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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스가랴 14:1-5 / 쪼개진 감람산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스가랴

스가랴 14:1-5 / 쪼개진 감람산

정인순 2024. 5. 26. 13:32

음성 동영상 Youtube

 

쪼개진 감람산

 

이근호
2024년 4월 10일             

 

본문 말씀: 스가랴 14:1-5

(14:1)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 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너의 중에서 나누이리라

(14:2) 내가 열국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니 성읍이 함락되며 가옥이 약탈되며 부녀가 욕을 보며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사로잡혀 가려니와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쳐지지 아니하리라

(14:3)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나가사 그 열국을 치시되 이왕 전쟁 날에 싸운 것 같이 하시리라

(14:4)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 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 산은 그 한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

(14:5) 그 산 골짜기는 아셀까지 미칠지라 너희가 그의 산 골짜기로 도망하되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 같이 하리라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가 주와 함께 하리라

인간은 자연의 안정성 위에 자기 세계를 건설해 왔습니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가도 대자연만은 굳건하게 한결같이 유지될 것이라고 믿고 삽니다. 이 자연의 안정성 위에서 자기 마음의 안정성을 구축해 왔습니다. 이로서 인간들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일어나는 특이한 일들에 관심 두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일은 대자연이 결코 안정성인 것이 아니라 위험한 세계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애굽나라에게 있었던 10재앙이 바로 그런 예가 될 수가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아담은 근본된 토지 위에서 살게 되었는데 이 근본된 토지가 저주받은 곳입니다.

비단 자연만 불안정한 게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도 탈이 났습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볼 줄 모르고 항시 외부 자연세계를 보고 살면서 잘 처신하면 된다고 여깁니다. 비가 올 때 우산 쓰면 되지 굳이 자기 마음을 반성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즉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 마음이미 더럽혀졌음을 알아야 합니다.

스스로 깨끗하게 순수하다가 자부하지만 막상 말씀 앞에서 서면 추하고 더러운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비로소 발견되는 더러움을 모르면 말씀에 의해서 깨끗함의 혜택도 없게 됩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전 인류를 대표해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내어서 형성된 역사입니다.

그 중에서 예루살렘이라는 도성은 하나님의 뜻이 뽀족하게 응집된 곳입니다. 마지막 날에 그곳에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시겠답니다. 그리고 그 예루살렘 도성이 파괴되도록 조치하시겠답니다. 그렇게 되면 ‘예루살렘’이라는 공간으로 표현된 영원한 하나님의 세계는 마지막 날에는 달리 나타납니다.

곧 ‘하늘의 예루살렘’으로 격상됩니다. 예수님의 지상의 마지막 생애를 같이 하게 된 제자들은 여전히 이 지상의 삶에 미련을 갖고 있으면서 다음과 같이 자기네들 궁금한 것을 예수님에게 질의합니다.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행 1:6)

하지만 예수님은 다른 답변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제자들과 지상 생활을 끝내시고 홀로 하늘로 치겨 올라가시는 일입니다. 그곳이 바로 ‘감람산’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죽어 피 흘리시고 부활하시고서는 계속 이 세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감람산을 통해서 하늘의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예루살렘은 ‘모형의 도시’가 되는 겁니다. 예루살렘을 거쳐서 감람산에 와서 하늘로 들어가시는 주님의 경로는 이 세상이 원래부터 멸망해야 될 세상인 점을 분명히 하시는 경로입니다. ‘지진’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겁니다. 인간이 감히 손댈 수 없는 대자연의 변동입니다.

왜 이런 변동이 일어나는 겁니까? 그것은 대자연의 근원을 들추어내기 위함입니다.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계 14:7-8)

대자연의 안정성에 기대를 살던 모든 인류의 유산과 문명은 지진과 더불어 그 바닥을 드러냅니다. 애초부터 인간의 본 모습은 ‘죽음’입니다. 살다보면 죽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죽음’입니다. 출애굽 할 때에 애굽에서 신나게 나왔던 이스라엘은 얼마 못가서 죽음으로 막힙니다. 앞에도 죽음이요 뒤에도 죽음입니다.

바로 이 지경이 인간의 참 형편입니다. 죽음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몸으로 그동안 지내온 겁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도 도리어 죽음에 갇혀 있음을 더 분명해질 뿐입니다. 이인간의 죽음에 하나님도 같이 하십니다. 대자연에 지진이 일어나듯이 인간 내부 마음에서 지진이 일어나야 합니다.

왜 감람산이 마지막 때에 갈라져야 할까요? 그것이 하나님 심판에 의해 멸망될 요소들이 그 산에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감람산을 열왕기하 23:13에서는 ‘멸망산’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또 예루살렘 앞 멸망 산 우편에 세운 산당을 더럽게 하였으니 이는 옛적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시돈 사람의 가증한 아스다롯과 모압 사람의 가증한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가증한 밀곰을 위하여 세웠던 것이며”(왕하 23:13)

이는 우상숭배가 인간의 근원적 마음에서 필연적으로 나오게 되는 현상이라는 겁니다.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고 심판의 대상일 수밖에 없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여전히 낭만적으로 좋게 여기는 태도 때문입니다. 자기가 ‘문제 있는 존재’라는 점을 알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해서 자신의 문제점을 알까요?

그것은 하나님쪽에서 일을 벌리시기 때문입니다. 늙어서도 여전히 자식이 전혀 없는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하늘의 뭇별처럼 많은 백성이 나올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당연히 아브람의 솜씨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일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특이한 제사로 보여줍니다.

그것은 제물을 반씩 쪼개고 서로 마주 보듯이 배열하므로서 그 한 가운데 길에 주목토록 합니다. 그리고 밤에 그 한 가운데를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의 불로서 지나가십니다. 이는 인간의 마음 내부는 하나님 마음에 의해서 심판받아 마땅한 요소가 있음을 말해주는 겁니다. 안정적인 자연질서에 마음을 두고 형성한 인간의 마음은 자신이 쪼개져야 함을 인정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지실 때, 갑자기 그 단단한 땅에 큰 지진이 일어납니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마 27:51-53)

감람산에서 예수님을 하늘에 빼앗긴 11제자들과 많은 제자들은 감람산에서 돌아서서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그때 하늘로 올라가셨던 그 예수님의 마음이 제자들의 각 마음에서 찾아들었는데 불의 모습으로 찾아들었습니다. 곧 심판의 모습이요 ‘마음의 지진’입니다. 이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최종적으로 지니지 말라는 뜻입니다.

구원, 곧 자유란 자기에게 자기 것은 아무 것도 중요한 것이 없이 된 상태를 말합니다. 오로지 예수의 십자가 지신 그 마음만이 꽂혀 있는 자가 곧 하늘의 예루살렘의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마음 안에 예루살렘과 감람산 모두가 다 들어있어 그 사이를 성령께서 왕래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9강-스가랴 14장 1-5절(쪼개진 감람산) 240410 - 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스가랴 14장 1절에서 5절까지입니다.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 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너의 중에서 나누이리라, 내가 열국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니 성읍이 함락되며 가옥이 약탈되며 부녀가 욕을 보며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사로잡혀 가려니와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쳐지지 아니하리라,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나가사 그 열국을 치시되 이왕 전쟁 날에 싸운 것 같이 하시리라,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산은 그 한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 그 산 골짜기는 아셀까지 미칠찌라 너희가 그의 산 골짜기로 도망하되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 같이 하리라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가 주와 함께하리라” 아멘.

전쟁을 하는데 그 전쟁에서 하나님 편이 져요. 집니다. 패배하죠. 이것은 애굽과의, 히브리인들, 뭐 히브리인들이 전쟁을 한 건 아니지만, 애굽에 살던 히브리인들이 애굽과의 전쟁에서 승리해서 빠져나온 게 아니고 일방적으로 그들은 혜택 입고 빠져나왔는데, 그들이 가는 그 탈출구가 빠져나올 때 목적이 약속의 땅으로 간다고 했거든요. 그럼 약속의 땅은 어디 있느냐?

약속의 땅이 어디 있느냐는 성립이 안 돼요. 왜냐하면 약속의 땅은 인간으로서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약속의 땅은 인간에게 막혀있어요. 인간이 스스로 알아서 네비게이션 해서 갈 수 없다 이 말입니다. 애굽에서 나왔던 히브리인들이 결국 약속의 땅이라 하는 것은 그들이 원하는 땅과 별개다 하는 것을 깨닫는 그 순간은 얼마 가지 않아서 들통났지요. 그게 바로 홍해 바다에 도착했습니다.

홍해 바다에서 꼼짝 마라. 그들은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뒤에는 애굽 군사들이 따라오고, 따라서 그 현장에 있던 어느 누구도 탈출이라 하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 우리가 자유를 얻는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우리가 헛된 꿈을 꿨구나. 하나님 믿으면 우리의 소망이 이루어 질 줄 알았죠. 압제에서 벗어나서 마음껏 해방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 꿈이 얼마 안 가서 좌절되면서 그들은 앞으로 가도 죽고 뒤로 가도 죽고, 비로소 그들은 죽음 속에서 그들이 깨달은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은 죽음 앞에서 비로소 자기가 최종적인 진짜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죽는 게 아니고 인간은 처음부터 죽어있었던 거죠. 살다 보니 죽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죽어있었는데 그 죽어있는 그것을 나라고 왜 사전에 미리 이야기를 못 했느냐. 어린 양이 죽어서 피를 흘려서 피를 바를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산다는 생각을 했지 자신이 어린 양 꼴이 된다는 것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자, 그러면 그 순간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해방이라는 것, 탈출이라는 것, 자유라는 것, 그런 것을 자기가 죽음을, 죽음이 나고 내가 죽음이라는 사실을 전제하지 않으면 그런 꿈들이 다 헛꿈이 되죠. 구원받는다? 이게 헛된 꿈 아닙니까? ‘행여나 구원되겠지’ 해서 교회 나오잖아요. 근데 그거는 자기 자신을 모르는 상태에서는 그게 개꿈이 되는 겁니다. 죽은 인간에게 소망이나 희망이라는 단어는 적절치 않습니다.

죽어있는 인간은 가장 적합한 단어는 그냥 시체에요. 그냥 죽는 거에요. 어린 양도 죽었고, 홍해 바다는 넘실대고 있고, 중간에 따라오면서, 애굽이 따라오면서 이스라엘을 죽이고자 하고, 사방을 둘러봐도 어디 봐도 오직 죽음만이 탈출한 히브리인들의 가장 적합한 환경은 그냥 죽음이었습니다. 그들이 빠져나왔는데, 얼마 가지도 못하고 죽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그들은 애굽에서는 잠시 빠져나왔는데 죽음에서는 영원히 빠져나올 수가 없었던 겁니다.

죽음이 그들 자신, 자기 자체였던 거에요. 그래서 거기서 그들이 정리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알려 준 것은 진짜 우리 목숨이라는 거에요. 우리는 죽어 마땅하다는 죽음이 우리한테 딱 맞다는 그 사실을 살아계신 하나님에게 그거 알려 주려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기 백성에게 찾아온 거에요. 헛된 희망, 구원, 자유, 해방? 그런 것 기대하지 말라는 거에요.

그래서 모세와 더불어서 나왔던 그 60만 되는, 60만 더 되죠.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양쪽의 죽음에 갇혀서 다 죽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그 죽음이 사람들은 생각 못 했는데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 해놓은 자유였어요. 그 죽음이 자유였습니다. 자, 자유란 뭐냐? 자기에게 아무것도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상태. 하나님이 중요하지 나는 중요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그것이 바로 구원이고 탈출이고 그게 해방이고 자유였던 거에요.

하나님이 모세에게 지팡이를 가지고 홍해 바다에 잠궈라 할 때, 홍해 바다는 두 조각 났습니다. 두 조각 나서, 이스라엘, 히브리인들은 그 애굽에서 도망칠 수가 있었던거에요. 탈출로가 바다 속에서 죽음 속에서 비로소 탈출로가 마련되어 있었던 겁니다.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감람산이 두 조각 나고, 그 두 조각 나는데 “너희가 산골짜기로 도망하되”, 두 조각 났으니까 골짜기가 생겼을 거잖아요. 새로. 지금껏, 예전에 없던 골짜기.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 같이 하리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도망하기, 자기 남은 백성을 도망치기 위해서 감람산을 두 조각 내신 겁니다. 그 두 조각 낼 때 거기에 누가 이걸 두 조각 냈는가? 홍해 바다가 두 조각 난 것은 모세의 지팡이를 대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개입으로 그렇게 되었다면, 이 감람산이 왜 두 조각 났느냐?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날에 여호와께서 감람산에 서셨기 때문에 그래요.

4절에,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 그렇게 되어있어요. 감람산이 서서 감람산이 두 조각 나서 그 틈 사이로 예루살렘에 있던 남은 백성이 틈 사이로 빨리 도망칠 수 있다는 이 말은, 여기서 오늘 이야기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먼저 두 가지 요소가 필수적으로 배정 되어야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첫째는 뭐냐? 예루살렘이라는 곳. 두 번째, 멀쩡하게 예루살렘을 마치 튼튼하게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감람산. 이 두 산이 먼저 하나님이 일을 벌이는 재료로서 두 개가 먼저 설정이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일이 터지고 난 뒤에 그 일이 터지고 난 그 결과에 있어서 감람산이 두 개를 쪼개지면서 예루살렘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예루살렘에 벌어진 일이 그 의미, 취지가 뭐냐가 비로소 밝혀진다는 겁니다.

예루살렘에 무슨 일이 있는가? 예루살렘에서 적들이 와서 예루살렘 주민의 반을 죽이고 약탈 되고 부녀가 욕을 보고 백성들 절망에 사로잡혀 가고, 남은 백성들이 약간은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곳은, 예루살렘은 더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살만한 도성이 못 된다는 거죠. 살 수 없어요. 출애굽 할 때 애굽이 난리 쳤잖아요. 이 말은 뭐냐?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애굽 나라에 10가지 재앙을 보내고, 이건 마지막 재앙이 모든 애굽의 집안의 맏이는 다 죽게 되어있는 그런 난리를 치게 된 겁니다.

이것은 히브리인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느냐 하면, ‘너희들이 살 곳은 이 애굽이 아니다’라는 것을 분명하게 해주시는 거에요. 애굽에서 430년 동안이나 살았던 이 히브리인들에게, 야곱의 자손들에게 애굽이 살만한 곳이 아니라면, 그러면 어디 살란 말입니까? 어디 살아요? 살 곳이 없잖아요. 그것을 히브리인들이 미리 예상도 못 했어요.

하나님께서는 감람산 쪼개지기 전에 예루살렘부터 먼저 쪼개버립니다. 더이상 살 수 없는 곳. 그리고 감람산이 이렇게 쪼개졌는데 쪼개진 그 현상을 5절에 보면,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여기 5절에,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이라고, 지진. 지진을 일으켰다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지진을 일으켰다는 거에요.

지진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손 쓸 수가 없잖아요. 대만에 지진이 대만에 뭐 지진 일어나지 마라고 고사 지낸다고 지진이 안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자연 세계에 지진이 일어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너희들이 마지막으로 의지하고 기대고 살기 위해서 버텨야 될 이 세상이 상당히 위험한 세상이라는 것. 살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14장 25절에 보면,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이렇게 되어있어요.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셨습니다. 상당히 사람들보고 물에 한번 걸어보라고 하죠. 사람들 물에 빠지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물 위를 걸으셨습니다. 이거는 뭘 뜻하느냐 하면은, 인간들에게는 인간들에게 있어서 이 자연환경이라는, 물부터 자연환경이라는 게 굉장히 위험한 것이라는 거에요. 세상 자연환경이 이만큼 위험하다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굉장히 위험하고 문제성이 있다는 겁니다. 살 가치가 없다는 거에요.

또 죽음에 대한 예고를 자연환경을 통해서 해 주시는데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오는 식으로 “너희들은 물 위를 걸을 수 있어?” 이렇게 묻는 거에요. “안되지?” 그만큼 너희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너희들은 문제가 크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거에요. 물론 베드로도 한번 시도 했지만, 예수님 쳐다볼 때는 걸어왔는데 갑자기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지?” 하고 자기를 쳐다보는 순간 물에 빠졌습니다.

자연환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 물 위를 걸어오시고, 인간이 생각하는 자연환경이 안정된 게 아니라 안정에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궁극적으로 주님께서 인간 마음속까지 다가가시는 방법이 그 방법이에요. 그렇게 해서 가장 위험한 것이 인간 마음속에 들어있다는 겁니다. 당연히 마귀죠. 마귀가 들어있고 죄가 들어있는 거에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모집하는 데 있어서, 채택하는데 있어서에 제일 궁극적인 조치는 뭐냐?

그 자신의 인간의 마음을 그 인간 속에서 뺏아버리는 거에요. 없애버리는 겁니다. 마음을 제거해 버리는 거에요. 그 자기라는 이름의 마음을 없애버리는 겁니다. 없애서 ‘나는 내꺼다’라는 것에서 내 뜻과 몸과 마음, 정성, 신체 전체가 예수님 것으로 전환되어야 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통보하고 계시는 겁니다. 인간의 마음이 바뀌어져야 돼요. 바뀌지 않으면 이 세상이 무너질 때 인간은 굉장히 곤란한 입장에 처합니다.

왜? 마음 씀씀이가 모두 세상에 다 두고 살았기 때문에요.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게 전부잖아요. 눈에 보이는 게 전부라면, 눈에 보이는 것이 만약에 파토가 난다. 그러면 인간은 어디에 의지하겠습니까?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번에 대만의 지진이잖아요. 107층 건물이 무너지지 않았다. 그러면 이거는 진도 7.2니까 안 무너진거에요. 만약에 진도 11.5되어버리면, 이거는 돌 위에 돌이 남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총선이고 대선이고 그거는 자연환경이 안정된다는 보장하에 치뤘던 거죠. 그러나 자연환경 자체가 무너지게 되면 투표하는 것도 의미가 없어요. 인간이 세상이 위험하고 세상이 위험한 원인이 내 마음이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다는 그런 관계로서 연결이 되어야 돼요. 연결이. 그 모든 것이 다 들추어 내는 실상이 다 드러나는 그 날이 바로 스가랴 14장 1절에 나옵니다.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니.”

여호와의 날이, 인간의 날이라 하는 것은 죽음이 인간의 날이잖아요. 죽음이 인간이 유일하게 자기와 최종적으로 진짜 자기다운 모습이 드러나는 것은 인간이 죽는 순간입니다. 여호와의 날은 뭐냐? 진짜 여호와에게 자기 본뜻이 드러나는 그 날이 여호와의 날이에요. 그동안 인간세계에 많이 봐준거에요. 봐주고 있다가 이제는 더는 못 봐준다. 내가 하나님의 하나님 다움을 여기다가 그냥 된통으로, 제대로 이 세상을 보여주겠다. 그래서 나온 게 뭐냐? 지진이에요.

자, 이 지진이 뭐냐 하는거에요. 요한계시록 14장 7절에서 8절 보면, 그 지진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7절부터 보면,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라고 되어있어요. 그러니깐 이게 여호와의 날이 어떤 날이냐 하면, 모든 것이 바탕이 다 드러나는 날, 근원이 들추어지는 날. 해와 달과 별, 이런 것들이 싸그리 다 없어지고 그 바닥에 뭐가 있는가 드러나는 날.

8절에 보면,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다 이런게 무너져버리는 거에요. 모든 것이 무너져버리고 바닥이 드러나는 그 날이 여호와의 날이에요. 이 땅에는 심판이 적절하고 심판 외에는 심판에 감행되는 심판의 자국, 심판의 흔적, 심판했다는 심판의 현상 그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으면 안 돼요. 그날이 여호와의 날입니다.

그러니까 그 해와 달과 물, 별들도 다 바닥에 난다면 이거는 결국 뭐냐 하면 인간의 바닥, 인간의 자아의 바닥, 나는 누구냐 하는 그 바닥도 아울러서 같이 다 드러나는 그 날이 여호와의 날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날에 위에서 여호와께서 직접 이 땅에 오시는데 우리 주님께서 오셨다 할 때 사람들은 그 예수님의 신기한 능력에, 신기한 능력 자체가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잖아요. 물 위를 걷는 것, 이런 것. 주님의 능력을 오해 해가지고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신 줄 알았어요. 우리를 구원하실려고.

우리를 심판하러 오신 분인 줄 이해를 못하고 구원하러 오신 분인줄 알았어요. “난 이제 됐어.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거야.” 열두 제자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근데 예수님이 하신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니까, 열두 제자 그들도 불안하기 짝이 없는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예루살렘 보고 있으니까, 묻는 겁니다. “예수님, 마지막 때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질문을 왜 합니까? 본인은 안 죽고 본인은 살아야 되겠다는 뜻이거든요.

인간 자체가 죽음인데, 그건 모르고 어떻게 하면 살아있는 내가 더 살 수 있는가 그걸 궁리하면서, 예수님에게 어떤 정보라도 캐낼까 싶어서 그걸 묻는겁니다. 사도행전 1장 6절에 보면,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이스라엘 회복 안 됩니다. 안 되는데 그들은 이스라엘 회복에 대해서 언급을 한 거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을 어디에 보내느냐 하면, “여호와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 회복할 때 그때가 여호와 때인데 지금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회복된다 했는데 아직도 아무 소식 없는데 주님은 아시잖아요. 회복될 때가 언제입니까?” 이렇게 물으니까 주께서 제자들을 어디로 보내느냐 하면 감람산으로 가라 하셨어요. 감람산으로.

그게 사도행전 1장 12절에 나옵니다.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와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그들로 하여금 감람산에서 감람산에 갔다고 오게 만들었어요. 감람산에서 무슨 일이 있는가? 감람산에서 9절에 보면,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 보고 있는데” 이렇게 되어있어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있을 때 제자들과 같이 있었습니다. 이야기했습니다. 제자들은 언제 이 이스라엘이 회복됩니까 하고 자기 궁금한 것, 자기 살 길을 물었거든요. 근데 예수님께서는 둘이 이야기하시면서 감람산으로 갔어요. 감람산에 가가지고 제자들은 계속 궁금한거에요. 감람산, 그런데 답변을 해야 될 그분이 로켓 올라가는 것처럼 이야기 안 해주시고 그냥 하늘로 올라가버린 거에요. 이게 답이에요. 땅은 끝났어. 땅은. 땅은 끝난 거에요.

“니가 아직도 땅에 뭔가 희한한 현상이 있기를 기대한다면, 너는 질문 자체가 잘못된 거”에요. 감람산에서 하늘로 올라갔어요. 그러니 제자들이 갑자기 자기한테 모든 궁금한 것을 답변해 줄 분을 사라진 겁니다. 내가 누군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전혀 어떤 것 하나 얻어 챙기질 못하고 그냥 자기 스승님을 놓친거에요. 그래서 계속 쳐다 봤지요. 계속 올라가니까 점점 더 올라가서 나중에 구름이 중간에 있어서 보이지 않게 되었어요.

제가 아까 했잖아요 이 자연환경은 위험하다고요. 우리가 이 자연 세계, 이것 안전빵이다. 자연 세계는 이거는 뭐 틀림없이 내일 되면 해 뜨고, 달 뜨고, 괜찮아. 하여튼 그거. 그것이 예수님의 승천 한방으로 다 끝났어요. 뭔가 인간은 이 땅, 이 눈에 보이는 세계에 갇혀있는 느낌을 받은 거에요. 주님은 거기서 탈출한 느낌 들고. “뭐야 우리끼리 이게 뭐야?” 나중에 이 세상 작살 나면 어쩌려고요. 탈출할 사람 아무도 없는데요. 주님 혼자 탈출했거든요. 그래 가지고 절망적으로 같은 곳만 계속 쳐다보고 있으니까, 천사 둘이 와서 책망을 합니다.

뭐냐 하면 “너희들은 왜 너희 살 궁리만 하느냐?” 이 말이죠. 왜? 너희 살 궁리하지 말고 주님의 일이 너희에게 제공될 것이다. 주님의 일은 안 끝났다. 이 말이죠. 주님의 일은. 주님하고 예수님하고 육신하고 붙어 있는 게 주의 일이 아니고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거에요. 너희들은 옆에 사람 붙어 있어야 안심하는데 그게 예수님의 그다음 방식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다음 방식은 위에서 자기 백성을 조종하는 그 방식이 주어진다는 거에요.

“다시 예루살렘에 가. 마가의 엄마 다락방에 가. 거기 가서 모여서 약속 믿고 기도해. 그냥 기도하지 말고 약속 믿고.” 이 말은 뭐냐 하면, 제자들로 하여금 지금 뭐가 안되느냐 하면, 제자들이 자기 마음속에 자기가 여전히 남아있어요. 여전히 남아있으니까 자기 자신, 남아있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든 자기가 계속 살려보겠다는 그런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을 그동안 이용했던 겁니다.

근데 예수님은 쑥 빠져나가서 가버렸거든요. 예수님은 그 질문에 답변할 이유 없어요. 자기를 위한 질문인데 그걸 왜 답변합니까? 그럼 자기를 위한 질문을 해선 안되고 뭐로 바뀌어야 되는가? ‘주님이 나에게 무슨 일을 시키느냐’, 그게 남아있죠. 주님이 나에게 무슨 일을 시키는가. 주님이 나에게 무슨 일을 시키냐는 것은 예수님에게 나를 없애고 내가 있는 자리를 없애고 주님 자신의 마음으로 그걸 바꿔치기, 채워 넣는 거에요. 채워 넣는데 채워 넣는 그 예수님의 마음이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서 쭉 지금까지 제자들과 함께 있으면서 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 하신 일의 절정이 뭐냐? 예루살렘에서 있었어요.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은 적들에게 패배했습니다. 졌어요. 적이 이겼습니다. 예수님 졌습니다. 거기서 예수님 피를 흘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제자들도 “아, 끝났다, 끝났다. 총선 끝났다. 가자, 가자. 졌어. 다 끝났어. 고기 잡으러 가자.” 전부 가버린거에요. 그런데 제가 아까 출애굽 할 때 홍해 앞에서 이야기했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 자체가 쪼개져야 돼요.

여기서 오늘 본문과 더불어서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될 옛날 아브라함 때 있었던 일이 있습니다. 창세기 15장에 뜬금없이 15장에 보면 뜬금없이 하나님께서 하늘에 나와가지고 바깥에 내보냅니다. 해가지고 하늘을 쳐다보게 해요. 밤이에요. 보니까 하늘에 별들이 총총 뭇별들이 많아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희 백성이 저 별처럼 많을 것이다” 했어요. 그런데 지금 아브라함은 아내도 나이 많고 자기도 나이 많아서 자식이 하나도 없어요.

자식도 하나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약속을 일방적으로 약속을 합니다. “저 하늘의 별이 보이나?” “보입니다.” “별 많지?” “별 많습니다.” “셀 수가 있나?” “못 세겠습니다.” “저 셀 수 없는 그 뭇별,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는가 보라. 너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라고 했어요. 지금 여기서 아브라함은 우리하고 똑같은 인간이라 또 오해하고 있어요. 내 자손을, 내 자손이 뭇별처럼 많다고 오해를 한 겁니다. 내 자손이. 근데 그때가 누구냐 하면, 아브람이에요. 아브라함이 아니고 아브람 때라고요.
여전히 자기 자신이 자기 한가운데 턱 하니 박혀있어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니 이게 무슨 말인지를 납득을 할 수가 없는거에요. 쉽게 말해서 인간이 자기 마음이 감람산처럼 쪼개져야 돼요. 여러분 감람산이 쪼개져야 될 이유, 예루살렘은 멀쩡한데 감람산은, 예루살렘도 뭐 박살 났지만, 파괴되었지만, 예루살렘은 갈라지진 않아요. 아주 흔적 없이 갈라지진 않거든요. 감람산이 쪼개져야 될 이유가 솔로몬 때에 두 개의 중요한 도시가 나와요. 하나는 예루살렘이고 짝을 이루어서 감람산이 나옵니다.

먼저 예루살렘부터 보면, 열왕기상 11장 36절에, “그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에게 한 등불이 항상 내 앞에 있게 하리라”라고 되어있어요. 등불. 여기 등불이 나오는 예루살렘이라는 여기는 다윗, 솔로몬 아버지의 등불이 솔로몬 이후에도 지켜보고 있다는 뜻이에요. 등불이라 하는 것은 빛을 비추고 있다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럼 열왕기상 7절은 뭐냐? 4절부터 쭉 보게 되면, 솔로몬이 나이가 많아가지고, 왕비들이 많아가지고, 그 왕비들 단도리한다고 이렇게 되어있어요. “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으니” 되어있어요. 솔로몬 마음이 변질이 일어났어요. 온전치 못한 마음이 되었어요. 온전했던 마음이 아니고 온전하지 못한 마음이 되었을 때의 결과가 뭐냐?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좇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좇음이라,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 부친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좇음 같이 좇지 아니하고,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 산에 산당” 예루살렘 앞 산에, 예루살렘 앞 산이 뭐냐? 감람산입니다. 감람산에 바로 산당을 지었고 암몬 족속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 거기다 우상을 섬긴 거에요. 그 우상 섬김에 대해서 열왕기하 23장 13절에서는 이것을 감람산이라 하지 않고 별명을 지어놨습니다. 멸망산이라고 되어있어요.

열왕기하 23장 13절에 보면, “또 예루살렘 앞 멸망산 우편에 세운 산당을 더럽게 하였으니 이는 옛적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시돈 사람의 가증한 아스다롯과 모압 사람의 가증한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가증한 밀곰을 위하여 세웠던 것이며”라고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여호와의 날에 여호와께서 메시아께서 오셔서 서자 마자 쪼개진, 지진이 일어나서 쪼개진 감람산은 바로 우상, 우상의 산이기 때문에 쪼개버린거에요. 근데 그 우상은 인간의 힘으로 막혀서 도망칠 수가 없는거에요.

예루살렘의 남은 백성이 막혀서, 만약에 안 쪼개지게 되면. 그러면 쪼개지면 어떻게 되는가? 홍해 바다 쪼개지듯 쪼개지면 어떻게 되는가? 그 쪼개지는 그 모습이 오늘 본문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오늘 본문 14장에 보면, 도망하는, 그 산이 동, 서로 쪼개지고 절반은 북, 절반은 남, 쪼개지고 아셀까지 미칠지니. 아셀까지 미친다는게 뭐냐하면 바로 여기에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 같이 하리라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라고 되어있거든요.

남북으로 쪼개져서 도망치는 이 산은 바로 여호사밧 때에 이 쪼개진 오늘 본문의 스가랴에 나오는 이 대목은 이방 민족이 와서 예루살렘, 이스라엘 백성들을 덮칠 때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하나님께서 개입을 했다는 증거. 하나님께서 개입을 했다는 증거는 뭐냐? 애굽 나라에 히브리에게 기도에 응답해서 모세를 통해서 개입했다는 것은 뭐냐? 그것은 바로 탈출구를 마련해 주는거에요. 이 땅에 승리를 해버리면요, 우리의 자아는 자기가 괜찮은 자아라고 여기게 되는 겁니다.

좀 어렵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더렵혀져야 돼요. 예수님 말씀으로 더럽히지 않고 세상의 지식으로 더럽혀져 버리면 나중에 깨끗함을 얻지 못합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더럽혀지는 자만이 주의 말씀으로 깨끗함을 얻는 거에요.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 예루살렘에서 쪼개진 감람산 그 도중으로 골짜기로 아셀까지 도망치면서 깨끗해지는 거에요.

그러면 그 깨끗해지려면 예루살렘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예수님께서 미리 예루살렘에 가서 거기서 누가 봐도 실패했다는 증거로서 피를 흘렸어요. 그 피. 그 피가 흘리고 십자가 지시고 사도행전 1장 10절에서, 예수님께서 감람산에가서 로켓 올라가듯이 하늘로 올라가버리거든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성경을 좀 아는 사람은 대번 이런 괜찮은 결론을 내릴 수 있어요. “아, 예루살렘이 모형이구나.”

예루살렘은 모형 도시고, 모형 깨뜨리고 진짜배기 예루살렘은 예수님이 다녀갔던 경로를 따라 올라가면 예루살렘이 지상에 있는 게 아니고 지진으로 완전히 박살 난 지상에 있는 게 아니고, 예루살렘이 어디 있느냐? 하늘에 있는구나?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열한 제자를 이 지상에서 어떻게 뭐 언제 옵니까? 가 아니라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보내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보다 먼저 예루살렘을 경유하고 감람산 경유해서 하늘로 올라가신 거에요.

그 예수님의 경로를 구약 스가랴 14장 식으로 이렇게 하는 겁니다. “남은 자는 구원 받으리라.” “어떻게?” “니도 도망치면 되잖아.” “어디에서?” “이 세상에서.” 문제는 세상에서 도망치지 않으려는 특징은 뭐냐? 말씀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얼마나 추접고 더러운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한테 자기 마음은 괜찮다고 여기고 기대 잔뜩하고 이 땅에서 남 보란 듯이 성공해서 남에게 “나 봐 괜찮잖아. 이정도야.” 그것 자랑질 하려고 아직도 이 세상에 기대를 걸기 때문에 말씀이 자기 자신을 직접 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도망칠 줄을 몰라서 문제에요. “그럼 도망치면 되겠네” 도망치는 방법이 없는데요. 출애굽 때 막혀 있는 데 어디로 도망칩니까? “그러면 어쩌란 말입니까?” 도망쳐야 된다. 근데 도망칠 방법은 다 막혀있다.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겁니다. 주의 말씀은 우리에게 마음속에 감람산 찢어지듯이 세상을 좋아하는 우상을 섬길 때 세상 좋아하듯이, 그 세상 산당이 있고 세상에 대한 유혹과 욕망과 세상에 대한 쟁취가 가득한 이 감람산을 멸망산으로 간주해서 찢어지듯이 우리의 마음을 두 조각 찢어내고 거기에 주께서 지나가야돼요.

그 이야기가 바로 창세기 15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내 백성이 뭇별보다 많다 했을 때에, 아브라함은 어리둥절했지요. 그리고 난 뒤에 15장 9절에 보면 좀 길더라도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찌니라,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여기 쪼개는게 나와요. 중간을 쪼개요. 딱 쪼개고 그다음, 쪼개놓고 던지는게 마주보게 해요. 쪼개놓고 마주본다는 것은, 어디를 주목하라는 말입니까? 어디를 유심히 보라는 말입니까?

그 제물과 제물 사이에 길이 나와 있다는 것에 주목하라는 겁니다. 그 길이 아브라함이 깊이 잠들 때에 그걸 누가 통과하느냐? 하나님이 횃불이 되어서, 쪼개놓은 제물 사이를 통과합니다. 불로서 통과하지요. 심판의 불이죠. 그리고 난 뒤에 17장에 가면, 아브라함 자손들은 할례를 행해야 돼요. 뭇별보다 많은 자손. 오케이. 다 좋은데, 조건이 있어요. 그들의 마음에 할례, 그들의 마음이 쪼개져야 되고 찢어져야 돼요. 마음의 표시를 육신으로 할 때는 인간의 육에서 육으로 자손이 자손을 낳게 하는 게 있어요. 생식기죠. 생식기 끝을 잘라냄으로써 못 쓰는 생식기, 무능한 생식기, 하늘나라 올라갈 수 있는 번식, 생식기가 되지 못하는 자들의 뭇별 집단.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브라함 자손들입니다.

사람이 할 수 없어요. 육신의 할례 했다고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그럼 뭐냐? 먼저 주님께서 자기 자신을 이 땅에 와서 자기 십자가에서 자기 자신을 보여줍니다. 그게 예수님의 자기 죽음이에요. 하나님이 가장 하나님다운 모습은 하나님이 죽는 모습이 하나님이 가장 하나님다운 모습이다. 이 지상에선 그래요. 지상에서 하나님다운 모습은 하나님이 죽는 거에요. 죽지 않는 하나님은 가짜입니다. 모조리 가짜입니다. 그러면 그 예수님이 죽었다고 해서 그게 우리 마음이 어떻게 찢어지는가?

마태복음 27장 51절에 보니까,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그 죽음과 아무 상관 없어 보이는 무덤에 있는 성도들이 일어나는, 성도들이 부활 되는 것, 이것과 관련성이 있다는 거에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예수님 일이 마감되는 것이 아니고, “기다려봐. 이미 목숨이 끊어진 성도들아, 기다려봐. 내 십자가로 죽고 난 뒤에 너희들이 내 마음으로 바뀌어서 내가 부활 되는 것처럼 너희도 부활 되는 결과를 내가 보여줄게” 그게 지속되는 예수님의 일이에요. 사도행전의 제자들처럼, “언제 오십니까?” 자꾸 걱정하지 말고, 내가 하늘로 올라가게 되면, 하늘로 올라가서 그다음 일을 하는 거에요.

하늘로 올라가서 더이상 인간이 예수님을 붙들 수 있는 방법은 없어요. 왜? 하늘로 올라갔으니까. 그다음부터는 하늘에서 인간들에게 일방적으로 찾아오는 방식이 있어요. 그게 뭐냐? 그들이 성령을 받으니까 그 성령이 어디를 겨냥하느냐? 바로 인간들의 욕심으로 가득 찬 우상숭배 감람산 같은 더러운 우상의 산당이 가득한 감람산이 쪼개지듯이 성도가 될 사람들의 마음을 둘로 쪼개버립니다. 둘로 쪼개버리면, 그들에 있어서 내꺼, 내꺼, 내꺼가 둘로 쪼개져요.

내꺼가 빵꾸가 난거에요. 불로 지진거에요. 불로 심판을 받은 거에요. 그래서 오순절 성령, 불로서 와요. 불로 와서 그 마음을 지져버리는 거에요. “이제 니 마음은 썩었다. 알겠지?” 자유라는 것은 자기에게 아무것도 중요한 것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에요. 예수님의 영은 예수님의 마음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내 속에 있을 때, 이제부터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이 아니고, 내 마음은 불로 지져버려요. 주님의 마음이, 그 주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뭘 주느냐?

우리에게 스가랴 이 말씀을 줍니다. 우리 마음속에, 성도 마음속에 말씀을 줘버려요. 말씀을 줘버리면, 스가랴 말씀처럼 예루살렘 있고 감람산 있고 두 개가 같이 우리 속에 들어오죠. 들어오게 되면, “나는 이제 뭐 예루살렘인데 나는 뭐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 이렇게 되는 게 아니고 또, 구원받은 내 마음이 또 이게 소중한 것처럼 쥐고 있으면 이것도 우상숭배거든요. 그게 아니고, 말씀이 두 개의 곳, 예루살렘과 감람산에 와 버리면, 예루살렘에서 감람산 쪽에서 탈출시킨, 하늘의 예루살렘으로 탈출시킨 주님의 말씀의 활동이 우리 마음속에 현재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을 임하면서, 우리가 말씀이 스가랴 14장이 되면서 그것이 지금 현재화되고 현실화되는 거에요.

쉽게 말하면, 오늘 투표하셨어요? 투표해서 몰래 투표용지 국민의 힘과 민주당 두 장을 딱 오려가지고, 걸리면 안 되지만, 안 걸렸다 치고 해 가지고 자기 마음속에 두 개를 다 집어넣는거에요. “나는 여기서 일로도 갈 수 있다. 여기서 일로 갈 수 있다.” 매일 평생동안, 나는 감람산이었는데 나는 이 세상이 예루살렘인 줄 알고 하다가 착각해 완전히 박살나가지고 근데 주님께서 이 지상 예루살렘이 아니라 하늘의 예루살렘을 위해서 지상의 예루살렘을 겪었던 예수님을 따라서 감람산 골짜기를 통과해서 하늘의 예루살렘의 영을, 마음을, 이미 우리가 받아서 이제는 내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예수님이 나에게 이런 일을 행하셨다는 증거하는 증인들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내 것이 아니고 주께서 쓰시는 마음인 것을 말씀, 매일 같이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반복해서 주님의 마음이 우리 안에 작동하고 있는 성도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