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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히브리서 10:5-7 / 교체된 기준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히브리서

히브리서 10:5-7 / 교체된 기준

정인순 2025. 2. 2. 16:14

음성 동영상 Youtube

 

교체된 기준

 

이근호
2025년 2월 2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0:5-7

(10:5)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10:6)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10: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율법은 모형입니다. 그리고 인간도 모형입니다. 모형이란 실체를 고대하고 기다리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리고 실체가 등장하면 아낌없이 스스로 포기하고 자진 철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 말고 우리를 구원하려 다른 몸을 준비하셨다고 고맙네”라는 식으로 나오면 안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상대하지 않으시고 배제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번세나 소제나 속죄제 드릴 자격이 안되고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제사는 구현해야 하는 취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제사의 기본 취지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아는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날 때부터 병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타고난 정신병자들입니다. 왜냐하면 ‘눈을 떴기’ 때문입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창 3:7)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옷을 안 입고 벌거벗은 것을 문제삼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옷을 해입는 처신이 본래의 인간에서 이미 이탈했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정녕 죽으리라”라는 선언 안에 이미 인간이 놓이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생각하고 있는 그런 죽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신 죽음은 따로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아는 이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해 두신 모든 제사, 즉 속죄제나 번제나 소제는 그 안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죽음이 담겨 있어야 하나님께서 만족하십니다.

기존의 모든 인간을 거부하시고 하나님께서 따로 한 몸을 하늘에 대기하셨다가 지상에서 출격시켜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기존의 인간들은 어떤 식으로 상대하지 않으심이 분명해졌습니다. 기존의 인간들은 이미 ‘눈을 뜬 상태’에서 자신의 미래와 운명과 구원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들은 나름대로 자기 행함이 끼어드는 나름대로 절차를 마련합니다. 하지만 시편 40:5-7에서는 인간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필연적 절차를 미리 예고하십니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이런 하나님의 방식을 통해서 인간들쪽에서 알아야 될 것은, 그동안 기적이라는 것이 인간들이 요구한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즉 기적(=우연)은 그야말로 기적(=우연)이 되기 위해서 철저하게 인간의 기대나 희망이나 행함이 배제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함을 거부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인간들 나름대의 계획이 공포로부터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공포에 짓눌러 삽니다.

공포의 부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평생을 삽니다. 공포는 왜 생기는 겁니까? 그것은 망하기 싫어서입니다. 왜 망하기는 것이 싫지요? 그것은 망하믄 것이 창피스럽기 때문입니다. 왜 차잎를 느껴지요? 그것은 인간은 스소로 생각하시를 자신들은 누구의 행동에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자기 존재는 자신의 행함에만 종속되는 것으로 정신적인 독립을 시도하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너는 더는 누구의 종이 아니라 주인이다’는 겁니다. ‘내가 나에게 주인이 된다’는 것, 마치 이 ‘주인됨’을 지켜내기 위해 평생을 걸쳐 노력합니다. ‘내가 나를 지키는 것’외에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음에 나오는 짧은 시를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낫 놓고 ㄱ자도 모른다고
주인이 종을 깔보자
종이 주인의 목을 베어버렸다
바로 그 낫으로

즉 주인은 종을 종으로 여기기를 강요했지만 종는 “나는 더 이상 누구의 종이 아니야”라는 면면을 보일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마태복음 21:38에 보면,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낫에 피가 묻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피묻은 낫’을 유일 천국 기준으로 삼으십니다. 이를 위하여 기존의 모든 인간을 제치고 다른 몸을 하늘에서 대기시켜 놓았다가 지상에 파견하신 겁니다. 인간들이 제사 주도자로 나설 수 없는 이유는, 제사 자체가 제사 드리는 자를 버리도록 하는 원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0:28에서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인정하는 구원이 자리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버림받은 그 곳입니다. 그곳이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가 우연 중에 우연이고 기적 중에 기적입니다. 사도바울이 사도행전에 체포되어 죽기 위해 로마가 간 이유는 철저하게 인간을 모독하는 하나님을 소개했기 때문입니다. 즉 사도는 ‘십자가 앞’에 있는 자가 아니라 ‘십자가 속’에 있는 자입니다. (갈 6:14) 십자가 안에 들어온 자만이 ‘내 책임’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악마’가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타고난 정신병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취한 것은 쉽게 표현해서 ‘주님의 탕냄비’입니다. 음식을 쪼아 닳려서 원래 얻고자 하는 것을 맛있게 조리하는 주방기구입니다. 예수님도 넣으시고 그리고 구원될 자도 거기에 넣습니다. 그리고 평생을 걸쳐 주님은 우연과 우연의; 연속으로 성도가 자립성과 책임감과 자기 자랑을 다 증발시켜 버립니다.

남는 것은 ‘피 묻은 낫’ 곧 예수님의 십자가 뿐입니다. 나를 지켜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나를 평생토록 닳여주시고 소모시켜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생각한 모든 필연은 다 휘발되어야 합니다. 남은 것은 ‘주님 홀로 해내신 필연’ 뿐입니다. 말씀이 품고 있는 나에 대한 모독이 전달되는 것이 곧 선물이요 기적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기준 교체에 저희들을 참여시켜 주심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