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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히브리서 10:1-4 / 죄와 피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히브리서

히브리서 10:1-4 / 죄와 피

정인순 2025. 1. 26. 15:48

음성 동영상 Youtube

 

죄와 피 

 

이근호
2025년 1월 26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0:1-4

(10:1)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10: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10:3)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10: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하나님께서 인간세계에 뭘 주셨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기적입니다. 그냥 하늘에 가만계시고 땅에서 우리들은 나름대로 열심히 살면 그만이잖아요. 그런데 하늘의 하나님께서 가만계시지 않는 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율법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망했습니다.

즉 율법은, 인간들이 얼마나 지독하게 자기 위주인가를 들추어내기 위함으로 주어진 겁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말씀 자체에는 관심이 없는 그것으로 인하여 자기에게 이익이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는 율법을 앞장 세워서 인간들의 인간 관심을 삭제하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은 율법 안에 ‘죄 사함’요소가 있음을 간파하고 그점에 대해서 대단히 하나님께 고마워했습니다. 죄가 생각나고 죄를 지었다 싶으면 율법대로 시행해서 죄사함 받아보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시스템이 있다는 것 자체만 해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인해 과연 율법도 모형이요 본인 자체도 모형에 불과한 것인지를 알겠습니까? 모릅니다.

왜 모르지요? 그것은 하나님의 관심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 그 자체에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에서 복음으로 나아가는데 있어 이스라엘의 멸망이 필수적이었던 겁니다. 이스라엘을 비롯해서 모든 인간들은 악마가 심어준 심성, 즉 선과 악 사이에는 균형을 맞추고 조절하려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러한 선악적 중심점은 새로운 상황이 오면 여지없이 다 무저져 버립니다. 경제 상황이 극도로 혼란스럽고 수입이 줄어드는 처지에서 그전에 약간은 넉넉했던 그 시절의 선과 악 사이의 균형감각은 아무짝도 소용없게 되어 버리는 겁니다. 남아공화국에서 주변 이민자들이나 못사는 현지민들이 폐광 구멍으로 내려가서 2km 아래에서 금쪼가리를 찾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 중에서 76명이 죽고, 300명 가까운 자들이 탈진상태에서 구출되었습니다. 죽은 자들이 독가스로 죽은 것이 아닙니다. 굶어죽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작업을 강요하고 식량과 식구를 바깥 세상에서 파는 것 5배를 강요하는 갱단 뿐이었습니다. 돈 안내고 갱도 밖 육지쪽으로 올라오면 총으로 쏴죽였습니다.

이처럼 오늘날 일상 생활에서 힘들게 살도록 강요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갱단을 누구지요? 그동안 자체적은 선악 지식으로 하나님 앞에서 심한 저주나 징벌을 받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요령을 부렸잖아요?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니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경제적 압박과 병마와 육신적 압박으로 인해 자꾸만 새로운 선악 사이의 균형점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즉 육신의 요령보다 더 센 갱단이 이 세상이 이미 가득 덮고 있었던 겁니다. 버틸 때까지 버텨보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해보지만, 자아만큼은 어떻게든 포기를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연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출애굽 20장에서 십계명 줄 때는 복과 저주가 간단하게 소개됩니다.

하지만 신명기 28장에 오게 되면 복과 저주 사이의 간격이 도저히 건널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벌어져있습니다. 더구나 신명기 32:15에는 하나님께서 율법을 가지고 이스라엘의 운명에 운명을 단정짓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

즉 선과 악 사이가 벌어져야 합니다. 벌어져야 그곳에 인간으로서 어찌할 수 없는 빈 터가 생겨납니다. 선과 악 사이를 어떻게 통제해보려는 모든 노력은 다 허사로 끝나고 가랑이가 찢어지듯이 찢어져 버려야 선과 악 사이가 연속되어 있는 생각이 얼마나 큰 오산인지가 드러납니다.

선과 악은 인간으로서 봉합되어서 연결시킬 수가 없습니다. 인간들이 갖고 있는 선과 악의  지식은 뭔가를 그 가운데서 감추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냥 ‘죄’입니다. 인간은 ‘죄인’ 정도가 아닙니다. 오롯이 죄를 품고 삽니다. 바로 율법과 말씀은 인간들을 하여금 추락케 합니다.

말씀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백을 강요합니다. “너는 뭐냐?” “나는 난데요?” “이게 아직 멀었어!”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율법 안을 수직적으로 관통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그 영광을 버리시고 추락의 바닥까지 내려오신 분이십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죄’그 자체임이 드러납니다.

즉 ‘선과 악을 아는 지식’ 자체가 죄가 되는 겁니다. 그 죄의 자리에서 비로소 구심점은 결코 인간 본인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너는 누구냐?” “저는 죄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냐? “주님은 ‘피’입니다.” 이게 바로 약속의 내용입니다. 레위기 1::5-7에 보면, “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 앞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그는 또 그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것이요
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 제단 위에 불을 붙이고 불 위에 나무를 벌여 놓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죄와 피와 불의 만남, 이것만이 참 하나님의 증거입니다. 게하시라는 사람은 엘리사 선지자의 사환입니다. 그는 옆에서 엘리사 선지자하는 것을 다 보았고 선지자가 시킨대로 다 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하나님의 선지자 옆에 있었던 그것으로 인하여 그는 나하만 장군의 문둥병이 그에게 임하게 됩니다.(왕하 5:27)

특히 열왕기하에 나오는 수넴 여인의 사건에 있어서도 역시 게하시의 한계가 나타납니다. 스승이 시킨대로 스승의 지팡이를 죽은 수넴 여인의 아들 위해 놓았지만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엘리사 선지자가 죽은 아들 위에 두 번찍이나 자기 육신을 일치시키자 죽었던 아들이 살아났습니다.(왕하 4:34)

즉 엘리사는 죽음 자와 자기 육신과 일치십니다. 빌립보서 1:21에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하나님의 복음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더는 우리 자신이 무의미해집니다. 이 무의미함이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큰 선물이요 자유가 됩니다. 죽고 사는 것도 자기 소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으로 우리는 우리 안에 주님 계신 것을 확인케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