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434강, 435강) 절기/ 강함과 약함 230606 본문
434강 음성
435강 음성
434강 동영상
435강 동영상
녹취:이하림
434강-YouTube강의(절기 레위기 23:2)20230606-이 근호 목사
제434강, ‘절기’. 절기는 축제라고 합니다. 사람끼리의 축제가 아니고 하나님이 함께하는 축제. 따라서 하나님의 율법이 없으면 하나님과 하는 축제가 성립 안 되겠죠. 하나님께서 함께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시고 율법으로 인해서 그 안에 절기를 마련했다는 이것은 달리 이야기해서 ‘말씀의 축제’라고 그렇게 정리하시면 되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께서 말씀 주실 때 이스라엘 백성이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그것에 따라서 움직이는 게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은 의당 위반하는 거고 그렇다고 해서 말씀이 소기의 목표에 멈추지는 않거든요. 그냥 밀어붙여요.
이와 같은 취지의 이야기가 신약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이 말씀을 우리가 인정해줘야 되는데요. 요한복음 6장 38절에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벌써 예수님 오실 때 예수님만 덜렁 오신 게 아니고 아버지의 뜻이 같이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알죠.
아까 말씀하는 것 가지고 다시 설명하게 되면 아버지의 말씀이 먼저 있고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성취하시기 위해서 유일한 성취자 예수님께서 오신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을 성취하면서 누구와 대비가 되느냐 하면 인간들이 하나님의 율법과 말씀을 지키는 그 양상과 대비가 되겠죠. 대비가.
더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말씀을 준 것은 예수님이 그 말씀을 지키는 것과 저와 여러분들이 지키는 것과 비교하고 대비하고 대조해보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그 말씀을 지킨 것은 뭐가 되겠어요? ‘다 이루었다’가 되겠죠. 그러면 예수님에 의해서 다 이루었다면 우리가 그 말씀을 성취하려고 하는 것은 어떻게 되겠어요? 땡, 탈락이죠. 우리의 뜻에 의해서 우리의 의지와 착함과 애씀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을 땡, 탈락시키는 취지가 말씀 안에 들어있습니다.
그러니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늘 감사해야 될 이유가 이제 성립되었습니다. 어떤 말씀도 내가 그 말씀을 못 지키는 것이 뭐로 이어집니까? 늘 감사로 이어지는 거죠. 늘 고마움과 감사로 이어지는 겁니다.
평소에 그렇게 살아가고 계십니까? 내가 말씀을 못 지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습니까? 인간이 할 수 있는 생각의 한계를 넘어서야 돼요. 자, 애가 공부를 못한다. 갑자기 감사 날아가고 슬픔이 밀려오죠. 자기 인생의 보람이 확 쭈그러들죠. 갑자기 방금 감사해야 될 게 어디 갔어요? 없죠.
그러니까 인간은 내가 애한테 공들인 만큼 내 뜻대로 되면 사람들은 감사할 준비가 되어 있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주의 말씀은 뭡니까? 내가 말씀을 지키지 못한 것이 명백해질 때, 도리어 우리에게는 슬픔이 아니고 고마움과 감사로 이어지게 되는 전략, 이것이 바로 주께서 하신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장 39절,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해놓으시고 그 다음에 뜻이 뭐냐?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이 말씀을 우리가 지킵니까, 예수님이 지킵니까? 예수님이 자기가 이런 식으로 말씀을 성취해낸다는 것, 그 성취해냈던 결과물이 뭐냐?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거죠. 우리한테 맡겨놓으면 우리는 백번 중에 백번 다 잃어버리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네 식대로 살아서 잃어버린 자가 됨을 분명히 합니다.
너 봐. 자식 공부 잘하는 데에 네가 올인했잖아. 거기에 정신이 팔려있잖아. 그런데 ‘자식이 공부 잘하기만 하면 감사하겠습니다.’하는 그 상황 자체가 요한복음 6장 39절에 보면 잃어버린 상태에요. 자기는 최선을 다한다고 하지만 인간이 자기 뜻만 고집하고 자기 뜻대로 되기를 아웅다웅 애쓸 때, 그 모습이 주님이 이루신 것과 비교해보면 잃어버린 상태죠.
그래서 우리는 요한복음 6장 38절, 39절 보면서 또 감사해요. 왜? 우리 주제파악이 되었으니까요. 내가 뭐가 문제인지를 알게 되었으니까요.
레위기 23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가 공포하여 성회를 삼을 여호와의 절기는 이러하니라”라고 되어 있죠. 여호와의 절기는 이러하니라. 지금 절기 이야기합니다.
3절에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요 일곱째 날은 쉴 안식일이니 성회라”라고 되어 있어요. 절기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든 절기는, 모든 절기 해봐야 세 가지가 주요절기인데, 공통점이 안식일 지키는 식을 기본으로 깔고 그 절기를 축제를 즐겨야 돼요.
자, 그러면 여러분 잘 아십니다. 안식일이라는 것은 창세기 2장에 나오죠. 하나님께서 스스로 계획한 일을 스스로 다 만족하게 성취했다는 기념일이 안식일입니다. 그 안식일에 인간의 애씀과 행함은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안식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쁘게 반갑게 즐긴다는 말은 이런 뜻이에요. 이 세상에 많은 민족들 가운데서 하나님이 홀로 완성시킨 그 상태에 우리 민족 빼놓고 어느 민족이 거기에 참여된 자가 있을까? 거기서 오는 희열과 고마움과 감사로 안식일을 지키는 거예요.
아, 이거 가게 문 열어야 될 건데…. 고3인데 애가 교회 안가고 또 학원가네, 안식일에…. 이런 저런 사적인 것으로 고민해버리면 이런 고민이 무엇을 가립니까? 주께서 홀로 하신 일을 가리는 하나의 장애물 같은 요소가 되죠.
그래서 제가 아까 요한복음 6장 38절을 거론한 겁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인간들이 아버지의 뜻을 이룰 수 없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이룬 일에 ‘내가 이뤘다. 나만 달랑 천국 간다.’ 이게 아니고, 거기에 아버지의 잃어버린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기어이 다 살려서 데려간다는 것을 예수님이 홀로 다 이루신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만으로 감사하고 예수님만으로 고마워하고 예수님만으로 기뻐하지 않을 수 없어요. 참… 이 지옥같은 세상 살면서 우리가 얼마나 힘든 게 문제가 아니고 세상에 마음 뺏기는 쪽으로 우리 정신이 정립되어 있고 정리되어 있다는 게 문제에요. 세상이 나 좀 알아줘야 될 텐데, 여기에 온통 정신이 팔렸다는 것.
이제 절기의 요소, 안식일이죠, 절기 안에 들어있는 안식에서 우리는 감사한 마음으로 황공스러운 마음으로 자기 사람을 버리지 않고 찾으시는 주님의 다 이루심에 고마워하는 그것이 절기의 완성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진짜 백성입니다.
435강-YouTube강의(강함과 약함 고린도후서 4:8)20230606-이 근호 목사
제435강, ‘강함과 약함’. 자, ‘강함과 약함’인데 제목을 약간 늘여보겠어요. ‘강해지려는 것과 약해지려는 것’, 이렇게 방향성을 집어넣어서 제목을 그렇게 변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강함과 약함이니까 강해지려는 것과 약해지려는 것이 있으니까 우선 첫째, 강해지려는 자들이 어떤 모습을 띄는지 알면 되고 약해지려는 자들이 어떤 모습을 띄는지 알아서 두 개 합치면 되겠죠.
우선 강해지려는 사람은 로마서 1장에 나옵니다. 1장 28절-32절, 상당히 길죠. 빨리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28)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자, 28절에서 32절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의 특징을 하나로 뽑아낸다면 ‘분노’. 괜히 화를 내고 있어요. 괜히 성질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길에 가다가 혹은 집안 식구나 혹시 오랜만에 아는 사람 만났는데 말투나 행동에 화가 나있거든 바로 여기 사형에 해당되는 사람이라고 보시면 돼요.
왜 그들은 화를 내면서 살아갑니까? 왜? 강해지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강해지고 싶다는 마음이 없으면 화가 날 이유도 없습니다. 그럼 강해서 뭐하는데? 강해서 뭐 할 건데? 강하게 되면 남한테 안 지게 된다는 거예요. 남한테 안 져서 뭐 할 건데? 내가 승리자가 되죠. 그럼 승리자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돼요? 강해지고 싶죠. 강해지고 싶은 거예요.
어떤 힘든 일이 있더라도 흔들림이 없다, 이런 거요. 교회도 그런 강함이 많잖아요. 기도를 얼마나 열심히 했든지 어지간한 시련은 이긴다, 뭐 이런 거요. 이것도 일종의 강함이다 이 말이죠. 너네 교회 교인 몇 명이고? 우리교회 이만큼 많이 나와. 그것도 일종의 뭡니까? 강함이요, 배틀이고 경쟁이요 투쟁이죠.
그 투쟁은 내가 강해야 됨을 스스로 확인하기 위한 투쟁과 싸움입니다. 동서지간에,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 남편과 아내 사이에, 자식과 부모 사이에 평소의 행동과 말투가 전부다 분노 속에 있습니다. 분노 가운데 있어요.
로마서 1장 28절에서 32절까지 읽었던 이 내용은 하나님을 버려야지만 비로소 내가 마음껏 강함의 경쟁에 구애받지 않고 부담 없이 나설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을 인간은 기본적으로 깔고 있다는 겁니다.
여기 28절에 자기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거예요. 하나님 모셔버리면 자기가 성깔대로 강함에 매진하기가 좀 주저되는 거예요. 선악과를 아예 따먹어버려야 그다음부터는 하나님하고 관계가 바이바이 되니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는 거예요, 부담 없이.
그런데 그 하고 싶은 게 뭐냐? 그게 인간 속에 들어온 악마의 마음인데 악마의 마음은 스스로 신이라 자처하기 때문에 그 누구한테도 지지 않고 최고로 절대적으로 강함의 강함, 강함의 존재로 자기를 자부하고 싶은 거예요.
목사님 앞에서 상담을 한다, 또는 정신과 의사 앞에서 상담을 한다, 그 상담을 왜 합니까? 점쟁이 앞에 가서 상담한다, 상담을 왜 합니까? 상담을 왜 하는 거예요? ‘나는 지고는 못 살겠습니다. 약한 것은 내 생리에 안 맞습니다.’ 이런 거거든요. 그런데 거지 나사로가 누구하고 상담했습니까? 안했죠. 상담 안했죠. 스데반 집사님이 누구하고 상담했어요? 안했죠. 약해지려는 거예요. 약해지고 싶은 거예요.
자기 사랑하는 여자보고 ‘여자야~ 여자야~’ 부르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약해지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 노래 가사가 있어요. 약해지면 안 된다. 보세요. 로마서 1장 28절에서 32절이 왜 나왔겠어요? 세상 전체가 이미 마귀의 성질들을 다 갖고 있으면서 그 성질이 뭐냐? 강하게 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단 하나님 제키고 하나님은 거리 두고 자기 속에 있는 욕구와 욕망대로 그냥 밀어붙이면 그것이 마지막 32절에 어디 해당된다? 사형에 해당된다. 심판받는다 이 말이거든요.
문제는 그렇게 알고서도 자기가 옳다고 행할 뿐 아니고 남들까지 그 일이 옳다고 부추기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 세상은 분위기에 휩싸이는 세상이에요. 분위기에. 낙오자가 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낙오자 되면 인간도 아니라는 거예요.
강한 사람으로 부각되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관계없이 해도 된다는 것이 이 사회에 용인된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서 나온 것이 뭐냐? 29절, ‘모든 불의와 추악과 탐욕과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와 살인과 분쟁과 사기와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자랑하는 자요’ 이런 거죠.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 이게 취미가 아닙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어쩔 수 없었다는 거예요. 누가 강해지기 위해서? 내가 살아남고 강해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 이런 현상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두 번째, 그러면 이런 세상에서 과연 약해지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느냐?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8절에서 10절, 7절부터 보게 되면 “(7)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이렇게 되어 있죠.
여기 보면 7절에 강한 것이 오직 하나님께 있기에, 필히 우리는 자체적으로 강해져야 된다? 강해질 필요가 없다? 강해질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아시죠. 우리가 평소에 이 세상과 닮아서 얼마나 자체적으로 강해지려고 하는지 아시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는 상태, 답답한 일을 당하는 상태, 핍박을 받는 상태, 그런 상황을 자기 백성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그 상황을 맞닥뜨리게 주께서 인도하십니다. 그분은 목자고 우리는 양이라서. 우리로 하여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의도적으로 집어넣어요.
그러면 그때마다 정말 주님이 강하다는 것, 근거를 내세우는데 그 근거가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 나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굳이 내가 안 강해도 괜찮아요. 예수님의 생명은 사탄을 이겼죠, 율법을 이겼죠, 저주를 이겼죠, 지옥을 이겼죠. 죄를 이겼죠. 죽음을 이겼죠. 그 생명이 우리한테 나타난 거예요.
그래서 4장 11절에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이것이 주께서 자기 백성을 이끌어가는 방법입니다.
세상은 강하다고 우기고 강해지려고 하고 성도는 충분히 약해져도 괜찮아요. 여자야 여자야 약해져도 괜찮아. 가사를 바꿔야 되겠죠.
'유튜브 강의(이근호) > 유튜브 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438강, 439강) 천기, 마음 / 230704 (0) | 2023.07.05 |
---|---|
(436강/437강) 윤리/인간 230620 (0) | 2023.06.24 |
(432강, 433강) 사라지는 것들 / 회복과 창조 / 230523 (0) | 2023.05.24 |
(430강, 431강) 일용할 양식 / 산자와 죽은 자 / 230509 (0) | 2023.05.10 |
(428강, 429강) 지식과 지혜 /상처 230418 (0) | 2023.04.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