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히브리서 10:8-9 / 둘째 것 본문
둘째 것
이근호
2025년 2월 9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0:8-9
(10:8) 위에 말씀하시기를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10: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두 개의 조치를 마련하신 것은 인간 배후에 있는 악마를 두 번 다시 하나님 나라에게 들어오지 못하고 차단시키기 위함입니다. 첫 번 조치는 ‘율법 프레임’입니다. 즉 법을 지키게 되면 의로워지는 체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율법으로 모든 인간을 돌돌말아 찢으므로서 법으로 자신의 가치를 챙기려는 자는 같이 찢어집니다.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골 2:14) 첫 번째의 것인 율법에서 우리가 빠져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이미 우리는 우리 자신을 챙기려는 식으로 관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똑똑함’입니다. 벌써 악마는 우리 인간들을 똑똑하는 자존적 존재로 만들어놓았습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자신의 운명은 자기 손으로 책임져보려는 겁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부자청년도 이런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말라, 간음하지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마 19:18-20)
이 말씀에서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고 청년이 예수님께 물으므로서 이 부자 청년이 시도하는게 무엇인지 드러납니다. 자기 힘으로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다 수행해서 그 근거로 영생을 얻고자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부자청년 자신도 알지 못하는 한계를 말해주십니다. “모든 것을 다 팔고 너는 아무 것도 없는 나를 따르라”(마 19:21)
이 부자 청년은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게’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이와 같은 경우보다 더 심도 있게 예수님 곁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중 한 가지는 예수님께서 직접 제자로 뽑아세운 인물이 있습니다. 가룟유다입니다. 또 한 사람은 예수님 마지막 순간을 함께 있던 자입니다. ‘독똑한 강도’입니다.
우선 ‘똑똑한 강도’부터 보겠습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눅 23:39) 즉 이 똑똑한 강도는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신뢰하지도 않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쪽에서 자기를 신뢰할 만한 증거를 준다면 당신을 메시야로 믿을 용의가 있다는 겁니다.
거기에 비해 다른 강도는 머저리, 바보, 등신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자 예수님도 자기와 똑같은 쓸모없는 형편으로 나란히 십자가에 달린 처지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을 믿을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머저리 같은 강도는 ‘저희들과 같이 십자가 달리신 것은 주님이 주의 일답게 하시는 일이기에 이 일에 자신을 참여시켜 주님되심만 드러내어 달라’는 심정을 갖고 있습니다.
즉 머저리같은 강도는 결코 자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은 자신들이 행한 것의 당연히 형벌을 받는다고 여깁니다. (눅 23:41) 하지만 저분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저분의 하는 일로 인하여 사형집행장에 합류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머저리같은 강도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즉 바보같은 강도는 첫 번 프레임(갇히게 하는 액자)에서 두 번째 액자로 옮겨왔습니다. 이번에는 가룟 유다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생각은 다릅니다. 가룟유다의 모든 행위가 ‘예언’에서 진행된다는 겁니다. 즉 첫 번 프레임에서 둘째 프레임으로 넘어오는 모든 증거는 예수님께서 손수 장만하시는 겁니다.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요 2:25) 그런데 가룟유다는 스스로 예수님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 “저분이 과연 나를 구원할 구원자 맞을까”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굳이 예수님께서 가룟유다는 제자를 뽑아 자기 곁에 두신 이유는 그에게 악마의 본성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가룟유다가 계속 예수님과 같이 하면서 한 일은 과연 예수님의 주장과 현실이 일치되는지를 면밀히 검토하는 것이었습니다. 내린 결론은 이러합니다. 예수님의 주장은 현실과 점점 상관없이 괴리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가룟유다를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26:24에서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움직임은 모두 사전에 하나님에 의해서 예언된 내용이었습니다. 가룟유다는 이점을 빠트린 겁니다. 그리고 가룟유다 자신도 하나님의 예언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마 27:8-9)
그 뒤 제자들의 모든 행위도 전부 예언에 맞추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마 26:31) 진짜 예수님에 대해서 가룟 유다는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한 겁니다.
가는 끝까지 자기 인생을 자기 책임하에 두고 자결합니다. 예언같은 것은 염두에 두지 않고 있습니다. 반면에 나머지 11제자도 예수님 버리고 다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성령이 왔을 때, 그들은 모든 것은 예언대로 되어짐을 알게 됩니다. 즉 두 번째 프레임은 십자가 사건없이 들어설 수 없는 곳입니다.
즉 예수님을 가운데 두고 일어난 십자가 사건은 최초와 최후가 그 현장에 같이 있습니다. 창세 전에 구원받기로 선택된 자(생명책)와 창세 전에 저주받기로 된 자(행위책)와 구분을 예수님만 행하실 수 있는 십자가 공로로 결정나버립니다. 이 사실을 역시 성령받은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3-34) 그런데 이 대상자는 인간이 선택할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일방적으로 부르심을 입어서 두 번째 프레임(천국)에 들어온 사람에게 해당됩니다. 당연히 가짜가 있을 수 있지요. 그래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롬 8:35-36)
이 모든 것이 우리 인간이 무능하기에 발생되어야 될 하나님의 조치입니다. 자기 무능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자가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 어떤 경우라도 예언의 결정에 순응하면서 이 자체를 사랑으로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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