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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오바댜 1:12-14 / 특수한 죽음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오바댜

오바댜 1:12-14 / 특수한 죽음

정인순 2021. 6. 3. 08:55

음성 동영상 Youtube

 

특수한 죽음 

 

이근호
2021년 6월 2일              

 

본문 말씀: 오바댜 1:12-14


(1:12) 네가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할 것이 아니며 유다 자손의 패망하는 날에 기뻐할 것이 아니며 그 고난의 날에 네가 입을 크게 벌릴 것이 아니라

(1:13) 내 백성이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성문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고난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재물에 손을 대지 않을 것이며

(1:14) 사거리에 서서 그 도망하는 자를 막지 않을 것이며 고난의 날에 그 남은 자를 대적에게 붙이지 않을 것이니라

야곱의 후손의 나라인 이스라엘과 에서의 후손의 나라인 에돔 나라의 차이성을 계속 선지자는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철두철미한 편애가 그대로 담겨있는 내용입니다. 다른 민족들이 약탈당하는 것은 마땅하지만 이스라엘이 약탈당하는 것은 가만두지 않겠다는 겁니다. 왜 이스라엘 민족만은 약탈당하지 않아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만 신경쓰시는 이유는, 놀랍게도 ‘타국에 의해 약탈당하도록 방치하신다’는 점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약탈을 당하지 말아야 할 민족이라면 아예 약탈 안 당하도록 하시는 것은 그 관심사에 적절한 하나님의 조치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들의 상식을 거부하십니다.

도리어 약탈을 당하게 하므로서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을 구현하십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 것을 지키는 것으로 자기다움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이방민족이든 이스라엘이든 모두다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에게 마음에 드는 자기 인생사를 ‘운명’이라고 부르고 싶은 겁니다.

그러나 그 운명은 어디까지나 사적인 운명입니다. 거짓된 운명입니다. 인간들은 은밀하게 비밀을 갖고 있지만 그 비밀은 본인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운명이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그 운명과 자신의 일생을 일치시키려고 그토록 애를 쓰지만 결국 실패로 끝납니다. 그래서 자기 인생에 불만인 겁니다.

이 ‘운명’을 성경에서는 ‘언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거론하시는 것은 모든 이야기를 시작점부터 시작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되면 운명, 혹은 언약이란 인간이 감당할 수 없고 손댈 수없고 다룰 수 없는 것이 됩니다. 이 사실을 인간들은 모르기 때문에 일치성에 계속 실패합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것은 이스라엘 그들이 자신의 이스라엘을 지켜보기 위해 관여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운명이라는 것에 관여하는 것은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나를 위한 나의 운명이고 싶어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이스라엘은 그 안에 ‘죽음을 당한 어린양’의 취지가 담겨있습니다.

이 취지가 곧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있다는 증표입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이스라엘 안에서 ‘죽으시는 하나님’이 들어와 계시는 겁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참된 이스라엘이 되려면 이 ‘하나님의 모습’과 같아야 합니다. 그것은 곧 ‘나의 것은 모두 다 타인에게 빼앗겨야 할 타인의 것’이 되는 겁니다.

야곱은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철저하게 자기 것을 유지했습니다.(창 32장) 그러나 정작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야곱의 가진 것’이 아니라 ‘야곱의 죽음’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다 죽습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죽음’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속으로 찾아들어온 언약은 ‘일반적인 죽음’이 아니라 ‘특수한 죽음’입니다.

죽음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부활과 통하는 죽음이 있습니다. 이 죽음은 언약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반면에 ‘일반적인 죽음’이 있습니다. 이 ‘일반적 죽음’은 영원한 저주와 관련있는 죽음입니다. 이스라엘이 에돔 및 여타의 민족과 다른 점은, 이스라엘 속에서 ‘대신 죽으심’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이 ‘대신 죽으심’은 영원한 고마움을 제공하시는 분의 일이십니다. 세상사람들의 일상적인 생활 가운데 일시적으로 고마운 분들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영원한 고마움’이 되려면 일체 나는 ‘영원한 죽는 자’기 될 경우 뿐입니다. 그래서 ‘대신 죽으심의 영원함’이 계속 유지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후손, 즉 이스라엘은 일반적인 죽음이 아니라 ‘특수한 죽음’에 참여하도록 언약을 부여받은 겁니다. 이 특수한 죽음은 야곱에서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는 절차를 그대로 거쳐야 합니다. 즉 ‘나의 것’이 몽땅 다 달아나고 오직 ‘나’ 안에 ‘나의 죽음’만 있어야 합니다. 이 ‘언약적 죽음’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예수님께서 품으신 바로 그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몽땅 다 빼앗기기 위해 오셨습니다. 심지어 마지막으로 걸쳤던 옷까지 로마 군인들에게 빼앗겼고 목숨도 빼앗겼습니다. 반면에 에돔 및 세상 나라들은 ‘안 빼앗기기’ 위해 삽니다. ‘자신의 것’을 유지하는 것은 마음에 드는 운명을 지키고 싶어합니다. 그 예가 마태복음 19:22에 나옵니다.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이 부자 청년은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자기 것을 잃을 생각이 없어 떠났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것은 더 이상 나의 것이 용납될 수 없음을 알았던 겁니다. 그는 죽기가 싫었습니다. 망하기도 싫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마음에 드는 운명을 자기가 유지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는 평생을 자기 인생에 자신이 관여했습니다. ‘나의 것’이 유지되면서도 영생과 연결짓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언약적 방식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본인들이 이스라엘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들 것으로 소유화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에 친히 관여하십니다. 자진해서 자기 것이 다 잃고 죽음에 이르는 것을 시도하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언약의 주인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언약 수행을 위해 자기 백성을 제거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즉 야곱은 언약 안에서 ‘없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참된 이스라엘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에돔과 이방민족을 통해서 야곱의 모든 것들이 뜯겨나가도록 조치하신 겁니다. 성도에게 있어 모든 것은 나의 것이 아니라 타인의 것입니다. 언약 안에서 ‘우리 자신의 죽음’만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주체와 함께 한 특수한 죽음’입니다.

이처럼 성도의 운명은 성도 자신이 채워나가거나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언약에 의해서 조성됩니다. 이를 위해 멸망당한 에돔이나 이방민족들이 있는 겁니다. 그들에게는 ‘언약’이 없어 오로지 평생 자신의 인생을 자기 손으로 꾸려나가다가 결국 영원한 저주로 빠져버립니다. 부활의 언약과 연결됨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우리의 일생을 다루지 않게 하옵소서. 오직 주님의 죽으심만 드러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