에는 의미가 담겨있는 거예요. 의미가 담겨있는 말을 베드로가 했는데 아니니아 삽비라 부부가 죽었다.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부부가 땅을 팔아서 일부를 감추고 일부를 헌금한 이것이 뭐냐 하면은 부부의 땅값 헌금은 뭐가 되느냐 하면은 무의미가 되지요. 무의미가 되는 겁니다. 무의미가 되면서 죽음으로 이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이 일이 일어나고 난 뒤에 젊은 사람들이 시신을 메고 장사 지냈잖아요. 이 사건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있지요. 다른 사람들은 이 부부가 죽는 것을 보고 관람했을까요 아니면 발견했을까요? 어! 이 사람 죽었네 이렇게 구경하고 관찰하고 관람했다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로 이거는 무의미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아나니아 삽비라가 죽은 사건을 보고 관람이 아니고 발견을 해야돼요. 무의미의 세계에서 진정한 의미는 말씀에서 비롯된다. 말씀에서 비롯되는 겁니다. 말씀은 베드로가 했기 때문에 베드로가 말하면서 죽였잖아요. 우리가 아는 상식에 의해서는 죽음은 어디서 나오나? 죽음이란 울법의 권세에서 죽음이 와요. 갈라디아서나 로마서나 율법의 권세. 율법으로 모든 사람은 죄를 범했으되 그 죄값으로 율법이 작용을 하게 되면 인간은 죽고 저주 받고 지옥 갑니다. 우리는 율법의 권세에다가 무엇을 할 수 있나. 그 누구 말도 듣지않는 자율성이 돼요. 자율적으로 기능한다.
율법이 하나님의 말씀이 누구 간섭받고 누구 의식하고 누구 눈치보고 작용합니까? 아니지요. 무의미의 세계에서 죽음의 세계에서 말씀이 지니고 있는 유일한 의미는 그 어떤 눈치도 보지않고 그 어떤 권세도 부여받지 않고 자율적인 기능을 발휘한다. 이렇게 되죠. 자율적 기능을 발휘하는 겁니다. 이것을 다른 사람을 관람해야 될까요? 발견해야 될까요? 이걸 여기서 발견해야돼요. 자율적인 기능을. 아! 이 세상에 저런 자율적으로 움직이는게 있구나 라는 것을 발견해야 된다고요.
제가 쭉 쓴 걸 보면 뭔가 짝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겠지요. 의미와 무의미, 의미가 활동하면 반드시 현장에 무의미가 나타나는 겁니다. 또 관람과 발견. 자, 그러면 이 본문을 보면서 여러분들이 그 충격적인 내용을 접해야 됩니다. 율법이 자율성을 갖고 있다고 했지요. 그런데 이걸 이렇게 바꿔보면 율법도 자율성을 발휘하지만 땅값도 자율적인 기능을 한다. 돈이라고 하는 것은 돈이 주인이 아니고 갖고 있는 인간이 주인이잖아요. 그런데 거꾸로 돈이 자기를 갖고 있는 주인을 친다? 어퍼컷 훅 막 때리고 한다. 희한하지요. 집에 있는 개가 성이 나서 주인을 차고 때리고 할 수도 있어요. 개는 생물체잖아요. 땅 판 값은 생물이 아니에요. 무생물이기 때문에 이거는 움직이지도 않고 인간이 어떻게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인간이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쓰일 뿐이다 이게 우리네 상식인데 땅값이 주인을 죽인다 그 누설을 조선일보에서 들어본 적 있습니까? 땅값이 인간을 죽인다. 무생물이 어떻게 인간을 죽여. 말이 안되지. 그렇게 생각을 하게 될 겁니다.
그런데 그 땅값을 주님이 활용한다면? 이거 이야기 되지요. 절에 가서 시골 농부가 지성을 바치고 부처에게 고맙다고 복숭아나 참외를 가지고 부처 제단 앞에 놨다면 아무도 없는데 손바닥 뒤집어 가면서 절을 하고 왔는데 그 바친 포도가 슥 살아가지고 그 농부를 팼다면 이거 뭐가 됩니까? 이걸 사건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건. 사건이죠. 돈이 이것밖에 안돼?!! 땅 판 값이 이거밖에 안돼! 그때는 동전이지만 지폐 같으면 때릴 때 찰진 맛이 날 거예요. 아무도 없는데 돈이 알아서 살아가지고 팬다면 이거는 사건이라고 합니다.
돈은 내가 주도적으로 다스리는데 내가 갖고 있는 돈은 자율성이 없고 자율성은 누가 갖고 있습니까? 내가 있는데 이거는 바뀌어 가지고 돈이 자율성을 품고 돈 바친 나를 때려서 죽인다면 세상이 어떻게 될라고 뒤집어진 세상이 됩니까 이게. 마태복음 16장 26절에보면 주객이 바뀐 그 모습을 생각해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거든요. 온 천하가 생명입니까? 무생물입니까? 온 천하가. 부동산, 차, 촌에 토지, 펀드, 주식. 생물이에요 무생물이에요? 무생물이죠. 주님께서 지금 무생물과 살아있다는 우리의 목숨과 이것이 단위별로 같은 대응이 안되잖아요. 대응이 안되지요. 사람 대 사람, 니 목숨이 중하냐 내 목숨이 중하냐? 이건 돼요. 둘 다 목숨이니까.
그런데 무생물 촌에 땅이 중하냐 네 목숨이 중하냐? 이거는 같이 동등하게 비교 대상이 안되요. 단위 자체가 달라요. 단위 자체가. 목숨은 얼마짜리냐 하는 자체는 인간에게 해당이 안되고 땅은 얼마짜리다 해당이 되잖아요. 촌에 밭이 있다 땅이있다. 그거는 밭 자체를 살리기 위해서 밭이 있는게 아니고 진짜 살아있는 내 목숨 살리기 위해서 밭에서 소산물이 나온단 말이죠. 이게 인간의 언어 생활입니다. 인간의 언어는 이처럼 우리가 납득되는 의미를 주는 이유가 인간의 언어는 인간 본인들이 주도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본거죠.
그런데 만약에 부동산이 하나님의 소유라고 봅시다. 하나님 것인데 내것이라고 우겼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 부동산, 땅에 갑자기 소나기가 와서 밭에 물난리 났는가 싶어서 가보니까 그 도랑에 물이 차서 빠져 죽었다. 그럼 누가 누굴 죽인 거예요? 밭이 그 주인을 죽인셈이 되죠. 하나님은 그 밭을 이용해서 주인을 죽인 셈이 된단 말이죠. 그 이야기 아닙니까 사도행전이. 자기가 바친 땅값 때문에 바친 당사자가 죽잖아요. 그러니까 이거는 자율성이 없다고 여기는 것을 통해서 주께서 자율성을 준다면 인간이 사용하는 전체 언어가 많은 의미를 담고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몽땅 죽음에 이르는 무의미에 불구하다는 겁니다. 의미 없다.
그들은 아나니아 삽비라가 헌금한 헌금을 바친 행위만 나오지만 거기에 대한 평가에 대한 말은 누구 입에서만 나옵니까? 베드로 입에서만 나와요. 여기 아이니아 삽비라는 말도 안했어. 그냥 5절에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려 혼이 떠났다. 그게 아니고요 할 것도 없이 죽었어요. 그러니까 지금 아나니아 삽비라가 헌금 똑바로 해 안 그럼 죽어 지금 이 문제가 아니고 인간 대 인간의 문제가 아니고 인간이 속해 있는 전체 세계관과 베드로가 속해 있는 성령의 세계관이 확연하게 지금 끊어져 있다. 전혀 다른 막으로 다른 장벽으로 다른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 지금 이걸 나타내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베드로가 하는 이야기가 뭐를 지금 베드로가 언급하느냐 하면은 4절에 보면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아나니아 삽비라가 헌금한 것에 대해서 헌금한 심보에 대해서 성령받은 베드로 쪽에서 폭로를 시키는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람 같으면 네 본심을 모르지 그러나 내가 속한 곳은 사람 쪽이 아니고 성령 쪽이야. 3절에 보면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너는 사람 속인 게 아니고 사람 속였다. 그 다음에 그 부인되는 삽비라가 왔을 때 어찌하여 주의 영을 시험했다. 주의 영을 시험했다, 너는 사탄에 속했다, 너는 하나님을 속였다 이런 일방적인 평가는 어느 쪽에서 나온 겁니까? 이거는 성령 쪽 베드로 쪽에서 나온 거예요. 변명의 여지가 없지요.
자, 그러면 여기서 근원적인 문제를 따져봅시다. 두번째 아나니아 삽비라는 왜 헌금했습니까? 왜 헌금합니까? 나 헌금해서 오늘 죽을래 이래서 헌금했습니까? 그것도 혼자가 아니고 부부가. 여보 오늘 헌금하고 오늘 죽자. 우리가 땅값을 속이고 헌금하는 것 같으면 진짜 교회가 성령이 함께 있다면 우리 헌금한 것에 대해서 용서하지 않고 사탄에 속한 인간아 너 죽어라 오늘 우리 사이좋게 오늘 죽을 수 있어 그러니까 딴 날 잡지말고 오늘 같이 죽자. 그래서 그들은 헌금했습니까? 자기가 헌금 속이면 죽는 줄 알고 헌금했습니까? 그렇지 않지요. 아나니아 삽비라는 본래 자기의 자율성에 속해요. 자율적 기능. 나는 살아있고 나는 헌금하고 싶다는 그 자율성이죠. 여기서 물어야 할 것은 왜 헌금을 하고자 하느냐에요.
질문을 이렇게 합시다. 그들이 헌금을 안하면 그들에게 돌아올 손해가 무엇입니까? 이 질문이 여러분 답변해봐야 되요. 그들이 헌금을 안했을 때 그들에게 돌아올 손해는 뭐냐? 주의 사람들이 얼레리꼴레리 당신 땅 판거 소문났는데 왜 소식이 없느냐. 교회에 그런게 있어요. 집사님 갖고 있는 땅 재개발 돼서 보상 받았데. 재정 보는 회계 집사는 한번에 알아볼수가 있지요. 왜? 십일조를 냈거든. 곱하기 10만 하면 보상금 아닙니까. 딱 나오잖아요. 어렵지 않아요. 두고보자. 두고보는데 한 달 지나고 두 달 지나고 어느새 세월이 16년. 생깠지요. 아무 소식이 없어. 누가 관심을 두겠습니까? 제일 관심을 두는 사람이 누구겠어요? 목사지요.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축복!하여 주셔서 하필 그 집사가 사는 동안 재개발이 되가지고 막대한 수입이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으니까 뭐 목 졸라서 돈 달라고 할 수는 없고요 지켜보는 거예요. 계산해보는 거예요.
예를들면 손흥민 계약을 했다. 손흥민이 만약에 교회를 다닌다면 그 교회 목사가 계약금이 이번에 얼마더라? 466억이지. 그럼 46억이 우리 교회에 오겠지 하고 은근히 기다리는데 쌩깠어. 아무것도 없어. 아버지가 축구교실 한다고 다 가져가서 없어 이게. 누가 이번에 비트코인으로 이익을 봤다는데 아무 소식이 없어. 왜냐하면 그 집사는 십일조 빠진 적이 없단 말이죠. 십일조도 몫돈 들어오면 십일조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지금 따져봐야 할 것은 이 아나니아 삽비라 왜 헌금을 하느냔 말이죠. 헌금해서 사단 났잖아요. 굳이 헌금을 한 이유가 뭐냐? 궁금해요? 아직도 남은 나의 의가 있다. 아이고 쪼다 병신. 아직도 내가 헌금할 만큼의 신앙이 있다고 자부하고 있어요.
주님의 복음은 우리가 일체 우리의 의는 없습니다. 전도니 헌금이니 예배니 찬송이니 일체 자기의 의는 없어요. 나온다면 모조리 죄 밖에 안 나와요. 나온다면 무조건 죄 밖에 안 나와요. 그런데 이 아니니아 삽비라가 자기가 의가 있으니까 만약에 나는 나올게 죄 밖에 없다 하면 땅을 팔아서 전부 다 줬을 거예요. 왜? 죄 반 주는 것보다 죄 몽땅 주는 게 자기한테 마음이 편하잖아요. 주님은 죄 용서하시는 분이고 자기한테 헌금할만한 죄가 등장했으니까 이 죄는 몽땅 하면 헌금하는 죄는 일단 자기한테 청산되었으니까 기분 좋잖아요. 그런데 헌금을 죄로 안보고 뭐로 봤습니까? 내게 아직 남아 있는 의로 보는 거예요.
이걸 자기가 조절한 겁니다. 자기 의를 조절했는데 어떻게 조절했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의 대로 헌금을 하고 싶은데 액수가 커. 아...액수가 크네요. 그래서 부부가 의논을 했겠지요. 응? 응. 응? 응. 끝났어요. 많다. 많지? 응 나도 많은 것 같애. 다? 아니. 오케이! 이 점에서는 부부가 천생연분이에요. 두 마리 토끼 다 잡았지요. 헌금 했으니까 내가 대외적으로 의롭다. 신앙생활 잘한다는 소식이 나의 아까운 돈을 바침으로서 오는 반대 보상으로서 나의 체면에 그 빈자리, 돈을 바친 그 빈자리를 남이 주는 체면과 위신의 상승으로 그걸 메꿀 수가 있어요. 그게 이득이고 또 이득은 뭐냐? 다 안 빼앗겼다는 이득. 헌금을 했다는 것은 윤리 도덕 수준으로 사도 바울의 말씀과 복음을 대한 거예요.
여러분 성경 해석은 이렇게 해야 됩니다. 성경 해석에서 윤리 도덕 부분을 잔에 따르세요. 잔에 따라서 윤리 도덕 부분을 잔에 따라 갖다 버리고 윤리 도덕 뺀 채 성경을 해석해보세요.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은 인간은 이미 윤리 도덕적이에요. 선악과를 따먹었으니까. 성경을 볼 때에 윤리 도덕적으로 내가 얼마나 더욱 더 착한 사람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목적을 가지고 성경을 보게 돼요. 이거는 타고 났으니까. 그걸 빼자는 말입니다. 뺄 때 이만한 막대를 준비하시고 삼베를 준비하시고 한약재를 구하세요. 약재를 다려가지고 작대기 가지고 쫙 짤 때까지 짜요. 한 방울도 윤리 도덕은 일체 안 나오도록. 막 시커먼 약재가 베어 나올 정도로. 야무지게 해가지고 성경을 볼 때 어떤 식으로도 착함과 악함 자체가 나오지 않도록. 그렇게 성경 해석할 수 있습니까? 못했잖아요.
못하니까 어디 걸린 겁니까? 율법의 권세에 걸린 거예요. 율법의 권세는 선악논리를 합류한 자에게 주어질 것은 저주와 죽음과 심판밖에 없습니다. 이게 율법의 권세에요. 죽이기 위해서 율법을 준 거예요. 죽이기 위해서. 죽여버린다 이래서 율법을 준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게 율법의 권세예요. 믿는 것과 효력에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아나니아 삽비라는 몰랐던 거예요. 아나니아 삽비라가 교회 와서 사도에게 헌금을 드린다는 말은 이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다고 본인이 자부했죠. 그런데 뭘 뺐어요? 내가 믿으면 그만이지 실제로 효과가 있겠느냐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효과가 있어서 인생 망친 자가 누구냐? 창세기 4장에 가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어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효과 제대로 봤지요. 영원한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예후를 보면 사람들은 어떤 요령이 통밥이 딱 떠오르느냐 하면은 나 안 할래. 헌금 안 하면 되잖아. 그러면 헌금을 안 하겠다는 말은 뭘 뜻하느냐 하면은 이 효과를 믿는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뜻이잖아요.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어떤 효력을 주신다고 믿어야 되는데 내가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는 그것이 어디에 비축이 되느냐 하면은 역시 나는 훌륭한 신앙인이야 라는 자기가 만든 창고에 이 내용이 들어와버리니까 내가 믿는 효과는 내가 아는 식으로 나한테 이게 내 실적으로 어떤 실적으로 내 의로 들어오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내가 나를 믿는다가 되어버려요. 나는 내가 아는 하나님을 내가 믿는다. 따라서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일방적으로 스스로 규정을 한 겁니다. 이거는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만은 내 기분 상 우리나라 교회의 99.9%입니다. 자기가 하나님 믿고 내가 하나님 믿는다는 것을 나는 하나님 믿는 신자를 자기 사고의 창고에 고이 딱 이쁘게 포장해서 비축하고 쌓는 재미로 교회다니는 거예요. 99.9% 이건 여러분에게는 해당이 안 되고요. 그럼 나머지 0.01% 숫자는 이미지니까 통계조사한건 아니고 일방적으로 하는 겁니다. 0.01%는 뭐냐? 뭘 믿느냐 하면은 율법의 권세의 효력을 믿는 사람이에요. 율법은 나한테서 나온 겁니까? 하나님이 주신 겁니까? 하나님이 주신 거죠. 이걸 오늘날 교인들이 안 믿어요. 왜냐? 율법은 하나님이 주셨겠죠.
중요한 것은 율법을 이해할 때 마중 나와서 이해하는 율법을 해석할 때 어떻게 한다고 했습니까? 도덕적 해석 있잖아요. 착해야 된다. 나쁘면 안 된다. 이 윤리 도덕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겁니까? 자기 마음에서 나온 겁니까? 자기 마음에서 나왔지요. 그러니까 효력을 안 믿는 거예요. 율법의 권세를 믿지 않는 거예요. 나 율법 믿고 착하잖아요. 헌금을 했잖아요. 나처럼 땅 팔고 헌금하는 사람 이 교인들 중에 몇 명인 줄 압니까? 반은 숨겼지만 어쨌든 교회에 도움 되라고 반은 냈잖아요. 포도주 반병만 있네. 반병이나 남았네. 긍정적 부정적 그런 거 베드로 당신은 몰라요 막 따지고 나올 거란 말이죠. 왜 반만 바쳤나 이렇게 따지지 말고 오 반이나 바쳤네 사람을 긍정적으로 좀 이해하면 안 되느냐 이렇게 따질 수 있는 변명거리가 많잖아요. 이 변명거리를 왜 합니까? 윤리 도덕에 준한 나는 윤리 도덕으로 착한 쪽으로 기울었다는 이 믿음으로 성경과 모든 베드로의 말씀과 하나님을 일방적으로 그런 식으로 자기 한계 내에서 해석해버리는 겁니다.
그게 뭐다? 의미다 무의미다? 무의미다. 아무 의미 없어요. 혼자 놀고 있네. 또 놀 것 끄집어내 보세요. 출발을 선악적으로 하고 있으니까 율법의 권세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거예요. 율법은 착해라 가 아니라 너 착하고 싶어? 죽여버릴라. 너 착하고 싶지? 예! 얘 당장 지옥 보내. 이게 율법의 권세 아닙니까. 의미 없는 게 뭐 윤리 도덕으로 자기를 완전무장해가지고 자기 의를 그런 식으로 갖고 있으려고 애를 써.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좀 충격적이지만 여기까지의 결론은 베드로는 교인들을 책임지지 않는다. 와 이게 무서운 이야기 아닙니까? 베드로는 아니니아 삽비라의 운명을 책임지지 않습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병원을 개원하면 써놓으세요. 우리는 환자의 목숨에 대해서 일체 책임지지 않습니다. 치과 앞에다가 우리는 당신의 이가 어떻게 망가지든 우리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체육관 앞에 우리는 당신의 몸이 어떻게 부셔지든지 우리는 일체 책임지지 않습니다. 못하지요. 베드로는 합니다. 아니니아 삽비라 교인의 운명에 대해서는 나 베드로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베드로 당신 책임지지 않으면 사도는 왜 됐는데? 사도를 왜 하는가? 사도는 바꿔치기 하는 거예요. 어떻게 바꿔치기 하느냐? 그 사람의 몸을 주님의 몸으로 바꿔치기 하는 봉사 일을 사도는 합니다.
자, 베드로와 아나니아+삽비라의 차이점이 뭐냐? 베드로는 바꿔치기 해요. 현재 인간의 몸은 천국에 못갑니다. 주님의 몸으로 바뀌어져야 하는데 주님의 몸에 안에 있는 게 뭐냐? 성령이거든요. 말씀의 성령을 전해서 말씀을 따라서 성령이 들어오게 되면 내 몸의 자율성이 아니라 내 몸의 자율성은 예수님의 자율성에 예속된 몸으로 바꿔치기 하는 거예요. 내놔! 내놓고 바꿔치기 하는 것을 베드로가 합니다. 바꿔치기 하는데 이거는 봉사죠. 돕는 일. 주님이 바꿔치기하고 베드로는 돕는 일을 하는데 아나니아 삽비라의 결정적인 잘못은 자기방어였어요. 자기방어. 누굴 돕는 게 아니고 자기 방어에 급급한 겁니다. 의논해서. 그래서 땅값이 자기를 죽일 줄 생각도 못한 거예요.
자기 자율성이 있고 땅값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 땅값을 하나님을 사용해가지고 그 땅 주인 되는 아나니아 삽비라를 죽여버렸단 말이죠. 그래서 여기에 11절에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왜 두려워합니까? 두려워한다는 것은 관람하고 있는 거예요. 관측하고 관람하고 구경하고 있었던 거예요. 베드로를 통해서 이런 사건이 일어난 것은 관람하라는 말이 아니고 발견하라는 말이죠. 모든 것이 자기밖에 모르는 무의미한 세계에서 진정 생명 되는 의미는 어디에서 다루는가. 발견하는 그 재미가 바로 성도의 세상 살아가는 재미 아닙니까? 성도는 인간 되는 게 아니에요 발견하는 거예요.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일을 벌리는데 그 일, 아나니아 삽비라 같은 사건이 일어나는 그 사건을 발견하는 그 즐거움과 감사가 있어야 돼요. 아 진짜 효과 있네 이런 거예요. 효과 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렇지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 부자들 누가복음 16장에서 부자와 나사로 했죠. 사람들은 성경을 해석할 때 뭐를 제거해야 된다? 완전히 한 방울도 윤리와 도덕을 다 제거하고 성경을 해석해야 돼요. 성경 해석을 윤리 도덕 차원으로 치사하게 저질로 그걸 낮추면 안돼요. 윤리 도덕 수준으로 뚝 떨어지게 하면 안 된다고요. 윤리 도덕을 빼고 나머지 그 무엇으로 해석해야 돼요? 인간은 이미 선악을 윤리 도덕으로 착한 사람 되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 입장이라서 성경 해석을 보면서 그래 이 성경을 지키면 난 얼마나 착하게 되는데 맨날 이 생각하고 있어요 맨날.
윤리 도덕을 빼라는 말은 뭐냐 하면은 결국은 나는 무의미 속에 헤엄치고 있기 때문에 성경 의미 있는 해석에 접근이 불가하다 이렇게 되는 거죠. 접근이 불가해야 도저히 접근하지 못해야 성령이 가르치는 성경 해석은 바로 율법의 권세를 경유해서 해석이 되는 거예요. 율법의 권세. 율법의 권세를 경유해서 해석할 때 나오는 하나의 예가 뭐냐 하면은 기생 라합의 태도와 행위입니다. 야고보서 4장에 보면 나오지요. 기생 라합과 짝을 이뤄서 나오는 게 아브라함이죠. 기생 라합이 뭐 했느냐? 거짓말 했어요. 평소에 주특기가 거짓말 하는 겁니까? 아니지요. 어떤 상황이 왔어요. 기생 라합에게 어떤 상황이 왔어요. 그 상황은 뭐냐 하면은 나는 죽었다. 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에게 맞아 죽는다. 하나님에게 맞아 죽는다는 뜻이 하나님은 어떤 분이다? 나를 죽이려고 작정하고 달려드는 분이다. 그 의식이 된 겁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죽게 되었다 라고 했을 때 그 사람이 윤리와 도덕으로 구차스럽게 안주머니에서 그걸 끄집어내겠어요? 안 끄집어내겠어요? 끄집어내도 소용없지요. 히브리서 9장27절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한 번 죽는 것은 이미 뭡니까?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요. 남자들에게 이번 말에 논산훈련소 가는 것은 이미 정하신 것이요. 만약에 젊은 친척에게 그런 이야기하면 뭐라고 하겠어요? 아니야! 아니야! 정했다니까 나라에서. 안돼!! 난 할 일 있어. 다음 달에 시험봐야 해! 안돼! 안돼고 되고 그건 소용없고 너 군대 가야해 통지서 나왔다니까. 어떻게 돼요? 자포자기하면서 안하던 문신 새기고 머리 기르고 하겠습니까? 이미 군대 가기로 정했는데 문신 새겼다가는 맞아죽지요.
이미 나의 본 모습은 이미 정해놨다면 그 다음부터 나의 모든 행위는 어디서 나오는가? 이미 정해놓은 그것에 맞춰서 행동하게 되어있단 말이죠. 기생 라합 입장에서는 뭐냐? 이미 죽었어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개인적으로 나쁜 게 아니고 민족 자체가 맞아죽게 되었단 말이죠. 자기가 평소에 그걸 수용했지요. 긍정한 거예요. 왜? 본인이 이스라엘이 아니니까. 이방 민족이니까. 그냥 그 자리 앉았다가 저주 받는 거예요. 그런데 마침 누가 왔습니까? 정탐꾼이 왔잖아요. 그 챈스를 찬스도 아니야 챈스를 놓칠 리가 있습니까? 정탐꾼이 쫓기게 되었지요. 자기 나라 경찰한테.
그럼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무슨 수단과 방법을 다해서라도 거짓말해서 그 정탐꾼과 자기가 한 패를 만들었지요. 한 패를 만들었다 하는 것은 기생 라합이 뭘 떠났다? 나는 의롭다 윤리적이다 도덕적이다 그래서 나는 여호와 하나님 아니고 어떤 하나님이 와도 나의 착함을 보고 나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에서 완전히 빠이빠이 한 거예요. 떠나버린 거예요. 이것을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의 효력을 더불어서 믿음을 생각하는 사람. 그 효력은 믿는 내가 예상한 겁니까? 아니면 주님이 일방적으로 정해놓은 거예요? 주님이 정해놓은 효과는 내가 어떻게 발악을 하고 반항을 해도 그건 완전히 무시당하고 일방적으로 퍼붓게 되어있다는 것이 정확한 거죠.
마지막 날에 해와 달이 변하면서 주께서 천사와 함께 이 땅을 방문한다. 이건 뭐 군에 가는 정도가 아니고 이미 정했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노아 때 뭐한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그걸 하지 말라가 아니라 먹어도 언제든지 거짓말 할 각오하고 먹으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도 사기 칠 각오하고 장가 시집가세요. 물론 평소에 잘하고 계시죠. 무엇을 위해서? 나의 윤리 도덕을 위해서? 아니지요. 그 나라와 의를 위해서. 거짓말이 아니라 그것보다 더한 것도 할 충분히 그러할 용의가 있어야 돼요.
왜냐하면 이미 주님의 자율권이 발동된 상태거든요. 아아 벌써 민방위 훈련이 저쪽에서 발동이 됐기 때문에 우리는 민방위 훈련 따라가면 되지요. 따라가면 되지 하든 말든 나는 내 할 일한다. 이거는 하나님의 자율권보다 내 자율권을 우선하는 행위가 되는 거예요. 이러한 일들에 대해서 참으로 좋은 예시가 바로 아나니아 삽비라가 헌금 해놓고 한날 한시에 세 시간 터울로 죽게 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우리가 관람하지 말고 거기서 우리가 발견할 것을 발견해야 되겠지요. 그 발견이 뭐냐? 베드로가 말을 했다. 언어가. 우리가 모르는 언어. 언어가 베드로에서 말이 나왔고 나왔던 그 언어의 세계가 그냥 언어가 아니고 효력 발생이 성사되는 언어. 왜 베드로의 말은 효력 발생이 성사되는가? 이게 유일하게 의미 있는 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은 의미 있고 우리의 말은 기생 라합에 의하면 그건 지킬 필요도 없는 거예요. 이스라엘 정탐꾼 분명히 이 근처로 왔는데 네가 숨겨놨지?! 어디 갔어? 하고 그 여리고성 경찰이 물었을 때 기생 라합은 속으로 되지도 않는 언어 발설하고 있다 하고 무시하면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 정탐꾼을 체포하겠다는 것은 그 나라 의와 하나님의 언약과 관계있습니까? 없습니까? 관계없지요. 관계없는데 그 말을 진지하게 들을 이유가 없지요. 아! 우리 집에 왔어요. 왔지?! 어디 있는데? 갔어요. 왔다가 그냥 갔어요. 사실은 옥상에 볏짚에 숨겨놓고 있었는데. 누가 봐도 거짓말이죠.
그 나라 의를 위한 거짓말 없이는 그 누구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거짓말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십자가 마을 너희들 신자야? 아니 불신자야. 저쪽에서 묻는 게 말 같지도 않는 거 물으면 답변을 어떻게 해야 됩니까? 말 같지도 않은 답변을 해야 이게 죽이 맞잖아요. 그걸 진지하게 답변할 필요 없어요. 너희 신자야? 아니 불신자야. 너희들이 진짜 복음이라며? 우리 이단이야. 신천지는 시시한 이단. 어설픈 이단. 왜 그걸 자신 있게 말 못합니까? 자신 있게. 우리는 뭘 믿기 때문에? 내 말은 아무 소용없지만 주의 말씀은 유효하게 효력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작동을 합니다. 자, 첫째 시간 내린 결론은 주님은 우리의 목숨을 책임지지 않는다. 다만 주님의 목숨을 집어넣고 우리의 목숨과 바꿔치기 한다. 우리는 백만 한번 백만 둘 배터리, 교체 되야 될 배터리이기 때문에. 10분 쉽시다.
강남-사도행전 5장 3절 (무의미) 250715b-이근호 목사
첫째 시간에 의미와 무의미를 아나니아 사건을 통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어려운게 있어요. 뭐냐면 의미와 무의미가 서로 상호 작용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뭐 무의미는 없애고 의미끼리만 놉시다" 이러면 하나님이 만든 세계가 아닙니다. 그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교회에 속한 사건이에요. 교회기 때문에 벌어진 사건. 교회라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 집약된 게 교회 사건입니다. 교회에 일어날 사건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준 집단이 이스라엘이고요. 왜 그러냐 하면 이스라엘은 누가 동행하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이름이 동행해요.
낯설교에 그랬지요. "고생한다." "너만 고생하냐?" 우리 주님은 고생 안 했어요? 주님도 고생했다고요. 의미와 무의미를 같이 공존하게 만들고 그 주고받고 주고받고 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은 아름다움을 느끼는 겁니다.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하실 때 재물, '부자와 나사로' 정해도 되는데 재물을 바꿔 보면 훨씬 실감 있게 나옵니다. 부자를 뭐냐? '우리와 나사로' 이렇게 바꿔도 괜찮아요. 왜냐하면은 우리의 모든 영은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나사로 같이 살려는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에 나사로를 우리라는 범주에서 한번 빼보자 빼 가지고 따로 설정하자 이 말이에요. 그러면 '우리와 나사로'와 같은 말이 '부자와 나사로'예요. 모든 인간이 부자되고 싶기 때문에..
내가 부자된다는 말은 된다는 말은 대칭성이 없습니다. 대칭성이 없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천국만 만듭니까? 지옥도니까? 둘 다를 만들었죠. 천국 지옥이 둘 다가 있어야 하나님의 주 되심의 작업의 완료가 돼요. 그런데 인간은 내 천국 간다. 하면 이 지옥은 안중도 없어요. 주님의 안목은 천국과 지옥이 둘 다 있음으로써 하나님은 기쁘다. 지옥 갈 자를 지옥 가게 한 것에 대해서 기쁘다. 천국 갈 자를 천국 가게 해서 기쁘다. 둘 다가 존재함으로써 기쁜데 우리는 한쪽만 택해서 기쁘다가 기쁘다가 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거는 우리에게 뭐가 없냐? 대칭성 결여예요. 대칭성이 빠져 있어요.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자꾸 슬퍼지고자 하고 슬픈 노래를 듣고 자꾸 조금만 뭐 안 되면 자꾸 슬퍼지는 이유는, 자기가 대칭성 구조가 안 돼 있기 때문에 대칭성이 결여되어있고 빠졌기 때문에 눈물이 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천국을 정했다~만 아니고 주님께서는 지옥도 정했다. 요렇게 둘 다를 다 같이 아우르는 안목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천국에 누가 가냐 하면 사랑하는 자, 지옥은 누가 가느냐, 저주 받는 자가 돼요. 따라서 이 천국과 지옥, 사랑과 저주는 반드시 주님의 작업에 의해서 양쪽 다 대칭적으로 분류에 성공해야 돼요. 늘 분류가 이루어져야 돼요. 자꾸 나는 어디 속합니까? 하면 안 돼요. 그래서 이 분류를 주께서 이렇게 하실 때 이 점이 좀 어려울 거예요. 뭐냐하면, '성령의 세계' 아까 그 "네가 하나님을 속인다" 또는 "주의 영을 속인다" 하는 성령의 세계의 특징은 '인간의 이해와 용서를 능가하는 세계' 예를 들면 바로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바치는 거. 이게 인간적으로 이해될 문제입니까? 그리고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사라를 차갑게 거침없이 너 죽던 말던 나는 모르겠다. 내쫓았죠? 사라가 내쫓는 거에 대해서 하나님이 동의했고 잘했다 하고 아브라함도 동의를 했어야 될 사건. 이거는 뭡니까? 인간의 용서를 능가하죠.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았는데 네가 뭔데 건방지게 네가 용서해?
같은 인간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도저히 우리는 납득하기가 곤란하죠. 남들이 자기한테 해코지 않해도 남들이 나쁜 짓하면 용서가 안 돼요. 그런데 내 딸이나 내 자식이 남한테 해를 끼쳐도 엄마가 나서서 자식을 감춰줘요. 얼마나 용서라는 게 얼마나 자위적이고 일방적입니까? 이해와 용서를 능가하기 때문에 이 능가하는 것에서 인간이 이 주님의 이런 이해와 용서를 능가하는 주님의 일 때문에 이 영적 일 때문에, 성령에 인하여 하신 주님 때문에 인간은 능가하는 이 능가를 인간은 따라갈 수가 없어서 인간의 대체는 뭐냐 하면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살해하는 겁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넘어가 버리니까 에라이 죽어라~ 하고 하는 거예요. 죽여 버렸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하신 말씀과 주님이 하는 그 행위에 대해서 인간의 솔직한 본심에 의해서 나온 행동은 뭐냐면 죽으라고 주님의 가슴팍을 쥐어 뜯는 거예요. '주님의 가슴팍을 쥐어뜯는 것' 주님 당신이 나한테 이런 이야기해 가지고 내가 얼마나 마음에 상처가 되고 고통스러운가 당신은 알기나 알아? 하면서 쥐어 뜯는 거예요. 사랑과 전쟁 그 드라마 보면 많이 나오죠. 그 시츄에이션 드라마 보면 나오죠. "인간아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죽어 죽어" 너 때문에 내가 못 살겠다. 좀 해 봤어요? 인간과 인간 끼리 그런 일이 있는데 주님 앞에서는 인간이 십자가 못 박았을 때에 주님을 예수라는 자를 동정을 안 했어요 사람들이. 동정할 수가 없어요. 너무 세니까. 적어도 벌써 주의하라고 경고 빨간불 몇 번 더 갔어요. 근데 말 안 듣거든요. 봐주다 봐주다 더는 못 봐주는 거예요.
내가 이해하고 내가 당신을 용서하려고 해도 당신은 이제 용서 대상이 안 돼. 우리는 당신에게 할 도리 다했어. 봐줄 거 다 봐줬는데 당신이 이제 다 죽으면 당신 책임이야. 우리는 당신을 봐주려고 애를 많이 써서 이건 본디오 빌라도도 마찬가지고요. 바라바까지 강도까지 해 가지고 살려 달라고 하고 자기 마누라가 세숫대야에다가 이 손 씻고 하면서 봐달라고 할 때 그 본디오 빌라도가 매섭게 내몰아치지 않았어요. 감안했어요. 참작했다고요. 재판장 입장에서 참작해서 어쨌든간에 저 피고를 죄 없는 피고를 살려달라고 재판장에 있는 본디오 빌라도가 나름대로 애를 썼는데, 피고 자체가 뭐 전혀 반성의 기미를 안 보이니까? 어쩔 수 없지 뭐~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 할 때는 예수 믿어 주니까 당신 고만 고마운 줄 알아. 이런 자세를 우리가 넘어서야 되거든요. 다른 사람은 성깔 못 됐는데 나는 착하기 때문에 내가 예수라는 분은 나는 훌륭하게 본다. 본디오 빌라도 이상으로 훌륭하게 본다. 따라서 나는 다들 바쁘지만 지금 교회 갈 시간도 없어 바쁘지만 나는 예수는 믿어줄 용이가 돼 있습니다. "저 착하징 착하징?" 막 "ㅇ" 붙는 거예요. "나 훌륭하징?" 이런 거 있잖아요. 아우 성격 좋아~ 근데 주님은 나의 성격을 능가하는데요? 영적 세계가 나의 성격과 인간성 좋음을 능가해 버리는데 그건 따라갈 사람 없으니까 내가 이 정도로 당신을 믿고 따르고 애썼는데 어떻게, 왜 예수 당신은 나의 이해의 범위 바깥에서 놀면 내가 당신을 믿고 잘해 주려 해도 나는 어쩔 수가 없네 뭐. 여기서 우리 빠이빠이 합시다. 뭐 이렇게 되죠. 여러분들이 그 십자가에 달린 강도 있었지요. 강도 있을 때 여러분 출발점 어디서 해야 되냐면 이걸 해야 돼요. 구원받지 못한 지옥 간 강도부터 출발해야 돼요.
끝까지 당신을 믿을 용의가 있으니까 내가 당신을 믿어 줄테니까 당신은 나한테 뭘 해 줄래? '내가 당신을 믿어 줄테니까' 앞에 이렇게 괄호 열어줘야 돼요. (바쁜데도).. 굳이 안 믿어도 내가 당신을 믿어 줄 테니 당신은 나에게 무엇을 제공 하시겠습니까? 이 뭐냐면 거래죠 거래. 내가 세운 언약에 당신이 따라 들어오라 이 말이에요. 내가 세운 언약에 당신이 따라서 여기 도장 찍어라 이 말이거든요. 당신은 나한테 뭘 해 줍니까? 의, 천국, 영생? 좋지. 그래 내가 그걸 원했어. 구원? 기도하면 복 받고 죽어서는 천국? 좋지. 좋은 거예요. 여기서 민수기 6장 24-26절 누가 한번 읽어 보세요. 흔히 이걸 구약에 나온 주기도문이라 했는데 과연 그런지 한번 따져 봅시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이게 바로 기존 교회 안다는 사람의 특징이에요. 기존 교회는 이게 구약의 주기도문이에요. 뭐 심방 가려면 6장 이것만 생각하고 온 사람들이에요. 6장 24절. "여호와는 네게 복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지금 심방 왔다고 봅시다. 지금 당회장 목사님이 수행원 한 열대명 해가지고 심방 왔다고 보자 말이죠. "여호와는 네게 복주시고 너를 지키시기 원하며 여호와께서 그 얼굴로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그 얼굴로 네게로 향하사 듣사 평강 주시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할 때 백성들이 뭐라 했다고요? 아멘. 심방 끝났죠. 심방 끝났어요. 이거는 주기도문 아무 상관없어요. 주기도문은 죽이는 겁니다 그거. "죽어 인간아" 이게 주기도문이고.
성경을 읽고 나한테 괜찮다 싶은 건 뽑아 가지고 거래 나서는 거예요. 주님, 성경에 이런 이야기 있는데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겠다는 그거 있는데 딱 그걸 들고 와 가지고 내가 당신을 믿어 줄테니까 당신은 영생 줄 용의가 돼 있습니까? 그러면 또 상상해서 옆에서 또 훈수 두는 뭐 "믿어라 믿어라" "믿습니다. 그럼 우리 계약 끝나는 거죠? 손 털고 이제 집에 가도 내일 죽어도 천국갑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제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거는 누구 효력이에요? 본인이 비축한 본인이 일방적으로 자기가 선한 존재, 구원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너무나 일방적인 말도 안 되는 일방적인 무의미한데 내가 의미 있다고 단정 짓고 이런 계약에 나서는 거예요. 이게 바로 지옥 간 강도의 특징이에요. 강도를 이렇게 천국 지옥 배치하는 이유가 있어요. 두가지 배치해야 대칭성이 아름다워요. 대칭성. 모든 인간들이 지옥 가는 그런 식으로 하는 겁니다. 바쁜데도 굳이 안 믿어도 되지만 나는 워낙 내가 선악적으로 착한 인간성 자체가 인간성 자체가 됐거든 착하기 때문에 당신을 믿을 용의가 돼 있다. 그러니까 당신 쪽에서 좀 성의를 보여 달라. 좋은게 안 좋으냐? 좋게 좋게 하자 이 말이에요. 그게 은혜롭잖아. 이렇게 된 거예요.
여기서 방금 제가 어려운 걸 했어요. 대칭성이라는 거. 대칭성은 모든 존재보다 우선됩니다. 이게 대칭성이에요. 물리학에도 마찬가지지만 모든 존재보다 대칭성이다 이게 뭐냐 하면은 제가 그 부산 강의 때 강정 이야기 자꾸 끄집어냈죠. 땅콩 강정 깨강정 쌀강정. 강정 할 때 강정 하나 땅콩 하나 이게 전부 다 뭐냐면 이게 입자거든요. 입자를 강정의 엿이 이걸 끈찍끈적한 엿이 이렇게 하나로 만든다고요. 글루온. 글루온 입자라고 양자 역학 물리학에서 글루온이라 하는데 이게 풀이에요. 풀로 입자를 딱 묶는 거예요. 그러면 뭐냐? 이렇게 돼요. 물질에서 또 물체에서 힘이 나온다가 아니라 두 물질, 물질과 물질 사이에서 힘이 나오는게 아니고 대칭성에서 뭐가 나오냐? 힘이 나오고요. 이 힘에 대한 결과물이 뭐냐? 이게 바로 입자예요. 입자. 이게 물질이에요. 물질. 물체.
그러니까 이건 뭐냐면 이 세상은 뭔가 보존하고자 하는게 뭐냐? 이 대칭성을 보존하고 싶은 거예요. 사랑할 자는 사랑하고 미워할 자는 미워한다라는 대전제를 딱 설정해 놓고 거기에 맞춰서 거기에 대한 필요한 물체 물질, 인간들을 거기다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 만들어 내기 위해서 그 대칭성에서 뭐가 나오냐? 힘이 나온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거는 뭐냐면 인간의 입자에서 나온 인간의 이해와 인간의 이성과 용서를 능가하는 세계가 무슨 세계? 성령의 세계예요. 이게 성령의 세계예요. 자, 거기서 나온 논리가 뭐냐? 그렇게 되면 인간은 왜 슬프냐? 대칭성이 깨졌으니까 슬픈 거지. 대칭성이 없으니까. 자기만 생각하니까 대칭성이 없으니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나 지옥 가면 안되는데, 천국 가야 돼. 이 자체가 대칭성이 없는 거예요. 왜 지옥을 굳이 만든 주님의 취지에 대해서 본인이 왜 거기에 대해서 관심이 없냐 이 말이죠. 왜 자기는 굳이 천국에 가야 될 이유가 뭐냐? 그러니까 천국에 나 가는 거야 하면서도 자기 마음에 뭐가 없어지잖냐? 슬픔이 없어지지 않아요. 그런데 but 그러나 혹시 못 가면 어떡해? 찝찝해.
제가 이렇게 지금껏 살아오면서 우리나라 노래 가운데 제일 슬픈 노래 언젠가 그 우리 형제님이 나한테 물은 적 있어요. "목사님 어떤 노래가 제일 슬픕니까?" 기억나요 안 나요? 안 나요. 이제 인간의 슬픔에 대해서 한번 분석해 봅시다. 인간이 왜 슬픈데 이 해답은 대칭성이 없어서예요. 이게 슬퍼서 교회 가는 이유가, 슬퍼서 교회 가서 교회 가서 또 슬퍼요. 그 이유가 뭐냐? 자기만 생각하니까. 대칭성이 없어서. 자꾸 유튜브 이거 노래 트니까 저작권 자꾸 해 가지고 아예 내가 노래를 불러버려야지. 다 받으셨지요? 1973년도 방미, 미국 가는 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개그맨 가수 이름이 방미예요. 내가 지금까지 가장 슬픈 곡 두 곡을 뽑았는데 제일 첫 번째가 올 가을엔 사랑할 거야. 두 번째가 날이 갈수록이에요. 그걸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올 가을엔 사랑할 거야는 방미가 부른 노래인데 1973년도 날이 갈수록은 김정호가 불렀던 1975년도 나온 노래예요. '묻지 말아요 내 나이는 묻지 말아요' 노래 이렇게 시작되거든요. '올 가을엔 사랑할거야' 이게 어디서 슬프냐면 '올 가을엔 사랑할 거야~' 여기서 슬픈 거예요. 그 심정을 한번 돌아보세요. 지금 나는 여기 있는데 여기 뭘 보느냐? 미지의 나가 있어요. 미지의 나가 비어 있는 거예요. 올 가을엔 사랑할 거야. 이 뭔 뜻입니까? 지금은 결핍되어 있다는 거. 뭐가? 사랑이 결핍되 있는 거예요. 사랑의 결핍은 어떤 경우도 온전치 못해요. 그래서 온전함을 채우기 위해서 비어 있는 이 부분을 올 가을엔 사랑할거야 하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슬픈지 그 심정도 답답해 죽는 거예요. 백화점 가서 물건 사려면 돈 주면 구입할 수 있잖아요. 근데 사랑을 어디서 구입합니까 사랑을? 내가 좋다 하면 지 싫다 하고 지가 좋다 하면 내가 싫은데. 도대체 이게 내 마음대로 안 되잖아요. 내 마음대로 안 되는데 나한테 결핍이 있어요. 결핍이라는 말은 뭐냐면 결핍보다 더 어려운 말은 이게 자꾸 자아를 '지연'시키는 겁니다. 지금은 아니고 올 가을까지 한번 봅시다. 자기를 자꾸 뭡니까? 미래로 자꾸 지연시키는 거예요. 지금은 형편 이런데 가을에는 나아질 거야. 자꾸 지연시키는 이 모습이 어떤 모습이라도 대칭성이라는 것은 꿈도 도저히 예상도 못 하고 있는 상태에서 더욱더 집요하게 자기의 결핍을 지연된 미래에다가 거기에다가 자꾸 미루는 거예요.
'올 가을엔 사랑할 거야 나 홀로 가는 길은 너무 쓸쓸해' '창밖에 눈물 짓는 나를 닮은' 무슨 잎 하나? 단풍잎 하나. 단풍잎이 인간입니까? 얼마나 비교할게 없어서 단풍잎 하나 그 노래 들어보면 나오는게 있어요. 탄식의 음이 여기 들어가 있어요. 가사에 안 나오지만 '나를 닮은 단풍잎 하나~ 하아~' 자세히 들으면 나와요. 그런데 내 심정이 이런데 이 가을은 어떻게 되냐? '가을은 소리 없이 본체만체 흘러만 가는데' 슬퍼라 아무도 자기 마음을 이해하는 이 아무도 없어요. '애타게 떠오르는 떠나간 그리운 사람' 또 지나간 이미 헤어진 사람을 찾고 있어요. '그래도 다시 언젠가는 사랑을 할 거야' 가사 이래요. 저작권 안 걸립니다 내가 불러서.
무슨 슬픔인지 알겠죠? 이게 뭐냐? 대칭성이 빠져 있어서 슬퍼요 인간은. 이게 왜 그러냐면 마귀가 네가 신이 되려면 이렇게 해야 돼. 내 신이 된 이상은 대칭성이 없어요. 내가 나한테 최종적 존재가 마지막 존재가 나기 때문에 가장 소중한 존재가 나이기 때문에 대칭성은 둘을 용납하지 않아요. 마지막은 내가 남아 있어야 돼요. 이게 지 손가락 가지고 눈을 찌르는 거예요. 근데 주님이 만든 현실은 무슨 성이다? 대칭성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주님 만든 존재란 나는 대칭성이 없어요. 그러면 내가 바보죠. 내가 전혀 무의미하고 비현실적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날이 갈수록 1975년도. 1975년도 김정호 노래 나왔을 때에 그때 대학교 때 복학생들 모아서 예비군들 복학생 훈련시킬 때 주로 어디서 하냐 하면 대학교 캠퍼스 빈터에 그 풀잎만 있는 언덕에서 예비군 훈련 교육을 시켰어요. 이제 끝나면 오후 5시쯤 되면 해가 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것도 가을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해지는 시각 계산 나오지요. '우~ 가을잎 찬바람에 흩어져 날리면 캠퍼스 잔디 위엔' 방금 예비군 훈련 마쳤거든요. 다 가고 마지막 시간에 '캠피스 잔디 위엔 또다시 황금물결'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뭐냐 이 복학생들이 4학년 되면요. 전부 다 취직하러 가서 생각을 이제는 대학 생활을 마지막 마감을 해 줘야 돼요. 하다 보니까 일찍 팔린 친구도 있고 끝까지 졸업하는데도 취직 안 된 친구도 있어요. 그러면 공대에 기업체에서 추천서가 들어가고 석유공사 뭐 많은 기업에서 들어오면 삼성에서 들어오면 이 추천서 놓고 같은 친구끼리 경쟁 대상이에요. "교수님 제가 들어가야 되겠습니다" "네 성적이 쟤보다 못한데?" "쟤보다는 내가 더 적합입니다" 이래 가지고 둘이 우리 친구 아이가 해 놓고는 실제로는 사무실 가 가지고 "내가 들어가야 됩니다" 그 당시엔 추천서 받는 그게 합격이에요. 시험 같은 것은 없고 그런 시절이에요.
또다시 군대 갔다 복학생 대학 다녔죠. 대학 다니면서 뭐해요? 공부하는 게 아니에요. 친구하고 놀러다닌다고요. 그러니까 잊을 수 없는 얼굴 '또다시 황금물결 잊을 수 없는 얼굴' 얼마나 얼굴들이 보고 싶었으면 '얼굴 얼굴 얼굴들' 그 다음에 취직하러 가잖아요. '우우우우~ 꽃이 지네 가을이 가네' 남들은 취직해 가지고 또 여자 동료는 시집 가고. 그러니까 친구들 다 와해됐죠 친구 모임이. 그럼 떡하니누가 남았어요? 본인 남고 본인 어디 뒹굴고 있습니까? 황금물결 낙엽지는 캠퍼스 뒤에 지금 갈 자리도 없어 가지고 지금 졸업은 코 앞에 있는데 취직도 안 되고. 취직 안 되니까 뭐 연애도 못 하고. 돈 있어야 하지. '꽃이 지고 가을이 가네' 이게 1절입니다.
이게 얼마나 슬픈 노래인지 그 당시에 통기타 치고 하면서 20대에 신나게 놀았잖아요. 놀았는데 대학 졸업하고 늙어가지고 이제 졸업할 때 되니까 취직자리가 없네. 그때 얼마나 슬픕니까? 친구? 이제 친구 아니에요. 경쟁 대상이라고요. 친구로 지냈던 것이 그때 교수님 내가 간다 하는데 왜 네가 끼어들었어? 이래 가지고 원수가 된다니까요. 같은 동기 여자 동기들은 벌써 시집 가서 애 낳아가지고 청첩장 한다고 돈 내라고 결혼식 날짜 오고, 아 그럴 때 나이 27, 28 예비군복 입고 마지막 2학기 끝에 대학 가을날. 쓸쓸하기 짝이 없어요. 꽃잎도 떨어지죠. 그 다음에 뭡니까? '젊음도 곧 가겠지' 그 다음에 나온 가사가 '머물 수 없는 시절 우리들의 시절' '세월이 가네 젊음도 가네' 꽃이 지네 가을이 가네 세월이 가네 젊음도 가네 가네 가네 해 가지고 김광석은 33에 자살해버리고 노는데 익숙하다가 같이 있는 젊은 애들 다 헤어지니까 사는게 허무하니까.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낫다. 이게 '비대칭성' 다시 말해서 다른 말로 하면 '불균형'. 슬픔은 '함께'가 깨어지는 거예요. 이 대칭성은 성경적으로 대칭성은 천국과 지옥으로 대칭돼야 돼요. 근데 천국은 어떤 세계라 했습니까? 성령의 세계거든요. 그런데 이 지옥은 어떤 세계냐 하면은 인간의 이해와 서로서로 용서와 인간의 동정과 인간의 이성적으로 다져진 세계가 지옥입니다. 왜? 선악 세계니까. 인간은 이해와 용서를 극복할 수가 없어요. 뛰어넘을 수가 없어요. 니 이만큼 도와줬으니까 내 이만큼 도와주겠지. 상호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같이 정들었던 그 정으로 사는 세계가 인간 세계입니다. 젊을 때 친구 따라 교회 왔다가 나중에 시집하고 결혼하고 하면 교회 안 나오는 이유가 뭡니까? 친구 없으니까. 친구 때문에 가는 거예요. 만약에 교회에 마음에 드는 아가씨 있다. 새벽 기도까지 나와요. 봉사란 봉사는 다 해요. 목사는 오해해 가지고. 믿음 좋은게 아니고.
서로 이해가 되고 용서가 되고 말이 통하니까 의미가 통하니까 같이 붙어 있는데 이것이 결핍이 일어났다. 이것이 누락이 됐다. 그러면 슬프다. 왜 슬픈지는 몰라요. 그냥 슬퍼요. 세상이. 이게 뭐 잘못되었냐면, '나는 불균형하다' 이렇게 돼요. 근데 아까 그 '우리와 나사로' 부자 나사로에서 나사로를 반길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나사로가 이게 대칭성으로 이 땅에 주어진 거예요. 대칭성. 예수님이 그 인간의 불균형과 비대칭성의 증거가 예수님 몸에 새겨져 있죠. 이사야 53장 한번 봅시다. 53장 4절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를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자 우리의 이성입니다. 우리 인간의 세계예요. 대칭성 없는 세계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생각 이해죠?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도다" 이게 인간의 모든 아담부터 인간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예수를 믿고 싶어요. 예수 믿고 싶은데 진짜 오신 분은 하늘에 계신 영광과 지상의 고난이 대칭되어있다고요. 왜? 지옥 같은 세상에 왔으니까 고난을 받는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나 영광을 받아서 합당하냐 빌립보서 2장에 보면 그 영광을 어떻게 하고? 스스로 포기하시고 이 땅에 내려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대칭성 가진 분 누구밖에 없습니까? 예수님밖에 없죠.
그럼 다른 사람은 구원 받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한계를 못 넘으니까 구원받을 수가 없는 거예요. 아무리 예수님 이해를 해도 결국은 나는 예수님을 붙들어도 갈수록 예수님이 하는 모든 상황과 이 모든 것이 납득이 안 돼. 이 정도 바르게 복음 생활하고 신앙생활하고 오직 복음만 사랑하면 뭔가 주님 쪽에서 뭔가 콩꼬물이라도 내야 되는데 일체 면회도 없고 사식도 없고 뭐 그냥 없어 없어. 이 믿으란 말인지 말라는 말인지 심지어 아브라함는 더 심하게 이야기했죠. "네 아들 바치라" 이삭을 줄 때는 하나님이 나를 우호적으로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 이삭이 얼마나 귀합니까? 귀한 자식을 도로 나한테 죽여서 바치라 하면 아브라함이 그걸 그 비이성적인 것을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안 되죠. 그래서 지금 여기서 주께서 하는 방식은 뭐냐 하면은 여기서 이게 나옵니다. '자발적 대칭성 깨어짐‘
자발적 대칭성 깨어짐으로써 여기서 없는 데서 천국 백성이 나와요. 죽은 데서 천국 백성이 나오는 방법은 자발적 대칭성을 깨버립니다. 누가? 예수님이 고난을 받음으로써. 그게 이사야 53장에 보면 "우리는 다 양 같으나" 여러분 잘 아시죠? "다 양 같으나 제 갈 길 갔거늘" 5절에 "그의 찔림은" 그 다음에 뭡니까?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우리의 허물은 뭡니까? 안 믿겠는 게 아니고 믿을라고 해도 메시야가 믿을 만한 분이 못 되거든요. 이게 우리의 한계고 허물이에요. 대칭성, 하나님이 알고 있는 대칭성은 우리는 이걸 이거 대칭성은 우리가 없어요. 그게 허물이에요. 우리는 천국만 생각하지. 굳이 지옥 가야 한다는 지옥을 만들 이유에 대해서 우리는 납득이 안 돼. 하나님께서 뭐 성격 이상해~ 그렇게 안 믿는 사람 영원토록 괴롭혀야 속이 시원해? 막 이런 식이다 이 말이죠.
마가복음 9장 한번 봅시다. 마가복음 9장 47절 48절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면은 빼어 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으로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음이라" 자 지옥이 뭐냐? 거기는 구더기도 그 다음에 뭡니까? 구더기도, 이게 안 죽었어 문제예요. 차라리 고통 가운데 죽으면 좋겠는데 안 죽어요. 계속 고통만 살아 있어요. 고통을 살아 있게 해서 너도 같이 살아 있어라. 이게 지옥이에요. 환장합니다. "차라리 날 죽여~ 나 죽고 싶어" "너 못 죽어" 왜? "너와 붙어 있는 고통이 저주의 고통이 안 죽기 때문에 너도 안 죽어" 네가 있어줘야 고통이 계속 사니까. 그 다음에 뭡니까? "저 뜨거운 불 좀 꺼져 줘" "안 꺼져" 불도 꺼지지 않는다. 참.
마태복음 8장에서는 지옥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마태복음 8장 12절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지옥의 특징이 뭐냐? "바깥 어두운데" 조명빨이 안 좋아요. 북한 같애. 전기 에너지가 없어 가지고. 근데 그 쫓겨나서 거기서 뭐 하고 있습니까? 뭐 거기서 뭐 참고 기다리지. 헬스를 하고. 헬스 할 입장이 안 돼요. 지금 필라테스 할 입장이 안 되고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이를 왜 자기 신세 한탄해서 갑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대든다고 이를 갑니까?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거기 지금 주님께 원망하는 이 세상이 지옥입니다. "하나님 당신 나한테 뭐 해 줬습니까?" 이게 원망하는 거 시작. 그걸 일본말로 요이땅~ 지옥이 시작된 거예요. 원망하는 거. 교회 40년 다녔는데 하나님 나한테 해 준 건 무엇입니까? 요게 이제 지옥의 시작이에요. 우리의 안에 깊숙히 감춰 있던 우리의 본 마음이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튀어나오는 거예요. 누가 그걸 튀어나오게 했었습니까? 율법의 권세로서 말씀이 그걸 끄집어내는 거예요. 믿고 싶어요.
근데 예를 들어서 아까 그 마가복음 9장 다시 봅시다. 믿고 싶어요. 믿고 싶은데 47절 봅시다. 45절 47절에 믿고 싶어도 못 믿게 만듭니다. "만일 내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그 다음에 뭡니까? "찍어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로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 말씀대로 멀쩡한 자기 발을 찍으면 그거는 정신병자입니다. 만일 내 눈이 범죄케 하면 찍으라. 지금 잘 보이는데 1.2 1.5 나와 그걸 왜 그 오른손을 왜 찍어 버려요? 왜? 요쪽 눈으로 죄지었다고.. 그래서 한쪽 눈은 죄 안 짓습니까? 요쪽 눈이 죄졌으면 요 눈만 빼면 안 돼요. 어떻게 해야 하냐면 두뇌를 해부해서 눈 시신경이 오른쪽 눈은 왼쪽 그거를 드러내야 돼요. 복잡해요. 수술이 굉장히 복잡해요. 죄 안 지으려면 복잡해. 나중에 이것저것 다 하면 나중에 신장 떼고 남는게 없어. 차 떼고 포 떼고 없어요. 그냥 없어요. 그걸 누가 해주십니까? 고맙게도 주님께서.
그 명복공원이라는 대구에 장례 화장터가 있어요. 주께서 친절하신 주님께서 화장터에서 아주 가루를 만들어줍니다. 가루를 만들어 주고 어느 강의에서 이야기했죠. 드라이브스루 예정했다. 공중에서 헬륨가스 공중에서 그냥 일본 장례 공중에서 유골 다 공중에 풍선 띄워가지고 공중에서 날려보내요. 찾지도 못하게. 아이고 잘 보냈다~ 그 인간. 자꾸 땅에 있으면 또 매 추석 때마다 설마다 찾아가잖아요. 그것도 벌초 또 누가 하냐고 형하고 싸워서 가다가 술 먹고 형 패고 또 동생 패고 이런다고요. 아예 공중으로 폭발시키면 되잖아요. 그 수목장 하면 수목장은 자기 조상만 가는게 아니에요. 그 다음에 제 26기 27기 막 가가지고 수목장이 어느 조상이 어느 조상 건지 몰라 섞여 가지고. 왜? 그 장례 회사에서 비용 아끼기 위해서 있는 나무에다가 그냥 하고 나중에 나무 자체로 해 가지고 또 다른 새 나무 심고 이래요. 어차피 자본주의인데 뭐.
자 지금까지 보니까 어떻습니까? 지옥을 안 가고 싶어도 안 갈 수가 없죠. 왜? 빼지를 못하니까. 누가 좀 빼줬으면 좋겠는데 누가 눈을 못 빼고 누가 오른팔을 못 잘라요. 무슨 수가 없습니까? 왜 수가 없겠습니까? 수가 있지요. 그 수를 이제 말씀드리겠습니다. 욥기 38장 26절에서 27절. 자 그렇게 원망 많은 욥에게 주님이 해결책을 줍니다. 대칭성을 가지고. 그 대칭성을 하기 위해서는 현재 자기만 있고 나머지는 대칭성이니까 자기만 챙기고 없습니까? 저쪽은 없죠. 대칭이 안 되니까 없지요. 그러면 대칭성은 주께서 자발적 대칭성을 파괴했다는 말은 뭐냐하면 죽었다는 말이잖아요.
그러면 인간에게 정의할 때는 한쪽 남아 있는 것도 없애면 대칭성 없음이 성립이 안 되죠. 저쪽은 없고 내쪽만 있는데 남아 있는 내 쪽을 마저 없앰으로써 아예 처음부터 뭡니까? 이건 아무것도 없는게 없이 되죠. 그 없는데서 있게 하는 거. 그게 바로 이삭이 태어난 거 아닙니까?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이삭을 죽임으로써 죽은 데서 살려내는 이 원칙. 이 원칙 외에 천국 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원칙을 집어넣으면 간다. 문제는 그 원칙을 어떻게 집어넣느냐 문제죠. 그 집어넣는 방법은 욥기에 38장 26절 27절 제가 읽습니다.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고 황무하고 공허한 토지에 축축하게 연한 풀이 나게 하였느냐" 쉽게 말해서 욥아 빈 황무지에 비 내리는 이유를 네가 아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를 듣고 욥이 무슨 생각해야 돼요? 나 사람인데요. 안 되죠. 그거 접어두고 본인이 뭐가 돼야 돼요? 황무지가 되죠. 황무지.
그걸 첫째 시간에 그걸 뭐라 했냐? 이걸 '무의미'라 했어요. 내가 살아 있는 건 맞고 내가 뭐 빵 좋아하는 거 맞고 다 맞는데. 우리나라 축구팀 일본한테 이겼으면 좋겠다. 나는 가수 누구 좋아하고 좋아해요. 문제는 뭐냐? 좋아하지 말라가 아니라 누구 싫어하지 말라가 아니라 그게 뭐다? 내가 출세하고 승진하고 성공하고 재벌되고 좋은 차 타고 아파트 좋은 거 다 좋은데. 그게 주님 앞에 뭐다? 이게 '황무지'입니다. 다 좋아요. 좋은데 억지로 안 좋다 하는 건 말도 안되고, 좋지만 그게 하나님 보시게 의미가 없는 거예요. 의미가 없어요. 제가 그 부산 강의할 때 접시에다가 날파리 빠진 거 물에 빠진 거 생각 나죠. 파닥거려요.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데 이게 평면이라 이 빠레트 평면이라서 뛰어봤자 자신의 이해와 자기의 용서를 능가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지 마" 그냥 "하지 마" 오늘 제목을 '하지 마'라 할까요 차라리. 하지 마. 내가 할게. 문제는 뭐냐? 황무지에 뭐가 내린다? 은혜의 단비를 내리네. 은혜의 단비. 비 내릴 때 '이 왜 내리지? 이 어디서 오지?' 하늘서 오지 뭐. 햇빛과 공기를 주시고 단비를 주시는 이것은 마태복음 5장에 의하면 하나님의 자비로우심. 원수를 사랑하라 그 대목에. 하나님의 자비로우심. 하나님의 은혜. 지금도 세상이 지옥 같은 데다가 계속 비는 내리고 하나님의 구원할 자에게 하나님의 성령의 비를 내리시고 하나님께서 먹고 마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의 이게 바로 의미 있는 데거든요. 주님이 사셨던 곳에서 무의미한 주님이 고생했던 무의미한 세계에 왔는 것처럼 지금도 비가 오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여기에 대한 성도의 성도다운 반응은 뭐냐? 감사하죠. 감사합니다. "오늘 과속 잡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은 청탁권 때문에 평소에 안 하던 거짓말을 했는데 연기가 괜찮았던 모양입니다. 경찰 그냥 갔어요" 그 다음에 뭡니까? '감사합니다' 마지막에 뭐 한다? '감사합니다' 윤리 도덕을 능가하는 '감사합니다' 윤리 도덕을 능가하는 감사.
욥은 이 이야기 듣고 욥은 할 말을 잊었어요. 재를 뒤집어 썼어요. "재가 내 본모습에 합당함이니다. 흙으로 왔으니 흙으로 가겠다" 재를 뒤집어 썼어요. 하나님께서 욥에게 "욥아 재 뒤집어 쓰지 말고 네가 이참에 그만 제사장 해라. 제사장. 저 철딱서니 없이" 욥은 대칭성을 만났죠. 대칭성 누굽니까? 나는 재, 주님은 나에게 없는 재 같은 나를 살리는 하나님으로 찾아오신 분. 이게 대칭성이잖아요. 이 대칭성 왔는데 욥의 친구들은 뭡니까? 철딱서니 없는 친구들은 뭡니까? 대칭성이 없어요. 뭐 잘 나가니까 지가 뭐 나는 천국 간다. 구원받았다. 이렇게 까불고 있다 말이에요. 그들이 욥에게 와서 뭘 바쳐야 됩니까? 제물을 바쳐야 돼요. "잘못됐다. 미안하다. 우리가 뭔가 나는 네가 진짜 뭐 나쁜 짓 해서 벌받은 줄 알았잖아" 뭐 이런 식으로 이제 되겠죠. 이게 이제 정당하지 못하다. 이게 욥기 42장 7절 "너희 말은 욥의 말처럼" 뭐하다? "정당하지 못하다“
욥은 대칭성을 갖고 있었어요. "하나님이여 왜 저를 이렇게 괴롭힙니까?" 계속 의미 있는 말로 언어 안에서 말씀 안에서 계속 주고 받고 주고 받고가 이어졌던 겁니다. 대칭성의 연속 그게 아까? 뭡니까? 힘이요. 힘은 어디서 나옵니까? 대칭성에서 나오거든요. 대칭성을 유지하는 힘 안에 욥이 놓여었었던 겁니다. 그래서 "친구들 니넨 가만 있고 욥이 제사장 되어서 욥이 너를 위해서 기도한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우매한 대로 너희를 갚지 아니하리라" 뭐 무슨 용서시죠? 인간이 생각하는 대칭성 없는 인간이 생각하는 용서가 아니라 대칭성을 유지하기 위한 대칭성을 조건 하에 주어진 용서, 그 용서 받은 사람은 무엇을 생각합니까? '아 지옥이라는 것은 필히 반드시 있어야만 하구나' 그 다음부터 주님의 안목처럼 천국도 있어야 되지만 지옥도 있어야 된다. 이게 하나님의 정의로움이다 라고 간파할 때 성령의 안목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전체 뜻을 살펴보았습니다. 아나니아 삽비라처럼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우리, 지옥 가도 마땅한 우리, 그러면서도 안 가려고 발악하는 우리.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대칭성을 위해서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 나를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발견하는 자가 되게 하시고 주의 일에 봉사로 참여하는 자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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