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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376강, 377강) 멸망, 집 / 211221 본문

유튜브 강의(이근호)/유튜브 강의

(376강, 377강) 멸망, 집 / 211221

정인순 2021. 12. 22. 10:09

376강                  음성                    동영상

377강                  음성                    동영상

 

녹취:이하림

376강-YouTube강의(멸망 마태복음 24:9)20211221-이 근호 목사


제376강, ‘멸망’. 멸망이라고 할 때 사람들이 자기 멸망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께서 너무 하십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이 세상을, 사랑으로 만들어놓고 왜 그걸 뭉개려고 하십니까?’하고 원망조로 나설 수가 있는데 성경에서의 멸망은 인간이 잘못했다고 멸망이 오는 게 아니에요.

순서가 있습니다. 세상 멸망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그것을 개시로 해서 본격적으로 와르르 이게 무너지게 되어있어요, 연차적으로. 멸망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6절에 보면,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해서 ‘끝’이라는 단어가 나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예 끝이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지사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제발 끝은 오지 마세요.’라고 뭐 하소연을 하든 사정 사정을 하든 전혀 주님께서는 그 의견을 듣지 아니하시고 배제하시고 그냥 끝을 향하여 나가시는데 만들어놓은 것을 그냥 무너뜨린다, 그것은 의미 없습니다. 무너뜨려지는 그 과정과 절차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 세상을 어떻게 창조하셨는가, 창조의 내막을 무너뜨림 속에서 그것을 발췌해내십니다.

그래서 8절에 보게 되면,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그러니까 주님께서 재난 이야기할 때 그냥 덤덤하게 “재난 시작된다.” 그런데 결정적인 것은 9절이에요.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여기 ‘너희’가 누구냐 하면 지금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멸망을 시키는 것이 아니고요. 나무토막 쌓는 게임 있잖아요. 그 게임을 그냥 나무토막으로만 보지 않고 무너뜨릴 때 여기 나무토막이 있었는데 무너졌다고 하지 않고, “여기에 내 백성이 있었는데 무너졌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 ‘내 백성’이라고 하는 것이 여기에는 ‘너희’라고 되어 있지만 어떤 존재를 너희라고 하느냐 하는 것은 창세기 12장 3절에 보면 확 다가오실 거예요. 아, 이 뜻이 그 뜻이었구나. 창세기 12장 2절과 3절을 보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지금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면서 선택이 우선이고 그다음에 아브라함이 선택되잖아요, 선택이 우선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3절에 보면,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해서 복의 원천으로 삼으시고 그다음에 모든 민족이 너로 인하여 그 복을 얻을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아브라함 너만 구원 받는다,가 아니라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복이 내려오는 관, 수도 파이프 같은 것, 하늘과 땅이 유일하게 연결되는 관으로 사용하시되 그 길을 흘러내려오는 복은 ‘아브라함 너 말고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려 하심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멸망이라 하는 것은 복이 내려오는 관이 이제 탈이 난 겁니다. 더 이상 제 기능을 못하게 된 거예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복을 다른 이에게 전달하는 전달 매개체로 사용하는 것이 마땅한데, 창조하실 때 그러한 핵심요소가 들어가 있는 채로 창조를 했는데, 그 창조를 이제는 무효로 돌리고 멸망하겠다는 것은 노후 된 수도 파이프, 그것부터 먼저 무너지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무너지게 되면 이제 멸망의 개시가 되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마태복음 24장에서 한 거예요. 여러 가지 난리가 있지만 끝은 아직 아니다. 끝은 뭐냐 하면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죽는 것이 너희 이름으로 죽어버리면 그것은 아무 의미 없어요. 너희를 죽일 때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너희가 죽게 되고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게 되면 모든 민족에게 전달된 구원의 복은 이제는 다 딸딸 긁었습니다. 더 이상 줄 게 없어요.

모든 민족을 사랑해서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소식을 전달하는 역할을 이스라엘이 해야 하는데, 다른 민족들이 이스라엘에 대해서 복의 전달체로 보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그 이유 때문에 미움을 받는다면 더 이상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에게 복을 전달할 전달기능은 더 이상 안 해도 되는 거예요. 안 해도 되는 겁니다.

개, 돼지한테 복음을 안 전해도 되는 거예요. 개, 돼지는 어떻게 아느냐?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이유 때문에 미움을 받을 때 그들이 개, 돼지인 거예요. 개나 돼지한테 복음을 전하지 말라. 마태복음 7장에 나오죠 (7장 6절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그냥 화나서 욕하는 게 아닙니다. 복음의 내용이 그거에요. 개와 돼지한테는 복음을 전하지 마라. 왜? 그들은 그 가치를 모르고 그냥 짓밟아버린다. 복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지옥 갈 인간에게 짓밟힐 그런 내용이 아니다. 그 하나님의 자존심을 분명히 하겠다는 겁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멸망이라 하는 것은 전 세계가 무너지는 것, 코로나가 멸망이 아니라 복의 전달 파이프가 사람들에게 배척받고 인정받지 못하고 그 파이프 자체가 또 노후가 되어가지고 전혀 복음을 복음대로 전달하지 못할 때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무너지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결국 마을 뒤쪽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저수지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농사지을 때 물이 필요하잖아요. 그러면 마을 뒤편에다가 저수지를 만들어가지고 물은 중력에 의해 위에서 아래로 흐르니까 거기에 물꼬를 터주는 거예요. 그러면 위에 고여 있던 물이 생수가 아래쪽 농사 짓는 데까지 흘러 들어오겠죠. 물 없이 무슨 농사가 되겠습니까? 논농사가 안 되겠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세상을 구원할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9장에 나오거든요. 19장 5절에 보면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제사장 나라가 된다는 말은 ‘제사장이 갖고 있던 ‘거룩’이라는 하나님의 생명의 내용물이 너희들뿐만 아니고 다른 민족에게 흘러 들어가도록 내가 제사장, 중보자 역할을 하는 민족으로 만들겠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어서.’ 그런 약속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만약에 이스라엘이 제사장 기능을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뭉개버리겠죠. 제사장 나라를 하라고 세워놨는데 제대로 제사장 기능을 못하고 우상만 섬긴다면 뭉개겠죠.

문제는 이스라엘이 무너진다는 그것이 다른 세상도 같이 무너지는 징후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다시 말씀드리면 멸망은 전 세상 죄 지었다고 그냥 뭉개는 게 멸망이 아니라 그 멸망의 징후가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값을 못할 때 무너지는 거예요.

그리고 교회가 교회 값을 못하고, 성도가 제대로 복음을 전해도 세상이 그 성도의 복음을 하찮게 여기고 무례히 대하고 무가치하게 여기면 굳이 그들에게 애한테 밥을 강제로 떠먹이듯이 십자가 믿으세요, 라고 떠먹일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전도하러 보낼 때 “만약에 세상이 너희 말을 듣지 않거든 그들과 결별하는 표시를 하라. 먼지를 떨어버려라. 그 더러운 세상 것이 너희에게 묻지 않게 하고 묻었거든 떨어서 네 가는 길과 내 가는 길이 다르다는 표시를 분명히 하라.” 고 하셨어요.

그게 바로 열두 제자거든요. 이스라엘이잖아요. 열두 제자로 표현되는 이스라엘이 원래 이러이러 해야 된다는 거예요, 이스라엘의 존재가치가. 남 천국 못 보내서 애걸복걸하는 게 아니고 본인이 갖고 있는 복음만 전달하게 되면 안 듣는 그들만 손해거든요.

그러니까 배포를 가지시고 당당하시고 쫄리지 마시고 아는 복음을 귀하게 여겨서 아직까지는 안 망했으니까 전하면 그들이 멸망 받을지 안 받을지는 우리 소관 아니니까 주께서 그 절차대로 복음이 없는 쪽은 완전히 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게 바로 멸망에 담긴 하나님의 창조 안의 기획이고 그 내용이 들어있다는 얘기를 방금 드린 겁니다.


377강-YouTube강의(집 고린도후서 5:1)20211221-이 근호 목사


제377강, ‘집’. 집이라 할 때 구약에서 말씀하는 집과 신약의 집이 달라요. 구약의 집은 시편 127편에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말씀은 내가 집 지으라 할 때 집 지으란 뜻이 아니고, 내가 집 지으라 하지 않더라도 너희는 본성상 집이 꼭 필요하다고 너희들은 아주 마음을 단단히 먹고 이 땅의 삶을 살고 있다는 그 점을 하나님 내가 알고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 집 지을까요, 말까요?’ 이걸 물어볼 것도 없고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 땅에 살면서 집 없이는 못 산다는 것에 대해서 조금도 의심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구약 자체가 토지라는 수평적 무대를 갖고 있어요, 토지, 땅. 그 정해진 땅에서 이스라엘 약속의 땅. 어쨌든 약속의 땅도 땅이잖아요. 땅에 자기 백성을 거기다 두면서 그 백성들이 땅에서 생명을 목숨을 부지하면서 어떤 현상들을 보이는가를 주께서 관찰하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기다가 담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집을 짓는 것에 대해서는 나무라지 않아요, 본성이기 때문에. 집 지었나? 한옥 지었나, 양옥 지었나? 그래, 집 지어. 하지만 무슨 요소가 들어가야 되느냐.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고 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집 지을 때 주님께서 도와주셔야 집 짓는다,가 아니고 그 집 지을 때 누구를 위한 집이었느냐를 주께서 묻습니다. 너 자신을 위해서 집을 지었는지, 너 살기 위해서 집을 지었는지, 아니면 하나님과 함께 있기를 원하면서 집을 지었는지.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집을 지었는지를 묻는 거예요.

그게 바로 이방민족과 이스라엘이 차이나는 점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집이 없으면 못 산다는 것은 너무 당연하니까 그걸 문제 삼는 게 아니고, 집이 없으면 찬바람에 얼어 죽잖아요. 못 살잖아요.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게 누구를 위한 집이냐 이 말이에요.

단지 나를 살리기 위한 집 같으면 이방민족이나 다른 땅에서 사는 민족하고 이 약속의 땅에서 사는 민족하고 차이점이 없잖아요. 집을 하나 짓고 밥을 하나 먹고 무슨 행동을 해도 다른 이방민족, 택함을 받지 않은 민족과 택함을 받은 민족과의 어떤 차이점을 분명히 드러내면서 집을 지어야 되죠.

집을 짓는 것은 시편 127편에 의하면 인간의 삶의 기본으로 봐요. 집 없이 추운 데서 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2절에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아까는 집을 지을 때 나를 위한 집은 여호와께서 개입하지 않으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고 그다음에 사람은 집만 있으면 안 되잖아요. 집은 기본이고 그 집을 기본으로 기초로 해서 일을 하잖아요.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 이것도 헛되다는 거죠.

쉽게 말해서 집은 세우고 지키고 그 안에 거주하는 것. 이것은 인간의 목숨 부지의 가장 기본 중에 기본입니다. 주님께서 그걸 말한 것이 아니고 백날 집 잘 짓고 백날 밥 잘 먹어도 주님 보시기에 헛되다는 평가를 받을 것을 너희들이 고려해봤느냐, 그걸 한 번 생각해봤느냐.

너희들끼리 좋은 집 짓고 너희들끼리 잘 먹고 잘 살면 그러면 됐지, 라고 끝나버리면 안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 집 짓는 데부터 관여하고 먹고 마시고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하는 모든 일에 주님이 관여해주어야 이게 하나님의 친백성답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 3절에 자식이 태어나는 것도 네가 낳은 자식이 우리 가문을 계속 이어주면 좋겠다 해서 자식을 주는 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한테는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하나님이 함께 집에 관여하고 하나님이 함께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눕는 데에 관여했을 때 어떤 결과가 주어지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상(常)이란 이름으로 자식을 주는 거죠. 이것은 결국은 하나님이 함께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렇게 해서 5절에 보면 “이것이 그 전통(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자식을 하나의 화살로 보는 겁니다. (4절)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자식이 많아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우리 가정에 주도적으로 일하신다는 증거가 되게 되면,

그다음 5절에 어려운 것은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 이 원수라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나라, 이방나라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방나라와 이스라엘과의 차이점을 시편 127편에서 하나님이 개입했느냐, 개입하지 않았느냐의 여부로 이렇게 정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된다면 집이라 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이고 시편 127편에서는 인간 삶의 처음 부분에서 집을 언급했죠. 그러면 신약에서는 어떻게 되는가. 신약에서는 이 땅에서 이미 우리가 죽은 자가 돼요. 죽은 자는 이 땅에 더 이상 집이 있을 필요가 없어요.

그렇다면 구약 시편 127편의 그 집이라는 개념이 신약에 오게 되면 어떤 식으로 그 본질을 보이느냐.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그 내용이 나와 있어요. 이런 점이 상당히 난해해요. 거기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5장 1절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구약에서는 내 몸 따로 있고 그 몸이 거주해야 될 집, 건축구조물이 따로 있어가지고 그 집을 세우는 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친히 세워주시는 것이 약속의 백성들이 이 땅에 사는 방법이라고 구약에서는 그렇게 언급하는 거예요. 땅이라는 무대가 있거든요. 그런데 신약에 오게 되면 십자가로 인하여 이미 우리는 죽은 몸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집이고 절이고 필요 없고 몸 자체가 우리의 집이 되는 겁니다.

이 말은 시편 127편의 완성이 되면...... 시편 127편에 하나님이 집을 세우지 아니하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죠. 신약에는 이렇게 되는 거예요. 네 몸을 내가 개입하지 아니하면 네 몸이 하나님이 원하는 영광스러운 집이 될 수가 없다고 하는 거예요.

집이 없는 생명은 없는 거거든요, 구약이나 신약이나. 그러면 신약의 집은 뭐냐. 네 몸이야. 영광스럽게 네 몸이 네 집이야. 이렇게 고린도후서 5장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영원한 집은 네 몸이 영원한 집이 되게 하겠다는 겁니다.

자, 집 없으면 못 살아요. 집이 있어야 거주하는 겁니다. 집 없이는 못 산다, 집 없이는 거주 못 한다, 그 집의 개념이 신약에서는 몸이라는 것으로 함축되어 있습니다, 몸이라는 것으로. 그러면 신약에 와서 만약에 주께서 손댄 몸, 주님의 영광스러운 몸을 말합니다, 주님의 부활의 몸이 없으면 어떻게 되느냐.

3절에 보니까 그것은 벗은 자로 발견될 것이다.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벗은 채로 발견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4절에 보면 “이 장막에 있는 것은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몸은 그냥 있고 외부에서 뭔가 덮치는 거예요. 덮치는 것을 ‘삼킨다’라고 한 거예요, 삼킨다. 요나 선지자가 고래를 이겼습니까, 아니면 삼킴을 당했습니까? 요나가 고래를 이겨서 산 게 아니고 놀라운 사실은요, 요나가 고래한테 졌어요. 짐으로써 생명을 얻은 겁니다. 자기 안식처가 바다 속에서 만들어진 거예요.

그 망망대해 깊은 바다 속에서 집이 있을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요나를 삼켰던 고래가 본인의 집이 된 겁니다. 그 집을 누가 마련해줬겠습니까? 그 집 마련할 때 대출 얼마 냈어요? 은행에서 5억 대출받았습니까? 아니죠. 고래를 준비해서 삼켜버린 거예요.

이 요나의 표적이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 표적이에요.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되는 십자가의 효력입니다. 제발 너의 죽은 것을 네가 변신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생명에 삼킴 당해버려라. 그게 바로 여호와께서 친히 세우시는 집이다 이 말이죠.

거북이처럼 껍데기를 자기 손으로 벗길 생각하지 말고 그냥 죽어가는 몸, 이게 홀로 있으면 지옥이죠. 그러나 홀로 있는 몸에 위에서 덮쳐버렸어요. 주님의 몸은 뭐냐. 주님의 영광된 부활의 몸이 주님의 집이에요. 주님의 집이 허름한 우리 집을 깔고 눌러버린 겁니다.

그걸 뭐로 보증하느냐. 5절에 보니까 성령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우리가 보증한다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성령을 우리에게 보증으로 주신 것을 어떻게 아느냐. 6절에 “항상 담대”하라. 이게 정답입니다. 항상 담대하라.

자기만 보지 말고 덮쳐져 있는 주님의 부활의 효과, 죽음도 이기는 효과, 그 효과 때문에 우리는 이 땅에서 못난 몸 가지고 뭐 별로 돈도 없고 재산도 없이 초라한 몸이지만 당당하게 살 수가 있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