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오바댜 1:17-18 / 방향성 본문
방향성
이근호
2021년 6월 16일
본문 말씀: 오바댜 1:17-18
(1:17) 오직 시온 산에서 피할 자가 있으리니 그 산이 거룩할 것이요 야곱 족속은 자기 기업을 누릴 것이며
(1:18) 야곱 족속은 불이 될 것이요 요셉 족속은 불꽃이 될 것이며 에서 족속은 초개가 될 것이라 그들이 그의 위에 붙어서 그를 사를 것인즉 에서 족속에 남은 자가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니라
보통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 세상을 심판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야곱을 통해서 에돔 민족을 불사르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야곱이 에돔보다 더 후륭해서가 아닙니다. 신명기 9:5에 보면,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시면서 인간 대 인간을 만나게 하시되,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마주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악함을 아는 악한 사람과 자신이 악함을 모르는 악한 사람과 만나게 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하면 오로지 그 누구의 승리가 아니라 주님의 승리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점을 감안해 볼 때, 처음 애굽에서 나왔던 이스라엘은 온전한 이스라엘일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의식이나 그들이 망했으면 하는 에돔이나 여타의 이방민족과 차이점은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방민족의 특징은 홀로 살고 싶어합니다. 이는 모든 판단과 평가와 거기에 따른 심판을 본인들이 내려야 합당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은 자기로 인해 자기가 살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이방민족의 특징이요 망해야 하는 이스라엘의 특징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나 하나님이 자신들을 위해서 있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오늘날 유대사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의 과거 역사 가운데 하나님에게 잘못한 점이 있다고 자부하고 전적으로 회개하면서 과거의 영광을 얻고자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에게 항복한다고 해서 속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다 버린다고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동정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고단한 하루하루 삶을 살다가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속죄받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반성하고 아무리 회개해도 속죄는 되지를 않습니다.
속죄란,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인간이 가진 몸으로 성과를 내어서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인간들이 평소에 자기 몸으로 어떤 약간의 성과를 내겠다고 기대하고 있는 그 자체가 나름대로 세상을 평하고 세상과 하나님을 심판하는 모습을 드러낸 겁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언약과 관련해서 심판하십니다.
이 말은 심판주되시는 분이 인간들이 심판주로 자처하는 그 심판에 의해서 심판을 받게 된 그 상황을 근거로 도로 세상을 심판하는 심판을 하나님께서 감행하십니다. 인간은 한시로 세상과 하나님과 자신을 심판하지 않는 경우가 없습니다. 이것은 그 어떤 경우라도 자신을 잃고 싶은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일찍감치 인간과 인간 사이를 차별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1:7에 보면,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 한 마리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를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나니”고 되어 있습니다.
이 유월절 사건은 밤에 이루어졌습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을 ‘낮의 경치’로 판단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밤의 경치’로 간주하시고 심판에 나섭니다. 모든 인간들의 그들의 실력과 능력과 노력이 잠들고 멈추는 그 시점에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실력보다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데서 살게 하시는 그 언약’을 기능으로 사람들을 구별하십니다.
인간의 능력 이전의 근거로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말은, 아담 이후의 되돌아가는 정도가 아니라 아담을 넘어서서 계시는 바로 그분과 만나는 상황으로 새로운 백성, 새로운 이스라엘이 됩니다. 즉 자신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온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문제삼으시는 것이 아니라 ‘원천’을 아는지를 가지고 따져서 심판하십니다.
왜냐하면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여기서 세상은 아담 이전에 작정되어 있는 언약의 내용이 관심두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시온산’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시온산’은 수직적으로 하나님의 거주지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는 ‘성전’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성전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심판이 매일같이 일어난 곳입니다. 레위기 10:1-2에 보면,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단 불은 그 어떤 경우에도 최측근을 인정하지 않고 거룩함의 엄정함을 그대로 적용시키십니다. 더럽고 추잡은 이 인간들이 제단불 근처에서는 살아가는 것은, 그 인간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성전의 취지가 그대로 살아있다는 조건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에서 범죄한 이스라엘은 이방민족과 같이 ‘자기를 위한 신’으로 여호와를 이해했습니다.
이사야 6:5-7에 보면,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속죄란 하나님의 아들되시는 분의 속죄제사의 취지가 그대로 살아있다는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가능합니다. 따라서 이 속죄의 은혜에 입각해서 보면, 그 어떤 인간도 자신을 부정하고 속죄받을 능력자는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화염방사기로 세상을 심판할 무기가 될 야곱은, 예수님으로부터 속죄받은 자에게만 해당됩니다.
이들은 아무리 세상살이가 피곤하고 힘들어도 제단에서 내려진 속죄가 보이는 쪽으로 시선을 두고 산다는 점에서 방향성이 올바른 쪽입니다. 아버지를 향하여 돌아온 탕자처럼(눅 15:20), 혹은 다시스로 가려다가 도로 니느웨로 방향을 뜬 요나처럼(욘 2:4), 주님께서는 시온산의 성전을 바라보게 합니다. 성도는 그 어떤 경우라고 그 현장에서 십자가의 피를 잊지 않고 생각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성과에 정신 팔리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녹취:오용익
7강-오바댜 1장 17-18절(방향성)21061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오바댜 1장 17-18절입니다.
오바댜 1:17-18
“오직 시온산에서 피할 자가 있으리니 그 산이 거룩할 것이요 야곱 족속은 자기 기업을 누릴 것이며 야곱 족속은 불이 될 것이요 요셉 족속은 불꽃이 될 것이며 에서 족속은 초개가 될 것이라 그들이 그의 위에 붙어서 그를 사를 것인즉 에서 족속에 남은 자가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야곱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될 자가 어떤 사람 어떤 백성이라는 것을, 어떠한 자들이 천국 백성이라는 것을 나타내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몇 가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필연적으로 몇 가지 결과가 도출됩니다. 세상을 향하여 나타납니다. 그것이 구원될 백성들은 시온산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에서 족속, 저주받은 족속은 남은 자가 없지만 야곱 족속은 남은 자가 있습니다. 세 번째로 이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은 쉽게 말해서 화염방사기 같은 역할을 하지요. 이 세상을, 시온산에 피하지 못하고, 시온산까지 올라가지를 못하고 남아 있는 모든 자를 깔끔하게 불로써 정리하는 작업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맡겼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맡겼다. 그렇게 정리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의도적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에 싸움을 붙이시는 분입니다. 싸움을 붙이고 그걸 조절해 나가십니다. 그 싸움은 이 인간세계에서 인간들이 예상하는 어떤 가진 힘과 힘으로 대결하는 그런 싸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밤에 이루어집니다. 밤은 모든 인간이 잠을 자는 그 순간이지요. 노동하지 않고 가진 힘을 쓰지 못하는 그러한 기간이 밤입니다.
출애굽기 11장 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이런 말씀을 내려줬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으리니 여호와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이 땅에서 인간이라고 다 똑같은 인간 아니에요. 애굽사람과 이스라엘 사이를 구별하시는 그 구별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뜻을 그대로 드러내는 하나님, 그게 참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라고 짠, 하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구별하는 거예요. 달리 취급해주시는 겁니다. 이스라엘과 애굽나라.
그것이 밤중에 유월절 밤에 분명히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예요. 18절에 “야곱 족속은 불이 될 것이요” 야곱 족속은 화염방사기가 되어 가지고 저주받은 에돔 그리고 에돔뿐만 아니고 모든 저주받은 민족들을 다 불사르는 하나님의 무기로서 사용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여타민족, 이스라엘과 저주받은 민족을 구별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 된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의 화염방사기 같은 불꽃이 튀는 그런 무기라고 으스댈 수 있겠지요. 그러나 여기 나오는 야곱이라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다가 하나님으로부터 된 통으로 멸망을 당하고 그다음에 등장한 이스라엘 그 이스라엘을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오바댜 자체가 이스라엘 멸망을 기정사실로 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불로써 세상을 멸망할 때 무기가 되는 이스라엘과 그리고 멸망 당해야 될, 심판 받아야 될 이방 민족과의 차이점을 하나님이 두는데요.
그 차이점은 뭐냐 하면, 에돔족속이나 애굽족속이나 모든 이방 민족은 특징이 혼자 살아요.본인의 인생을 본인이 개척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멸망 당한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에 넣어줄 때 그들은 땅 있겠다, 젖과 꿀이 흐르겠다, 이제부터는 우리 혼자 살겠다, 해서 이방 신을 믿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그렇게 자기 본성대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그냥 방치하지 않고 이방민족화 된 이스라엘을 그냥 멸망시켜 버렸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야곱이, 처음의 이스라엘이 야곱이 오해한 것이 있어요. 뭐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다, 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게 오해였어요. 하나님이 함께 있으니까 날 위해서 함께 있는 줄 알았던 거예요. 교회 나와서 하나님 믿고 예수 믿으면 하나님이 날 위해준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게 구약에서 처음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있으니까 자기들이 착한 사람인 줄 알았어요. 신명기 9장에 보면 분명히 아니라고 했어요. 너희들이 착해서 구원한 것이 아니라고. 너희들은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교만한 백성이라고 했어요.
5, 6절에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다만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너희를 사용할 뿐이지 너희가 훌륭해서 내가 너희들 편에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언급할 때 그걸 되풀이해서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의 싸움을 붙일 때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 싸움 붙이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악함을 아는 자, 자기의 악함을 아는 자와 자기 악함을 모르는 자와 싸우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전쟁을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있으니까 자기들은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는 줄로 알지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직접 화염방사기로 그 죄악의 현장에 뛰어들게 합니다.
뛰어들게 해서 나는 내 죄를 아는 사람과 자기는 같이 악하면서도 악하지 않다고 우기는 쪽과 그 속에 들어가게 해가지고 자기 악함을 알고 망해야 마땅함을 아는 자로 하여금 승리케 해서 인간과 인간의 싸움에서 인간이 승리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승리하도록, 주님에 대한 언약의 효과가 승리하도록 그렇게 조치하시는 겁니다.
인간은 그냥 세상을 관망하는 관상적 존재가 아니고 활동적 존재에요. 하나님께서 수시로 사람의 현장에 투입 시킵니다. 아까도 유월절 이야기를 했지만, 인간들의 삶은 주로 24시간 늘 생각하는 것은 낮의 경치입니다. 해가 떴을 때의 경치를 주로 머릿속에 기억하지요. 그러나 야곱을 만났던 하나님의 사자가 출애굽에서 유월절 날 그때는 낮의 경치가 아니고 밤의 경치였습니다.
모든 인간들이 피곤에 젖어서 주저앉을 때 그때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도움이나 인간의 뜻 고 전혀 상관없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인간을 그저 이용하지 인간이 알아채는 식이 아니라 일관성 있게 하나님의 일은 차질없이 잘 진행될 거예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늘 본문대로 에돔을 치고 멸망시키고 승리한다 할 때에 우리가 이스라엘 편에 서려고 생각하지 마세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처음에 그들이 약속의 땅에 오고 나서도 이방 민족의 속성을,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방성을 그대로 드러낸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도 망했고요. 에돔은 물론이고요. 하나님의 언약이란 이런 겁니다. 우리 인간들은 생각해요. 선한 바닥에 악이 들어왔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악한 이 바닥에 선한 하나님이 오셔서 죽으신 거예요. 하나님은 세상을 그런 식으로 보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혼자 자꾸 자기 자신이 살고자 하는 거예요. 살고자 하는 사람은 이야기를 해보면 티가 나요. 여러분이 복음 안다는 사람하고 이야기를 해보세요. 진짜 살고자 하는 사람 그러니까 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태도가 뭐냐 하면, 하나님을 위해서 살면 하나님이 날 살려준다는 겁니다.
그처럼 오늘날 복음, 복음, 이야기하지만 살고자 하는 사람은 티가 나는데 결국은 복음 가지고 이야기하게 되면 끝에 가면 대화가 안 돼요. 대화해 보면 얼추 처음에는 복음으로 비스무리하게 가는데 나중에 가면 그래서 뭐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고 우리를 살려줬잖아,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한단 말이야. 가만 들어보면 하나님을 자기 시다바리로 여기는 그런 쪽으로 분위기가 쭉쭉 가는 거예요.
여러분이 세상에서 대화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사람과의 만남이나 대화를 할 때 항상 대화가 되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 돈 문제가 깔끔하게 해소되고 난 뒤에 대화가 돼요. 그렇지 않고 돈 문제 해소 안 되면 그다음부터는 대화가 전부 다 꾸미고 위선적입니다.
시집온 며느리들이 대화할 때 시댁 유산문제가 깔끔하게 해결된 상태에서 동서 간 대화는 화기애애합니다. 형님 먼저 아우 먼저. 그런데 유산문제가 깔끔하게 해결이 안 된 상태에서 동서 간 대화는 그냥 간 보기고 탐색적이고 무시무시하지요. 말 한마디 멘트 하나에 뒤에 칼날이 들어 있어요. 혹시 더 가져갈까 싶어서. 아버지 모셨다고 더 가져갈까 싶어서 아주 긴장 상태에 있습니다. 세상에서는요.
왜 그러냐 하면, 자기 사는 게 우선이기 때문에 그래요. 돈 없으면 못살잖아요. 세상 사람들도 돈 문제가 깔끔하게 끝나지 않으면 그 관계는 항상 수상하고 결국 마지막에는 틀어지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세상 살면서 돈 문제가 선행되는 것처럼 그러한 본성을 가지고 평소에 예수님하고 상대하고 하나님하고 상대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이야기했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보면 이스라엘 나라가 이렇게 까불다가 멸망했다. 다른 나라 망하라고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 먼저 자기 민족부터 망하게 했다 했을때에 사람들의 태도가 어떤 태도냐? 현대 유대 사회, 유대교도 마찬가지고 오늘날 교회에서도 그런 현상이 많은데 하나님께 항복하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 잘못됐습니다. 제가 손들고 나옵니다.” 여러분, 손들고 나온다고 속죄가 되는 것이 아니에요. 고달픈 인생을 힘들게 살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해서 속죄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하루 피곤하게 산다고 하나님께 동정받는 게 아니에요. 십자가의미를 알아야 돼요. 십자가의미를!
“살아오면서 나쁜 짓도 했지만 그래도 하나님 섬기려고 무던히 애를 썼습니다. 그러니 한번 봐주세요. 내가 손들고 옵니다. 주께서 부도나고 망하게 했으니까 이제 주의 뜻을 알았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하나님의 속죄가 제공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은 인간을 동정하지 않습니다. 구원의 원칙이 있어요. 하나님의 심판은 망하기 전에 망해야 될 이스라엘이 갖고 있던 그 하나님 자체가 수정돼야 돼요. 망하고 난 뒤에 이스라엘은 자기가 회개했다고 이스라엘 된 것이 아님을 아는 이스라엘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은 심판을 언약대로 한다는 겁니다. 속죄라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어요. 언약이 뭐냐 하면, 아담이라는 최초의 인물 그 인물 너머에 근원적으로 계시는 그분과 만나는 게 언약입니다. 아담이 만났던, 아담이 최초의 인간이니까 만났겠지요, 아담이 만났던 그 하나님의 원칙 그 원칙보다 더 전에 있었던 원칙을 아담 이후에 만나게 하는 그것이 언약이에요. 그 언약이 뭐냐?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살아오면서 내가 얼마나 나쁜 짓을 했느냐, 그런 것을 일체 문제 삼지 않는 거예요. 근원문제에요. 내가 살아오면서 어떤 행동을 했느냐가 아니라, 어떤 나쁜 짓을 했느냐가 아니라 근원문제에요. 근원, 원천 문제에요.
그 원천문제가 뭐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요. 우리는 아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은 유일한 아들이 새롭게, 아들이 만든 새로운 이스라엘, 오늘날 성도들이지요, 교회라는 말은 자체가 좀 거북스러워서, 새로운 백성, 새로운 성도 안에 살아 있는 그 하나님이 인정하는 유일한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에 근거해서 심판이 이루어집니다.
그 심판은 이렇게 이루어져요. 모든 인간은 에돔처럼 홀로 살아요. 내가 내 생각하는 그 순간부터 내가 남을, 하나님과 타인을 심판하는 심판자가 돼요. 예수님께서 심판하는 것은 소위 심판자가 될 수도 없는 이 존재가, 심판자가 진짜 심판주를 죽인 것에 대해서 죽었던 진짜 심판주가 자기를 심판한 심판자들을 심판하는 그 심판이에요. 그 순간부터 심판되는 겁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어디다 집어 넣었는가? 바로 오늘 본문에 야곱이라 되어 있지요. 망해버린 이스라엘 말고 망해버린 이스라엘에서 새로 만들어진 그 이스라엘, 또는 그 야곱, 그 야곱 안에 인류의 근원 되시는 주님이 그 안에 담겨 있어서 제대로 이 세상 모든 민족을 불로써 화염방사기, 하늘의 유황불로써 저주할 충분한 자격을 갖추는 겁니다.
“너희들이 너희 생각하는 순간순간 그것이 너희들이 심판주 역할을 했고 스스로 심판주 노릇을 했다. 그 심판주에게 내가 심판받아서…….” 이 세상에서 심판주가 둘 될 수 없잖아요. 그런데 인간은 자기 생각한다고요. 자기 계획, 자기 스케줄, 목표 다 한다고요. 항상 자기 생각하는 그 순간 우리는 하나님과 이 세상과 타인을 심판하고 판단하고 평가하고 있는 그 순간순간입니다.
우리가 성경 보면서 대충 교회 다닌다고 하고 대충 믿는다고 우긴다고 해서 그냥 믿는 자로 봐주면 안 돼요. 아닌 것은 아닌 거예요. 죽도 밥도 안되는 이런 것은 제가 용납해도 주님이 용납 안 하는데요? 주님만이 유일한 심판주에요. 예수 믿었다고 같이 심판주 합시다, 그런 것 없습니다. 인간이 혼자 산다는 것은 이게 항상 티를 내게 되어 있어요.
예를 들면 유치원 애들이나 초등학교 1학년 애들에게 문제 낼 때 관계있는 것끼리 줄을 그으세요, 그런 것이 있잖아요. 관계라는 말도 어렵다. 알맞은 것에 줄 그으세요, 하잖아요. 밥 먹는데 더울 때 어떻게 하는지 바른 것에 줄을 그으세요. 첫째 선풍기 바람을 쐰다. 두 번째 얼음물에 발 담근다. 세 번째 남에게 분풀이한다. 이렇게 해놓고 줄을 그으세요. 굉장히 쉬운 문제에요. 전혀 어렵지 않지요. 1번과 2번이 정답이지요.
그런데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은 몇 번에 줄 긋는가? 3번에 줄 그어요. 생각은 1번과 2번인데 속마음은 3번에 가 있습니다. ‘내가 너 같은 남자를 만나서 찌질이 궁상, 돈도 없어서 밥 먹을 때 에어컨도 못 틀고 있다. 밥 먹을 때 꼭 이렇게 땀이 나야 돼? 누구 만나서 내 팔자 조져서 하루하루 사는 게 이렇게도 피곤하다. 미치겠다 정말. 저질신체 때문에 내가 쓰러져 퍼지겠다. 이러다 죽겠다.’ 몇 번에 그었지요? 3번.
내 인생 이렇게 만들었다는 탓이 있어요. 인간은 그래요. 그래서 철저한 자기파괴 아니면 신앙으로 인정할 수 없어요. 그냥 파괴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옛날 이스라엘을 박살 내는, 죽은 데서 살리고 없는 데서 있게 하는 새로운 언약 약속이 있어야 돼요. 그 안에는 누가,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있어서 내가 남한테 탓하고 내가 남한테 불평을 늘어놓을 하등의 그런 권한이 없고 오직 모든 권한, 모든 심판, 모든 저주의 권한은 유일하신 신앙인 유일하신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님 뿐인 것, 우리가 그쪽에다 시선을 둬야 됩니다.
한 가지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여대생이 학교 다니면서 자기 맘대로 살면서 놀다가 또 데모도 하다가 제적을 당하게 되니까 집에는 돈도 좀 있으니까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는 말이지요. 유학을 갔다가 학업 마친 후에 다 정리하고 한국에 돌아오는데 한국 다 꼴 보기 싫지만 딱 한 분 내가 대학 다니는 동안 나를 나무라지 않고 나에게 희망을 주고 나의 소질과 능력을 인정해준 그 교수님 보고 싶다.
그런 마음으로 외국 유학 마치고 한국에 온 그 아가씨가 지하철 탔는데 미국에서 살다 보니까 가볍게 목이나 손에 문신을 했다는 말이지요. 미국생활 했으니까. 그런데 맞은 편에 머리가 허연 점잖게 생긴 어떤 노인네가 보니 30대 여자가 문신을 하고 있으니까 오지랖 떨면서 꼰대 지적질을 하려고 일어섰어요.
‘이 아가씨 오늘 당해봐라. 나는 저런 꼴 보고는 못 참는다. 어디서 맨살에 문신을 하고 다니냐?’ 해서 지적질 할 때 그 맞은편에서 자기를 지적질 하는 노인을 보고 그 아가씨가 왈칵 울음부터 먼저 터뜨린 거예요. 왜냐하면 그렇게 보고 싶었던 자기가 소망했던 그 스승이 바로 그분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그 아가씨는 근원이 보고 싶은 거예요. 내가 이 땅에 살면서 어떻게 무엇을 했느냐 하는 것은 하나도 중요한 것이 아니고 도대체 나는 왜 이 땅에 태어나야 하는가, 그 원천, 근원 되는 것 그것만 만약에 만나고 발견했으면 우리는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새로운 이스라엘이고 하나님의 백성이고 세상을 심판할 수 있는 하나님이 무기가 되는 겁니다.
스승님 만나고 왈칵 울음을 터뜨릴 때 그 머리 허연 노인네가, 오지랖 넓은 노인네가 거기 그 분위기에서 나무라겠습니까? 이 사람이 왜 우냐, 하는 거예요. “저 모르겠습니까?” “아이고, 네가 갸구나.” 그 다음 부터 문신을 했니 옷차림이 그게 뭐니 그것은 싹 가시는 거예요. 아무것도 남지 않아요. 싹 가시는 거예요. 네가 30대에 뭘 했고 50대에 뭘 했고 70대에 뭘 했는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싹 가시는 거예요.
하나님의 심판은 내가 잘났기 때문에 남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 인생 조져 가지고 책임지라고 심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네 탓이오, 너 때문이라고 손가락질 하는 게 아니에요. 누가 근원을 접했는가? 근원을 알게 되었는가? 그 근원을 하나님이 야곱에다 집어넣은 거예요. 그런데 처음 야곱 처음 이스라엘은 엉망진창이었지요.
그 야곱을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야곱으로 만드는 겁니다. 그것이 17절에 나옵니다. “오직 시온산에서 피할 자” 자, 이 시온산이라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야 되느냐? 어떤 사람이 사는게 참 피곤해요. 피곤하지만 잠언서에 보면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난다는 그 대목을 가지고 버티고 또 버티는데 그러나 우리가 지난 엉망진창인 이스라엘과 새로운 이스라엘의 차이점에서 우리가 유의할 것이 하나 있어요.
기존 이스라엘은 항상 외부를 압제로 봤고 새로운 이스라엘은 항상 이 땅에서 잘 먹고 잘살 것이라는 생각은 그것은 잘못된 거예요. 그러면 뭐가 옳으냐 하면, 하나님께서 기존의 이스라엘을 멸망케 함으로 말미암아 그 속에 택한 자들은 우리가 추구하는 그 하나님을 이용해서 내 행복을 추구하는 자체가 방향이 잘못된 방향이에요. 그 방향, 방향이라는 말을 지금 강조하고 있습니다. 방향이 잘못된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새로운 야곱에게 준 복이 뭐냐 하면, 그쪽이 옳은 방향이 아니고, 그것은 잘못된 방향이고 이것이 옳은 방향이라고 방향을 제공하는 그 자체가 복이 되는 겁니다. 그 방향에 대해서 누가복음 15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게 탕자 비유에요. 그리고 구약에서의 방향 문제가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은 요나입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야 되는데 반대 방향 다시스로 가거든요. 하나님께서는 그 방향을 급선회, 꺾기 위해서 고래까지 보냈습니다. 고래까지 보내고 난 뒤에 요나는 어떤 식으로 방향을 잡았느냐? 요나 2장에 나옵니다. 4절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찌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나이다. 오늘 본문 같으면 시온산을 바라보겠나이다. 그렇게 돼요. 옳은 방향이라 하는 것은 시온산까지 몇 킬로 남았느냐, 아직 멀었느냐, 혹은 가까운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시온산 쪽으로, 바로 시온산 그쪽으로 시선이 가 있도록 해주는 게 이게 복이에요. 시온산!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야곱이……, 제가 화염방사기라고 했는데 같은 말이에요, 오늘 본문 오바댜 1장 17절에 “야곱 족속은 불이 될 것이요 요셉 족속은 불꽃이 될 것이며” 그리고 에서 족속은 초개가 될 것이라.” 에서족속은 완전히 불살라버린다. 초개같이 불사를 것이다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러면 시온산에서 뭐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성전이 있고요, 그 성전에서 뭐가 나오느냐?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불로 인하여 이 세상의 어떤 자도 그 거룩한 불 앞에서 이길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어요.
레위기 10장 1, 2절 읽어보시면 제 말이 분명히 이해되실 겁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서 그들을 삼켰다 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4장에는 여호와는 소멸하시는 불이라고 되어 있어요. 모세는 떨기나무에 붙은 불을 보고 기겁을 하고 엎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불로써 정화하시는 거예요. 왜? 추접고 더럽기 때문에. 어떤 인간도 추접고 더럽습니다. 불사름을 당해야 마땅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피곤을 이기고 다시 일어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요. 피곤해서 쓰러져도 괜찮아요. 방향이 성전에서 26만 킬로 되어도 괜찮아요. 방향이 성전을 향해서 요나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불로써 세상을 심판해 버리소서. 그게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조치입니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신다면 비록 힘들고 피곤한 하루하루라 할지라도, 그 사람이 거기서 쓰러진다 할지라도 그 사람은 중요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야곱입니다. 하나님의 무기가 된 야곱이에요.
나답과 아비후는 성전에서 얼마나 가까웠습니까? 몇 미터 안되는 곳에 성전이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명하시지 않은 다른 향불을 가지고 향단에 불을 지폈거든요. 그 이유에 대해서, 왜 그런 짓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레위기 10장 9절에 보면 “너나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너희 사망을 면하라.”라고 합니다.
이런 새로운 조항이 있는 걸로 봐서 나답과 아비후가 평소에 늘 하던 당번을 서면서 그 날에는 소주 좀 드신 것 같아요. 더, 더, 더, 더, 하면서 마셨는데 그만 취하도록 마신 모양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짐작입니다. 어쨌든 그 일 후에 너는 회막에 들어갈 때 술 먹고 들어가지 말라 했거든요. 술 먹고 들어가는 것이 자기 즐거움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할 때 그 거룩한 일을 하는 당사자는요, 절대로 자기 몸의 성과를 내려고 하면 안 돼요. 성도는. 성도를 볼 때 저는 이것만 봐요. 성도라고 우긴다고 성도가 아니고 자꾸 자기 몸을 가지고 성과를 내려는 사람이 있어요. 예수 믿고 교회 다니면서, 기도하면서 ‘이런 성과를 냈습니다. 애들을 믿음으로 잘 인도했습니다.’ 이런 되도 않는 성과.
우리 몸에서 나오는 성과는 주께서 안 받아요. 그런데 복음을 알면서도 늘 그런 유혹에 빠집니다. 왜? 남들이 그걸 요구하니까요. 우리 친구가 요구하고 남들 시선이 그걸 요구한다니까요. “무슨 백신 맞았나?” 기다렸다는 듯이 “나 내일 백신 맞는다.” 이것도 일종의 자기성과 아니겠어요? 내가 옳은 결정을 내렸다는 거지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이 어떤 결정을 내리고 판단을 할 때 그 순간 나는 내가 심판주가 된다는 겁니다. 어떤 성과를, 내가 원하는 성과를 내가 내야된다는 것을 고집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밥 먹다가 더우니까 남 탓하는 거예요. 얼음물에 감사하고 선풍기에 감사하면 되는데 괜히 짜증이 나요.
짜증 난다는 말은 ‘도대체 내 성과 내는 데 누가 방해한 거야? 누가 장애물이야?’라고 그것 찾고 있는 중이에요. 그래야 속이 좀 풀리는 모양이에요. 그러나 진짜 보고 싶었던 은사를 기다리는 것처럼 내가 지금 이런 얼굴을 하고, 어떤 모양새고 그런 것은 아예 생각도 안 해요.
자기 생각, 자기 판단, 자기 평가, 자기 심판을 하지 않고 그냥 보고 싶은 스승님을 만나는 거예요. 왈칵 눈물을 터뜨리면서. “나의 원천이신 분 오늘의 내가 있게 하신 분 바로 당신이십니다.” 그걸 우리가 주님한테 이야기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 일을 했던 것이 바로 이사야입니다. 이사야 6장 5절부터 보면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이사야는 이미 자기 평가를 철회했습니다. 자기는 하나님의 성전을, 오늘 본문 같으면 시온산이지요, 하나님의 성전을 보면서 자기가 얼마나 추접고 더럽다는 것, 추저분한 짓을 해서 더러운 것이 아니고 추저분한 짓을 안 했을 때도 나는 나의 평가나 판단은 주님 앞에 추접고 더러운 판단과 평가만 내놓을 뿐이고 다른 것은 내놓을 것이 없다는 것을 충분히 알았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그 경지를 봤다는 겁니다. 6절에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이사야의 입을 지져버립니다. 왜? 이사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은 성전의 거룩함을 경유해서 그 취지를 담아서 나오는 심판의 말로 나와야 되기에 그런 거예요.
우리도 이사야처럼 해야 됩니까? 하지만 우리는 어느 자리에 퍼트려져 있더라도 항상 그 제단, 제단 불, 숯불, 성전, 그게 바로 오늘 본문은 시온산이라 했어요, 그 시온산 쪽으로 시선이 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수직적 안목이에요. 세상을 위/아래로 보는 수직적 안목입니다.
세상 눈에 보이는 동서남북의 뜻, 성경에 보면 동서남북이라 되어 있는데 이것은 뭐냐 하면, 교도소라는 뜻이에요. 교도소가 동서남북으로 망대가 있잖아요. 탈출 불가. 어느 구석에 있더라도 교도소에 있는 겁니다. 탈출할 데는 없습니다. 수평적으로 지형적으로 탈출할 수는 없어요.
그러나 수직적으로는 있어요. 그 수직적인 것이 바로 주님께서 위에서 와서 위로 올라가는 그 노선, 그 제대로 된 심판주로서 오셔서 어느 누구의 심판주 행세에 대해서 묵과하지 아니하시고 제단의 거룩한 숯불로 네가 맘대로 판단했지, 라고 찢어버리는 식으로 심판해주시는 그게 복입니다. 그게 바로 옛날 이스라엘이 망해야 된다는 거예요.
속죄라는 것이 바로 그렇게 이루어지는 겁니다. 위에서 와서 우리를 속죄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그 거룩함이 우리를 속죄하는 거예요. 우리는 일찌감치 타버리는 것이 정말 마땅하지요. 그래서 아까 이야기한 것 다시 하겠습니다. 사람 대 사람의 싸움이라는 것은 주께서 싸움을 붙이는데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붙이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악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과 악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사람, 아직도 자기에게 희망과 기대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과의 싸움을 붙이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런 백성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그런 사람이 있으면 만나보고 싶습니다, 라고 여러분이 이야기하고 싶겠지요. 오늘 본문에 보면 거기에 대한 힌트가 나와 있습니다. 18절에 “에서 족속에 남은 자가 없으리니” 이 말은 야곱족속은 남은 자가 있으리라. 다른 말로 하면 남은 자들만 새로운 야곱족속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남은자라는 뜻은 뭐냐? 화가가 그림 그릴 때요, 아마추어하고 프로 화가하고의 차이가 아마추어는 그리고 싶은 대상을 먼저 윤곽 잡아 그리기 시작하잖아요. 그러나 프로는 물감 가지고 배경부터 칠해요. 그러니까 그림 그리기 시작한 뒤에 30분 지나고 한 시간이 지나도 도대체 이 화가가 정물화 그리고 풍경화 그릴 때 대체 뭘 그리는지도 몰라요.
한 시간이 지나도 물감이 다 뭉개져서 뚝뚝 떨어져 있어요. 구체적인 개체가, 대상체가 안 나타나요. 아마추어들은 처음부터 예를 들어 고양이라면 고양이부터 그리는데 프로는 배경으로 시작해서 그린다고요. 배경을 채우고, 채우고, 채우고, 채우니까 점점 더 어디에 초점이 모이느냐? 나중에 한 시간 지나고 두 시간 지나고 세 시간 지나니까 어 윤곽이 드러나는 거예요. 진짜 그리고자 하는 그림의 모티브가 등장합니다.
그걸 성경에서는 로마서 9장에서 남은자라고 해요. 남은자. 남은자는요, 주님의 철저한 은혜의 솜씨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를 구원하려 하니까 자기가 자기 챙기는 것부터 시작해요. 너무나 아마추어에요. 나부터 자기 생각만 하고 자기 평가만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네가 너를 구원하는 것은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 구원하고자 하는 것은 철저히 자기붕괴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뜻이거든요. 아까도 말씀드렸지요. 복음 안다, 해놓고 대화 해보면 나중에 대화가 안 되는 이유가 결국은 살고자 하는 그 욕망이 여전히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살고자 하는 욕망이 계속되기 때문에 복음 이야기가 아니고 나 이렇게 해서 살았다, 그 이야기밖에 안 나오니까 복음적인 대화가 될 수가 없지요.
주님께서는 죽은 데서 살리고 없는 데서 있게 하기 때문에 철저하게 그 인간을, 구원되고자 하고 살고자 하는 인간을 죽여버리고 없애버립니다. 죽여버리고 없애지요. 그것도 밤의 경치로 바꿔서, 이 낮의 세상 경치를 밤의 경치로 바꿔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게 만드는 식으로 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은혜로 남은자, 내가 노력해서 남은 자가 아니고 은혜로 남은자. 로마서 9장 27절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그 남은자가 로마서 11장 5절에 보면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받는 게 목적이 아니고 은혜가 은혜답게 되는 게 목적입니다. 너 인간도 아닌 너를, 더러운 너를, 입술이 더러운 너를 내가 그 거룩한 제단의 숯불로 지져가면서 속죄를 하는 이유는 속죄의 은혜가 네가 가는 곳마다 그것이 펄펄 살아나기 위해서, 은혜가 은혜답게,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 십자가의 공로가 은혜답게 드러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게 구원입니다. 남은자 그림을 그릴 때 내가 주인공 아니에요. 주인공이 우리로 하여금 남은 자 되게 하는 그런 모습이 나오는 그림을 그리게 하신 거예요. 붓질 해가면서. 고린도후서 11장에 보게 되면 사도바울이 자기가 부득불 자랑한다는 겁니다. 부득불 하니까 사람 이름 같아요.
부득불 자랑하는데 그 부득불이 뭐냐 하면 32, 33절에 “다메섹에서 아레다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쌔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광주리 타고 도망쳤다. 이게 자랑이라는 거예요. 나는 약하다는 겁니다. 나는 나 챙기려고 도망쳤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내가 사도가 되는 것은 내 노력이 아니고, 내 의지가 아니라, 나의 평가가 아니라, 나의 판단이 아니라 은혜가 은혜답게 된 것이라는 겁니다. 돌아서서 보면 모든 게 은혜 아닌 게 어디 있습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 정말 여전히 아무것도 아닌 우리를 하니님의 제단 불, 속죄의, 이사야의 입을 찢었던 그 죄를 사했다는 것, 그 일방적인 죄사함, 예수님의 피로 인한 그 피만 자랑하라고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남은 자 되게 하시고 나머지는 다 불심판으로 가는 것이 너무나 하나님 하시는 정당한 일이니 이제부터 주님의 불심판의 정당함을 살아생전 자랑스럽게 세상에 외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살기 위해서 주님 믿는다는 이것이 얼마나 꼼수에 불과하고 거짓된 귀순인 것을 저희들이 자각하게 해 주옵소서. 그저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것마저 은혜요 감사거리인 것을 늘 되새기면서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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