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스가랴 14:12-15 / 삼분지 일 본문
삼분지 일
이근호
2024년 5월 1일
본문 말씀: 스가랴 14:12-15
(14:12) 예루살렘을 친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내리실 재앙이 이러하니 곧 섰을 때에 그 살이 썩으며 그 눈이 구멍 속에서 썩으며 그 혀가 입속에서 썩을 것이요
(14:13)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들로 크게 요란케 하시리니 피차 손으로 붙잡으며 피차 손을 들어 칠 것이며
(14:14) 유다도 예루살렘에서 싸우리니 이 때에 사면에 있는 열국의 보화 곧 금 은과 의복이 심히 많이 모여질 것이요
(14:15) 또 말과 노새와 약대와 나귀와 그 진에 있는 모든 육축에게 미칠 재앙도 그 재앙과 같으리라
예루살렘의 운명에 관한 예언입니다. 철저하게 이방민족에서 유린 당한 예루살렘, 페허가 된 예루살렘은 하나님에 의해서 설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당시 가장 유력한 이방민족으로 하여금 예루살렘을 치도록 조치하셨습니다. 곱게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처참하게 파괴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성전이 유일하게 있었던 장소로서의 예루살렘의 고귀함과 그리고 황폐함과 다시 풍족해진 예루살렘의 운명은 하나님의 예언으로 형성하게 되었다는 점이 하나님을 원하셨던 바입니다. 더 간편해서 말해서,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바로 그 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의할 것 같으면, 장차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이 마치 이스라엘이 애곱에서 나오는 그날 밤과 같습니다. 출애굽기 3:20-22에 보면, “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내리라 내가 애굽 사람으로 이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할지라 너희가 갈 때에 빈 손으로 가지 아니하리니 여인마다 그 이웃 사람과 및 자기 집에 우거하는 자에게 은 패물과 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여 너희 자녀를 꾸미라 너희가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자기 것이 아니더라도 남의 것이지만 자기 것이 되도록해주시는 하나님의 배려가 있음으로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더불어 움직이는 대상임을 알게 해주십니다. 또 하나 유월절과 관련있는 것은 바로 오늘 본문 12절의 “그 살이 썩으며 그 눈이 구멍 속에서 썩으며 그 혀가 입속에서 썩을 것이요”입니다.
이것은 그 어느 인간도 진정한 죽음을 가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죽어가면서도 죽는 이유도 모르고 죽습니다. 왜 인간은 죽음이 자신에게는 꼭 단독 죽음인 것처럼 오해하면서 죽어가느냐는 겁니다. 보편적 죽음이 찾아왔다는 생각을 인간은 못 가지고, 자기만이 죽는 것처럼 여기면서 죽는다는 겁니다.
진정한 죽음은 인간의 죽음보다 월등한 죽음이 됩니다. 이 죽음을 알려면 하나님의 언약과 만나 그 언약의 죽음에 합류되어야 비로소 알게 되는 죽음입니다. 예루살렘의 도성의 파괴는 기존 도성들의 멸망과 달리 보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언약의 취지가 반드시 드러내는 특수한 도성입니다.
이 언약의 특수성을 위하여 언약을 모르는 대표적 이방나라인 바벨론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쪽으로 이동시켰습니다. “칼이 암몬 족속의 랍바에 이르는 길과 유다 견고한 성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을 그리라 바벨론 왕이 갈랫길 곧 두 길 머리에 서서 점을 치되 살들을 흔들어 우상에게 묻고 희생의 간을 살펴서 오른손에 예루살렘으로 갈 점괘를 얻었으므로 공성퇴를 베풀며 입을 벌리고 살륙하며 소리를 높여 외치며 성문을 향하여 공성퇴를 베풀고 토성을 쌓고 운제를 세우게 되었나니”(겔 21:20-22)
이렇게 되면 언약과 비-언약이 예루살렘 한 곳에 모이게 됩니다. 거기서 이방민족이 완전한 승리를 해냅니다. 그 결과로 예루살렘은 철저하게 유린되고 유다민족은 바벨론 민족의 통치 영역을 따라 세상 만방에 흩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예루살렘의 언약적 운명은 끝인가요? 아닙니다.
비언약, 곧 우상과의 만남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진실은 드러납니다. 유월절날에 애굽 사람들은 히브리인들과 싸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출애굽기 12:23에 보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설주의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로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멸하는 자’가 등장합니다. 즉 인간은 인간세계를 다 멸하는 천상의 천사와 싸워야 될 자들입니다. 이길 낼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인간은 이미 “정녕 죽으리라”의 증인으로 전락했기 때문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탈출이 가능했던 것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이용해서가 아니라 그 어린양의 죽음(피) 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어린양의 죽음에 합류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곧, 애굽에서 탈출 이후에 어린양의 죽음에서 벗어나서 다시 자신만의 세계를 따로 영위하면 이것은 곧 ‘구원받았다는 자신의 증인’밖에 안 되는 겁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의 멸망은 결코 예루살렘의 주민을 위함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실린 그 언약 자체를 위함입니다. 그 언약의 내막이 예루살렘이 망하면서 세 차례를 통해서 시행됩니다. “인자야 너는 날카로운 칼을 취하여 삭도를 삼아 네 머리털과 수염을 깎아서 저울에 달아 나누었다가 그 성읍을 에워싸는 날이 차거든 너는 터럭 삼분지 일은 성읍 안에서 불사르고 삼분지 일은 가지고 성읍 사방에서 칼로 치고 또 삼분지 일은 바람에 흩으라 내가 그 뒤를 따라 칼을 빼리라”(겔 5:1-2)
즉 예루살렘 주님 모두가 한꺼번에 죽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멸망의 파편적 요소가 어떻게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되느냐를 보여줍니다. 삼분지일의 주민은 예루살렘 안에서 죽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삼분지의 일은 칼에 맞아 죽는데 그 칼의 주인은 이방민족입니다. 이들은 오로지 우상만 섬기는 자들입니다.
그 다음의 삼분지 일의 주민들은 바람처럼 예루살렘을 떠나 사방으로 퍼져나갑니다. 그렇다면 이 사방으로 퍼져나간 이 유다 자손들은 오늘 스가랴 예언대로 복을 받는 겁니까? 아닙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예언은 먼저 예수님 개인의 생애로 집결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눅 13:32-33)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구약의 말씀과 예언이 다 집결되는 사건입니다.
⅓+⅓+⅓=1, 곧 예수님에 십자가 지심에 의해서 완성되는 겁니다. 그렇게 완성된 1은 예수님에 의해서 예루살렘 언약 흩어짐의 원칙에 준해서 온 세계에 다 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이 요한계시록 8장 전체에 걸쳐서 나옵니다. 첫째 천사의 나팔로 인하여 자연세계 ⅓이 다칩니다.
이는 전에 예루살렘이 멸망당할 때의 징조가 덮쳐지는 겁니다. 두 번째 천사 나팔로 이 자연의 생명체의 ⅓이 죽습니다. 세 번째 천사로 인하여 마귀가 하늘에게 떨어집니다. 이로서 예수님께서 다 이루어내신 그 십자가(1)로 인하여 기어이 선악과 과실을 따먹은 배후의 존재까지 끄집어내십니다.
이로서 예수님의 죽으심에 합류된 자들이 최후의 성도들이며 이들만 생명나무의 증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쥬스 안의 빛나는 반짝이처럼 그 어떤 시간이나 공간이나 상관없이 십자가 속의 사람으로 빛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2강-스가랴 14장 12-15절(삼분지일) 240501-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스가랴 14장 12절에서 15절까지입니다.
“예루살렘을 친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내리실 재앙이 이러하니 곧 섰을 때에 그 살이 썩으며 그 눈이 구멍 속에서 썩으며 그 혀가 입속에서 썩을 것이요,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들로 크게 요란케 하시리니 피차 손으로 붙잡으며 피차 손을 들어 칠 것이며, 유다도 예루살렘에서 싸우리니 이 때에 사면에 있는 열국의 보화 곧 금 은과 의복이 심히 많이 모여질 것이요, 또 말과 노새와 약대와 나귀와 그 진에 있는 모든 육축에게 미칠 재앙도 그 재앙과 같으리라”아멘.
오늘 본문에서 두가지를 유념하시면 됩니다. 하나는 12절에 있는 “그의 살이 썩으며 눈이 구멍 속에서 썩으며 그 혀가 입속에서 썩을 것이요”하는 이 대목. 이 대목 하나 염두에 두시고 그다음에, 14절 15절, “열국의 보화 곧 금 은 의복이 심히 많이 모여질 것이요, 또 말과 노새와 약대와 나귀와 그 진에 있는 모든 육축에게 미칠 재앙도 그 재앙과 같으리라” 이렇게 되어있는데, 여기 열국의 보화 금 은 의복이 심히 많이 모아질 것이라는 건 그건 예루살렘에 있는 유다민족에게 그것이 풍성하게 주어진다는 거고, 한쪽은 지금 예루살렘 점령군한테는 썩어지고 전부다 시체가 되고 썩어지고 또 하나는 그 점령당했던 유다백성에게는 오히려 보화와 그리고 금, 은이 많이 풍성해진다는 것, 그 두 개가 예루살렘 중심으로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둘을 합치면 뭐가 되는가? 이 두 개가 합치면 유월절 사건이 됩니다. 유월절 사건이라는 것은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학대받다가 하나님께서 그 학대 받는 자를 데리고 자기 성산에 예배받기 위해서, 경배를 받기 위해서 모세 보내어서 어린양의 피로서 그들을 애굽나라 자체에서 벗어나게하는 이 사건, 그게 바로 유월절 사건입니다.
근데 유월절 사건에서 어떻게 오늘 본문과 통할 수 있는가? 출애굽기 12장 35절에 보면, 유월절에 대해서 미리 언급하기를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으로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의 구하는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 그렇게 되어있어요. 그들이 출애굽 할 때에 아무것도 없는 빈손으로 나온 것이 아니고 은혜를 받아서 애굽사람들로 하여금 많은 물품을 공급 받으면서 그들은 나온거에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 12절, 그게 이제 유월절과 관련되어있다면, 여기 12절에 썩는다는 것, “그 살이 썩으며 그 눈이 구멍 속에서 썩으며 그 혀가 입속에서 썩을 것이요,” 이것은 유월절 사건과 어떤 관련성이 있느냐? 그 말은 죽을 수 없는 인간이 예루살렘에서 비로소 죽는다는 겁니다. 이것은 유월절을 통해야 인간은 죽을 수 없는 인간이 제대로 죽을수 있게 됩니다. 인간이 숨끊어진다고 죽는게 아니에요.
죽음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과 결부 된 채 같이 의미가 실려야 그게 죽는겁니다. 사람이 죽어도 죽는 이유를 몰라요. 이거는 성도만이 알아요. 죽는 이유가. 죽는 이유가 아는 자 만이 그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기에 그 사람은 말씀이 살아있는 그 이유 때문에 영생을 얻습니다. 그래서 성도가 죽는 것은 귀한 것은 성도는 일반인과의 죽음과 달라요. 일반인들은 그냥 늙어 죽고 죽는 이유도 모르고, 다시 말해서 제대로 못죽어요. 그런데 성도는 예수님의 죽음만이 진정한 죽음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 예수님의 죽음에 합류가 됩니다.
그게 유월절 사건이에요. 유월절 사건은 뭐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그냥 나오면 안되고 그 어린양의 죽음과 동행해야 살 수가 있습니다. 어린양의 죽음을 이용해서는 못살고 어린양의 죽음 그 안에 본인이 거기에 합류가 되어야 살 수가 있는 겁니다. “어린양 때문에 우린 살았다. 나는 다시 살았어. 나는 살았단 말이야. 헤헤.” 이래가지고는 안되고, 계속해서 어린양 죽음안에 합류가 되어야 어린양이 살았다는 조건 하에 그들이 사는 것이지 “내가 어린양 이용해먹어서 나는 살았다”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유월절. 그래서 그 유월절 나오고 난뒤에 그들은 율법대로 유월절을 반복해야 되는 그러한 민족이 된겁니다. 여전히 그들은 어린양이 일회용이 아니고 그다음 부터는 필수적인 그들의 새로운 환경으로 자리잡은 것이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이에요. 피 찍어 발라서 끝나는게 아니고 피 속에 들어오게 된겁니다. 피 속에서. 그래서 피속에 들어오니까 자신의 피는 피로서 인정받지 못하죠. 그래서 피를 먹지마라고 했거든요. 하나님께서.
니 피는 안받는다는거에요. 너의 피는 안받는 다는 말은 “니가 주인공이 아니야. 너의 주인공은 너가 아니야.” 니 주체는 니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게 유월절을 통해서 기존의 인간 세계하고는 전혀 다른 신종 종족이 발생 된 거에요. 새로운 종족이 발생된 겁니다. 따라서 이러한 새로운 종족의 발생, 생산은 유월절 사건이 있어야 되고요, 유월절 사건이 있으려면 하나님께 대든 우상숭배자죠. 이방인의 신, 악이죠. 하나님 보시기에 악이 되는겁니다. 그 악이 있어 줘야 성도가 생겨나요. 악이 없으면 성도라는 것도 없습니다. 성도는 악 속에서 탈출해서 생긴 사람이 성도입니다.
악에서 내가 탈출하는게 성도가 아니고 악에서 성도가 탈출하는 거에요. 성도가 탈출할 때 성도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고 성도 본인이 아니라 유월절의 어린양이 주인이 되어서 함께 탈출 된 자를 성도, 거룩한 자라고 이야기하는겁니다. 그 차이점을, 여러분들이 차이점을 이렇게 분명하게 잘 아셔야 돼요. 복음에서 성도하고 교회에서 말하는 “예수 십자가 믿어서 당신 구원받아요”하고 이거하고 완전히 반대가 돼요. 상반되게 되는겁니다.
한쪽은 예수님의 죽음 안에 있는 사람이고, 한쪽은 예수님의 죽음을 이용해 먹는 사람이죠. 보험들어 놓듯이. 일반 사람들이 보험들었다고 보험회사 사람 아니잖아요. 보험 회사를 이용했죠.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을 이용할 수가 없어요. 오히려 하나님이 이용하는 거죠. 그리스도 안에, 이걸 뭐냐하면, 성도라 하는 것은 성령을 받게 되면 예수님의 증인 되는겁니다. 그런데 기독교란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예수님의 증인 아니고 내가 구원 받았다는 내가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자기 자신을 증거하는 사람들이에요. 이거는 우상숭배잡니다. 이단이죠.
기독교 모습을 띈 이단이에요. 그 차이점을 아셔야 돼요. 그 차이점을 알려면, ‘나’라는게 하나님께서 두 종류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는 뭐냐하면, ‘선악과와 관련된 나’와 또 하나는 ‘생명나무와 관련된 나’ 두 개의 나무에 따라서 두 개의 자아가 있어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악과 과실을 따먹지 말라 한 것은, 하지 말라는 명령을 선악과 관점에서 인간에게 준 것은, 인간보다 선악과 나무의 과실이 더 중요하다는 거에요. 이 말은 인간의 존재는 선악과는 따먹어선 안된다는 점을 증거하기 위해서 인간이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또 하나의 인간, 생명 나무의 생명이 인간보다 더 중요한 겁니다. 따라서 생명 나무가 찾아 와서 우리에게 영생을 줌으로 우리는 비로소 영생, 천국 백성이 되었다는 것. ‘생명 나무를 증거하는 새로운 나’가 등장합니다. 순서는 선악과로 말미암아 온전히 죽게된 그 자, 그 자에 대해서 선악의 심판을 충분히 치뤘다는 그걸 토대로 해서 생명나무에 들어가게 하시는 겁니다.
선악과 따먹었다 라는 것을 충분히 그것은 용서받지 못할 죄라는 것을 충분하게 그 인간에게 그 증거를 담아내고 담고서, “그러니깐 넌 구원 받지 못해. 정녕 죽는게 합당해. 맞아.”라는 그걸 내용으로 해서 생명이 주어지는 겁니다. 잘 들어보시고 여러분에게 적용되는걸 한번 해 보세요. 예수님 이용해서 구원받을 생각 하지 마시고요. 하나님이나 예수님은 우리가 이용할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용물이 아니에요.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나님 자신을 증거하기 위해서 한다면 그러면 왜 사람들은 이 사실에 대해서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못 받아 들이는가? 인간의 능력으로. 그것은 선악과를 따먹게 되면 정녕 죽으리라에 합당한 죄를 인가들이 짓게 돼요. 정녕 죽으리라에 합당한 죄. 그게 뭐냐하면, 나는 나로서 살고자 하는거에요. 삼위일체를 이용하든 예수님을 이용하든, 그건 내 이용물이고 궁극적으로 내가 챙기고 싶은 것은 나 자신의 영생이에요. 내가 신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극복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조상의 성깔을 그걸 물려받아가지고 모든 인간은 그냥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이용할 생각하지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나 하나 작살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럼 나만 손해게?” 이렇게 되죠. 인간은 손해보는 장사는 하지 않겠다는 것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절대적인 신으로 행세하는 그 성질이 다 그런거에요. 모든 인간이 그렇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구원은 불가능하죠. 안되는겁니다. 이 말은 인간이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인간은 자기 증거 외에는 내놓을 증거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증거하는데 거기에 전부를 다 바쳤고요. 타인을 증거한다? 미쳤어요? 나 놔두고 왜 남을 증거해요. 안되죠. 되지를 않는겁니다. 이 안되는 것, 안된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놓치지 말고 꼭 품고가야 돼요. 그렇게 해서 제대로 죽어야 돼요. 죽는 이유를 알고 죽어야 돼요. 나는 나를 포기 못하는 그 죄로 인하여 우리는 제대로 죽는겁니다. 그 죽는다는 것을 구약에서는 뭐냐? 우상숭배라고 이야기하는겁니다. 신이 다른거에요.
인간이 믿는 신은 이미 내가 신이기 때문에 “나한테 잘해주는 신은 얼마든지 내가 섬길 용의가 되어있고 뇌물 바칠 용의가 되어있다. 어차피 나를 잘쳐준다면 나는 좋은 호의적 관계를 할 수 있다.” 인간에게 우상은 절대신은 단 하나밖에 없어요. 그러나 참된 하나님은 주가 두명이에요.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시편 110편, 주가 둘이 돼요. 하나는 하나님이고 하나는 이땅에 온 하나님 이름이고. 두분이 되는 겁니다. 성령은 그 가운데 연락책이고요.
연락책으로서의 하나님이죠. 나타난 하나님은 두분으로 나타나고 성령은 숨어계셔서 일하시고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둘 된다는 말은, 그 두분의 하나님중에서 한분이 인간이 되어버리고 말았어요. 따라서 인간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 사이에 끼어들 수가 없게 된 겁니다. 끼어들 수 없으면 인간은 이거는 타고난 우상숭배자가 돼요. 그러면 이 우상숭배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뭐를 준비했느냐 하면, 우상 숭배자는 “정녕 죽으리라”의 그 죽음에 해당되기 때문에 어떠한 잔인한 처벌을 받게 되는가를 보여주는 특수한 도성을 마련했습니다.
그 도성이 뭐냐? 예루살렘이에요. 오늘 본문에나오는 예루살렘. “예루살렘을 치는 모든 백성” 되어있죠. 예루살렘이 세가지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하나는 영광스러운 예루살렘으로 다윗 시대에 도성이 되고 하나님께 여부스 사람에게 정복케해가지고 되었고요. 두 번째는 뭐냐 그 예루살렘이 잔혹하게 파괴됩니다. 철저하게 파괴돼요. 폐허가 돼요. 황폐한 예루살렘. 세 번째, 그 예루살렘이 세 번째가 뭐냐? 세 번째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로 “많은 금, 은과 의복이 심히 많이 모여질 것이요.” 출애굽때에 히브리인들이 애굽사람의 많은 보화를 건져서 가져간 것처럼 예루살렘이 풍성하게 하나님과 더불어 살수 있는 도성이 되는겁니다.
왜 예루살렘이 이런 절차를 3개를 밟아야 되느냐? 그것은 방금 제가 이야기 한 이것도 스가랴 이것도 구약에 해당되는거에요. 자, 여기서 해석에서 구약해석과 신약해석의 차이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약 해석은 말씀이 인간 앞에 하나의 대상으로 서있어요. 인간 앞에 있어요. 인간 앞에 스톱이 돼요. “지켜라” 이게 구약적입니다. 인간 앞에 멈추죠. 근데 신약은 뭐냐? 신약은 멈추지 않고 쑥 들어와 버려요. 신약은. 그 말씀이 쑥 들어온다고요. 멈췄을땐 뭐냐? “이 말씀을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으리라” 되어있거든요. 그 저주를 받으리라가 계속해서 유보적으로 구약때는 멈춰있는데 드디어 신약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 말씀이 안지키면 저주받는 그 저주가 바로 우리 내부에 들어와요.
내부에 들어오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12절 말씀처럼, “그 살이 썩으며 그 눈이 구멍 속에서 썩으며 그 혀가 입속에서 썩을 것이요,” 썩는다는 말은 저주받았다는 뜻입니다. 썩는다는 말은 저주 받아서 소실 되는거에요. 없어지는거에요. 그리고 그 현장에는 율법의 저주만 남게될 거에요. 율법의 저주만. 저주가 우세하고 저주가 인간보다 월등하다 이말입니다. 삶에 대한 집념과 집착보다도 저주가 훨씬 더 월등한 거에요. 그것이 일어나는 특수한 도성, 공간으로서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을 설정해 놓았습니다.
그러면 이 예루살렘을 설정해 놓으면 예루살렘이 멀쩡했던 예루살렘이 파괴당해요. 파괴 당하는데 예루살렘을 파괴할 때 하나님께서 누구를 부르느냐 하면, 철저하게 우상을 섬긴, 그들은 우상을 섬기는게 아니라 신을 섬기죠. 왜? 그들 이방민족에게는 우상이란 개념이 없고 그냥 신이에요. 나를, 우리 나라를 잘 되게 하는 신이에요. 자기의 하나의 신이죠. 하나의 신. 절대적인 신을 믿는 그 우상을 믿는 자로 하여금 예루살렘을 침범하게 만들어요. 하나님께서 그들을 끌어당겨서 침범하게 만듭니다. 침범하게 만드는 그 근거가 에스겔 21장 21절에서 22절에 나옵니다.
“바벨론 왕이” 이스라엘 북쪽에 현재 이란과 이라크쪽에 바벨론이 있습니다. 이라크쪽에 있다가 지금 남쪽 예루살렘. 현재 이스라엘 쪽으로 공격을 해 오는데 오면서 그 왕이 점을 쳐요. 암몬족속으로 갈꺼냐, 아니면 유다 예루살렘으로 갈거냐 하고 점을 쳐요. 20절에, “칼이 암몬 족속의 랍바에 이르는 길과 유다 견고한 성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을 그리라” 그래놓고 “바벨론 왕이 갈랫길 곧 두 길 머리에 서서 점을 치되 살들을 흔들어 우상에게 묻고 희생의 간을 살펴서” 점을 치는데 점괘가 뭐가 나오느냐 하면, 왼쪽으로 나온게 아니고, 암몬쪽으로 가는게 아니고 오른쪽에 있는 “오른손에 예루살렘으로 갈 점괘를 얻었으므로” 이것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점괘에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는 우상이죠, 우상을 섬기는 나라로 하여금 예루살렘을 치도록 만들어요. 그러면 예루살렘은 어떻게 되느냐? 예루살렘은 그냥 함락당하고 그냥 멸망 당하느냐? 예루살렘이 멸망 당한다는 것은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언약으로 세워진 성전이 있던 곳이고, 언약의 백성, 유다 민족들이 있던 곳이에요.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예루살렘에 다 모여 있고, 세상의 그 나라 그 당시에 가장 이방 나라가운데 이방나라를 대표하는 대표 제국이라 할 수 있는 바벨론이 예루살렘으로 끌어당깁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에서 두가지 세계가 만나요.
한쪽은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백성과 언약이 없는 백성이 만난다 하는 것은 모든 인류에 있어서 예외없이 몽땅 다 예루살렘 전쟁에 거기에 합류시켰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거에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인간의 미래, 인간의 운명 그거는 예루살렘에 일어나는 전쟁의 성격으로 이미 결판 났다는 거에요. 예루살렘의 전쟁 결판으로. “뭐 진리가 무엇이냐? 인간의 진정한 해답은 무엇이냐?” 그것 찾을 것 없어요. 예루살렘에게서 무슨일이 일어났는가를 보면 돼요. 예루살렘에서.
그러면 예루살렘에서 전쟁을 일으켰다면, 그 전쟁 조차도 하나님의 언약 안에 담긴 더 깊은 내용이 전쟁을 통해서 역사화로 노골적으로 구체화 되는 계기가 되는겁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라도 그것 조차도 하나님의 언약에, 언약의 실현 속에 그것이 포함되어 있어요. 하나의 예루살렘의 멸망하는것도 예언이다 이말입니다. 예언이고, 예루살렘이 멸망하는것도 계시가 된다는 말은 장차 신약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예수님이 예루살렘 멸망의 내용까지 포함된 자신의 생애를 보낸다 이말입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에서 무슨일이 일어났는가? 에스겔 5장 1절에서 3절, 에스겔 5장 12절에서 13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인자야” 에스겔이죠. “너는 날카로운 칼을 취하여 삭도를 삼아 네 머리털과” 선지자 에스겔의 머리털, “수염을 깎아서 저울에 달아 나누었다가, 그 성읍을 에워싸는 날이 차거든 너는 터럭 삼분지 일은 성읍 안에서 불사르고 삼분지 일은 가지고 성읍 사방에서 칼로 치고 또 삼분지 일은 바람에 흩으라 내가 그 뒤를 따라 칼을 빼리라, 너는 터럭 중에서 조금을 가져 네 옷자락에 싸고, 또 그 가운데서 얼마를 가져 불에 던져 사르라 그 속에서 불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로 나오리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삼분의 일이 등장합니다. 삼분의 일이 무슨뜻이냐? 예루살렘을 이렇게 아주 멸망시키려면 그냥 멸망했다 하면 끝날 문제인데 하나님께서 삼분의 일을 나누어서 멸망시킵니다. 왜 그렇게 하는가? 왜? 예루살렘이 멸망한다는 것, 그것은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누가 관여되어있느냐 하면 유다 뿐만 아니고 이방나라, 대표 이방나라 바벨론도 하나님께서 일부러 끌어당겨서 점괘를 그쪽으로 몰아세워서 예루살렘의 멸망의 사건에 관여하게 한거에요.
전쟁이라 하는 것은 이미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전쟁을 했거든요. 10가지 재앙도 전쟁이고 유월절도 전쟁을 한겁니다. 전쟁이라 하는 것은 모든 것의, 인간의 본성이 다 노출되는 거에요. 유월절 다시한번 생각해 보세요. 유월절은 출애굽기 12장 2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설주의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로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여기 멸하는 자가 나와요. 천사입니다. 이게 무슨뜻이냐 하면 “인간들아, 너희들이 누구하고 싸워야 되는가? 너희들은 죽음을 유발하는 천사와 전쟁해야된다.”는 거에요. 인간들아.
“인간들, 너희 인간들끼리 전쟁하고 이긴다고 이긴게 아니야. 진짜 이길려면 진짜 너희들이 살려면 너희를 죽이려는 천사와 싸워서 이겨야 진짜 너희들은 산다”는 거에요.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죽음을 보낸 천사, 인간을 적으로 간주하셔가지고 멸하는자, 인간을 다 멸해버리는 자를 유월절날 보냈다는겁니다. 그것은 선악과 먹는날엔 정녕 죽으리라 하는 하나님의 취지가 일관성있게 계속 끌고가는거에요.
이번에 선거때 국민의 힘은 누구하고 싸웠습니까? 민주당. 민주당은 누구 하고 싸웠습니까? 국민의 힘. 뭐에요 그게? 그러면 승리입니까? 아니죠. 나를 죽이는 천사와 우리가 싸워 이길 수 있습니까? 못이기죠. 그게 바로 하나님 전쟁이에요. 어떤 인간도 이길 수 없습니다. 이것을 이스라엘은 알아야 되는데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에 성전지어놓고 계속해서 우상을 섬겼습니다. 뭐 우상 섬긴다는 대목은 여기 한, 두 대목이 아닙니다.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파괴시켰어요. 예루살렘을 파괴했다. 그러면 예루살렘은 없어지고 예루살렘이 없다는 말은 이 땅에 하나님의 백성이 없다는 뜻이에요. 없고 그리고 누가 하느냐? 예루살렘을 이방민족, 여호와 믿지 않는 다른 신을 믿는 민족으로 하여금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파괴시키고 불태워버리고 그리고 유다민족을 다 흩어버렸을 때에 최종 승리가 그들에게 가버린게 되죠.
그 예루살렘 멸망 당했을 때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어떻게 되는가? “그 살이 썩으며 그 눈이 구멍 속에서 썩으며 그 혀가 입속에서 썩을 것이요,”이렇게 되어있어요. 너무나 지당하죠. 이방사람한테는 이거는 당연한게 아니고 유대인, 언약이 있는 자들에게는 우상숭배하면 당연히 이런 저주 받는게 마땅합니다. 우상을 안섬기면 되는 거에요. 문제는 안섬길 위인이 없다는 거에요. 세상이 자기를 증거하고 싶지 하나님 증거한다는 것은 전부다 구라거든요. 거짓말인거에요. 자기 자신이 이만큼 잘났다. 나 하나님 믿어서 천당갔다. 그거 증거하고 싶은거에요. 그것 자체가 우상숭배잖아요. 거기서 누가 벗어납니까? 아무도 못벗어나죠.
여기 에스겔 5장에서 “삼분의 일은 성 안에서 불살라 버리고 삼분의 일은 성읍 사방으로 칼로 치고 삼분의 일은 바람에 흩어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하면 예루살렘을 그냥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거주민, 유다민족 조지고 그다음에 예루살렘에 칼로 대었던 그 이방 민족, 이방민족에게 예루살렘 쳤다는 것, 하나님의 백성을 언약을 건드렸다는 그 증거를 그들의 칼, 그 피묻은 칼자국에 증거를 남기고 그리고 그 승리감에 도취되어서 바벨론제국이 예루살렘 유다나라 섬겼다고, 그당시 바벨론 제국이 중동에 전역을 다 차지했으니까, 온 처 에 흩어지겠죠. 이 말은 예루살렘, 여호와 믿는 예루살렘 마저 우리가 꺾어버렸다. 우리 신, 마르둑 신이 이겼다는 사실을 그들이 지배하고 있는 전역에다가 다 확대되겠죠. 이거는 뭐냐? 처절하게 예루살렘이 망했다는 사실이 실려서 확대되는거에요. 이제 죽었어. 이제 이방민족 죽었습니다.
하나님 여호와 믿는 백성을 쳤다는 그 사실을 품고 이방민족 전체에 포로잡혀가는 유대인들이 그들이 흩어지게 된겁니다. 이제 이방민족은 죽었습니다. 이제 그들이 썩을 차례에요. 그들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에 일어났던 그 처참한 지경을 하나님이 인간을 멸해버리는 그 광경을 그들은 그대로 답습을 해야되는겁니다. 이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이 처참하게 유대민족을 침으로써 전쟁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숨겨진 살인 충동, 살인 충동의 광기를 만족시키는 현장이 전쟁터입니다.
평소에 점잖은 사람 전쟁터에 나가보세요. 이거는 미친인간돼요. 사이코입니다. 사람을 죽임으로써 예전에 미처몰랐어요. 이런 쾌감을. 이런 희열을. 사람을 죽임으로써 자기가 신이 된다는 것. 자기 속에 자기를 지배 했던 악마적인 살인 충동의 노예가 되어버려요. 하나의 자기가 자기자신의 칼날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미워서 죽이는 것은 밉다는 감정은 있는데, 전쟁터에는 어느정도로 악해지느냐 하면, 안미운데 그냥 죽여요. 밉지도 않은데 죽여요. 이거는 내 속에 있는 원초적인 살인충동은 내 감정보다 우세하다는 뜻입니다.
악마의 정신은 나의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통제력 보다 우위에 있다, 월등하다는겁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은 이세상의 어떤 도성들 보다 월등합니다. 그래서 유다민족도 날라가버리고 예루살렘도 없어지고 이세상에 다 없어지고, 예루살렘 불타버렸으니까. 남아있는 것은 우상섬기는 이방 민족만 천하를 호령하는 세상. 이 세상이 바로 끝까지 가는 세상입니다.
그러면 스가랴 오늘 본문에 있어서 오늘 예언에 의하면, 예루살렘 망하고 난 뒤에, 스가랴에 의하면 그때 예루살렘을 친 그들이 이제는 “그 살이 썩으며 그 눈이 구멍 속에서 썩으며 그 혀가 입속에서 썩을 것이요, 그들이 피차 서로가 서로를 붙들고 칼로 찌르고” 서로가 서로끼리 붙어요. 이스라엘 역사속에는요 자기끼리 칼로 죽인 사건들이 여러번 나와요. 유다의 아사나라 전쟁할때도 그랬고요. 그다음에 기드온 전쟁할 때 미디안 군사끼리 자기들이 만들어낸 꿈속에서 칼로 찔러 죽었다고 했어요. 자기들 끼리.
자기들끼리 찌른다는 말은 장차 메시아가 오셔가지고 예루살렘에서, 예루살렘 편, 유다편을 들 때에는 그때 유다를 지배했던 이방민족들에게 이러한 처참한 참혹한 저주가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예루살렘이 이미 그들은 없어진줄로 아는데 어디서 예루살렘이 그렇게 되는가? 아까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예루살렘을 치게되면 유다민족들이 흩어지게되고 흩어진 하나하나가 전부다 알알이가 돼서 반짝반짝 빛나게 돼요.
온 천지에 온 이방 민족 속에 예루살렘 아닌 곳이 없게되었어요. 확산된 예루살렘. 흩어졌으니까. 다시 말해서 이방 민족은 예루살렘을 침으로 말미암아 불씨가 온 들판에 잡풀에 다 튄 것처럼 그들은 이제 건들지 말아야 될 자를 건들이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거에요. 그러면 그 시작은 뭐냐? 유대인이냐? 아니죠. 그 시작은 뭐냐? 그시작은 바로 누가복음 13장 33절에서 34절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끝자락에 왔어요.
자기 인생을 마감하면서 헤롯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헤롯보고 여우라고 했어요. “저 여우에게 이르러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3일입니다. 3일이라는 말은 예루살렘을 삼분의 일, 삼분의 일, 삼분의 일씩 구분했다 이말이죠. 삼분의 일, 삼분의 일 구분을 그냥 하루에 다 멸망시킨게 아니고 삼분의 일 남겨줌으로써 하나님께서 뭐를 들추어 내느냐 하면, 예루살렘이 멸망하되 멸망하는 그 절차, 그 절차 하나하나가 예수그리스도의 행하실 생애, 그의 하신 일을 내부적으로 세밀하게 나누어서 보여주는 역할이 되는거에요.
예수님이 예루살렘 멸망한다는 이 예언, 이 계시, 아까 계시라고했죠. 멸망을 자기 몸에 연합을 시켜요. 자기 몸으로 끌어당깁니다. 끌어당기면서 예수님의 생애가 보여주는 그 순서가 예루살렘이 순서대로 구분지어서 삼등분해서 구분지었던 그 과정대로 이 세상이 주님에 의해서 멸망당하는 모습을 보여주는겁니다. 그렇게 그런식으로 하나님께서 일해서 하나님께서 얻고자하는게 뭐냐? 그것은 예루살렘을 바벨론이 건드린게 아니고 결국은 너희들이 주의 이름, 예수님을 건드린게 된다는 식으로 주님께서는 정리정돈을 해버린거에요.
예루살렘은 뭐하는곳이냐?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모든 일이 완성되고 마감되는거에요. “오늘과 내일과 모레, 삼일이 지나고 난뒤에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일이 없다.” 이래 돼있어요. 예루살렘을 초점으로 해서 주께서는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하고싶어서 예루살렘속에 집중합니다. 어디 근거해서? 바로 스가랴 오늘 본문에 근거해서. 예루살렘은 예루살렘 나름대로의 성취해야될 예언의 성취가 있어요. 거기서 뭐가모인다? 유다인과 언약이 없는 이방민족 모조리 다 유대인처럼 다 완전히 멸망해야 될 그래서 정녕 죽으리라가 수립돼야될 장소를 예루살렘이 되는거에요.
그 예루살렘이 어디있는데? 예수님 본인이 예루살렘이에요. 예수님 본인이. 왜? 예루살렘에서 예언을 다 이루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이 본인이에요. 그러면 오늘날 예루살렘은 어디있느냐? 그 예루살렘의 분신들이 누구냐? 하나님의 바로 오늘 본문의 유다백성이라하는 것은 예수님과 언약관계, 언약에 같이 예수님의 죽음과 동행하는 사람. 예수님의 증인들, 그들이 오늘날의 유대인이고 오늘날의 이스라엘이고 오늘날의 예루살렘들이에요. 그들을 건드린다는 것은 곧 그들이 저주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오순절날 성령을 통해서 전 세계에다가 하나님의 새로운 이스라엘을 확장시키죠. 그 이스라엘은 뭐냐? 예수님 증인이에요. 자기증인이 아니고, 나 아니고 성도라 이말이죠. 구원 받은 나가 아니고 성도를 말하는거에요. 예수님의 몸의 일부로 들어간 사람을 말하는 겁니다. 반짝이죠 반짝이. 아이들 노는 그 반짝반짝 빛나는 것 있잖아요. 뭐 쥬스나 물에 반짝이 넣으면 반짝반짝 빛나죠? 빛을 받아가지고. 그 반짝이 하나하나가 성도 하나하나에요.
그러면 그렇게 해서 결국은 하나님께서 처리하시는건 뭐냐? 그게 요한계시록 8장에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8장에 보면 일곱 천사가 있는데 8장 6절에, “일곱 나팔 가진 일곱 천사가 나팔 불기를 예비하더라,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서” 삼분의 일입니다. 땅의 삼분의 일이 타요. 아까 여러분 삼분의 일 어디서 기억했습니까? 예루살렘이죠?
하나님의 언약의 도성 예루살렘이 삼분의 일이 타죠. 삼분의 일, 삼분의 일, 삼분의 일 마지막 다 탄다는 말은 삼분의 일, 삼분의 일, 삼분의 일 모이면 예루살렘 전체가 삼분의 일 더하기 삼분의 일 더하기 삼분의 일이 1이 되는 것처럼 이제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예루살렘의 주민, 그 성도가 그들의 우상숭배 죄로 인하여 철저하게 이방나라로 흩어졌어요. 바람에 흩어져서 죽는다고 했으니까. 세 번째 삼분의 일이 바람에 흩어지는거에요.
첫 번째는 예루살렘 도성에서 죽고 두 번째는 예루살렘에서 칼로 죽고, 칼로 죽는다는 것은 이방 민족의 칼날이 동원되었다는 뜻이고 세 번째는 바람에 흩어졌다. 결국은 이세상 모든 바람부는 곳에 다 흩어지게 되는거에요. 누가? 언약이 흩어지는거에요. 언약속에 뭐가? 어떤 것이 저주 받는거 맞느냐? 어떤자가 저주 받느냐가 전세계에 흩어지게 되는겁니다.
그 흩어진 저주의 성에 의해서 요한계시록 8장에 보면 천사가 그대로 실행에 옮기는데 첫 번째는 뭐냐? 자연세계가 삼분의 일 타버리고 그다음에 8절에 두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부는데 두 번째 삼분의 일은 뭐냐? 그는 자연에 살고 있는 생명에 죽어버리고, 세 번째 천사 10절에 세 번째 천사가 나팔 불 때 여기에 비로소 큰 별, 사탄이죠. 악마죠. 큰별, 쑥이라는 이름의 큰 별이 떨어지게 되있어요.
비로소 여자의 후손에게 대들던 뱀의 후손이 그 정체를 드러낼 때 예수님의 전쟁은 마감이 되는거에요. 그것이 십자가 안에 다 함축이 되어있는거에요. 함축이 된 이 사실을 이 자연세계에 인간죽고 자연 망하고 인간 죽고 악마까지 심판보내는 그 절차가 예루살렘 언약 안에 내포되어있는거에요. 내포되어 있는 것을 삼분의 일, 삼분의 일, 삼분의 일로 그걸 구체화해서 펼쳐지고 그 펼쳐진 것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예루살렘에서 한때 두 때 반때라 해서 다 이루진겁니다. 십자가에서.
왜? 시간에 모든 시간은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고 예수님안에서 마감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시간안에 놓여있어요. 언약적 시간안에 놓여있습니다. 멀쩡했던 다윗때 예루살렘. 뭐 대단한 예루살렘이죠. 솔로몬이 성전지었던 예루살렘. 그러나 필연적으로 예루살렘, 구역적 도성은 완전하게 불바다, 불태워져야 돼요. 시체가 넘쳐나야 돼요. 살아남은 자는 “오늘은 네 아이 먹자, 내일은 내 아이 먹고.” 이런식으로 처참하게 돼요.
그게 저주 받은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에 실상을 하나님은 유다민족 예루살렘 주민을 통해서 낱낱이 보여줍니다. 인간은 살지 못합니다. 어느인간도 살지 못합니다. 사는 것은 성도입니다. 인간은 자기 증인이죠. 선악과 증인은 인간이에요. 그러나 성도는 생명나무의 증인, 그것을 성도라고합니다. 왜? 출처가 예수그리스도의 다 이루심에서 나왔기 때문에. 언약의 백성이기 때문에.
오순절 성령와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어라” 이 세상은 어딜가도 삼분의 일 삼분의 일 거쳐서 결국 그 정체가 마귀가 선악과 따먹을 때 마귀가 꼬셨다는 사실을 결국 감추지 못하고 마지막 예수그리스도에서 다 노출되는 이 세상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지금도 부지런히 지옥 가는게 아니고 그들이 지옥을 만들고 있어요. 지옥을 만드는 중입니다. 인간은. 그 인간이 지옥 만들 때 이야기하죠. “나는 열심히 산다.”고요. 전쟁나보세요. 자기안에 있는 살인 충동이 말릴 세도 없이 나올겁니다. 그게 좀 완화된게 뭐냐하면 바로 스포츠에요. 야구, 축구, 그리고 그것이 시시하다 싶으면 도박, 마작 이런 것. 다 이게 뭐냐? 살인 충동에서 나와요.
“제발 좀 내앞에서 죽어도. 난 널 죽이고 싶다.” 그게 바로 악마였고 주께서는 죽음을 당함으로써 모든 인간속에 악마의 그 본성이 살아있기에 인간은 자기 증인으로서 지옥간다는 사실, 그것을 언약으로 안게되는겁니다. 십자가의 공동체험으로, 죽음의 체험으로 알게된 사람은 오직 더 이상 자기를 자랑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피만 자랑하는 성도가 될겁니다. 그들이 바로 성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예언대로 될 때에 인간이 지킬 예언은 없었고 모조리 다 예수님 홀로 다 지킬 예언인 것을 우리가 왜 몰랐습니까? 우리 살 궁리 하지 말고 주님이 살아서 우리 안에 들어왔을 때 오히려 제대로 죽게 된, 십자가에 함께 죽은 그 죽음을 자랑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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