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364강, 365강) 성도의 위치, 오해와 거짓 210928 본문
녹취:이하림
364강-YouTube강의(성도의 위치 시편 109:8)20210928-이 근호 목사
제364강, 제목은 ‘성도의 위치’. 태어나면서 사람은 장소를 갖게 되죠. 어디서 태어났느냐 또는 언제 태어났느냐. 인간을 규정하는 데 있어서 물체적으로 물리적으로 규정하는 것을 시공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시공간에서 인간은 하나의 좌표를 갖는 거예요. 주민등록을 보면 앞에 생년월일 나와 있죠, 시간. 본적(本籍)이 어디냐, 공간. 시간과 공간, 하나를 x, 다른 하나를 y좌표로 하게 되면 정확하게 한 지점으로 공간에 위치를 규정할 수가 있는 겁니다.
이 세상을 하나의 좌표계로 삼아버리면 거기에 독점적이고 특수한 나만의 공간이 생각되는 겁니다. 같은 산부인과에서 태어나도 내가 태어난 시간은 정확하게 나만이 가질 수 있어요. 같이 중첩되지 않는 특별한 나만의 시공간을 갖는 겁니다.
물리적 세계관에서는 그런 식으로 인간을 실증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데 문제는 그 규정하는 사람이 자기는 고정되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고정되어 있고 누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느냐를 이렇게 보는 거거든요.
그런데 만약에 자기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시간과 공간이 움직인다면 이건 절대적으로 남을 규정할 수 있는 자격이 박탈되는 겁니다.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반대로 상대적이죠. 그 때는 앞에 뭐를 붙여야 되느냐 하면 ‘내가 볼 때 너는 어디서 태어났고 너는 몇 시에 태어났다.’ 이렇게 돼요, 내가 볼 때.
그 전에 주민등록 이런 것은 이 시간과 공간은 고정되어 있다는 가설 하에 좌표를 만들 수 있습니다, (x, y) 좌표요. 그렇게 되죠. 한국에 있는 주민등록이 아프가니스탄 가서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그 주민등록을 쓸 수가 없어요. 새로 발급하라 하죠. 그쪽 나라는 그쪽 나라의 시간과 공간이 있기 때문에. 그런데 그렇게 정한 그 사람이, 그 나라, 그 당국이 고정적이지 않고 움직인다면 이 세상에서 어느 누구도 절대적으로 ‘나는 어디에 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네가 보기에는 내가 그렇게 보이지만 그것은 정답일 수가 없어. 왜냐하면 내가 보기에 너는 저렇게 따로 보이기 때문에.’ 이렇게 되는 거예요. 본인은 본인한테는 절대적이지만 모든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절대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 이 말입니다.
그것을 상대속도라 합니다. 상대의 속도에 따라서 상대가 어떤 인물인지는 보는 사람에 따라서 천차만별, 다 다르게 되어 있어요. 이 세상은 전부다 상대적이 되는 겁니다. 상대적이라 하는 것은 결국은 ‘자기 외부에서는 절대적인 것은 찾을 수 없다’ 가 되어버려요. 내가 옳으면 옳은 것이지, 내가 옳은 것을 누구한테 검증받거나 허가받을 필요가 없는 세대, 없는 그런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이것이 절대적이라 했지만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공간에서는 심지어 시간도 공간도 빛의 속도에 의해서 이것이 전부다 다 달라져요. 그리고 시간과 공간을 시공간이라고 합쳐버렸습니다. 합쳐서 시공간이 절대적이 아니어버리면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시간의 중첩이 일어나요.
나는 여기 있는 것이 나한테는 ‘지금’이라고 생각되지만 다른 먼 데에서 보면 그것은 과거지사가 되는 거예요. 다른 우주에서의 과거가 나는 지금 오늘로 보이는 겁니다. 빛의 속도로 인하여, 멀리서 온 빛이 내가 보고 있는 이 순간에는 지금 그 별의 현재라고 보지만 빛의 속도 때문에 빛의 속도가 만약에 1시간 걸린다면 1시간 전의 별을, 그 별의 과거를 나는 지금 현재라고 우기면서 보고 있는 거예요.
이것은 물리적으로 상대성 이론에 의해서 그렇게 되지만 이것이 단순히 물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물리 알아봤자 구원 받는 것도 아니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이 절대적인 위치를 내가 잡을 수가 없다. 너무나 세상은 상대적이고 남에 대해서 나를 전제로 규정할 수 없다.’ 라는 말 속에는 ‘절대적인 것이 필요 없다’ 가 아니라 절대적인 것은 필요한데 그것을 지금까지 남이 이야기해왔다면 지금 이 시대는 ‘내가 절대라 하면 이건 무조건 절대적이야. 내가 진리라 하면 진리야.’ 지금 이런 시대에 돌입했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위치라 하는 것은 남이 정해주는 게 아니고 성도 본인이 정하는 거예요. 성도보다도 교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 믿고. ‘하나님 보시기에 나는 의롭다하면 나는 의로운 것이다.’ 라고 할 때 우리는 그런 질문을 해봐야 돼요. 그 하나님이 누구한테 동의 받은 하나님이냐. 누구한테 인정받은 하나님이냐를 물을 때 그 근거를 제시해야 되는데 절대적 근거를 바깥에서 못 찾는다 했죠, 방금. 찾을 수 없다 했죠.
내가 믿는 하나님이다, 이런 답변밖에 안돼요. 그럼 네가 믿는 하나님에 의해서 네가 의롭다 하니까 이것은 다른 사람한테로부터 공증 받을 수 없는 내용이에요. 남들이 동의할 수 없는 일이 되는 거예요.
나에게 절대적인 것은 남에게도 절대적이어야 되는데 그게 남에게 넘어가는 순간 이게 상대적인 게 되고 절대적인 게 안 돼요. 그건 네 생각이고, 이러면 끝나는 겁니다. “그냥 나는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 그다음에 나오는 말은 “네가 좀 내 말에 동의하면 안 되나? 알아주면 안 되나?” 이것은 억지죠. 네 위치하고 내 위치하고 다른데 그걸 동의해준다고 해서 하나님 보시기에 그건 진리로 인정받을 수 없죠.
그러면 이런 문제에 대해서 성경에서는 어떻게 해결하는가. 성령이 오게 돼요. 성령이 오시게 되면 사도행전 1장 20절에,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시편 69편 25절의 말씀이고요. “또 일렀으되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이것은 시편 109편 8절의 말씀이에요.
자, 성도의 위치가 뭐냐. 결론을 내려보라고 한다면 이렇습니다. 성도의 위치란, 원래 천국 가야 될 성도의 위치는 내가 하나님한테 그 위치를 달라고 하거나 요구할 권한은 없습니다. 우리는 천국 가는 그 위치에서 배제된 상태에요.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 밖으로 배제된 상태입니다, 특히 이방인 같은 경우에.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던 자들이 자격 미달로 탈락이 된다면 거기에 빈 공간이 생기겠죠. 그 빈 공간, 그 직분을 바깥에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자리를 채우게 하면서 비로소 이방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의 절대적 자리를, 위치를 갖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절대적 위치라 하는 것은 내가 나에게 그러고 싶다, 해서 그걸 절대적 위치로 알아주는 게 아니고 ‘전에 너 어디 있었지?’ 라고 하는 이러한 변동 사항이 우리 직분에 기재되어야 돼요, 우리 천국 호적에. ‘너는 전에 죄인이었어.’ 라는 전에 있던 위치가 있고 지금 새롭게 부여된 위치가 있고 그 둘 사이에 이동사항이 기재될 때 그것이 바로 성도의 위치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밖에 있다가 안에 들어오게 하는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와서 위치변동을 먼저 우선했어요. 저주받은 자였지만 하나님에 의해서 성령에 의해서 부활되신 거예요. 첫 번째 부활되신 분이에요.
그러면 부활되시기 전에 주님은 어디에 있었는가. 버림받으신 자리에 있었죠.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버림받으셨다가 이제는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로 주가 되셨다면 그 과정에서 일어난 이동 사건을 십자가 사건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들어나 봤습니까, 십자가 사건?
그 십자가 사건은 바로 저주받은 자를 하나님의 긍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약속 때문에 약속에 충족하라고 위치 이동을 시켜줬다는 하나님의 일이 십자가 안에 작용되어 있습니다. 그 안에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성령께서 그리스도 밖에 있는 우리에게 찾아와버리면 십자가 안에 그 작업의 역량, 효과와 혜택에 의해서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의 위치가 뭐냐고 할 때 두 가지를 이야기해야 돼요.
하나는 나는 저주받은 자였는데 (다른 하나는) 십자가의 예수님 효과 때문에 이제는 그리스도 안이 되었다. 이것을 에베소서에서는, 전에는 네가 이방인이었으나 전에는 너희가 저주받은 자였으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너는 사랑의 대상이 되었다. 하늘나라에 앉혔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게 성도의 위치입니다.
365강-YouTube강의(오해와 거짓 마태복음 7:29)20210928-이 근호 목사
제365강, 제목은 ‘오해와 거짓’. 이게 쉬운 말인지 어려운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쉽게 다른 말로 하면 ‘아니다’와 ‘틀리다’의 차이. ‘아니다’와 ‘틀리다’의 차이.
‘너는 그게 아니야.’ 라고 할 때는요. 네가 지식적으로 뭔가 부족하다 할 때는, 아니, 그게 아니야. “3x5=?” “14” “아니, 14가 아니야. 그건 15야. 좀 노력해봐. 그럼 너는 이제 3x5=15라고 알게 될 거야.” 할 때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지식의 모자람이 있을 때는 ‘오해’가 되겠죠.
‘틀리다’의 예를 들면 이런 경우입니다. “사람이 달에 가려면 뭘 타고 가면 되지? 사람이 달에 가려면 뭘 타고 가야 갈 수 있지?” 라고 했을 때, “3x5=15” 답변하는 거예요. “아니, 아니, 아니. 지금 그 이야기하는 게 아니야. 3x5=15 그걸 안다고 해서 달에 갈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럼 3x5라고 말한 사람이 “그럼 3x5가 16이야? 17이야? 14야? 내가 바른 소리하는데 왜 틀리다고 이야기해?” 이렇게 나오죠. 자체적으로서는 3x5=15 맞는데 내가 질문한 것에 대한 답으로서는 틀린 답이 되죠. 설명하니까 더 어려워지는 느낌이 드는데.
아니다/틀리다. 오해/거짓을 잘 구분하면서 마태복음 7장 28절,29절을 제가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6장, 7장은 산상설교라 해서 예수님이 산에 가셔서 하신 설교에요. 그 설교의 말미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산상설교의 마지막 대목이 뭐냐 하면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 그 이야기했어요. ‘나중에 창수가 나고 바람이 나면 그 집에 부딪치매 모래 위에 지은 집은 거침없이 무너진다.’ 그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뿐 아니라 앞에 있는 5장, 6장, 7장 이야기를 듣고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이러라” 이게 지금 칭찬처럼 들리죠. ‘아, 대단하네. 우리가 아는 선생들하고는 격이 다르네. 월등하게 우리가 예전에 듣지 못한 더 추가적이고 새로운 이야기를 하시는 분이다. 새롭다.’ 이렇게 평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평하는 그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까요? 아닙니다. 지금 평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들이 지금 평론가에요. “야, 놀랍다. 새롭다.” 이 말을 예수님한테 하는 것이지, “아, 그 말을 들어보니까 나는 죄인이야.” 뭐 이렇게 자기 자신을 아는 그런 모습은 안 보이죠.
아무리 예수님을 칭찬하고 우대하고 그리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예수님에 대해서 호감을 느끼고 저 예수님 한번 따라가 볼까? 저기에 진리가 있는 것 같아. 이렇게 한다 할지라도 지금 예수님 말씀의 효과와 능력이 자기 자신의 본질까지는 전혀 도달되지 않았어요.
그리고 난 뒤에 마태복음 8장이 나와요. 마태복음 8장에 보면 2절,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그 당시에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문둥병이라 하는 것은 신의 특별한 징후로 봤어요. 자기 조상의 죄든지 아니면 자기 죄로 인하여 손댈 수 없는, 못 고치는 불치병. 손댈 수 없는 거예요.
자기가 스스로 보기에 도저히 이것은 문둥병이라는 저주받을 만큼 나쁜 짓하지 않았다 하면 필히 그것은 조상이 죄 지어서 그 저주가 그 가계, 가족력으로 내려앉았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왜냐하면 출애굽기 20장에서 십계명을 이야기할 때 이 율법을 어긴 자는 3, 4대까지 저주를 받는다고 되어있거든요. 그게 율법이잖아요.
저주받는다는 개념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면 복 받은 사례를 봐가지고 복 받은 것과 반대방향으로 나가는 것. 풍요하게 주어지는 것은 복, 있는 것도 거덜나는 것은 저주. 뭐 이 이야기가 힘듭니까? 날로 건강하다, 복. 있는 건강 다 날렸다, 이건 저주. 집에 통장의 돈은 날로 계속해서 불어난다, 복. 통장에 있는 것도 다 까먹었다, 저주.
사람들의 복과 저주는 일단 자기 자신을 안 건드린다는 전제 하에 복과 저주입니다. 자기는 그냥 있는데, 나는 여기 있고 내 자체를 문제 안 삼아요. ‘건강해야 될 텐데’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복 받아야 될 텐데’. 그게 안 되면 또 저주 받는다 하는 거예요.
심지어 이건 어린애도 마찬가지에요. 초등학생 어린애들도 달을 보면서 ‘그저 우리 가정 잘 되게 해주시고 하는 일 잘 되게 해주시고 우리 할아버지 예수 믿게 해주시고...’ 뭐 그런 이야기.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는 애는, 이렇게 기도했으니까 날 부정하지는 말아주세요. 날 건드리지 말아주세요. 이렇게 착한 나를 건드리는 건 말이 안 됩니다.
결국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오늘날 교회 가는 교인들이나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교회 가는 착한 일을 좀 봐주시고 내 미래가 좀 피게 하옵소서. 복 받게 하옵소서. 아, 내가 복 받게 해달라는 건 너무 기복신앙인가? 너무 염치없는가? 그러면 내가 좀 겸손의 톤으로 나갈 필요가 있다. 주여, 그저 안 까먹고나 살게 하옵소서.’ 이런 식으로 자체적으로 겸손을 조작하죠.
그런데 성경에서 산상설교를 주신 이유는 바로 그렇게 칭찬 일변도로 주님을 칭찬하고 주님을 섬긴다는 그 자체가 네가 그게 저주받을 죄가 된다는 겁니다. 지금 네 걱정 안 하고 예수님 칭찬 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본인이 거짓되기 때문에 거짓된 마음에서 예수님을 평하는 것도 틀려버린, 주께서 인정하지 않는 그 마음가짐에서 자기 딴에 주님을 높인다고 높이는 거예요, 교회 와서. 하나님 찬양합니다, 라고 하면서.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걱정하지 말고 네 걱정이나 하라. 네 딸을 보고 울어라. 나보고 울지 말고.”
근본부터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이들은 산상설교 전부를 반대로 생각합니다. 산상설교 말씀을 듣고 이 말씀을 위반한 사람을 찾는데 멀리 가서 찾을 필요 없어요. 바로 나에요, 나. 내가 산상설교 어느 하나 제대로 지키는 건 하나도 없습니다. 너는 죽었어.
그러니까 마태복음 7장 끝나고 8장 나오죠. 거기에 누가 나옵니까? 문둥병자죠. 진정 산상설교를 이해했다면 문둥병자는 “저는 무능합니다. 저는 저주받았어요. 저주 받은 것을 자인합니다. 불쌍히만 여겨주세요.” 이런 자세, 이런 태도이어야 하는 거예요.
말씀 마치시고 내려오니까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이 문둥병자에요. 이 저주받은 것, 고칠 의사 없습니다. 이미 절망인 것을 그 문둥병자는 그대로 수용해요. 저 압니다. 이것은 내가 손댈 수 없을 정도로...... 문둥병 자체가 저주받았다는 말은 죽으면 어디 간다는 말입니까? 지옥 간다는 말이죠. 나, 지옥 갈 사람 맞습니다. 세상에, 이런 발언을 할 수 있다는 것. 주님의 산상설교 취지에 딱 맞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것을 불쌍히 여기니까 그 문둥병자가 아무 한 것도 없이, 산상설교 하나 안 지켰어요. 이 문둥병자가 산상설교에 순종했습니까? 아니에요. 산상설교와 관계없이 그냥 이 사람은 복 받았습니다.
복은 저주에서 오고 저주는 주의 말씀에 입각해서 내가 모르는 주님 보시는 그 안목이 저주케 하는 그 말씀 안에 들어있으니 우리가 말씀을 그대로 받아서 저주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니고 다 차별 없이 “내가 바로 저주받은 사람 맞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이것이 바로 복 받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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