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스가랴 14:9-11 / 왕과 상속자 본문
왕과 상속자
이근호
2024년 4월 24일
본문 말씀: 스가랴 14:9-11
(14:9)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
(14:10) 온 땅이 아라바 같이 되되 게바에서 예루살렘 남편 림몬까지 미칠 것이며 예루살렘이 높이 들려 그 본처에 있으리니 베냐민 문에서부터 첫문 자리와 성 모퉁이 문까지 또 하나넬 망대에서부터 왕의 포도주 짜는 곳까지라
(14:11) 사람이 그 가운데 거하며 다시는 저주가 있지 아니하리니 예루살렘이 안연히 서리로다
‘이스라엘에게 왕이 있었다’는 말은 그 전에 ‘이스라엘에게 왕들이 있었음’을 선행하는 말씀이 됩니다. 이전의 왕들은 모두 실패한 왕들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왕들이 실패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을 유지시킬 수 없었다가 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왕’을 이해하려면 도대체 이스라엘이 어떻게 생겨났고 가나안 땅(예루살렘)에 살게 되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왕들이 있었습니다. 이들 왕과 하나님의 왕되심의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탈출 시켰습니다. 애굽에는 바로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왕 밑으로 애굽나라는 단단히 결속하면 평화롭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바로왕을 당황하게 만든 것은 꿈이 하나 있었습니다.
요셉이 꾼 꿈이 아니라 요셉 안에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꿈입니다. 바로왕은 이 세상에서 무서울 것이 없지만 단 하나, 요셉의 꿈 앞에서는 거의 죽은 자에 해당됩니다. 요셉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자입니다. 이는 곧 요셉이 있을 동안에는 애굽 나라는 요셉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자비의 덕을 입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후대 바로왕이 요셉의 은덕을 잊고 살면서 애굽나라의 실상은 어느 정도였나요? 모세가 와서 하나님께서 시키시는대로 10가지 재앙을 내렸습니다. 강물이 피가 되는 재앙, 개구리가 각 가정의 식탁까지 올라오는 재앙, 이(모기)가 들끊는 재앙, 파가가 범람하는 재앙, 악질이 가축을 공격하는 재앙, 독종이 사람까지 미치는 재앙, 우박이 쏟아지는 재앙, 메뚜기가 남은 곡식까지 마저 뜯어먹는 재앙, 해가 갑자기 사라지는 재앙, 그리고 마지막은 모든 애굽 나라의 장자가 죽은 재앙이 바로 그것입니다.
애굽은 실은 열 가지 재앙의 결과물이요 재앙이 쓸고 지나간 쓰레기가 애굽 나라입니다. 두 번째로 알아야 될 것은 실제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탈출했다는 점입니다. 즉 쓰레기 같은 애굽 나라가 이스라엘을 붙잡을 수 없다는 겁니다. 같은 인간이라는 다같은 종족이 아니었던 겁니다.
셋째로 중요한 점은, 이스라엘은 율법과 함께 했다는 겁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새롭게 알게 된 갈렙과 여호수아는, 비록 자신들이 약속의 땅에서 들어간다 할지라도 광야와 마찬가지였음을 알았습니다. 반면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약속의 땅에서 제공하는 젖과 꿀에 현혹되어 자신들을 만족케 한다는 점에 치중해서 율법의 가치를 밀쳐버렸습니다.
결국 그 후에 이스라엘에 등장된 많은 왕들은 율법의 취지가 뭔지도 모르고 그저 약속의 땅에서 붙들 생각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중심이 아니라 언약 중심으로 일하심은 이미 아브람 때부터 나타났습니다. 창세기 15:2에 보면,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아브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을 받았지만 상속자는 없습니다. 상속자가 없다는 말은 하나님 복이 단절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야곱에게 와서 상속자가 구체적으로 알려집니다. 그것은 바로 ‘많은 왕들’과 ‘국민들’입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창 35:11)
이 대목에서 야곱의 허리에는 이들 왕들과 국민들이 나온다는 겁니다. 야곱의 허리는 야곱이 하나님과 맞짱 뜰 때 천사에게 맞아서 어긋난 그 자리입니다. 야곱의 힘의 원천이 작살난 자리입니다. 이 천사와의 씨름에서 야곱이 알았던 것은 자신 하나님 앞에서 이미 죽은 자라는 사실입니다.
시체같은 자신이 그동안 살아온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자기 몸이 작용했기 때문인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몸에 언약이 살아서 그 언약으로 인해 많은 왕들과 국민들이 영생의 상속자로서 생겨나게 되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으로 친히 얻어맞지 아니하면 인간 자체적으로 그 어떤 노력과 시도를 통해서는 영생의 나라에 갈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2:24-25에서는 이렇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여기에 등장하는 ‘한 일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영생의 상속자에게 죽음을 요구하는 겁니다. 죽지 아니하고, 달리 말해서 자기를 미워하지 아니하고서 영생 얻을 자는 없습니다. 문제는 그 어떤 인간도 자기를 미워하는 자가 없고 모두 미치도록 자기만을 끝까지 붙들고 있는 판입니다.
따라서 자기를 사랑하면서 예수님 덕을 보겠다는 심보는 용납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안 통합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통해서 자기 백성을 저주하십니다. 이는 야곱에게서처럼 그 사람의 마음에 구멍을 내는 겁니다. 자기를 사랑할 수는 최종적 근거를 박살되는 겁니다.
신약에 와서 여기에 동원되는 것이 율법입니다.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롬 7:12-13)
즉 율법의 선함과 거룩함을 위해서 우리는 철저하게 저주받아야 하고 죄인이어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이 일을 위하여 주님께서 요한복음 1:47에서 나다나엘에게 먼저 말씀을 건넵니다. “너는 간사함이 없구나 너는 참 이스라엘이다”고 말입니다. 즉 주님께서 나다나엘의 간사함을 거두어내시니 거기에 참 이스라엘 백성이 나타난 겁니다.
이 말씀을 하시므로서 예수님만이 참된 상속자, 즉 참된 이스라엘 왕이심이 드러납니다. 다른 사람들은 결코 상속자가 아닙니다.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마 21:38) 진정한 영생받은 자는 예수님으로부터 철저하게 저주받은 자로 지목당해 예수님의 함께 십자가 못박아 죽은 자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시체에 구멍을 뚫고 언약을 부어주신 주님께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1강-스가랴 14장 9-11절(왕과 상속자) 240424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스가랴 14장 9절에서 11절까지입니다.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 온 땅이 아라바 같이 되되 게바에서 예루살렘 남편 림몬까지 미칠 것이며 예루살렘이 높이 들려 그 본처에 있으리니 베냐민 문에서부터 첫문 자리와 성 모퉁이 문까지 또 하나넬 망대에서부터 왕의 포도주 짜는 곳까지라, 사람이 그 가운데 거하며 다시는 저주가 있지 아니하리니 예루살렘이 안연히 서리로다” 아멘.
여호와께서 친히 왕이 된다는 것은 그전에 왕이 많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왕이라면 그들은 인간의 왕은 왕들이 되죠. 왕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처럼 올바른 왕이되지 못했기 때문에 예루살렘이 저주받았고 불바다가 되었고 이방인에게 짓밟혔습니다. 그런 절차를 먼저 거친 후에 그다음에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의 왕이 되셔서 왕의 통치를 하게되는데 결국 이 왕이라는 것은 하는 기능이 전쟁이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들이 주위에 있는 나라와 전쟁을 제대로 해서 이겨서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약속의 도성처럼 유지시켜야 되는데 그동안 그들이 어설퍼서 제대로 예루살렘 답지 못하게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거기 우상들을 수입해서 우상의 전당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왕다운 왕의 모델 케이스로 다윗 왕을 이스라엘 역사에서 봉우리로 잡고 있습니다. 우뚝 솟은 봉우리.
그때 예루살렘이 빛났죠. 근데 이 다윗 왕이 뭐를 잘했는가? 전쟁을 잘했습니다. 소년때부터 잘했어요. 골리앗을 이겼으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하는 평강이라 하는 것은 이방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난 뒤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로 제공받는게 평강입니다. 그런데 다윗 이후에 솔로몬부터 시작해서 그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이 평강스럽지를 못했습니다.
다윗을 모델로 삼았다는 것은 다윗에게 하나님이 약속을 한 바가 됩니다. 다윗에게 한 약속과 그 약속의 실현자로서 오실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 그 사이에 여러 많은 왕들은 다 실패자였습니다. 근데 그 실패자라는 말은 단순히 ‘이스라엘이 이방나라하고 싸워서 이겼어야 되는데 못 이겼다. 그래서 실패자다.’라고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보다 먼저 이스라엘 왕이 실패자가 될 수밖에 없던 이유는요, 자기 자신하고 싸워서 이기질 못한 거에요. 이스라엘 왕들이.
자기 자신을 제대로 관리하질 못한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 마지막 왕으로 오신 하나님 자체가 왕이 되신 이 마지막 왕 예수님은 주변의 사람들도 귀신도 쫓아내고 했지만 마지막 아버지하고의 앞에서 예수님은 자기자신을 이겼습니다. 자기자신을 어떻게 이겼느냐하면, “이 잔을 마시겠나이다. 제가 죽겠습니다. 제가 죽을게요.” 그 싸움에 예수님은 지지않고 이겼습니다.
요한복음 12장 24절에 그렇게 나와있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이게 바로 순서에요. “한 알의 밀알이 죽지 아니하게 되면” 이 순서가 먼저 있어야 돼요. 이스라엘에 많은 왕들이 있었고 그들이 예루살렘을 거주지역으로 삼아서 이스라엘을 관리했는데 그들은 한 알의 밀알이 죽지 않았습니다. 죽지 않기는커녕 자기가 더욱더 살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자기 나라로 편성을 그렇게 했고 관리를 그렇게 했던거에요.
예수님 오시기 전에 왕들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2장 24절에는 “한알이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알 그대로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아버지와의 단독에서 이겼던 대목이 이 대목입니다. 이 대목에서 이겨야 다 이루었다가 됩니다. 여러분들이 우리 자신에게 이 말씀을 적용시켜 봅시다. 적용시킬 때에 “우리는 뭐 죄인인데 저는 사양하겠습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이거는 예수님만 하시고 우리보고, 우리까지 그렇게 요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님 홀로하신 예수님 덕이나 보겠습니다.” 이렇게 발뺌을 하겠죠. 그런데 25절에 이렇게 되어있어요.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여기 영생이라는 말이 나와요. 예수님께서 이루어서 영생을 얻었다면 예수님처럼 자기 생명을 잃어버리지 않는자는 영생이 없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예수님 덕이나 보지 뭐. 예수님은 하나님이니까 뭐든지 잘하잖아요. 우리는 죄인이라서 아무것도 할줄 아는게 없으니까 그냥 불쌍히 여겨주셔가지고 주께 혼자 얻은 영생 넉넉하게 나누어 주신다면 주님 앞에 섭섭지 않게 영광돌리고 헌금하고 봉사하겠습니다.” 이런식으로 나온다면 그사람은 어떤 모습이냐 하면 자기 생명을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자기 생명을 미워하지 않는자가 예수님 덕분에 천국 간다, 영생 얻는다? 이것 없습니다. 이런 경우는 없어요. 시스템이 이런 시스템이 아니에요. 그렇다면 이 세상에 예수님만 구원 받고 구원 받을 사람 아무도 없을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을 할 수 밖에 없죠. 구원 받으려고 교회 나오는데 요한복음 12장 25절 들이대버리면 다 도망가요. 자기를 미워하지 아니하면 영생이 없다했는데 영생은 얻고싶은데 자기를 미워할 순 없고요. 만약에 티비에 나오는 보험, 생명보험. 뭐 여러분, 보험 좀 잘 아시죠?
그 많은 온갖 보험들이 선전할 때 그 보험회사에서 조건을 거는 것이 ‘누구든지 자기를 미워하게 되면 보험금 드립니다.’ 이렇게 나오면 ‘자기 생명을 미워하면 보험금 줍니다.’하면 한건도 못 건질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보험이 문제가 있는거에요. 다시 말해서 세상 보험은 자기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려는 이유 때문에 보험에 드는거에요.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보험만 그렇습니까? 교회 나오는 것은 안그렇습니까? 하나님 믿는것도 그렇잖아요.
‘모든 것을 자기 미워하는 대신 하나님 믿을게요’라는 엉뚱하게 하나님이 원하지도 않는 자기가 자기조건을 만들어서 들이 미는거요. 이런 것은 주님앞에 안통합니다. 그런 것은 사기나 치는 교회에서 그런 소리 많이 들으세요. 복음앞에서는 그런 것은 사기입니다. 거짓말입니다. 그러면 천국에 요한계시록에 보면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종려나무들고 천국에서 전부다 입성했다는데 그사람은 그러면 하나같이 자기를 미워하는데 성공했던 사람인가? 그런 생각이 들죠? 그게 바로 왕이 했던 역할이 기존의 왕들이 했던 역할을 실패했고 최후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성공한 대목이 이 대목이에요.
어떤거냐 하면 자기를 미워하는 그 역할을 우리 본인에게 맡기지 않고 왕이 되신 우리 주님이 우리를 미워하시는거에요. 아까 걱정하는 사람은 뭐냐? “내가 스스로 미워하지 못하는데 나는 내 목숨을 사랑하고 싶은데 어떻게 영생얻겠습니까?” 라는 질문을 하는데 그 질문 자체가 잘못된 거죠. 미워하지 않으면 못간다는 조건이 조건은 조건대로 살아있고 천국은 영생얻을 자의 조건이 살아있다면 내가 못하는 미움을 주님이 해주면 되잖아요. 주님이 나를 저주해주면 되잖아요. 참 쉽죠잉?
나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저주 못해요. 그런데 주님이 나를 저주해주면 되잖아요. 그걸 고맙게 여기고 그걸 복으로 여기면 어떻습니까? 얼마나 고마운 복입니까? 내가 못하는 저주를 주께서 저주케 해주시니 이건 뭐 아무나 받는 저주 아니거든요. 성도는 자기 저주받은걸 자랑하는 사람이에요. 그걸 사도바울 표현대로 하면 “나는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게 없다”는 건데 그 십자가가 뭐냐? 갈라디아서 6장에보면, “나는 이미 십자가에 죽게 되었다”는 그걸 자랑하는거에요.
“십자가에 나는 죽게되었다. 어떻게? 죄인의 입장에서 천하 죄인의 입장에서 죄인답게 죽게되었다”는 그것을 자랑하게 된겁니다. 한꺼번에 고민이 다 해결되어버렸어요. 이것도 모르고 지가 자기 미워한다고 온갖 고난받고 봉사하고 쓰잘떼기 없는, 봉사하면 점점더 자기를 사랑하게 되지 그게 어떻게 미워하게 됩니까? 봉사한 자기를 자랑질 할 수 밖에 없는데요.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를 미워하는 방법이 뭐냐? 미워하는 이유가 근거가 있어요. 그게 뭐냐하면 육으로 난 인간은 영생의 나라, 또는 천국, 하나님 나라, 영생의 상속자가 될 수 없어요.
상속자는 오직 왕밖에 안됩니다. 하늘에 있는 영생을 지상에서 받을 수 있는, “던지세요. 받을게요.” 이렇게 딱 받을 수 있는 자는 이 땅에 상속자 자격을 부여한 자만 딱 받아요. 자격증을 따야돼요. 그걸 따야 되거든요. 이 말은 뭔뜻이냐 하면 이런 뜻이에요. 땅에서 아무리 하나님께 제사드리고, 가인처럼, 아무리 신을 부르짖고 아무리 한다 할찌라도 하나님의 뜻은 요지부동이에요. 상속자가 될 만한 자격이 없는 자에게는 천국도 없고 영생도 없습니다.
우리가 천국가기를 소원하죠. 하지만 나의 소원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제시한 조건이 따로주어지는데 이땅에는 영생의 상속자를 따로 내가 보내고 그 상속자에게만 영생이 주어지게 되어있어요. 그 상속자가 뭐냐? 왕입니다. 상속자가 왕이에요. 그러면 그다음 문제는 뭐냐? 상속자를 어디서 찾느냐 하는거에요. 창세기 15장 2절에 보면,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무자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라고 해요.
“나는 자식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정식으로 된 나의 상속자, 내 몸에 난 상속자가 없나이다.”라는 고백을 해요. 맞습니다. 육으로 난 인간은 아무리 구원받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상속자는 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니가 자식이 없다.” 없는데 이름을 뭐로 바꾸냐 하면 많은 자식의 아버지로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람이라는 뜻은 최고 높은자라는 뜻이고, 아브라함은 많은 사람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너로 하여금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름을 바꿔줘요. 이것은 아브라함쪽에서 육적으로 자식이 없어요. 없는데 이름이 바뀌면서 상속자가 나오도록 하나님께서 특별 조치를 해준겁니다. 이름 바뀌고 그다음 천사 찾아오고 그다음 생긴 자식이 뭐냐? 죽은 태에서, 태가 죽었어요. 아내 사라 태가 죽은태에서 자식이 나오는데 그 자식이 이삭입니다.
그것이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언약의 상속자가 돼요. 이말은 무슨뜻이냐 하면요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인간의 육으로,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도 영생을 얻을 상속자는 나올 수 없다는 것을 그런식으로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니가 어떤 노력을 하고 어떤 애를 쓴다 할찌라도 영생 얻을 수는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거에요.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조치가 주어지는 조건 하에 영생얻을 상속자가 비로소 발생되는겁니다. 그러면 아브라함 입장에서 말로는 “니가 복의 근원이 된다, 내가 너와 언약을 세우리니,” 이런걸 했는데 실제적으로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어요. 자식이 없으니까 상속자가 없는데 이땅에서 복을 받고 복의 근원이 되고 뭐 이렇게 한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이말이죠. 상속자가 없는데요.
없다는 것은 끊어졌다 이말이죠. 언약이 끊어져버렸는데, 없으니까 도대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직까지 이삭이 생기기 전입니다. 이삭이 생기기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도대체 어떤 식으로 아브라함을 언약을 가지고 하늘과 땅을 연결시켜주는가? 거기에 아브라함이 왕을 만나요. 창세기 14장 18절. 18절에 왕을 만나는데 그 왕 이름이 뭐냐? 살렘왕 멜기세덱입니다. 살렘. 예루살렘이에요. 예루살렘의 왕 멜기세덱. 멜기세덱이라는 왕은 예루살렘 성에. 장차는 예루살렘이죠. 그때는 살렘이고. 살렘을 거주지로 해서 이분이 하늘과 땅에 있는 아브라함 사이에 연락책으로서 활동하는 분입니다.
하늘에 주신 그 영생의 복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지도록 중간에 관여하신 분이 이분이 바로 멜기세덱이에요. 그러면 아브라함이 멜기세덱과 만났다는 말은 아브라함의 언약에 목표가 생겼다는 말입니다. 그 목표가 뭐냐? 아브라함 몸에서 나온 분이 어떤 분을 빼닮았느냐? 어떤 분의 반열, 족보를 따르느냐? 멜기세덱과 같은 분이 장차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온다는 겁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아브라함 자손 가운데서 장차 멜기세덱과 같이 하늘과 땅에 복을 주시는 그분이 내려오는 그 절차 절차 절차 마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상속자를 주시는가? 라는 겁니다.
그 상속자를 주시는 대목이 창세기 35장 11절에 나옵니다. 창세기 35장 11절에 보면 야곱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온다고 했어요. 허리입니다. 허리. 효리가 아니고. 왕들이 허리에서 나와요. 근데 이 야곱은 이런 말이 없어요. 많은 백성들이 나와요. 근데 아브라함에서 이삭이라는 상속자, 이삭이라는 상속자에서 야곱이라는 상속자로 계속 연결 연결 돼 가면서 장차오실 상속자가 왕으로 오신다는 것이 보다 더 진척된 형상을 보여주는겁니다.
왕들이 야곱에서 나오는데 그 나오는 장소가 특이해요. 그 나오는 장소가 장차오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영생주기 위해서 사람이 하지못하는 자기에 대한 미움을 주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미워서 그들을 영생에 가게하는 그 작업을 야곱에게 이미 벌써 낌새가 일어났습니다. 아브라함하고는 달라요. 아브라함은 그냥 만났죠. 멜기세덱을. 만났잖아요. 그런데 야곱에서는 그 하나님하고 한판 붙었습니다. 얍복강가에서. 한판 씨름을 한거에요. 생명의 존재와 죽음의 존재, 무자하니까요. 육이니까요. 하늘의 상속를 배출 할 수 없으니까 죽은 존재에요. 영생이 없으니까 죽은 존재 맞잖아요. 영생이 없으면 죽은 존재에요. 살아도 산게 아니고 결국 다 죽게되니까, 시체니까요.
그런데 이 시체같은 야곱이 생명되신 하나님하고 한판 밤새도록 붙었습니다. 붙으면서 거기서 뭘 발견하느냐? 몇가지를 발견해요. 첫째는 야곱 본인이 죽었다는 사실. 내가 시체에 불과하다는 사실. 두 번째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 시체인 야곱의 허리에 구멍을 냈다는 것. 세 번째 그 구멍에서 왕들이 쏟아져 나오는거에요. 언약의 왕들이 쏟아져 나오는거에요. 구멍에서. 한국 은행에서 유통될수 없는 지폐에다가 천공을하죠. 구멍을 뚫죠.
“이 돈은 쓸데없는 돈입니다.”하면서 구멍을 내는거에요. 야곱은 그 자체가 쓸데없는데 야곱이 하나님이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야곱의 그 시체에다가 구멍을 내니까 구멍에서 영생과 통하는 왕들이 쏟아지기 시작한다는 거에요. 이것은 바로 일반 시체와 달라요. 언약이 개입한 시체에요.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생산하기 위해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게 아니고 죄인을 찾아왔다”고 할 때 그 죄인에 대해서 주님께서 구멍을 뚫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두가지 경우만 말씀드리죠. 하나는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 사마리아 여인은 그냥 자기가 시체인걸 모르고 살아있으니까 더 살기 위해서 우물에 물길러 온거에요. 사는 행위니까. 자기가 죽은줄은 몰랐죠. 그런데 주님께서 넌지시 작업을 걸면서, 이 작업이 진짜 귀한 작업이죠. 작업걸면서 사마리아 여인에 숨기고 있었던 과거 이야기를 다 들추어냈습니다. “남자 5명 사겼지? 지금 다헤어지고 6번째 남자 사귀잖아.” 과거 이야기를 왜 이게 들추어내느냐?
그 사마리아 여인의 과거하고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생을 주는 것 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 어떤 관계가 있느냐? 제가 문제를 하나 낼테니까 여러분 속으로 한번 맞춰보세요. 미세먼지와 십자가의 관계는? 상당히 어렵죠. 미세먼지와 십자가는 어떤 연결이 있느냐? 미세먼지는 알갱이가 0.01mm의 작은 먼지 미세먼지거든요. 인간들이 그렇게 미세먼지에 대해서 설명이 가능해요. 그런데 인간들은 십자가에 대해서 아는사람 아무도 없어요. 성령이 아니면 십자가에 대해서 아무도 없어요.
왜냐하면 미세먼지에 대해서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그게 미세먼지 내가 알고 물리학에 대해서 알고 생물학 경제 철학에 대해서 아는 것, 그것 구멍이 뚫려야 돼요. 알기 때문에, 안다는 것은 내가 아는 것이 나를 살게했다는 뜻이거든요. 니가 아는 것을 구멍을 뚫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지금 시간 보낸 것이 시체로서 가는 시간이었지 아무리 시간이 가도 나는 살수 없다는 것을 내가 그동안 내가 사는데 밑천 들였던 모든 그 밑천을 주님앞에 발각시키는 겁니다.
그걸 폭로당함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알던 그 자리에서 비로소 그다음에 뭐냐? 그 아는 것의 연장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이제 언급하기 시작합니다. “우리 조상은요, 우리 민족은 그리심산에서 예배 드려야 된다하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하고 어느게 맞습니까?”라고 하나님과의 관련성을 이야기하는거에요. 이거는 상속자가 아닙니다. 인간이 아무리 지적으로 성경을 안다고 해도 그건 상속자가 될 수 없어요. 예수님이 와서 직접 충돌해서 내가 살았다 할 수 있는 그 최후의 근거. 그 바탕에 드릴가지고 두두두두 뚫어버려야 돼요. 구멍이 나야 돼요. 통용 불가. 드디어 사람으로서 가치없음. 가치 종결됨, 끝났어. 그렇게 되어야 돼요.
그리고 네 속에 영원한 샘물이 영생의 물이 흐를 것이다. 이 방법입니다. 주께서는 사마리아 여인한테 일을 벌여놓고 그다음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누구든지 자기를 미워하지 아니하면 영생이 없다”고 말 한 것은 이미 주께서 먼저 손대놓고 이제는 나를 미워하고 자시고 할것없어요. 이미 죽은 시첸데 뭐 죽은시체가 뭘 새삼스럽게 안미워할 것 뭐가 있겠어요. 사나 죽으나, 좋아해도 미워해도 시체인건 한결같은데요.
이게 신약에 나오는 경우고 구약에 나오는 경우를 말씀드릴게요. 구약은 뭐냐하면 바로 이스라엘 그 자체에요. 이스라엘 나라는 없습니다. 나라 자체가 없어요. 애굽나라에요. 애굽나라 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애굽나라의 말을 들었어요. 그때 애굽나라에 누가 있었는가? 바로 왕이 있었어요. 바로 왕. 그래서 바로 왕 밑에 애굽사람, 히브리인들 포함해서 애굽나라 사람들은 평화롭게 잘 살았어요. 근데 그 바로 왕을 불안하게 만들고 바로 왕을 완전히 뒤집어버린 엎어버린, 바로왕이 당황스럽게 만들수밖에 없는 것은 딱 하나였습니다. 그건 뭐냐? 꿈이었어요. 누구의 꿈? 요셉의 꿈.
근데 요셉의 꿈에 하나님의 꿈이 그 안에 들어있었던 거에요. 하나님이 요셉을 앞장세워서 바로왕과 만났을때에 바로 비로소 애굽은 이세상의 모든 것 한테는 자신 있어도 하나님의 유령같은, 그야말로 유령이죠. 보이지 않는... 유령같은 하나님의 계획, 꿈 앞에서는 이게 아무 쓸모짝 없는 죽은 제국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알았어야 합니다. 근데 그들은 정신 못차렸어요. 그 바로 말고 후대의 바로왕 때에 그때 모세가 등장합니다. 모세가 등장해서 자기 백성을 끄집어내는데 이때 그들은 바로 왕은 누구와 대결하느냐 하면 이스라엘의 왕, 이스라엘의 왕이신 여호와와 직접 대결을 했어야 했어요.
그 대결 하면서 3가지가 조건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끄집어내었습니다. 첫째는 애굽을 알아야 되는거에요. 두 번째는 탈출해야 돼요. 세 번째는 율법과 함께있어야 됩니다. 딱 이 세가지에요. 첫째는 애굽을 알아야 돼요. 자, 애굽을 알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10가지 재앙을 내렸습니다. 이집트 나일강이 피가 되는 것, 그리고 개구리가 뭐 밥상까지 올라오는거요. 그다음에 파리가 들끓고 이가 들끓고 독종이 있고 악질이 있고, 독종은 가축들에게 악질은 사람들에게까지 퍼졌죠. 그다음에 우박 그다음에 메뚜기 그다음에 깜깜한 흑암, 해가 사라지는 것, 네 번째 모든 애굽에 있는 장자들은 다 죽는 것. 이 10가지 재앙을 내렸습니다.
자, 그럼 애굽 나라는 뭐냐? 애굽 나라는 이 쓰레기같은 재앙의 결과물이 바로 애굽나라에요. 애굽을 알아야 돼요. 애굽은 뭐가 없느냐? 율법이 없었던 겁니다. 율법이 없었던 거에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뭐냐? 하나님의 백성이 있느냐? 아니죠. 이스라엘은 율법이 있었죠. 율법과 이스라엘 백성이 괴리가 일어나면 율법에 의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번에는 다 죽습니다. 애굽나라처럼. 그거는 무슨뜻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어떤 인간도 상속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율법이 와서 그걸 가르치는거에요.
인간은 영생의 상속자가 되지 못하면 그 자체가 시체에 불과하다는 것은 율법과 함께 있을 때 아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걸 몰랐어요. 왕들이 있었지만 왕들은 자꾸 이스라엘을 살아있는 자기를 위한 자기 소유의 나라로 관리했습니다. 특히 사울왕같은 사람은 살기위해서 누굴 찾아갔는가? 신접한 여인을 찾아갔어요. 더 살아보려고. 얼마나 다급했는지 죽은 사무엘까지 불러내라고 요청할 정도로 철저하게 자기 살겠다는 것, 다시 말해서 자기를 미워하지를 못해요. 자기 사랑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이거는 뭐냐? 율법은 제쳐놓고 율법보다 자기 자신이 우선이 된 나라였습니다. 갈렙과 여호수아가 광야에서 할 때 갈렙과 여호수아는 열두 지파를 대표하는 열두 정탐꾼 중에 두사람이었습니다. 그 갈렙과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갈렙과 여호수아의 사고방식은 뭐냐? 바로 이것이 본격적인 광야라는 것을 약속의 땅을 그렇게 규정했어요. 다른사람은 “광야생활 끝. 젖과 꿀이 흐르는 멋진땅, 약속의 땅 시작.” 이렇게 이해했던 겁니다. 그렇게 이해하는 것은 뭐냐? 자기를 미워하지 않고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 사는게 편하면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거에요. 자기를 도와준다고 지켜준다고 생각하는겁니다.
뭘 빠뜨렸죠? 율법을 빠뜨렸죠 율법을. 율법을 빠뜨리면 광야때나 약속의 땅이나 한결같이 율법이 있는 이상은 자기를 미워하지 않는자는 살수가 없게 되어있습니다. 로마서 7장에 보면, 이제 신약에 와서는 구약 이스라엘 뿐만 아니고 신약에 와서는 모든인간에게 다 적용됩니다. 로마서 7장에 율법에 대해서 언급을 하면서 이렇게합니다. “율법은 선하다. 율법은 거룩하다.” 그 이야기를 왜하느냐 하면 율법이 선하기 위해서 너는 악해야 되고 율법이 거룩하기 위해서는 너는 죄로 인하여 죽어야 된다는 것을 언급하기 위해서 여기 “율법은 선하다, 거룩하다” 라고 이야기 한거에요.
그러니 이게 무슨뜻이냐 하면 죽은 시체가 어떤때 활용 되느냐 하면 ‘율법은 선하다, 율법은 거룩하다, 말씀은 거룩하다’를 그 효용성을 드러내기 위한 시체가 필요한거에요. 하나님앞에. 여기 로마서 7장 12절에 보면요,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라고 되어있어요. 나를 죽게 만들었다고 되어있다 이말이죠.
율법이 살아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나를 죽여야 하는거에요. 내가 왜 죽어야 돼요? 율법을 살리기 위해서, 말씀을 살리기 위해서 내가 죽어야 되는겁니다. 내가 저주받아야 되는거에요. 왜? 율법이 선하기 때문에. 이런 인식, 이런 관점이 필요한 거에요. 교회 나와가지고 하나님 사랑받고 천당갈 생각하지 말고 율법적 관점을 해야 돼요. 율법적 관점에 보면 예수님 빼놓고 어떤 자도 상속자가 없어요. 왕만이 상속자가 되는겁니다.
그러면 율법으로 이렇게 다 막혀 있는 우리가 어떤식으로 영생을 얻는가? 계속 그 질문이 계속 뒤로뒤로 이어져야 돼요. 왜? 앞에서 계속 우리가 상속자가 아니면 영생 얻을 수 없고 영생 얻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계속 이야기 해 줘야돼요. 주어야 우리 자신을 알아요. 성경이 고마운 점이 뭐냐하면 우리가 시체라는 것을 성경이 아니면 알려주지를 않는다는 거에요. 우리는 저주가 합당하지 영생이 합당하지 않다는 것은 성경이 알려줘요. 이 엉뚱하게 성경가지고 영생 얻으려하는 사람 보면 이거는 보통 잘못된 생각이 아니에요. 크게 잘못된겁니다.
요한복음 1장 47절에 보면 나다나엘 나오는데 나다나엘에게, 이 나다나엘이란 사람이 아주 특수한 사람인데요. 이방인 빼놓고 유대인에게 개인적으로 나다나엘밖에 없어요. 나다나엘이 먼저 찾아온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먼저 이야기를 했죠. 예수님께서 먼저 나다나엘에게 찾아온거에요.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예수님이 계시는데 나다나엘이 자기한테 오는거에요. 오니까 예수님이 반응한거에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는 간사한게없다.”라고 했어요.
이 말은 인간은 모든 인간은 간사함으로 시체가 되었고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 나다나엘의 특수성은요 무엇과 비교할 수 있느냐 하면 열두 제자와 비교가 돼요. 열두 제자들은 주님 십자가 질 때까지 끝까지 간사했어요. 주님께서 나다나엘에게 간사함을 이렇게 들추어버렸어요. 가져가버린거에요.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간사함을 들추어 내니까 들추어내고 남아있는 간사함이 예수님에 의해서 날라가고 남겨진 나다나엘에게 주께서 규정한게 뭐냐? 참 이스라엘.
그게 무슨 뜻이냐하면 “아, 나다나엘 참 괜찮은 사람이네.” 그런 뜻이 아니고 진짜 이스라엘은 예수님 본인이 이스라엘이라는거에요. 하늘에 있는 미끄럼틀이, 하늘에 있는 사다리가 미끄럼틀이 미끄러지듯이 쫙쫙 내려오는 것은 나다나엘쪽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에게 내려오는 겁니다. 요한복음 1장 51절에,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했어요.
그러니까 지금 나다나엘이 열두제자에 포함이 안되어있습니다. 열두 제자에 포함이 안되면서 열두 제자가 궁극적으로 예수님에 의해서 다루어 질 때 그 목표가 되는 것이 나다나엘처럼 되는거에요. 예수님께서 먼저 하나님의 언약이 예수님께 오게되면 예수님이 그다음에 오고난 뒤에 나다나엘 찾아가서 그 간사함을 거두어 내게되면 그다음부터 나다나엘은 참 이스라엘 사람, 그 왕의 백성이 되는거에요. 아직 열두 제자들은 근처도 안갔습니다. 혼자 뒤좇았다고 혼자 잘난체하면서 “제가 모든걸 버리지 않았습니까?”어쩧다 하는데...
마태복음 21장에서 38절에서 포도원 비유할 때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이게바로 애굽같은 이세상의 모든 인간의 본성을 딱 이 한줄로 압축이 되어있어요. “예수님이 상속자니까 죽여버리고 우리가 영생, 천국의 영생의 상속자가 되자.” 이게 인간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노림수를 가지고 시도한거에요. 교회나와서 이거 원했던겁니다. 인간들은... 자기를 안미워해요.
자기를 미워 할 줄을 몰라요. 근데 예수님이 상속자로 오니까 자기는 상속자가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예수님만 죽여버리면 우리는 상속자가 되는줄로 알고 있다 이말입니다. 그러니까 오시는 예수님이 그 인간들을 얼마나 그 거룩한 예수님이, 선한 예수님이 인간들을 얼마나 율법적으로 죄있다고 말씀을 해 놓으니까 인간들이 견딜 수가 없는거에요. 예수님을 안죽이고는 결딜 수가 없는거에요. 이게 인간들입니다.
간사하기 짝이없죠. 무슨 이스라엘이에요. 간사가 덕지덕지 붙어있는데... 무슨 이스라엘입니까? 마태복음 25장 34절에 보면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심판하실때에 양과 염소로 심판할때 34절에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상속하라. 여기서 우리가 끝으로 명심해야 될 것은 천국은 예수님 손에서, 상속자이신 예수님의 손에서 우리에게 상속 주는 것이지 우리가 쟁취하는게 아닙니다. 우리가 애써서 내것 만드는게 아니에요.
주님에 의해서 주님과 우리가 얼마나 큰차이가 있는 지를 로마서 7장에 율법을 가지고 충분히 우리는 그걸 느껴야 돼요. 나를 지켜주는 하나님이 아니었고, 정말 고마운 것은 나를 없애주는 하나님이어서 고마운거에요. 그동안 나를 사랑하는 내가 영생, 나의 영생을 방해했던 거에요. 나의 영생도 있지도 않지만... 영생을 내가 방해했던거에요. 열두 제자들처럼. “내가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주님은 기가 차지요. “이 철딱서니 없는 것” 주님, 주님. 스승님, 스승님 하면서 실은 자기 챙길걸 야무지게 챙기는 자기 사랑에 미쳐 집착하고 미쳐버린 그 인간들.
그 간사함, 주께서 십자가 지고난 뒤에 이번에 열두 제자에게 그 간사함을 거두어줍니다. 그러니까 남아있는 것은 뭐냐? 바로 예수님의 허리에 난 창자국, 구멍. 그 구멍에서 나오는 그 용서가, 죄사함이 거기서부터 상속자를 생산하는 자리가 창자국에 있던 그 구멍의 자리에서 천군천사 숫자만큼이나 하나님의 진짜 백성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죽은자가 죽었던자가 예수님 덕분에 산자가 되어서 살아납니다. 어디에서요? 십자가에서요. 어디에서요? 내가 저주받은 그 자리에서요. 그래서 이 저주 받은 것 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하나님의 왕의 거주자 예루살렘에, 하늘에서 내려오는 예루살렘에 들어갈 자격도 못되는 저희들이었는데, 주님께서 착각에 빠진 우리에게 십자가로 쑤셔서 구멍내어주셔서 우리가 하나님과 맞짱떴구나, 싸웠구나, 하나님을 공격했구나는 것을 깨닫는 자로 만들어서 비로소 우리가 시체며 죽은자며 이제는 하나님의 그 복음이 시체에 작용해서 저희들을 건져주시니 우리는 이제 십자가만 자랑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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