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426강, 427강) 약속과 언약, 추억과 기억 / 230404 본문
녹취:이하림
426강-YouTube강의(약속과 언약 출애굽기 20:6)20230404-이 근호 목사
제426강, ‘약속과 언약’. 약속하고 언약하고 그 차이점이 뭐냐? 약속은 하나님께서 창세기 3장 15절에 언급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약속은 하나님의 전체 그림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설계도. 창세 전에 계획했던 것, 그게 약속이에요. 그림 전체를 약속이라 합니다. 그럼 주께서 계획하신 것을 실천에 옮기려면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실시해야 되는데 그 실시하는 방식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언약 방식으로 실시를 해요.
그럼 약속과 언약의 차이점이 뭐냐? 약속은 전체 설계도이고 언약은 실무자의 등장. 그 약속을 이루는 실무자의 등장입니다. 그래서 언약은 상대자가 있어요. 언약하신 하나님과 그 언약하신 내용을 또는 약속한 내용을 성취하실 분이 등장하게 되고 하나님과 그분 사이에 맺어지는 것을 언약이라 하는 겁니다.
아브라함 때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했죠. 그걸 아브라함 언약이라 하죠. 그런데 모세 때 하나님은 언약을 누구와 하느냐 하면 이스라엘이라는 집단과 언약을 맺게 됩니다. 언약 상대자가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신약에 오게 되면 최후의 언약 상대자가, 모든 것을 마무리 짓는 언약 상대자가 주의 이름이 돼요. 그런데 그 주의 이름이 구약 이스라엘 속에 함께 동행하셨던 그분입니다. 이스라엘이 외부에서 보면 그냥 사람들의 집단이지만 그 속에 사람 눈에 띄지 않으면서 함께 계셨던 분이 계셨으니 그분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에요. 여호와의 이름이었습니다. 이걸 신약적으로 번역하면 주의 이름이 함께 있었어요.
비록 구약에서 이스라엘 나라가 언약에 위반했다는 이유 때문에 언약에 의해서 특히 모세 율법에 의해서 그들은 심판받고 저주받았지만 그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심판받고 저주받는다고 해서 이스라엘과 동행했던 하나님의 주의 이름마저 실패한 것이 아니고요.
오히려 반대로 이스라엘과 함께 있는 주의 이름이, 이스라엘이라는 인간집단이 실패하는 바로 그 자체가 안쪽에 있던 주의 이름, 함께 계신 주의 이름이 뚜렷해지는 계기가 됩니다. 껍질이 벗겨지면 속에 있는 알맹이가 등장하잖아요.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면서 진짜 구원될 이스라엘은 안쪽에 계신, 핵으로 계신 주의 이름이 차질 없이 구원의 성취되게 언약대로 되게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게 언약이에요. 하나님의 언약대로 “내 이스라엘은 거룩한 왕 같은 제사장이 되리라” 하는 그런 약속된 내용, 곧 언약이 있었단 말이죠.
언약이 있었는데 그 언약을 두고 바깥 외피는 실패해서 날아갔는데 날아가면 갈수록 도리어 하나님이 원래 생각했던 이스라엘은 아주 끄떡없이 하나님이 약속한 세상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공로자가 누구냐? 주의 이름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언약의 목적은 처음에 약속했던 그 실행자가 누구냐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준 겁니다.
오늘날 성도의 삶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이 성도의 삶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성도의 뜻대로 되지 않게 해요. 그러면 성도가 미리 생각했던 어떤 기대감 또는 행함, 열심, 은근히 노렸던 노림수 이 모든 것은 벗겨지게 됩니다. 성도의 뜻대로 안되게 해주시죠. 성도의 뜻대로.
사도 바울에게 있었던 사단의 가시가 사도 바울의 소원대로 세 번씩이나 기도해도 이게 없어지질 않았어요. 세 번 기도하고 난 뒤에 응답이 뭐냐 하면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에요. (고후 12:9)
자기 몸이 아프니까 자기한테는 하자가 있는 것처럼 무슨 문제 있는 것처럼 느껴지잖아요.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 사탄의 가시가 있는 것이 문제 있는 게 아니고 그래야 된다는 겁니다.
참 냉혹하죠. 하나님이 자기 백성 다루는 방법이 상당히 냉철하고 냉정하고 냉혹하잖아요. 우리의 뜻대로 하지 않고 주의 뜻대로 막무가내로 밀어붙이잖아요. 이것은 구약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망하게 하는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살리는 방법, 방식을 그대로 활용하는 겁니다.
그러면 약속으로 시작해서 모든 게 약속으로 끝나는데요. 원래 하나님의 설계도대로 된 것은 설계도 그대로 성취가 되는데 그럼 언약은 뭐냐? 그 중간에 들어가요. 그 중간에 들어가는 구절이 출애굽기 20장 6절에 나옵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천대(千代)까지 은혜를 베푼다’ 이건 모세 율법에 속한, 십계명에 속한 내용입니다. 천대까지. 그러니까 하나님의 약속과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약속이라는 것이 계곡에 다리 놓았다고 치면, 그것도 출렁다리라고 보면, 첫 번째 출발지점-약속과 저 끝에 있는 끝 지점-약속의 완성, 그 중간에 놓여있는 출렁다리에 해당되는 것이 바로 언약.
하나님은 약속을 이룬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서 약속을 이룬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언약이 있고 없고의 차이점은 뭐냐? 언약이 중간에 들어가게 되면 하나님의 약속 달성에 대해서 인간은 전혀 한 게 없었음이 언약을 통해서 이게 점검이 돼요.
대표적인 언약이 아까 이야기했지만 율법 언약, 천대까지 계명을 지켜라. 계명을 지키라 했는데 이스라엘이 계명을 지켰습니까, 못 지켰습니까? 못 지켰죠. 못 지켰으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에서 탈락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탈락되는, 인간이 행했던 모든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그 인간에 대해서 탈락시키는 그 절차가 하나님의 언약을 온전히 이룬 분을 드러내는 환경이 되는 거예요. 한쪽은 제키고 한쪽은 온전하고. 이 두 가지 요소를 다 품어야 그게 언약을 주신 취지에 부합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실패자가 되고 성공자는 예수님밖에 못 되는데, 그런데 왜 인간을 끌어당기느냐? 실패한 걸 알면서도 인간을 왜 끌어당기는가?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아버지 앞에 합의된 대로 약속을 이루는 데 있어서 언약은, 예수님이 바르게 살았다든지 예수님이 율법을 잘 지켰다든지 예수님께서 죄가 없다, 가 아니라 예수님의 피에요. 그리고 예수님의 튼튼한 근육질이 아니고 찢겨진 살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언약에 만족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나는 바르게 살았습니다, 이게 언약이 아니에요. 나는 하자 없이 살았습니다, 이게 언약이 아닙니다. 언약은 예수님의 피이고 예수님의 살이에요. 그리고 합치면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특별한 죽음이에요. 어느 인간도 따라죽을 수 없는. 예수님만이 죽을 수 있는 그 죽음, 그 죽음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이었던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바로 예수님의 피에 의해서 오직 피에 의해서만 달성이 다 된 겁니다.
그 앞에서 우리는 뭐로 드러나야 됩니까? 우리는 실패자로 드러나는 기쁨과 즐거움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427강-YouTube강의(추억과 기억 창세기 9:16)20230404-이 근호 목사
제427강, ‘추억과 기억’. 개인마다 추억이 없을 수가 없어요. 사람은 두뇌에 과거의 체험에 대해서 현재 본인이 그걸 편집하는 기능으로 두뇌가 움직입니다. 과거의 생각이 우리 속에 있는 게 아니고, 과거에 대해서 지금의 뇌세포가 그걸 편집해요.
편집하는 이유는 인간의 두뇌세포든 모든 신체기능은 지금의 환경에서 지금의 내 몸을 적응하고 방어하고 보호하고 지켜내는 본능으로 작용을 합니다. 그런데 현재 환경 속에서 내 몸을 지키고 싶은 이 본성은 과거의 내가 체험했던 것을 내가 그걸 그대로 받아들인 게 아니고 골라잡아요.
이게 아주 신비로운 정신활동인데요. 인간의 몸 자체가 본능적으로 자기를 지키고 싶다했죠, 방금. 자기를 지키고 싶을 때 거기에 반드시 사람은 이유를 달아요. 내가 나를 지켜야 될 이유는 내가 약간이나마 내가 정당하고 의롭기 때문에 그렇다는, 몸의 본능에다가 자아의 정당성까지 이렇게 추가를 해서 지금의 나로 구성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인간의 두뇌를 아무리 해부해 봐도 자기 정당성, 자기 의로움, 나는 꼭 살아남아야겠다는 그런 의지, 이런 것은 보이질 않죠. 인간이 자기를 관찰할 때 그런 게 안 보여요. 마치 라디오 소리 날 때 뒤에 해부해보세요. 아나운서의 내용물이 나옵니까? 안 나오죠. 아나운서가 뉴스 할 때 라디오 뒤편을 뜯어보든지 TV 뒤편을 뜯어보면 그냥 우리 눈에 비치는 것은 반짝반짝 번뜩이고 있는 전자회로밖에 안 보여요.
그처럼 인간이 자기를 관찰하게 되면 어떤 목적, 의미는 없습니다. 뭐가 있느냐? 기능만 보이죠, 기능.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 기능이 내 몸이 생존하는 데에 유리한 쪽으로 선택적으로 기능한다는 점에 대해서 현대과학도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인간은 기계 그 이상이거든요.
성경에서는 그걸 가지고 ‘인간 속에 하나님이 살게 하는 생명력을 주었다’ 이렇게 돼요.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간섭하고 있다는 겁니다. 여호와께서 살리시기도 하고 죽이시기도 하는 그 주님의 손길이 신자든 신자 아니든 상관없어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지금도 통제하고 있고 관할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마귀까지 통제하고 있어요.
이것을 인간이 알 리가 없죠. 그냥 그러려니 살아가죠. 나? 나는 나 잘난 맛에 살아가. 그 뿐인 겁니다. 제가 이렇게 길게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의 기억이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위주이다, 이 이야기하려고 이렇게 길게 이야기한 거예요.
창세기 우선 40장을 보겠습니다. 창세기 40장 23절에 보면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지 않고 잊었더라” 분명히 요셉하고 술 맡은 관원장하고 같은 감옥 동기생이잖아요. 이야기가 있었던 거예요.
이상한 꿈을 꿨고요. 그 꿈에 대해서 관원장이 자기가 지난밤에 꾼 꿈을 낮에 기억하고 있는 겁니다. 자,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기억이라 하는 것은 그 취지가 이상하게 어떤 생리로 작용한다? 자기 자신의 몸을 내가 안 지키면 누가 지킵니까. 내가 지키는, 그걸 방어하는 그런 방식으로 기억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그래서 자기한테 도움 되는 기억은 기억하고 자기한테 손해되었다는 기억도 기억하는데 손해되었다는 기억을 왜 기억하느냐 하면 그때 아찔했다고 기억해요. 큰일 날 뻔했다고 기억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기억에는 목적이 있는데 그 목적이 뭐냐? 어쨌든 간에 지금 나는 버텨야 되고 견뎌내야 된다는 식으로 기억하는 거예요.
그런데 술 맡은 관원장이 갑자기 임금님이 노해가지고 교도소 와서 언제 죽을지 몰라요. 그러니 뭐가 다급합니까? 자기 방어 본능이 지금 다급하게 움직이겠죠. 그런데 꿈을 꿨단 말이죠. 그래서 꿈 해석을 딱 들어보는데 옆에 젊은 사람 요셉에게 해몽을 맡겼는데 요셉이 어떤 미래를 예측하느냐 하면 ‘당신은 원대 복귀될 것입니다.’ 이렇게 했단 말이죠. 그러니까 술 맡은 관원장이 기분이 좋았죠. 일단 자기한테 희망이 생겼잖아요. 그리고 그다음에 정말 꿈대로 자기가 복직되었습니다.
더 이상 자기가 자기 일 잃어버릴까 염려할 필요 있어요, 없어요? 없죠. 요셉? 기억할 필요 없죠. 지나간 것은 지나간 거니까. ‘그때 당신 꿈 해몽 내가 잘했으니까 당신이 복직하게 되면 나 억울하게 교도소 있다고 임금에게 잘 말해주세요.’ 그거 다 소용없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41장 9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오늘날 나의 허물을 추억하나이다” 이렇게 나와요. 아니, 40장 23절에서 요셉을 기억 못 했잖아요. 그런데 41장 9절에서 드디어 술 맡은 관원장이 기억을 해냅니다, 꿈을 매개로 해서. 임금님의 꿈을 매개로 해서.
자, 이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되는가? 이것은 창세기 9장 16절로 해명하면 다 됩니다. 창세기 9장 16절,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땅의 무릇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된 영원한 언약을” 누가 기억한다?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의 기억은 자기 위주죠. 그런데 하나님의 기억은 하나님의 언약 위주죠. 인간은 비록 자기 유리한 것 챙기고 자기에게 불리한 것은 잊어버리는 그런 존재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요셉에게는 뭐가 와 닿았어요?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꿈을 준 것은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야곱 언약에 속해요.
아브라함 언약은 아들 이삭이 죽음으로써 아브라함 언약이 구현되잖아요. 그렇죠? 이삭 언약은 자기가 사랑했던 맏이가 저주받고 둘째 아들 야곱이 아버지의 상속을 받음으로써 이뤄지죠. 어쨌든 이삭 입장에서는 자기가 사랑하는 자를 잃어버렸잖아요. 야곱 언약에서는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요셉이었죠. 요셉이 야곱에게는 이미 죽은 존재죠. 자식들이 거짓말했으니까 이미 죽었다 했으니까 없는 존재에요. 잃어버린 존재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반드시 어떤 요소가 있느냐? 아버지께서 아들을 잃어버렸다가 되찾는 방식이잖아요. 그 되찾는 방식에서 예수님께서 흘린 게 뭡니까? 예수님의 피와 살이었단 말이죠.
그래서 인간들은 자기 유리하면 생각하고 불리하면 잊어버리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요셉이 언약 바깥에 나가지 않도록 기어이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국무총리 되도록 술 맡은 관원장에게 기억나게 하신 거예요.
그렇다면 성도는 자기 기억으로 삽니까, 아니면 주님의 기억 아래 삽니까? 성도의 모든 삶은 내가 정신 바짝 차려서 사는 겁니까, 아니면 주님의 은혜 안에 사는 거예요? 주님의 은혜 안에 살죠.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내용입니다.
“자기 백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에 다 살리는 것이다.” 요한복음 6장 39절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은 나를 잊을지라도 나는 너희들을 잊지 않고 반드시 살려내시는 기억력 좋으신 하나님 덕분에 우리가 구원받는 걸로 하나님께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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