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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히브리서 9:23-26 / 확장된 말씀 환경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히브리서

히브리서 9:23-26 / 확장된 말씀 환경

정인순 2025. 1. 14. 17:23

음성 동영상 Youtube

 

확장된 말씀 환경

 

이근호
2025년 1월 12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9:23-26

(9:23)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9: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9:25)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9: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인간의 시작은 항상 개별 단위(unit) 부터입니다. 평생 자기 관리를 어떻게 했는지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와 구름과 공기 같은 것들은 인간의 선택과 결정에 의해서 조성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요구 이전부터 이미 형성되어 있는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연 환경에서 말씀을 첨가하셨습니다.

그렇게 되니 인간이 적용받는 환경이 자연환경을 넘어서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 구약을 행태로부터 능가하는 말씀 환경의 조치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구약 때에도 사람들은 율법으로 자신을 정화하기 위해 반복적 시도들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결국 드러난 것은 바로 ‘모형’이었다는 겁니다.

즉 모형을 깨끗하게 위해 시도한 그 모든 것이 다 부질없는 행위가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모형인 줄을 모릅니다.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인간이 자기가 모형인 것을 모르게 되면 ‘자기’라는 환경이 전부인 줄 압니다. 이 개별적 자아를 지켜내기 위해 전 생을 소모합니다.

하지만 공기와 바람과 비나 파도는 인간들의 이러한 시도를 무산시킵니다. 모형은 환경에 종속됩니다. 모형은 환경의 일부일 뿐입니다. 모형을 환경을 다룰 수 있는 권한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말씀으로 묶어서 환경을 궁극적으로 확장시켰습니다. 이 일을 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이라는 환경의 끝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죽음=사라짐’이 아니라는 겁니다. 도리어 본격적으로 환경상태를 유지하면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인간도 모형이니까 이 확장된 환경을 따라주면 됩니다. 문제는 인간은 자신을 모형이라고 여기지를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자기 죽음이 곧 ‘끝’이라고 여깁니다. 모형의 끝일 뿐입니다. 실체에 편입되는 되는 겁니다. 이 일을 위하여 말씀이라는 새로운 환경이 모형임을 모르는 인간을 깨부수시면서 모형임을 알려주시는 친절을 베푸십니다. 그 한 예가 바로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부자 청년’이야기입니다.

개별적인 자아 구원을 위해서 온갖 것을 착실하게 나름대로 준비했다지만 결국 도로 ‘개별적 자아’로 되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보고 걱정을 한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습니까?” 주님의 답변은 단호합니다. “사람은 할 수가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이 못한 일을 해내신다”입니다.

인간들의 개별적 단위의식은 자신의 선택과 결정으로 인해 자기에게 유리한 결과를 주어지기를 고대하게 됩니다. 문제는 이러한 시도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환경에 훼방질이요 방해짓인 것을 모른다는 겁니다. 서기 1세기 쯤에 지금의 이라크 지방에서 등장한 ‘만다야 교’라는 경우가 적절한 예가 됩니다.

이 종교는 예수님보다 세례 요한을 더 위대한 선지자로 섬기는 종교입니다. 그 이유는 세례 요한은 물로서 사람들을 정화시켜 줄 뿐 아니라 인간들에게 열매맺는 천국 백성이 되기 위한 결과성까지 해내는 방식을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리가 물어 가로되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세리들도 침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 하고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눅 3:10-14)

이 만다야 교가 현대 기독교 세계 안에서 살아남는 이유는, 결국 인간의 두뇌에 저장되는 것은 자신의 행함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으로 버틸려고 해서 오랫동안 교회 다니면 그런 것들이 다 허망하고 공허하게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으로 아무리 자신을 두둔해도 자신이 벗거벗음을 스스로 부인할 길이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그동안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 해낼 자기만의 실적을 의지하고 믿고 싶은 겁니다. ‘교회’라는 역사적 구성물을 모형으로 여기지 않고 실체로 여기는 천주교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집요한 구원욕망을 주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면서 명쾌하게 물리치십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눅 16:16) 현실은 악질입니다. 인간들이 이런 환경 속에서 천국이 있는 곳으로 도피를 시도합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몰려올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가라사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눅 8:10) 천국 자체가 이 세상에서는 장벽으로 작용합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피 흘려돌아가실 작정으로 인해 기존의 폐쇄적 환경을 벗어나셨습니다.

그리고 모형의 시간 자체가 예수님 자신이 흡수해 버렸습니다. 인간의 육신은 그저 짧은 시간 조각이 된 겁니다. 유월절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전체의 시간은 유월절 시간으로 대체했습니다. 그 시점이 바로 밤이요 그 밤은 인간의 밤이 아니라 ‘여호와의 밤’입니다.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을 인하여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출 12:42)

모든 아브라함 자손들은 이 시간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 시간 안에서 비로소 주님의 날을 부여받게 됩니다.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 9:26)

성도의 매일의 삶은 단 하루에 해당되는 주님 안의 시간입니다. 성도가 ‘주님의 시간성’으로 다루어집니다. 따라서 성도의 삶은 자기 결정과 선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결성과 선택으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 위주의 시간 단위를 벗어나 자신의 모형임을 유지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