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오바댜 1:19-21 / 언약으로 심판 본문
언약으로 심판
이근호
2021년 6월 23일
본문 말씀: 오바댜 1:19-21
(1:19) 남방 사람은 에서의 산을 얻을 것이며 평지 사람은 블레셋을 얻을 것이요 또 그들이 에브라임의 들과 사마리아의 들을 얻을 것이며 베냐민은 길르앗을 얻을 것이며
(1:20) 사로잡혔던 이스라엘의 뭇 자손은 가나안 사람에게 속한 땅을 사르밧까지 얻을 것이며 예루살렘의 사로잡혔던 자 곧 스바랏에 있는 자는 남방의 성읍들을 얻을 것이니라
(1:21) 구원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
이 세상에 심판할 수 있는 그 누구가 있다는 것 자체가 이 현실 세계에 대한 모독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감히 누가 나를 심판해?” 인간은 심판받기 전에 자신이 알아서 자신을 심판에서 빼내어 구원할 능력이 있다고 자부합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했던 자들이 망해야만 했던 이스라엘이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에돔을 심판하는 야곱의 집’은 기존의 이스라엘이 망하고 난 뒤의 등장한 이스라엘입니다. 기존의 이스라엘의 망한의 이유를 안고 있는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심판하는 장소가 바로 ‘시온산’입니다. 시온산이나 예루살렘은 다윗이 이스라엘이 왕이 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는 지명입니다.
왜 시온산이라든지 예루살렘이라는 지명을 없었는고 하니 그 장소는 이스라엘 지파에 속하지 않는 이방민족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왕과 그 종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 거민 여부스 사람을 치려 하매 그 사람들이 다윗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소경과 절뚝발이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하니 저희 생각에는 다윗이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함이나 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 성이더라”(삼하 5:6-7)
그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에서 배제된 이스라엘로 줄 곧 이어져오고 있었습니다. 원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하나님의 언약이 실효적인 기능의 결과로 등장하는 나라이어야 하는 겁니다. 이 세상의 모든 나라는 하나님의 언약이 없는 민족이요 나라입니다. 이 말은, ‘언약이 빠진 신’을 신이라고 여긴 민족들입니다.
그것은 ‘언약’이라는 특정 인물, 특정 가족, 특정 나라에만 하나님께서 선택해서 주셨기에 이 지상에서는 아예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삭 가정에 언약이 주어지면서 언약은 두 형제 사이의 관계를 통해서 그 본질이 드러나게 됩니다. 같은 형제라도 언약의 혜택을 입는 쪽은 복이 되고 언약의 혜택이 없는 쪽은 저주를 받습니다.
참된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언약이 아니고서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참된 하나님은 언약이 없는 가짜 하나님을 심판하시고 공격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본질을 지상의 역사 속에서 나타내십니다. 언약이 있는 민족인 이스라엘과 그 외의 민족과 하나님께서는 달리 취급하십니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언약을 가지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본 모습을 샘플로서 사용하신 겁니다. 즉 하나님의 천사를 만나기 전의 야곱과 그 후에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뀐 야곱과의 차이를 통해서 언약의 내막이 밝혀집니다. 야곱은 천사를 통해서 자신이 죽습니다. 그리고 언약이 함유된 새로운 존재, 즉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살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 이름’속에는 ‘죽어야 될 야곱의 존재’가 담겨 있는 겁니다. 즉 언약의 사람이 된다는 자신의 죽어야 하고 죽는 이유도 함께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에 들어갔던 이스라엘은 사무엘상 4장 이후에는 ‘언약궤를 블레셋’에 빼앗기고 맙니다.
이렇게 되면 ‘언약궤 없는 이스라엘’ 곧 ‘언약이 빠진 이스라엘’이 됩니다. 그렇다면 참된 이스라엘은 언약궤 안에 함유되어 있습니다. 언약궤가 결합되는 인물이어야 되어야 참된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이스라엘입니다. 사울왕 당시, 내내 언약궤는 이스라엘 지파 내에서 의미있는 장소에 놓여 있지 않고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그곳이 바로 ‘기럇 여아림’입니다. 즉 광야에서부터 시작해서 언약궤는 다음과 같은 경로를 밟습니다. 광야 39년 동안 이스라엘과 동행한 언약궤는 요단강을 함께 건너서 길갈에 있다고 실로에서 약 300년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사무엘상 4장에 나오는 에벤에셀에서 블레셋에 빼앗기고, 그 뒤 7개월 동안 아스돗, 가드, 에그론, 벤세메스를 거쳐 기럇 여아림께지 와서 20년을 방치되었습니다.
언약궤가 없는 이스라엘 속에서 이스라에르이 12지파는 내내 그들이 원했던 왕, 사울왕이 정통 왕가로서 행세했습니다. 사울왕이 죽고 난 뒤에는 사울의 아들 므비보셋이 마하나임에서 2년동안 12지파를 대표하는 이스라엘 왕족보를 따른 왕 행세를 했고, 기존의 12지파를 그것을 기정 사실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12지파를 다 대표하는 왕이 아니라 몰래 숨겨놓은 왕을 준비해놓으셨습니다. 즉 언약궤와 무방한 이스라엘은 왕이 없는 이스라엘로 간주하시는 겁니다.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삼상 16:13)
사울왕이 죽고 난 뒤, 다윗은 12지파의 왕이 아니라 다윗 지파의 왕으로 헤브론에서 왕이 됩니다. 바로 이때 그동안 이방민족의 관활 속에 있는 시온을 함락시켜 다윗의 자신의 통치영역 속으로 집어넣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기럇여아림에 있는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안치합니다.(삼하 6장)
이렇게 해서 이로서 ‘언약궤가 있는 유다지파’가 ‘언약궤가 없는 이스라엘 전체’를 지배하는 진정한 왕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유다지파에 이러한 왕이 간택되는 이유에는, 이스라엘 지파 바깥에서 새로운 이스라엘의 준비된 언약적 지파가 있었습니다. 룻기 1:1에 보면,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하였는데”라고 되어 있습니다.
흉년이 들었다고 해서 기존의 약속의 땅을 버리고 간 그 유다지파의 한 가정 속으로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될 새로운 언약적 여인이 들어오게 됩니다. 이는 곧 ‘없음의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 있음을 근거로 한 하나님’을 심판하고 정죄하는 그 언약적 작업을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겁니다.
룻이 만나게 되는 족보적 인물은 보아스가 보아스는 창세기 38장에 나오는 유다지파의 후손입니다. 이렇게 해서 다윗이 속한 유다지파는, 다른 모든 지파를 대신해서, ‘언약은 이 지상의 인간에게 나온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게 된 겁니다. 이렇게 해서 ‘없는 신’이 모든 ‘있는 신’을 언약을 통해서 심판하게 된 겁니다.
이러한 언약이 오늘날 우리 일상에 들어오게 되면, 이 땅의 우리들의 삶이 참으로 무의미한 삶이라는 사실을 최후의 언약인 십자가를 가지고 들통내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헛되고 헛된 세상 일이 곧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8강-오바댜 1장 19-21절(언약으로 심판)21062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오바댜 1장 19-21절입니다.
오바댜 1:19-21
“남방 사람은 에서의 산을 얻을 것이며 평지 사람은 블레셋을 얻을 것이요 또 그들이 에브라임의 들과 사마리아의 들을 얻을 것이며 베냐민은 길르앗을 얻을 것이며 사로잡혔던 이스라엘의 뭇 자손은 가나안 사람에게 속한 땅을 사르밧까지 얻을 것이며 예루살렘의 사로잡혔던 자 곧 스바랏에 있는 자는 남방의 성읍들을 얻을 것이니라 구원자들이 시온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
하나님의 나라, 과연 있는가가 의심될 수밖에 없지요. 하나님의 나라가 있으면 그곳에 들어가겠습니다, 라고 생각하는데 성경에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이 어떻게 등장하는지 여러 군데서 많이 이야기를 하지만 오늘 오바댜 1장 21절에도 분명히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심판 없이는 나타나지 않는다. 심판을 동반해서만 나타난다. 심판 없이는 나타나지 않는 곳 그게 바로 천국이고 하나님 나라입니다.
세례요한도 이야기하실 때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할 때는 그 하나님 나라 앞에 심판에 대해서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심판은 생각 안 하고 천국 갈 생각만 먼저 성급하게 하면 안 됩니다. 심판을 통과한 사람만 천국 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심판을 누가 하느냐?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 심판을 하나님이 하신다. 그런데 그 다음 질문이 답변이 되어야 돼요. 어떤 하나님이냐? 어떤 하나님이냐?
하나님이 한 분 같으면 어떤 하나님이냐, 라는 질문이 성립되지 않겠지요. 그런데 심판받아야 될, 지옥가야 될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을 천국 가게 하시는 그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하나님을 심판하시는 겁니다. 이걸 구약성경에서 이야기하면, 이스라엘 하나님이 다른 아담의 족속에 속한 모든 신을 심판하는 역사가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그리고 십계명에서도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해서 이 땅에 심판받아야 될 하나님이 따로 있고 그것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이미 하나님 쪽에서 하나님을 둘로 나누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인간들은 아무런 정보를 안 갖고 있어요. 그냥 인간들은 땅에 살고 하나님은 어련히 알아서 홀로이겠는가, 하늘에 그냥 하나님이 한 분 계신 줄로 알고 있어요.
성경에서는 두 종류의 하나님을 설명하고 있는데 땅에서는 깜빡 무소식입니다. 그 두 종류, 아무 신이나 믿어도 된다, 이런 두 종류의 신이 아니라 그 신이 다른 신을 심판함으로서 비로소 제대로 된 신, 참되게 살아계신 하나님이 심판을 통해서 나타나시는 거예요.
그러면 이 땅에서 진정 천국에 대해서 사모하고 천국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심판을 항상 선행해서 생각을 해야 되고요, 그 심판은 진짜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한다, 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인간이 알고 있는 하나님을 심판하신다, 이렇게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교회 왔으면 “저 천당 갈 수 있어요?”라고 성급하게 묻지 말고 “심판받아야 될 하나님은 어떤 내용을 갖고 있는 하나님입니까?”라는 질문을 할 수 있어야 돼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한테 심판받습니까, 또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으로부터 가짜 하나님이라는 것이 들통나겠습니까, 라는 식의 질문을 가지고 교회 와서 성경도 보고 생각도 하고 설교를 듣고, 그렇게 해야 되는 겁니다.
세상 모든 운영은 인간 손에 달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 손에 달렸습니다. 그 하나님이 심판하는데 사람을 상대로 심판한다, 가 아니라 인간들이 신이라고 여긴 것을 심판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심판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지요. 왜? 인간이 알고 있는 그 하나님이 심판받는다면 그 하나님을 인간들이 섬기고 있으니까 자동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심판받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궁금한 게 어떤 하나님이 심판받고 어떤 하나님이 심판을 하느냐? 언약의 하나님, 약속이 없는 것은 심판받는 하나님이고 언약이 있는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그 언약이라는 것이 어디에 있느냐, 어디서 파는가, 또 어디서 찾을 수가 있는가? 그 언약은 이 땅에 없는가 있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스라엘과 함께 동반해서 나타나는 하나님, 이스라엘 속에 함께 하신 그 하나님이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약속의 하나님이에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약속이 있다는 것을 위하여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1절에 “구원자들이 시온산에 올라와서”라고 되어 있는데 그 시온산이 어디에 있느냐? 바로 이스라엘에 있습니다. 그리고 19절에 보면 “남방 사람은 에서의 산을 얻을 것이며” 에서의 산은 어디에 있느냐? 이스라엘에 있어요. “평지 사람은 블레셋을 얻을 것이요” 블레셋이 이스라엘이에요. 약속의 땅이 거기에 있습니다.
“또 그들이 에브라임의 들과 사마리아의 들을 얻을 것이며” 에브라임의 들도 이스라엘이고 사마리아의 들도 이스라엘에 있고요 “ 베냐민은 길르앗을 얻을 것이며” 베냐민도 이스라엘 영토고요 길르앗도 이스라엘에 있어요. 요단강 동쪽인데 거기도 이스라엘이에요.
20절에 “사로잡혔던 이스라엘의 뭇 자손은 가나안 사람에게 속한 땅을 사르밧까지 얻을 것이며” 가나안 땅도 이스라엘에 속하고 사르밧이라는 것은 지금의 텔아비브 그 위쪽에 사르밧이 있어요. 거기도 이스라엘 땅이고요. “예루살렘의 사로잡혔던 자 곧 스바랏에 있는 자는 남방의 성읍들을 얻을 것이니라” 예루살렘은 물론 이스라엘 땅이고요.
스바랏이라는 여기는 이스라엘 땅이 아니고 지금의 터키 땅인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포로 잡혀서 남의 땅에 갔는데 그 남의 땅 터키 땅에 있던 사람이 다시 와서 남방의 성읍들을 얻는다고 되어 있는데 그 남방의 성읍들도 이스라엘 땅이지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이 본문을 보면서, 우리가 알기에는 하나님이 전 지구를 다 심판한다고 되어 있는데 여기 보니까 하나님께서 전 지구를 압축을 시켜서 모형을 만들었어요. 모형을 만들어서 이스라엘 안에서 미리 언약을 받았던 그 이스라엘이 미리 받았던 언약에 의해서 어떻게 심판이 진행되고 그 과정과 절차가 어떤 요소가 투입되어서 심판의 기준으로 정해지느냐, 라는 것을 이스라엘 땅을 이렇게 작게 축소해서 우리에게 시범조로 다 보여주는 거예요.
2차대전 때 독일군에서 전쟁을 치르면서 지휘본부에 3차원 모형으로 만든 지형의 지도를 만들어 놓고 파란색으로 칠한 것은 바다고 녹색 칠이 되어 있는 부분은 들판으로 해놓고 거기에 파란색 칠해놓은 곳에 잠수함이나 군함 모형 배치하고 그다음에 녹색 칠한 들에는 탱크하고 부대의 깃발을 꽂아놓고 뾰족한 모자 쓴 게슈타포 지휘관이 작대기 가지고 탱크 밀면서 “이 부대는 이렇게 공격하고 이 부대는 이렇게 공격하라” 그렇게 할 때 그 자체가 모형이지요.
모형 가지고 전쟁의 전략과 전술을 거기서 다 이야기하잖아요. 눈에 확 들어오니까. 오늘 이 본문 보면서 하나님이 정말 친절하시다. 정말 하나님은 독일군 지휘부 같아요. 친절하게 압축해서 이스라엘 땅 가지고 진짜 하나님이 세상을 어떤 기준에 의해서, 어떤 표준에 의해서 세상을 심판하는가를 다 보여줍니다.
그 기준은 언약인데 도대체 언약이 이 땅을 심판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냐? 언약으로 약속으로 심판한다는 게 무슨 의미냐? 그것을 지명을 가지고, 이스라엘 땅을 가지고 설명을 해주시는 겁니다. 왜 한국은 안되고 일본도 안되고 이스라엘이냐? 다시 이야기합니다. 그들만이 언약에 의해서, 약속에 의해서 만들어진 민족이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파트너가 있어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국가가 되기 전에 그 이름이 조상이 이스라엘이 아니고 야곱이었거든요. 그런데 그 야곱에게 파트너가 있어요. 언약을 가지고 설명할 때 이것은 언약의 혜택을 받는 쪽, 야곱 언약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쪽, 쌍둥이로 같은 날에 붙들고 태어났지만, 같은 아버지 어머니에서 태어났지만 쌍둥이라서 서로 운명이, 갈 길이 달랐던 어떤 파트너가 필요한 거예요.
그 파트너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저주하는 샘플이 돼요. 여러분, 샘플 아시지요. 화장품 살 때 조금씩 주는 그거요. 샘플, 작은 샘플, 저주의 샘플 그리고 축복의 샘플은 야곱. 그런데 왜 야곱은 축복을 받아야 되는지 뭔가 설명을 해주셔야 진짜 하나님의 자기 모습을 드러내거든요.
에서는 왜 저주 받아야 돼요? 저주받는 이유가 진짜 등장해야지 하나님의 일의 일관성이 나타나는 겁니다. 그 저주받고 복 받는 그 이유가 하나님의 주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약속 안에 언약 안에 그것이 담겨 있습니다.
참, 언약설명이 너무나 어려운 이유가, 예를 들어서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쉽게 소개 했어요. 노아 같은 경우에 하나님의 언약을 아예 만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언약은 만들어진, 물체화 된 언약이 등장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방주라는 겁니다. 그리고 방주 안에 탄 사람은 물의 저주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복을 받는 것이 되고 나머지 방주에 타지 못한 사람은 그냥 하나님의 저주를 받지요.
그러면 여기서 인간적인 심보를 가지고 왜 하나님께서 그 배 안 탔다고 해서 그 놀잇배 비슷한 것, 잠수함도 아니고 유람선도 아니고 배를 안 탔다고 해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물에 다 빠져 죽는 그런 참혹한 벌을 내리시는가? 벌과 죄가 연결이 잘 안 되는 거예요. 배 만들었다. 그거 안 탔다. 이게 말이 됩니까?
지금도 거제도에 가면 배를 만들고 있는데 거기 배가 한두 척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지금 거제도의 그 배 탈 생각 안 하지요. 우리는 대구 사니까 거제도에 잘 안 가보잖아요. 안 가봤다고 대구에 물이 차서 다 물에 빠져 죽는 거예요. 이게 말이 됩니까? 터무니없지요. 우리는 그렇게 터무니 없는 신을 우리가 선택하기 싫어요. 납득이 되는 신을 믿고 싶습니다. 착한 일 많이 하면 복 받고 나쁜 짓 하면 저주받는, 이렇게 납득이 되는, 선악체제로 납득이 되는 신을 믿고 싶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새삼스럽게, 여기서 ‘새삼스럽게’가 중요해요, 새삼스럽게 우리가 납득이 안되는 새로운 심판의 기준이 안 왔으면 좋겠어요. 내가 내 양심상 마음에 알고 있는, 아마 하나님이 계시면 하나님은 공정하시고 자비롭고 어질기 때문에 이런 하나님이 이런 심판의 기준을 제시할 거야, 우리가 알고 있는 그 하나님 있잖아요. 줄곧 그 하나님 그대로 갔으면 좋겠어요.
자꾸 새로운 것이 등장해버리면 그래서 새로운 것을 몰랐다는 그 이유 때문에 잘리면 우리로서는 착하게 살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당하잖아요. 이것은 공정의 원리에 어긋나지요. 기회균등의 원리에 어긋납니다. 이것은 민주주의가 아니잖아요. 정답 가려놓고 문제도 안 주고 땡 탈락, 이것은 말이 안 되지요. 기회는 줘야지요, 기회는. 그래야 공정한 하나님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은 인간들이 알고 있는, 진짜 하나님 앞에 저주받을 하나님이에요. 인간들의 생각과 통하는 하나님은 이게 가짜입니다. 그래서 쉽게 말해서 교회에서 하나님, 하나님, 하는 것은 다 가짜에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진짜 하나님을 교회에서 이야기해버리면 어떤 결과를 낳느냐 하면, 제가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죄인에게 팔린 거잖아요.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은 인자가 죄인에게 팔린다고 되어 있거든요. 마태복음에 나와요. 26장 45절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인자가 죄인에게 팔린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려면 인자가 있어야 되고 거기에 또 누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죄인이 있어 줘야, 무조건적으로 죄인이 있어줘야 그 인자와 죄인의 만남에서 십자가 사건이 등장합니다.
그러면 교회가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구원되는 기준, 언약, 언약이 있으려면 교회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죄인이어야 돼요. 죄인들의 집합체가 되어야 됩니다. 그런데 어느 교회가 “여러분, 우리교회는 다 죄인입니다.” 이렇게 그걸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교회가 누가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그리고 예수님을 왕으로 모셨기 때문에 우리는 진짜 교회입니다.” 이러고 싶지요. “무슨 짓을 해도 우리는 죄입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교회가 있겠어요?
큰 교회 가보세요. 강단 한편에 교회 청년들 떠나지 말라고 갖고 노는 장난감 드럼, 기타, 앰프 시설 다 해놨다고요. 예배 전에 그들로 하여금 한바탕 마당놀이를 하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이 기타치고 또 찬양팀 율동 팀 나와 가지고 주 나의 왕이여, 이 전에 오소서, 막 눈물 줄줄 흘리고 한다고요.
그래서, 그래서 본인이 죄인 되었어요, 잘난 사람 되었어요? 그걸 묻고 싶은 거예요 제가. 그래서, 찬양해서 본인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아니면 나는 새사람 되었다고 우기는 겁니까? 어떤 겁니까? 지금 관심사가 자기가 새사람 되고 천당 가는 데 관심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가짜 하나님인 거예요. 십자가 사건이 나와줘야 그게 주께서 함께 있는 교회입니다. 우리 구원받았다, 가 나오면 안 돼요. 우리 교회는 다 구원받았다. 그게 나오면 안 된다는 말이지요.
오늘 본문 21절에 “구원자들이 시온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심판하는데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 땅에 줌으로 말미암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언약기능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자신을 표현하기 시작합니다. 언약을 통해서.
하게 되면 여기에 나오는 구원자가 누구냐 하면, 야곱이거든요. 그런데 이 야곱은 어떤 야곱이냐 하면,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전에 있던 그 야곱이 아니에요. 오바댜 1장 18절에 “야곱족속은 불이 될 것이요” 화염방사기가 된다고 했는데 이것은 전에 있던 이스라엘이 아니고 이미 망해버린 이스라엘이에요. 망해버린 이스라엘 속에서 나오는 이스라엘이에요.
따라서 지형적으로 말해서 여기는 이스라엘이 와서 심판한다고 되어 있지만 이 지표면, 지리적으로 해서 심판할 수 있는 이스라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모든 인간이 아는 하나님은 가짜고 엉터리예요. 진짜 하나님은 누가 와서 당겨줘야 하는데 누가 오시느냐 하면, 메시아, 예수님이 오셔서 그 예수님의 아버지가 진짜 하나님이에요. 예수님의 아버지가.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님이 아니에요. 인간들은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님의 아버지도 몰라요. 다만 하나님께서 아버지는 나타나지 않고 아들부터 먼저 이 지상에 등장시키는 겁니다. 왜? 인간들은 가짜 하나님을 믿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성경에서 언약, 언약, 해도 진짜 하나님의 진짜 언약을 몰라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이걸 심판하시는가 그 심판하는 방법이 여기 21절에 나옵니다. “구원자들이 시온산에 올라와서” 시온산, 이게 예루살렘이거든요. 시온산. 그리고 20절에 보면 포로 잡혀서 갔던 그들을 “예루살렘의 사로잡혔던 자”라고 표현합니다. “가나안 사람에게 속한 땅을 사르밧까지 얻을 것이며 예루살렘의 사로잡혔던 자”
예루살렘이라는 것은 새로운 이스라엘에게만 있기 때문에 기존의 이스라엘에게는 예루살렘이라는 지명 자체가 없어요. 시온산이 없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이스라엘을 차지했던 열두 지파가 전부 다 하나님의 원하는 그 언약의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그것은 망해야 될 이스라엘 열두 지파입니다.
그 근거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바로 룻기 1장에 나옵니다. 룻기 1장에“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이렇게 되어 있는데 유다 베들레헴 유다 지파가 여기 등장하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운명을 코스를, 절차를 밟는데 어떤 절차냐 하면, 야곱이 이스라엘이 될 때에, 창세기 32장이지요, 야곱이 얍복강에서 천사 만나고 이스라엘 되었지요. 야곱은 죽고 이스라엘로 바뀐 거예요. 동일인물이 있을 때 그 동일인물, 야곱이라는 그 육신을 가졌지만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면 야곱 이름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앞에 뭐가 되느냐 하면, 있어서는 안 될,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는, 또 다른 말로 하면 이스라엘로 인하여 미리 심판받은 이름이 야곱이에요. 그래서 언약은 심판받을 이름 야곱과 심판하시는, 있지도 않았던 이스라엘, 천사가 와서 새롭게 나타난 이스라엘 이름,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언약을 소개하고 언약을 실행에 옮기는 요 소가 되는 겁니다.
이 절차가 야곱의 열두 아들의 그 역사를 진행하면서 이 원칙이 그대로 적용됩니다. 적용되어버리면 이스라엘 열두 지파는 싹쓸이 다 망해버려요. 물론 예루살렘도 없습니다. 시온산도 없습니다. 다 날아가는 거예요. 없어요. 그들이 구원받을 자가 아닌 거예요. 마치 야곱이 구원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구원하는 것은 야곱을 구원하는 게 아니고 언약의 심판성이 담겨 있는 야곱, 누군가가 야곱을 심판했다는 그 증거가 담겨 있는 야곱 그 야곱을 이스라엘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동일인물인데 이스라엘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누가 구원받는가? 이스라엘이 구원받지 야곱적인 이스라엘이 구원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구원하는 게 아니라 누가 심판주고 누가 구원주냐, 하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하나님의 그 모든 일하심의 목표에요.
누가 구원받았느냐 하는 그것은 나중 결과적인 문제고요, 도대체 진짜 하나님이, 진짜 구원자 진짜 심판주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그것을 스스로 드러내는데 그 드러내는 샘플로서 이스라엘을 잡았고 그 이스라엘을 잡게 된 그 근거는 바로 야곱이라는 인물을 가지고 사용하는 겁니다.
야곱에게는 언약을 보여줄 파트너가 있다고 했고 그 파트너가 뭐냐? 에서가 되는 거예요. 그 에서가 세운 나라가 에돔이고 그 에돔이 이스라엘 야곱의 열두 지파와 더불어 함께 모형판을, 지형판을 형성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지형판을 마련하게 되면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없는 하나님이, 그 언약을 실행하는 과정 속에서 없는 하나님이 새로운 심판주로서 또는 구원자로서 이스라엘 역사 속에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 속에 없는 하나님이 언약적으로 등장하면서 기존의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는 인정하지 않는, 멸망시키는 그 작업과 같이 겸해서 그 과정을 일으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본문에 시온산이 나오는데 아까 예루살렘은 없다 했지요.
시온산은 없습니다. 시온산이 없다는 말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이, 원래 왕이 필요 없는 이스라엘 민중들이 왕을 달라 해서 사울왕을 줬잖아요. 사울이 왕이 되기 전에 언약궤를 이스라엘이 빼앗깁니다. 그래서 언약궤가 없는 왕이 등장한 거예요. 언약이 없는 왕이 등장한 거예요. 같은 말로 언약궤가 없는 왕이 등장한 겁니다.
처음에 언약궤를 만들었는데 광야에서 만들었지요. 출애굽기 40장에 나오는 대로 모세가 광야에서 만들어서 39년 동안 함께 있었습니다. 그다음에 그 언약궤가 여호수아 4장에 보면 길갈이라는 곳에 와 있어요. 요단강 건너서 바로 나오는 길갈.
그다음에 사무엘상 4장에 나오는데 언약궤가 실로라는 곳에서 3백 년 동안 있어요. 그다음에 사무엘상에 들어오게 되면 처음 전쟁이 일어날 때 그러니까 사울이 왕 되기 이 전에 언약궤를 빼앗겨 버립니다. 블레셋한테 빼앗겨 버리지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뭐냐? 언약궤가 없는 이스라엘 돼요. 언약이 없는 이스라엘은 이방 민족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자체가 언약이 있어야 되는데 언약궤가 없어요. 그러면 진짜 이스라엘은 어디 있느냐? 언약궤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면 언약궤는 누가 있는 거주지냐 하면, 주의 이름, 언약의 하나님이 거주하는 거주지인데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빼앗겼다는 말은 진짜 하나님이 없는 그런 이스라엘로 남은 거예요. 그래서 진짜 언약궤 안에 참된 이스라엘이 있는데 그 언약궤가 진짜 언약에 합당한 이스라엘을 자체적으로 만들어나가기 시작하는 겁니다.
에벤에셀에, 7개월 동안 블레셋에 언약궤가 체포되어 있었지요. 그다음에 아스돗이라는 곳, 블레셋 지명입니다. 가드, 블레셋 지명이고요. 에글론, 전부 다 블레셋 지명이에요. 이렇게 7개월 동안 갖고 있다가 그 블레셋이 식겁했지요. 원인도 모르는 전염병이 퍼져서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언약궤를 내보내자. 우리 신도 아니고 남의 신을 여기 두는 것이 화근이었다. 돌려주자.” 블레셋 그들이 자발적으로 이스라엘한테는 이겼는데 언약궤한테는 졌어요. 그들의 신 다곤이 졌어요. 신과 신의 싸움에서. 그 신을 믿는 민족한테는 이겨놓고 막상 그 당사자 민족의 신한테는 져버린 거예요.
그래서 언약궤를 돌려줬지요. 문화재 반납 같은 것인가요? 돌려주자 벧세메스에서 돌려받아서 기럇여아림에서 20년 동안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그 뒤에 사울 왕, 물론 본래 왕도 아닌 데 백성들이 왕을 달라고 해서 된 왕이지요. 사울 왕은 가짜가 되는 거예요. 언약궤와 아무런 연관이 없어요. 그냥 나라가 있으니까 이 나라 유지하겠다고 그들이 왕 달라 해서 뽑은 왕이 사울 왕입니다. 사울 왕이 사무엘의 예언에 의해서 죽습니다.
사무엘상 15장 26, 27절에 보면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사무엘이 가려고 돌이킬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사울이 아말렉 왕을 제대로 안 죽이고 좋은 것은 남겨두었다 그 말이지요. 그러니까 사무엘선지자가 지적을 하지요. “당신은 범죄 했기 때문에 당신의 나라는 끝났습니다.”라고 하니까 사울 왕이 사무엘의 옷자락을 잡았어요. 27절에 “사무엘이 가려고 돌이킬 때에 사울이 그의 겉 옷자락을 붙잡으매”
붙잡으니까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서 일하는 그쪽 방향과 기존의 사울 쪽 방향이 합치되는 것이 아니고 옷이 찢어졌어요. 옷이 찢어졌다는 말은 네 세계하고 이 사무엘의 그 세계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거예요. 상관없는 거예요. 교회 문제 있을 때 당회장 나가라, 못 나간다, 너희가 나가라, 이렇게 싸워서 2층 본당에서 예배드리고 아래층에서도 예배드리고 있고, 찬송가가 막 섞이고 그런 것 여러분은 잘 모르지요. 물론 둘 다 문제 있겠지만. 서로가 다 정통이라고 하는 거예요.
사울이 왕이 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은요, 열두 지파 전부가 정통적인 왕은 사울 계열이에요. 사울 족보라고요. 사울 왕이 죽고 난 뒤에 이스보셋이라는 그 아들이 열두 지파를 총괄하는 새로운 왕으로 된 겁니다. 왜냐하면 왕의 아들이 왕의 후계자라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이상한 게 아니에요. 당연한 거예요.
그 이스보셋이 2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를 했는데 어디서 했는가? 그것도 야곱이 천사 만났던 마하나임 그 동네에서 2년간 통치했습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은 전부 누굴 왕으로 생각하느냐 하면 사울 왕이 정통적인 왕이에요. 미얀마 사태 보잖아요. 군사쿠데타 해도 안 믿어요. 그래서 사울이 정통적인 왕이고 그 아들인 이스보셋이 왕이에요. 열두 지파가 전부 다 그렇게 인정한 거예요.
다윗은 사울의 사위인 동시에 군대 장관이지요 뭐. 다윗은 그냥 사울 왕의 국방부에 근무하는 하나의 신하에 불과한 거예요. 여러분, 이점을 이해해야 돼요. 이스라엘 전체가 사울 왕 계열을 왕으로 인정을 한다니까요. 그러면 그 당시 예루살렘은 뭐냐? 그 당시 예루살렘은 이방 민족, 여부스 민족이 쥐고 있는 거예요. 중립지역이에요. 열두 지파에 속하지 않는 중간지점에 예루살렘이 있습니다. 시온산이 거기 있는 거예요.
그러면 언약궤는? 언약궤는 20년 동안 기럇여아림에 가 있고요. 그래서 가짜 이스라엘의 특징은 뭐냐 하면, 언약궤고 뭐고 간에, 정통이고 뭐고 간에 지금 우리 국민들이, 백성들이 밀어서 정통으로 인정하면, 여론조사 해서 40퍼센트 인정하면 그게 바로 차기 대통령이에요. 갑자기 선거운동 하면 안 되는데……, 그게 인간들이에요.
그 인간들의 본성은 자기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이고, 여기 존재하는 내가 인정하고 믿어지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사무엘상 15장 27절에 “ 사울이 그의 겉 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가는 방향이 반대 방향으로 드러나고 난 뒤에 16장에 보면, 사무엘이 사울 왕에게 들키면 죽으니까 몰래 벌벌 떨면서 거짓으로 제사 지낸다 했고 어디로 가느냐?
16장 13절에 보면, 하나님이 선택한 어떤……, 사무엘도 몰라요. 누군지 몰라요. 누군지도 모른다는 말은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없습니다. 없어요. 현재 존재하는 사무엘이 모른다는 말은 진짜 하나님은, 왕은 있음의 세계에서는 없는 존재예요.
사무엘은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없던 존재, 없는 존재의 인물을 하나님께서는 “걔 아니야……, 걔도 아니야.”라고 하면서 딱 집어서 소년 다윗, 그 현장에 없던 소년 다윗에게 기름을 붓습니다.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붓고 난 뒤에 왕이 되게 하지요. 쉿! 입 다물어야 돼요. 왜냐하면 나라 전체는 사울 왕 계열로 줄곧 가기 때문에.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 붓고 난 지 15년 뒤에 사무엘하 2장 4절에 보면 헤브론에서 이스라엘의 유다 지파만의 왕으로 등극해요. “유다 사람들이 와서 거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을 삼았더라.” 열두 지파는 아닙니다. 유다지파만의 왕으로 등극해요. 그러니까 전체 이스라엘의 왕이 아닌 거예요.
왜 유다 지파가 되느냐 하면, 아까 룻기에 보면 유다 지파에 속한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모압 땅에 이민왔다는 이야기부터 룻기가 시작되잖아요. 룻이라는 모압여인이 어찌어찌 해서 룻기 제일 마지막 룻기 4장 18-22절에 보면, “베레스의 세계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았고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이렇게 해서 이 다윗이라는 이 족보는 이스라엘에 없는 족보에요. 왜냐하면 엘리멜렉이 모압 땅에 가지 아니했더라면 생겨날 수 없는 계열이거든요. 생겨날 수 없는 계열이에요. 인간들의 세계에 없는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는가? 그것은 이스라엘 지파가 하나의 모형이고 샘플이고 그 샘플 속에서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있음의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하나님이에요. 존재하지 않는 하나님의 기능입니다.
다만 언약이 있기 때문에 언약대로 시행하면서 언약이 없는 자는 저주하고 언약이 있는 자는 복 내리는 그 작업을 하나님이 홀로 몰래 해 오신 거예요. 룻이라는 모압 여자, 이방 여자는요, 이스라엘 지파에 속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땅에서 이방 여자는 없는 거예요. 없는 쪽에서, 제로의 지파에서 새로운 지파가 등장하는데 그 제로 지파, 없는 지파의 기능을 누가 하느냐? 유다 지파가 하는 거예요.
현재 지금 왕은 베냐민지파의 사울 왕이에요. 그러나 사실은 베냐민 지파가 아니라 열두 지파를 총괄하는 그러한 왕으로서 사울이 왕이 된 겁니다. 12대 0입니다. 전쟁하는데 12:0입니다. 그러면 다윗이 영웅이냐? 아닙니다. 다윗이 잘났냐? 아닙니다. 다윗이 인기가 많아? 아닙니다.
그러면 뭐냐? 다윗이 왕이라는데 다윗은 사무엘하 6장에 보면 다윗이 왕이 되고 난 뒤에 전체 이스라엘 왕이 되는 것은 언약궤라는 사물체, 물체와 다윗이라는 인물이 만나야 돼요. 접합해야 되는 겁니다. 그럴 때 비로소 새로운 이스라엘이 탄생합니다.
새로운 이스라엘이 등장하면서 기존의 사울 계열, 사울왕 쪽을 심판해버리지요. 십이 대 빵(0)에서 빵(0)이 이기는 거예요. 그런데 누가 왕이냐를 결정하는 것은 언약에 의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언약이 있는 이스라엘이에요.
그러면 언약이 있는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주의 언약이란, 주의 이름이 거하는 곳이 언약궤니까 주의 이름이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서 언약궤에 합당한 인물을 따로 뽑아놓은 거예요. 숨겨놓은 거예요. 그 인물이 뭐냐? 다윗입니다.
그러면 다윗이 사무엘하 2장에서 한 지파의 그냥 한 족보의 왕이 되고 난 뒤에 헤브론에서 7년 동안 왕이 되었거든요.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 족속의 왕이 된 날 수는 일곱해 여섯달이더라.” 그러고 난 뒤에 제일 먼저 한 것이 뭐냐?
여부스라는, 아직 이쪽 지파도 저쪽 지파도 아닌 이방 민족으로 그대로 다스리고 있는 중립적인 위치에 있는 예루살렘, 예를 들어 중립국 스위스 같은 곳이지요, 아무것도 이스라엘 영토에 포함되지 않은 여부스라는 그 지역을 접수함으로 말미암아 그 없다는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았음을 증거하는 그 산 이름이 시온산이에요. 그게 예루살렘이고.
그 예루살렘으로 드디어 등장하면서 그 없던 예루살렘에 다윗이 언약궤를 모셔옴으로 말미암아 없던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중심으로 새로 생긴 것 그것이 기존의 육적인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심판의 장소가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 21절 봅시다. “구원자들이 시온산에 올라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라”
시온산,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산이 존재하는 모든 존재를 전부 다 심판하는 그 날, 그 시온산에 합당한 왕이 누구냐? 바로 언약의 마감되는 언약, 다윗언약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언약이 계속 남아 있어요. 최종적인 언약의 왕이 누구냐? 바로 예수님이시지요.
예수님이 바로 시온산에 부합되는, 언약에 부합되는 인물, 언약과 인물의 결합 예수님 계신 곳이 시온산, 그게 뭐냐, 하나님의 나라, 그 나라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다 심판한다. 이 예언이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이 언약이 오늘날 우리의 일상 속에 들어오면 어떻게 작용하는가? 그것만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그 언약이 진짜 성경의 예언대로 십자가로 다 이루어졌다면 그러면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 언약이 오게 되면 언약은 어떤 식으로 진짜 살아계신 구원의 기준이 우리 안에 살아나는 모습이 있느냐? 그게 상당히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찾아보니 언약에 관한 노래가 있어요. 노래 가사를 볼 테니 언약이 우리한테 어떻게 작용하는가, 한번 잘 들어보세요.
“우리는 말 안 하고 살 수가 없나 날으는 언약처럼”
언약은 하늘에서 왔기 때문에 언약은 말이 없어요
“권태 속에 내뱉어진 소음으로 주위는 가득 차고
푸른 하늘 높이 구름 속에 살아와”
언약은 이렇게 초월해서 살고요.
“수많은 질문과 대답속에 지쳐버린 나의 땅의 존재여”
2절
“스치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어느덧 내게 다가와
종잡을 수 없는 얘기속에 나도 우리가 됐소”
나도 그들과 똑같은 그렇고 그런 아무 의미없는 존재가 되었다.
“바로 그때 나를 비웃고 날아가 버린 나의 언약이여”
하늘에서 와서 나를 비웃고. “너 뭐하냐 지금? 너 도대체 인생 왜 살아? 왜 그렇게 무의미해?”라고 비웃고 날아가 버린 나의 언약.
“수많은 관계와 관계 속에 잃어버린 나의 얼굴아”
진짜 나는 내 모습을 잃어버린 거예요.
3절
“애드밸룬 같은 미래를 위해 오늘도 의미 없는 하루”
의미 없어요.
“준비하고 계획하는 사람 속에서 나도 움직이려나”
전부 다 나름대로 준비하고 계획하고 하루 스케줄 짜는 거기에 나도 같이 움직일 수밖에 없구나.
“머리 들어 하늘을 보면 아련한 친구의 모습
수많은 농담과 한숨 속에 멀어져 간 나의 언약이여
수많은 농담과 한숨속에 멀어져 간 나의 언약이여
멀어져 간 나의 언약이여”
‘언약’ 자리를 ‘솔개’로 바꾸면 원래 노래입니다. 이태원이 불렀던 <솔개>라는 노래입니다. 인간들의 일상,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아무 의미도 없는 거예요. 있는데 왜 있는지 사는데 왜 사는지, 서로 농담이나 하고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 속에 그냥 모든 수많은 관계 속에 진짜 내가 뭔지는 잃어버린 것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봤던 우리의 참모습입니다.
이 모습을, 우리가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 나의 모습을 이렇게 봐야 돼요. “우리는 말 안 하고 살 수가 없나~” 우리는 맨날 말하면서도 권태 속에 내뱉어진 소음, 온갖 것이 소음, 산다는 것이 소음 속에 살고 있어요. 수많은 질문과 대답 속에 지쳐버린 나의 일상이여. ‘뭐야? 사는 게 산다는 게 대체 뭐야?’ 이 태원씨가 기타 치면서 불렀던 1970년대 노래에요. <솔개>
우리의 모습, 이게 바로 망해야 될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이게 바로 내가, 야곱 같은 내가 주님에 의해서, 내 이름이 주의 이름에 의해서 심판할 때 그 심판하는 그 현장이 바로 주와 함께 있는 시온산입니다. 천국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 의미도 없이 살아가는 저들, 그냥 성경 말씀을 지식으로 이해하고 내 삶은 따로 있다고 우기는 저들, 그러나 이 세상은 이미 주님의 언약이 접수했고 언약의 기준대로 십자가대로 하나님의 죄 용서받은 사람만, 언약이 있는 사람만 천국 보낸다는 이 변경 없는 확실한 하나님의 일을 저희들이 진짜 하나님의 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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