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368강, 369강) 끊어진 과거. 홀로 산다는 것 211019 본문
이하림
368강-YouTube강의(끊어진 과거 마태복음 14:10)20211019-이 근호 목사
제368강, 제목은 ‘끊어진 과거’. 과거를 양(量)으로 보지 말고 질(質)적으로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 오시기 전에 세상을 다루시는 방식과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세상을 다루는 방식이 다릅니다.
예수님이 누구냐 할 때 ‘예수님은 이런 분이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할 게 아니고 새로운 질서, 새로운 질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예수님 오시기 전에 인간 세계는 어떤 식으로 어떤 원칙을 세우고 그들이 살아왔고 또 그들이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 왔는가?’ 그것을 우리가 미리 알아야 돼요.
알고 난 뒤에 예수님은 확연히 다른 분이니까 과거에 살았던 것과 전혀 다른 거죠. 어느 정도로 다른가 하면 예상을 못할 정도로 확연하게 달라요. 구약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 방식과 신약의 성령 받은 성도로서 살아가는 방식이 완전히 다릅니다. 어느 정도냐? 대화가 안 될 정도에요.
그 당시에 같은 아람어, 헬라어 사용하지만 대화가 안 될 정도로 달라요, 성령 받은 사람은.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이야기를 그 당시 사람들이 못 알아듣겠다고 짜증을 내고 예수님을 추방한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영을 받았던 사도들과 성도들에게 똑같은 대우를 그 시대에 했습니다. 지금도 예외는 아니죠.
그렇다면 우리는 옛 시대와 새 시대를 가름하는 데에 있어서 그 경계선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경계선을 긋는다는 말은 연속을 인정하지 않고 막아버린다는 거예요, 연속을 인정하지 않고.
철도 일하는 사람들이 서울에서 대전으로 내려오다가 전라도 쪽으로 가려면 경부선으로 가는 노선 말고 홱 틀어서 다른 노선으로 철로를 바꿔줘야 되죠. 안 바꾸면 기차가 폴짝 뛰어서 갈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노선따라 가니까. 그 노선을 홱 바꿀 때에 그게 경계거든요. 그 경계에 등장하는 인물이 누구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4장에 보면 마태복음 14장 1절에서 12절까지 쭉 되어 있는데 거기에 제목을 정하자면 ‘세례 요한의 죽음’이에요. 여기 14장 6절부터 보게 되면 헤롯의 생일날 자기를 축하하죠. 헤로디아의 딸이 생일의 주인공인 헤롯 왕을 기쁘게 하니까 헤롯이 그 딸에게 자기 기쁨의 표시로 선물을 주려고 하는 거예요.
“네가 원하는 것 내가 다 줄게.” 할 때 그 딸이 “내가 이런 것 원해요.”하면 되는데 자기 엄마한테 물어요. 엄마한테 “엄마, 헤롯 왕이 나에게 뭘 주겠다는데, (자기 아버지죠) 아버지가 나에게 선물 주겠다는데 아버지한테 어떤 선물을 요구하면 엄마 마음이 흡족하겠어?”라고 묻습니다.
요청할 때 딸의 뜻은 아니에요. 배후에 있는 엄마 뜻이었지요. 8절에 보면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내게 주소서’ 하라.”고 딸한테 시키는 거예요, 세례 요한의 머리. 뭐 제사 지낼 일 있습니까? 돼지머리 달라는 건 이해되는데 사람 머리를 왜 달라고 했을까.
헤로디아가 뭔가 지워버리고 싶은 게 있었어요. 자신의 약점, 자신의 취약점, 남들이 수군수군하는 소리를 듣고 여자 기분이 굉장히 상했던 거예요. 뭐에 상했느냐 하면 거기 14장 3절에,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 4절에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제수씨하고 혼인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세례 요한이 이야기했고 세례 요한은 그 당시에 백성들에게 선지자로 통했던 사람이에요. 그러니 세례 요한의 사적인 견해가 아니고 이게 그 당시의 언론이 된 겁니다. 뉴스거리가 된 거죠.
그러니까 이것은 ‘아,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의 말에 의하면 지금 권력 잡은 헤롯의 가정에 하나님 보시기에 문제덩어리가 있구나.’ 그래서 헤롯의 왕적 권위에 대해서 백성들이 생각하기를 ‘온전히 복종할 필요가 있겠어?’ 라는 식으로 권위에 누수가 생긴 거예요. 권력의 질서에 흠집을 만드는 계기가 세례 요한이 바로 잔소리해서 그런 거예요.
그러면 이걸 북한 김정은으로 생각해봅시다. 이것들이... 이 권력자를 뭐로 보고 이게 권력이 무서운 걸 모르는구나. 다시 백성들로 하여금 권력에 고분고분할 수 있도록 하려면 하늘에서 온 권세보다도 그까짓 것, 그보다 더 센 권력으로 그들에게 현실성을 부여하면 되겠죠. 정신 차려, 이 백성들아. 뭐 하나님의 선지자? 더 센 거 여기 있다. 보여줘?
그렇게 함으로써 아내 입장에서 남편이 통치하는 데 있어서 기여하려 하고 보탬이 되려 하는 거예요. ‘남편 하는 일에 아내가 쓸모없는 게 아니고 나, 당신 일에 쓸모 있다. 보태줬다. 따라서 내가 왕의 부인으로서 행세하는데 당신도 이 행세하는 것에 대해서 인정해줘. 권력에 대해서 인정해 달라. 당신만 권력 센 게 아니고 당신한테 붙어있는 나도 한 권력 해.’ 그런 식으로 헤로디아가 세례 요한의 머리를 달라 한 겁니다.
그렇게 돼서 세례 요한이 죽어버렸다. 세례 요한이 죽은 것은 예수님 오시기 전 옛날 시대에서는 인간의 권력이 모든 것에 대해 말하고 힘 꽤나 쓰는 것이 옛 질서의 특징입니다. 정치적 힘이죠. 권력의 힘. 그것에 사람들이 주눅 들어 살아가는 거예요. 그게 옛 질서에요.
제가 옛 질서라 하니까 들으시는 분이, 그럼 그 질서 말고 뭐 다른 질서 있겠어? 그게 전부잖아. 세상에 힘센 사람이 최고고 그게 정의고 그게 진리고 그 외에 뭐가 있어요? 인간의 사사로운 개인의 감정, 그건 권력 앞에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아무리 귀한 집 자식이라도 나라에서 ‘군에 와’ 하면 군에 와야 되잖아요.
이걸 누가 저항해? 이걸 누가 반대해요? 네가 모가지 날아갈라고? 네가 아무리 아름다운 추억, 기억이 있더라도 이 목 위, 두뇌가 포함되어 있는 머리를 잘라버리면 아름다운 추억, 기억이, 개인적인 소망이 같이 날아가는데요. 이 세상 권력보다 더 센 건 없죠. 그게 옛 시대입니다.
그 옛 시대의 마감을 세례 요한의 죽음을 통해 확실하게 보여준 거예요. ‘아, 인간들은 권력에서 못 벗어나는구나.’ 이게 끊어진 과거에요. 예수님이 오셨다. 그러면 그걸 다 과거지사로 돌려버리는 거예요. 이걸 옛날, 즉 하늘나라와 끊어진 상태가 여러분들이 이게 진짜 현실이라고 누누이 확신하고 있고 이게 실제현실이라고 하면서 ‘뭐 다른 생각은 품지 마. 이게 전부야.’ 라고 했던 이것이 하나님과 끊어진 세상의 모습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오셔서 뭘 보여주느냐. 세례 요한에게 있던 그 선지자의 말씀을 그대로 주님이 인수해요. 세례 요한은 죽어도 세례 요한이 남긴 말씀은 계속 완성을 보는 겁니다. 누구한테서? 예수님에게서요.
그래서 예수님은 마지막 선지자이고 새 선지자이기도 해요. 옛 시대를 끊었다는 점에서 마지막 선지자이고 그 끊어진 그 지점부터 새로운 시대를 세례 요한이 죽었던 그 죽음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자기 죽음이 선지자의 말씀대로 죽고 거기서 사흘 만에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이 부활의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어쨌든 저쨌든 간에 권력이 힘을 못 쓰는, 죽여도 또다시 살아버리는, 죽인다는 겁박과 협박, 공갈이 전혀 먹히지 않는 새로운 질서의 시대. 그게 바로 끊어진 과거를 끊어졌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새로운 시작의 출발입니다.
369강-YouTube강의(홀로 살기 이사야 47:8)20211019-이 근호 목사
제369강, 제목은 ‘홀로 산다는 것은’. 홀로 산다는 말을 하게 되면 사람은 더불어 산다고 주장하게 될 겁니다. ‘사람이 혼자 살면 외롭고 쓸쓸해서 못 삽니다. 누구라도 대화상대가 있어야 이 힘든 세상 위로 받고 또 위로 주고... 그 가운데서 식구라는 거, 가족이라는 거 있어줘야 인간은 견딜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죠.
그러나 ‘군중 속에 고독’이라는 말이 있어요. 굉장히 많은 사람이 파티장에 운집하잖아요, 뭐 즐기겠다고. 원 없이 술 먹고 일탈해보겠다고 모이잖아요, 파티장에. 그러나 그 파티장에도 삐에로는 있어요. 울고 있는 삐에로.
위선과 위선의 만남이 너무나 답답하고 그들이 하는 위선의 말을 들어준다는 게 너무 괴로워서 가면 뒤에 숨어서 울고 있는 그런 사람들이 있거든요. 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덜 외로운 게 아닙니다. 오히려 외로움이 더 짙을 수가 있어요.
가족이 다들 퇴근해서 TV앞에 있다고 해서 가족이 한마음 되는 게 아니에요. 이상스럽게 인간은 홀로 되고 싶어해요. 뭐 ‘홀로 된다는 것은’ 그런 노래도 있지만... 자꾸 홀로 있고 싶어요. 뭐 하하, 호호 하지만 같이 있다는 것은 사람에게 긴장도를 강화시킵니다.
그래서 보통 가장들, 아버지들이 식구들 앞에서 어른인 체 하고 뭐 훈계도 놓지만 한 10분 동안 훈계하고 난 뒤에 ‘가만 있어봐. 나 잠깐 밖에 좀 쉬었다 올게.’ 쉬었다 오는 것은 뭐냐. 담배 피러 가는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하느라 지 딴에 힘들었어요. 어른인 체 한다고 품격 지키느라 힘들어가지고 담배 피우고 난 뒤에 담배냄새 팍팍 피우면서 들어와가지고 또 괴롭히죠.
말을 하는 순간 인간은 홀로가 됩니다. 입을 다물고 그냥 듣기만 하면 혼자라는 느낌이 안 드는데 말을 하는 순간 갑자기 자기가 주목을 받게 되고 자기는 남들이 주시하는 남보다 높은 강단 또는 강대상에 강제로 올라와 있는 느낌이 들어요.
직장에서 회의할 때도 다른 사람이 이야기하고 있는데 끄트머리에 가서 신입, 쫄병한테 ‘네가 의견 이야기해봐.’ 그때 한 1분, 2분 이야기하는 그 순간 자기는 몸둘 바를 모르죠. 군중들 속에 숨어있는 것이 습성화되고 이게 일상화되었는데 ‘어이, 신입이. 네 의견 한번 들어보자, 우리끼리만 이야기했는데. 너도 뭐 좋은 의견 있을 거 아니야?’ 하는 순간, 갑자기 경직되죠.
머리가 하얘지면서 ‘잠깐만요. 좀 쉬었다 이야기하겠습니다.’ 이건 뭐 어느 교회 기도하는 것처럼. 기도하는데 ‘잠깐 기다려주세요.’하는데 내가 얼마나 감동받았는지요. 저게 바로 성령의 기도다. 비비 꼬는 거 아닙니다.
듣기만 하는 경우에는 수용자이기 때문에 그냥 가만히 있어도 들려져요. 들려질 때는 뭐 남한테 이야기 안 해도 속으로 막 평가하고 점수 매기고 난리도 아니죠. 그러나 막상 자기가 딱 강단에 서게 되면 주목을 받으면서 홀로 되는 겁니다. 이것이 훅 하고 들어오게 되면 당황스럽죠. 그런데 자기가 말할 기회를 빈번히 가져버리면 자기가 드디어 이제 마귀가 되는 겁니다. 악마가 되는 거죠.
그게 이사야 48장과 40장 뒷부분 쭉 보면 우상이야기가 나오고요. 거기 우상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나는 홀로된다는 것이 우상의 특징이에요. 세상에서 자기를 돋보이는 거예요. 나보다 더 높은 사람은 없다, 라는 식으로 우상이 나오는데 그게 이사야 47장 8절에 나옵니다. 제가 한번 읽어볼게요.
“그러므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평소에 사람들과 섞여있을 때는 이런 느낌을 못 느껴요. 자기 깊숙이 이런 마음이 있다는 것을 본인이 알 수가 없었던 거예요.
그러나 앞에 강대상에서 ‘당신 의견 이야기해보라. 당신 뜻은 뭡니까?’ 하는 순간, 자신의 깊이 잠복되어 있던 깊이 잠재되어 있던 자기의 본성이 유감없이 나오는 겁니다. 이게 훈련이 안 된 사람은 버벅거리고 못하지만 이걸 자꾸 되풀이해보세요. 지가 대장질해야 속이 시원해요. ‘됐고! 내가 이야기할게요.’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됐고. 이게 이제 한두 번 해본 거예요. 그래서 그걸 가지고 ‘입만 살아가지고’ 그런 이야기 듣잖아요.
그럼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가 최고고 ‘나는 나뿐이다. 나는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가 평소에 인간의 깊은 본성처럼 자리 잡은 겁니다. 이것은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선악과 따먹을 때에 인간의 공통된 본성이에요.
그러면 이사야 46장 15절에 하나님 뜻이 나옵니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스스로 숨어 계시는 분이에요.
숨어 있다는 것은 군중 속에 숨어 있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이야기를 해도 납득이 안 되고 이해가 안 되는 식으로 드러내는데 이게 숨어있는 형식이에요, 드러내는데. 나에게 주목하고 나의 말에 호응하도록 하시는 분이 아니고, 너희들은 백날 들어도 나밖에 없고 내가 최고고 나는 나만 행복하고 잘 되면 되고 나만 챙기면 그만이다, 라는 본성으로 장착되어 있는 어떤 인간도 숨어있는 하나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너는 너밖에 모르기 때문에.
나밖에 모른다는 뜻은 뭐냐 하면 나만 안다는 뜻이 아니고 나와 관련된 사람만 내가 챙기고 싶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관련된 식구를 챙길 때 내가 다시 단상에 선 사람이 되기 때문에. 내가 너 챙겨줬잖아. 어려울 때 도와줬잖아. 네가 잘못할 때 내가 용서했잖아. 이 용서가 권력이 돼요, 용서함이.
사람은 착함이 권력이 된다니까요. 착함이 착함으로 소멸되는 게 아니고 자기가 착해버리면 착하게 한 사람에 대해 자기는 갑이 돼요. 그 사람은 나한테 을이 되고. 본성이 뭐냐. 내가 하는 행동이 결국은 나는 나뿐이라는 쪽으로 전부다 의미가 응축되고 집합돼서 되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건 못 고칩니다, 타고났으니까.
다만 이런 본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할 때 하나님은 왜 숨어계시는지 그 이유를 바로 나 자신에게 찾아야 돼요. 내가 얼마나 나밖에 모르고 내 구원, 내 천국, 천당 가는 것만, 내 행복만 챙기기 때문에 주님께서 난 너하고 안 놀아, 하고 숨어 계시는 겁니다.
이것은 성령이 와서 나의 본모습이 나만 챙기는 인간이라는 그것을 죄로서 다 들추어내게 하시는 그 작업을 통해 우리 뜻에 의해서 발각되지 않고 왜 숨어계시는지, 비로소 숨어계시는 하나님과 나밖에 모르는 오만한 나와 연결되면서 그 사이에서 구원이 성사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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