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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스가랴 14:16-19 / 초막절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스가랴

스가랴 14:16-19 / 초막절

정인순 2024. 5. 26. 19:28

음성 동영상 Youtube

 

초막절 

 

이근호
2024년 5월 8일           

 

본문 말씀: 스가랴 14: 16-19

(14:16)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14:17) 천하 만국 중에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14:18) 만일 애굽 족속이 올라오지 아니할 때에는 창일함이 있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열국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라

(14:19) 애굽 사람이나 열국 사람이나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의 받을 벌이 이러하니라

예루살렘을 공격했던 자들은 실은 하나님의 일관된 말씀 완성의 용도로 충실하게 쓰여질 결과들 중의 하나입니다. 이방민족은 그들의 제국 안에서 여호와의 하나님의 흔적을 아예 싹 지우고 싶어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통치 이념에 해당되지 않는 그 어떤 것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을 불태우므로서 나름대로 그들은 성공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그 어떤 노력과 행함으로 지워지지 않습니다. 도리어 인간이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 성취에서 인간은 철저하게 배제됨을 분명히 보여주십니다. 이방인들은 율법을 모르고 있다는 그 자체로 저주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율법을 받았지만 그들이 그 율법을 지키지 못해서 저주입니다. 이래도 저주요 저래도 저주입니다. 저주 대상이 아닌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들의 저주성은 인간들의 행함으로 나옵니다. 왜 인간들은 기어이 자기 행함에 대한 가치와 미련을 못 버리는 걸까요?

그것은 본인이 ‘살아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살아 있다’는 말은 곧 ‘나의 행함’도 가치 있게 살아 있다‘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그 행함을 발휘해서 이 세상을 사는 보람과 행복을 얻고자 합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있어서 말씀이니 율법이니 하는 것보다 자기 행함이 최우선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율법은 이러한 인간들의 행함 위주에 의해서는 사라지지 않고 엄연히 살아 있고 또 그 완성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초막절은 율법을 통해서 백성에게 전달된 절기 중의 하나입니다. 절기란 인간의 전체 시간을 절기로 압축하고 그 대미를 장식하는 것은 초막절입니다.

그런데 이 절기에 대해서 내용상 두 노선으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무교절→ 맥추절→수장절’로 이어지는 노선입니다.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칠 일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 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지니라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출 23:15-16)

또 다른 노선은, ‘유월절(무교절)→칠칠절→초막절’입니다. “너의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신 16:16) 이 모든 절기의 시작은 ‘유월절 어린 양의 죽음’입니다. 곧 특이한 짐승 ‘피 흘려야 될 짐승’의 죽음이 모든 절기로 확장되어 내용을 가득 채웁니다.

그런데 ‘무교절→맥추절→수장절’ 노선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백성들이 농사 짓고 얻을 수 있는 열매에 관한 겁니다. 즉 열매의 싹이 돋고 그 다음에는 본격적으로 열매 추수 작업에 들어가고 마지막에는 추수를 끝내고 저장하게 되어 그 저장된 열매를 백성들이 먹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약속의 땅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으로 사는 영생의 삶이 됩니다.

반면에서 ‘유월절(무교절) →칠칠절→초막절’ 노선은 어린양의 죽음과 그 내용이 담긴 율법을 시내산으로부터 수여받는 것과 그 수여받은 율법 안에 들어 있는 ‘어린양의 죽음’에 실제적으로 같이 참여하기 위해 광야의 초막생활을 실시하는 겁니다. 이 두 노선을 합치면 이렇게 됩니다.

약속의 땅에서 얻을 양식은 전부 어린양의 죽음에서 비롯되고 그 죽음이 내용으로 담기게 된다는 겁니다. 한 알의 밀이 죽어서 많은 열매를 얻는 원칙입니다.(요 12:24) 그런데 문제는 이 율법에는 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저주도 아울려 낳는다는 겁니다. 이방인들은 율법을 아에 몰라서 저주받고, 이스라엘은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해서 저주받습니다.

전체적으로 말해서 로마서 3:19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인간 자체가 저주 아래 있다는 말은 인간이 내놓은 모든 행함이 저주받을 짓만 내어놓는다는 말입니다.

율법이나 절기에 대한 구약적 안목을 가지고 끝까지 지켜보겠다는 오기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의 심정이었습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은 스데반 집사의 죽음에도 관여하고 왜 적극적으로 나서서 예수 믿는 자를 체포해서 죽음에 넘길려고 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평소에 하신 말씀이 그들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은 율법의 행함으로 결코 영생을 얻지 못하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셔야 영생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요 6:53) 이것은 인간에게 있어 가장 신뢰할만한 자기 행함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으로 이해되는 겁니다. 초막절이라는 율법을 지키는 것도 같은 태도를 보입니다. 민수기 29:12에서부터 초막절에 동원되는 제물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첫째부터 수송아지 13마리를 드리고 수양도 2마리, 1년 된 수양은 매일 14마리, 상번제로 숫양 두 마리, 엄소 한 마리, 고운가루를 바칩니다. 이런 율법을 제공받으면 그 당시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겠습니까? “우리는 저주받았으니 이 제사를 드린 들 우리는 저주받을 뿐이다”라고 생각했겠습니까?

도리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자부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초막절의 완성이 아니었습니다. 신약적 관점에서의 초막절 완성은 요한복음 7장에 나옵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요 7:37-38)

예수님께서 초막절 절기에 참여하셔서 예수님 자신으로 인해 초막절 율법의 완성을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오직 예수님 홀로 행하신 율례요 절기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근원적인 살해 의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요 7:19-20)

결국 인간들은 예수님을 죽여 없이는 식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심성으로 가득차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 행함으로 율법을 지켜보겠다는 의지가 결국 예수님을 살해하는 결과를 낳고 이것이 인간은 근원적으로 저주받은 자로 살고 있을 말해주는 겁니다. 복, 초막절 완성에서 오는 영생은 율법을 홀로 이루어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모든 행위가 죄임을 지적할, 그 결과로 나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마지막 때의 주님의 수장절 열매를 추수하시는 방식입니다. 인간의 믿음이 아니라 말씀 완성으로 나오는 믿음으로 구원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말씀 완성에서 오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의해서 철거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3강-스가랴 14장 16-19절(초막절) 240508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스가랴 14장 16절에서 19절까지입니다.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천하 만국 중에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 오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만일 애굽 족속이 올라 오지 아니할 때에는 창일함이 있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열국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라, 애굽 사람이나 열국 사람이나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의 받을 벌이 이러하니라”

여기에 예루살렘이 멸망 당했습니다. 바벨론 나라라는 이방민족에게 멸망을 당할 때에 그때 바벨론 사람은 그들 나름대로의 예루살렘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예루살렘이라는 도시가 건설된 그 취지하고 바벨론 나라가 국가가 운영하는 취지하고 맞지 않기 때문에 제거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물론 그 백성들은 자기 나라에 끌고가서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바벨론 나라가 얻고자 하는건 뭐냐?

‘이 바벨론 제국 아래에 있는 어떤 인간의 생각과 어떤 인간의 시도도 바벨론 제국의 이념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바벨론 제국의 건국 이념, 통치 이념을 벗어날 수는 없다’를 공고히 하는 겁니다. 확고히 하는 거에요. 그래서 그들은 성공했어요. 왜? 예루살렘을 멸망시켰으니까요. 이것은 바로 애굽의 바로왕 밑에 있는 히브리인들도 같은 처지에 있었습니다. 바로왕, 애굽 나라의 통치 이념에 거부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니가 애굽에 사는 이상 이 애굽 나라의 건국 이념에 충실히 따라야 된다는 것, 그 조건 하에 살려줄게”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의 예언에 의하면 “예루살렘을 치러왔던 그 이방민족들이 초막절을 지키지 아니하면 내가 비오지 않는 벌을 내리리라”하는 예언이 오늘 본문 내용이거든요. 여기에 예루살렘을 그냥 완전히 멸망시켰습니다. BC586년에. 완전히 멸망시켰으면 예루살렘사람들이 믿던 그 율법이라는 것도 여호와 하나님이 줬다는 그 여호와 하나님의, 그들의 신의 계명도 완전히 말살된 걸로 그들은 그대로 처리했는데 분명히 예루살렘을 접수했고 점령했는데 초막절이라는게 툭 튀어나오거든요. 초막절.

예루살렘을 정복한 것이 율법마저 마저 제압할 수 없었던 일인가? 라는 생각을 그들은 가져야하는 겁니다. 분명히 다 죽였는데, 다 없애 버렸는데 흔적없이 다 청소했는데 어떻게 그 초막절이라는 율법은 그들은 맹렬한 자신의 군대에 의해서 이게 짓밟히지 않고 보란 듯이 그게 엄연히 살아있느냐 이말이죠. 예루살렘, 그것을 연결시킬려면 이래요. 예루살렘의 멸망이 잠자고 있었던 하나님의 율법을 깨웠다. 자극시켰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겁니다. 달리 이야기하면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그 율법을 한번 지켜보겠다는 예루살렘 거민, 유다 민족은 그동안 율법을 제대로 지킬수도 없어서 망했다’라는 겁니다.

문장을 더 약간 길게 끌어보면 소위 유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지키면, 지키면 복이 오거든요. 못지키면 저주가 오지만, 그러나 그 저주는 귀에 안들어오고 복을 받으니까 그 복 받겠다고 지켰던 그 율법이 제대로 율법을 지킬려면 인간의 행함으로 율법을 지키겠다는 그들이 같은 인간에 속한 이방민족에 의해서 제거당할 때 비로소 본격적으로 율법은 완성된다. 그렇게 되는겁니다.

이 말을 다시 이야기하면 율법이 완성될려면 어떤 절차가 필요한데 그것은 바로 소위 율법을 안다는 쪽도 율법 지키는데 실패함으로 저주받아야 되고 그리고 아예 율법이고 여호와에 관해서 모든 것을 없애 버릴려는 그들이 예루살렘을 빈 공터로 만들었는데 그 빈 공터가 율법이 시작하는 기초가 되고 현장이 된다는 사실이에요. 이방민족들이 율법 지키는 민족을 없앰으로써 율법도 같이 없어진다고 했을 때 그들은 “아싸, 성공했다.”라고 여기는 그 빈 공간, 그 빈공간이 도리어 율법완성에 그들이 도와준 셈이 되는거에요.

아무도 율법완성을 막을자는 없었다. 그들의 군사력, 강대한 정치력 어떤것도 말씀 자체가 살아있는데 있어서 어떤것도 영원한 방해물이 될 수 없다 그렇게 되는겁니다. 방해물이 될 수 없는데 뭐 그걸로 이야기가 끝나는게 아니고 예루살렘을 쳤다고 치고 이 열국에 남은자들이 초막절을 지키러 오너라 라고 되어있는거에요. 초막절. 그러면 율법은 이제는 본격적으로 한번 슬 팔걷고 율법한번 시작해봐?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한테는 필요치 않다’는 것은 이방민족이에요.

그런데 그 율법이 필요없다는데 그 율법이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오늘 본문 초막절에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요 “율법 안지키면 너희 저주받는다” 이런 이야기 하거든요. 분명히 저주받는다는 것을 없애서 이제는 저주가 없다고 자부했는데 없다고 자부한 그것이 진짜배기 저주의 율법이 얼굴을 내미는 하나의 계기가 된겁니다. 여러분들이 이 율법에 대해서 이방민족이 이렇게 이스라엘 율법에 대한 그들의 강력한 반발, 부정, 거부 이거 생각하면 창세기 2장과 3장에서 마귀가 뱀이 “선악과 따먹으라”한 취지가 지금도 이 본문과 더불어서 살아있다는 것을 여러분 느낄거에요.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말 자체가 악마가 인간에게 앞장세워서 계속 쑤시고 있는게 뭐냐하면 그 죽는다는 것, 따먹으면 안된다는 것, 금기, 금지가 니 생애에 있어서 부담되지? 부담스럽지 않느냐? 너 앞에서 하지마라가 있는 이상 니가 온전한 자유라고 느낄 수 있겠어? 뭔가 부담이 되는 인생이 되지 않겠어? 하나님이 너보고 뭐라고 했어? 따먹지 마라고 해? 아예 이참에 따먹지 말라는 그 시험문제를 찢으면 어떻겠어? 아예 없애버리면, 따먹지 말라 그 자체를 없애버리면 너는 이제부터 누가 너에게 하라, 하지마라 명령으로부터 니가 자유케 될수 있지 않느냐?

요거 누구 아이디어냐? 마귀 아이디어입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여러분, 인간이 따먹었죠. 뱀이 부추겨서 따먹었다 이말이죠. 따먹고 난 뒤에는 악마가 자기 딴엔 성공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진짜 정녕 죽으리라의 시작점이었습니다. 정녕 죽으리라의 시작점. 이제 본격적으로 저주가 개시될 판입니다. 그 저주를 개시할 때 하나님께서 준비한건 뭐냐? 율법을 준비해놨어요. 율법을 동원시켜서 이방민족은 율법을 모르기 때문에 저주 받고, 이스라엘은 율법을 받았는데 못지켜서 저주받고, 이래도 저주받고 저래도 저주받고. 정녕죽으리라의 저주의 세계를 확실히 하나님께서는 이제 개시를 하는겁니다.

저주가 저주받는 세계가 될 때 하나님께서 얻고자 하는 것은 바로 말씀의 성취에요. 하나님은 자기 말씀만 성취되면 끝나는 거에요. 인간같은 존재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저주받을 자가 뭐 그리 주장할 권한과 권리는 없어요. 똑같은 문장인데 제가 똑같은 문장을 톤을 달리해서 말씀드릴게요. “하나님이여, 이런일은 절대로 나에게 있어서는 안됩니다.(슬픈톤)”요런 톤, “하나님이여, 저한테 제인생에 이런일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요걸 글로 쓰면요, 하나님 저에게는 절대로 이런일이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울상이 되어서 그렇게 이야기하죠.

똑같은 글자에 똑같은 문장을 하겠습니다. “하나님 저한테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 일어났네요.”하고 활짝 웃는 경우. 그 두가지 경우. 똑같은 문장인데 반색하는거에요. 왜 이런 기적이지? 똑같은 문장인데 결과가 정반대 결과가 나타나는거에요. 하나는 “이런 저주가 일어나면 안되죠. 내인생을 이렇게 망가뜨리면 하나님 안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내가 예상치도 않은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정말 싫어요”하는 느낌으로 본다면, 또 한사람은 뭐냐? “저에게 이런 영생을 얻는 놀라운 일이 어찌 일어나선 안될일이 일어났습니까?”하는거에요. 일어나선 안될 일이 일어났는데 둘다 어디서 나오는가? 율법에서 주어지는거에요.

율법이 갖고있는 것이 복과 저주 두 개 다 갖고 있어요. 한쪽은 뭐냐? 한쪽은 율법을 무시하거나 안그러면 율법을 지킬려고 애써도 실패한 쪽에서 이제 자기에게 주어진 것은 저주밖에 없기 때문에 그 저주가 싫은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앞에 짜증내는겁니다. “내 인생이 왜이렇게 꼬입니까? 나를 이렇게 괴롭게해서 하나님께 득되는게 뭡니까? 왜이렇게 힘들게 합니까? 제가 불행스러운 인상을 가지고 살아가야 그래야 주님이 그렇게 속이 시원한가요?” 뭐 이런거.

근데 똑같은 율법의 작용을 했는데 “하나님, 믿음도 없는 저에게 어떻게 믿음이 생기고 소망이 없는 저에게 어떻게 소망이 생기고 사랑도 전혀없는 저에게 어떻게 사랑이 생긴거죠? 그거다 율법이 성취한 결과물인거죠 그지요?” 하고 묻는, 활짝 화색하면서 묻는 그러한 자세. 하나님께서는 두가지 인생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러니까 이 두가지 인생을 만들어 내면서 그 인생에 찾아오는 것은 단 하나에요. 율법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율법에서 어떻게 해서 저주가 나오고 율법에서 어떻게, 동일한 율법에서 어떻게 저주가 나오고 동일한 율법에서 어떻게 생명이, 영생이, 복이 생산되는가? 그 메커니즘, 시스템 체계가 어떤 체계기 때문에 거기서 영생이 나오고 동일한 체계에 저주가 나오는가? 그걸 알면 되겠죠. 준비됐나요? 그것만 알면 돼요. 그걸 아는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걸 알게 하시느냐 하면, 무교절 그다음에 맥추절, 수장절 이 노선 하나 딱 끄집어내요.

그리고 동일한 절기인데요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 이 노선을 딱 끄집어내요. 동일한 날이에요. 동일한 절긴데 앞의 절기는 뭐냐하면 그 약속에 땅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농사지을 때 농사짓게 되면 수확이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 수확하는 것, 수확하는 그 수확물과 그 약속의 땅에 사는 너의 인생의 팔자가 일치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그게 농사 스케줄로 짠 절기 3가지에요. 무교절, 맥추절, 수장절.

무교절은 뭐냐하면 열매가 처음 맺히기 시작하는 것. 그리고 맥추절은 본격적으로 추수를 한창 시작하는, 추수를 시작하게되는 것, 본격적으로 추수하는거요. 세 번째 수장절이 추수 끝, 빨래 끝 하는 것처럼 추수 끝나는 것. 추수와 관련되어있어요. 열매 맺고 열매를 거두고 열매를 거두어서 저장하고, 수장. 저장하는 그 스케줄이에요. 이 절기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시간을 압축해서 절기로 만들고 그 절기에 대미를 장식하는 것이 뭐냐하면 수장절이에요. 우리가 먹을 열매도 없이 그냥 저주받아 죽어 마땅한데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 기거한다는 이유 때문에 열매도 맺히고 그 열매를 먹는 우리도 하나님의 열매라고 간주 당하고, 간주 되고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주신 열매로서 영생을 누리는 백성이 된다는 그 내용으로 함축되어있는거에요. 압축되어있는 것이 절기입니다.

그게 바로 무교절, 맥추절, 수장절. 근데 똑같은 날짜인데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은 뭐냐하면 그 열매가 나올 수 있는 그 시스템에 바탕 시스템으로 표현을 한거에요. 유월절은 뭐냐하면 양이, 특이한 양이 죽은날이에요. 양의 죽음입니다. 하나님이 간택한 선택된 그 한 마리의 양이 피를 발라서 저주의 대상인 인간을 향하여 저주에서 면제시켜주기 위해서 발랐던 그 피가 나와야될 그 양의 죽음을 유월절이에요.

그다음에 칠칠절은 뭐냐하면, 시내산에서 모세가 율법을 받는거에요. 그럼 그 두가지를 연결시켜봅시다. 하나님이 어린양이 죽었다는 것을 그 죽은 사건으로, 그 시점으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고 그 죽음 사건을 뭐의 내용이냐? 율법을 주면서 율법안에 충실한 온전한 내용으로 율법속에 그 어린양의 죽음이 실려서 율법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지게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은 율법대로 이제 제사를 드려야 되겠죠. 그 유월절 어린양을 반복하는겁니다.

세 번째 초막절은 뭐냐하면, 초막절은 그 어린양의 죽음에 실제 그 내용속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일주일동안 초막을 짓고 광야 때의 체험을 초막절 율법안에다가 담아보는거에요. 초막절에서 초막짓고 힘든 광야생활을 하면서 그들의 죽음을 몸소 체험하는 축제가, 절기가 바로 초막절입니다. 그 죽음은 누구로부터 야기된 죽음이냐 하면 유월절의 어린양으로부터 계속 주어지는 죽음이에요. 주님의 죽음에 합류하는 그런 죽음 체험을 초막절에 하게 되는겁니다. 근데 그 두 개가 같은 날이에요. 유월절은 무교절하고 같은 날이고 맥추절은 칠칠절하고 같은 날이고 수장절은 초막절과 같은 날이에요.

근데 오늘 본문에서는 뭐냐? 수장절로 되어있지 않고 뭐냐? 초막절로 되어있어요. 광야 생활을 경험하는, “이 어린양의 죽음에 참여하지 않는자는 누구든지 저주를 받을 것이다. 재앙을 받을 것이라”라고 하는거에요. 그러면 여기서 더 깊이 들어가봅시다. 예를 들어서 2023년도에 유월절, 그리고 칠칠절, 초막절 지켰습니다. 그러면 2024년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작년도 지켰으니까, 그걸로 퉁칠까요? 안지켜도 되는겁니까? 아니죠. 또 유월절이 반복돼요. 그리고 칠칠절도 반복되고 초막절도 반복돼요. 반복이 된다는 말은 시간이 서킷, 서킷이 뭐냐하면 운동할 때 서킷 트레이닝있거든요. 쉬지않고, 멈추지 않고 계속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것 또는 로테이션한다. 로테이션. 그말도 적당하죠.

계속 시간을 돌리고 돌리고 계속 돌려보는거에요. 율법의 로테이션을 계속 돌리는 이유가 뭐냐? 그 율법 자체가 가만히 있지 않고 방향성을 띄고있다는거에요. 어디로 향하고 있어요 이게. 유월절부터 시작한 그것이 유월절의 죽음이 맥추절에도 멈추지 않고 그안에 내재되어있다가 그 절기의 대미는 초막절이에요. 초막절에서 양의 죽음이 그 초막절 참여하는 이스라엘이라는 인간의 죽음으로 대미를 장식하는겁니다. 양의 죽음이 인간죽음으로 발현되는거에요. 표상되는거에요. “양이 죽었으니까 우리는 덕 보자.” 이게 아니라 양이 죽었으니까 우리도 양죽음 따라 우리가 죽어야 될 책임을 율법이, 절기가 가진 율법 내용이 우리에게 부여한거에요. 그걸 못지키면 어떻게 되냐? 못지키면 저주 받는거죠.

그래서 예루살렘은 불타버렸어요. 제대로 못지켰어요. 사람들이 율법을 못지켰다. 설교 처음으로 돌아갑시다. ‘사람들이 율법을 못지켰다. 또는 이방인들은 율법 자체를 아예 무시했다.’ 그것이 율법의 완성을 멈춘다든지 끊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게 아니고 반대로 생각해야돼요. 이방인들의 그 무지와 유대인들의 이스라엘의 그 무능이 오히려 율법을 완성하는데로 꾸역꾸역 끌고가는 하나의 재료가 되고 에너지가 되는거에요. 인간이 자기 행함으로 지키지 못하는 것을 율법안에 있는 유월절 어린양이 스스로 그것을 율법을 완성시켜서 기어이 이 세 절기를 완료를 시키는, 마감을 시키는 그 날을 향하여 율법이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 진행 과정 속에서 인간의 모든 행위는 배제되고 거부되는거에요.

여기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인간은, 자, 이방인이 예루살렘에 대해서 그걸 다 쳤거든요. 분노로서 다 쳤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섭섭하고. 근데 이방인도 그렇고 유대인도 그렇고 문제는 항상 뭐만 생각하느냐 하면 ‘내 인생의 왜 내맘대로 안되는가? 왜 내뜻대로 안되고 왜 힘드느냐?’ 이것만 생각하는거에요. “하나님이여, 도대체 뭘 어떻게 해 드리면 내인생이 확 풀리겠습니까? 뭐 다리미질 해가지고 반듯하게 풀릴수 있는 비법이 뭡니까?”를 생각하는거에요.

근데 율법적 관점에서 보면 바로 그것이 저주 받는 태도에요. 율법에 의해서 저주 받는 자는 똑 그와같은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말해서 ‘내가 어떤 행하는데 그 행함에 내가 예상한 결과가 필히 도출 되어야 돼’라는 것을 인간들은 이미 고집하고있고 고수하고있습니다. 자기 행함이 아무짝도 소용없다는 것은 인간은 결코 최후적으로 그걸 용납하지 않아요. 그런 것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율법을 딱 초막절을 하니까 또 유월절을 하니까 그들은 옛날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뭐 성경에 보니까 구약에 보니까 그들이 유월절을 뭐 무시하고 율법을 무시해서 이방신을 믿어서 바알, 아세라 신을 믿어서 망했다, 그걸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귀담아 들었어요.

“우리는 그와 같은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제대로 지키자. 성심성의껏, 믿음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으로 다하자”고 열심을 냈던거에요. 그런데 그 유대인들이 뭐가 잘못되었느냐 하면 율법을 지키는데 있어서의 자기의 행함이 필수적 요건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한거에요. 필수적 요건으로.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예를 들고 여러분들이 유대, 그당시 율법 줬던 유대인 이스라엘사람이라면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 것인지 스스로 한번 상상해 보세요.

민수기 29장에 보면 초막절 지키는 법이 상세하게 나와있습니다. 수소를 잡는데, 첫날에 열세마리 두 번째 열두마리 그다음에 열한마리 그다음에 열 마리 아홉 마리 여덟마리 일곱 마리 해가지고 이렇게 1주하면 총 몇 마리 되느냐 하면 총 70마리 돼요. 그거 잡아야 되죠. 수양이 매일 같이 2마리씩 잡아서 7일동안 14마리 잡습니다. 그리고 1년된 수양을 하루에 14마리 잡아서 7곱하면 98마리 잡아야 돼요. 그다음에 상번제로 수양을 드리는데 하루에 두 마리해서 7일하니까 14마리 들어갑니다. 이것 뭐 함지는것도 아니고.

그리고 염소를 매일 한 마리 잡아서 일곱 마리 잡습니다. 그다음에 고운 가루를 짐승의 수대로 잡아야 돼요. 이게 바로 초막절 지키는 방법입니다. 자, 이것을 모세 율법을 전달 되었을때에 그시대에 저와 여러분들이 있다면 여러분 어떤 생각합니까? “하나님, 이거 우리 못합니다.”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그게 바로 율법에 대한 인간의 해석 전제입니다. ‘우리가 해낼 수 있다.’에요. 우리의 행함에 가치를 빛낼 기회가 찬스가 왔다는 거에요. 그들은 이 초막절 지켜서 저주받았어요.

유월절도 마찬가지고, 맥추절도 마찬가지고 하나님의 율법이 어떻게 등장하느냐 하면 우리의 행함을 배제하거나 우리의 행함을 “나 안돼”가 아니라, “야, 이거 야무지게 마음먹으면 하나님 앞에 충성심과 목숨 바칠 각오되어있으면, 요것 지킬수 있다”는 식으로 율법이 그런식으로 찾아온거에요. 심지어 이 사실을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도 똑같이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경우라도 내 행위를 내스스로 저주할 필요는 아예 없다는 식으로 그 율법을 대했던 거에요. 여러분 아시죠 로마서 3장 19절에. 율법을 주신 것은 저주받기 위해서죠.

사도바울이 사도 되기 전에 사울시대때에 예수믿는사람을 한없이 저주하고 죽일려고 했어요. 스데반 집사도 물론 사울이란 사람이 책임자로 있었고요. 그 뒤에 스데반 죽고 난 뒤에 본격적으로 예수믿는사람, “야 이거 스데반 죽는거 보니까 우리가 예수믿는사람 잡는 것이 이게 여호와 하나님에 충성하는것이고 뜻이다. 분명하다.”해서 온 동네방네 예수님믿는사람 잡아죽이려고 했습니다.

왜 사울이라는 사람은 예수믿는사람을 잡아죽이려고 했을까요?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자신한테 물어봐야 돼요. 왜 예수믿는사람을 죽이려고했을까요? 도대체 예수님이 뭐라고 이야기했습니까? 예수님이 이런이야기 했어요. 인간은 행함으로 구원받는게 아니고 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했거든요. 그게바로 사울의 분노와, 사울은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었어요. 그정도는 인정받은거에요. 다른사람으로부터. 대단한 진짜 신앙인이라고. 그러면 구약 율법에 대해서 구약적 해석, 그러니까 유대인들의 해석 그 해석이 오늘날 우리한테는 없는걸까요?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그중에 결정적 예를 들겠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거에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 성경에서는 믿음으로 구원받는게 아니에요. 말씀으로 구원받는거에요. 말씀의 믿음은, 말씀에서 완성된 믿음은, 예수님이 믿음이에요. 예수님의 믿음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우리의 믿음을 삭제하고 체포해버립니다. 저주라고. 우리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바로 저주거리고 그게 죄가 돼요. 행함이 뭐냐하면 이런거에요. 내가 여기있고, 내가 여기있어야 행함이 나오거든요. 그다음에 행함을 통해서 어떤 열매를 맺겠다는 것은 나와 내 행함을 멀쩡해야돼요. 여기 손상되면 안됩니다. 하자가 없어야 돼요. 내쪽에서 문제가 있어버리면 나한테서 나온 행함도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이거는 용납이 안돼요.

있고, 그다음에 천국과 영생 예수님 십자가 앞에 있어요. 그러면 뭐냐하면 십자가를 믿어야 용서받고 예수를 믿어야 영생을 얻는다면, 멀쩡한 내가 멀쩡한 믿음을 총동원 짜내어서 어떻게 해야되느냐? 내 기도 열심히 해서 뭘해야돼요? 그 영생과 그 죄사함을 내것으로 만들어야 그래야 내가 구원받는다는거에요. 이게바로 유대적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하는겁니다. 바로 그것이 어디서 잘못되었느냐 하면, 초막절에 대한 그 초막절 자체의 절기가 율법이 나름대로의 완성을 향하여 질주하고있거든요.

계속 절기가 돌아다니면서 그러면 그 절기안에는 뭐가있다고 했습니까? 유월절 되는 어린양의 죽음이 내포되어있어요. 그러면 초막절을 완성시킨다는 말은 유월절 죽음에 제대로 참여된 상태에서 초막절은 완성이 되는겁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뭐냐? 초막절이 되면 7월 15일날 일주일 동안 실제로 초막을 지어요. 지금도 이스라엘은 초막절 지킵니다. 베란다에다가 옛날엔 뭐 종려나무 가지 꺾어서 했지만 요새는 다 팔아요. 가게에서 팔고 돈주고 사가지고 셋트로 사가지고 키트 사가지고 조립하면 다 되게 되어있어요.

그리고 그들은 초막절 지킨다고 뭐했느냐 하면 실로암 물을 가져다가 그 성전 앞에 보면 대야가 있는데 대야에 뿌려요. 대야에 물을 뿌리는거에요. 이거는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오는거에요. 이사야 12장 3절에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구원의 우물, 실로암에서 물길러서 성경 예루살렘 하게 되면 초막절 하는겁니다. 그들은 그런식으로, 어떻게 하느냐하면 자신의 행함이 미래에 좋은 결과가 주어질 것이라는 그들의 믿음이, 그들의 믿음을 믿는거에요. 그리고 그것이 주님의 사랑이고, 사랑을 믿는거에요. 자기의 기대, 소망을 믿는겁니다. 그랬던 그 유대인들. 그 유대인들이 초막절 축제를 즐길때에 요한복음 7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7장 1절에,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초막절이 가까울 때 주님께서 슬슬 이제 움직이십니다. 무빙하십니다. “함 가볼까”하고 만나요. 만나는데 여기 요한복음 7장 19절 20절에 요 구절은요, 오늘날 우리가 우리 자신한테 꼭 필요한 질문이에요.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요 대목입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쌩뚱맞는 발언이 주님께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너무나 쌩뚱맞고 이게 어처구니 없는 주장을 주님쪽에서 하니까 유대인들이 가만히 있지 않죠.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지금 예수님은 “너희들이 나를 죽이려 한다. 모세 율법을 너희들 손에 쥐고 있으면서 율법의 뜻도 모르면서 너희들은 나를 죽이려 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유대인들이 하는 말이, “내가 왜 당신을 죽여? 당신은 지금 율법 어겼어. 귀신들렸어. 그것만 이야기했지 우리가 왜 당신을 꼭 죽여야 되는데?”라는 말을 하고 있는거에요. 언제 말입니까? 초막절날요. 초막절이 뭔데요?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이 대미를 장식하는 그 날에 말입니다. 이 질문이 오늘날 우리한테 필요해요.

우리는 노골적으로 하나님한테 대놓고 “하나님 제인생 완전히 망가졌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에 대한 조금이라도, 주님에대한 조금이라도 사랑도 없어졌습니다. 하나님,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살아도 전혀 주님이 안도와주고 점점 완전히 앞이 캄캄합니다. 어떻게 저를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라고 할 때 주님은 우리한테 물어요. “니 지금 뭐를 의지하고 있느냐?” “제가 살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요.” “니가 왜 살아야 되는데? 너 지금 초막절 속에 있는 것 몰라? 죽음 체험해야될 자 인 것을 몰라? 니는 지금 저주 안에 갇혀있어.” 그런데 지금 저주 받는게 마땅하다는 생각이 전혀 없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살려고 애쓰는데 너무 힘드네요.”이러고 있다고요.

초막절 왜 있습니까? 하나님의 율법 왜 있습니까? 죽일려고 있는거에요. 우리를 죽이기 위해서 율법을 준거에요. 엉뚱한 생각하면 안돼요. 근데 우리는 뭘하느냐 하면 믿음 소망 사랑가지고 살려고 하는거에요. 그것도 어디서 들은 풍월이 있어가지고 성령으로 주신 믿음. 성령으로주신 믿음 그게 행함이에요 그게. 성령으로 주신 소망, 그게 행함이라고요. 왜? 그것가지고 우린 안죽으려고 하니까. 저주 안받으려고 하니까. 주님께서, “비켜, 비켜, 비켜라.” 해놓고 마지막날에 “유월절날 물 부었지? 그거 초막절 아니야. 그거 완성 아니야. 초막절이라는 것은 뭐냐하면 내가 죽고 난뒤에 내 몸에서 또는 너희들 몸에서 생수가, 성령이 나오는게 초막절의 그 물”이란 말이죠.

같이 죽어야 나오는게 성령이에요. 같이 죽을 때. 그럼 주께서 우리의 뭘 죽이십니까?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소망과 우리의 사랑을 죽이는거에요. 믿음으로 구원받는게 아닙니다. 율법의 완성이 만들어낸 그 믿음이 우리가 기존에 갖고 있던 나의 믿음이 얼마나 나 위주인 것을, 내중심적인 것을 그걸 발각시켜서 저주케하는거에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을 누가 줬느냐? 믿음으로.

우리? 우리가 만드는게 아니에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씀 자체를 성령을 선물로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거에요. 따라서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주의 말씀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고 주께서 주신 선물, 그 말씀의 선물 안에서 우리가 새로운 믿음 그 자체가 되는 그러한 수장절, 열매가 되는거에요. 그러니까 유월절, 맥추절, 무교절, 칠칠절, 초막절, 이 모든 것은 누가 홀로 다 이루셨느냐 하면 예수님 홀로 다 이룰 예수님 자기를 향한 자기 율법이에요. 율법을 이루면 뭐가 된다? 복을 받죠. 그게 영생이에요.

주님을 하나의 대상으로 놓고 내가 갖고 있는 믿음을 가지고 “난 행하지 않습니다. 나는 행함을 저주합니다. 오직 나는 주님만 믿습니다.” 이런다고 구원되는게 아니에요. 그거는 꼼수에 불과하거든요. 예루살렘을 찾던자나 예루살렘에 살았던 자나 모든 인간은 자기 행함에 대한 미련을 육신이 있는한 벗어나질 못합니다. 그러니깐 주님께서, “이리와 초막절에 참석해, 초막절로와. 내가 어린양의 죽음으로 같이 죽여줄게. 니는 그 체험을 하게 해 줄게.” 그 체험 속에서 나의 행함이 나를 구원시키는게 아니고 나의 행함이 나의 이미 받은 저주에서 나온 행함인 것을 주님을 통해서 알게되는겁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유월절하고 그다음에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셨잖아요. 그 주신 율법안에 절기가 들어있다 이말이죠. 그래서 그것이 약속에 땅에 들어가면 뭐냐? 그 율법 자체에서 열매가 맺혀요. 어린양의 죽음을 기초로해서 하나의 밀알이 죽어서 비로소 거기서 영생이라는 생명을 얻고 그 하나님의 죽었던 그 죽음에서 복주는 율법이 나왔고 그 죽음에서 이제는 천국에 예수님의 어린양의 죽음에 참여된 진짜 자기 백성이 추수의 알곡들이 되어서 알알이 맺히는겁니다.

초막절이 절기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처럼 인류의 역사도 마지막은 초막절로 대미를 장식하는데 그게 마지막 추수입니다. 마지막 추수가 요한복음 4장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주께서는 마지막 추수의 열매를, “내양식이다 열매를 봐라. 이게 내가 추수하려는 자다.” 하면서 개인적으로 주님께서는 그 사마리아의 여인의 속을 꼬챙이로, 말씀으로 콱콱 쑤셔버리죠. “니가 남자 다섯명 사겼는데 지금 헤어지고 6번째 사귀고 있구나.” 콱콱 쑤시고 있는거에요.

니 종교는 어떤 행함을 해서 어느 산에서 예배드리고 하면 구원 받겠습니까? 그 인간의 오락, 종교가 오락이거든요. 놀이문화에요. 놀이 문화를 꼬챙이로 확 쑤셔버릴 때 그 사마리아 여인은 물을 먹어야 살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 길러 온 양동이도 던져버리고 내가 생명을 얻었다 하고 외치면서 자기 마을로 돌아가는 그 모습, 주님께서 제자들 보고, “봤지? 이게 바로 추수된 양식이다. 저 여인내가. 그리고 너희들은 너희들이 수고하지 아니한 것을 뒤따라가서 줍기만 하면 돼. 내가 추수꾼이거든. 내가 바로 초막절의 주인이고 맥추절의 주인이고 유월절의 어린양의 주인”이거든요.

율법은 주님 홀로 이뤘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받는데 필요한 믿음도 내것이 아니고 주께서 새롭게 믿음오셔서 나의 믿음을 죽여버려야 돼요. 주의 소망이 나의 소망을 죽이고 주님의 사랑이 나의 사랑을 체포해야 돼요. 이게 죄라고 체포하는 그 작용이 매일같이 순환해서 이루어져요.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순환해서 이루어지고 있는겁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서 알아있는 것, 이것이 초막절의 완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하나님 믿는다 하면서 이런 순진한 거짓말을 하나님한테 안들킬줄 알았습니다. 우리의 본심은 내가 편안하게 내인생 잘 즐기는 것 그것 뿐이었는데 어떤 죽음체험도 없기를 바랬는데 어떤 저주 체험도 아니길 바랬는데, 그게 속마음인데 주께서 말씀으로 다 들추어 내주시고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 하신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이미 생명이 작동하고 있음을 영원히 모든 것에 감사할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