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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열왕기상 3:5-10 / 번제와 응답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열왕기상

열왕기상 3:5-10 / 번제와 응답

정인순 2024. 12. 11. 21:54

음성 동영상 Youtube

 

번제와 응답

 

이근호
2024년 12월 11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3:5-10

(3:5)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3:6) 솔로몬이 가로되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의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저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저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예비하시고 오늘날과 같이 저의 위에 앉을 아들을 저에게 주셨나이다

(3:7)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비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3:8) 주의 빼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저희는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3: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3:10)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

솔로몬이 한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추가적인 사실을 첨가해서 응답하십니다. 이는 기도하는 전에 솔로몬의 인식의 범위를 넘어서는 내용으로 솔로몬과 그 후예들을 다루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드러내십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기도 내용을 칭찬하십니다. 이는 ’자기를 위함‘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자기를 위함‘이 빠져 있는 내용으로 응답을 하셨다는 말은 이 기도 응답을 솔로몬이 주도적으로 자기 것으로 소지할 수 없음을 말해줍니다. 즉 결코 솔로몬이 자기를 지키기 위한 용도로 기도 응답을 활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고 응답받았다고 해서 앞으로도 줄곧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인정해주시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냥 솔로몬의 기도를 계기로 해서 새로운 원칙이 수립되었음을 뜻합니다. 그 내용이 열왕기상 3:14에 나옵니다.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 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 만약에 솔로몬이 기도 응답에 부합되지 못하면 응답 실현 차원에서 솔로몬은 부정적인 사람이 될 것입니다.

솔로몬이 1천 번제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은, 자신이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상태에서 아버지 다윗이 하나님과 연결된 그 자리에 들어서게 되었다는 겁니다.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하나님과 다윗에게 맺은 맹세 자체가 일관성을 가지고 맹세를 이루게 되신다는 겁니다.

즉 인간이 시작한 기도의 응답은 인간에게 돌아가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기도는 그 응답도 인간을 거쳐 주님의 몫으로 돌아갑니다. 인간은 이 맹세 성취의 기능으로 활용되게 됩니다. 이를 위해 응답은 인간의 부정성을 경유해서 완전에 이릅니다.

히브리서 7:20-21에 보면, “또 예수께서 제사장 된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 저희는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자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세상에 던진 맹세를 이루는 데 있어 인간들을 가담하게 하시는 이유는, 그들에 의해서 결코 맹세가 이루어질 수 없음을 부각해서 오로지 모든 공적이 하나님의 아들에게 주어져 있음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인간에게 대해서 이러한 부정적 평가는 번제에 대해서는 이미 다윗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6-17) 인간에 의해서 성취되는 맹세가 없는 이유는 인간 육신의 한계 때문입니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9) 인간의 육신은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너무나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장례식장에서 우는 것은 이제 더는 자기와 놀아줄 사람을 잃은 자기 상실감 때문입니다.

따라서 당연히 흙으로 환원되는 운명과 성질을 지녔기에 하나님쪽에서 제시한 그 어떤 구원의 조건도 인간에게는 들어붙지 않는 조건이 됩니다. 마치 아무리 턱걸이 달인이라도 결국 지면으로 당기는 중력의 힘을 당해내지 못하고 철봉을 놓고 도로 땅에 내려와야 하는 것처럼 흙으로 환원되어야 될 육신의 힘을 인간은 당해내지 못합니다.

육신은 마음의 고향을 찾아갑니다. 나와 일치된 나를 갖추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늙어가는 육신은 말할 것도 없고 어릴 때 나다움을 구성한 주변의 식구나 친구나 일가친척이나 풍경들은 세월 따라 흔적없이 다 날아가고 현장에 없습니다. 아무리 복음의 말씀을 대해서 그것은 육신의 새로운 시작점이 되지를 못하고 그리운 과거 노선 안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모든 신앙적 도전은 실패로 끝납니다. 육신의 본능은 이렇습니다. “나와 닮거나 같지 않은 것은 다 싫다!” 육신은 한시로 자신을 잃어버린 적이 없습니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탕자 비유는 이런 점에서 육신의 한계를 극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 비유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 집을 떠나 허랑방탕하며 가진 돈을 다 쓰고 도로 빈털터리로 아버지집으로 되돌아왔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어는 인간도 자신이 만든 자기 자리를 떠나 본 적이 없습니다. 한시도 자기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오로지 일관되게 자기 만을 신봉하기에 로마서 8:7의 말씀이 정확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그렇다면 솔로몬의 기도 응답은 결국 솔로몬이 아니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아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솔로몬이 기도 응답 받을 때 결코,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말을 하게 될 줄은 상상치도 못했습니다. 1천 번제의 응답은 요한복음 3:13-14에 나오는 방식으로 성사됩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들은 주장은 ‘애굽으로 돌아가자’입니다. 자기 주제에 ’약속의 땅‘은 관계없는 곳이라는 겁니다. 그냥 그동안 살던 대로 살겠다는 겁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불뱀을 보내었습니다. 그리고 그 불뱀을 그들 가운데 금속으로 고정시켰습니다. 이는 인간 육신의 한계를 계속 확정지으면서 그들과 동행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예수님께서 스스로 불뱀이 되셔서 인간 육신의 한계를 최종 지으셨습니다. 마치 아담은 반드시 흙으로 환원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맹세에 이중성이 있습니다. 창세기 3:20에 보면, “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하와’라는 이름은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육신임에도 불구하고 생명으로 환원된 육신도 있다는 겁니다. 그 육신이 바로 예수님의 육신입니다.

이 육신에서 뿜어져 나온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성령의 은사입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고전 12:4-6) 이 성령으로 인해서 한 분의 지혜로 모든 백성을 한 나라의 백성으로 모을 수가 있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늘 우리의 한계를 명확하게 인식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