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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열왕기상 10:21-22 / 솔로몬보다 더 큰 이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열왕기상

열왕기상 10:21-22 / 솔로몬보다 더 큰 이

정인순 2025. 4. 23. 22:22

음성 동영상 Youtube

 

솔로몬보다 더 큰 이

 

이근호

2025년 4월 23일                    

 

본문 말씀 : 열왕기상 10:21-22

(10:21) 솔로몬 왕의 마시는 그릇은 다 금이요 레바논 나무 궁의 그릇들도 다 정금이라 은 기물이 없으니 솔로몬의 시대에 은을 귀히 여기지 아니함은

(10:22) 왕이 바다에 다시스 배들을 두어 히람의 배와 함께 있게 하고 그 다시스 배로 삼 년에 일차씩 금과 은과 상아와 잔나비와 공작을 실어왔음이더라

솔로몬은 인간들이 이 땅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영화를 누렸습니다. 이는 결코 솔로몬이 애쓰고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언약의 내용이 실제로 역사 안에서 현실이 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한 그 번영이었습니다. 솔로몬 이전 다윗 시대에 이미 이러한 언약의 효과를 받았습니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대상 29:12) 뿐만 아니라 그 많은 부귀 영화를 아낌없이 소비할 곳도 다윗은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은 도로 주님께 드리기 위해 주신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것을 위해 다윗은 성전을 지으려고 한 겁니다. 많은 것을 얻었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많은 것을 어디에다 바쳐야 되느냐도 안다는 것이 바로 이방 민족의 국왕들과의 현격한 차이점입니다. 바칠 곳이 없으면 ‘내가 버린 돈, 나를 위해 산다’가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솔로몬에게는 다윗에게 주신 언약이 가시적으로 큰 국가 영광과 번영으로 주어짐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잠언 3:16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잠 3:15-17)

즉 땅에서 사는 인간에게 있어 최고 여망은 무엇이겠습니까? 오래 사는 것과 풍부하는 사는 것, 바로 이 조건으로 의하여 주어지는 마음의 평화라고 본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솔로몬이 직접 경험한 바로 그것이 진정 다윗에게 주신 언약의 최종 완결상태일까요? 아닙니다. 마태복음 12:42에 보면,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부귀 영화보다 더 큰 것을 예수님께서 주신다고요? 그게 뭐지요? 어떻게 솔로몬의 부귀영화보다 더 클 수가 있지요?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이 애굽에 나올때부터 주어진 불변의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에 참여’라는 사실입니다.

이 외의 다른 길, 다른 방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유월절 방식은 온갖 악마의 방해 공작을 뚫고 직접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 마음 속까지 찾아와서 심어놓으신 사실입니다. 이 길을 알고부터는 그 인간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이 유월절 삶의 방식 이외의 모든 방식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알려주신 삶의 길입니다. 그것이 다윗 언약에도 계속 이어져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윗은 단순히 성전 짓기 위해 주변 나라로부터 받았던 귀한 재물들을 소모한 것이 아니라 자신마저 그 성전에 합류되기를 원했습니다. 자신의 인생이란 그저 모든 것을 다 놔두고 가야하는 나그네에 불과하다는 겁니다.(대상 29:15)

물론 솔로몬이 엄청나게 많은 것을 받은 것을 맞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남아 있는 바는 과연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서 받으시겠느냐는 겁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우리 몸에 바르는 것이 다가 아니라 그 안으로 우리 자신이 합류되어 소멸되어야 합니다. 이게 가능한가 말입니다.

솔로몬이 받았던 육적인 양식은 창세기 3:17에 나오는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힘든 형편과는 대조적으로 참 여유있는 겁니다. 하지만 이 부귀영화는 솔로몬보고 준 것이 아니라 솔로몬에게 뛰어난 지혜를 주신 하나님을 보고 주위 나라에게 솔로몬에게 준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은 솔로몬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솔로몬은 자신의 몸을 성전에 받을만한 몸이냐하는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다윗 같은 경우, 그는 성전을 준비하면서 거창하게 1천 번제를 드렸습니다. “이튿날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고 또 번제를 드리니 수송아지가 일천이요 수양이 일천이요 어린 양이 일천이요 또 그 전제라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풍성한 제물을 드리고”(대상 29:21)

이 번제는 바로 화목제입니다. 화목제란 하나님께서 제사에 대 만족하셔서 하나님께서 받은 제물을 백성들과 더불어 함께 먹으면서 평화를 실감케 하십니다. 일체 너의 모든 일에 대해서 문제삼지 않겠다는 겁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25-26)

그런데 이 평화가 되기 위해서는 솔로몬에 와서 마감되는 것이 아니라 다윗 자손이 해야만 할이 그 뒤에 남아 있습니다. 즉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필히 오셔서 솔로몬보다 더 큰 선물과 평화를 자기 백성과 공유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줄기차게 예수님을 추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그들의 심보를 아십니다. “네가 나를 찾는 것을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썩지 않은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하십니다.(요 6:27) 즉 솔로몬이 아무리 부귀 영화가 엄청나도 다 썩을 양식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요 6:29)

그 일이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 유월절 양으로 죽으시는 일입니다. 마르다, 마리아 가정에서 예수님을 섬겼지만 그들은 혈육 너머의 혈육을 알지 못했습니다. 오빠가 난데없이 죽었는데 그들을 엄청 삐졌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오빠를 살려주고 난 뒤, 마리아는 자신이 그동안 귀하게 모아놓은 향유를 아낌없이 예수님 발에 쏟았습니다.(요 12:3)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과 같이 자신의 해석을 붙이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요 12:7) 마리아는 본의 아니게 예수님의 죽음에 참여하게 된 겁니다. 마가복음 7:27-28에서는 귀신들인 딸을 둔 이방여인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에게 찾아왔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나의 아들들에게 줄 영생의 떡을 개같은 이방인에게 줄 수 없다“고 하실  때, 그 여인은 기꺼이 이 규정에 동의하면서 자신을 없는 존재로 간주하시고 그 아들에게 떨어지는 떡 한 조각으로 자신을 새롭게 만들면 되지 않느냐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의해서 합류된 백성이요 그들 속에 천국의 평화가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언약 완성을 알리기 위해 우리 자신을 소모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