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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오바댜 1:9-11 / 깎이는 주체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오바댜

오바댜 1:9-11 / 깎이는 주체

정인순 2021. 5. 26. 22:50

음성 동영상 Youtube

 

깎이는 주체

 

이근호
2021년  5월 26일              

 

본문 말씀: 오바댜 1:9-11

(1:9) 드만아 네 용사들이 놀랄 것이라 이로 인하여 에서의 산의 거민이 살륙을 당하여 다 멸절되리라

(1:10)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을 인하여 수욕을 입고 영원히 멸절되리라

(1:11) 네가 멀리 섰던 날 곧 이방인이 그의 재물을 늑탈하며 외국인이 그의 성문에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얻기 위하여 제비뽑던 날에 너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었느니라
 
비록 에서와 야곱은 형제였지만 에서의 후손의 나라인 에돔과 야곱 후손의 나라인 이스라엘은 더 이상 형제라는 인식을 유지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에서와 야곱을 형제되게 하신 하나님의 취지가 무효가 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강제로 에돔과 이스라엘을 엮이는 관계를 지속시켰습니다.

즉 이스라엘을 통해서 저주받아야 될 에돔의 본질을 드러내시고, 에돔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복받아야 될 민족으로 드러내십니다. 이는 에돔이 보는 세상 이해와 이스라엘이 보는 세상 이해가 확연히 달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게 됩니다. 두 나라가 그 당시 강대국에서 망한다고 해서 같은 운명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에돔 나라는 이스라엘이 망하는 것을 고소해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적의 나라와 다를 바 없는 속성을 지녔다고 하나님께서는 보시는 겁니다. 에돔나라의 이러한 태도 속에는 전에 같은 부모 아래의 형제의식이 결여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에돔은 하나님의 언약의 혜택에서 배제되는 겁니다.

에돔은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 외에 다른 에돔은 없다고 여깁니다. 자아의 이중성이 에돔에게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나밖에 없는 그 자아를 키워나가는 것은 인간다운 삶이라고 여깁니다. 이렇게 되면 에돔은 같은 인간들을 상대해서 공동의 이익을 위해 연대감을 갖는 것이 세상 사는 최선의 방식이라고 믿게 됩니다.

이는 무엇이 진리고 무엇이 비-진리를 따지기 보다는 무엇이 강한 경우고 무엇이 약한 경우냐만 관심사가 될 뿐입니다. 에돔이나 이방민족들은 본질의 차이를 알지 못하고 항상 정도의 차이를 염두에 두게 됩니다. 지금보다 더 강한 것이 사는 재미요 보람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야곱과 이스라엘의 운명은 그렇지 못합니다.

야곱은 할아버지인 아브라함과 아버지인 이삭과 같은 언약적 노선에 속한 자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친히 자기 손으로 잡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지시가 그러했습니다.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다른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죽기 전에 이삭을 구출한 존재는 아브라함이 아니라 천사였습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을 죽음에서 건져낸 것은 ‘밤’이라는 기간이었습니다. 그 ‘밤’의 기간은 사람의 시간이 아니라 천사의 시간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과 야곱의 공통점은 모두 사람을 상대한 것이 아니라 천사를 상대했기에 그들에게는 자기 운명을 바꿀 다른 가능성이 전혀 없었던 겁니다.

죽은 야곱을 이스라엘로 다시 살려낸 그 ‘천사 개입의 밤’은 야곱의 후손들에게 집단적으로 주어집니다. 그것이 바로 출애굽 되었던 그날 밤이었습니다.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을 인하여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출 12:42)

이날 밤은, ‘모든 인간들은 다 죽어야 될 밤’이었습니다. 부각이 되는 것은 ‘유월절의 어린 양의 피’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는 ‘유월절의 피’만이 살아있는 조건 하에 유지되는 민족입니다. 참으로 특이한 민족이요 이상한 민족입니다. 세상에 그 어떤 민족과는 다릅니다.

세상의 모든 민족들은 같은 인간들을 상대로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만은 하나님을 상대하는 민족입니다. ‘틈이 있어야 빛이 들어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어느 인간들도 하나님께서 인정할만한 인간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들을 선택해서 하나님의 언약이 삽입시키는 일을 하신 겁니다.

이스라엘의 이스라엘다운 조건은 신명기 30:19에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즉 생명과 사망의 출처가 따로 있는 것으로 세상 사람들은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 출처가 동일한 출처입니다.

모든 인간을 죽이고 홀로 부각된 유월절의 어린양이 바로 복과 저주가 시작되는 출처가 되는 겁니다. 이 출처가 심겨지기 위해 이스라엘 나라가 ‘밤에 태어난 나라’로 출발된 된 겁니다. 이런 본질을 지니고 있어야 할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기거하면서 에돔 나라나 이방나라들을처럼 우상을 섬기면서 본질이 뒤덮혀진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속에서 참된 이스라엘을 뽑아내기 위해 에돔을 통해서, 그리고 이방민족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깍아내게 하신 겁니다. 이스라엘은 결코 에돔이나 이방민족들을처럼 스스로 자신을 살찌는 식으로 자신을 인위적으로 키워나가서는 아니되는 민족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로 이스라엘을 통과케 하면서 벌써 본질이 달라진 이스라엘과 에돔민족과 차이됨을 이스라엘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에돔이나 세상 나라들을처럼 같은 인간들하고 상대해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광야길을 가면서 이미 자리잡고 단단하게 살아가는 에돔나라를 차지하고 싶은 욕심을 들 수밖에 없을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하여금 형제 나라 에돔의 것을 건드리지 말하고 당부하셨습니다. “너는 또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세일에 거하는 너희 동족 에서의 자손의 지경으로 지날진대 그들이 너희를 두려워하리니 너희는 깊이 스스로 삼가고 그들과 다투지 말라 그들의 땅은 한 발자국도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세일 산을 에서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로라 너희는 돈으로 그들에게서 양식을 사서 먹으며 돈으로 그들에게서 물을 사서 마시라”(신 2:4-6)

그러나 에돔 민족은 이스라엘의 특이성을 고려하지 않고 이방민족과 합세하여 이스라엘을 학대했습니다. 신약적으로 말해서 참 이스라엘은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 16:19) 하나님께서는 결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그 ‘천국의 열쇠’로 인하여 선택하신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본인이 원하는 인생을 가지 못한 겁니다. (요 21:18)

세상은 애굽과 광야로 나뉘는 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언약이 삽입된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나뉘어지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강하게 살찌우는데 관심두지 말고 귀한 예수님을 모시게 된 신분임을 감격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4강-오바댜 1장 9-11절(깎이는 주체)21052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오바댜 1장 9-11절입니다.

오바댜 1:9-11

“드만아 네 용사들이 놀랄 것이라 이로 인하여 에서의 산의 거민이 살륙을 당하여 다 멸절되리라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을 인하여 수욕을 입고 영원히 멸절되리라 네가 멀리 섰던 날 곧 이방인이 그의 재물을 늑탈하며 외국인이 그의 성문에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얻기 위하여 제비 뽑던 날에 너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었느니라.”

나라 이름이 분명히 에돔으로 있고 또 분명히 이스라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바댜에서는 에돔이라 하지 않고 에서라 개인적인 이름을 거명하고 또 야곱이라고 거명하는 이유는 이 에돔이라는 나라의 운명은 바로 이스라엘과 연동되어 있다는 겁니다. 관련성이 있다. 형제라고 했던 그 근원, 원천, 에서와 야곱이 형제지간이라는 그 원칙을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형제이기는 형제인데 서로 싸웠던 형제, 그 형제의 원칙이 시간이 아무리 흘러가도 세상 끝날까지 이 언약적원칙은 하나님께서 그대로 이끌어 내십니다. 그렇게 해서 에서로 이해되는 야곱, 또 야곱으로 이해되는 에서, 야곱이 있음으로서 에서의 운명이 절단 났고 에서가 있음으로서 야곱은 본래의 야곱으로 찾아가는 그러한 기회를 받게 되는 겁니다.

에서와 야곱이 서로 싸웠고 나중에는 야곱이 복을 받게 되었을 때에 에서의 태도가 창세기 27장 41절에 나옵니다. 에서가 어떤 마음을 품느냐 하면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아버지가 돌아갈 때가 가까웠으니 내가 야곱을 죽이겠다고 악한 감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에서의 사적이고 개인적인 그 때 그 기분이라면 하나의 개인인 에서도 죽고 야곱도 죽고 난 뒤에 그 이어지는 에돔과 이스라엘 나라에도 에서가 품고 있던 야곱에 대한 악한 감정이 그대로 국가 전체의 본질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두 나라 사이를 대조하고 비교하면서 에돔은 어떤 식으로 자기 자신의 생활과 삶과 생존을 유지하고 있으며 야곱은 그것과 너무나 차이나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어떻게 새로운 이스라엘로 나오는지를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합니다.

이것은 쉽게 말해서 에돔은 정도의 차이, 나에게 이익이 있느냐 그 차이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예가 10, 11절에 나옵니다.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을 인하여 수욕을 입고 영원히 멸절되리라.” 네가 야곱에게 한 그 학대로 인하여 도리어 네가 욕을 얻어먹을 것이며 그리고 11절에 보면 “네가 멀리 섰던 날 곧 이방인이 그의 재물을 늑탈하며 외국인이 그의 성문에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얻기 위하여 제비 뽑던 날에 너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었느니라”

즉 “그때 많은 민족들이 이스라엘을 괴롭힐 때 너는 멀뚱멀뚱 서 있기만 했고 너는 형제 이스라엘이 외국인한테 늑탈당할 때 너는 마음속으로 굉장히 좋아했잖아. 고소해 했잖아. 그러니까 네가 약탈하는 그 외국인과 네가 같은 입장에 있다, 같은 생각에 있었다.”라고 지적을 합니다. 그것 때문에 에돔나라는 완전히 망해버리지요.

이렇게 되어버리면 우리는 남의 불행을 가지고 즐거워해서는 안 된다. 뭐 이런 식으로 결론이 날 수도 있는데 그러나 에돔의 입장에서는요, 더 착하냐 덜 착하냐 정도의 문제 기껏 그 정도 레벨에서 올라갔다 내려갔다 그것뿐이에요. 근본적인 본질은 바뀔 줄을 몰라요. 바둑두는 사람들이 바둑판을 쳐다보면서 생각을 하거든요. 뭘 생각하느냐 하면, 새로운 수를 내다보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둑두는 사람들은 새로운 수는 보고 있지만 새로운 게임은 못 보고 있어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내가 어떻게 이익을 얻을 것이냐, 거기에 필요한 수를 계산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걸 정도의 차이라고 보고 싶어요. 만약에 자기가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어떤 사람이 있ㄷ 합시다. 그 사람이 지나가다가 불법으로 쓰레기를 버리는 걸 봤다 그 말이지요.

그래서 그 사람이 잘됐다 너 당해 봐라, 해서 스마트폰으로 찍어서 당신을 동구청에 고발하겠다, 이렇게 나설 때 “아이고, 돈 내고 치우려다 보니 돈이 많이 들어서 그럽니다. 영세업자인데 좀 봐주세요. 한 5만 원 드릴 테니 안 본 것으로 좀 해주세요. 찍은 사진은 좀 지워주시고요.”

이렇게 하면 “뭐 5만 원? 내 이 정의감, 환경을 생각하는 이 맘을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는거요? 내가 돈이나 받고 눈감아줄 그런 사람인 줄 알았소? 내가 당신 같은 사람은 억만금 줘도 고발 할거요.” 이런 이야기 할 때 그 사람이 얼마나 본인이 정의롭다고 생각하겠어요? 자신의 본질은 정의에 속한다 하겠지요.

그런데 그 쓰레기 버리다가 걸린 사람의 부자 삼촌이 있다가 “그러면 한 50억?” 하고 제안하니까 “콜! 오케이.” 5만 원은 안 되지만 50억은 돼요. 5만 원은 단호하게 거절하지만 50억 딱 들어오면 ‘야, 이거 하나님이 나 부자 되라고, 횡재하라고 이런 좋은 기회를 줬구나.’ 해서 정의고 뭐고 다 없어지지요.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가 존재한다는 그 판만 생각해요.

거기서 내가 살 수 있는 어떤 기발한 아이디어나 아이템 투자처 이런 새로운 수를 생각하지 판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는 생각을 전혀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에돔의 입장에서 야곱을 보면서 자기가 속해 있던 자기판에서 나오는 그 생각으로 그대로 타인을 평가하지요. 그게 바로 세상 해석인데 에돔에 있어서의 세상 해석은 뭐냐 하면, 바로 그 이스라엘이 쫄딱 망하는 것이 자기의 기쁨이 되는 그런 식으로 세상 해석한 겁니다.

“네가 더 큰 나라가 되는지 내가 더 큰 나라가 되는지 두고 볼 거야. 너는 망해라 나는 흥하겠다.” 이런 판이지요. 이런 세상에 대한 해석은 그 책임을 하나님께서 묻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에돔은 이스라엘이 망하는 것을 고소해 하다가 자기의 그 세상 해석에 대해서 책임을 하나님한테 당하는 겁니다.

9절에 보면, “드만아” 드만은 아라비아 사람입니다. 아라비아 사람들 “네 용사들이 놀랄 것이라” 왜냐? “이로 인하여에서의 산의 거민이 살륙을 당하여 다 멸절되리라” 에돔이 그렇게 심하게 살육을 당할 줄은 이웃나라도 몰랐어요.

‘저 에돔나라는 왜 저렇게 망해도 조용하게 망하는 것이 아니고 처참하게 요란하게 보란 듯이 짓밟히지?’ 너무 처절하게 밟힐 때에 오히려 주위 나라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길 정도로 혹독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에돔은 이스라엘과 형제나라 라는 관련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 에돔나라의 평소의 생각은 뭐냐 하면, 자기 판에서는 자기가 생각하는 생존의 판에서는 공동이익을 얻는 것, 다른 이스라엘을 치는 다른 나라와 좋게 지내는 것으로 공동이익을 통해서 연대성을 이루는 그런 식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어떤 사람들과 친하게 지낸다, 좋게 지낸다 하는 것은 공통적인 관심사로 인하여 그때그때 마다 동지가 되지요.

복음을 아느냐 모르느냐, 그런 것은 안 묻잖아요. 나에게 이익만 있다면 “우리는 형제처럼 친구처럼 지냅시다.” 마음에 어떤 껄끄러움이 있거나 섭섭한 것이 있더라도 술 한잔하면 다 풀리지요. 술로 풀리겠어요? 돈으로 풀리지요. 공동이익의 연대성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에돔같은 나라 또는 이방 나라는요, 참과 거짓, 진리와 비진리의 차이는 모르고요. 뭘 아느냐 하면, 얼마나 강하냐 얼마나 약하냐, 그 차이만 알아요.

내가 얼마나 강하고 너는 얼마나 약하냐, 나는 얼마나 약하고 너는 얼마나 강하냐, 강함과 약함, 그러한 생각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거기에 비해서 야곱은 전혀 다릅니다. 이스라엘은 완전히 달라요. 어떤 점에서 다르냐?

이스라엘의 할아버지가 아브라함인데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어떤 지시를 내렸느냐 하면 아들 이삭을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삭을 죽이는 그 가능성 말고 다른 가능성을 전혀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 죽이는 이것은 본인의 의사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지시가 주어진 겁니다. 하나님의 이 지시에 따르고 말고 할 것이 없어요. 무조건 따라야 돼요. 이게 아주 특수한 관계입니다. 하나님하고 아브라함 관계가.

뭐 아들 이삭은 죽을 수밖에 없지요. 사람인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사람인 이삭을 죽이게 만들어 놓고 그다음에 이삭을 살리는 것은 어떻게 하느냐? 천사가 개입해서 아버지가 이삭을 죽이는 것이 중지되었습니다. “멈춰라! 됐다.”

그러니까 에돔은 한마디로 말해서 사람을 상대했는데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진영은 사람 대 사람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개입할 만한 여건을 가지고 사람과 사람을 상대하도록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개입이 주어지는 그러한 상황을 하나님의 의도적으로 유발하기 위해서 사람과 사람을 만나게 하는 거예요.

이런 말이 있어요. 틈이 있어야 빛이 들어온다고요. 야곱도 아브라함도 인간인지라 사람하고 좋게좋게 공동이익을 통해서 유대성과 연대성을 갖추면 이 세상 사는데 별로 지장 없다,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일반적인 사람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차마 하지 못하는, 차마 그럴 수 없는,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그 사건을 의도적으로 지시하고 아브라함은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 하지만 주님의 지시기 때문에 그걸 실행에 옮길 때 거기에 아브라함도 몰랐고 이삭도 몰랐던 어떤 틈이 있는데 그 틈이 뭐냐? 하나님이 개입하는 자리 그 틈이 생겨버린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개입으로 이삭은 죽었다가……, 혼났지요. 죽었다가 살아난 거지요. 또 천사의 개입이 야곱에게 있었습니다. 야곱이 형 에서의 분노를 피해서 도피하다가 얍복강 가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데요. 야곱은 사람 대 사람을 상대하는 줄 알았습니다. 사람 대 사람을 상대해서 안 지려고 할 때는 강한 자가 안 지게 되기 때문에 자기의 모든 힘을 다 발휘해서 그 사람을 만나기 전에 멀쩡했던 자기 자신을 유지하고 싶었던 거예요.

그 사람을 자기를 공격하는 사람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안 지려고, 안 죽으려고 애를 썼던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언제 멈춰지느냐 하면, 바로 얍복강의 밤이 끝나고 새벽이 열릴 때 비로소 자기가 사람을 상대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상대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야곱은 뭘 아느냐? 내가 천사와 씨름하는 것은 내가 철회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아들 죽일 때 다른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처럼 야곱이 천사를 만나서 씨름하는 그 일도 자기 쪽에서 어떻게 조치할 다른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야곱의 운명이 그렇다면 에돔에게는 그런 게 없어요. 에돔은 계속해서 자기가 잘 될 수를 생각하는 거예요. 가능성을 생각하는 겁니다.

느닷없이 누가 확 다가와서, 천사가 다가와서 사람 대 사람으로 상대했던 그 과거를 절단 내고 사람하고 상대하지 않아야 될 새로운 사람, 새로운 인간성의 출발 에돔에게는 어떤 체험도 없었습니다. 그게 차이점이에요. 이것은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나라는 인간 자체의 본질이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서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래서 야곱의 후손들이 누구냐? 이스라엘 이거든요. 그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로 갔을 때에 그 때 에돔사람들은 이 이스라엘의 완전히 달라진 위상, 본질 자체가 다른, 이방 민족과는 전혀 다른 국가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어요.

신명기 2장 4, 5절, 그리고 그 뒤에 죽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는 또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세일에 거하는……” 세일은 에돔이 거하는 그 동네가 세일산이에요. “세일에 거하는 너희 동족 에서의 자손의 지경으로 지날찐대 그들이 너희를 두려워하리니 너희는 깊이 스스로 삼가고 그들과 다투지 말라 그들의 땅은 한 발자국도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세일산을 에서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로라.”

야곱은 하나님이 개입합니다. 하나님의 개입, 천사의 개입이란 곧 하나님의 언약의 개입이지요. 이스라엘 안에는 언약적인 터가 있고 언약적인 안목을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때문에 언약적인 관점에서 보면 사람 대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언약에 속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나 언약이 없는 에돔은 기껏 자기가 보는 삶의 판이 사람과 상대해서 누가 잘났냐, 누가 강하고 누가 약하냐, 누구한테 이익이고 누구한테 손해냐, 이것만 따지는 삶을 사는 거예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달라야 돼요. 에서가 사는 땅이 탐나더라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너는 그 땅을 탐내지 마라. 손도 대지 마라.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 너희가 합류하는 식으로 살아야지 사람 대 사람이 상대하는 것처럼 사람 살던 땅을 네가 탐내서는 안 된다.” 그 말이지요.

제가 오늘 아침에 운동하는데 주일에 예를 들었던 “어이 김 사장! 백신 맞았나?” 하던 그분들이 또 그 시간에 와서 떠들기 시작한 거예요. 나는 허리 돌리는 그 운동하고 있었는데요. 이번에는 또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가만히 있어도 다 들려요. 하도 큰 소리로 이야기하기 때문에. 자기는 지묘동 팔공산 밑에 와서 살기 전에 수성구 살던 것을 자랑하는 거예요. 내가 왕년에 수성구에 살았는데 이제는 조용하게 살려고 여기 왔다고. 누가 수성구 안 살아본 사람 있어요?

도대체 사고방식이……, 오늘 수요 말씀 생각하면서, 그게 에돔식이에요. 놀던 그 판이요. 학군 좋고 잘사는 사람 많이 산다는 그 동네 수성구 사람이냐? 그 정도의 차이 가지고 자신의 강함을, 위세를 자랑질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맨날 평생을 타인하고 비교하는 거예요. 남하고 비교하는 겁니다. 자기 판에서는 같은 인간류 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에돔은 뭘 모르느냐 하면, 이스라엘은 그걸 알아요. 애굽과 광야의 차이점을 알아요. 같은 평지지만 세계관이 완전히 다른 세계관이거든요. 애굽은 사람으로 우샤우샤, 하는 동네고 광야는 사람 찾아봐도 사람 없어요. 자기들 공격하는 아말렉족속만 있지 우호적인 사람, 연대감을 가진 사람, 같은 이익을 나눌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완전히 거지떼쓰리들이지요. 하나님의 동행하심과 하나님의 도와주심 없이는 절대로 한치도 어디로 갈지를 알지 못하고 당장 굶어 죽을 판의 그 관계, 그것이 바로 야곱이 하나님을 만났던 그때 그 체험을 집단적 체험으로 야곱의 후손들이 다 갖게 되는 겁니다. 집단체험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정리할 것은 뭐냐? 착한 사람 나쁜 사람,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모조리 나쁜 사람인데 착한 사람 나쁜 사람 없어요. 나쁘면서도 자기가 강해지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고 또 누가 있느냐 이상한 사람이 있어요. 이상한 사람.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그런 영화도 있지만 이 수상한 사람, 수상한 놈, 이상한 사람이에요. 판이 달라요.

오늘 본문에서 야곱이 살육당하거든요. 살육당하고 거기에 합세한 것이 형제라고 하던 에서 곧 에돔입니다. 이스라엘은 에서를 광야 때 안 건드렸는데 에서는 야곱을 건드리는 거예요. 왜? 자기편이 많다 그 말이지요. 이방 민족과 한패 먹었으니까 저 이스라엘이 망하는 것이 자기의 기쁨이다. 그렇게 되거든요.

야곱에 있어서 에돔이 공격할 때는 인위적으로 자기 자신을 키우려는 주체 자아상을 갖고 있어요. 그런데 야곱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야곱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의 지시로 죽여야 되듯이 야곱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려야 될 그러한 과정을 겪어야 진짜 야곱이 그 안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에돔이라는 형제를 통해서 야곱이 주체가 깎이는 주체에요. 깎여나가는 주체. 에돔 및 이방민족에 의해서 야곱이 소비를 당하고 허비를 당하는 거예요. 무력한 존재지요. 무력한 존재. 왜 그래야 되는가? 아브라함도 그렇고요, 천사가 개입했다 했지요. 다른 가능성이 없으니까. 야곱도 마찬가지고요. 하나님의 개입입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이 개입하는가? 야곱이 특별히 훌륭해서 그런가 아닙니다. 야곱을 이 세상의 수상한, 아주 특이한 민족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어떤 조치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갖고 있던 언약을 야곱 속에 삽입하고 집어넣는 작업을 해요.

하나님의 언약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온 편지라고 봅시다. 편지인데 그 편지에 이 세상 모든 민족에게는 수취인 불명입니다. 편지를 받을 수취인이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을 받을 수취인을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천사가 찾아오듯이 이스라엘을 에돔이라는 나라, 바벨론 나라, 이방 민족에 의해서 그 모든 외부가 깎이도록 하는 겁니다.

탈탈 털리게 하는 거예요. 학대를 받는 거예요. 핍박을 받는 겁니다. 덕지덕지 쓸데없는 세상적인 요소가 너무 많다는 거예요. 깎아내는 거예요. 이게 원래 이스라엘이에요. 처음에 히브리인들이 이스라엘 될 때 이스라엘 나라가 어떻게 만들어지느냐 하면, 밤에 만들어지는 겁니다.

야곱의 밤, 죽었던 야곱이 얍복강에서 주님 만났을 때에 야곱이 살게 된 것은 그 날 밤이에요. 야곱이 죽었던 그 날밤, 그 밤이 중요한데요. 창세기 32장 30절에 보면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하나님과 대면하면 이미 죽은 거예요. 죽었는데 아침이 되니까 살아 있어요. 그래서 브니엘을 지날 때 해가 돋았고. 그 밤 그 밤이 야곱의 죽음을 대신한 밤이에요. 밤의 내용이 뭐가 있어야 되겠지요. 야곱이 죽어야 되는 그 밤이 아침 되니까 죽어야 될 야곱이 살아 있었던 겁니다. 밤의 어떤 내용이 죽은 야곱을 살린 거예요.

마치 천사의 개입으로 죽은 이삭이 천사가 와서 “됐다. 멈춰라!” 하는 순간 이삭이 살아난 것처럼 하나님의 개입이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개입이었다는 말이지요. 그 개입이 단순히 이삭을 살리고 개인적인 야곱을 살리는 것이 아니에요.

출애굽기 12장 6절에 보면 “이 달 십 사일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여기 해질 때, 라고 되어 있어요. 유월절 그 밤은 모든 사람은 다 죽고 양의 피만 부각 되는 날이에요. 밤이라 하는 것은 단순히 그다음 날과의 사이의 시간대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죽어 마땅함을 확정해주는 밤 모든 인간은 죽었다는 것을 확정하기 위해서 그 죽은 사람들 가운데 이스라엘민족을 새롭게 만든 거예요.

거봐, 죽음 가운데서 살아난 민족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 있잖아, 하는 그 민족은 이스라엘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환경이 그 이스라엘을 특이한 민족으로 만들어주는데 그 환경이 어떤 환경이냐? 바로 유월절 양의 피가 부각 되는 조건을 만족하는 새로운 환경, 그 환경 안에서 참된 이스라엘이 본질을 찾습니다. 새로운 본질을 만들지요.

참, 이거 정말 이상한 현상입니다. 그날 밤으로 모든 것은 종결되었습니다.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듯이 이스라엘은 훌륭하지 않다고 했지요. 그러면 이스라엘 속에 어린양을 집어넣음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자체는 이제부터 어린양의 피가 있다는 조건 하에 움직이는 양처럼 이스라엘이 움직이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양의 피, 양의 역할은 뭐냐? 신명기 30장 19절에 나옵니다. 요 대목이 오늘 설교에서 제일 난해한 대목인데요. 제가 차근차근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치 못할 것이니라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생명과 사망은 서로 대비되는 것이지요. 같이 있을 수 없다고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복과 저주도 마찬가지로 같이 붙어 있을 수 없다고 알고 있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의 특이성은 뭐냐? 그 복과 저주, 생명과 사망이 출처가 동일한 출처로서 하나님께서 마련했다는 거예요. 출처에요.

이스라엘이 훌륭한 것이 아니에요. 야곱이 훌륭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복과 저주의 동일 출처를 위해서 특정한 인물, 특정한 민족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겁니다. 달리 이것을 정확하게 제대로 이야기해서 뭐냐? 사람을 선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을 선택한 거예요. 저 천당 가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천당 보내려고 선택한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복과 저주가 동일한데서부터 주어진다는 언약적 출구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야곱도 선택했고 아브라함도 선택한 겁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했지요. 3절에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라고 할 때 아브라함은 본인이 그런 존재라고 생각하고 자기가 생각했던 본인이 복과 저주를 가름하는 주인공이라고 착각한 거예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데리고 다니면서 아브라함의 그 주체 착각하는 주체, 세상적인 그 인간성에서 나오는 사람을 상대하는 그 주체를 깎아버려요. 전부 다 깎아버리니까 그 안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바로 이삭이 튀어나오는 거예요. 죽었다가 살아나는 이삭이 튀어나온 겁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이름으로 죽였던 자식을 천사의 개입으로 살려냈으니까 ‘아, 내가 축복과 저주의 사람이 아니고 내 안에 다른 미지의 인물이 따로 있구나.’ 복과 저주를 결정지을 인물이 아브라함 자손의 이름으로 일찍이 그 안에서 삽입이 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식으로 하면 신약의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지요. 내가 결단하는 것이 아니고 내 안의 타자가 결단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 안에 내가 아니고 그리스도라는 구체적인 나사렛 예수라는 구체적인 인물이 아무것도 아닌 내 안에 박혀 있다는 겁니다. 그분이 왜 박혀 있습니까? 그분이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유월절 어린양이었고 그분이 복과 저주를 가름하는 결정자기 때문에, 심판주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천국과 지옥의 심판주가 성령을 통해서 우리 안에 있다는 것, 이것은 우리가 황공해야 됩니까, 안 그러면 화들짝 놀래야 됩니까, 아니면 기절해야 됩니까? 1번, 황공해야 된다. 2번, 놀래야 된다. 3번, 기절해야 된다. 정답은 3번입니다.

어느 정도 기절해야 되느냐? 내가 몸이 아프다, 내가 수입이 없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까, 그게 걱정거리가 되지 않을 정도로 기절해야 돼요. 성적이 내려가고 자꾸 공부도 안되고 수학문제도 안 풀리고, 이 걱정이 아주 소소한, 아무것도 아닌 걱정이 될 정도로 기절 초풍해야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을 볼 때 나쁜 놈/좋은 놈으로 보지 마시고 이상한 놈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이상한 놈은 나쁜 놈한테 깎여야 돼요. 핍박을 받아야 돼요. 이 세상 살면서 깎여야, 나무연필이 깎여야 심지가 나오잖아요. 연필 그냥 쓰면 안 나오잖아요. 앞부분, 그거 깎을 때 향기 삭 나거든요. 향나무 연필 나무 부분을 깎아줘야 그다음에 심지가 나와서 쓸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님께서 언약의 펜으로 사용하고 싶은데 앞부분이 뭉툭한 거예요. 누구처럼? 바로 이스라엘처럼, 우상을 섬긴 이스라엘처럼. 오바댜는 이스라엘이 망하고 난 뒤에 주어진 계시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본분을 잊어버리고 이스라엘 자기가 자기를 지키려고 한 거예요. 누굴 상대해서? 바로 힘 있는 주위 이방민족을 상대해서. 그런 것은 야곱적이 아니고 에돔적이에요.

에돔은 사람만 상대하면 끝이에요. 자꾸 자기가 살 수 있는 새로운 수를 찾아요. 이 판에서. 그러나 야곱은 이 땅에서 새로운 수를 찾는 것이 아니고 도저히 인간으로서 아이디어로서 나올 수 없는 완전히 다른 판을 하나님으로부터 제공 받았습니다. 네 인생 이제는 없다. 너라는 것은 다 깎여 버렸으니까. 너라는 인생 다 깎였어요. 깎일 준비만 하세요. 깎일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이 세상에 인간이 딱 두 종류 있습니다. 땅이 애굽나라 있고 광야 있듯이 인간도 애굽형 인간 있고 광야형 인간 있습니다. 바로 에돔은 애굽형 인간이에요. 야곱은 광야형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생각했던 그 야곱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만들어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에돔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내 인생은, 앞으로 내 미래 내 운명은 지금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노력하느냐에 따라서 내 미래는 활짝 열리기도 하고 꼴아박기도 한다. 내 생각과 내 행동이 내 운명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는 게 에돔이에요.

그러나 야곱은 아무리 노력하고 애쓴 것하고 자신의 운명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아요. 내가 착하게 산다고 천당 가는 것도 아니고 나쁜 짓 하는 것도 지옥 가는 것도 아니고 내 인생 나도 몰라. 내 인생 나도 몰라요. 그러니까 야곱의 입장에서는 뭐냐? 세상은 낮이라고 보는데 야곱은 항상 이동하는 밤이에요.

그 밤, 하나님과 동행했던 밤, 유월절 어린양만 부각되는 그 조건하게 같이 살 수밖에 없는 진짜 야곱은 하나님께서 에돔을 통해서, 악마를 통해서 세상을 통해서 우리를, 야곱을 학대하듯이 세상이 우리를 우습게 보고 학대하게 만드는 그 작업이 우리에게 필요한 겁니다.

제가 드라마 별로 안 보는데 젊을 때 봤던 MBC 드라마가 아직도 생각납니다. <서울의 달>이라는 드라마에요. 거기 나오는 노래가 <서울 이곳은>이라는 장철웅이 부른 노래입니다. “이곳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아” 아, 이곳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복음을 생각하고 야곱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이 세상은 전혀 이 에돔의 세계는 야곱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대화나 소통이 될 수가 없지요. 그들은 사람만 상대해서 자기가 강자가 되려고 해요. 약자는 싫다는 겁니다. 그러나 야곱은 본의 아니고 마태복음 16장의 말씀처럼 천국의 열쇠를 가졌습니다. 본인이 만든 게 아니에요. 본인이 소지한 게 아닙니다. 주님께서 집어넣었어요.

집어넣고 천국의 열쇠답도록 베드로로 하여금 이 세상에 나가서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원대로 자기의 길을 가지 못하게 만들었어요. 베드로는 자기가 천국 열쇠가 아니지요. 천국 열쇠가 들어 있는 사람이지요. 그게 바로 예수님 열두 제자의 표상입니다. 제자는 다 그래야 돼요. 주님에게서 주어진 천국열쇠가 있어야 돼요.

이것은 세례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 3장 27절에 보니까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하늘에서 주신바 되지 아니하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이 말은 에돔적인 사고방식하고는 너무나 판이하지요. 판이 다르지요 판이. 세상 해석하는 해석의 판이 달라요. 안목이 달라요.

세례요한은 하늘에서 주신 것 때문에 살아간 사람입니다. 왜? 성령이 함께 있거든요. 성령의 예언에 의해서 태어난 사람이 세례요한이잖아요. 그러면 우리는요? 말로는 뭐 성령 받았다, 코스프레 하는데 자꾸 성령의 개념 가지고 자아를 살찌우려고 하지 마세요. 인위적으로 키우려고 하지 마세요.

걱정하지 마시고요. 가만 있으면 세상 마귀와 세상사람들이 찾아와서 우리의 자아와 주체를 사정없이 깎아내릴 겁니다.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왜냐? 이 잘난 내가 천국 열쇠를 가리면 안 되잖아요. 이 잘난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유월절 어린양의 그 조건과 요소를 가리면 안 되잖아요.

하나님은 마귀를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내 자랑 못하게 만들고 내 의를 내세우지 못하게 하시는 그 여러분, 여러분이 바로 성령 받은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인위적으로 성도 되려고 하는 것도 실패고 인위적으로 천국 가고자 하는 것도 그게 에돔인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주여, 가만 있어도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이상한 존재로 보는 이것조차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인 것을 이제는 흔쾌히 수용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