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스가랴 13:7-9 / 목자를 쳐라 본문
목자를 쳐라
이근호
2024년 4월 3일
본문 말씀: 스가랴 13:7-9
(13: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13:8)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지 이는 멸절하고 삼분지 일은 거기 남으리니
(13:9) 내가 그 삼분지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눅 12:32) 이 본문에서 ‘적다’는 뜻은 아예 이 세상에는 그 어떤 식으로도 천국 백성이 있을 수 없음을 전제로 하신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 아예 천국백성이 없는 것은 이 세상 자체가 속되기 때문입니다.
‘거룩’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거룩이란 ‘깨끗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 인간 세계와 분리된 다른 세계를 겨냥하는 말입니다. 이 세상은 인간들은 평온한 가운데 지내는 일상의 세계입니다. 따라서 이 세계 자체가 몽땅 다 속(俗)한 세계라는 인식은 사람들에게 없습니다. 그저 밝은 면도 있고 어두운 면도 있다고 나름대로 판단하고 구분짓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참으로 많은 종교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특징은 ‘최종적으로 믿을 만한 궁극적인 절대 진리’를 취득하기 위한 시도들입니다. 왜 그들은 최종적인 단일 진리를 확보하려고 할까요? 그것은 자신을 자신이 건지기 위함입니다. 바로 이러한 인간의 시도가 얼마나 헛된 것인지 배후에 있는 악마가 알고 있습니다.
인간 세계는 모두 악마의 수중에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껏 인간들의 종교생활에 열중하는 것조차도 악마가 넉넉하게 용인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겉으로 보이게 절대진리를 얻었다고 하지만 인간 본성상 본인만이 알고 있는 의심의 잡풀이 내부적으로 쉴새없이 올라오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절대를 추구하고 완벽한 진리를 확보하려고 하면 할수록 인간들은 스스로 위선자가 되어가는 겁니다. 결국 “성경도 완전한 경전이 아닐 수 있지 않는가?”라는 의심마저 제거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악마는 미리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가 예수님 곁에서 부지런히 배우고 함께 하면 자신들이 구원받게 된다는 신앙이 얼마나 허술한 착각인지 악마가 벌써 알고 있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32) 하나님과 예수님의 방식은 이러합니다. ‘목자가 이 세상에서 죽음을 당하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 하면, 이 세상에 그 어디에는 천국으로 통하는 출구가 없음을 명확해지기 때문입니다. 어디 구석이든 악마가 다스리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시간상이나 공간상이 모두 악마가 장악하고 있습니다. 악마가 철저하게 인간을 통제해서 구원이 없기에 악마는 마음껏 인간의 종교활동을 허락해주고 도리어 장려해주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생겨난 겁니까? 그것은 예수님과 아버지 노선에 의해서만 나타나는 겁니다. 즉 ‘목자가 죽어야 비로소 백성이 생긴다’는 이 노선에 이 세상 그 어떤 인간도 끼어들 수가 없고 영속성은 오로지 예수님만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악마와 인간의 공통점은 말씀의 노선에 들어설 수 없다는 겁니다. 말씀의 노선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은 목자가 죽어야 자기 제 갈길로 가는 자기 본색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⅔는 멸절당하고 ⅓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이 작업은 사람들이 끼어들 수 없고 오로지 예수님만 해낼 수가 있습니다.
전체를 3등분 하는 방식은 시내산에서 내려온 율법에 준해서 이스라엘 내에 지상에 성막이 만들어질 때부터 형식입니다. 성소와 지성소에서 그 길의 비례가 2:1입니다. 전체에서 성소는 ⅔를 차지하는 길이를 가지고(10m) 지성소는 전체에서 ⅓에 해당되는 길이(5m)를 가집니다. 이 비례는 솔로몬 성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성소는 이 속된 세상에 도저히 생길 수 없고 있을 수 없는 거룩한 공간으로서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하신 겁니다. 성전이 완성이 되면 비로소 ‘삼마’, ‘거기 계시다’가 성사됩니다.(겔 48:35) 악마는 이 세상의 그 어느 구석이든 거룩, 곧 하나님이 있는 곳에 일체 없다고 자부합니다. 모든 영역을 악마가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상에 벌리시는 프로젝트는, 없다고 여겨지는 ‘거룩의 공간’과 없다고 여겨지는 ‘하나님 공간’이 실제로 ‘거기 계시네’를 성사시키려 하십니다. 그 방법은 성막과 성전을 만들었지만 이스라엘의 멸망으로 인하여 결국 이 인간 세계에는 그 어디에서 ‘거룩 없음’으로 확정났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이 알아듣는 ‘말’로 이해했습니다. 인간들의 말 사용은 이름과 개념을 부르면서 자기 소유화를 시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자기 것으로 끌어당기려고 하면서 율법을 대했던 겁니다. 그러나 말씀의 차원에서 보면, 성소는 지성소를 속된 세상과 차단시키는 경계공간으로 사용되는 동시에 결국 인간들에게 더럽게 점령당하는 공간으로 배치해 놓으신 겁니다.
성소 입구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은 불을 피우는 제단입니다. 그리고 그 제단에서 먼저 붙에 태어는 그 제물의 피는 결국 지성소까지 도달됩니다. 이 말씀은 곧 이 세상은 전체 하나님이 만드신 지옥의 불판 위에서 보내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 어느 누구도 지옥불에서 탈출이 가능한 존재는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지상 생애에는 이 성막의 코스를 그대로 이어받습니다. 그래야 ‘말씀의 연속성’을 자신의 몸에 담아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불의 심판 속에서 피를 흘리시는 그 노선을 예수님께서 거쳤다는 것은 양들이 모든 흩어진 상태에서 혼자만이 스가랴의 예언의 달성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평면적으로 구획된 ⅔와 ⅓의 구분은 예수님의 활동 표현을 위해 시간요소마저 동원됩니다.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계 11:2-3)
한 때(1), 두 때(2), 반 때(3)로 구획되면서(계 12:14) ⅓에 해당되는 시간인 반 때는, 인간들 입장에는 자기네들이 이해하는 시간이지만 예수님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거기 계시다’는 완성시킨 시간입니다. 이로서 인간들이 성경 말을 듣고 본인들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살아나면서 그 안에서 하나님 백성, 곧 ⅓로 표현된 예수님의 완성의 결과물’도 같이 나타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스스로 완벽을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악마적 몸부림인가를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8강-스가랴 13장 7-9절(목자를 쳐라) 240403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스가랴 13장 7절에서 9절까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지 이는 멸절하고 삼분지 일은 거기 남으리니, 내가 그 삼분지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아멘.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비록 작은 자이지만, 그 작은 자를 내 백성이라고 만드는 그 하나님의 절차와 과정 속에서 제일 요긴하게 중요한 점은 목자, 하나님이 함께 하신 목자를 쳐야된다는 거에요. 그 목자가 ‘하나님과 짝이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거니와’ 이 사건을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만들어내고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자기 백성 만드는데 원래 자기 백성이 목자가 와서 건져 내야 비로소 백성이 된다는 것은 사람들도 누구나 납득될 수 있는 당연한 걸로 알고 있는데, 하나님께선 일을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이 예상하고 기대한 방식이 아니라 도리어 반대로 나가십니다. “목자를 쳐버려라. 그러면 소위 양이라고 자부하며 목자를 기다렸노라 라고 고대했던 자들이 자신들의 본색을 드러내면서 다 이 세상에 흩어져버린 것이다.” 이렇게 해요. 구원이라 하는 것은 목자 중심으로 집결될 때 그게 구원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고 그것이 당연한 걸로 알고 있죠. 따라서 “목자만 주시면 목자 중심으로 우리가 집결해서 천국 백성으로 사는 행운을 누리겠습니다.” 뭐 이런 마음 자세를 가지고 있었던 거에요.
오늘 본문 말씀은 도리어 그 반대입니다. “너희들이 목자를 치게 될 것이다.” 목자를 치게 되게 되면 목자를 기다렸던 그들이 스스로 자부하기를 우리는 양이라고 자부했는데, 도리어 양이 아니었던 걸로 들통나는 겁니다. 마태복음 26장 31절에 보면,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하나님이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하는 그 스가랴 말씀. 방금 우리가 보았던 스가랴 말씀을 마태복음 26장 31절에서 예수님께서 그것이 오늘 밤에 그것이 이루어진다. 금요일, 유월절 밤에 이루어진다. 그렇게 연결시켰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가랴 13장 오늘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진다” 이 말씀에 대해서 양이 되었든 인간이 되었든 어떤 인간도 이 말씀과 신약에서의 이 말씀의 성취성과 거기에 끼어들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말씀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고 그리고 연속선상에 유지할 수 있는 분은 이 세상에 예수님 빼놓고 아무도 없다는 그 점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목자를 치도록 허용을 하신 겁니다.
목자를 쳤으면 만약에 진짜 예수님처럼 그렇게 아버지와의 관계가 돈독한 사람 같으면 목자를 쳤으면 아, 저거는 우리가 진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이거는 반드시 있어야 될 절차였었어, 뭐 이렇게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해를 할 수 있는데 그렇게 이해할 사람은 예수님 빼놓고 아무도 없는 거에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목자를 쳐라” 그다음에 ‘목자는 치는데 양들은 안 흩어진다.’ 이거는 말이 안 돼요. 목자를 치면 반드시 양들이 흩어져야 돼요. 양들이 흩어지면서 하나님께서 의도한 것은 뭐냐? “이 세상에 아무도 구원받을 사람은 없다. 인간에게서의 구원은 아예 없다. 천국도 없고 구원도 없고. 인간이 고대하고 있는 그러한 하늘나라도 없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동안 인간들이 목자를 기다리고 메시아 기다리고 천국 갈 것을 소원하고, “하나님 좀 있다 봅시데이, 내 곧 하나님 가서 만납시데이.” 장례식 때 그렇게 많이 하잖아요. 처소가 마련되면 하나님 만나러 가서 일찍 헤어졌던 가족들 거기서 천국에서 만난다. 그런 위로를 받고 싶은 사람들이 다지요. 축구에서 전반전있고 후반전 있잖아요. 전반전으로 끝내버리면 너무 아쉽지 않습니까? 15분 쉬고 후반전에 한 5:0으로 넣어가지고 드디어 최종 승리자로 뭐 이러한 드라마. 이러한 히스토리, 역사를 은근히 사람들이 고대하고 있는 거에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들에게는 목자가 왜 침을 당해야 될 목자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왜 죽음을 당해야 될 그 이유가 거기에 전혀 포함되어있지 않습니다. 혼자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자, 그 이유가 뭔지, 그 이유는 누가복음 22장에 보면 거기에 힌트가 나와있습니다. 거기 누가복음 22장 31절에 보면,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너희, 그러니까 베드로 뿐만 아니라 열두 제자 다 마찬가지에요.
베드로부터 열두 제자를 누가 넘보고 있느냐 하면, 악마가, 사탄이 넘보고 있는 거에요. 사탄이 왜 열두 제자를 넘보고 있느냐? 사탄의 입장에서, 악마의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넘볼 수 있는 대상이에요. 왜? 이 세상은 자기 나와바리니까. 자기의 활동 영역이에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악마 생각은 이래요. 이 세상에서 악마의 지배력, 장악력에서 벗어날 인간은 단 하나도 없는 걸로 악마는 알고 있어요. 어떤 인간도 악마에게 대들 수 있는 그러한 자질을 갖고 있는 사람, 능력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음에 대해서 악마는 자신만만해 합니다.
왜냐하면 인류의 조상 아담을 장악했기 때문에 아무리 자식을 놓고 새끼 까듯이 자식을 놓아 봤자 그 아담이 갖고 있는 범위 안에서만 계속 자식, 후손이 나오기 때문에 아담을 머리된 아담을 장악했다는 말은 그 자손들 전부 다 이미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 그 인간들이 이러한 사실을 그들은 모르죠. 뭐 눈이 소경이 되었으니까, 마음도 어두워 졌으니까 마귀가 장악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그저 눈에 보이는 그냥 인간들끼리 열심히 활동하고 밥 먹고 살고 돈 벌고 그게 인간에게는 전부인 줄 알고 있는 거에요. 그게 다라고 알고 있는 거에요.
그러니 악마는 인간에 대해서는 마음 편하죠. 원채 악마의 존재도 모르고 악마가 그냥 존재하는 정도가 아니고 자기들의 모든 마음과 영혼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인간 쪽에서 모르고 있으니까. 참 쉬워요. 갖고 놀기에 정말 쉽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예수님이 열두 제자 하지만, 열두 제자도 마찬가지거든요. 마귀가 언제든지 잡아먹을 수 있는 대상으로 마귀는 아주 자신만만해 합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마귀에서 벗어날 위인은 아무도 없거든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기서 개입해요. “내가 너를 위해서, 시몬 베드로, 너를 위해서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거는 악마와 인간 사이에서 인간은 악마의 손아귀에서 못 벗어 난다는 것을 누가 인정하느냐 하면 예수님도 벌써, 땅, 땅, 땅. 벌써 인정을 하고 들어가시는 거에요. 인정을.
나의 기도가 개입되지 아니하면 아무리 니가 노력해도 소용없다는 거에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세상은 이미 만약 거대한 맨홀 뚜껑으로 모든 인간을 덮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인간 치고 맨홀 뚜껑을 뚫고 나갈 그런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이러한 지경, 이러한 상황, 이게 인간 세계의 확실한 현실. 이런 현실을 확실하게 “그렇다, 맞다. 어떤 인간도 구원받을 인간 없고 천국갈 인간 없다.” 확실히 하는 그 하나님의 제시하는 근거는 바로 목자가 죽었다는 사실.
목자 죽었으면 천국 가는 길은 노선은 끊어진거에요. 목자가 죽었는데 구원을 받는다, 이건 말이 안되거든요. 인간 형편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목자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죽고 그동안 메시아 기다리고 목자 기다렸던 그 양들은 사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고 목자 치니까 자기 본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다 흩어져 버렸죠. 원래 그래야 돼요. 은근히 구원을 받을까 싶어서 뭐 “메시아 믿습니다.” 하다가 하나님께서 목자를 쳐버리니까 “안되는구나.” “그러면 우리는 뭐 내 갈 길로 가야지. 고기 잡으러 가자.” 그렇게 되는겁니다.
일이 목자 치니까 비로소 모든 사태가 정리가 되었어요. 구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정리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목자가 의도적으로 죽어야 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인 간 속에 아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간 속에는 왜 그리 종교가 그렇게 많은지요. 종교가 뭐냐 하면 절대적인 단일 진리를 추구하는 게 종교입니다. 절대적 단일체계. “이것 저것 믿는게 믿음이 아니고 오직 이 세상에 정답이 있고 그 정답은 오직 궁극적으로 하나로 모아지며 그 하나를 알게 되면 나는 구원받는다.”라는 것을 시도하고 거기에 대해서 그런 것이 있을 것이라고 집착하고 거기에 욕구하고 그걸 욕망하는 그런 모습을 종교라고 하는겁니다. 종교.
절대적 진리에 대한 추구. 그걸 누가 허락했는가? 마귀가 허락하죠. 왜냐하면 마귀한테는 손해 될 게 하나도 없으니까요. “기독교를 믿든 불교를 믿든지 니 마음편한 대로 믿어.” 그리고 마귀는 인간들에게 인간들의 지혜가 있으니까 자기가 믿는 그 종교, 경전, 성경이면 성경, 불경이면 불경. 그 경전에 모순점들을 성경을 믿고 불교를 믿는 그들의 손에 의해서 그 모순되고 이게 온전치 않다는 것을 확인하게 만들어 버렸어요. 절대적인 진리가 있는 줄 알았는데.
파고 파고 계속 코 파듯이 계속 파보니까 코피 나듯이. “야, 이거 진리 적립하는데 이거 아귀가 안 맞네.” 아귀가 안 맞아요. 해외에서 직접 구입해가지고 장난감 키트를 샀는데 에펠탑도 사고 건담브이 로봇도 사고했는데 이게 안맞네요. 작품이 나오질 않아요. “그래, 나 이거 알았어. 나 이제 구원 받은거야. 십자가 피 알았으니까 구원 받은거야.”라고 딱 자부하는데 자부하고 난 뒤에 그다음에 자기의 경험과 성경해석 계속해서 더 따져보니까, “아, 내가 구축한 최종적인 진리가 허점이 드러나는데 한, 두 가지가 아니야.” 여기저기서 빵꾸가 나는거에요.
최종적으로 논리적으로 적립이 되질 않는 거에요. 그러면 성경을 대하면 대할수록 억지로라도 “아니, 믿어야 돼. 아니, 믿어야 돼. 내가 의심하는 것 자체가 마귀의 시험이야.” 혼자서 아주 고군분투를 하고 있어요, 혼자서. “주여, 사탄아 물러가라.” 지금 누구보고 이야기하는지. “사탄아 물러가라.”하면서 “나는 이거 믿을거야.” 근데 믿을거야 라고 하는데 자꾸만 “그게 다가 아니라면? 이게 아닐 수도 있잖아.” 의심이 자꾸 콩 던져놓고 물 부으면 콩나물 올라오듯이 여기저기서 한두 군데가 아니고 계속해서 잔디에 잡초 올라오듯이 계속 의심의 잡초들이 올라오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때부터 본인의 정서가 혼선과 혼란에 빠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야, 나는 지난 3년 전에 확신한 게 그게 다인 줄 알았는데 3년 후에 생각해 보니까 그게 허접스럽기 짝이 없고 이게 숭, 숭, 숭, 숭 구멍이 뚫어져가지고 이게 진리라 할 것도 없이 논리적 허점이 한두 군데가 아니고 또 그것도 땜질하고 메꾼다고 또 부지런히 설쳤는데 “결국 믿습니다.”라고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 이런 생각이 드는거에요. 내가 성경은 세상의 모든 책은 엉터리라도 성경 만큼은 확실하고 완전하다는 자체가 이 자체를 가르치는 사이비 종교한테 내가 농락당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 의견을 한번 들어볼까?” 그럼 다른 사람 의견은 성경이 앞뒤가 안 맞는 이유, 성경이 비과학적인 이유, 성경이 논리가 앞뒤가 엉성하기 짝이 없고 실제 일어난 일과 성경과는 완전히 틀어져 있고 뭐 이런 증거가 수백 개에서 수천 개씩 쏟아지게 되면 “그래도 뭐 성경보다 유익한 건 없지. 뭐 온전치는 않지만 내가 이것 믿고 천국 가는데 마음 편한 대는 성경 만한 게 없어. 그렇다고 성경이 완전하게 이해되는 건 아니고. 일단은 한번 걸쳐 보자. 성경이 뭐 되겠지.”라고 할 때 바로 이러한 일을 팔짱 끼고 마음껏 웃으면서 싱긋이 웃고 있는 존재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악마입니다. 그게 악마에요.
“믿어. 믿어야 니가 마음 편한 거야.” 바로 그것을 이미 악마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을 통해서 이미 다 해본 거에요. 다 했어요. 악마나 인간이나, 인간은 악마 밑에 있으니까. 악마나 인간이나 공히 공통점이 있어요. 뭐냐 하면 스가랴 13장에 있는 이 “목자를 치니 양이 흩어진다.”는 이 말씀을 끝까지 유지해서 마지막 때 완성하는 그 노선에 악마하고 인간은 둘 다 끼어들 수 없다는 사실이에요. 끼어들 수 없어요.
그저 누구 하나 성과 얻으면 득 보려하는 그 노림수 밖에 없어요. 메시아 와서 모든 말씀 있으면 내가 그 메시아 이룬 성과에 대해서 내가 끼어들어서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그런 구원의 욕구, 천국 가는 욕구는 남아 있는 거에요. 근데 그 욕구가 어디에서 이게 마귀 마음이냐 하는게 어디서 들통나느냐 하면 목자를 치면 반드시 모든 양은 흩어져야 돼요. 흩어지지 않고 또 목자 근처에 얼쩡거리면서 “저 목자가 내 한테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지 않겠는가, 구원의 혜택을 주지 않겠는가?” 얼쩡거린다면 그거는 어디서 이탈된 자냐 하면 스가랴 13장 7절에 그 말씀 자체에서 지금 벗어나 있는 안목이에요.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번 원칙적이고 원리적인 것을 한번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이겁니다. 인간은 말을 해요. 인간은 말을 하는데, 예를 들어봅시다. 저 어떤 산이 있는데 산에 이름을 자기가 짓는다고 합시다. 저 백두산 보고, “백두산이다.” 이름 지으면 자기 것 됩니까? 아니죠. 이름 짓는다고 자기 것이 아니에요. 근데 인간은 뭐 이상한 존재가 되어 가지고 물론 배후에 마귀가 그렇게 했지만, 이름 지으면 자기 건 줄 알고 있는 거에요. 이름 지으면. 이 말은 그만큼 인간은 자기 말을 통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해요. 그러나 인간들이 놓치고 있는 거에요.
인간의 세계는 말의 세계에요. 그러나 주님의 세계는 인간들이 말 가지고 생존하는 인간들이 끼어들 수 없는 어떤 세계냐 하면 말씀의 세계입니다. 말의 세계하고 말씀의 세계하고 달라요. 악마는 인간들로 하여금 말씀을 못 보게 하고 말을 보게 하는 거에요. 악마는 인간들로 하여금 성경을 백 독하게 만들고 천 독하게 만들어요. 만 독하게 만듭니다. 열심히 연구하고 히브리어 헬라어 원어 연구하고 우리가 납득하는 말로 계속 다가서서 구원받기를 악마가 그렇게 부추겨요.
그런데 악마하고 인간하고 둘 다 못 하는게 있습니다. 말을 가지고 살고자 하기 때문에 말씀의 세계에 한 발짝도 들어설 수가 없습니다. 목자를 치니 양들이 흩어진다는 이 말씀의 세계에 어떤 인간도 이해 못 합니다. 그 이해는 오직 아버지와 아들의 소관입니다. 애초부터 인간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러면 목자가 치면 그다음에 어떻게 되는가? “이 땅의 삼분지 이는 멸절하고 삼분지 일은 거기에 남아 있으리라.”라는 이것도 말이 아니에요. 이게 뭐냐?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누구만 아느냐? 예수님만 알아요. 목자로 와서 사람에게 침을 당한, 죽임을 당한 예수님만 이 말씀의 내용을 알아요. 다른 인간은 이 말씀을 아는 인간이 없습니다. 유일하게 아는 이 주님께서 이 말씀을 예수님의 자신의 몸으로 이 말씀을 성취를 해버려요. 어떻게?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함으로써 의외로 이 말씀이 이뤄지는 거에요. 목자를 치고 양은 흩어지고 그리고 그다음 스케쥴 삼분의 이는 멸절하고 삼분의 일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금같이 불로서 연단 받아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이 남은 스케쥴은 누구의 몫이냐 하면 예수님 홀로 이룰 수 있는 몫입니다. 그러면 이걸 어떻게 이뤄지느냐. 이게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역할을 이미 구약 이스라엘 역사 속에 율법으로 하나님께서 다 넣어줬어요. 율법으로. 하나님의 율법의 최종 구심점은 뭐냐? 그것은 바로 초창기에는 성소였고 그다음에는 성전이었고 그 성전이 완성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 에스겔 48장에 보면 최종 성전이 완성되고 난 뒤에 35절 에스겔 마지막 대목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그 사면의 도합이 일만 팔천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여호와삼마.
삼마라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거기에 계시다는 뜻이에요. 여호와삼마는 여호와가 거기에 계시다는 뜻입니다. 삼마. 거기에 계신거에요. 제가 아까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이 없어요. 마귀 세계입니다. 마귀 세계인데 마귀는 인간에게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마귀는 인간에게 하나님 찾는 것을 마음껏 허락해요. 왜? 어차피 사이비니까. 내가 사적으로 믿고 싶어서 믿는 거니까요. 스스로 변명하고 스스로 합리화하고 정당화시키고. 성경 구절 가운데 이것 저것 빼가지고 나는 구원받았다고 자부하는 그 일을 마음 놓고 마귀는 뒤에서 베드로하고 열두 제자를 지켜보고 있는 거에요.
“예수님과 함께 더불어 4년 동안 있었으니까 나는 구원 받았다.” 마귀는 알죠. 그게 구원이 아닌걸. 그게 자기 합리화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다는 것은 이것은 마귀만 압니다. 인간은 몰라요. 아무데도 없는 이 세상. 하나님이 없는 그 세상에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여기 있지롱.” 여기 있다, 하나님이 없다고 여기는 하나님. 없다고 아무도 안 여기죠. 다 가짜로 하나님을 섬기니까. 여호와를 다 섬기고 있으니까. 여호와를 섬기는 자가 예수님 죽였잖아요. 다 여호와 섬기고 있는 곳은 마귀는 알아요, 그게 가짜라는 사실을. 그들이 상상하는 사실을.
근데 그 상상 말고 진짜 하나님이 하나님이 없는 곳에 하나님이 있는 조치를 하신 거에요. 그게 무슨 세계냐? 말의 세계가 아니고 말씀의 세계입니다. 그럼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런 뜻이에요.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줄 때 시내 산에서 율법을 줄 때 하나님께서는 거룩함을 요구한 거에요. 율법대로 할 때 거룩함입니다. 거룩함은 뭐냐? 분리에요. 분리. 거룩한 것은 하나님이 계시는 그곳이 거룩하고 인간이 있는 곳은 일체에 거룩함이 없는 것을 가지고 속되다고 합니다. 속되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이 오기 전까지는 속됨이 없어요. 왜? 그냥 일상생활이에요. 인간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도 속되고요, 인간이 참 착하다 훌륭하다 참 거룩하다 하는 것도 속된 거에요. 거룩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 쪽에 없는 인간이 예상도 못한 하나님이 뭔가 집어넣을 때 거룩이 되는 것이지 인간의 거룩은 거룩으로 받아주질 않습니다.
율법이 들어와서 하나님께서는 드디어 율법대로 성소를 만들었어요. 성소를 만들었는데 성소 구조를 보면 이렇습니다. 동쪽으로 나있고 동쪽에 세로 길이가 25미터 가로 길이가 50미터, 그다음에 성소가 있는데 성소, 지성소 합해서 15미터, 근데 성소가 10미터고 지성소가 5미터에요. 성소 전체를 1로 보면, 성소 천막 전체를 1로 보면 성소가 3분의 2고 3분의 1이 뭐냐? 하나님이 계신다는 지성소. 3분의 1입니다. 면적, 비율로.
하나님께서 오늘 스가랴 본문에서 3분의 2와 3분의 1로 나누는 것은 3분의 2의 자리가 언약에 의해서 이 세상 자체가 속되다는 것과의 경계선을 이루는 거에요. 3분의 2를 그걸 경계선으로 해서 3분의 1에 진짜 거룩은 그 안쪽에 숨어 있는 거에요. 3분의 2 안쪽에 숨어 있는 거에요. 3분의 2는 하나님 보기에 속된 것. 그냥 세상 것.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 것. 그리고 3분의 1은 하나님이 계신 곳. 그 사이에 3분의 2가 중간에 패널로 샌드위치처럼 끼어 있는 거에요.
이스라엘 백성의, 이게 이제 처음에 성막 할 때 이렇거든요. 나중에 솔로몬의 성전이 되게 되면 이게 처음에 모세의 성막은 평면적으로 이렇게 성소 3분의 2 그리고 지성소 3분의 1로 나눴지만, 솔로몬 성전은 입체적으로 높이까지 들어가요. 높이까지. 총 길이가 솔로몬 성전은 길어요. 총 길이가, 성소 지성소 합해서 길이가 15미터였는데 여기 솔로몬은 총 27미터 넓이는 9미터 높이는 14미터. 그렇게 되어 있고 성소 길이가 18미터이고 지성소 길이가 9미터, 역시 3분의 2대 3분의 1, 2대1의 길이를 갖고 있습니다.
높이도 3층 높이로 하는 겁니다. 그러면 성막에서는 평면적인데 솔로몬에서는 입체적이 돼요. 높이 깊이가 다 있는 거에요. 근데 그 거룩과 하나님의 율법의 개입으로 거룩한 장소가 생겼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거는 뭐냐? 여호와 삼마를 지향하고 그걸 목적으로 한 하나님의 프로젝트가 시작된 거에요. “하나님이 여기 계시네? 없다고 했지? 여기 있어. 마귀야 여기 있잖아. 하나님 여기 있잖아.”가 되는 거에요. 마귀는 (하나님이) 없던걸로 알고 있지만 하나님이 작업을 해보니까 없는 데서 거룩한 곳이 생겨버린 거에요. 생겼는데 그 거룩함을 생기기 위해서 율법이 주어졌고, 그 율법이 지나가면서 뭐를 거치느냐 하면 그 속된 것을 거쳐서 가요.
속된 것을 거치면서 거룩이 이동하면서 거기에 뭐가 주어지냐면 불을 바탕으로 깔아버려요. 저는 그걸 불판이라 하는데, 그 세상 자체가 불판으로, 불의 보일러, 저주의 지옥불로 보일러를 깔았다고 보면 됩니다. 마가복음 9장 43절에,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럼 지옥이 뭐냐? 48절에,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그 불의 세계가 지옥입니다.
근데 그 지옥이라는 것이 이미 구약에 율법적으로 주어졌어요. 뭐냐 하면 이 성전 성막에 있는 제단 입구에 동쪽으로 딱 들어가면 제일 먼저 부딪히는 것이 불판 나옵니다. 제단. 불 붙는 제단 나와요. 그 제단에서 제단의 불로 향을 피울 때 그 향 피우는 장소가 성소에요. 그리고 1년에 한 번씩 들어가는 것은 바로 지성소고. 근데 불인데 인간이 어떤 인간도 불을 못 이깁니다. 어떤 인간도 불을 못 이긴다는 말은 어떤 인간도 구원 못 받아요. 지옥에 들어가야 돼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뭐냐? 하나님께서는 어린 양이든지 또는 소나 염소, 제물을 이미 불로서 태워버리면 그걸 연단, 연단이라고 해요. 불로 태워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이미 불로 탄 채 불의 심판을 이미 받았다는 입장에서의 그 피는 지성소까지 들어갑니다.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는 거기에 합류하게 돼요. 그게 성막 구조의 기능이고 솔로몬 성전의 구조입니다.
근데 이스라엘이 그 기능을 했던 이스라엘이 망해버렸거든요, 스가랴 시대 때 이미 망해버렸어요. 망했다는 말은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던 눈에 보이는 성전 방식은 이제 끝났다는 말은 인간이 해낼 수 있는 방식은 이스라엘 멸망으로 구원은 없습니다. 더 확실하게, 전에도 없지만 이젠 더 확실하게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어요. 이스라엘 멸망을 통해서. 근데 멸망하는 이스라엘이 해야 될 일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목자를 치는 겁니다.
목자를 쳐버리면 목자는 이스라엘이 실패한 모든 것, 성소와 성막에 대한 그 본래의 의미와 취지를, 불로 연단 받는 그것을 어린 양이 하고 염소가 했던 그것을 목자 몸 자신이 구약 있던 모든 불의 만남과 피의 쏟아 냄을 홀로 그걸 감당을 해버려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2장 49절에, “내가 불을 이 땅에 던지러 왔다.” 던지러 오면서 내가 받은 세례가 이 불과 관련되어 있다는 거에요. 물세례 벌써 받았잖아요. 근데 예수님은 아직 남은 세례가 있다는 거에요. 남은 세례.
예수님께서 말을 한 게 아니에요. 예수님은 말씀을 하셨어요. 예수님께서 말을 해버리면 “야, 똑바로 잘 들어. 내 말 잘 들어란 말이야.” 이렇게 되지만 예수님께서 입에 나온 것은 말이 아니고 말씀이 되어버리면 예수님이 내뱉은 그 말씀은 본인이 제일 먼저 그 말씀을 본인에게 적용시켜 버립니다. 본인에게 적용시켜 버려요. 그렇게 되면 예수님에 의해서 스가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3분의 2와 3분의 1이라는 것이 이미 성전이 다 날아가 버린 상태에서는 입체적이든 평면적이든 없잖아. 그게 뭐가 추가되느냐 하면, 시간 요소가 추가가 돼요. 시간 요소가.
시간적으로 3분의 2와 3분의 1이 나누어지는 시간 요소가 추가가 되는 겁니다. 평면 되는 성막, 입체 되는 솔로몬 성전, 거기다가 시간으로 거기에 요소가 들어가 버리면 그것이 요한계시록 11장 1절에서 3절에 나옵니다.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달 동안 짓밟으리라,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일천 이백 육십. 같은 기간이 마흔 두달. 이게 3년 반입니다. 3년 반은 한 때, 삼년 반을 성경적으로 요한계시록 12장에 분해한 방법에 의하면 한 때, 두 때, 반 때에요. 근데 한 때, 두 때, 반 때가 여기서 3으로 나눠지고, 그 3으로 나눠진 한 때, 두 때, 그리고 그 반 때의 일부는 이방인들에게 짓밟히는 거에요. 세속에게. 이 속된 인간 세계에 짓밟히는 시간을 보내게 되는 겁니다.
3분의 2가 밟히는 게 아니고 인간의 시간, 인간의 시간 자체가 스가랴에서는 3분의 2로 보지만, 인간에서는 모든 시간은 인간들의 시간이에요. 인간들은 시간을 3분의 2, 3분의 1로 나누질 않습니다. 나누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적 해석에서 나오는 것이지 인간은 말씀이 없고 말이에요. 인간은 이 시간과 공간을 자기를 위한 시간과 공간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은 한 때 두 때 반 때라는 것을 인간 쪽에서 나눈 자도 없고 나눌 필요도 없고 나눌 생각도 없고 그래요.
왜? 자기가 자기들을 위한 시간을 보내면 되니까요. 그런데 그 시간을 성경은 말씀, 말이 아니고 예수님이 말씀의 주인공이 되어버리면 인간의 시간을 뭐로 보느냐 하면 거룩한 것에 의해서 목자가 죽게 되고 그 죽게 된 목자가 어떻게 그 죽었던 목자가 인간들이 훼손한 그 시간을 어떻게 완성시킴으로써 3분의 2와 그리고 나머지 3분의 1을 시간을 나누는 그 작업의 주인공으로서 드디어 스가랴 말씀대로 거룩한 백성들, 불 가운데서도 너끈하게 통과한 3분의 1을 예수님이 성취시키는 토대가 되는 겁니다.
말한다고 이해될 것 같으면 내 말합니다. 시간 가더라도 다시 한번 말씀드릴게요. 예수님은 말씀입니다. 인간은 그 말씀을 이해 못 해요. 이탈했기 때문에. 마귀 쪽에 속했기 때문에. 그러면 예수님은 스가랴의 예언에 의해서 3분의 2와 3분의 1을 나누어요. 나누는데 이것을 시간적 까지라도 적용을 시켜버립니다. 시간에. 적용시켜 버리면 한 때, 두 때, 반 때가 3으로 나누어져요. 그러면 핵심은 어디에 있는가? 그 반 때에 있습니다. 그 반 때에 있는데 반 때에 주님께서 말씀을 다 이루어버려요, 그 반 때에.
말씀을 이루기 때문에 어떤 고난이 예수님에게 주어져 있느냐 하면, 이제는 일방적으로 자기 백성을 더러운 자기 백성을 거룩하게 불로서 연단 시켜서 기어이 내 백성 만드는 고난이 말씀 되시는 예수님에게 부여받게 되는 겁니다. 3분의 1은 3분의 1에 대한 숫자 3분의 1이 아니고 3분의 1이라는 시간에 이루어졌던 그 혜택을 입은 자들이 예수님의 일방적 고난으로서 선언해버리고 자기 백성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이보다 더 쉽게 할 수가 없어요.
그 반 때가 한 때, 두 때, 그 반 때에 인간들은 시간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속했다를 노골적으로 다 표현한, 그 표현한 것이 반 때 그들은 다 표현 했고 “모든 시간과 공간은 우리 인간들 거야.” 그 자기 의사를 다 표현한 것이 바로 그 반 때에 일어났습니다. 왜? 인간들은 목자를 쳐 죽였으니까. 근데 인간들이 생각하는 시간이 그게 모든 인간의 시간이 그걸로 마감된다는 것을 충분히 최종까지 다 보여줘놓고 그 반 때로 죽은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살림으로써 인간의 시간관과 공간관의 한계성을 예수님의 부활로 증명해 버린거에요.
‘인간은 따라와도 결국은 자기 힘으로 천국 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를 그 반 때 일어난 사건, 죽었다가 살아난 그 반 때의 사건으로서 악마의 실상, 인간 세계의 속됨의 실상을 드러내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 세계에는 거룩이 없습니다. 거룩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서 여호와삼마, 없는데, “있네? 거기 있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침을 당한, 목자가 죽은 목자에 있는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계신 곳이에요. 바로 여호와삼마에요. 거룩이 바로 거기에만 있는 거에요.
끝으로 “우리가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어떻게 믿습니까?”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예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말씀이 살아나는 조건과 더불어서 생겨나는 것이 성도입니다. 인간들은 말을 가지고 저 괜찮은 말을 내 것 만들면 구원받고 싶은 내가 드디어 구원받는다 하는 것이 이게 악마가 시키는 대로 종교 생활 하는 거에요. 근데 하나님 뜻은 뭐냐? 말씀을 살림으로써 말씀 사는 것과 더불어서 생겨난 결과물이 바로 성도라는 거에요. 따라서 성도는 뭐냐? ‘내가 산다’가 아니라 나를 통해서 말이 아니고 말씀, 예수님 자신이 살아날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준비된 하나님의 백성이고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이 전체가 다 일상적인 생활이 다 더럽다는 사실을 하나님 보시기에 지옥에 갈 자들이라는 것을 저희들은 깨닫지 못하고 마귀가 시키는 대로 자체적으로 종교라는 것을 만들고 기독교 만들고 교회 만들고 그 안에서 신앙생활 한답시고 해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목자를 치게 된 동기인 것을 저희들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고 하나님이 없는 곳에 목자께서 다 이루셔서 주의 성취와 더불어서 자기 백성을 친히 만들어 주신 이 은혜를 늘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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