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열왕기상 10:1-5 / 지혜와 이방인 본문
지혜와 이방인
이근호
2025년 4월 16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10:1-5
(10:1) 스바 여왕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솔로몬의 명예를 듣고 와서 어려운 문제로 저를 시험코자 하여
(10:2) 예루살렘에 이르니 수원이 심히 많고 향품과 심히 많은 금과 보석을 약대에 실었더라 저가 솔로몬에게 나아와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말하매
(10:3) 솔로몬이 그 묻는 말을 다 대답하였으니 왕이 은미하여 대답지 못한 것이 없었더라
(10:4)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모든 지혜와 그 건축한 궁과
(10:5) 그 상의 식물과 그 신복들의 좌석과 그 신하들의 시립한 것과 그들의 공복과 술 관원들과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는 층계를 보고 정신이 현황하여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에 반했습니다. 그녀가 평소에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을 물어봤다는 것은 과연 솔로몬의 지혜가 그렇고 그런 인간의 지혜에서 나온 것인가 여부를 알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만나서 그녀가 속에 담은 모든 것을 물었음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의 답변은 인간의 지혜를 초과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스바 여왕은 알았습니다. 그가 솔로몬 왕국에 본 모든 것은 바로 모세 율법에 준해서 국가가 운영되고 있다는 겁니다. 제사장 나라나 신하들에 대한 관리가 모두 모세 율법체계가 가시화된 결과물이었던 겁니다. 이것은 나라 자체가 일반적인 나라가 아님을 뜻합니다. 즉 언약에 준해서 이 세상에 나타난 ‘언약 나라’였던 겁니다. 따라서 스바 여왕은 솔로몬 나라를 자기 나라에 벤처마킹으로 삼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나라는 여호와의 율법의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방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스바 여왕은 조금도 개의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특수성이 솔로몬의 왕국을 통해서 증명되었음에 같이 호응하고 참여하게 된 것만으로 영광스럽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점이 중요합니다. 이방나라나 이방인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의 독보성에 기꺼이 동의한다는 점이 언약이 절정기에 도달하면 생겨나는 현상입니다. 즉 완성단계에 이른 언약의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솔로몬과 스바 여왕의 만남으로 미리 보여주신 겁니다.
스바 여왕이 황홀한 정도로 솔로몬의 지혜에 반해버렸다는 사실은 다른 이방나라와 이방인이 감히 견줄 바가 될 수 없는 영광에 자신이 본국에서 자랑스레 가져온 모든 보화를 아낌없이 내놓고 갑니다. 그런데 이러한 스바 여왕의 태도가 언약의 본 나라라고 할 수 있는 이스라엘의 운명에 경종을 올리는 현상이 된다는 겁니다.
즉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에 대한 경외심은 결코 자신 존재를 완전케하고 완성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잠언 25:2-3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하늘의 높음과 땅의 깊음 같이 왕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솔로몬과 관계하는 하나님은 단순히 하나님이 아니라 지상에 왕 중의 왕으로 통치를 실시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그 당시에는 솔로몬을 통해서 보여주었지만 그 하나님께서 직업 지상의 왕으로 오신다면 모든 세상 왕들은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나님 앞에서 영광돌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겁니다.
“여호와여 땅의 열왕이 주께 감사할 것은 저희가 주의 입의 말씀을 들음이오며 저희가 여호와의 도를 노래할 것은 여호와의 영광이 크심이니이다”(시 38:4-5) 따라서 스바 여왕은 솔로몬은 결코 자신이 실익을 챙길 의사가 없습니다. 인간은 나름대로 자아를 바라보는 이상(理想)적 이미지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평생을 이상적인 나를 따르기 위해 고생을 합니다. 우리 인간은 보여지는 나를 연기하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현실에 있어 자신과 자신과의 간격이 늘 벌어져 있습니다. 더 극단적으로 말해서 인간은 늘 자기에게 개 목줄을 씌우고 자신이 자기를 끌고 다니는 식입니다.
이것은 한꺼번에 다 털어버릴 수 있는 것은 타인이 어릴 때부터 씌워진 자아상을 버리고 하나님의 지혜에 자신의 모든 것를 맡기는 겁니다. 스바 여왕은 바로 솔로몬 앞에서 이런 결심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솔로몬 시대 때의 언약에서 발산되는 영광는 빛나는 영광입니다. 하지만 그 영광은 더 온전한 언약의 영광을 위해 일시적인 영광으로 시들어 버리게 됩니다.
보다 완성된 언약 완성이 남겨져 있습니다. 그 마지막 남은 영광을 위해 예수님께서 오셔서 일하셨습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온전히 언약을 이루었을까요? 마태복음 12:41-42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즉 언약이 최종적으로 완성이 되었음을 알리는 현상 중의 하나가 언약의 본 자손인 이스라엘 민족 말고 다른 이방민족들은 별 한 것도 없이 이 영광에 값이 참여한다는 겁니다.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사 65:1)
이 이방인들이 언약 완성, 즉 복음을 듣는 자세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스바 여왕의 마음가짐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이방인들의 자세가 소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본 자손들과 다른 이방인들을 심판하는 기준이 된다는 겁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 20:16)
스바 여왕과는 달리 언약이 최종적으로 완성이 되면 모든 세상이 사모하는 그런 영광이 아니라 초라하기 짝이 없는 영광이 독생자 안에 함축되어 들어 있게 됩니다. 반면에 세상의 왕이나 권세자들은 이런 낮아짐의 영광은 없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5-28)
세상들이 기대한 세상 영광은 실은 악마들이 인간을 미혹하는 영광입니다.(마 4:8) 예수님은 다른 모습의 최종 영광성을 보여주셨습니다. 곧 십자가에 죽으심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영광이 완수되는데 있어 난데없이 타이밍 맞추어서 이방인들을 출몰한답니다.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즉 처참한 십자가 죽음이 세상을 심판하는 최종 심판이 되는데 이는 이 십자가 안에서 아무 것도 한 것도 없이 마냥 복음이 좋아서 자신의 모든 가치가 포기하는 이방인들이 출몰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근원적인 지혜입니다. 즉 잠언 8장에 나오는 지혜는 인간의 근본 토대가 되는 생명이요 곧 예수님이십니다.(잠 8:22,35)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복음 앞에서 자신이 늘 해체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김혜근
수요설교(250416)요약 열왕기상 10장 1-5절(지혜와 이방인)
수요설교를 하는데 중간에 꺼져서 굉장히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마는, 그동안 잘 된 것도 우리가 노력해서 잘 된 게 아니고, 주께서 많이 봐주셔서 잘 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몇 번 더 꺼질지 모르지만, 꺼지더라도 주께서 필요해서 꺼지게 하신 것이기 때문에, 마음을 잡으시기 바랍니다.
스바 여왕에 관한 문제에서 제일 곤란하고 힘든 게, 그냥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보고 놀랐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놀란 내용이 안 나와 있어서 사람들이 굉장히 궁금해 하는 거예요. “솔로몬 지가 똑똑하면 얼마나 똑똑한데? 그래봤자 옛날 사람이지. 요즘 얼마나 과학이 발달했는데?”
자, 솔로몬이 똑똑할까요? ChatGPT가 똑똑할까요? 어느 게 똑똑할까요? 솔로몬이 바둑을 둔다면 과연 잘 둘 수 있겠는가? 인간 쪽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인간은 지혜를 생각하지 못하고 지식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똑똑하다, 놀랍다’ 지식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솔로몬의 지혜는 뭐냐 하면, 인간이 얼마나 똑똑하냐가 아니라, 인간의 뿌리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어떤 식으로 내부적으로 연결되어 있느냐 이게 지혜가 되는 겁니다. 기초, 토대에 관한 문제에요. 스바 여왕이 발견한 것은 솔로몬의 똑똑함이 솔로몬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인간 대 인간으로 똑똑하다가 아니라 누구로부터 유입된, 지식이 아니고 지혜라는 거예요.
지식은 묻는 것만 답변하지만, 지혜는 그 물음을 통해서 몰랐던 것까지 한꺼번에 통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안목을 열어주는 것이 바로 지혜거든요. 그래서 스바 여왕이 발견한 것은 솔로몬 배후에 누가 있다라는 점입니다. 그게 잠언서 25장 2절을 제가 언급했죠. 배후에 숨어계시는 분은 하나님이고, 그 숨어있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나타난 자가 바로 언약적인 왕, 다윗언약이라 볼 수 있죠, 언약적인 왕, 솔로몬이 숨어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대변해주고 있다고 볼 수 있죠.
그럴 때 스바 여왕은 ‘나도 이걸 써먹어야지.’하면서 벤치마킹을 하겠느냐? 벤치마킹 알죠? 모방해서 써먹는 것, 컨셉 훔쳐오는 것, 그냥 흉내 내는 거죠. 그렇게 하겠느냐? 안 그러면 내가 여기서 틀어버리는가?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가 어떻게 국가 전체에 속속들이 운영되고 있는가를 발견했어요. 우선 제사장 제도부터 해서 모든 구석구석에 모세 율법이 실제적으로 국가 운영 체계로써 작동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면 스바 왕국은 택함 받은 민족이 아니기 때문에 모세 율법이 없어요. 없는 입장에서 욕심을 내서 솔로몬의 영광처럼 되겠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우리가 이방민족으로서 지금 다윗 언약의 최절정기에 도달한 그 솔로몬의 지혜에 우리가 복속되는, 나쁜 의미가 아니라 좋은 의미로, 자진해서 복속됨으로서 솔로몬의 여호와가, 숨어있는 하나님이 실질적으로 세상에 나타났다는 이 경이로움을 스바 여왕과 자기 백성들이 새롭게 받아들인 이것이 중요하다는 거예요.
흉내 내서 따로 괜찮은 내 나라 만드는 것보다도 이미 이스라엘 중심 체제를 인정해 주는 것,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언약이 이스라엘 국가를 통해서 완성 상태를 보여줬다는 그 점이 놀랍다는 거죠. 스바 여왕이 솔로몬에게서 알았던 것은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지혜를 초과하는 지혜였습니다, 초과하는 지혜.
질문을 하면서 질문 하지도 않은 것까지 답변으로 나오는 걸 보고, ‘내가 질문을 잘 했으니까 답변이 나오지.’라는 생각조차도 이제는 포기해야 된다는 거예요. 자기 포기죠, 그걸 다 버리는 거예요. 바로 그러한 스바 여왕의 진짜 모습은 다윗언약을 일시적으로 보여줬던, 가시적으로 보여줬던 솔로몬 시대 이후에 다윗언약의 완성, 최종언약을 이루려고 오신 예수님 시대에 와서 그것이 다시 해석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모든 언약을 절정기 정도가 아니고 완성을 시켰을 때 일어나는 특이현상이 있는데, 그게 전혀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들이 하나님을 찾게 되고, 하나님께 질문을 하고, 답변을 얻는 그러한 현상이 이사야 65장 1절에서 예언되어 있어요.
그 예언대로 마태복음 12장 42절에서 땅 끝에서 남방 여왕이 와서 솔로몬에게 지혜를 얻는 것처럼, 지혜를 얻는다는 말은 예수님이 왔지만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우기는 기존의 유대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지금 아주 무시하고 있는 입장에 대해서 남방 여왕이라는 존재가 고발하고, 심판하고, 정죄하는 역할을 한다는 거예요.
회개했던 니느웨 사람이 안일한 이스라엘을 고발하는 요나서의 경우와 똑같이 된 거예요.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를 통해서 심판 소식을 전해 듣고 완전히 무장해제해 버렸어요. 짐승까지 사료 안주고, 먹이 안주고 전부 다 금식에 들어갔습니다. 금식이라는 것은 ‘나 이렇게 망가져도 상관없어요.’라는 뜻이거든요. 그게 마땅하고.
왜? 목숨을 부지하는 것보다 차라리 목숨을 저쪽에 건네는 것이 진리라는 사실을, 지혜가 찾아 온 요구조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가져가시고, 나는 오토바이 탈 때 손 놓고 타던 정우성처럼 모가지 뒤로 젖히고, 그냥 오토바이한테 모든 걸 일임하고 그냥 맡기는 것처럼. 그게 하나의 심판 기준이 된다는 거예요, 마지막 때에.
너희들도 복음에 대해서 이와 같은 태도를 보이지 않고, 행동하지 않으면 너희들은 천국 못 오고 지옥 간다.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남방 여왕처럼 그런 심판으로 올 것이다. 하면서 실제로 요한복음 12장(20.21절)에서 예수님이 십자가 지지도 않으셨는데 이방인이 오는 거예요.
이방인이 온 이유가 뭐냐? ‘염치 불구하고 그냥 공짜로 얻어먹겠습니다.’ 하고 오는 거예요. 그냥 아무 것도 한 것도 없는데, ‘지혜 얻겠습니다.’ 하고 찾아오는 거예요. 아무 보태준 거도 없는데, 그냥 뻔뻔스럽게 찾아오는 거예요. 이방인이니까 율법 지킨 적도 없어요. 그냥 율법이 완성될 때 그 콩고물이라도 얻어먹겠다고 오는 거예요.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먹으면 그게 목숨보다 귀한 최고의 영광이라는 겁니다. 상에서 떨어졌다, 도로록 떨어졌다, 이게 뭡니까? 영생의 부스러기죠. 부스러기는 영생이 아닙니까? 영생이랑 매한가지죠. 영생의 부스러기, 먹기 좋게 이렇게 떨어져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찾아온 겁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0장 16절에서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고 이야기 하면서 제자들에게 먼저 이야기 하시죠. 제자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또 ‘우리 아들 좋은 자리에~’ 할 때, “너희는 세상 주관자들처럼 되지 마라. 나는 이 땅에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고, 섬기러 왔다. 너희들도 세상주관자들처럼 섬김 받으려 하지 말고 차라리 종이 되어라.”(마20장25-27)
제가 이야기한 것처럼 이긴 자가 패배자요, 패배자가 이긴 자다. 그렇게 해서 주님께서는 십자가 지셨는데, 십자가 진 그 영광이 솔로몬이 보여줬던 그 영광이 아니라, 예수님 시대에 그것은 마귀가 보여준 거거든요. 그게 아니라, 희생물이 되었다, 희생물 자체가 되었다는 것, 하나님이 초라하게 되었다는...독생자의 영광이에요.
초라한 영광, 의도적으로 나귀 새끼처럼 우스운 꼴을 보여주는 영광, 그 영광 속에서 비로소 진짜 원래 나를 창조하신 분이 이런 꼴로 오셨다는 것과 자기 존재를 연결시킬 수 있는 사람은 뭘 해서,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아무 것도 한 것도 없으면서 염치 불구하고 그 영광은 정말 우리에게 영생이라고 반기는 자가 되는 거예요.
반면에 소위 좀 가르친다는 자는 “주여, 주를 위해서 복음을 전하고, 전도하고, 성경공부 다니고 했습니다.” 그러면 “누고? 너 누구지?” 몰라요. 그래서 제가 끝 부분에 그런 이야기 했죠. 자기를 위해서 사는 자가 바로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자다.
무너질 수밖에 없는, 맨날 평생을 자기에게 목줄 감아서 “이리야, 이리야~”자기가 자기를 끌고 가야 성에 찬, 그런 식으로 사는데.. 뭐 우리가 안 그럴 순 없지만 오늘 강의처럼 ‘그게 바로 죄구나! 이런 죄인을 위해서 희생 되셨구나!’ 그러니까 어떤 일이 있더라도 감사하면 되지요.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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