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432강, 433강) 사라지는 것들 / 회복과 창조 / 230523 본문
녹취:이하림
432강-YouTube강의(사라지는 것들 욥기 1:21)20230523-이 근호 목사
제432강, ‘사라지는 것들’. 이 세상에는 모든 것이 다 사라집니다. 사라지지 않는 것들도 있죠. 사람들이 보기에 해와 달과 별은 멀쩡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할아버지, 우리 아버지, 선조들 다 사라졌습니다. 해와 달과 별과 그리고 인간들의 차이가 뭔데 해와 달과 별, 그런 것은 왜 사라지지 않고 인간은 왜 사라져야 하는가?
여기에 대해서 성경 외에는 해답을 제시한 곳이 없습니다. 인간과 자연과의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어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그 관계가 바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골로새서 1장에 나와요.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골 1:15) 예수님을 하나님의 형상이라 했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나타난 하나님으로 나타날 때, 그걸 하나님이 나타났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났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이죠.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이니까.
그럼 그전에 하나님의 형상 역할을 한 자가 누구냐? 바로 아담과 하와, 인간이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 역할을 해야 되겠죠.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은 뭐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관계성. 그 관계성은 영원하겠죠.
해와 달과 별들은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한다. 별의 종말도 뭐 있겠죠. 폭발해서 나중에 블랙홀이 돼버리는 별의 일대기가 있겠습니다만 어쨌든 간에 인간보다는 오래 가잖아요. 마치 영원한 것처럼.
그러면 그 인간이 해와 달과 별보다 더 나은 게 뭐가 있느냐?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별과 달과 해가지고는 하나님의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다 드러내지 못해요. 인간을 통해서 드러내는 겁니다.
그럼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관계가 어떤 관계냐? 그것은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났죠. 아버지는 아들을 버립니다. 그걸 로마서 8장에 ‘내어 주었다’고 해요. 아들을 우리 죄인들을 위해서 내어 주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 8:32) 그리고 그 내어줬던 예수님을 성령을 통해서 영원한 아버지의 처소로 다시 불러 모으죠. 그게 관계에요.
이것은 해와 달과 별이 해내지를 못합니다. 사라짐을 통해서 제대로 영원한 것. 다시는 사라짐이 없는 영원한 것을 이 땅을 통해서, 이 지구를 이용해서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사라지는 것이야말로 영원히 제대로 두 번 다시 사라지지 않는 것이라는 하나님 본래의 뜻을 하나님의 형상되시는 분을 위해서 드러내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이 ‘사라지는 것들’이라 했을 때 이 사라지는 것들이 되어야 영원한 천국 백성이 되는 겁니다. 내가 사라진다는 것이 체험되어야 내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그 예가 구약에 나옵니다. 욥기 1장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욥기 1장 13절에 “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에”라고 했는데, 15절에서 “스바 사람이 갑자기 이르러 그것들을 빼앗고 칼로 종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나만 홀로 피했다고 되어 있어요. 18절에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더니 거친 들에서 대풍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소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처음에 14절에는 종 중에서 자기 혼자 살아남았고 나중에 18절에 나오는 종은 욥에게 보고하기를, 주인님 자녀들 다 죽었습니다. 아들, 딸 다 죽었어요, 바람이 불어서. 나만 홀로 피했다. 산 사람은 이 다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종 하나 홀로 남겨서 아버지 욥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러니까 욥에게 무엇이 사라졌죠? 종하고 자녀들이 다 사라졌죠. 그럴 때 21절에 보면 욥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럴 것 같으면 하나님, 저도 사라지게 해달라고 하죠.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아무것도 없이 나왔은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찌라” 또한 아무것도 없이 돌아갈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욥은 자기에게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게 사라졌는데 그 사라지는 리스트(list)에 항목에 나도 끼어들게 해달라는 거예요. 내가 아무것도 없이 태어났고 죽을 때도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까 ‘사라졌다’는 뜻은 뭐냐 하면 인생사는 것이 하나님이 와서 쳐버리면 인생 산다는 그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뭔가 업적과 실적을 근사하게 남기면 ‘아,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이유가 여기 있었구나.’ 하겠는데 스바 사람들이 와가지고 욥이 가진 종들을 다 죽이고 이제는 하나님이 나서서 큰 바람 불어서 집 지붕이 무너져 소년들이 다 죽었다면, 욥의 입장에서는 ‘이게 하나님께서 나한테 무슨 뜻이냐’를 자기가 해석하는 거예요. ‘아, 내가 사라지는 것들 중에 하나였구나.’
그러면 사라지고 난 뒤에 그 뒤가 있는가? 욥은 아직까지 그걸 깨닫지 못합니다. ‘사라지면 사라지는 걸로 모든 것이 게임 오버, 끝났다. 사라지면 끝났다. 그 뒤에 아무것도 없다. 사라지기 위해서 태어났기에 사라지는 것이 당연하다. 아무것도 없이 왔기에 아무것도 없이 돌아가는 것이 당연하다.’ 이렇게 생각을 했었습니다.
만약에 그것이 옳았다면 욥기를 42장까지 끌고 갈 이유가 전혀 없겠죠. 욥은 그렇게 자식 따라서 자기도 그냥 아프다가 죽었다, 그러면 끝나는 문제에요. 그런데 욥은 1장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어디까지 가느냐? 42장까지 갑니다.
42장 12절부터 보면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 13절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으며” 하고 그다음에 큰 딸 이름은 “여미마”라 구체적으로 딸 이름을 언급했는데 15절에 “전국 중에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 아비가 그들에게 그 오라비처럼 산업을 주었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고 난 뒤 16절에, “그 후에 욥이 일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대를 보았고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 이렇게 돼있어요.
자, 분명히 욥기 1장 21절에서 그는 사라지는 각오를 하고 ‘아, 그다음 차례는 내 차례구나. 하나님께서 무의미하게 나를 없애는구나. 그래, 인생이라는 게 다 그렇지.’ 마음을 그렇게 먹었는데 딸이 죽었다 했죠.
딸도 죽고 아들도 죽었는데 욥기 42장 13절,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은 뭡니까? 그럼 이건 왜 등장했죠? 앞에 사라졌던 아들, 딸과 욥기 42장 13절에 나오는 아들, 딸 의 차이점은 뭐냐? 그 중간에 욥이 고난받는 게 들어있어요. 욥의 고난.
그러면 아들, 딸이 있었다, 딸이 예뻤다, 가 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욥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이 욥을 내어버리는 것, 하나님께서 고통 가운데서 그냥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 그것이 복이었어요. 그게 욥의 존재 의미입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사람들은 자기 의미도 모르고 사라지고 있어요. 사라지면 천국 가겠지. 아닙니다. 누굴 알아야 돼요? 우리 대신 사라지고 아버지로부터 취해졌던 그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 그게 복이에요. 예수님을 아는 사람은 영원히 생명나무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433강-YouTube강의(회복과 창조 잠언 8:22)20230523-이 근호 목사
제433강, ‘회복과 창조’. 창조에 대해서 말하라고 한다면 피조물에 대해서 사람들이 주로 이야기해요. 세상에 있는 해와 달과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만들어진 그 창조를 통해서 창조주를 생각하려고 그렇게 시도를 하는데 그것은 실패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셨기에 우리 자신이 회복된다. 나중에 죄짓기 전의 아름다움과 기쁨과 낙원을 주께서는 에덴동산보다 더 좋은 예루살렘성에서 회복시켜준다. 자기 잘된다.’ 거기에 치중해서 성경을 보는 안목이 있어요.
그런데 잠언서 8장에는 창조를 언급하면서 우리 인간들을 창조했다는 창조에 관심을 두는 창조가 아니라, ‘창조 때에 누가 계셨다. 하나님이 창조행위를 하실 때 거기에 누가 계셨다.’를 주목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했다. 뭐 이거 알면 하나님의 백성이겠지.’라는 생각은 너무나 터무니없이 안일한 생각입니다. “너 창조될 때 거기에 누가 있었는데?” 물으면 “하나님 계시고 그다음 창조되고 난 뒤에 나 있었다.” 이렇게 돼버려요. 그건 잘못입니다.
잠언서 8장 2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이렇게 되어 있어요. 23절에 “만세 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24절에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25절에 “산이 세우심을 입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26절에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27절에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으로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자, 창조할 때 해와 달, 별, 땅, 들, 세상 진토, 바다, 큰 샘 이 모든 것에 주목할 게 아니라 ‘그렇게 만들어질 때 거기에 누가 계셨느냐’가 제대로 창조를 아는 사람이에요.
창조할 때 누가 계셨느냐 하면 생명이 계셨어요. 이렇게 돼버리면 우리 인간이 만들어져서 숨을 쉬잖아요. 또는 사슴이 만들어질 때 숨을 쉬죠. 사람들은 그걸 사슴이 생명 가졌다, 사슴이 숨을 쉰다,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생명은 그게 아닙니다. 생명은 피조물 속에 호흡이 작동하고 반복하는 그게 생명이 아니라, 생명은 창조 때에 하나님 옆에 계셨던 그분을 생명이라 해요.
그러니까 내가 회복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주님이 회복되는 것이 제대로 된 회복이에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잠언서 8장 36절,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숨 잘 쉬고 밥 잘 먹고 열심히 운동하고 건강하고 튼튼한데 단지 뭐가 없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이 없고 안목이 없을 때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기의 영혼을 잃어버린 자’라 하는 겁니다. 자기 영혼을 잃어버린 자.
생명은 내가 생명이 아닌 거예요. 내 목숨이 생명이 아니라는 이걸 우리가 분명히 해야 돼요. 살려달라고 할 필요 없어요. 살아도 주님 생각하게 해주시고 지금 죽는다 할지라도 주님 생각하게 되면 그 사람은 원래 창조했던 그 구조 안에서 회복상태에 있는 사람입니다. 회복된 사람이에요. 예수님 얻어버리면 회복이에요, 그게.
8장 35절에 보면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었다. 나를 얻는 자는, 신약의 예수님이죠, 예수님을 얻는 자는 생명을 얻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비슷한 이야기가 시편 139편 16절에 보면 나옵니다.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내가 있기 전에 주님의 눈이 먼저 있었다. 내 눈이 있기 전에 주님의 눈이 먼저 있었다. 그 주님이 누구겠어요? 나보다 예수님이 먼저 계셨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관심사가 나한테 있어야 되겠어요, 나보다 먼저 계신 분에게 있어야 됩니까? 당연히 먼저 계신 분에게 있어야 되죠. 왜? 하나님은 그분 위주로 창조하시고 그분 위주로 회복하시고 완성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비참하게 죽었지만 주께서는 영광스럽게 회복하셨잖아요. 그 회복을 말합니다. 시편 139편 15절에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기우지 못하였나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시편 139편 17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 주님의 생각이 하나님과 더불어 천국에 살 사람 속에 창세 전에 이미 결정된 뜻이 그 사람 속에 들어옵니다. 17절을 보게 되면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16절에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이 기록된 것에 대해서 아까 17절 읽었던 것,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그러니까 지금 시편 139편에 이 신앙인은 뭘 느끼느냐 하면 살아가면서 내 뜻이 어떻게 이루어지냐를 느끼는 게 아니고 ‘주의 뜻이 나를 통해서 나를 방편으로 삼아서 자기 주의 뜻 스스로 펼치는 도구로서 이렇게 저를 사용해주시니 주의 뜻이 어찌 그렇게 깊으십니까’라고 감사하면서 찬송하고 있는 거예요. 시편 139편에.
그러니까 그 점에 대해서는 잠언서 8장에 나오는 것처럼 바다, 산, 땅, 들, 하늘, 궁창 다 마찬가지에요. 그들이 파도 철썩 한번 치는 것, 창세 전에 주께서 이미 다 알고 계신 거예요. 창세 전에. 하늘에 구름이 만들어졌다 흩어지고 또 만들어지는 것, 각양 각색, 각 모양을 만들어내는 것, 주께서 그렇게 창세 전에 다 계획하신 대로 움직입니다.
그렇다면 공중에 나는 새, 바다에 헤엄치는 물고기, 그리고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 그 모든 것이 여기 시편 139편 그리고 잠언서 8장에 의하면 바로 그때 창조 때 함께 계신 그분의 뜻을 스스로 펼치기 위해서 창조세계, 창조질서를 만들었다, 그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세상은 몽땅 주의 뜻에서 빠지는 게 하나도 없어요. 이 세상 모든 것이 주의 뜻에서 빠진 게 없다고 한다면 그 모든 것에다가 우리 자신을 거기다 한번 넣어봅시다.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것이 주의 예정하신 뜻에 어긋나거나 비껴간 게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창조 하나도 나를 위해 창조한다 하지 말고 예수님을 위하여 창조했다, 골로새서 1장 16절, 예수님을 위해 창조된 것을 안다면 이 세상에 살면서 두려움이라든지 불안 같은 것은 있을 이유가 없죠.
이 세상에 불안과 두려움은 내 뜻을 관철하려고 억지를 부리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아니야, 아니야. 그건 아니야. 그건 도리어 너를 힘들게 해.” 라는 식으로 주께서 당부하고자 우리에게 불안과 근심 걱정을 주는 거예요. “이게 뭐 잘못된 거야. 성경 다시 봐. 세상 뭐라고 되어 있는지.”
회복과 창조는 예수님 중심입니다. 예수님을 위한 것이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님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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