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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362강, 363강) 부끄럽지 않는 일, 중심부 210907 본문

유튜브 강의(이근호)/유튜브 강의

(362강, 363강) 부끄럽지 않는 일, 중심부 210907

정인순 2021. 9. 8. 09:47

362강           음성               동영상

363강           음성                동영상

 

녹취:이하림

362강-YouTube강의(부끄럽지 않는 일 로마서 1:16)20210907-이 근호 목사


제362강, 제목은 ‘부끄럽지 않은 일’.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몸에 일어난 현상이 부끄러움과 수치라는 겁니다. 과학으로 파악할 수가 없어요. 부끄러움이라 하는 것은 감정의 문제이기 때문에 어느 대목에 부끄러움이 있는지 이게 파악이 안 되거든요.

왜 그 부끄러움이 일어났는지 다소 감추기 위해 하체에 치마를 입었는데 그것은 옷 의존적이죠, 옷 의존적. 인간이 벌써 누구한테 의존적이었어요. 나설 때 그냥 벗지 못하고 옷을 입어야 된다는 거예요. 이미 의존적이라 하는 것은 자립성, 독자성이 깨어진 겁니다.

그럼 부끄러움이란 여기서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부끄러움이라 하는 것은 결함이 생기는 것, 이게 부끄러운 거예요. 온전하지 못하다는 의식. 내 자체로서 불만족스러운 것. 이게 전부다 부끄러운 현상을 야기하는 거예요. 이것을 전체적으로 이야기하게 되면 원래 하나님이 만든 존재가 아닌 것, 그 인간이 아닌 것, 그게 부끄러움이에요.

그래서 인간이 부끄럽고 난 뒤에 옷을 만들었잖아요. 이것은 자기가 어찌할 수 없는, 감당할 수 없는 현상이 자기에게 일어났고 인간의 모든 행동의 기저, 그 바닥에서는 부끄러움을 덮고 해소하고 제거하고 그것을 처리하는 본능에 준해서 모든 행동을 하게 되어 있다. 그렇게 정리하면 돼요.

거기서 나온 행동이 바로 과학이고, 철학이고, 문학이고, 소설 쓰고, 노래 부르고, 춤추고, 의학적으로 연구하고, 과학적으로 더 개발하고, 경제적으로 새로운 상품 거래처를 트기 위해서 열심히 홍보하고 영업하는 행동, 그 바닥에는 부끄러움이 있는 거예요. 결함이 있는 거예요.

옷이라 하는 것은 결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함 없다’라고 하고 싶어서 자기를 결함 없는 사람으로 조작해내는 그러한 성향이 바닥에 깔려서 모든 행동이 개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다 완전한 사람을 좋아하고 보다 온전한 사람을 찾길 원하죠.

창세기 10장에 보면 그것이 어떤 단어로 되어 있느냐 하면 “당대의 영걸이라”. ‘영웅’이다. 영웅은 나보다 더 온전해 보여요. 나보다 더 완전에 가까이 간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이 국가라 하는 것은 온전하고 완전한 영웅중심으로 뭉치게 되어 있습니다. 가인이 국가의 시조이고 가인의 7대손 라멕도 국가 위주로 나갑니다.

특히 여성들에게 있어서 완전함이라 하는 것은 조화입니다. 아름다움을 거침없이 방출하는 것. 남성들은 모든 행동이 ‘나는 거침없이 모든 난관을 이긴다.’는 영웅적인 기질을 굉장히 강조해요. 나한테는 어려운 일이란 없다. 나를 믿어라. 내가 이 모든 난관을 다 헤치고 나갈 테니까 너는 내 안에, 내 뒤에 딱 있어라. 내가 다 책임질게. 둥지를 나한테 틀어라. 이런 식으로.

여자의 모든 관심사는 완전한 아름다움이에요. 미(美)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겁니다. 이것은 모든 여성을 다 모아서 종합한 것이 아니고 바로 에스더 성경에 보면 나오죠. 가인도 권력이고 라멕도 권력인데 그 남성의 그 권력을 누가 이기느냐 하면 에스더라는 여자의 미모가 여지없이 이겨버립니다. 그 아름다움에 반해가지고 나라의 반을 거침없이 주겠다고 제안하죠, 나라의 반을.

오늘 당신이 맛있는 거 해주면 내 보너스 숨겨놓은 거 반을 줄게, 뭐 이런 식이죠. 오늘 맛있는 해물탕을 해준다든지 하면 숨겨놓은 내 비자금 반을 이 자리에서 줄게. 왜냐하면 요리 자체가 아름다움이니까. 요리 자체가 여성에서 나올 수 있는 아름다운 솜씨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미모만 아름다운 게 아니에요. 여성이 하는 모든 것은 아름답고 남성 입장에서 사랑스러워야 되고 그렇죠.

이 모든 것이 세상은 부끄러움을 감추는 데에 급급하면서 서로가 조작된 자아상을 가지고 늘 만나는 거죠. 어제보다 더 부끄러움이 없이 완전한 사람을 원하죠. 애가 전교에서 10등 했다면 보다 더 완전한 것은 뭐냐. 미흡한 게 뭐냐. 1등, 2등,……,9등이 아직 남아있죠. 다음에는 7등으로 다음에는 5등으로. 우리 애가 전교 10등이지만 1등에서 9등까지 모인 그 애들과 학부모 앞에서는 내가 미흡함, 부끄러움을 느끼는 거예요. ‘음메, 기 죽어.’ 하고 부끄러움을 느끼는 거예요.

그처럼 모든 인간의 행동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그러한 부끄러움에 휘둘리면서 인간세계에서 인생은 살아갑니다. 이것은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 누구의 강압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보기에 스스로 부끄러움을 대체하다보니까 힘 있는 사람, 영웅적인 것에게 고개 숙이고 그렇죠.

모든 원인은 남 탓하지 마세요. 본인 자신이 본인을 불만스러워하는 거예요. 나 인생 실패 같아. 남한테는 그런 소리 안 하죠. 그러나 혼자는, 본인은 본인한테 그런 소리해요. 아무리 생각해도 내 인생은 실패작 같아, 실패작. 그럼 성공작은 뭔데? 성공작하면 또 옆에 사람 찾는다고요. 친구 찾고 뭐 찾아가지고. 아, 저 가정은 굉장히 행복해 보이는데 우리 가정은 왜 이렇게 그에 비해 뒤떨어지는가? 귀에 병이나 생기고 말이죠. 춥다 하고 이런 거. 본인 생각에 자꾸 미흡함을 찾게 되죠.

그러니까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이 상당히 동떨어진 거예요. 그러나 주님은 성도한테는 인간이 이미 그런 존재이고 그렇게 수치스러움에 휘둘리면서 쫓기듯이 살아간다는 것을 뻔히 아시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여기에 능력을 주십니다.

그 능력이 뭐냐 하면 로마서 1장 16절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건 사도 바울의 사적이고 개인적인 이야기로 국한된 게 아니에요. 사도 바울에게 주신 능력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다면 우리도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과 동일한 고백이 나와야 되죠. 나는 부끄럽지 않다. 왜? 어떤 능력이 임하는데 그 능력이 뭔지 궁금해? 그게 복음의 능력이에요.

그 복음의 능력은 우리가 평소에 하는 행동, 다시 말해서 내 수치를 내가 알아서 감추려고 급급한 거,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거 그만 두지. 고만하지, 고만.” 이런 식으로. 왜? 행함으로 수치는 감추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의인이 되는 거거든요.

내가 의인이라고 불러줄 테니까 네가 스스로 죄에 쫓기는 그 짓 그만하지? 그만해. 그러지 마. 지금 그런 너의 행동 하나가 나의 복음을 지금 부끄러워하는 거예요. 바로 그런 자, 그런 자를 주께서는 받아주지 않습니다.

나는 이것밖에 안돼요. 되게 겸손해보이고 자기 부정같이 보이지만 이것은 완악하고 오만한 겁니다. 주께서 하신 일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끝까지 자기를 믿으려고 해요. 그래, 하면 할 수 있어. 그래, 나는 가능성이 있어. 끝까지 자기 자신을 믿는 것, 이게 바로 행함입니다. 이게 불신자에요.

사도 바울은 17절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고 했어요. 나의 행함을 제치고, 나의 행함 아예 보지도 않고 주님으로부터 시작한 그것이 우리에게 도달하게 되면 거침없이 우리 입에서 놀라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는 매사에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게 사도 바울이 받았던 그 능력이고 오늘날 우리가 받았던 믿음의 능력, 복음의 능력입니다.


363강-YouTube강의(중심부 누가복음 17:21)20210907-이 근호 목사


제363강, 제목은 ‘중심부’. 사람들은 그 중심부에다가 그럴싸한 것을 자기가 무대 세팅하듯이 설정을 딱 해놓고자 하는 겁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그런데 이 교회라는 것이 성경에서는 뭐라고 했느냐 하면…… 구약 때에 성전이 있었습니다. 성전이 있기 전에 성막이 있었고요. 성막과 같은 단어로 ‘회막’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회막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기 위한 장소가 아니고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기 위해서 만든 장소에요. 그러니까 인간 쪽에서는 감당 못하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추잡하고 더러운 인간 속에 온다는 그 자체는 인간에게 재앙이에요, 파멸이고. 거룩과 속됨은 같이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쪽에서 인간을 만나겠대요. 그러면 사전에 만나는 장소가 뭔가 정비가 되어야 되고 만나기에 합당한 조건들이 갖추어져 있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만날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건 조건이 뭐냐 하면 일단 나는 죄 있는 것들은 안 만난다. 죄 있는 것들은 안 만나지만 나는 내 백성과 만나야 되겠다.

두 가지 조건이 다 합치되어야 돼요. 죄 있는 자는 못 만난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왕으로서 자기 백성 만나는 일은 성사가 된다. 그럼 그 중간에 뭐가 있어야 되겠죠. 죄 있는 자가 죽어있다면, 죽어있고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안에 들어온 자는 이미 죄 있는 자는 죽어있으니까 죄 있는 자가 현장에 없는 셈이 되고요. 그리고 약속이 있기 때문에 그 약속에 의해서 하나님과 인간이 만날 수가 있는 겁니다.

이 아이디어는 인간 아이디어에서 나온 게 아니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하나님이 만날 수 있는 그런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설비, 장치를 하늘에서 이미 모세에게 전달하셨고 모세는 땅에 내려와서 그 제작에 나섰습니다. 하나님이 땅에서 인간과 만날 수 있는 그런 설비나 장치, 그러한 공간에 대한 제작.

여기에 여러 가지, 인간세계에는 아무 짝도 쓸데없는 그런 것들이 만들어져요. 언약궤라든지 제사장의 복장이라든지, 출애굽기에 보면 세세하게 그 치수에다 크기, 그 모양, 색깔, 원단 등이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만들어진 하나님과 인간과의 만남을 위한 설비의 특징은 기구들뿐이라는 거예요. 사람들이 기구를 만들어놓고 ‘기구들뿐’이라는 말은 그 기구이외에 아무것도 눈에 보이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빈 터 같아요, 빈 공간. 공백, 빈 자리.

그래서 회막이나 성막이나 성전의 특징은 중앙이 비어 있어요. 비어있다는 말은 주변에 있는 인간들이 “내가 들어갈게요.”라고 손들고 나설 위인은 단 한사람도 존재할 수가 없다는 뜻이에요. 그 중앙을 비워놓고 그 주변에 있는 자들은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하기 때문에 죽은 자가 그 중앙을 차지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럼 없으면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는 무엇이 허락되느냐 하면 인간과 만나기 위해 오신 그 메시아, 언약적인 분을 만날 수 있는 그 기회는 부여받게 돼요. 그러면 기다려야죠. 기다릴 때 누가 오시느냐 하면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오시는 겁니다.

그 빈 공간에서, 오직 빈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죽음이 있어야 되는데 그 죽음도 아무나 죽는 죽음이 아니고 흠 없는 제물이 반복해서 죽어야 그 공간이 유지가 돼요. 그러면 죽었다는 최종 증거물은 거기다가 피를 뿌리는 것입니다.

피라는 것은 뭔가 죽어야 생겨나는 게 피잖아요. 죽어야 생겨나는 게 피라고요. 피를 자꾸 뿌리는 거예요, 중앙에. 언약궤에다가 피 뿌리고 제사장은 그 제물의 피를 가지고 제단에도 뿌리고 그 회막 들어갈 때 입구, 천으로 만든 입구에 들어갈 때도 뿌려요. 물론 지성소에도 뿌리지만 성소에도 뿌리고 피를 자꾸 뿌립니다. 피를 뿌림으로써 속죄가 될 때 나타나는 결과는 거룩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은 더러워서 안 받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인간이 자기가 죽어서 흘리는 피 있잖아요. 그것도 안 받아요. 대신 죽어야 되는데 그 대신 죽어야 될 제물의 특징은 뭐냐? 흠이 없어야 돼요.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흠 없는 것을 받는다는 것, 죄는 안 받는다는 것. 두 번째, 흠 없는 자가 죽어야 된다는 것. 그러니까 첫 번째는 흠이 없어야 된다. 두 번째는 죽어야 된다. 죽어야 됨으로써 결국 흠 없이 죽은 그 제물만 받는 조건이 갖추어질 때 그 조건의 확장으로서 새로운 인간이 성사되어야 돼요, 죽은 인간 말고.

그럼 여기에 메시아는 인간으로 오셔야 되는 거예요. 새로운 인간의 시조로 오셔야 돼요. 죽었다가 하나님께 인정받은 그 분으로 시작되는 자리. 그게 바로 중앙자리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언급합니다만 중앙자리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했죠. 이게 상당히 중요한 겁니다. 중앙자리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만약에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성경을 보고 또는 목사한테 설교 듣고 ‘주님을 모신 가정은 그게 교회다.’ 라는 얘길 듣고 이제 가정을 교회라고 꾸밀 때, 그 중앙자리에 남편이 들어갈까요, 믿음 좋은 아내가 들어갈까요, 누가 들어갈까요? 아무도 들어가면 안 되는 거예요. 그것도 모르고 남편이 남자라고 들어가면 안 되고. 여자는 남편 말을 들어야 된다는 디모데전서 말씀 듣고 자기가 차지하면 안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목사가 중앙에 들어서면 안 됩니다.

그러면 누가복음 17장 21절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이게 약간 어려운데요. 어려우면 제가 설명해드릴게요. 20절부터 보면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바리새인들은 하늘나라가 어떤 시간적으로 임하는 것으로 생각했어요. 시간적으로, 어떤 시간 가운데 임하는 줄 알았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사람들은) 시간도 유지되고 시간 안에서 올 때도 눈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21절에,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여기 있다’란 눈에 보이는 여기 있다, 눈에 보이는 저기 있다, 거기에 메시아가 구세주가 온다. 이것이 아니라 구세주가 오는데 보이지 않는 분이 오게 되면 그 공간은 분명히 보이지 않는 공간을 형성해요.

우리와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다고 우기는 우리가 볼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겁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성령 안’이라고 했고 사도 바울은 ‘십자가 안’이라고 했고 이것을 가지고 ‘주님 안’, ‘예수 안’이라고 한 거예요. 예수 안, 주 안, 십자가 안, 성령 안. 같은 이야기입니다.

같은 이야기가 에베소서 1장 23절에서는 뭐라고 표현되어있느냐 하면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이것을 ‘충만’이라고 했어요. 그득 참, 가득함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가득 찼다, 충만하다, 모자람이 없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뭔가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그득 찬, 가득 찬 공간이 바로 중심부를 차지할 때, 그걸 느낄 때 그 사람이 바로 주의 몸의 지체요, 교회요, 그게 하늘나라 백성입니다, 지금. 인간에게 일어난 모든 일, 코로나 사태나 뭐 선풍기 돌아가는 이 모든 사태, 여기 우리가 모인 이것도, 모였다는 것은 구청에는 알리지 마시고, 그득한 분의 조치에 의해서 일어난 일이에요.

어느 하나도 그 그득함, 충만함, 가득 참에서 누락되고 모자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누린다고 이야기해야 돼요. 주님의 한 가운데에 있는, 중심부에 있는 그 그득함이 오늘날 우리를 다루고 있고 살게 만들고 숨 쉬게 만들고 우리를 부리고 우리에게 지시를 내리시는 겁니다. 그게 바로 성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