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열왕기상 2:36-38 / 왕의 공간 본문
왕의 공간
이근호
2024년 12월 4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2:36-38
(2:36) 왕이 보내어 시므이를 불러서 이르되 너는 예루살렘에서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거기서 살고 어디든지 나가지 말라
(2:37) 너는 분명히 알라 네가 나가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날에는 정녕 죽임을 당하리니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가리라
(2:38) 시므이가 왕께 대답하되 이 말씀이 좋사오니 내 주 왕의 말씀대로 종이 그리하겠나이다 하고 이에 날이 오래도록 예루살렘에 머무니라
죽이는 것은 왕의 일이 되는 공간은 참으로 특수한 공간이기도 합니다. 잠언 25:2에 보면,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고 되어 았습니다. 왕은 이 땅에 있어 하나님의 대리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무나 땅이 아니라 약속의 땅에서만 그러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약속의 땅이란 출애굽 정신으로 가득찬 곳입니다. 출애굽 정신이란 가진 권력이 일체 없어 철저하게 애굽인들에게 구박을 받던 히브리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전지전능한 보호 아래서 무사히 애굽에서 탈출했던 그 정신입니다. 고아와 나그네와 과부 신세에 불과한 그들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를 받게 됩니다.
더구나 그들은 그냥 여호와 하나님께 보호 받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겁니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출 19:6) 거룩이라는 말은 깨끗하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거룩하지 않는 것은 추잡고 지저분하다는 말이 됩니다.
너무 더러워서 감히 감히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상대자라는 말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으로부터 거부당하게 자들입니다. 이스라엘이 단순히 생존이 가능한 민족 정도가 아닙니다. 거룩하게 생존이 가능한 민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 이스라엘은 3개월 만에 시내산 밑까지 오게 하셨습니다.
그 시내산 꼭대기에서 뭘 주시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입니다. 이는 ‘왕의 법’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왕이 계셨던 겁니다. 그 왕은 자기 백성을 거룩케 하시고자 떠나지 않는 왕이십니다. 바로 이런 정신을 받들어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왕이 진정한 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왕의 법 안에서 제사법도 들어있어 이 제사로 인하여 율법에 의해서 인도함을 받는 백성은 거룩한 민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출애굽 정신으로 된 공간이어야 할 약속의 땅은 변질되어 깨끗함 보다 돈 많음이 선망이 대상의 되고 말았습니다. 소위 힘이 있다고 자부하는 자들끼리의 권력 투쟁이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힘을 원하다는 보니 거룩은 뒷전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을 평정해야 할 책임이 있는 자가 바로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왕은 악인들에 대해서 사정봐주지 않고 심판해야 합니다. “지혜로운 왕은 악인을 키질하며 타작하는 바퀴로 그 위에 굴리느니라”(잠 20:26) 진정한 하나님의 자태는 참으로 거룩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소개하는 이스라엘은 왕은 이런 모습입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사 6:5-7)
즉 완벽하고 완전한 거룩한 죄를 적게 지음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깨끗하게 씻어지므로서 완성됩니다. 바로 이런 정결을 유지하기 위해 이스라엘은 이 약속의 땅까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왕들은 백성들의 호응도를 의식해서 사람들의 구미에 맞추는데 급급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왕되심을 모델로 하지 않고 세속나라의 왕됨을 모델로 했기 때문입니다.
이방나라의 왕들의 특징은 ‘힘 축적으로 실제적인 통치를 행사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요압 장군의 성격도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출애굽 정신과 전혀 부합되지 않는 인물이 다윗과 솔롬 초기까지 걸쳐 이스라엘의 실세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솔로몬 왕은 자신의 할 일이 발생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죽이는 겁니다. 요압의 악함은 자신의 힘을 다 빼고 귀순해 온 상대 장군을 두 사람이 살해한 죄입니다. 한 사람은 아브넬이요 다른 한 사람은 아마사입니다. 아브넬은 사울 왕 시대의 장군이요 아마사는 다윗의 아들 압살롬 반대 때에 압살롬편에 선 장군입니다. 이들은 자신이 의지하는 권력이 괴멸한 것을 알고 다윗에게 투항하고 귀순한 왕입니다.
즉 다윗의 왕되심의 자리에는 적을 위하여 남겨준 자리가 따로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다윗의 원수들, 즉 요압같은 장수는 적에게 자비와 동정을 베풀 여부의 자리가 전혀 없었습니다. 사적인 복수심이 발로해서 귀순한 인사를 사정없이 죽였습니다. 요압은 자신이 가진 힘으로 마치 왕인양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출애굽 정신에 어긋나는 겁니다. 시므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울 집안의 유력한 자였던 시므이는 압살론 난에 직면해서 다윗의 모든 권세가 무너지자 그 틈을 타서 사울 집안에 대한 하나님의 벌로 여겼습니다. “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매 거기서 사울의 집 족속 하나가 나오니 게라의 아들이요 이름은 시므이라 저가 나오면서 연하여 저주하고 또 다윗과 다윗 왕의 모든 신복을 향하여 돌을 던지니 그 때에 모든 백성과 용사들은 다 왕의 좌우에 있었더라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 대신에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붙이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고로 화를 자취하였느니라”(삼하 16:5-8)
즉 시므이는 초라한 다윗 앞에서 자신이 가진 힘을 자랑했습니다. 다윗은 솔로몬에게 부탁하기를 시므이의 자세를 주시하라고 하십니다. 결국 시므이는 자기 집의 종이 가출한 것을 통해서 다윗의 보호 권역 밖으로 나가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왕되심을 의식한다는 것은 그 왕의 위세 밑에서 자신의 가진 힘을 부정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요압은 죽을 때도 자기 방식으로 죽겠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이것은 완전히 하나님의 왕심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악마의 태도와 같습니다. “브나야가 여호와의 장막에 이르러 저에게 이르되 왕께서 나오라 하시느니라 저가 대답하되 아니라 내가 여기서 죽겠노라 브나야가 돌아가서 왕께 고하여 가로되 요압이 이리이리 내게 대답하더이다”(왕상 2:30)
끝까지 왕됨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기웃거리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왕 있음을 알고 자립적으로 살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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