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430강, 431강) 일용할 양식 / 산자와 죽은 자 / 230509 본문
녹취:이하림
430강-YouTube강의(일용할 양식 출애굽기 16:19)20230509-이 근호 목사
제430강, ‘일용할 양식’. 사람은 하루만 살아도 사람은 하나님한테 큰 혜택을 입고 있다, 라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가르쳐요. 인간에게 이틀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수명은 하루가 전부입니다. 인간은 이틀을 살 자격이 없고 그런 권리가 없어요.
그래서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 위주가 아니고 사람을 도와줄 위주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을 어떤 식으로 하루 단위로 끊어서 살려내는가를 말씀을 보조로 맞추어서 말씀이 드러나는 조건 하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살립니다.
이런 경우는 일반 이방 민족한테는 이런 사실을 알려준 적이 없고 이스라엘에게는 이런 사실을 알려줬습니다. 출애굽기 16장에 보면 만나라는 게 나옵니다. 그런데 만나가 하루치 양식이에요. 여기서 만나라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는 겁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에게 주는 거예요.
일단 만나가 양식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이 노동할 수 있는 어떤 여지가 발생되지 않는 환경을 제공할 필요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광야입니다. 광야는 자기 손으로 벌어먹을 어떤 환경도 어떤 형편에 처하지도 않게 했어요.
‘내 힘으로 내가 살래’가 성립되지 않는 생활이 광야 생활이었어요. 사방을 둘러봐도 농사지어서 남아도는 잉여 농산물로 내일도 먹고 모레도 먹을 수 있는 어떤 조건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피해가십니다. 이끌어서.
그러면 이 광야 생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먹었다는 말은 이 뜻이 뭐냐 하면 ‘누가 너희에게 먹을 것을 주었느냐’를 분명히 하시는 거예요. 누가 너희에게 먹을 것을 주었느냐, 누가.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하면 틀린 거예요. ‘이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하면 틀린 답변이고 ‘말씀을 주신 분이 말씀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에게 양식을 주었습니다.’ 이게 이제 정답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살리기 위해서 양식을 주는 게 아니고 ‘말씀이 성취되는 또는 말씀이 실현되는 그 코스에 너희들이 접어 들었느니라’ 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만나를 준 겁니다.
그러면 말씀이 실현되는 코스에 오게 되면 만나는 그치는가? 끝이 나는가? 끝이 납니다. 약속의 땅에 가게 되면 만나는 더 이상 주지 않습니다. 이는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를 통과하게 하면서 말씀이 목표하는 데가 있는데 ‘약속 또는 약속의 땅’ 그것을 목표로 만나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면 약속의 땅의 형편은 어떤가? 약속의 땅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소문에 듣기로는 젖과 꿀이 흐른다니까 풍족한 가운데서 오늘 먹을 거, 내일 먹을 거 계속 저장해놓고 먹으면 되겠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약속에 대해서 뜻을 모르는 거예요. 약속은 말씀 자체가 성취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 약속의 땅에서 말씀 안 지키면 만나도 없고 양식도 없고 다 바닥나고 저주받습니다.
엘리야 시대 때 북이스라엘이 바알을 섬기니까 삼년 반 동안 양식 끊어졌습니다. 비가 오지 않아서 먹을 게 없었어요. 이 말은 ‘말씀 끊어지는 순간 너도 죽는다.’ 라는 것을 드러내는 그 판, 드러내는 그 지평, 그 세상이 약속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사람들은 ‘천국 가고 싶어요.’ 그러잖아요. 천국 갈 생각 말고 이 땅에서 말씀이 나를 살린다는 것을 알면 천국 가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 갑니다. 말씀이 우리를 살리는 방식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인간을 살리는 방식에 대해서 하나님이 철저하게 거부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신 것은, 만나를 일용할 양식으로 사용하신 것은 애굽에서 그들이 생계를 유지하는 방식을 하나님의 말씀이 거부한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인간이 자기 생계를 위해서 할 수 있는 노동력을 총동원하는 방식을 하나님의 말씀이 용납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말씀이 있을 경우에만 산다.’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루치를 준 거예요.
하루치를 주면 인간에게 있어서 내일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나한테 내일이 없다는 말은, 나한테 만약에 내일이 있다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내일이 아니라 말씀이 만들어내는 내일은 있어요. 말씀이 완성되는 내일은 있어요. 나를 위한 내일이라는 것은, tomorrow, 내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주실 때 사람들은 건성으로 들었죠. ‘아, 하루치 만나먹고 또 내일치 온다니까 참 편리하구먼.’ 편리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나를 주면서 미리 경고했어요.
미리 많이 모아두지 말라, 남겨두지 말라고 경고했어요. 그게 출애굽기 16장 19절에 나옵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 두지 말라” 했어요. 이 말은 인간은 먹을 게 있으면 남겨두는 속성이 있다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그들의 더러운 성질을 그냥 노출시키는 거예요. 하지 마라해도 하지 마라 하는 것은 이미 너한테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는 거죠.
그래서 20절에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네가 지금 말씀의 세계 안에 들어오면서도 너는 네가 배불리 너 살 생각만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선 앞으로 내가 더 살 수 있는 여지를 박탈해버리는 겁니다. 무엇이? 말씀이 그렇게 박탈해버려요. 하나님 말씀이.
그렇다면 말씀이 이끄시는 그 목표가, 말씀이 완성되는 약속의 땅은 그 땅은 그러면 더 깊이 들어가서 어떠한 땅이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해서 만든 날이 있어요. 그 날이 안식일입니다. 창세기 2장에 안식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당부했어요. ‘안식일을 앞두고 곱빼기로 줄게, 만나. 만나 곱빼기 줄게.’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럼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뭐라고 합니까? ‘에이, 만나 하루치만 있어도 썩던데 이틀치를 두면 더 썩을 수밖에 없을 건데.’ 라고 생각할 거예요.
출애굽기 16장 23절에 보면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식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그렇게 이야기하시고 22절에 “제육일에는 각 사람이 갑절의 식물 곧 하나에 두 오멜씩” 그러니까 곱빼기를 주신 거예요.
그런데 24절에 보니까 “그들이 모세의 명대로 아침까지 간수하였으나 냄새도 나지 아니하고 벌레도 생기지 아니한지라” 이렇게 했어요. 25절, “모세가 가로되 오늘은 그것을 먹으라 오늘은 여호와께 안식일인즉 오늘은 너희가 그것을 들에서 얻지 못하리라” 했어요.
그럼 여기 25절에서 나타난 사실은 뭐냐? 하나님은 안식일날 하나님도 노동하지 않고 쉬신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일하지 않는 날이 안식일이에요. 그럼 그다음 나온 문제는 ‘평소에 사람이 일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이 일하시느냐’ 가 뚜렷해지죠. 평소에도 누가 일하느냐? 사람이 일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일하신 거예요.
그러면 인간은 평소에 일하면서 뭘 하느냐?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늘 그걸 깨닫게 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의 백성, 영원한 말씀의 세계 안에 백성이라는 것이 밝혀지죠.
431강-YouTube강의(산자와 죽은자 에베소서 1:20)20230509-이 근호 목사
제431강, ‘산 자와 죽은 자’. 인간들은 죽은 자밖에 없어요. 산 자는 없습니다. 죽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살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몰라요. 죽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그런데 인간은 태어나서 항상 내가 살아있다, 살아있다는 의식만 계속 하고 있는 겁니다. ‘나 죽어있는데?’ 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혹시 꿈속에 자기가 ‘나 죽었구나.’ 라고 생각하지만 꿈 깨보면 ‘아, 나 참 식겁했네. 정말 죽을 뻔했네.’ 하고 식은 땀 닦으면서 오늘도 보람차게 하루 씩씩하게 살자, 하고 그렇게 살아가죠.
살아있기 때문에 내가 죽었다는 것이 가리워집니다. 막혀버립니다. 알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인간은 그만큼 산다 죽는다, 생명이냐 죽음이냐 조차도 제대로 확립이 안 되어 있어요. 그 개념 확립이 안 되어 있습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냐? 마귀가 그렇게 만들었죠. 왜 그러냐하면 마귀는 저쪽에 진짜 살아있는 생명나무가 인간에게 차단된 다른 쪽에 인간이 넘볼 수 없는 공간에 진짜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악마는 인간들로 하여금 보지 못하도록 그렇게 훼방을 놓는 거예요.
생명나무가 인간 쪽이 아니고 인간 너머에 다른 세계에 있다면 인간은 몽땅 죽은 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세계에 일어나는 모든 것이 죽음과 관련되어 있는 일로서 일들이 일어나게 해요. 죽음과 관련되어 있는 것.
그러면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는 건, 죽지 않았는데 죽음과 관련된 것을 어떻게 아느냐? 그래서 죽음이 일찍 미리 이 세상에 나타났습니다. 자, 죽음이란 뭐냐? 하나님으로부터 괴리된 것, 하나님으로부터 격리된 게 죽음이에요. 그게 마태복음 27장에 보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하여 버리시나이까. 버림받는 것, 격리된 것,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 이것을 죽음이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세계에서는 하나님과 끊어졌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고 하나님은 우리가 만들어내면 된다는 거예요. 만들어내고 섬기면 그만이지, 해서 나온 게 뭐냐 하면 우상이라는 게 나왔어요. 그래서 이스라엘 나라에 여호와 하나님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모든 민족들의 신은 각자 나름대로의 참된 신이라고 주장하지, 우리가 우상을 거짓된 신을 섬겼다는 생각을 그들은 추호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임무가 뭐냐? 이스라엘의 임무는 ‘너희들 믿는 신이 가짜야. 그것은 신 아니야. 진짜 신은 따로 있어.’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마차 부리듯이 타시고 그 주변 나라와 접촉하게 만들었죠. 싸운다든지 공격한다든지 회유한다든지 어떤 식으로든 접촉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라 하는 것을 그들에게 이스라엘 나라 존재 자체로서 보여줬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뭐 너희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인가 보여 달라고 요청한 적 있어요? 없어요. 다른 나라는 없어요. 애굽 나라가 진짜 하나님이 누군지 그렇게 궁금했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 나라는 부강했고 부강하다는 말은 그만큼 참된 신을 믿고 있다는 자부심을 그들은 갖고 있었기 때문에 ‘나를 부강하게 만드는 신은 가짜야’ 이런 생각은 있을 수 없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보내가지고 애굽 신들을 열 가지 재앙을 통해서 그들의 허무성을 다 폭로시킵니다. 그들이 신으로 섬겼던 자연 현상을 하나님께서는 혼돈으로 만들어버렸어요. 너희들이 믿는 신이 아무런 능력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리고 그 신들이 그렇게 나올 수 있게 된 그 출처가 신에서 신이 나온 게 아니고 너희들 혈육에서 육신에서 나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마지막 재앙이 온 애굽에 있는, 바로 왕 아들뿐 아니고 맏이뿐만 아니고 온 애굽의 모든 맏이를 다 죽였습니다. 이 말은 모세한테 대든 사람은 바로 왕밖에 없지만 우상을 섬긴 것은 모든 집안마다 다 우상을 섬겼다는 겁니다. 이 말은 인간치고 우상 말고 다른 참된 신을 섬길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면 히브리인들은 그들은 참된 신을 섬겼겠는가? 그들도 마찬가지죠. 그들도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크게 오해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와서 바로 왕하고 대결구조를 가져가니까 그들은 도리어 바로 왕편을 들고 기존 권세 편을 들고 모세와 아론을 박대했죠.
그럼 모세와 아론을 통해서 보여준 것은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참된 신을 섬길 수 없다. 단 어떤 경우냐 하면 우상을 섬기는 그 죄에 대해서 희생적인 요소가 들어가면 그 희생적인 요소를 경유할 때만 참된 신을 만날 수 있다, 라는 조건이 모세를 통해서 제시됩니다. 그러면 그 희생되는 조건이 뭐냐? 유월절 어린 양의 죽음이에요. 죽음.
자, 이렇게 됐으니까 죽음에 대해서 두 개 종류의 죽음이 등장했어요. 하나는 인간이 죽고 난 뒤에 숨 끊어진 것을 죽음으로 보는 인간들의 죽음. 그 죽음은 가짜 죽음이죠. 이것은 참된 하나님이 제시한 죽음이 아니에요. 참된 하나님이 제시한 죽음은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나님과 괴리되는 격리된 죽음. 그리고 자기 백성을 위해서 희생당한 그 죽음. 그 죽음만이 하나님께서 제시한 죽음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인간 쪽에 뭘 앞장세웠습니까? 십자가란 죽음을 앞장세웠죠. 그러면 죽음이 하나님 쪽에서 인간 쪽으로 밀고 들어왔다는 말은 인간 쪽에서는 생명이라는 것은 애시당초 인간은 기대하거나 고대할 자격이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거예요. 인간은 생명이라든가 영생이라는 것을 얻을 쨉이 못 된다는 것을 주님께서는 십자가 중심으로 밀어붙이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 영생을 얻겠다고 시도하는 모든 종교는 다 헛수고에요. 사기입니다. 마귀가 만든 거죠. 악령이 만든 거죠. 조작된 거예요. 어떤 인간도 자신의 죽음, 주님이 앞장세운 그 죽음 앞에 그냥 죽은 자이어야 하지, 살아날 욕심을 내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누가복음 9장 6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제자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할 때에 마침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예수님께 부탁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안 따르고자 하는 게 아니라 따르는데 제 부친을 장사하고 그다음에 따라가는 것을 허락해 달라, 이렇게 할 때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죽은 자들이 죽은 자를 장례 치르나 안 치르나 죽기는 마찬가지에요. 안 치뤘다고 사는 것도 아니고. 인간이 죽음을 애도해도 죽음은 그대로 있어요. 죽은 데서 살려달라고 아무리 기도해도 여전히 죽음은 죽음이에요. 인간에게는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어떤 방법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에베소서 1장 20절에 보면 그 해결책이 나와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 20절에 이런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예수님은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 아니고 죽은 자들 속에서 살아난 거예요. 죽은 자들. 그러니까 예수님 살아났다고 해서 내가 살 권한이 생겼다고 말하면 안돼요.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제대로 제대로 이건 확립된 거예요. ‘어떤 누구도 예수님 빼놓고 영생 얻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이게 부활이에요. 부활을 믿는다고 부활되는 게 아니에요. 부활은 반대에요. 아무도 부활될 수 없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부활되신 거예요.
그렇다면 천국은 텅텅 비겠네요. 예수님만 덜렁 외롭게 있고. 아무도 천국 못 가고. 아무도 영생의 생명나무 따먹을 수 없다면 그러면 아무도 없이 혼자 있겠네, 라고 할 때 거기에 대해서 로마서 1장 4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이 말은 성결의 영, 성령이죠. 예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이 죽은 가운데에 있을 때에 성령이 와서 예수님을 살린 그 영, 성령이 우리 안에 있으면 죽은 우리 몸도 삽니다. 그래서 천국 가는 겁니다. 부활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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