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열왕기상 9:15-22 / 언약의 건축물 본문
언약의 건축물
이근호
2025년 4월 9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9:15-22
(9:15) 솔로몬 왕이 역군을 일으킨 까닭은 여호와의 전과 자기 궁과 밀로와 예루살렘 성과 하솔과 므깃도와 게셀을 건축하려 하였음이라
(9:16) 전에 애굽 왕 바로가 올라와서 게셀을 탈취하여 불사르고 그 성에 사는 가나안 사람을 죽이고 그 성읍을 자기 딸 솔로몬의 아내에게 예물로 주었더니
(9:17) 솔로몬이 게셀과 아래 벧호론을 건축하고
(9:18) 또 바알랏과 그 땅의 들에 있는 다드몰과
(9:19) 자기에게 있는 모든 국고성과 병거성들과 마병의 성들을 건축하고 솔로몬이 또 예루살렘과 레바논과 그 다스리는 온 땅에 건축하고자 하던 것을 다 건축하였는데
(9:20) 무릇 이스라엘 자손이 아닌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남아있는 자
(9:21) 곧 이스라엘 자손이 다 멸하지 못하므로 그 땅에 남아 있는 그 자손들을 솔로몬이 노예로 역군을 삼아 오늘까지 이르렀으되
(9:22) 오직 이스라엘 자손은 솔로몬이 노예를 삼지 아니하였으니 저희는 군사와 그 신복과 방백과 대장이며 병거와 마병의 장관이 됨이었더라
솔로몬이 여러 군데에 건축을 합니다. 이는 그만큼 이스라엘이 평화의 시절을 보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은 주변 이방민족들과 수시로 싸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런 이방민족들을 붙여주셨습니다. 이는 이방민족이 믿는 신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어떤 점에서 다른가를 자기 백성이 알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나라 전체가 평화가 찾아오고 평정이 되니 그 안정감을 누리는 자신들이 대단히 신앙이 좋은 줄로 여겼습니다. 즉 마땅히 이 평화를 자신이 누릴 자격이 된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이 죽고 난 뒤에 상황이 급변하게 됩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음이 금방 들통난 겁니다.
요한계시록 2:4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문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과연 받기는 받았느냐는 겁니다. 인간 대 인간 사이의 사랑은 서로 호감이 가고 만나면 반갑고 즐거워면 그것을 사랑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사랑의 상대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서 하나님을 보이지 안찮아요? 어떻게 사랑을 받고 어떻게 그 사랑을 상실하는지가 모호하게 느껴질 겁니다. 이점은 구약 이스라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살기가 풍요하고 넉넉하면 절로 하나님에 대해서 사랑의 기운이 솟아오릅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들은 자기쪽에 문제가 있음을 알지 못하고 그저 하나님께서 예전처럼 잘 먹고 잘 살고 사회 전체가 안정적이기를 원합니다. 바로 이러한 점을 점검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솔로몬이 지은 건축물입니다. 대표적으로 예루살렘의 성전을 비롯해서 그 성전을 보호하기 위한 국방 요충지에 솔로몬을 건물들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죽고 난 뒤에 곳곳에서 내분과 이방민족이 이스라엘을 침략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러자 솔로몬이 지었던 건물들이 파괴되면서 솔로몬 시절과 현저한 차이를 보이게 됩니다. 나중에 이스라엘은 전부 황무지가 됩니다. 이렇게 볼 때에 솔로몬이 지었던 건축물들은 이스라엘의 신앙 상태를 측정하는 계측기 역할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방국가들도 거대 건축물을 많이 만들었음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전을 건립하여 백성들의 마음이 신을 믿는 마음으로 결속을 시키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국가가 내란이나 분란이 일어나면 백성들의 마음들이 권력에 대한 신뢰도가 약화됩니다. 권력이 한 곳으로 집중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옆 나라로부터 정복대상으로 전락합니다. 누군가 한 사람에게 권력이 모아져야 나라가 오래 가게 마련입니다. 이럴 때 왕은 대단한 건축물을 건립하여 왕 자신이 신의 은혜을 입고 이 국가를 위해 큰 일을 한 인물임이 부각됩니다. 이 권력집중을 오래 끌기 위해 왕들은 신화를 덧입혀진 신전이나 관심사를 한 곳에 모을 수 있는 기념적인 건물을 짓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통해서 건물을 짓게 하셨지요? 그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는 친히 궁극적인 건물, 혹은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일관되게 일하시고 있음을 나타내보이기 위함입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이 관여해서 짓지 아니하면 건축물을 하나님에 의해서 온전하고 완전하게 지을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왜 인간들은 온전하고 바르지 못하고 있는 존재인가를 최종적으로 드러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최종 마련해주신 평화는 최종 영광스러운 성전의 건립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이끄는 전쟁들이 계속 일어나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므깃도‘라는 지명은 요한계시록 16:16에서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실제로 므깃도는 애굽에서 북쪽 지역까지 이어지는 최단거리 길이요 또한 동쪽 아람나라로 가는 길의 갈림길 역할을 했습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남방왕과 북방왕이 서로 이스라엘을 삼키기 위해 군대가 집결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곳에 인류 최후의 전쟁을 구약적 지명을 통원해서 나타냅니다. 그런데 이 전쟁은 곧 전체 인류와 하나님과의 전쟁을 보여줍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에게 대드는 이유는 구원이나 천국이나 영생을 인간이 원하는 대로 얻을 수없도록 하나님께서 조치한 바로 그 점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한 최종 성전은 ’사람에게 버림받은 그 버려진 돌‘이 머릿돌이 되는 건축물입니다.
이사야 54:11-13에 보면, “ 너 곤고하며 광풍에 요동하여 안위를 받지 못한 자여 보라 내가 화려한 채색으로 네 돌 사이에 더하며 청옥으로 네 기초를 쌓으며 홍보석으로 네 성첩을 지으며 석류석으로 네 성문을 만들고 네 지경을 다 보석으로 꾸밀 것이며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 네 자녀는 크게 평강할 것이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좋은 천국이 누구라도 원하는 자는 들어가는 곳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요한계시록 3:7에 보면, 다음과 같은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즉 천국에 일단 들어가게 되면 다시는 지옥으로 갈 수 없고, 그렇다고 해서 천국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공간입니다. 조건은 이것입니다. ’자기 이름‘이 지워져야 합니다. 인간세계에서 ’맞다‘ 혹은 ’틀리다‘를 논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다른 기준으로 ’맞다‘와 ’틀리다‘를 결정합니다.
나를 사라지게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 되었든 ‘맞고’, 나를 그대로 살려내는 일이라고 무엇이 되었든 ‘틀린 일’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에 들어가고 못 들어가고는 순전히 일방적인 주님의 결정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천사들에 의해서 측량된 천국이라는 건축물은 철저하게 사람 수로 채워지고 건설되는 공간입니다.
“ 그 성에 성곽은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이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척량하려고 금 갈대를 가졌더라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그 성곽을 척량하매 일백사십사 규빗이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계 21:14-17)
오늘날 성도들이 곧 이 세상에 계시를 알리는 ‘언약의 건축물’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열심히 지은 인생이지 말고 언약으로 지은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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