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열왕기상 3:16-21 / 솔로몬의 재판 본문
솔로몬의 재판
이근호
2024년 12월 18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3:16-21
(3:16) 때에 창기 두 계집이 왕에게 와서 그 앞에 서며
(3:17) 한 계집은 말하되 내 주여 나와 이 계집이 한 집에서 사는데 내가 저와 함께 집에 있으며 아이를 낳았더니
(3:18) 나의 해산한 지 삼일에 이 계집도 해산하고 우리가 함께 있었고 우리 둘 외에는 집에 다른 사람이 없었나이다
(3:19) 그런데 밤에 저 계집이 그 아들 위에 누우므로 그 아들이 죽으니
(3:20) 저가 밤중에 일어나서 계집종 나의 잠든 사이에 내 아들을 내 곁에서 가져다가 자기의 품에 누이고 자기의 죽은 아들을 내 품에 뉘었나이다
(3:21) 미명에 내가 내 아들을 젖 먹이려고 일어나 본즉 죽었기로 내가 아침에 자세히 보니 내가 낳은 아들이 아니더이다 하매
잠언 25:2-3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하늘의 높음과 땅의 깊음 같이 왕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지배받고 통치되는 나라에서의 왕의 자리란 일반 백성의 자리와 큰 격차가 있습니다.
백성의 수준에서는 빈번하게 재판받을 일들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왕의 자리는 재판 자체가 필요치 않는 자리입니다. 왜냐하면 숨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지상에 펼쳐기만 하는 자리입니다. 즉 언약에 의한 왕의 자리는 왕 자신을 위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 자리입니다. 재판이 필요치 않는 자리입니다.
따라서 백성들이 왕에게 재판을 청한다는 것을 계기로 백성들은 재판이 아예 필요치 않는 왕의 수준으로 세상 보는 안목이 상승할 필요가 있는 겁니다. 백성 수준에서 재판이 일어난다는 것은 곧 그들이 ‘자기 있음’ 곧 ‘존재’에 매여사는 수준에 놓여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내 것이니 내가 지키겠다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마음가짐입니다.
하지만 ‘내 것 의식’에서는 그 어떤 경우라도 우리가 사는 이유가 밝혀지지 않습니다. 왜 태어났는지, 왜 사는지, 왜 죽는지 존재 차원에서 알 길이 없습니다. 그저 있으니까 내것으로 여기고 무작정 지키기만 하면서, 그것을 키우기를 원하면서 평생을 소비하게 됩니다. 같이 살던 여자의 아이가 죽는 일이 생기지 않았다면, 존재가 갖는 근원적인 문제점이 드러나지 않고 안일하게 그저 살면 그만일 겁니다.
하지만 멀쩡한 아이가 죽는 사건이 터지니까 비로소 두 어머니들은 자신의 내면의 본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즉 ‘내가 사는 이유는 내가 낳은 자식을 지키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이런 모습을 ‘육적이다’고 단언하십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 2:14-16) 즉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겁니다. 따라서 솔로몬의 재판은 육에 속한 자들에 대해서 육을 능가하는 하늘의 숨겨진 지혜에 어떤 식으로 참여될 수 있는 가를 말하는 재판입니다.
이 방식은 육을 끝까지 밀어 붙여 육의 경계선까지 가보는 겁니다. 오늘 사건에서 두 아이 중에 아직은 살아있는 아이를 앞장 세워, 두 여자는 자신의 운명은 뒤따라 가는 식이 되었습니다. 그 살아있는 아이가 목숨이 엄마들의 목숨을 대변해줍니다. 그 아이에게 일어난 그 일이 곧 두 어머니의 존재 자체가 운명입니다.
솔로몬의 판결은 그 살아있는 아이를 산 채로 ‘둘로 쪼개라!’입니다. 이것은 곧 그 어머니의 목숨이 두 조각 나서 더는 ‘내 것, 내 존재, 내 목숨’이라는 의식이 성립되지 않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존재가 쪼개진다는 것은 존재가 비(非)-존재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없는 존재’이지만 그 자체로는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창세기 15:10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하게 되는 현장이 나옵니다. 거기에서 아브라함은 모든 제물을 새 빼놓고서는 둘로 쪼개게 됩니다.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이 제물은 장차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산 희생제물이 되려고 오신 분이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존재나 목숨 그 뒤편의 세계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곳의 세계는 ‘새 언약’의 세계입니다. 존재 자체가 곧 악(惡)이었던 겁니다. 육신적이였던 겁니다.
따라서 이런 육신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가 없습니다. 억울한 여자가 솔로몬 왕에 재판을 청구한 이유는 다시 옛적의 자기 존재의 자리로 복귀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즉 내 자식으로 내 것에 속한 자식으로 돌아올 때만 비로소 나의 존재는 명분과 이유를 갖출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하지만 이럴 경우에 언약적 왕만이 알고 있는 하늘의 지혜는 전혀 그 여자에게 삽입되지 않을 겁니다. 따라서 솔로몬의 재판을 재판을 청구하는 억울한 자의 편에 들지 않습니다. 그 여자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여자의 소망 자체에서 그 여자가 벗어나기 위한 재판으로 진행됩니다.
아직도 살아남은 아이를 둘로 쪼개라는 것은 법이 지배하는 세계는 존재를 법으로 쪼개어 결국 무의미하게 될 존재자들이 인간들임을 분명히 일깨워주게 됩니다. 존재 말고 존재에 가리워져 보이지 않는 다른 세계가 있는데 그 세계는 ‘내 것’을 인정하는 세계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담는’ 세계입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롬 9:21-23)
내 것이 법에 의해서 쪼개져야 하는 이유는 더는 존재 자체에 대해서 정죄함이나 고소당함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롬 8:33-34) 이제는 사망의 법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성도는 이미 더는 재판이 없는 왕의 자리에 앉아있습니다.(벧전 2:9) 동시에 이 세상은 지금도 재판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죽으신 바로 십자가 사건이 원고가 되어 자기 것 챙기는 것으로 살려는 자들을 피고로 해서 천국에서 배제 시키는 분류작업이 멈추지 않습니다. 피해자는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성도는 주님의 선물을 듬뿍받은 자로서 매사에 감사와 고마움으로 주님처럼 봉사하는 자세로 살아가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긍휼하심만 자신의 내면으로서 보여주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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