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372강, 373강) 권세 , 사도의 길 211116 본문
녹취:이하림
372강-YouTube강의(권세 마태복음 21:32)20211116-이 근호 목사
제372강, 제목은 ‘권세’. 권세라 하는 것은 그 당시 자기 유대나라를 다스릴 때는 하나님이 힘을 주신다할 때 권세를 말합니다. 자기들은 부족하지만 아주 센 하나님이 자기 나라를 지켜준다, 그게 권세인데 그 권세를 기다린다는 것은 바로 선지자를 기다린다는 거죠. 그래서 그들은 선지자가 오게 되면 구약 때 약속했던 일관성이 이 시대에 자기에게 완성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선지자를 기다린다는 것은 그들의 생각 가운데 어떤 것이 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살리기 위해 선지자를 우리 시대에 나타나게 하셨다’, 이것을 그들은 신앙이라 본 거예요. ‘너 말고 너 말고 너 말고 하나님이 보내준 사람 찾기 또는 그걸 찾아서 우리는 그 사람이 하는 것을 믿으면 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말에는 하나님의 권세가 있기 때문에 보통 인간들의 말하고는 차이가 있으니까 권세 있는 선지자의 말에 우리의 희망이 있다.’ 그렇게 믿은 겁니다.
자기들이 생각해도 참 순결한 믿음처럼 들리죠. 일반 사람을 안 믿고 하나님이 보내준 사람을 믿으니까. ‘그 사람은 하늘의 권세를 지니고 왔기 때문에 하늘의 권세 있는 사람을 찾아보자’ 라고 찾기 시작했죠.
그런데 그들이 찾은 권세가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마태복음 21장 25절에 보면 이미 그 당시의 대중들이 나름대로의 신앙체계가 갖추어져 있고 거기에 합당한 선지자가 왔다고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 사람이 세례 요한인데 25절에 보면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이렇게 물었어요. 이것은 물음 자체가...... 이건 뭐 답은 딱 나와 있어요.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건 하늘로서다. 그러니까 요한이 세례준 것은 드디어 우리 민족에게 희망이 비췄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만약에 어느 교회에 목사님을 새로 옹립했는데 옹립할 때 그 교인들의 희망사항이 우리 새로 옹립된 그 목사님은 사람에게서 나온 그런 권세 말고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사랑해서 주신 권세를 덧입은 그런 사람이기를 간절히 생각하면서 그 사람의 설교라든지 그 분의 목회에 대해서 전적으로 따르고 순종할 마음자세가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자세에 대해서 교인들은 순수한 믿음이 있다고 그렇게 자부하는 거예요. 땅의 것이 아니고 하늘의 것만 쳐다보고 있으니까 자기가 자기를 보기에도 ‘세상에, 아이고 나도 참 믿음 대단하다. 하늘의 권세를 이렇게 생각하니까.’ 교인들 본인 스스로가 얼마나 의젓했겠습니까. 우리가 저 목사님의 하늘에서 온 권세를 믿기만 한다면 우리 교회에 등록된 사람은 내일 죽어도 천국 간다는 보험 같은 것, 편안한 마음을 그들이 보장받을 거겠죠.
그런데 마태복음 21장 3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해요.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이게 이제 하늘의 권세가 어떤 모양새로 오느냐에 대해서 너희들은 지금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 당시 사람들이 하늘에서 주신 것은 무조건 옳은 것이고 무조건 바른 것이다. 나는 이 세상 세속적인 사람같이 이 세상을 찾지 않고 하늘의 것만 추구하니까 정말 나는 믿음 있다고 장담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이 오신 경우를 들어서 이걸 구분합니다. 세리와 창기는 세례 요한을 믿었다는 거예요, 세리와 창기는. 그런데 세리와 창기는 믿었는데 너희는 세례 요한의 의의 도를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했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세리와 창기는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어떤 요소를 보태었느냐 하면 뉘우친 거예요. 뉘우쳤다는 거예요. 그냥 받기만 한 것이 아니고 뉘우친 거예요. 뉘우쳤다는 말은 ‘하늘에서 어떤 권세가 오게 되면 내가 한 것은 일체 죄이고 더럽기 때문에 내가 어떤 일에 성실히 임했건 어떻게 열심히 했건 하나님께서는 그걸 죄로 규정해서 안 받는다’ 라는 뜻이고 바로 세리와 창녀가 그걸 인정하고 그런 마음을 가졌어요.
그러면 세례 요한이 가진 권세는 뉘우침이 함유된 믿음만 믿음이라고 간주한 권세이고 그 권세를 가지고 이 땅에 오신 분이 바로 세례 요한이었다 이 말이죠, 세례 요한. 그럼 다른 사람은 뭡니까? 제가 아까 예를 들었던 다른 사람은 뭡니까? 뉘우칠 생각 없어요. 그냥 하늘의 권세를 내가 살아가는데 추가해서 추가적으로 내가 받기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세리와 창기는 받기만 하는 게 아니고 뭘 경유했어요? 내가 이 땅에서 하는 어떤 것도 이것은 정말 추하고 더럽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겁니다. 세리와 창기가 무슨 일을 했습니까? 사람들은 그 당시에 나쁜 일을 했다고 이야기하겠죠. 세리와 창기는 나쁜 일을 한 게 아니고 돈 버는 일을 했어요.
돈 버는 일이 뉘우치는 일이 돼요. 이 땅에서 돈 버는 일이 뉘우치는 일이 돼요. 이게 일반인들에게 수긍됩니까? 수긍될 리가 없죠. 수긍될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은 인간이 이 땅에 태어나서 돈 버는 일을 하게 되면 필히 누구도 세리와 창기 수준이 될 수밖에 없음을 세리와 창기는 그걸 온 몸으로 노골적으로 보여준 거예요, 노골적으로.
그들은 노골적으로 보여줬고 다른 사람들은 음흉하게 그걸 감추면서 그걸 정당화한 겁니다. ‘아니 일 열심히 해서 노동해서 돈 버는 게 뭐가 나쁜데? 아니 뭐 문제 있을 수 있지. 하지만 돈 벌어야죠.’ 이게 뉘우침이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세리와 창기가 다른 사람보다 더 훌륭하다는 말이 아니고 이 땅에서 돈 번다는 자체가 필히 나의 허접함을 노출시킬 수밖에 없는 그러한 계기로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세리와 창기는 그대로 인정한 겁니다. 누구 앞에서? 하늘의 권세 앞에서.
사람들은 하늘의 권세를 그렇게 보지 않고 나름대로 착실하게 사는데 조금 문제 있고 모자람이 있겠죠. 그때 하나님의 권세까지 보태버리면 나는 죽어도 천국 간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목사 하는 일이 창기 일하고 equal(동일)이 된다는 생각을 어느 목사가 하겠습니까?
‘아, 추잡하고 더러워라, 이 목사일.’ 목사 중 누가 그런 고백을 하겠습니까? ‘하나님, 저는 평생 주의 목자였습니다. 이 더러운 창기 짓을 했습니다.’ 목사 일을 그렇게 이해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자, 신학교 가자. 창녀짓 하러 가자.’ 이런 식으로. ‘신학교 왜 왔습니까?’ ‘창녀짓 하러 왔습니다.’ 그렇게 서약하고 신학교 간 사람 봤어요? 못 봤죠. 이게 문제에요. 이게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아주 우습게 본 거예요.
그 당시에 또 어떤 파가 있느냐 하면 아무 것도 안 하고 그냥 겨우 밥 먹는 일만 하고 최소한의 노동만 하고 나머지는 기도와 성경 읽기에 몰입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세상은 일체 더럽다고 해가지고 일체 세상의 어떤 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고기도 안 잡고 아무 것도 안 했어요. 세상은 더러우니까 우리는 의로우니까 의로운 사람답게 말씀에 전념하자.
그 사람은 직장에 안 다녔기 때문에 자기가 죄인 되는 기회를 놓친 거예요. 돈 버는 일을 안 했잖아요. 그냥 텃밭 가꾸고 최소한의 죄로 줄이기 위해서 직장을 안 다니다 보니까 지가 얼마나 돈 밝히는지 지가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다 박탈당했습니다. 갑자기 기쁘지 않습니까? 돈 버는 일이 기쁘죠?
돈 벌게 해서 창녀 되게 해가지고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 왔을 때에 ‘저요! 제가 바로 죄인입니다!’ 하고 나설 수 있는 기회를 지금 여러분한테 줬습니다. 평생 직장 안 다니고 가정주부해도 마찬가지에요. 줬어요. 이게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이야기 더 하다가는 욕 얻어먹겠다. 이 기회가 바로 창녀하고 우리하고 다를 바 없다는 거예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28절-30절에 나옵니다. 두 아들 비유할 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은 포도원에 가서 일 하겠다 하다가 안 갔고 둘째 아들은 싫소이다 했다가 뉘우치고 갔다는 겁니다. 이 세상은 권세를 그냥 받지만 그렇지 않고 뒤집어서 받을 수 있는 안목. 그게 바로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제대로 알아보는 하나님의 성도입니다.
373강-YouTube강의(사도의 길 고린도전서 4:13)20211116-이 근호 목사
제373강, 제목은 ‘사도의 길’. 사도는 그냥 사도가 아니고 ‘저 사도 될게요.’ 그렇게 사도 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요. 사도는 예수님이 열 두 제자를 선택할 때 이미 열 한 제자는 사도였고요. 그리고 이방인의 사도는 주님께서 직접 모집한 겁니다. 사도 바울에게 찾아와서, 이제부터 너는 나의 사도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편지 앞에 꼭 붙이는 게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된 나 바울은”
그러니 사도라 하는 것은 ‘내가 하고 싶어서 되지 않았다’는 것이 유지가 되어야 돼요. 그럼 사도를 살짝 목사로 바꿔봅시다. 목사는 평생 ‘내가 뭔가 노림수 있어서 목사 되었다’가 있으면 안 되고 하나님이 정말 나를 목사 되게 했으면 목사 안에서 무엇과 싸워야 되느냐 하면 ‘나 목사해서 이거 될래.’하는 그것이 다 작살나는 체험이 계속해서 매일같이 일어나야 돼요.
목사로 인하여 내가 뭐 되겠다는 그것을 전부다 잘라내는 그 작업이 주께서 진짜 선택한 목사의 특징입니다. 본인의 노림수라는 것이 진짜 선택된 목사한테는 허용이 안돼요. 미가야 같은 경우는 400 대 1로 붙었어요. 그럼 미가야 빼놓고 400명의 선지자를 거짓선지자라고 하죠. 거짓선지자라고 이야기해서 뺨까지 맞았으니까요, 미가야 선지자가. 그럼 그 400명 선지자를 한번 우리가 분석해보잔 말이죠.
자칭 선지자잖아요. 그 선지자가 왜 미가야를 뺨 때리고 욕하고 왜 그렇게 미워합니까? 미가야 선지자가 뭘 건드린 거예요? 선지자 노릇해서 뭐 되겠다는 것을 건드린 거예요, 미가야 선지자가.
그럼 사도 바울 같은 경우에는 누가 누굴 건드립니까? 성령이 또는 예수님께서 사도를 계속해서 사도되도록 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사도 안에는 사도가 없어요. 그냥 주님만 계신 거예요. 그걸 사도가 고백한 겁니다. 내 안에 나 없다.
그러니까 내가 사도되고 싶은 생각은 0도 없는 거예요. 매일같이 주께서 찾아오니까. 그걸 가지고 세 자로 ‘스토커’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도는 누구의 눈치가 중요한 게 아니고 주님이 스토커에요. 스토커 한번 당해봤습니까? 아침에 나갈 때 문 열면 기다리는 그런 거 당해봤어요? 아, 진짜 이거는 죽이고 싶을 거예요. 죽이고 싶을 거예요. 이거는 뭐 수갑 채우는 것보다 더 심하죠.
스토커의 특징이 뭐냐. 자유의지, 자율성 다 박탈되었습니다. 다 박탈되면서 어떻게 끌고 가는가. 고린도전서 4장에 나옵니다. 이게 성경에 나오니까 잘 한번 들어봐야 돼요. 성경에 없는 말 아니에요. 잘 안 보지만 성경에 분명히 있어요.
4장 8절에,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노릇 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마지막)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말이 구경거리지, 놀림거리에요. ‘사도인데 왜 저리 망했나?’하고 수군수군 거릴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자꾸 사도에게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도에게는 ‘나 예수 믿어야지’ 라는 유인책이 하나도 없어요. ‘아, 예수 믿으면 저렇게 잘 되는구나.’ 하는 유인책이 하나도 없어요. 그걸 이사야 53장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한테는 사람들이 흠모할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나 본받아야지. 나 공부 더 열심히 해서 신학교 가야지.’ 라고 할 게 전혀 없어요. ‘나도 신학교 가서 고급차 타고 사택 갖고 월급 수천 만원 받고 해야지.’ 이게 전혀 없어요, 사도한테는.
그래서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10절에 보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이 말은 사도가 미련하게 살지 아니하면 사도를 믿는 그들은 다른 지혜를 찾게 돼요. 세상 출세하는 것.
그런데 세상 출세하는 그 거짓 선지자와 이 사도가 가는 길을 그 당시 성도들에게 비교할 수 있는 재료를 누가 제공하는가? 주님이 사도 안에 계셔가지고 스토커처럼 부려가지고 딱 제시하게 되는 겁니다. 어느 길이고? 넓은 길이냐, 아니면 좁은 길이냐? 너 알아서 해. 어느 쪽이 멸망과 통하는 길인지, 어느 쪽이 영생인지 네가 한번 봐. 한번 봐. 할 수 있는 자료를 제시하는 겁니다, 그들에게.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절,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수군수군거림을 당한즉.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잘 돼라, 너희들’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이게 사도가 갖고 있는 사고방식이에요. 입체적 사고. 입체적 사고라 하는 것은 두 개의 세상관이죠. 두 개의 세상이 샌드위치나 햄버거처럼 중첩이 된 상태에요. 중첩이 되어 있는 상태, 포개져 있는 상태에요.
2층 옥탑 방에 사도가 살면서 일하는 것은 1층 게스트 룸에서 일하는 것. 주인집은 2층에 살면서 1층에 내려와서 늘 손님 받는 사람. 손님한테 라면 끓여주고 여행자에게 잠자리 제공하면서 밤 되면 2층에 올라가 잠자잖아요.
그러니까 그 사람, 사도의 본 고향이 어디입니까? 2층이에요. 하늘나라에요. 빌립보서에 나옵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우리의 본적은 지금 하늘에 있다. (빌립보서 3장 20절,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하늘에 있는데 일하는 장소는 땅인 거예요. 땅에서 일하는 거예요.
이 말은 나는 너희들이 뭘 원하고 뭘 소망하고 뭘 갖기를 원하는지 선배가 되어가지고, 성령 안에서 주님의 영이니까, 그걸 다 거친 거예요. 그게 일시적인 허망함만 제공한다는 사실을 알아요. 교인들에게 존경받고 교인들에게 대접받는 게 얼마나 일시적인가 하는 사실. 결국 그렇게 되면 목사는 교인을 소유하려고 할 거예요. ‘우리 교인 몇 명이다’ 이게 소유 아닙니까?
사도는 그런 게 없어요. 주께서 붙여준 분이, 주께서 섬기라고 주신 분이 몇 명 왔는데 그 분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잘 되기 위해서 나는 뭐냐. 여기 13절에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이게 오늘 제목대로 사도의 길입니다.
<사도의 길>이라 하니까 여기 비슷하게 견줄 수 있는 게 이미자가 불렀던 <여자의 길>. ‘여자의 길’ 있죠? 옛날에 <여로>라 하는 드라마 있었잖아요. 고생 직싸게 하는 가련한 여성의 순종하고 헌신하는 삶. 그 여성하면 딱 생각나는 게 아래 위로 하얀 소복입고 항상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일할 준비가 되어 있는, 찬 물에 손 넣을 준비가 되어 있고 항상 발견되기는 우물가에서 발견되는 거. 밥도 같이 못 먹고 부엌 부뚜막에서 먹는 거 있잖아요. 옛날 여자의 길. 요새 여자 말고요. 술 먹는 여자 말고 모이면 술만 먹는 여자 말고. 옛날 여자의 길. 그 길이 사도의 길.
그런데 사도가 그걸 하고 싶겠어요? 하기 싫죠. 그런데 이건 스토커처럼 매일 찾아와서 주님이 그 안에서 사도는 껍데기이고 ‘네 안에 나 있다’ 해서 주님의 일의 연속성을 사도가 보여주는 거예요.
그럼 사도가 얻을 수 있는 건 뭐냐. 2층집이죠. 사도가 있는 곳은...... 이미 나는 영생을 얻어버렸어요. 얻을 걸 다 얻은 거예요. 얻을 걸 다 얻었기 때문에 아낌없이 줘도 그게 주께서 하게 하신 일이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사도되려고 하지 마세요. 사도는 지금 없지만. 주의 종, 목사 함부로 되는 게 아닙니다. 주의 종, 목사 그걸로 나는 됐다, 나는 목사 됐다, 그게 아니라 이제부터는 삭제시키는 거예요. 내가 목사에 대해서 기대했던 어떤 상상하는 환타지를 매일같이 주께서 제거해서 찌꺼기 중의 찌꺼기로 만드는 작업을 주께서 하십니다. 이게 바로 목사의 길이고 사도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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