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370강,371강) 배경, 원형 211102 본문
녹취:이하림
370강-YouTube강의(배경 출애굽기 13:21)20211102-이 근호 목사
제370강, 제목은 ‘배경’. 배경은 본인이 수집합니다. 본인이 골라내죠.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환경 가운데서 자기 생존에 필요하다 싶은 그것을 딱딱 집계합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내 삶의 터전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자기 자신이 있는 그 자리를 둘러쳐버리죠.
어린 애들이 자기들끼리 군병 놀이할 때, 요샌 애들이 학원 간다고 바쁘지만 옛날에 놀이할 때는 서로 진지를 구축해요, 애들이. 요샌 컴퓨터로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실제로 진지를 구축해서 토치카를 만들고 주위에 필요한 나무나 나뭇가지를 구해서 진지 비슷하게 둘러쳐요. 애들이 그렇게 하거든요.
나중에 어른 되어도 마찬가지에요. 내게 필요한 친구와 필요 없는 친구를 골라냅니다. 내게 도움이 되겠다 싶은 인사, 그런 사람들에게는 전화도 자주하지만 필요 없는 사람은 발신인 전화번호 거부해버리죠. 이게 다 나를 지키고 나를 지탱하기 위한 자기 환경 다듬어가기, 환경 만들기입니다. 그게 이제 자기 삶의 배경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삶의 배경이 되어버리면 자기 생존을 위해 자기 몸 하나 지키겠다고 그런 요소들을 골라서 배치를 하는데요. 그럴 경우에 하늘과 연락이 안 됩니다. 관계가 끊어져요. 철저하게 닫힌 구조를 형성합니다. 다른 사람이 들어가면 그 안에서 숨이 막혀요.
자기가 끌어 모았던 요소들로 본인이 그 안에 쏙 들어가서 스스로 갇힌 인생이고 싶어 합니다. 자기 필요할 때만 외출해서 바깥에 나오고 그렇지 않으면 자기 안에 파묻혀버리죠. 자기 삶 안에 파묻혀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언젠가 자기 날개를 펴고 비상할 날을 고대하면서 그렇게 살아가게 되면 그게 갇힌 배경 또는 닫힌 배경,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가 필요한 사람들에게만 연락을 취했기 때문에 타인이 그 사람에게 연락하기가 힘들죠. 그런데 특히 성도한테는 본인이 골랐던 그 구조, 토치카, 아지트, 그게 주님하고 연결선이 끊어진 상태가 되어 버리면 그 삶의 배경은 폭삭, 자폭하는 셈이 되어버려요. 결정적일 때 자살이 자살이 아니라 서서히 자살이 되는 쪽으로 삶이 가는 겁니다.
출애굽기 13장 21-2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여기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비췬다고 했어요, 비췬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능동적으로 폐쇄적인 자기 삶의 세계를 구축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준 그 배경이라 하는 것은 하늘과 연락이 가능한 그냥 구멍 뚫린 그 환경을 준 거예요. 그게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에요. 요즘 식으로 하면 이것이 성령이라 할 수 있어요. 항상 성도 옆에 따라붙으니까.
그럼 성령은 뭐냐 하면 하나님과의 연락책입니다. 연락책이고 성도의 삶의 방식은 연락처가 되시는 그 분이 하늘에서 물어다 주는 그것, 그 지시와 명령을 먹으면서, 그 지시와 명령을 삼키면서 그렇게 하루하루 성령과 동행하고 사는 거예요. 이게 바로 열린 구조잖아요.
주님께서 성도에게 배경을 마련할 때는 이처럼 세상적인 사람들의 배경과 확연히 달라요. 다시 말씀 드리면 세상적인 삶의 배경은 닫힌 구조 또는 폐쇄 구조. 왜 닫혔고 왜 꽁꽁 숨어 있느냐 하면 내가 수집했거든요.
내가 판단해서 이것은 나한테 유리하다, 저건 불리하다는 판단을 내가 하는 거예요, 내가. 내가 판단해서 그런 것들로 외부와 나와 단절할 때는 단절하고 자기가 필요할 때만 빼꼼히 입구를 만들어서 내 쪽에서 다가가고. 다가가봤자 어디까지나 이건 자기 아지트죠.
심지어 아파트가 50평, 100평 넓어도 하늘과 연락이 안 되게 되면 그 자체가 지옥입니다. 답답하지만 해결책이 없는데 어떻게 해요. 그 100평짜리 아파트에 있는 모든 가구와 인테리어, 그건 내가 결정했거든요. 내가 마련했거든요, 돈 벌어가지고. 소파부터 침대까지 모든 걸. 그리고 그 안에 살면서 지 잘났다는 그걸 감상하면서 답답한 일상을 살아가는 거예요.
다람쥐가 열심히 뛰죠. 뛰어봐야 실속 없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도니까. 체 안에 있을 때는. 자기 자리에서 떠날 줄을 몰라요. 왜 못 떠나느냐. 내가 힘들게 모아놓은 이 자리에 미련이 있어서 이게 아까워서 떠나지를 못하는 거예요.
뭔가 하늘과 뚫려야 되는데. 시원하게 뚫려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지시와 명령이 쏟아져 들어와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판단을 본인이 다 판단하고 본인이 결정내리고 책임도 본인이 책임지고. 여태까지 살아온 게 그런 식밖에 없어요.
수동적으로 살아온 적이 없고 전부다 자기가 나서서 자기가 개척해야 되고 자기가 항해사가 되어서 망망대해를 자기가 파도 이긴다고 설쳐대고. 파도가 그렇게 만만합니까? 서핑도 못하면서 파도를 어떻게 이겨요. 그냥 지시받고 살면 그렇게 쉬운 걸 가지고. 그렇지 않습니까?
하늘의 어른한테 지시받고 살면 쉬운 걸 가지고 일종의 자존심은 있어가지고 내 인생 그럴싸하게 남한테 보이겠다고 혼신의 노력을 다하는데 아무 실속이 없습니다. 몸은 피곤하고 집에 들어오면 쓰러져 퍼지기 마련이고.
주님의 배경은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이끄십니다.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이끌면 어떤 결과가 나오느냐. 출애굽기 14장, 15장에 보면 그들이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어도 하나님께 원망하는 자가 바로 나라는 것을 그 구멍 뚫린 통로를 통해서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이기주의이며 하나님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구멍 뚫린 지시와 명령을 통해서 이제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자기 주변에 널려있는 모든 환경은 내가 수집한 것이 아니고 내 죄를 알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물어다 준 거예요. 심지어 가정에 있는 아내, 남편까지 내가 얼마나 못돼먹은 인간이며 나만 챙기는 인간인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주님께서 모이 물어다 주듯이 갖다 준, 하늘과 열린 그 통로를 통해서 너 자신을 제대로 알라고, 너는 지옥 갈 인간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배치한 그 모든 기구, 배치물, 옆에 있는 여러 가지 소품들, 그것이 바로 성도가 마주보고 있는 주님이 주신 배경입니다.
371강-YouTube강의(원형 요한복음 1:5)20211102-이 근호 목사
제371강, 제목은 ‘원형’. 인간은 복사물이에요, 원형이 아니고. 복제물. 그것을 생물학적으로 말하면 DNA의 결과물 또는 DNA의 유형체, 가현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DNA는 너무 작아서 안 보이지만 DNA가 만들어낸 그 형태는 인간의 이런 모습들로 나오는 겁니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수정란을 형성하고 수정란에서 꼬물락 꼬물락 머리 자리, 엉덩이 자리, 팔 자리, 사지가 배분되어 나오거든요. 줄기세포에서 모든 것이 나오듯이 배분되어 나온다고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게 신기하니까 또는 태어나서 유전병 같은 것이 있을 수 있으니까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서 원형을 찾기를 바랐던 거예요. 그 원형을 찾았는데 그게 DNA였습니다.
그런데 DNA로 만족하지 않고 DNA는 뭐로 되어 있는가, 그걸 알아야 인위적으로 DNA를 조작도 할 수 있고 인간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DNA를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 DNA를 보니까 이건 분자구조에요. 분자구조라는 말은 아무런 감정도 없고 이성도 없고 느낌도 없고 그냥 냉혹한 분자구조란 말이죠. 기본 물질 원소가 백 몇 가지가 되는데 그 중 몇 개를 골라서, 물론 유기체는 탄소 중심이니까 탄소 중심으로 고른 분자구조가 DNA에요.
다윈이라는 사람은 그랬어요. 인간은 원소에서 태어났다고. 원소에서 태어난 게 아니에요. DNA에서 태어난 거예요. 더 나아가서, DNA가 다가 아니에요. 분자에서 태어났어요. 분자가 다가 아니고 원자에서 태어났고 원자핵에서 태어났고. 양자에서 태어났고.
나를 알기 위해서 원형을 찾는데 원형을 너무 세밀하게 쪼개버렸어요. 쪼개니까 알맹이가 나올 게 아닙니까. 알맹이를 더 쪼개보니까 에너지뭉치에요. 결국 인간의 어머니는 에너지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반박해보라. 반박 안 됨. 반박 되지를 않는 거예요. 그럼 인간이 사랑하고 미워하고 질투하고 싸우고 하는 것은 뭐냐. 각자의 에너지가 변형을 일으킨 거죠.
그걸 한마디로 말해서 의미 없음. 인간의 모든 것은 결국 원형을 살펴보니까 인간은 ‘의미 없음’이 되는 거예요. 우리는 과학에서 의미 없음이 되는데 성경에서는 그것을 ‘어두움’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둠.
여러분 잘 알다시피 그게 요한복음 1장에 나옵니다. 1장 5절에,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라고 되어 있어요. 말씀이 굉장히 오묘하고 난해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는 어두움은 감정이라는 게 없어요. 어두움이 무슨 웃는 게 있고 우는 게 있겠어요? 어두움 자체가 뭘 깨닫는 게 있겠어요? 그런데 여기 보니까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그럼 어두움은 깨달아야 돼요? 어두움은 꼭 깨닫는 것을 해야 됩니까?
‘나의 원형이 뭡니까?’ 라고 물을 때는 ‘나는 이렇다’고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요한복음에서. 모든 인간을 일괄적으로 이렇다고 하고 그 중에 부분이 저와 여러분들이에요. 개인을 콕 집어서 ‘나는 누구입니까?’ 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거예요, 질문 자체가. 그렇고 그런 인간들인데 뭘 더 개성이 있다, 없다가 아무 의미 없어요.
인간과 인간 사이에 어떤 차이라는 것을 성경적으로는 둬서는 안 돼요. 어둡다는 점에서 똑같아요, 어둡다는 점에서. 어두움에서 태어난 거예요. 빛에서는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냥 어두움에서 태어난 거예요. 어두움에서 태어나가지고 공부 좀 하고 출세 좀 해보려고 강남의 아줌마들은 스카이 캐슬 비슷한 모임 갖고 백날 해봐야 어둡잖아요.
성경은 간단하게 이야기합니다. 어두움이 뭐냐? 생명이 없는 게 어두움이에요. 그러면 생명이 있으려면 누가 가져다줘야 돼요. 가져다주는 것을 빛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5절까지 나오는 내용이 그건데요. 그걸 창세기 1장과 비교해도 통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처음에 이 세상에는 혼돈과 카오스죠. 혼돈과 어두움밖에 없었다는 거예요. 첫 날에 만든 게 뭡니까?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었더라” 빛이 있으라고 명령하신 분이 신약성경에는 빛으로 오신 거예요.
어두움에 속한 사람 입장에서는 빛이라 하는 것은 1초에 30만 km를 가는 어떤 실체를 의미하는 겁니다. 그 빛은 광자로 되어 있어요. 광자는 일종의 파동이기도 하고 입자이기도 하고. 지금 그것까지는 알아냈어요. 그러나 과학자들이 아무리 애써도 그 빛은 어디서 만들어졌는지 그건 몰라요.
태초의 빛은 어디서 왔는가. ‘빛이 어디서 왔는가?’ 라는 질문을 과학자들은 바꿉니다. ‘에너지는 어디서 왔는가?’ 그래서 기껏 이야기하는 것이 에너지는 옆 동네에서 왔다. 이걸 가지고 바로 다중우주론이라 합니다. 옆 동네에서 왔다. 그럼 옆 동네 우주는 어디서 왔는가? 그건 옆 동네에서 왔겠지 뭐. 그럼 그 옆 동네는 어디서 왔는가? 세상은 어디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어디서 출발한 것도 아니고 그냥 그렇다. 이게 바로 과학자들의 결론이에요.
이게 과학자들의 결론이고 불교 믿는 사람들의 결론이고 철학하는 사람들의 결론이에요. 그냥 그대로 있었다는 거예요. 어떻게? 내추럴하게 자연그대로. 그래서 이름이 자연이에요. 그래서 자연을 공부하는 것을 자연과학이라 합니다. 경제는 사회과학. 언어학은 인문과학. 전부다 뒤에 ‘과학’을 붙여요. 지금은 과학밖에 없어요. 종교는 뭐냐. 종교는 사회과학이에요, 종교니까. 아무리 연구해도 그들이 아는 빛에너지는 빛이 아니에요. 그것은 만들어진 빛이죠.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이야기하는 빛은 빛 자체가 오시는 거예요, 빛 자체가. 빛 자체가 오게 되면 ‘인간은 왜 죽느냐’가 해결돼요. 인간이 왜 죽느냐 하면 생명이 없기 때문에 죽는 겁니다. 생명이 없기 때문에 죽는 거예요.
그럼 그 말은 외부에서 가져다 준 생명이 있다면 죽어도 괜찮죠. 죽어도 괜찮은 거예요. 왜냐하면 그 생명은 죽었다가 살아난 생명이기 때문에 죽음이 끝이 아니다 이 말이죠. 생명이니까.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이 어두움 속에서 빛으로 말미암아 이끌어냄을 당한 빛이 돼요. 그것을 빛의 자녀라 해요.
1장 9절에,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기존에 세상의 빛하고 다릅니다.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 빛이 직접 빛을 비추게 되면 그 빛이 비춰서 영생을 얻은 사람은 다른 사람과 차이점이 뭡니까? 어떻게 구별합니까? 간단하죠. 나는 어두움에서 출발했고 어두움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발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생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미 생명을 받은 사람만 이 말을 합니다. 그리고 그 발언을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부럽지 않습니다. 당연히 시기나 질투를 하지 않습니다. 백날 출세해봐야 부자 되어봐야 그들은 어두움이기 때문에. 많이 어두워라. 어둡게 하다가 어두운 곳에 가거라, 이 인간아.
어떤 세상에 대해서 주눅 들지 않는 것. 세상에 대해서 겁먹지 않는 것. 그걸 한마디로 말한다면, 빛 있어요? 생명 받았습니까? 그러면 당당하세요. 이 세상을, 여러분 당당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유튜브 강의(이근호) > 유튜브 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374강, 375강) 설교, 시간 / 211207 (0) | 2021.12.08 |
---|---|
(372강, 373강) 권세 , 사도의 길 211116 (0) | 2021.11.17 |
(368강, 369강) 끊어진 과거. 홀로 산다는 것 211019 (0) | 2021.10.20 |
(366강, 367강) 운명과 예정, 불가능한 온전함 211005 (0) | 2021.10.06 |
(364강, 365강) 성도의 위치, 오해와 거짓 210928 (0) | 2021.09.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