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히브리서 9:27-28 / 두 개의 죽음 본문
두 개의 죽음
이근호
2025년 1월 19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9:27-28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9: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인간은 죽어도 죽음을 모릅니다. 왜냐하면 멸망 중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죽음은 예수님만이 가능합니다. 인간은 죽어도 왜 죽는 줄도 모릅니다. 인간이 죽어 마땅함은 인간의 처음 존재이유가 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
인간의 창조보다 죽음이 선행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존재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죽음과 연관되어야 비로소 의미가 생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범죄하고 난 뒤에 죽음과는 무관하게 존재하기 되었습니다. 출생 자체가 멸망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죽어가면서 죽음을 모릅니다.
만약에 인간이 자기 죽음을 안다면 그때부터 인간에게 의미라는 것이 생겨납니다. 멸망으로 치닫기에 인간에게는 의미라는 것조차도 없습니다. 죽음에 의미를 가져다 주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성소의 원리에 준해서 이 땅에 오시고 사셨기에 성소에서 생기는 그 죽음의 의미를 비로소 시작하신 분이십니다.
성소는 인간 세상을 함축시켜 놓은 모형적 구조물입니다. 그 안에서 인간들은 비로소 ‘죄’, ‘죽음’, ‘심판’, ‘시간’이라는 의미를 갖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성소 차원의 죽음을 통해서 ‘죄’, ‘심판’, ‘시간’의 의미를 완성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서 두 종류의 죽음을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는 ‘인간의 죽음’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죽음’입니다. 이러한 개념의 등장은 하나님의 등장으로 비로소 나타난 의미입니다. 당연히 멸망당해야 될 가인은 창세기 4장에서 동생 아벨을 죽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죽음’을 인간들이 이해하는 죽음과는 차별나는 죽음으로 전환하십니다.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창 4:25) 즉 하나님에 의해서 죽는 죽음만이 그 안에 생명이 ‘대신’의 방식으로 나타나게 해줍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그냥 죽어서는 그저 멸망일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죽음’과 연관되어서 죽게 되면 그 사람은 생명을 얻게 됩니다. 성소 안에서 움직이는 기능들은 ‘인간을 대신 양’의 죽음이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이 가능한 생명이 되는지를 나타내어 줍니다. 인간들은 목숨은 출생에서부터 죽을 때까지입니다. 하지만 성소 안에서 완성된 하나님의 시간은 십자가로부터 대시 오심까지의 시간입니다.
이 시간이 탑재된 자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성도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요 주님을 위한 존재입니다.(롬 14:7-8) ‘자기를 위해서’에서 ‘주님을 위해서’로 바뀐 자들입니다. 이 바뀜은 자신의 죽음에서 주님의 죽음으로 들어갈 때나 가능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주님 죽으심’의 가현체입니다.
‘인간을 위해서’가 왜 하나님으로부터 거절당하는 이유는 인간들 안에 이미 뿌리 깊게 박힌 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 사는 가현체’였습니다. 인간이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당연한 줄 알았습니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보람과 기쁨이 어디에 있을까요?
매슬로우라는 사람은 다섯까지 욕구의 단계를 소개했습니다. ‘생리적 욕구→안전의 욕구→소속감과 애정의 욕구→자존의 욕구→자아실현의 욕구’가 그 내용입니다. 그저 몸 건강하고 생활비가 넉넉하게 장만된 상태에서 누군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의 모든 말에 대해서 다 칭송하고 동의하고 격려해주는 삶을 인간은 원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욕구를 그대로 지니고 성경 말씀에 대하면 어떤 해석이 나올까요? ‘주를 위한 나’가 아니라 ‘나를 위한 주’로서 하나님을 신봉하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3:16의 구절에 대한 해석 같은 겁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욕구를 정당한 것으로 여기는 자에게 세상을 사랑한다는 하나님을 당연히 ‘사랑의 하나님’으로 여길 겁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17:9에서는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를 과연 우리 인간이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까? ‘내게 주신 자’에서 자기 자신이 빠져 있어도 그래도 하나님을 사랑하시겠습니까? 비슷한 내용이 요한복음 6:39-40에 나옵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영생이 제공되는 믿음의 주도권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예수님 본인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룰 수 있는 분은 신자가 아니라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행하심으로 영생을 얻는 겁니다. 이런 사실을 받아들일 믿음은 인간에게 애초부터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창세기 18:2-3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아브람은 비로소 자신이 홀로 사는 게 아님을 알았습니다.
결코 자기 욕구를 자신이 관리하고 달성하는 것을 보람으로 사는 게 아니었던 겁니다. 고기가 일방적으로 낚시에 걸린 것처럼 아브람은 주님에게 걸려서 새로운 피조물 ‘아브라함’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생산하시는 교회란 바로 인간의 뿌리 깊은 욕구를 쥐고 있는 존재를 발각되고 난 뒤에 생겨납니다.
하나님이 죽으심을 악마가 결사적으로 막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마 16:22-23)
누가 악마를 이깁니까? 미리 예수님의 피 안에 들어와서 예수님과 더불어 제대로 죽은 자만이 교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세상 일에 현혹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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