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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아모스 1:1-2 / 개념의 노예 / 수요예배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아모스

아모스 1:1-2 / 개념의 노예 / 수요예배

정인순 2020. 8. 26. 22:27

음성 동영상 Youtube

 

개념의 노예

 

이근호
2020년 8월 26일

 

본문 말씀: 아모스 1:1-2

(1:1)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

(1:2) 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소리를 내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마르고 갈멜 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

선지자라는 개념에 대해서 사람들은 부수적이고 보조적인 개념으로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추구하는 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선호하는 것은 왕입니다. 왕이란 최고의 자리를 뜻합니다. 모든 소유의 최종성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왕에 합당한 자가 등장해서 백성들이 그 사람을 우러러보고 싶어합니다.

즉 왕이란 믿을 만한 대상이요 희망을 주고 목표를 제시하는 자리라고 여기고 기대를 갖습니다. 이는 곧 왕이 없다면 희망도 없고 기대할 만한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사사기 21:25에 보면,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추구할만한 사람이 없으니 본인이 스스로 각자 왕노릇하면서 살아간 시대라는 말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왕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사무엘하 7:11에 보면, “전에 내가 사사를 명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않게 하고 너를 모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케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사사시대와 왕시대가 다르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왕을 세워주고서는 그 왕 중심으로 이스라엘을 통치해나가겠다는 겁니다. 이 때 등장하는 왕이 자리가 어느 정도로 대단하냐하면서 하나님께서 친히 아버지가 되고 왕은 아들이 되는 관계입니다.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삼하 7:14)

그런데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이 ‘이스라엘 왕’이라는 개념은 조건이 붙어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윗 가문의 혈통에서 난 자식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입장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지니고 왕으로 나타나는 사람을 알아보기에는 참 쉽게 되었습니다. 즉 다윗의 혈통을 따르는 그 왕이라면서 누가 뭐래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참된 이스라엘 왕이라고 인정할만하다고 여긴 겁니다.

백성들이 당연하다고 여긴 이 왕이라는 규정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다윗 혈통을 통해서 출현하는 모든 유다 왕들에게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붙여놓게 됩니다. 즉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지시한 그 개념에 대해서 그들의 생각으로 합치하고 일치시키는 것에 그들 인생의 보람으로 여겼던 겁니다.

사람들의 존재의 의미란, 자신이 태어나서 세상에세 듣게 되는 각종 개념들과 자신에 형편을 맞추어나가는데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인간의 자아란 그렇게 구성됩니다. 예를 들면, 성경에 ‘전도’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제시한 그 ‘전도개념’과 자신을 일치시키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규정하려고 합니다.

‘전도’ 뿐만 아니라 예배, 헌금, 찬송, 교제, 구원, 천국 등등의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의미에 대해서 자신을 일치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호세아 13:11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 즉 왕이라는 개념을 주신 것은 인간들의 평소의 생활 방식대로 하나님이 제시한 그 왕에 합당한 왕이 되고자 인간들이 시도하는 가운데 인간들은 자신의 죄성을 드러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 속에는 선지자적 기대는 없습니다. 스스로 다른 왕을 선망하기에 자신의 욕망을 구체화시켜 줄 왕을 찾게 됩니다. 왕이란 희망을 주고 왕이란 믿을만 하고 왕이란 기대를 갖게 하는 그 최종적 대표개념이라면 반면에 선지자는 아무 것도 없는 자입니다. 오로지 하나님이 담아 주신 말씀이 전부입니다.

따라서 선지자는 역할은 기존의 인간들의 개념 일치화가 실패가 되며 오류이며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하는 더러운 짓인지를 알리는 일을 하는 겁니다. 곧 선지자는 인간의 전멸을 외치십니다. 모든 인간들의 존재의 이유는, 마음에 드는 개념과 자신을 일치시켜서 자신의 가치를 하늘에까지 닿게 하겠다는 있음을 고발하고 그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처벌하심을 말해주면 되는 겁니다.

왕 개념의 경우, 마태복음 27:41-42에 보면,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고 조롱의 대상이 됩니다. 반면서 역대하 26:16에 나오는 웃시야왕의 경우를 봅시다.

“저가 강성하여지매 그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백성들이나 왕 본인이 아무리 애를 써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왕 개념에 부합하려고 애써도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참된 왕, 즉 하나님의 다윗에게 약속하신 그 왕 개념에 합당한 참된 왕은 어떻게 나타납니까? 거짓 왕들과 사람들이 선호하고 가짜 왕들의 그 나열 속에서 참된 왕의 요소가 드러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들로부터 버림받는 왕’입니다. 선지자가 기존의 왕에 대해서 가짜라고 외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특히 아모스 선지자의 경우, 기존의 왕의 예하에 있는 전문 선지자가 아닙니다. 그냥 양을 치던 목자였습니다. 이 목자에게 선지자의 기능을 주어졌다는 말은 가짜 왕과의 만남에서 진짜 왕이 되는 요소와 본질을 뽑아내기 위해서입니다. 왕의 개념에 합치되지 못하는 자를 왕이라고 기대를 거는 그 대중들의 거짓된 마음을 고발하므로서, 백성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그런 모습으로 참된 왕이 오신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겁니다.

따라서 성경에 나오는 모든 개념들은 인간의 손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다 이루었다”는(요 19:30) 예수님 앞에서 그저 죄인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개념에 도달하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성령이 하시는 선지자 기능에 의해서 예수님만이 홀로 하실 일에 감히 자신도 달성하겠다는 본인이 마땅히 진멸되어야 함을 아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참으로 아무 것도 아님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이하림

1강-암 1장 1-2절(개념의 노예)20082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아모스 1장 1-2절까지입니다.

아모스 1:1-2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의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묵시 받은 말씀이라 저가 가로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음성을 발하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애통하며 갈멜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

여기에 왕이 나오죠. 남쪽에 있는 왕 웃시야, 북쪽에 있는 왕은 여로보암. 여로보암 2세라고 하는데 여로보암 시대입니다. 이렇게 왕이 나오고 그 다음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드고아의 목자 중 아모스가”. 드고아라 하는 것은 지역 이름이고 거기의 목자니까 그냥 양치는 사람이에요. 양치는 사람이니까 왕이 양성하고 있는 선지자 중의 하나는 아니에요. 나라에서 월급 받는 선지자는 아닙니다.

왕이 정책적으로 장학금 대주면, 월급 대주게 되면 그 선지자는 뭐 다른 소리 못하겠죠. 자기에게 월급주고 있으니까 일종의 공무원이니까 그 시대의 통치자에게 무조건 긍정적이고 좋은 소리만 해서 백성들의 마음을 통치자 밑에 다 예속시키고 복속시키는 그런 역할을 한 사람들이 바로 선지자였습니다.

그 사람들은 다들 신학교 출신들이에요. 요새 같으면 헬라어, 히브리어 배우고 라틴어도 배우고 정통 신학을 해가지고 이것은 국가적으로도 인정해주고 백성들 사이에서도 사회도 인정해주는 목사 양성소. 그 출신들이 그 당시 하나의 체계를 이루면서 이스라엘 남쪽이나 북쪽도 다 마찬가지에요. 이스라엘에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연구하고 해석해서 백성들에게 현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택한 나라이니까 이 택한 나라에서 보탬이 되고 평화와 정책적인 안정을 도모하는데 있어서 사람들의 사상이나 인간의 영혼을 통제하는 그런 역할을 그 당시 선지생도 출신들이 했습니다. 그게 그들의 직업이고 밥벌이였어요.

요새 같으면 교목(校牧), 그 학교에서 서울대학 많이 보내기 위해서 아이들을 격려해주는 역할, 교목. 그 다음에 군목(軍牧), 탈영병 적게 하고 애들 자살 적게 하고 나라에 충성하도록 했던 군목 또는 군종(軍宗). 군에 가면 중도 있거든요, 천주교 신부도 있고. 하여튼 그들의 역할은 뭐냐. 계급장 달고 나라에서 공무원으로써 월급 받아서 그저 밤이나 낮이나 여호수아만 외치면서 굳건하게 국방력이 소진되지 않도록 장려되도록 해주는 정신 후원하는 그런 역할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또 병원에 목사가 있어요. 원목(元牧)이라고 해서 우리 병원에 환자들 많이 오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못 들은 말이 있을 거예요. 회목(會牧)이라는 게 있어요. 회목이라는 것은 자기 교회 부흥시키고자 하는, ‘교회’할 때 ‘회’자에다가 목사. 자기 교회가 잘되도록 하는 목사, 회목. 월급을 교인들이 주니까. 그 다음에 교단 목사. 교단 목사도 있어요. ‘예배 드릴까요, 말까요’ 할 때 그 지역 교단에서 지시 떨어져서 예배 드리라고 하면 드리고 안하라고 하면 안하는 그런 목사.

그러니까 이게 전부 전문 양성소인데 이들이 하는 일은 그 시대의 평화와 안정을 도모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시대에 살고 있는 민중들이 있잖아요, 대중들이 있잖아요, 백성들이 있다고요. 성직자들을 항상 그 시대마다 원하고 있던 거예요, 백성들이 그 시대에. 이 살기 어려운 시대에 우리의 마음을 위로해주고 희망을 줄 수 있는 그런 역할을 국가의 돈, 월급을 받더라도 우리에게 희망을 제시하는 그러한 성직자들을 선호하고 필요로 했던 겁니다.
이스라엘 같은 경우에는 라이벌 관계에 있죠. 바알이냐 아니면 여호와냐. 이렇게 라이벌관계에 있더라도 바알 성직자나 여호와 성직자나 전부다 백성들의 평화와 안정과 축복을 빌어주는 일을 한 겁니다. 내가 있는 내 가정과 직장, 크게는 국가. 가정과 직장과 국가의 번영을 위해서, 그래야 우리가 잘 살고, 잘 살면 우리가 행복해지니까 궁극적으로 행복한 이 시대를 보내기 위해서 성직자들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전혀 그런 부류에 속하지 않아요. 신학교 출신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떨어졌지요. 이름이 아모스. 그냥 목자에요, 양치는 사람이에요. 목축업 하는 사람이에요. 축협에서 대출받아서 소 키우는 사람. 그 양치는 목자 아모스가 하나님의 묵시를 받아서 외칩니다. 그러면 이 선지자의 역할은 전멸시키는 거예요. 죽어라, 다 죽어라. 다 죽어버려라.

‘다 죽어버려라’가 저주가 아니에요. 이것이 막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아모스가 하는 이 이야기는 아모스의 사적인 의견이 아니고 하나님의 앞으로의 계획이에요. 내가 너희들 다 죽일 거야. 다 죽여버릴 거야.

그러니까 여기서 여러분들이 아셔야 될 것은 선지자는 왕 제도가 없으면 선지자가 없어요. 참된 선지자는 뭔가 설정되어있고 그것을 공격하고 그것에 달려드는 거예요. 그리고 그 왕이 구성한 체제, 조직을 와르르 무너뜨리는 역할을 선지자가 하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쉬워요. 왕이라 하는 것은 최고성, 모든 소유의 최고성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모습이 왕이에요. 우리가 소유했을 때 그 소유한 것 중에, 소유했다, 가졌다, 가졌다, 가졌다, 그 최고가 뭐냐? 그게 왕이에요. 그걸 왕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왕은 일종의 포커에서 제일 에이스 같은 거예요. 모든 것의 모든 것. 모든 힘의 결정체. 모든 힘을 지시하고 그리고 힘의 출처가 되는 게 왕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전부다 왕을 고대하고 있고 왕을 기다리고 있고 누군가가 왕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왕의 그 자리가 나의 소유성을, 나의 가진 것을 더 키울 수 있는 희망을 주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왕과 선지자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왕은 뭔가 믿을 만해요. 믿을 게 있어요, 왕한테는. 믿을 게 있고, 왕한테는 목적이 있고 목표가 있고, 왕에게는 우리가 기대할 게 있어요. 왕이 있다면 그 나라의 왕은 든든한 기둥 같은 겁니다.

북한의 김정은 보세요. 이 시대의 왕이잖아요. 뭐 북한 주민들은 김정은 나타나면 자발적으로 울고 불고 아줌마들은 울고 불고 엎어지고 자빠지고 혼절하고 뭐 난리도 아니에요. 자신의 삶에 기대가 되고 목적이 되고 목표가 되고 유일하게 믿을만한 듬직한 기둥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걸 백성들은 원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게 왕이에요.

그런데 선지자는 뭐냐? 없어요. 본인의 것이 전혀 없어요. 본인이 양 치는데 양 다 날라가도 관계없어요. 양 날라간다고 나 이제부터 선지자 안 해. 이런 거 없어요. 선지자는 아무것도 없어요. 목적도 없고 기대도 없고 가진 것도 아무것도 없어요. 배짱 편해요. 그냥 헐뜯기만 하면 돼요. 달려들어서 뜯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공격만 하면 되는 거예요. 죽어라, 다 죽어라. 물귀신 작전이라고 하죠. 나 죽고 너 죽자. 다 죽자. 이게 선지자입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에게는 왕적인 요소는 가득 들어있는데 선지자 요소는 모든 인간에게 없습니다. 이게 바로 이번에 룻기 할 때도 했는데 사사기 제일 마지막 21장 25절에 보면,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그 당시에 왕이 없기 때문에 누가 왕 노릇 하느냐. 각자 본인이 왕 노릇하는 거예요. 그들이 사적으로 소유한 게 있고 사적으로 기대하는 게 있고 사적으로 뭔가 희망을 갖고자 하고 사적으로 어떤 목표를 얻고자 하니까. 각자 각자 그렇게 하니까. 이게 하나의 왕이 있어서 그 왕의 지시에 따라 움직일 수가 없어요. 왕이 없으니까. 왕이 없으니까 본인은 본인 자신에게 기대할 것밖에 없죠. 그러니 지 팔 지가 흔들면서 지 마음대로 살아가는 겁니다.

사사시대가 오늘날 현대시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요. 이 시대는 어떤 것도 왕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본인들이 왕이기 때문에. 그런데 이 선지자가 등장했다는 말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원래 왕이 먼저 등장하고 그 다음에 선지자가 거기에 달라붙어서 그 왕 체제를 공격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에서. 그러면 사람들이 좋아하는 왕이 있다는 사실을, 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보내가지고 그걸 헐뜯게 하고 그 왕을 못마땅해 하고 왜 그렇게 자꾸 달려드느냐.

호세아 13장 11절에 보면,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 이런 말씀이 나오거든요. 다시 말씀드릴게요.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 아니 이스라엘에게 왕이 있다는 것이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얼마나 마음으로 든든하겠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생각은 달라요. 왕이 왕 같지가 않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왕 같은 왕을 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는데 이게 어려운 게 왕 같은 왕은 가짜 왕들이 계속해서 연차적으로 등장한 그 끝에 나타나요. 진짜 왕다운 왕은 먼저 백성들 앞에 가짜 왕들을 줄줄이 진열시켜 놓는 거예요. 대대로 가짜 왕들이 계속 나타나게 합니다. 가짜 왕이 하나 나타날 때마다 여기에 선지자가 와서 와락 달려들어 뜯죠. 그 다음 왕 등장하면 그 다음 시대에 선지자가 또 등장해서 확 달려들죠.

그런 식으로 해서 북쪽이고 남쪽이고 이스라엘에 왕이 등장했다 하면 그 왕에 맞추어서 그걸 헐뜯고 무너뜨리는 선지자도 딱 일대일 대응처럼 짝을 맞춰서 등장합니다. 가짜가 먼저 등장한다 이 말이에요, 가짜가. 진짜 왕은, 이제 인간들 왕 할 수 있는 대로 다 했지? 이제 더는 인간에게 왕이라는 게, 지도자라는 게 없지? 손 털었지, 이제? 그러면 진짜 왕 줄게. 이렇게 되는 거예요.

마태복음 27장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달릴 때에 죄목이, 예수님 십자가 위에 죄목을 글로 썼어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유대인의 왕 예수 그리스도’. 같잖다 이 말이에요. 참 웃긴다 이 말이죠. 그 당시 사람들이. 네가 유대인의 왕이야? 네가 진정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그 왕 맞아? 아니지, 그치? 그런데 너는 우기잖아. 좋다. 마지막 죽는 마당에 소원이나 들어줄게. 해서 조롱하듯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푯말을 붙였어요. 그걸 보고 유대인들이 “저거 뗍시다.” 하니까 로마 빌라도가 “아니. 마지막 가는 길에 뭐 자기가 주장하는 대로 해보자.” 해서 ‘유대인의 왕’이 죄패가 돼요.

마태복음 27장 37절에,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그러니까 보통 십자가 달린 죄수는 무슨 죄로 죽어야 하는가를 붙여놨는데 예수님은 무슨 죄로 죽었느냐 하면 유대인의 왕으로서 죽은 거예요. 유대인의 왕으로 죽었다는 말은 그 당시 유대인들이 다른 왕, 예수 그리스도 저런 모습은 아니고 전혀 저런 모습과 정반대되는 다른 멋있는 왕을 그들은 고대했다는 것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왕이라는 것이 왜 그렇게 문제가 있는지. 예를 들어서 오늘 본문에 웃시야 왕이라고 했는데 하나의 예를 들 수가 있어요. 웃시야 왕은 왕 시대에 나라가 굉장히 커졌습니다. 영토가 넓었어요. 북쪽에 있는 여로보암 2세도 영토가 이스라엘 중에서 제일 컸던 시대였습니다. 그 때 역대하 26장에 보면 그 웃시야라는 왕이 무슨 짓을 했는지가 나옵니다.

얼마나 힘이 세고 용사도 많고, 13절에 보면 수하의 군대가 삼십만 칠천 오백명. 그것도 다 건장하고 싸움에 능한, 왕을 도와서 대적을 치는 자라고 되어 있어요. 왕은 그에게 갑옷과 활과 물매 돌을 예비해서 막강한 국방력을 갖추었습니다. 15절에 보면 성곽도 크게 지었고요. 그래서 얼마나 단단한지 저 먼 나라까지 다 소문났어요. 야, 유대 나라 무지무지하게 강해서 우리가 못 이긴다.

그러니까 16절에, “저가 강성하여지매 그 마음이 교만하여” 제가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왕이라 하는 것은 소유성의 최고성. 모든 가진 것의 최고성. 그 마지막 대표성 개념이 뭐냐. 왕이에요. 너무 강하니까 이건 뭐 거칠 것이 없죠. 그래서 16절에 보니까 강하매 그 교만한 마음을 어찌할 수 없어서 “악을 행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제사장 아사랴가 말렸죠. 웃시야 왕에게 “이건 왕이 할 바가 아닙니다.” 이렇게 하니까 “웃시야가 손으로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 하다가 노를 발하니” 하나님께 노를 발하니까 문둥병이 되어 버렸어요. 즉각적으로 문둥병에 걸리니까 거기 있는 사람들이 다 지금 전파될까 싶어 겁나가지고 왕을 쫓아내고 21절에 “웃시야 왕이 죽는 날까지 문둥이가 되었고 문둥이가 되매 여호와의 전에서 끊어졌고 별궁에 홀로 거하였으므로 그 아들 요담이 왕궁을 관리하며 국민을 치리하였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웃시야 왕이.

강하게 해줬음에도 강한 그것이 강하다, 잘났다, 대단하다, 영웅이다 라는 것을 본인이 그걸 감당 못하는 겁니다. 감당 못한 이유가 뭐냐? 이 개념 때문에 그래요. 왕이라는 개념.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유다 왕. 유다라는 하나님의 택한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그 이스라엘이라는 개념에 부합하는 참된 왕이라는 개념을 본인에게 일치시킨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후대 왕들이 현혹된 거예요. 사무엘하 7장에 보게 되면 다윗에게 주신 하나님의 왕의 개념이 나옵니다. 어떠했을 때 왕이냐? 사무엘하 7장 11절에 보면 약간 설명을 해드릴게요. ‘내가 전에 사사시대처럼 너희와 함께 통치하진 않겠다.’ 사사시대처럼 통치하지 않겠다는 말은, 사사시대에는 왕이 없으므로 지 맘대로 살았잖아요.

그런데 다윗을 통해서 이제는 사사시대처럼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왕, 다윗을 주겠다는 거예요. 다윗을 주는데 그 다윗만 줘서는 안 되고 ‘다윗 후대에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서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사무엘하 7장 12절에서 약속하기를 다윗의 육신의 몸에서 자식들이 나오는데 이 자식들은 그들이 이미 태어나면서 다윗계통의 왕위를 세습시킨다고 이미 하나님께서 다윗 언약에서 확정지었다 이 말이거든요. 이게 유다 왕의 왕 개념이에요.

조건이 뭐냐 하면 ‘다윗의 혈통 출신이어야 그 사람만이 왕이 된다’ 하고 왕의 개념 속에 그 요소가, 조건이 포함이 되어 있다 이 말이죠. 다윗의 혈통 안에서. 그리고 그 다윗의 혈통은 14절에,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고 육신을 갖고 있는 다윗의 혈통을 따라 난 그 혈육의 자식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거예요. 이것은 감히 사람이 범접하지 못하는 그런 신분자가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유다의 왕의 개념이에요.

이 개념을 웃시야 왕도 같은 다윗의 핏줄이니까 그 개념에 자신을 일치시킨 겁니다. 이게 화근이에요, 이게 사단난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인간은 자기 몸을 자기가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개념의 지배를 받습니다. 떠도는 개념의 지배를 받아요, 인간의 자아라 하는 것은.

몸은 있어요. 몸은 있지만 몸이 인간을 다스리는 게 아니라, 나를 만드는 것은 내 몸이 아니라 그동안 살아오면서 알고 들었던 그 개념이 나를 만들어요. 그 개념과 나를 일치시키려고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은 이스라엘이라는 그 개념, 하나님이 모든 민족 가운데 뛰어난 민족, 택한 민족은 이스라엘 뿐이라는 그 개념과 자기가 살고 있는 나라를 합치, 일치시키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오류였습니다. 그게 사단난 거예요.

어떤 분이 이번에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전도를 쭉 해왔는데 “목사님, 전도를 어떻게 합니까?” 저한테 물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답했어요. “전도라는 개념을 버리세요. 왜냐하면 성경에 나오는 개념, 전도, 헌금, 예배, 교회, 천국, 구원, 하나님, 이 모든 개념은 주님이 홀로 하실 일과 일치시키지, 인간이 자기와 일치시킬 개념이 아닙니다. 그런데 집사님께서는 전도라는 개념에 지금 완전히 매료되었고 그 개념의 노예가 되었어요.” 여수 가서 차를 마시면서.

지금껏 수십 년 동안 어떤 개념에 대해서 본인이 그 개념과 자기를 일치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자기 존재의 의미에요, 존재의 의미. 나라는 존재는 전에 성경을 몰랐을 때는 그냥 세상 사람처럼 살다가 이제 성경을 보니까 여러 가지 고상해 보이는 많은 단어들이 나오잖아요. 그 단어들과 나와 일치시키면 ‘나는 구원받은 사람 맞다. 나는 신앙인 맞다’ 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 오류를 웃시야 왕이 그대로 지금 따라하고 있는 거예요.

사무엘하 7장에 나오는 다윗의 자손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그게 진정 왕이라고 하니까 그 왕이 나라는 거예요, 웃시야 왕이. 거 봐. 많은 나라들이 우리를 강성하다고 하고 우리를 침범 못하잖아. 그러나 그게 자기에게 교만을 유발시켰다는 사실을... 본인이 자기가 왕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교만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일치될 수 없는데요.

일치는요, 십자가 달린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를 지었던 그 분이 모든 개념, 구약 때 던져놓은 모든 개념을 자기에게 다 맞추어서 이루었다고 하시는 거예요. 예수님이 다 이룬 거예요. 우리는 빠져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그 분이 잘 이해가 안 되는 것 같아서 제가 제 이야기를 했어요. “지금 제가 여수에 왔을 때 저는 개념 하나에 빠졌어요. 뭐냐? 이순신 햄버거. 여수에 왔는데 이순신 햄버거를 먹고 가야되지 않겠는가. 이순신 광장에서 11시부터 문 여는 햄버거집 있어요, 전에 먹어봤거든요, 맛있어요. 그러니까 전에 여수 와서 먹어봤는데 맛있는 그 개념을 일치시키는 것, 그 햄버거를 먹었던 나와. 안 먹었던 나는 내가 싫은 거예요, 미흡한 거예요.

아, 참 인간의 존재란 사는 보람이 그런 거예요. 어떤 가정의 아버지가 집을 나가서 있으니까 아이들의 희망이 뭐냐 하면, 선생님이 “네 희망은 뭐야? 네 가정은 행복해?” 하니까 “집 나간 아버지가 돌아오기만 하면 우리 가정은 행복해질 거예요.” 이런 이야기 했더란 말이죠.

집 나간 아버지가 돌아오기만 하면 행복하다는 말은 그 결손된 것, 결핍된 것, 빠져 있는 것을 세상의 피자조각 하나 뚝 떼어 가지고 거기에 끼워 맞추면 그것이 행복이 될 줄로 아는 거예요. 그 세상 행복이란 그 개념에 어린아이가 완전히 거기에 노예가 된 겁니다. 세상의 행복이라는 떠돌아다니는 개념에 그 어린아이가 노예가 된 거예요. 없으면 없는 대로 사는 게 아니에요.

그처럼 나는 이순신 햄버거에 빠졌어요. 아, 그거 안 먹고 그냥 여수 떠나려고 하니까 섭섭한 거예요. 그런데 저한테 질문했던 집사님이, “목사님, 점심 준비해놨습니다.” “뭡니까?” “가보면 압니다.” 가보니까 ‘남해안 장어탕’ 그 집에 딱 들어갔어요. “이게 민물장어입니까, 바다장어입니까?” 바다장어래요. “그 뭐 장어탕 뭐 그렇지.” “아닙니다. 목사님 한번 잡숴보셔요.”

나는 지금 이순신 햄버거에 빠져가지고 다른 것은 마음에 들어오지도 않아요. 그 개념의 노예가 되어 가지고. 그런데 그 장어탕을 딱 먹는 순간 이순신 햄버거를 잊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개념에 사로잡히고 말았어요. 그것은 장어탕이었어요, 남해안 장어탕. 여수 가거든 한번 잡숴보셔요. 이쪽 개념에서 저쪽 개념으로 옮긴 거예요, 제가.

‘헌금을 어떻게 합니까?’ 이게 바로 교인들의 오류인 거예요. 하나님이 주신 개념은 예수님이 다 이루고 인간은 거기에 죄인으로 드러나기 위해서 개념을 줬거든요. 그런데 ‘목사님 헌금은 어떻게 합니까? 예배는 어떻게 드려야 합니까? 찬양은 어떻게 해야 됩니까?’ 오늘 본문 같으면 ‘이 이스라엘 왕은 어떤 왕이어야 우리가 행복해지고 참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참된 이스라엘 되겠습니까?’ 라고 백성들도 그렇게 생각했고 왕 본인도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누가 와서 이걸 공격해야 되겠어요? 여기에 선지자 아닌 선지자, 예언자 부류에 속하지 않은 예언자가 등장해서, 아모스가 등장해서 이것을 공격해버립니다. 너희들은 진멸당해야 돼.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아니고 그 왕은 왕이 아니었어. 하나님이 왕을 주는 것은 진노하므로 왕을 주고 폐하는 것은 ‘내가 왕 줬다는 자체가 나의 분노의 뜻인 걸 이제 알겠느냐’ 하고 왕을 폐해버려요, 폐위시킨다고요. 이것은 뭐냐 하면 인간들은 개념에 묶여서 개념의 노예가 되어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준비한 이 선지자의 그 내용은 결국 뭐냐 하면, 인간은 자체가 날 때부터 몸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공중에 떠도는, 남들로부터 들려오는 모든 개념들 있잖아요, 의미들 또는 단어들, 단어의 개념, 개념의 의미, 그런 것들에 현혹되어서 인간은 우왕좌왕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성도 두 사람이 만났다. 성도 둘이 만났다면 이미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으로서 오셨다 이 말이죠. 자, 왕이라는 것을 다시 정의합니다. 왕이라는 것은 모든 소유의 최종점이고 그리고 모든 목표고 모든 의미이고 모든 기대요 모든 희망이고 유일하게 믿을 만한 것은 왕밖에 없죠. 그게 왕이라 했죠.

그런데 성경 전체를 보면 이미 그런 왕이 나타났어요. 나타났다는 말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분해해보자 이 말이죠. 분해해보면 ‘헌금은 어떻게 합니까, 예배는 어떻게 합니까, 전도는 어떻게 합니까, 설교는 어떻게 합니까, 성경해석은 어떻게 합니까, ...합니까, ...합니까?’ 라는 그러한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다 이루었기 때문에. 그거 예수님이 다 이루었거든요.

다 이루었는데 인간은 사적인, 개인적인 존재의 의미를 얻기 위해서 개념을 찾다 보니까 ‘주님이 다 이루었다’가 그다지 반갑지 않아요. 내 욕망, 내 욕심에 따르는 그 개념과 내가 나름대로 일치될 때 나는 뭐가 된 양, 내가 왕인 양, 사적으로 작은 왕인 양 여기고 있단 말이죠.

하나 예를 들게 되면 “예수님께서 재림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얼마나 기뻐해야 돼요? 그러면 저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재림하시기 전에, 이틀 뒤에 여수 가서 그 장어탕 하나 먹고 재림 오면 안됩니까?” 여전히 자기는 어떤 결핍을 느끼고 있는 거예요, 내 나름대로. 주께서는 다 이루었는데. 그게 뭐 별로 좋지도 않아요. 주께서 도사니까 다 이루었겠지. 하지만 내 소박한 소망은, 내 존재의미는 따로 있습니다. 이렇게 챙기고 있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해서 우리는 왕만 있지, 선지자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럼 주님께서 그래요. “너 십자가가 좋아, 장어탕이 좋아?” 이렇게 묻는다고요. 지금 10월달에 딸이 결혼한다. 그러면 주님이 묻습니다. “십자가가 좋아, 네 딸내미 결혼하는 게 좋아?” 이렇게 묻는다고요. 내 딸 결혼이라는 개념이 딱 오게 되면 어째든 간에 예수님의 말씀이고 뭐고 다 치우고 나는 딸 시집보내는 아버지라는 개념과 나와 일치시키고 싶은 이 욕망, 그럴 때 나는 사는 재미를 느끼고 사는 보람을 느끼는 거예요.

나는 왕이기 때문에. 왕은 희망이 있고 기대가 있고 목표가 있고 어떤 소유의 최종성, 이것까지는 내 거야. 내가 왕이야. 내 영역에서는 내가 왕이야. 이거 하나 하고 싶단 말이죠. 그렇게 살고 싶은 거예요. 내가 내 마음에 드는 세상, 내가 따로 갖고 싶은 거예요, 인간은.

그런데 진짜 성령 받아서 성도가 되어가지고 둘이 만났다면 만날 때 무슨 이야기해야 됩니까? 둘 다 폭파해야 돼요, 폭파. 너 잘났다, 나 잘났다 말고. 나 최선을 다한다, 너 최선을 다한다 그거 말고. 둘이 폭파하는 거예요. 폭파되는 그 즐거움이 있어야 돼요.

나는 이런 개념을 꿈꾸다가 작살났습니다. 아, 그래요? 나는 이런 개념과 나를 일치시키다가 나는 완전히 와장창 깨졌습니다. 나는 이순신 햄버거 먹으려고 하다가 완전히 주께서 못 먹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깨졌습니다. 나는, 이순신 햄버거 먹고 싶었던 저는 죄인입니다. 죄인입니다.

성령께서 오신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 왕이라면 그 왕의 선지자 영은 무슨 영이냐? 성령이 선지자 영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을 근거로 해서 모든 사람을 의와 죄에 대해서 책망하는 역할을 누가 하느냐? 성령이 하시는 겁니다. 그게 선지자에요.

성령은 본인에게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요. 그리스도만 보게 하시지 성령 자신에게 뭘 달라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마치 선지자처럼. 본인은 아무것도 없어요. 개코도 아무것도 없어요. 자기는 존재 의미 없습니다. 다만 이것은 아니다.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왕이라는 개념은 아니라는 거예요. 현재 이스라엘의 개념은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거예요. 지금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는 거예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을 교회라고 하는 겁니다. 처음 듣습니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에요. 여수강의에서 제가 얘기했잖아요. 믿는 자에게 생수가 나온다는 말은 믿는 자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에서만 나오기 때문에 믿는 자에게도 생수가 나오는 거예요, 성령이 나오는 거예요.

성도가 죄인으로 죽은 자가 될 때 비로소 죽은 자를 재료로 하고 주께서는 자기 몸을 구성해서 그리스도에서 나오는 그 성령이 죽은 성도의 몸에서도 같이 나올 수밖에 없는 거예요. 개념은 그리스도의 다 이루심이 개념이고 모든 것의 완성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은 아모스가 아무것도 아니면 입 다물고 있지. 입 다물고 있으면 저 나라 왕 망할 거고 어차피 메시아 올 건데 난 입 다물고 있으면 되지 않겠느냐. 왜 자꾸 왕이 하는 일이 잘못되었다, 이 나라는 이스라엘이 아니다, 왜 자꾸 공격하느냐.

그것은 이런 개념입니다. 범인이 아이를 납치했을 때 형사가 범인인 줄 알면서도 그 범인을 지금 잡으면 안돼요. 왜냐하면 그 범인을 살려둬서 범인이 자기 집 가기 전에 체포하면 안되고 범인의 집에 갈 때까지 기다려야 돼요. 거기에 잡혀있는 아이가 있기 때문에.

범인 찾는 게 목적이 아니고 아이를 산 채로 다시 부모한테 돌려줘야 되는 것처럼 선지자가 “왕 아니야, 그건 엉터리야, 그건 왕도 아니야” 라고 하는 것은 바로 가짜 왕 안에 진짜 왕이 되는 재료들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진짜 왕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메시아로 오신 예수그리스도의 재료가 가짜 왕 안에 그게 포함이 되어 있어요.

가짜 왕으로 말미암아 핍박받는 모습, 진짜 왕이 핍박받는 모습으로서 가짜 왕의 역할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가짜 왕들은 범인이거든요. 하지만 그 가짜 왕이 개념화시켜서 추구하는 그 개념은 가짜 왕 속에 인간들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진짜 왕의 개념이 그 안에 들어있습니다. 그걸 뽑아내는 거죠. 영어로 inversion. 전복시킨다, 뒤집어버린다, 전위시킨다. 이런 뜻입니다.

성도가 만나가지고, 두 사람 만나든 세 사람 만나든 성도가 만나가지고, “우리 죄인이고 우린 폭파 돼도, 우린 진멸 당해도 마땅해.”라고 하는 이야기는 지금 우리 당장 죽자는, 자살하자는 말이 아니고 바로 그 말을 하게끔 한 그 요소가 진짜 성도되게 하는 예수그리스도가 안에 살아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이 말이죠. 진짜 예수님이 살아 있기 때문에 “나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요.”라고, 아주 그것도 감사한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거예요.

“나는 성도 되어야지” 이렇게 하면 주께서 뭐라고 합니까? “성도의 개념이 뭔데?”, “성도의 개념이라 하는 것은...가만 있어보자, 신학교 때 뭐 배웠더라?” 신학교 때 배우는 성도의 개념은 이 개념이에요. 교회는 무슨 개념이냐 하면 서로 교육하고 교제하고 봉사하고 예배드리고 선교하고 찬미하는 집단. 이게 신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교회의 기능은 헬라어 막 섞어가면서 이코노니아 뭐 어쩌고 저쩌고 이렇게 하면서 교제하고 봉사하고 나와서 전도하고 하늘나라 확장하고 그 다음에 안에 모이면 하나님께 찬양하고 예배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 실천에 옮기는 것. 그게 교회입니다.

그게 바로 개념화된 거예요. 그게 바로 하나의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내가 그런 교회 되고 싶어서 그래서 나는 내가 신자라는 내 개념에 내가 현혹되고 속아 넘어간 거예요. 내가 내 힘으로 신자 되고 싶고 성도답게 살고 싶었던 거예요. 그게 이스라엘의 오류였고 잘못이었던 겁니다. 성령이 안 오니까 나라도 해야 된다 이 생각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성도 만나도 “우리 서로 폭파합시다”가 아니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폭파합시다” 하는 그건 잘못된 거고 “폭파 되었습니다”. “죄 지읍시다”가 아니라 “이미 죄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죄만 드러내면 됩니다.

그걸 하게 하신 것은 성령께서, 선지자적 기능을 갖고 있는 성령께서, 각자 왕으로 살아가고 싶어서 환장하는 나를 지금도 책망하시면서 진짜 왕은 네 속에 있는 예수그리스도가 진짜 왕이라는 것을 우리를 통해서 드러내는 겁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그냥 진멸하고 전멸시키는 일. 죽어라 인간들아. 너희들의 개념은, 너희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모든 말씀과 그 내용은 너희들이 이루는 게 아니야. 그런데 왜 왕을 주십니까? 그건 하나님이 너희에게 분노하고 있다는 뜻으로 준 거야. 왕이라는 개념을, 이스라엘이라는 개념을.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도 아니었고 왕은 왕도 아니었고.

진짜 이스라엘은 왕이 오셔서, 진짜 사람들에게 미움 받는 그 분이 오셔서 하나님의 성령을 주실 때 그것이 진짜 이스라엘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개념의 노예가 되면서 인생을 살아 왔습니다. 자기의 욕망의 미흡함을 하나님의 말씀인 양 여기면서 그걸 메꾸려고 했고 그런 식으로 해서 자기가 신자인 것을 확인하려고 하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마귀의 미혹인 것을 저희들 깨닫게 해주시고 다시 한 번 우리가 어떠한 인간됨 보다도 십자가에서 주께서 다 이루셨다는 것이 더 기쁜 소식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