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374강, 375강) 설교, 시간 / 211207 본문
녹취:이하림
374강-YouTube강의(설교 요한복음 20:31)20211207-이 근호 목사
제374강, 제목은 ‘설교’. 설교라는 것을 설교자가 할 때 교인들보고 “설교할까요?” 물으면 안돼요. 왜냐하면 설교는 사람하고 설교자하고 신학교 나온 목사하고 의논해서 설교가 성립되는 게 아니고 이미 성경에 설교하라고 되어 있어요, 설교자에게. 조건이 있죠, 성령 받은 사람에게.
성령 받은 사람이 다 설교자 되는 건 아닌데 설교자의 필수 요건인 성령 받은 사람이 설교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설교할 때 교인들 보고 “설교 할까요, 말까요?” 라고 물을 필요가 없어요. 설교자는 성경에 나와 있으니까 설교를 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 10장 같은 경우에는 아주 단출하게 나와 있어요. 전하지 않으면 누가 믿으리요 보내지 않으면 누가 전하리요 (로마서 10장 14절-15절). 지상에 일어나는 현상에 있어서 하늘과 땅 사이에 연결고리가 아주 단출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대목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유념하면 되느냐 하면...... 말씀을 듣지 않고서는 누가 믿으리요. 그다음에 말씀으로 강조점이 이동했지요. 보내지 않으면 누가 전하리요. ‘보냈다-> 전했다-> 들었다-> 구원 발생되었다’ 이 논리입니다.
그런데 그 논리를 성령께서 성경에 그렇게 구성을 하시면서 반드시 언급해야 될 것은 보는 것으로 하지 않는다는 그 점입니다. 보는 걸로 구원받는 것은 말씀을 들음으로 구원받는 게 방해되기 때문에 보는 것을 주께서는 취급하지 않습니다. 하늘나라 가게에서는 그 물건 취급하지 않아요. 보고 온 사람들은 천국에서 거부합니다.
복음 말씀을 듣고 믿는 자에게만 들어오는 것이고 그 복음 말씀은 복음 전하는 자가 “내가 당신을 가르칩니다.” 그것도 탈락이에요. 그것도 안돼요. “주께서 보내서 전하라 했기에 내가 전합니다.”라고 연결고리를 확실히 가져가야 돼요.
주께서 보내셔서 전했고 주께서 보낸 그 말씀을 내가 들음으로 구원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나의 구원이 전한 자의 공로나 능력으로 스톱되면 안 됩니다. 그건 뭐 100% 가짜죠. 백신 패스 있잖아요. 백신 맞으면 그냥 패스잖아요. 설교자 패스에요. 설교자로부터 출발하는 것은 패스. 그건 안돼요. 설교자가 중간에 전하고 빠져버려야 돼요.
그렇다면 그걸 어떻게 판정하느냐? 설교내용에 그게 포함이 되어야 돼요. 저의 능력으로 여러분 구원되는 것은 주께서 삑-. 주께서는 그걸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전하는 설득력으로 말재주로 전하는 것은 삑- 이것을 주께서는 인정한 적이 없습니다. 그걸 반드시 설교시간에 집어넣어야 돼요.
그러면 교인들이 묻겠죠. “아유, 공부도 많이 하고 성경도 많이 아시는데 왜 당신 능력을 제거하십니까?” 라고 물을 거예요. 묻게 되게 되면 그 설교자의 설교내용 속에 포함되어 있어요.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대로 “저는 십자가를 지지 않았습니다. 십자가 지신 당사자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설교의 현장성이라 하는 것은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하게 되면 십자가 지신 분이, 반드시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형식으로’ 자기가 보낸 종을 통해서 주의 말씀을 전하게 하셔가지고 그 전하는 말씀이 주의 종이 전한 말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십자가 달리신 그 분이 지금 현장에 현존, 실존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그 말씀으로 하나님 백성은 확정됩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설교 내용 속에 그 내용이 다 담겨 있어야 됩니다. 듣는 자나 전하는 자나 전부다 필수 요건이 자기 부인, 자기 부정이 되어야 되고 자기 부정이란 다른 게 아니에요. ‘나는 아무것도 쓸모가 없습니다.’가 설교 안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됩니다. 아무 쓸모없습니다. 정작 설교를 하게 하시고 그 말씀에 성령을 담기게 하시는 당사자가 보이지 않는 형태로 이 현장에 계시기 때문에 “나는 아닙니다.” 라는 말을 필히 해야 되겠죠.
그렇다면 주님께서 현장에 계실 때 그 방식이 뭐냐에 대해서, 주님이 현장에 있다, 없다를 어떤 방식으로 정립할 수 있는가. 그 점도 하나님께서 미리 제자들에게 언급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0장 31절에 보면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되어 있어요. 자, 기록입니다. 조금 어려워요. 기록이죠. 문자입니다.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여기서 어려운 이유가 뭐냐. 기록에서 믿음이 발생된다는 거예요, 기록된 데서.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그다음에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면 이 말은 ‘기록된 게 없으면 생명은 꿈도 꾸지 마라’ 그런 뜻이에요.
내가 생명 받았냐, 안 받았냐 하는 것은 기록된 말씀에서 확인해야 되고 이 기록된 말씀은 무엇을 대체하느냐 하면 ‘보고 믿겠다’를 대체하는 겁니다. “주님 동영상보고 믿겠습니다.”하는 것을 대체하는 거예요. 그러니 고고학이라는 것이 얼마나 성경말씀을 훼방하는지 아시겠죠? 고고학. 예수님 당시의 고고학적인 유물. 그것이 기록을 완전히 모독하는 겁니다. 이 기록을 배제하는 거예요.
그럼 기록하면 기록자가 있을 게 아니냐? 기록자를 위해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신 거예요. 그게 바로 그들만의 은사라는 겁니다. 그들만 해야 될 역할이죠, 역할. 성경을 기록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요한복음 21장에도 나와 있어요. 21장 24절에 보면,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
기록이라는 말은 그러니까 예수님 제자들만 구원 받는다면 굳이 기록할 필요 없어요. 제자들은 언젠가 나이 많아 죽는다 이 말이죠. 제자들이 죽고 난 뒤에 천국 갈 사람들이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이 있을 거죠. 그 사람들을 위해서는, 제자들은 보고 믿었지만 그 사람들은 보지 않고 믿는 방식을 주께서 생각해놓으신 거예요. 보지 않고 믿는 것.
그러니까 보고 믿겠다 하는 것이 보지 않음에 얼마나 방해되는지요. 진짜 구원에 방해되는 것이 ‘보고 싶어요, 주님. 실제로 주님 살아계신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요.’ 이러한 인간들의 모든 시도가 그건 믿음이 아닙니다. 보고 믿는 것은 누가 못합니까? 지가 봤는데 누가 안 믿겠어요? 눈,으로 보지 않고 귀,로 들음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들음으로.
물론 이 성경 보는 것도 들음으로 생각합시다. “성경 문자 봤는데요. 아무것도 안 들었는데요.” 이렇게 하는데 그쪽도 성경 문자를 본다는 것은 성경을 쓰신 주님의 실제를 안 본 것이 되기 때문에 안 본 것에 포함이 돼요. 듣는다는 것은 안 봤다는 뜻입니다.
그럼 들으면 뭐 나는 헬라어, 히브리어 모르는데 어떻게 하느냐. 그래서 오순절 날 각자 자기 민족의 방언대로 방언을 해서 각자의 민족 언어로 기록이 파생되게 되어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선교 현지에 가서 굳이 한국말을 쓸 필요가 없어요.
그 현지어를 쓰라는 말은 국적조차도 그 현지로 바꿔야 돼요. 파키스탄에 가면 파키스탄으로 국적을 바꿔서 한국은 빠이빠이가 되어야 돼요. 그런 선교사는 거의 없죠. 미국이나 잘 사는 나라 같으면 몰라도 못 사는 나라에서는 돈줄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돈 달라 할 때는 한국말로 써야지, 파키스탄 말로 ‘돈 주세요’ 이래가지고는 안 통한다 이 말이죠.
그 현지 말을 쓰라는 말은 말만 통역하라는 말이 아니고 현지 단어가 품고 있는 그 나라의 역사와 전통, 문화를 온 몸에다 다 담아야 된다는 겁니다. 담아버리면 뭐가 되겠어요? 말하는 선교사 자체가 기록된 말씀이 되는 거예요, 기록된 말씀. 단어만 그 현지어로 바꾸는 게 아니고 그 단어가 지닌 의미를 품고 있는 문화에 예속된 사람으로서 기록된 말씀을 증거케 하는 겁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되면 설교라 하는 것은 주께서 오늘날 사람을 구원하는 유일한 방식이고 다른 방식은 없습니다. 그 설교는 본문이 파키스탄이면 파키스탄, 미국이면 미국, 한국이면 한국, 그 사람으로 하여금 영생을 받은 천국 백성 되기 위해서 주님의 성령으로 쓰여진 그 말씀을 우리한테 주게 되면 말씀 받은 우리가 천국 백성의 문화와 그 기록된 성경 말씀의 진리의 세계에 하나의 국민으로써 새로운 피조물로써 새롭게 우리는 기록된 말씀으로써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선교사가 되는 겁니다.
375강-YouTube강의(시간 베드로후서 3:8)20211207-이 근호 목사
제375강, 제목은 거창합니다, ‘시간’. ‘시간은 길다’ 상식이죠. 이걸 한번 축약해봅시다. 긴 시간을 꼬깃꼬깃 조그마한 상자라든지 또는 컵 같은 데다가 구겨서 한번 넣어봅시다. 그러면 천 년이 하루 같이 되겠죠. 그걸 펴보면 천 년이 되고요. 날이면 날마다 오는 마술이 아니죠? 천 년을 집어넣자 이 말이죠.
그게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나와 있어요. 3장 8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자, 시간을 딱 구겨서 함축시켜서 있는 그 시간의 자리. 그것은 주님입니다. 주님 계신 공간에서 시간이 펼쳐지기 때문에 그래요. 왜냐하면 주님은 시간을 창조하거든요.
구겨진, 오므려진, 이렇게 함축된 데서 펼쳐버리면 폭발하듯이 시간이 천 년, 이천 년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주의 날은 뭐냐 하면 다시 모아. 다시 모아. 빅뱅에서 빅크런치로 폭발한 걸 다시 뭉쳐서 하나로 끌어당기는 거예요.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다.
시간은 잊어라. 네가 몇 월 몇 일에 뭐 했느냐를 잊어라. 지금 누구 안에 있는가, 그것이 네 시간을 대변할 것이다. 이게 베드로후서 3장 8절의 말씀입니다. 그게 주의 날이에요. 주의 날을 시간과 대비해서 ‘아, 난 시간 잊어버리겠어. 난 주의 날이 더 좋아.’ 할 때 주님이 갖고 있는 시간관을 그 사람도 동일하게 똑같이 갖고 있습니다. 그걸 세 자로 하면 ‘현장성’이에요.
주일 날 설교에서 그랬죠. 인간에게는 내일이 있은 적이 없다고, 주일 오후에. 인간에게 내일이 있은 적이 없어요. 내일은 현재가 조작하는 것이지, 조작한 내일은 내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시간을 관리하시는 분이 내가 아니기 때문에 오늘, 그 다음날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하는 것은 주께서 무슨 내일을 펼칠지 몰라요. 아무도 알 수가 없어요.
그러나 결론은 나와 있어요. 펼치신 내일도 다시 그 다음날이 되면 이것이 다시 주님이 계신 컵 안으로 전부다 소실, 소멸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한테는 과거는 없습니다. 과거는 없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한다면 나는 매일 죽는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했듯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
죽은 자는 과거가 없죠. 과거를 생각할 필요가 없는 거죠. ‘왕년에’라 하는데 그 왕년은 현재가 조작해 낸 과거이고 그럴 필요가 없어요.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다는 거예요.
하루가 천 년이고 천 년이 하루 같다 할 때 이 시간이 주 안에서 현장성을 말해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현장성을 생각 못하는 이유가 자꾸 ‘내일은 잘 할 거야.’ 하고 내일로 도피하려는 생각이 있어요. 지금은 내가 힘든 거지만 내일되면 편할 거야. 지금 주와 함께 있는데 따로 도망을 치는 거예요.
현대인의 속성은 자꾸 빠르게 내일로 미래로 도망치는 버릇이 있어요. 옛날 조선시대나 중세 때는 어떠냐. 중세 때는 시간이 느리게 가기 때문에 도망을 안 쳤습니다. 산업 구조가 느리기 때문에 시간도 느리게 갔어요.
그래서 머슴 되면 네 팔자라 합니다. 머슴, 너 5년 뒤에 과거에 합격해서 나중에 뭐 해라. 그런 거 없었습니다. 너는 네 팔자다. 너는 죽을 때까지 머슴 해. 끝났어. 그러니까 “예. 돌쇠 받아들이겠습니다.” 하는 순간 마당만 쓸고 있지 시간은 흐르지 않습니다.
시간을 따져봐야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요, 시간을 따져봐야. 아니, 경쟁이 없는데 무슨 시간을 따집니까? 경쟁이 없는데. 학교에서 중간고사, 학기말 시험 수시로 시험 치는 이유가 뭡니까? 계속해서 내일은 잘 될 거야, 계속해서 ‘잘 될 거야’를 경쟁을 붙이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런데 공부하는 학생에게 “집어 치워. 너는 신분상 결정됐어. 너는 시험 칠 자격도 없어.” 그러면 에이, 치워버리죠. 뭐한다고 합니까? 안 하죠.
일본 기업이 그래요. 한번 들어가면 늙어서 퇴직할 때까지 보장해줄게. 경쟁도 없고 일할 맛도 안 나고 그냥 월급 타는 맛만 있지, 일할 맛은 안 나요. 그러나 호주나 미국 같은 데 보세요. 못 하면 십 년 일해 놓은 거, “You're fired!” 하고 그냥 잘라버리죠. 뭐 하루 아침에 잘라버려요. 호주에 광부 되었는데 나중에 힘 없다하면, 유 파이어! 나가! 끝나는 거예요.
그래서 다니면서 한 달 뒤에 퇴직하면 뭐할지를 생각해야 돼요. 이게 뭐냐. 현대인은 끊임없이 도피를 해야 됩니다. 지금 뭐 설치해놓고도 전혀 본인이 안심이 안 돼요. 본인이 불안해요. 현재에서 늘 도망칠 생각만 해요. 현재에서 미래로. 그러면 현장성에서 안정성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후서 3장의 현장성은 어떠냐 하면...... 미리 말씀드리면 기록된 말씀이니까 제 말로 듣지 마세요. 저는 빠지겠습니다. 기록된 말씀이니까요. 저보고 욕하지 마세요, 또 그거 골랐다고.
10절에 보면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2절에,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그 현장성은 시간이 사라진 현장성이에요. 시간이 사라지니까 미래가 더 있을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그럼 미래는 뭐냐. 그냥 이 세상에 우리가 보고 있는 이 땅과 하늘은 어쩌면 우리가 최후의 목격자가 될 수가 있어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우리가 매일 같이 마지막 목격자로서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주의 날에 주와 함께 있는 자의 현장성이에요. 예수님의 안목으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럼 미래로 도피할 이유가 없어요. 미래로 가봤자 천 년이 하루 같다고 해서 시간을 응축하고 잡아 당긴다니까요. 빅크런치, 완전 부숴버리죠. 컵 속에 모든 시간을 꼬깃꼬깃 집어넣고 그게 폭발해버리면 세상에 모든 것은 다 없어지니까요. 주님이 마련한 현장성입니다.
인간 세계에는 시간이 있다,가 돼요. 그러나 주님 세계에서는 시간 그딴 거 없다. 마지막 불 심판 돼도 시간이 없지만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죽어도 나는 시간이 없는 거예요. 죽는 순간에 무슨 시간이 있습니까? 순간인데요. 사건인데 사건에 무슨 시간이 있어요? 납작한데. 폭이 습자지처럼 납작한데 무슨 여기에 시간의 폭이 있습니까? 없는 거죠. 그러니까 인간은 죽는 순간 살아온 모든 시간은 습자지처럼 없어져요.
그러니까 여기서 경건이란 언제든 없어질 수밖에 없는 이 땅에 살면서 순간순간 고맙고 감사한 거죠. 감사합니다. 이렇게 없어질 시간이지만 없어질 공간이지만 여기서 생존해서 이 기록된 말씀을 증거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증거할 수 있는 이런 안목을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경건함이라 하고 그걸 가지고 오직 하늘 나라만, 주께서 오실 날만 고대하는 성도라는 것이 베드로후서 3장 8절에서 13절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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