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오바댜 1:15-16 / 벌하시는 하나님 본문
벌하시는 하나님
이근호
2021년 6월 9일
본문 말씀: 오바댜 1:15-16
(1:15) 여호와의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웠나니 너의 행한 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너의 행한 것이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1:16) 너희가 내 성산에서 마신 것 같이 만국인이 항상 마시리니 곧 마시고 삼켜서 본래 없던 것 같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냉정하게 인간을 상대로 벌하신다는 것이 하나님 본래의 이미지하고는 안 맞다는 느낌이 들 겁니다. 때릴 만한 해도 안 때리시고 용서 장치가 가동시키시는 것이 ‘자비의 하나님상’에 부합된다고 여길 겁니다. 그런데 과연 인간이 하나님에게 자비를 요청할 만한 자격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괜히 인간들의 욕심에 하나님마저 인간들의 변개하려 듭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만국을 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벌내리시는 하나님을 인간들이 말릴 생각을 하지 말하야 합니다. 하나님의 하나님다움을 위해 필히 하나님께서는 쉬지 않고 벌하셔야 합니다.
우리 인간들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왜 ‘벌하시는 기능을 해야 하느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벌하실만한 죄가 어떤 식으로 만들어지는 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의로운 존재로 부각되고 싶어서 자신들이 할 수 있고 짐작할 수 있는 그런 의로움을 기준으로 죄와 의를 나누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죄와 의의 분류는 늘 상대적입니다. 일단 자신을 무조건 의로운 존재라고 간주하고 자신보다 덜 윤리적인 자들의 행동을 죄라고 규정하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자신보다 더 윤리적으로 도덕적인 모습을 보이면 그것을 의롭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이런 인식으로 하나님을 최고의 의롭고 착하고 훌륭한 분으로 여기서 신봉합니다.
하지만 이런 인간들의 죄관의 한계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완전히 드러났습니다. 도리어 그런 상대적 윤리관에서 나온 의가 악마가 심어놓은 죄 그 자체였던 겁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에 의한 재판은 단순히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그 당시 모든 인간들의 합치된 견해의 집대성이었습니다.
즉 이 세상은 악마가 심어놓은 잘못된 죄관에 준해서 통용되고 있었던 겁니다. 그 결과가 바로 예수님을 처형해야 마땅한 자로 단죄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이런 인간들을 벌하십니다. 윤리와 도덕적인 바탕에서 나오는 죄관이 아닙니다. 진정 하나님의 벌하시게 되는 죄를 알려면 이 윤리 시스템에서 옮기는 것이 절실합니다.
하나님께서 벌하시는 죄는, 장자되시는 분을 건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장자의 위치를 가볍게 여긴 야곱을 미워하는 에서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벌받을 모델이 됩니다. 이것이 ‘언약 시스템’입니다. ‘언약의 앱’을 우리 마음에 깔아야 합니다. 앱이란 application의 준말로서 컴퓨터의 운영 체제에서 실행되는 모든 응용 소프트웨어를 말합니다.
곧 기존 인간 세계가 알고 있는 판과 전혀 다른 판이 되어야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벌과 연계된 죄를 압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대행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실행되는 그 중심에 있는 인물입니다. 창세기 27:29에 보면,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저주와 축복은 개별적으로 얼마나 착실하고 휼륭하고 성실하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대행자에게 일어나는 일을 하나님의 일로 간주하느냐 여부에 달려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나름대로 죄와 의를 구별할 줄 안다고 하면서 그들의 관점으로 오해하고 핍박을 가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필히 두 이질적인 판이 충돌하게끔 세상을 다루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벌받는 자들은 하나님의 대행자를 건드리므로서 하나님의 복수를 받는 식으로 저주받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복수극입니다. 하나님 보시에 정당하게 죽임을 당한 자만이 정당한 복수를 할 수가 있는 겁니다.
불신 세계에 의해서 행해지는 폭력은 하나님편에 선 쪽의 학대로 이어지는 것이 민수기 22:25-28에 나옵니다.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몸을 담에 대고 발람의 발을 그 담에 비비어 상하게 하매 발람이 다시 채찍질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더 나아가서 좌우로 피할 데 없는 좁은 곳에 선지라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발람의 밑에 엎드리니 발람이 노하여 자기 지팡이로 나귀를 때리는 지라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뇨” 여기에 등장하는 나귀는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등장합니다. 이것은 발람 선지자가 학대한 겁니다.
또한 여호수아 2:18에 보면,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내리운 창에 이 붉은 줄을 내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비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고 되어 있습니다. 기생 라합의 온 가족은 ‘붉은 줄’ 그 하나에 다 쏠려 있습니다. 정탐꾼과 기생 가정을 학대한 바가 되는 여리고성은 사정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게 됩니다.
이러한 언약시스템 앱을 어떻게 깔고 들어설 수가 있을까요? 여기에 비밀번호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이름’입니다. 주술처럼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그 언약 안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기존에 ‘인간의 이름’으로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기에 이 이름은 ‘주님의 이름’에 의해서 같이 이 세상에서 ‘죽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즉 지금껏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내의 그 어떠한 태도와 말씀와 행동과 발언도 새로운 언약 시스템에 전혀 개입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주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동안 성도는 성령님에 의해서 철저하게 자신의 가치가 무참히 짓밝혀야 합니다. 즉 내가 망해도 상관없습니다. 구원은 주님의 이름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공연히 나의 가치를 주장하다가 주님의 가치가 방해받고 훼손되면 아니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것은 참으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극한’입니다. 십자가 자체가 이 극한을 넘어와야 합니다. 무엇이 복이고 무엇이 저주가 되는가를 극한을 넘어서서 발견되는 겁니다. 이 극한 두려워서 사람들은 중도에 우왕좌왕하면서 감보듯이 십자가 앞에서 주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과 함께 사는 성도는 더 이상 후회할 그 어떤 조건도 제거당한 상태입니다. 따라서 늘 모든 일에 감사하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반면에 야곱을 미워한 에돔과 그 후손들은, 그동안 자신들을 자랑할 무기같은 것이 도리어 평생 곱씹어 후회하게 하는 고문도구가 됩니다. 이처럼 성도는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삽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축복과 저주가 십자가로 확정된 판을 즐거워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6강-오바댜 1장 15-16절(벌하시는 하나님)21060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오바댜 1장 15-16절입니다.
오바댜 1:15-16
“여호와의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왔나니 너의 행한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너의 행한 것이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너희가 내 성산에서 마신 것 같이 만국인이 항상 마시리니 곧 마시고 삼켜서 본래 없던 것 같이 되리라.”
하나님의 예언입니다. 변동사항이 있을 리가 없지요. 그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를 소개하시는데 어떤 분이냐 하면 만국을 벌하시는 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하나님답게, 주님이 주님답게 벌하시는 데 있어서 우리가 개입하지 맙시다. 관여하지 맙시다. 벌 내리지 않는 하나님은 그것은 하나님도 아니고 주님도 아니에요.
그런데 사람이 자기 편한 것만 생각하고 자기 행복만 추구하다 보면 하나님이 원래부터 벌을 내리셔야만 하는, 벌 내리시는 일을 하는 분이라는 것을 우리가 도리어 의아해 여길 때가 있어요. 하나님에 대해서, 주님에 대해서 좋게 생각하다 보니 이런 성경 말씀 딱 보면서, 만국을 벌한다. “너 좀 맞아야 돼.” 그런 뜻이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놀라지요. “주님, 결국 그런 분이셨어요?” 이러고 있다고요.
“너 몰랐어? 내가 만국을 벌하는 일을 해야 될 분인 줄 네가 몰랐던 거야?” 나는 하나님 앞에서 맞아야 되고 주님은 저를 때려야 된다는 생각을 왜 진즉 못했느냐, 그 말입니다. 엉터리, 잘못된 주님에 대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던 거예요. 때리시는 분이 때리는 일을 하는데 거기에 왜 우리 인간이 건방지게 토를 다십니까? 토 달 수가 없어요.
만약에 때리지 마세요, 라고 한다고 안 때려 버리면 그것은 전혀 주님답지를 못한 거예요. 주님의 일에 어줍잖게 방해하지 마세요. 패시는 주님에 대해서 맘껏 패시는 그 일을 하시도록 우리가 찬양하면 되는 겁니다. 때리시는 하나님, 때릴 때 솜방망이로 떼치! 이 정도가 아니에요. 때리면 괴로운 겁니다. 아픈 겁니다.
하나님께서 만국을 벌할 때는 아프라고 때리고 벌하기 위해서 때리는 겁니다. 처벌하는 겁니다. 단순히 목숨 앗아가는 정도가 아니에요. 영원히 하나님은 너를 때릴 수 있는 권한이 있는 분이라는 것을 각인시키기 위해서 그것도 영원히 각인시키기 위해서 영원히 형벌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준비한 저주입니다.
저주가 저주답게 실행하는데 있어서 거기에 대해서 감히 주님이 하시는 거룩한 일에 불평이나 불만이나 주님에 대해서 그런 도발적인 행동은 우리는 하지 않아야 돼요. 우리 자신을 다시 한번 돌아봐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께서 벌 주실 때에, 그래서 매를 맞을 때에 나쁜 짓을 했기에 때리신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성경을 너무 모르는 거예요.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쁜 짓을 해서 때리는 게 아니에요.
나쁜 짓 해서 때린다는 것, 이것은 인간과 인간들 사이에 상대적으로 자기가 너보다 착하니까 너를 때린다는, 즉 상대적 윤리성, 상대적 도덕성으로 본인이 우수하다고 여기는 자가 상대적으로 도덕적 윤리적으로 못한 자를 때릴 권한이 있다고 여기는 이 인간세계에서 통용되는 잘못된 겁니다.
인간세계에서 죄라는 것은 상대적이에요. 저 사람보다 좀 못하면 저 사람은 죄인 되고 나는 의인 되어버리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는. 이런 도덕과 인간사회에서 윤리적인 시스템이 가동되면서 나오는 이 죄의 개념은 진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영원히 때리시고 벌하시는 그 죄의 개념과 연결이 안 돼요. 시스템이 다르기 때문에.
인간들이 아는 죄의 개념은 전혀 하나님의 벌 내리시는 것과 매치가 안 됩니다. 만나지를 못해요. 지금도 제가 기억합니다만 1980년 5월 18일 광주사태 일어났을 때에 그 때 민중신학 하는 사람들이 광주사람들 편들면서 이랬어요.
“하나님은 뭐하시노? 하나님은 이렇게 정의로운 사람이 정의를 외칠 때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저 광주사람들 학살하는 저 나쁜 인간들, 전 두환 일당부터 저 나쁜 인간들은 하나님이 벼락이라도 쳐서 사형할 것도 없이 그냥 안방에 있다가 벼락 맞아 죽어야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정의로운 하나님인데 뭐하시노?” 이렇게 한 거예요. 특히 천주교쪽에서 그런 이야기가 많이 나왔어요.
그래서 나오는 민중 노래 중 하나가 하나님은 혀 잘린 하나님이라, 귀머거리 하나님이라. 정의가 살아나야 될 이 상황에서 하나님은 아무 대책도 없고 조치도 취하지 않으니까 그게 무슨 하나님이냐는 겁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이 때리시는 벌 내리시고 저주하시는, 심판하시는 그 죄라는 것에 대해서 전혀 아는 게 없어요.
그것은 시스템이 다르기 때문에 판이 달라요 판이. 하나님이 때리시는 벌은 복음적 시스템이 가동될 때 그때 비 복음적이기 때문에 때리시는 벌이 바로 지옥 가는 저주스러운 벌입니다. 하나님의 죄는 복음과 관련한 죄만 때리세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하는 거예요. 너는 남을 돌로 칠 자격도 못 된다. 네가 생각하는 그 죄와 의의 시스템 자체가 그게 악한 거예요. 악한 자가 악한 자를 친다는 것은 말도 안 되지요.
선악을 아는 지식을 아는 악한 자가 선악 지식을 아는 악한 자를 처벌할 수 있는 어떤 자격이나 권한을 하나님이 주신 적이 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정당성을 알려면 윤리적 시스템에서 어디로 절실하게 이동을 해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죄를 제대로 찾아내고 그 죄에 대해서 제대로 벌을 내리시는 그 복음적 시스템으로 이동할 필요가 있어요.
그 이동하는 방법은 앱을 까는 거예요. 어떤 앱을 까느냐? 언약적 앱을 깔아버립니다. 우리 마음에다. 언약적 앱은 뭐냐? 야곱과 에서 사이에서 나왔던 그 앱을 까는 겁니다. 야곱과 에서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첫째는 앱을 깔고요. 두 번째로 비밀번호를 넣고요. 세 번째는 아담의 이름이 주의 이름으로 바뀌면 돼요. 그러면 구원받습니다. 참 쉽죠 잉.
그러니까 선악 체제를 뜯어내는 거예요. 선악 체제 그 시스템을 뜯어내고 언약적 시스템 그 앱을 깔아요. 연세 많은 분들은 앱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시겠지요. 그것은 애비하고 아무 상관 없습니다. 그냥 바탕, 새로운 체제, 그렇게 보시면 되지요.
야곱과 에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창세기 27장 29절에 야곱에게 복을 주는데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그다음이 중요해요.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라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작심을 하신 거예요.
너라고, 야곱이라는 사람을 너라고 하면서 자기의 대행자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이 땅에 주께서 친히 관리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앱은 새로운 시스템, 새로운 언약체제, 새로운 언약구조는 아브라함 때는 아브라함 중심, 이삭 때는 이삭 중심, 그다음에는 야곱 중심으로 돌아가는데 어떤 것이 죄가 되고 어떤 것이 의가 되고 어떤 것이 저주가 되고 어떤 것이 복이 되느냐 하면, 야곱에게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받아들이면 그 사람은 복을 받아요.
야곱은 특정 인간입니다. 우리하고 동일한 인간이 아니고 특정 인간, 육신으로는 같은 인간인데 하나님의 특별한 언약적 사건이 반복되는 그 특정 인간에게 일어난 그 일에 대해서 그것이 살아계신 진짜 하나님의 뜻인 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그걸 죄라고 그 앱에서 규정이 되어버리고, 그 시스템에서 규정이 되고 그 죄에 대해서는 영원한 저주를 받고 형벌을 받는 그런 언약적 체제가 이미 가동되었습니다. 작동되었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아브라함의 경우도 마찬가지에요.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받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를 받는다는 말은 아브라함의 존재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그게 죄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이미 선악 시스템, 악마와 더불어서 악마가 왕으로 통치하는 이 선악 체제에서 자기가 나름대로 양심껏 선하다고 생각해서 상대적으로 자기보다 윤리 도덕적으로 못하다 하면 그걸 죄라고 규정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죄라고 규정하는 것이 본인의 취미 생활처럼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그런 선악 체제 사고방식, 비 언약적이지요, 그 선악 체제 사고방식이 결국 무엇과 마주치게 되어 있느냐 하면요, 하나님이 벌써 가동 시킨 언약시스템 언약의 앱과 기존의 선악과에 있는 악마적인 앱이 서로 언젠가는 정면 부딪히게 되고 만나도록 주께서는 세상을 그렇게 펼쳐나가시는 겁니다.
아주 쉽게 말해서요. 야곱을 건드렸기 때문에 영원히 지옥 가는 거예요. 야곱을 건드렸기 때문에. 건들지 말아야 할 자를 건드린 거예요. 그런데 이 세상 윤리 도덕적 체계 속에서 자기 의를 따로 만들고자 한 사람은 결국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야곱에 나타난 언약적 복음을 건드리지 않을 수가 없어요. 건드리게 되어 있어요.
전도는 주님 소관입니다. 가만있어도 전도 아닌 순간이 이 세상에 한순간도 없어요. 꼭 전도를 해야 전도가 아니라 지금도 일 분 일 초 쉬지도 않고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서 지금 전도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넓은 바다가 한시도 조용한 적이 없듯이 전도가 일어나요. 서로 판이 달라요, 판이. plate, 판이 달라요. 하나는 언약적이고 하나는 비언약적이고, 판이 다르다고요.
그런데 야곱을 축복하는 자는 축복을 받고 야곱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받는다, 라는 이 언약적인 문장만 툭 던지는 것이 아니고요, 원칙만 던진 것이 아니고 거기에 대한 실제적인 사례, 실제로 이 땅에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를 야곱 중심에서 하나님께서 실례를, 실제 예를 보여준 겁니다. 그게 누구냐 하면, 바로 오바댜의 주제가 되는 에돔이에요. 에서입니다.
에서가 야곱의 장자 됨을 건드린 겁니다. 그러니까 에서가 저주받는 이유는요, 그 장자 요소가 없는 자가 감히 장자 요소가 있는 자를 건드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신약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을 건드렸기 때문에 저주받는 거예요. 그래서 언약적 앱에서는 심판을 내리신다, 벌 주신다, 저주 받는다는 말은 뭐냐 하면, 정당한 피해를 입은 사람, 다시 말하면 정당한 죽음을 가진 자를 등장시켜서 정당한 죽은 자에게는 정당한 복수를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거예요.
심판은 뭐냐? 정당하게 억울하게 죽으신 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복수극 그게 바로 지옥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을 굳이 안 찾아도 다 아는데 제가 찾아보겠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원수 관계를 유발하기 위해서 원수라는 그 상태를 절대로 주께서 지워버리지 않습니다. 원수 되는 관계가 계속 살아 있도록 조치를 해요. 원수라는 게 살아 있어 줘야, 다시 말해서 칼날은 날카로운 것은 양쪽 면이 있을 때 그 사이가 날카롭잖아요. 서로 이질적이고 대치가 되는 양날을 유지하는 것은 그 가운데 원수라는 날카로운 그 좁은 표면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원수가 되어야 하나님의 심판이 정당화되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이 원수를 지옥 보내는데 그러면 하나님이 원수하고 영원히 천국 가서 살까요? 그럴 수는 없거든요. 신약성경에 하나님의 원수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 18절에 보면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신약시대에서의 최종적인 원수의 모습은 “네가 원수다. 너 지옥 간다. 하나님께서 너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너를 영원히 심판할 거야.”라는 그 기준점, 그 근거는 뭐냐? 무엇무엇의 원수였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십자가의 원수였다는 거예요. 십자가의 원수. 평생을 간음한적 없고 평생을 이웃 돌보고 평생을 구제하고 백날 해도 그것은 윤리 도덕적인, 저희들이 스스로 자기들 정당화시키는 시스템이고요. 그래서 앱이 달라요.
시스템 그 구조가 달라요. 이쪽 언약적 구조에서는 뭐냐? 아무리 자진해서 착하고 훌륭하고 인품이 대단해도 십자가 모르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영원히 지옥 가야 될 저주 받아야 될 사람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건들지 말아야 될 자를 건드려서 그렇게 피해받던 자의 복수극으로 세상은 마감이 되어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뱀은 예수님의 발꿈치를 물었다 되어 있지요. 뱀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물었다 되어 있지요. 문 정도가 아닙니다. 아예 예수님을 죽여버렸어요. 그런데 죽었던 그 분이 사흘 만에 살아 남으로 어디에 해당되느냐 하면, “네가 기껏 까불어봐야 내 머리에서 가장 끝 지점인 발꿈치 깨문 것 밖에 안돼. 너는 내 머리를 다치게 한 적이 없어. 이제는 내 차례야.”
그래서 여자의 후손 되시는 주님께서 이제는 뱀의 발꿈치를 때리는 게 아니에요. 뱀의 머리를 쳐버립니다. 결정적이지요. 이게 복수에요. 복수차원에서 하나님께서는 지옥과 천국을 만드신 겁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안 되었다고 한다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그 배후에 있는 악마는 자기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재판했던 그 재판이 참으로 정당하고 의로운 것이라고 자부했을 거예요.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처벌은 한 개인의 감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민의를, 민중의 뜻을,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의 뜻을 최대한 반영하고 존중한 인간의 입장에서 가장 의로운 결과가 예수님은 처벌해야 마땅하다는 그런 식으로 모든 것이 결론이 난 거예요.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여러분도 생각해 보세요. 이 세상에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고 한국, 미국, 전 세계 돌아가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회 이런 것을 보세요.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고 한번 보세요. 장로 뽑을 때는 제직회 3분의 2로 하기로 결정했다 합시다. 이게 무척이나 정당해 보이지요.
3분의 2로 해야 되는데 만약 두 표가 모자라서 장로 못 된다 싶으니까 두 표 정도는 사기를 치는 겁니다. 1인당 1표인데 어떤 사람이 표 세 장을 냈다 했을 때 그래 가지고 장로가 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고 그 장로를 어떻게 보겠습니까? 불의한 장로로 보겠지요.
불의한 장로. 어떻게 장로가 되어서 얍삽한 사기적인 술수를 쓰느냐. 아마 그 장로는 장로 되나 안되나 하나님께서 분명히 지옥에 넣어줄 걸, 그렇게 생각하겠지요. 주님은 “네가 지옥 간다 네가!” 네가, 3분의 2를 중요시 한 네가 지옥 가요 네가. 예수님 부활이 없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서 주님의 복수가 없다고 한다면 인간은 스스로 자기가 재판관이 돼요. 얼마나 이 교회가 위험한 곳인가를 아시겠지요.
기생라합이 자기 조국을 배신했습니다. 기생라합이 자기 조국 배신할 때 기생라합의 입장에서 뭐만 기대를 하느냐 하면, 여호수아 2장 18절에 보면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내리운 창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비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기생 라합이 정탐꾼을 살려줬어요. 정탐꾼을 왜 살려줬느냐 하면, 그 여리고성에 있는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살해하려고, 잡아서 죽이려고 체포하려고 설쳤거든요. 그런데 이것이 여리고성 입장에서는 당연한 조치인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건들지 말아야 할 자를 건드린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 정탐꾼에 대한 그들의 압박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복수에 나설 수밖에 없어요.
건들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으니까요. 기생 라합은 그 붉은 줄, 그 붉은 줄만 기대하는 겁니다. 그 붉은 줄이 하나님께서 축복 될 자와 저주 될 자를 가려내는 기준으로 이미 자기에게주어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좀더 알기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정탐꾼이 왔을 때 기생라합이 정탐꾼 편을 들었잖아요. 그러면 기생라합은 미리 앞당겨서 여리고에 있던 이스라엘사람의 일부라고 보시면 돼요. 이스라엘의 대행자로 보시면 된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그 여리고에 사는 사람들은 기생라합을 힘들게 했고 정탐꾼도 힘들게 했거든요.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복수는 하나님 입장에서, 하나님의 앱이 깔린 언약 입장에서는 정당한 거예요. 그리고 그것을 괴롭게 한 것은 죄가 되고 그 죄에 대해서는 처벌이 주어지는 겁니다. 만국을 처벌할 때 처벌이 언약을 기준해서 처벌하는 거예요.
그 비슷한 예가 민수기 22장 28절에 보면 나옵니다. 거기에 선지자 이름이 나오는데 발람 선지자, 이 발람 선지자가 나귀를 타고 가는데 포도원 사이 좁은 길로 가는데 나귀가 가지를 않는 거예요. 이랴, 이랴, 해도 가지를 않아요. 채찍으로 때리면서 억지로 가게 하려 하니까 좌우에 길이 좁아서 피할 데가 없어진 겁니다.
그러니까 이 발람이 한번 때려서 안 되어서 세 번씩이나 때립니다. 인간이 노를 발해서 나귀라는 짐승을 때릴 때에 28절에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번을 때리느뇨” 왜 때립니까, 이렇게 된 거예요. 여호와의 대행자를 왜 때립니까, 이렇게 된 거예요.
인간들은 본의 아니게 여호와의 대행자를 때리는 식으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평소에 아무 생각 없이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인간세계에서 부활은 교과서에 안 나옵니다. 부활을 빼놓고 이야기해요. 부활을 빼놓고 이야기하는 그 시스템, 그 판이 결국은 그리스도의 사람을 핍박하고 학대하고 못살게 구는 그러한 상황들을 유발시킵니다.
주님의 대행자를 이 사탄에 속한 자들이 때리는 형국, 이 세상은 그런 식으로 지금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어요. 하나님의 복수는 멈추지 않습니다. 작살 내버립니다. 그래서 만국을 때리는 거예요. 때릴 때 죄 있다고 때리는 겁니다. 그 죄가 뭐냐? 그 죄는 하나님의 대행자를 건드렸다는 겁니다.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주고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하는 그자를 때렸다는 겁니다.
그 때리심은 예수님의 때리심의 그 원칙이 그대로 살아 있는, 엮여 있는 그 앱에 같이 연관되어있는 사람에게만 그 세상의 때림이 하나님의 복수로 이어지는 거예요. 말로만 예수 믿는 사람은 백날 때려도 하나님이 복수 안 해줍니다. 예수님의 그 취지가 계속 연결되어 있는 그런 대행자를 세상 사람이 때릴 때 그들에게는 복수가 주어지는 거예요.
그 하나님의 대행자 또는 주님과 연계되어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로마서 14장 14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과 연계되어 있고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이 땅에 쉽게 말해서 성도로서 살아가는 사람의 특징은 뭐냐?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이게 뭐냐 하면 윤리 도덕에 의한 죄와 죄 아니다, 하는 그 앱 자체 그 시스템 자체에서 이미 거기서 이동해 버린 거예요. 자리를 옮겨버린 거예요. 성도가! 나 네 판에서 안 논다.
제가 언젠가 설교하면서 그런 예를 들었지요. 농구천재 허재가 친구들 앞에서 농구공 가지고 자랑하면서 “야, 게임하러 가자.” 하니까 친구들이 “그래, 게임하러 가자. 야구 하러.” 농구 아무리 잘해도 야구판에서는 못하거든요. 그 게임이 이 땅에서는 윤리 도덕 게임이라면 주님의 게임은 뭐냐 하면, 주님의 십자가의 의를 건드린 자 십자가의 원수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복수를 감행하는 그러한 구조에 성도들이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면 돼요. 그 시스템은 일단 여러분 마음에 언약적 앱을 까세요. 에서와 야곱 사이에서 나온 그 앱,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너를 저주하면 저주받는다는 이것은 세상적이 아니라 새롭게 축복과 저주를 규정하는, 결정짓는 새로운 앱을 까세요. 그렇게 까시고 그다음에 비밀번호를 넣으세요. 그 비밀번호가 뭐냐 하면, 진짜 이건 비밀인데……, 주의 이름입니다. 비밀번호가 주의 이름이에요. 주의 이름을 치는 겁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시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두 번째까지는 굉장히 쉬워 보이는데 세 번째가 어려워요. 왜냐하면 주의 이름 이전에 우리는 이미 자기 이름이 있어요. 아담에 속한 이름이 있다고요. 아담에 속한 이름이 있는 자가 건성건성 주의 이름 불러 봤자 그것은 주의 이름으로 간주를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의 이름은 주의 이름에 부합되는 그 내용이, 실제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살아왔던 그 모든 행적이 주의 이름 안에 담겨 있는 거예요. 기존에 태어난 모든 게 아담입니다. 따라서 아담의 이름에서 주의 이름으로 바뀐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내가 한평생 인간으로 살아오면서 거쳤던 모든 나의 태도와 행동과 말씨와 행위가 일체 하나님의 앱에는 관여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내가 어디서 무얼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전혀 그런 것은 문제 되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태도를 가지고 어떤 어떤 짓을 하든 간에 그것은 윤리 도덕적인 문제지 그것은 주님의 저주나 복을 받는데 전혀 관계없어요. 아무것도 속된 것은 없습니다.
그 이유가 바로 로마서 14장 15, 16절에 나옵니다.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여기서 선한 것이 뭐냐? 네 안에 들어 있는, 네 마음에 깔린 앱이 선한 것인데 그게 무슨 선한 것이냐? 너를 대신해서 주님이 죽었다는 사실, 그게 선한 거예요. 주님의 이름이라는 것은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백성을 위해서 대신 죽으신 거잖아요. 그 죽으심이 바로 주의 이름이에요. 대신 죽었다는 것은 자기 백성과 주님의 만남이 오직 언약적 죽음으로만 이렇게 접속이 된다는 겁니다. 언약적 죽음으로만.
자살한다고 구원받는 것 아니에요. 언약적 죽음으로만. 그것도 산채로. 산채로 언약적 죽음으로만 접속이 돼요. 언약적죽음이기 때문에, 그 언약적 죽음에 주의 이름으로 행했던 언약적죽음이기 때문에 나의 이름이 또는 나의 노력과 성의와 나의 양심과 결심들이 전혀 주의 이름에 접속에 관여될 필요도 없고 관여해서도 안 되고 관여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의 이름의 완성된 것을 누가 갖고 있느냐 하면, 성령께서 그걸 가지시고 일방적으로 택한 백성에게 그걸 집어넣어서 이제는 아담의 이름으로 살지 않고 주의 이름으로, 그것도 산채로, 아직 죽기 전에 살아 있는 채 주의 이름으로 살게 하는 겁니다. 주의 이름으로 살게 하면서 성령께서 이 작업을 깔끔하게 진행 시키기 위해서 성령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내가 내 인생에 관여하는 모든 것을 사정없이 짓밟아버려요.
내가 옛날 하던 선악적인 버릇 있잖아요. 더러운 버릇, 윤리 도덕적인 버릇 있잖아요. 착했으니까 복 받을 거야. 나쁜 짓 했으니까 벌 받을 거야. 이런 더러운 버릇 있잖아요. 국가를 위해서 희생했으니까 하나님 뭐하시노, 귀머거리 하나님이냐. 이런 식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던 아담의 동네, 아담의 후손의 동네, 뱀의 동네에서나 통하는 그것을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그것을 지워버릴 수가 없어요.
성령께서 그것을 무너뜨립니다. 나의 잘남과 나의 의를 무너뜨리는 거예요. 왜? 온전히 주께서 하나님의 대행자가 되게 하신 그 가치를 우리 육신이 방해하기 때문에 그걸 그냥 방치하지 않습니다. 그걸 무너뜨리면서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주의 일을 위하여 오롯이 주의 하신 십자가만이 축복과 저주를 결정짓는다는 사실을 위해서 “너는 이제 망해도 상관없지? 그지?”라고 다가오는 거예요. “너는 망해도 상관없지? 그지?”
그래서 성령이 있는 사람은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 일체 후회할 어떤 조건 자체가 늘 성령에 의해서 제거당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반면에 장자가 없는 사람, 다시 말해서 성령이 없는 사람, 에돔 같은 쪽 그쪽은 뭐냐 하면, 어떤 일을 해도, 뭘 해도, 아무리 성공해도 두고두고 곱씹어 보면 모든 것이 후회로 다가와요.
그러니까 자기가 살아오면서 했던 모든 것은 현재 자기를 심하게 벌 내리고 고문시키는 고문기구로 작동합니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 무기로 사용한 그것이 나를 더욱더 괴롭히는, 나를 더욱 뒤틀리게 만드는, 나를 아프게 만드는 고문 기구로서 계속해서 누적돼서 나타나요. 남의 자식이 애먹입니까, 내 자식이 애먹입니까? 바로 사랑스러웠던 내 자식이 평생에 나를 애먹이잖아요.
자기가 자기를 괴롭히는 것은 평소에 자기가 자랑거리라고 여겼던 것들이 자기를 괴롭히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 받은 사람은 자기 행동, 태도, 말씨, 전혀 관여 못하도록 성령께서 아주 사전에 짓밟아 놓거든요. 후회하고 싶어도 뭐 개뿔 후회할 것이 있어야지요. 후회해서 구원받은 것은 아니거든요. 후회할 조건 자체가 날아가 버린 거예요.
여러분도 혹시 그런 경험 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수십 년 전에 우리나라에서 부흥회가 그렇게 많았어요. 부흥회 한다고 하면 원근 각지에서 10 교회도 넘는 데서 다 오거든요. 부흥회 할 때 부흥강사의 패턴이 있어요. 첫째 날에는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이야기합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다 알아요. 존재하심 그것은 소용없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첫째 날에는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이야기합니다.
둘째 날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이야기해요. 셋째 날에는 그 은혜가 은혜답게 되기 위해서 뭔가 보답을 해야된다는 겁니다. 잘 들어놓으세요. 안 적고들 계신데요. 넷째 날이 하이라이트에요. 그 날이 헌금을 하는 날이거든요. 넷째 날에 그동안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지은 죄를 다 회개하라는 거예요.
그런데 언약적 앱이 깔린 사람은 뭘 회개합니까? 회개할 것이 뭐가 있어요? 없어요. 회개할 것이 없어요. 회개할 것이 굳이 있다면 부흥회 참석한 것이 회개할 거리에요. 회개할 것이 없어요. 그리고 벌써 1년마다 부흥회를 하는데 회개할 것이 없으니까 작년에 회개한 것, 시효가 끝난 것들 이미 회개했던 것이 있잖아요. 그걸 또 끄집어내서 또 회개해요.
부흥사가 회개하라고 하니까 주변에서 랄라라라, 하고 있는데 저 혼자 입 다물고 있으면 안 되잖아요. 컨닝해 가면서 자기도 뭐 회개하는 꼴을 하고 있어야 되니까 작년에 다 회개해서 끝난 이야기를 또 끄집어내는 거예요. 마치 제사 지내는 사람이 문어가 비싸니까 바짝 마른 문어 1년 동안 다시 보관했다가 다시 조상에게 바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회개했지요. 이제는 돈 내도 안 아깝겠지요. “교육관 짓는데 여러분 뭐했습니까? 여러분, 집구석 애들 공부시키는 데 과외비나 썼지 여러분 교회에서는 뭘 했습니까? 세상 교육이 중요합니까, 교회 교육이 중요합니까? 지금 눈 다 감으시고 교육관에 지금 차량이 없는데 마음 가는 사람 손 드세요. 여러분 자식들 영혼 죽이려고 한다면 돈 안 내도 되고 살리려고 한다면 돈 내세요.”
자식에 대한 집착 없는 인간이 어디 있어요? 그걸 공략하는 겁니다. 무사히 성과 얻었고 마지막에 5:5나 3:7로 해서 갈라 먹기 하고요. 다음에는 너 부른다, 해서 거래하고요. 여러분, 후회하고 자기에 대해서 반성한다는 자체가 이것은 그리스도 사람이 아닙니다. 이건 그리스도 사람이 아니에요. 왜 그러냐 하면, 마지막에는 후회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마지막에는 감사가 나오게 되어 있어요. 고맙습니다.
후회해도 소용없고 안 해도 소용없는 나라에 가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반성해도 상관없고 안 해도 상관없는 나라에 이르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내 안에 내가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만약에 내가 후회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해서 내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후회하는 것과 똑같은 짓이에요.
결국 자기가 후회한다는 것은 자기 안에 예수님이 안 계시다는 것을 다 티 내버렸어요. 우리 육신은 계속 살아 있기 때문에 성령이 오게 되면 후회는 아니고 세상을 반복해서 다시 보기가 되는 겁니다. 후회하는 것이 아니고.
다시 말해서 진정 우리가 뭔가 잘못했다는 것은 나라는 인생은 주님이 관리하지 내가 관리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고 잠시 육신적인 생각에 빠져서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착실하게 관리하면 뭐 되는 줄 알았던 그런 세상적인 것이 성령을 통해서 까발려질 때 그것은 성령의 몫이기 때문에 내가 나보고 후회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님께 주님께 하나님께 감사하는 형식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지금이라도 때리고 또 때리고 지옥 불에 보내도 이것은 주께서 마땅히 하실 일인 것을 감사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극단이에요. 정말 극단적인 거예요. 여러분께 제가 성령도 아닌 게 부탁도 할 수 없지만 여러분에게 부탁하는데요. 극단을 넘어오세요. 극단을 넘어오라고요.
극단을 넘어서야 인생을 자기 시작이 무엇이며 끝이 무엇이며 한계가 무엇임을 아는 사람이에요. 십자가라는 극단을 넘어서 오세요. 그러면 나는 이미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 사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극단이 무서워서 우왕좌왕 어슬렁거리면서 중도에 서 가지고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십자가, 아이 무서워라. 나 집에 갈래. 아니 신앙생활 잘해야지.’ 도대체 맨날 왔다 갔다 왔다 갔다 왔다 갔다.
화끈하게 넘어서라는 말이지요. 십자가를 넘어 서버려야 돼요. 그러면 거기서 나는 살아 있지만 이미 나는 산 채로 죽은 자가 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성령께서 그렇게 하셔요. 십자가를 주면서.
끝으로 갈라디아서 5장 10절을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성도, 주님의 그 대행자, 발람의 나귀 같은 존재, 주님이 타시는 나귀 같은 존재를 건드리면 심판을 받는다 했습니다.
따라서 갈라디아서 6장 8절에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복 받았다, 를 좋아하지 마시고 주께서 복 줄 사람에게 복 주고 저주받을 사람에게 저주를 주는, 하나의 이 땅의 대행자로 쓰시는 것에 대해서, 주께서 그렇게 성령의 사람으로 쓰시는 것에 대해서 주께서 마음껏 저를 활용해 달라고 그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극단을 무서워하고 극한을 두려워하는 저희들, 여전히 나다운 나를 챙기려고 온갖 귀찮은 것들을 끌어모았던 그것을 나의 조건으로 삼았던 부질없는 짓들을 했습니다. 다 그것이 저주받을 짓인 것을, 주께 매 맞을 짓인 것을, 벌 받을 짓인 것을, 에돔같은 그러한 판인 것을 이제는 알았사오니 야곱으로서, 주님의 대행자로서 당당하게 늘 주님께 쓰임 받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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