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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아모스 9:11-15 / 무너진 천막 회복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아모스

아모스 9:11-15 / 무너진 천막 회복

정인순 2012. 4. 29. 16:28

 

 

무너진 천막 회복
음성 동영상

 

이근호
2012년 4월 29일                        

 

아모스 9:11-15

(암 9:11, 개역)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키고 옛적과 같이 세우고』

(암 9:12, 개역) 『저희로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는 이를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암 9:13,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그 때에 밭가는 자가 곡식 베는 자의 뒤를 이으며 포도를 밟는 자가 씨 뿌리는 자의 뒤를 이으며 산들은 단 포도주를 흘리며 작은 산들은 녹으리라』

(암 9:14, 개역)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리니 저희가 황무한 성읍을 건축하고 거하며 포도원들을 심고 그 포도주를 마시며 과원들을 만들고 그 과실을 먹으리라』

(암 9:15, 개역) 『내가 저희를 그 본토에 심으리니 저희가 나의 준 땅에서 다시 뽑히지 아니하리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들은 과거의 위험은 위험이 아니라고 느끼고 삽니다. 현재, 코 앞에 있는 위험과 위협적이라고 느낍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과거의 위험을 반복적으로 적용시킨다는 사실에 눈 뜨고 보면 실은 과거-현재-미래 라는 시간적 연속성이 별 의미가 없다는 점이 밝혀집니다.

즉 하나님의 미래에 대해서 사람들은 자기 미래라고 여기면서 수용하는 버릇이 있는데 그게 다 무용지물이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기 품에 담을려고 합니다. 자기와 의사 소통이 되는 그런 하나님이라고 간주합니다. 그래서 자기 멋대로 하나님께서 펼치시는 그 신세계에 자신들이 발을 담글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하자만 실은 반대입니다. 인간들이 세상관을 만들 때 동원되는 시간과 공간 개념은 하나님 일과 연결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다른 방식의 시간과 공간을 사용하십니다. 그것을 인간 입장에서 보면, 마치 똑같은 원칙이 반복하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식으로 일하십니다. 사람들의 이해를 촉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들의 눈과 귀를 막아버려서 쓸모없이 만들어 버립니다. 알아 듣지 못한다는데서 도리어 감사함이 유발되도록 하십니다. “너도 알아 듣지 못할 건데 알아듣네” 하는 식입니다.

이처럼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생각한 뜻을 틀어막아버리는 이유는, 하나님, 자신의 개입과 투입으로 인하여 이 세상을 예수님의 세상으로 변화시키기 위함입니다. ‘다윗의 장막’이라는 것이 바로 그 개념입니다. 이는 다윗의 생활 공간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생각하는 자기 생활과 배후에 작용하시는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다윗의 생활 공간’은 같이 않고 계속 차이를 보여줍니다.

이 차이는 다윗 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번져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 뜻대로 세상을 살 수 없으면서도 여전히 자기 뜻대로 움직이고 생활하려고 시도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앞장 세워놓고 일하십니다. 다윗으로 하여금, 얼마나 자기 뜻대로 안되는가 보라는 겁니다.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족보의 특징은 아브라함의 혈통이 아닌 자들을 부각시키는 식으로 나열되어 있다는 겁니다. ”다말에게서, 라합에게서, 룻에게서,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마리아에게서“라는 표현들이 나옵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알고 있는 ‘때’의 개념으로는 납득될 수 없는 방식으로 새로운 이스라엘, 새로운 백성을 창출해 내신다는 겁니다. 즉 결코 아브라함 자신이 될 수 없는 자들이 하나님의 허락으로 하나님의 백성에 합류를 하게 되는데, 단순한 합류가 아니라 아예 이스라엘의 성경이나 방향 자체를 틀어버립니다.

곧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식으로 말입니다. 입체적으로 그려보면 수직적으로 보이겠지만 이것을 평면적으로 그리게 되면 바로 ‘이방인 속에 섞여 계신 예수님의 투입’을 제대로 말해주는 바가 됩니다. 혈통적 아브라함 자손들은 이방인들을 내쫓으려 합니다. 하지만 그 쫓김 속에서는 아브라함 언약을 달성하실 그들의 메시아가 자동적으로 포함되게 되어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퇴락된 천막 회복’과 관련 있습니다. 어질고, 착하고, 순하고, 순박하고 인정 많은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단지 ‘이스라엘에게 내려진 언약’을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지옥행으로 간다고 과연 믿어지시겠습니까? 천국은 사람 됨됨이를 따져서 넣어주는 곳이 아닙니다. 도리어 반대로 덮여진 자들에게는 주어지는 겁니다.

왜 착하고 어진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걸까요? 그것은 그들의 마음 속에 ‘퇴락’ 곧 무너져내림의 속성이 담겨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나는 착하고 어질고 인정받고 남들의 형편을 극히 배려하려고 한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곱디고운 마음씨가 죄가 되는 줄을 모르겠다”는 식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방식은 탕자 비유에서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 비유는, 탕자가 아닌 맏이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즉 아버지께서 옆에 있는 큰 아들보고 묻습니다. “너는 지금까지 아비 말을 거역한 적이 있는가? 맏이가 대답합니다. ”없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말씀하십니다. ”지옥가거라“고 말입니다.

즉 천국 갈 사람은 자기 속에 ‘퇴락’의 요소가 들어가 있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이 퇴락의 요소가 없는 자들은 지옥가기 위해 분류된 자들입니다. 언약이 뭐길래 이런 희귀한 일이 벌어지는 겁니까? 그것은 언약에서 하나님의 자기 아들 버리심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요소를 표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택한 겁니다,

그래서 생긴 것이 다윗 언약이요 ‘다윗의 장막’입니다. 다윗을 배후에서 조종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장차 오실 예수님의 위상을 다윗 속에 미리 불어넣으시는 겁니다. ‘다윗 언약’과 ‘다윗의 장막’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다윗 언약’이 장만되면 주변에서 원수들이 몰려오는데 이 ‘원수’들은 다윗의 원수가 아니라 장차 오실 메시아의 원수입니다.

즉 예수님이 주님 되시는 것에 반발심을 갖고 있는 세력들이 미리 힘들을 발휘하는 것이 다윗이라는 개인에게 쏟아지는 겁니다. 오늘날에는 ‘다윗언약’이 아니라 ‘새언약’입니다. ‘새언약’의 특징은 ‘예수님의 버림받으심’입니다. 그것도 의인을 위함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서 버림받으심입니다.

따라서 다윗을 배후에서 조종하듯이, 오늘날 성도들의 배후에는 이 ‘새언약’이 조정하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성도는 늘 죄인으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새 언약이라는 것이, 죄로 인해 흠없는 분의 살과 피‘를 그 내용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죽어야 한다는 것이 새언약의 요구사항입니다.

사울이 사도 바울이 되곤 난 뒤에는 다음과 말을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것은 일반인들과 소통될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 사람 속에 예수님의 본성의 담김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타락한 자를 천국 백성 되게 하시는 능력이 날마다 우리 속에서 피어오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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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이한례

 26강-암9장11-15(무너진 천막 회복)12042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아모스9장11절에서 15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284 페이지입니다.

아모스911-15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키고 옛적과 같이 세우고 저희로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는 이를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그 때에 밭가는 자가 곡식 베는 자의 뒤를 이으며 포도를 밟는 자가 씨 뿌리는 자의 뒤를 이으며 산들은 단 포도주를 흘리며 작은 산들은 녹으리라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리니 저희가 황무한 성읍을 건축하고 거하며 포도원들을 심고 그 포도주를 마시며 과원들을 만들고 그 과실을 먹으리라 내가 저희를 그 본토에 심으리니 저희가 나의 준 땅에서 다시 뽑히지 아니하리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뽑히지 아니하리라“하는 것은 ‘뽑아내리라’ 그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너희가 포도원을 심으리라“는 포도의 포도원은 황폐되리라‘ 이렇게 보시면 되고 ”너희들이 다시 이 땅에 살리라“는 ’너희들은 사로잡혀 가리라’ 이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사람들은 뒤에 나오는 ‘우리가 포도를 심고 우리가 뽑히지 아니하리라.’는 우리는 이것을 좋아하는 게 아니고 아예 뽑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히려 그것을 원하죠. 뽑지 말아 달라고 그들은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의 재료로서 쓰여 져야 하기 때문에 현재 내가 잘못된 죄라는 자리에서 뽑아 나와서 주님이 의에 심겨준 곡식들이 되어 줘야 됩니다. 전에는 내 열매, 내 잘난 내 열매가 나왔던 그곳에서 이상하게 내가 행하면서도 ‘예수님만 잘났습니다. 예수님만 영광 받으시옵소서.’라는 아주 희한하고 이상한 열매들이 맺히게 됩니다.

 

인위적으로 교육받아서 해봤자 그건 소용없고, 교육 받았던 그 능력이 아니라 오히려 그게 즐겁고 내 영광보다도 주님의 영광 돌리는 그것이 왠지 편하고 그게 마땅한 것 같고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희열과 기쁨으로 다가오는 그런 순간이 올 때, 그런 상황이 될 때, 그 상황을 오늘 본문 13절에서는 한 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보라 날이 이를찌라” “보라 날이 이를찌라 그때”라고 돼 있죠? 오후에는 별로 어렵게 안하려고 애를 써도 할 수 없습니다. 할 수밖에 없어요. 사람들은 어떤 날, 4월 29일 같으면, 4월 28일과 4월 30일 중간에 끼어있는 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4월 29일, 4월 28일, 29일, 30일, 그 날 속에는 날이 없어요. 날이 없습니다. 우리는 29일 날을 뽑아낼 수가 있는데 주님께서는 28과 29와 30을 똑같이 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의 날은 무엇이냐 하면 위에서 다시 때가 이르면, 때가 주어지면, 그 다음에 4월 29일 날은 특이한 날이라고 지정하시는 분이 등장하면 비로소 ‘야, 4월 29일이 특이한 날이구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여러분, 4월 15일이 무슨 날인지 시사에 문제가 밝은 사람들은 알 겁니다. 북한문제 관련된 사람은 알거예요. 그날이 무슨 날이냐 하면 저쪽에서 위대하신 교주 김일성 생일입니다. 그런데 제 딸이 그날 생일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 김일성 생일만 그날을 나열시키느냐 말이죠. 제 딸 보기에는 제 딸을 집어넣으면 그 같은 4월 15일이 다른 의미로서 상승됩니다. 같은 15일을 통해서 노선이 둘로 나누어져 나오죠.

 

마태복음 1장은 교회 어지간한 사람은 다 봅니다. 왜냐 하면 교회에서 성경을 읽으라 하니까 억지로 마태복음 1장을 읽거든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그걸 읽어놓고 다음부터는 재미가 없습니다. 재미가 하나도 없죠. 누가 누굴 낳고 누가 누굴 낳고, 어쩌라고? 누구는 족보가 없나? 나는 경주 이씨 무슨 파다. 나도 양파다, 나도 새나라 파다. 파가 죽 나오는데 재미가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러나 여기서 깊이 있게 보면 여기서 갈라져 나왔던 자료가 나옵니다. 그 교차로, 같은 육의 족보에서 하늘로 이어지는 사다리같이 하늘로 올라가는 족보로서 이렇게 갈라져 나오는 족보가 있어요. 그 하늘로 갈라져 나오는 것이 입체적으로 보면 수평에다 수직으로 보이지만 족보에서는 이걸 둘 다 같이 수평면으로 평면으로 집어넣다 보니까 이 족보에서 다른 이방족보와 끼어드는 식으로 표현이 그렇게 돼 있습니다.

 

다말에게서, 룻에게서, 이건 끼어들 자리도 아니에요. 끼어들 자리도 아닌데 이방민족이 끼어들어서 그 끼어든 편에 예수님이 같이 끼어드니까 유대인들은 ‘어디서 건방지게 언약도 없는 아브라함 자손도 아닌 너희들이 어디서 끼어들어.’라고 매몰차게 침을 당하는 속에서 예수님도 같이 내침을 당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아침에 ‘복’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한테 버림받은 게 복이라고. 버림받은 사실을 알므로 오히려 내가 버림받아야 마땅함을 알 때 그 관계성이 이미 마태복음 1장 족보에 나와 있는 구원받은 아주 낯선 족보에 투입된 족보에 합류됐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그 날이 이른다는 말을 유대인들이 들으면 어떻게 보느냐 하면 ‘날짜 계산하자, 주께서 어느 날에 오실까, 이렇게 기다리는데’ 다 헛수고입니다. 내가 아는 달력 속에 그 다음 날이, 날이 아니라, ‘주께서 때가 이르매’라고 선언하시는 그 상황이 곧 주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상황, 현실이 만들어진 그날이 올 것이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메시야가 오는 그때를 기다리라 그 말이지, 니가 달력 계산하라 이 말이 아니죠.

 

옛날에 1992년 10월 28일 날입니까? 다미선교회에서 종말이 온다고 한복집 아주 대박 맞았습니다. 하얀 한복 해 입는다고. 왔습니까? 안 오니까 그 다음부터는 그들은 돈만 챙겨놓고 안 온다하니까 다시 계산이 잘못됐다고, 숫자가 잘못됐다. 지가 컴퓨터로 합니까? 숫자가 잘못되게. 사람들이 거기에 속아 넘어간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내가 아는 종말도 내가 날짜 계산하면 내가 알아챌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 자기한테 장착돼 있으니까 그런 마귀들이 그렇게 분위기를 띄우는데 이건 자연적으로 말려들 수밖에 없는 거예요.

 

어떤 의미에서는 ‘목사님, 언제쯤 오십니까?’ 기다리면 목사들이 준비된 날짜 계산해서 ‘재산 다 바치고 교회다 바치고 나오세요.’ 이럴 수밖에 없는 겁니다. 거기에 그때 정말 애매하게 이 장림이란 그 사람 혼자 죄를 다 뒤집어썼어요. 날짜 계산 혼자 뒤집어썼는데 그 당시 90%가 넘는 목사들이 다 날짜 계산 했었습니다. 큰 교회, 서울에 있는 조O 큰 교회, 대구에 있는 김O 무슨 교회, 동O 무슨 교회, 유명한 고심 측의 모든 교회 목사들이 전부 다 날짜 계산 했었습니다. 이 장림씨가 애매하게 혼자 십자가 지고 나자빠지니까 전부 다 철수 했죠. 문제는 장사가 되니까 요새 슬그머니 계산을 합니다. 여호와 증인, 전부 다 이단들이 계산해서 이성적으로 납득이 되는 식으로 하겠다는 거죠.

 

그래서 오늘 본문 들어가기 전에 먼저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들어가겠습니다. 뭐냐 하면 세계여행에 대해서 다큐멘터리를 하는데 우리가 여행을 못가니까 터키, 이런 데 가서 우리나라 PD가 여행하면서 느낀 것을 필름으로 찍어서 보여주잖아요. 제가 그것을 대리로 체험해야 돼서 그것을 자주 보는데 보면서 느끼는 것은 그 이슬람교에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 굉장히 친절하다는 겁니다. 특히 베트남, 캄보디아, 이런 동남아 쪽의 이런 분들은 순박할 정도로, 바보야, 할 정도로 너무너무 이방인에게 잘해줍니다.

 

친절하고 지난번에 보니까 길을 알려주는데 ‘여기서 박물관이 어딥니까?‘ 하니까 아예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서 어떤 아저씨가 친절하게 길을 알려줘요. 우리나라에서는 있을 수 없는 거거든요. 그렇게 친절하고 다정다감하고 이웃에 대해서 배려할 줄 알고 자기만 생각하지 않고 남들을 배려할 줄 알고 조금이라고 자기 주문한 것 말고 다른 것 필요 없느냐고 물어서 그냥 사람자체, 어떤 물건 팔려는 것이 아니고, 친밀하게 가져가는 그런 친절한 사람, 지옥 갑니다.

 

문제는 그거예요. 언약을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지옥을 간다는 거예요. 그래서 단지 하나님의 언약을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이 지옥 가는데 이것은 멀리 이슬람교 문제가 아니고 교회내의 문제거든요. 친절하고 담임 자랑하고 훌륭하고 사랑을 많이 나누는데 ‘언약 아십니까?’ ‘모릅니다.’ ‘지옥 갑니다.’ 똑같은 원칙을 적용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저쪽에서 화를 내면서 언약이 뭐길래, 도대체 예수가 뭐길래, 사람 되려고 인간이 인간답게 정 나누며 사는 그게 교회고 하나님이 뜻이고 그게 성도의 삶이고 그게 상식인데, 언약이 뭐길래, 십자가가 뭐길래, 피가 뭐길래, 그거 모른다고 그렇게 친절하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 지옥 간다. 그게 해도 해도 너무 심한 말이 아닌가, 이렇게 나올 겁니다. 거기다 맞은편에서 한마디 더 붙이죠. ‘그래, 언약 아는 너희들, 십자가 아는 너희들, 너희들 돈만 알고 뭐도 모르고 사랑도 모르고 교회 와서 인사도 안 하고, 그래 너희끼리 잘 먹고 잘 살아.’ 꼭 이런 소리 하고 내뱉고 가죠.

 

그런데 그들이 던진 질문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언약이 뭐길래 인간이 할 수 있는 소박한 기본적인 사랑과 인정마저도 그것이 언약이 뭐길래, 그 앞에서 지옥이고 죽음이고 저주고 심판의 근거가 될 수 있느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그 문제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여기 11절에 보면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다음에 나온 단어,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라고 돼 있죠. 퇴락했다는 것은 이것이 폐허가 되었다. 이런 뜻이거든요.

 

제가 초등학교 때 읽었던 시조에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네’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지금 나이 들어서 가끔 여행해 보면 ‘아, 그걸 많이 느꼈습니다. 오래간만에 고향에 왔는데 그 산천과 건물을 그대로인데 그 친한 동창생들, 친구들 같이 강물에서 고기 잡고 놀던 친구들이 다 어디 갔느냐, 어디 갔어? 아무도 없는 거예요. 아! 산천은 그대로인데 사람은 없구나, 세월이라는 게 허무하구나. 이런 걸 느끼죠.

 

하나님의 퇴락한 천막을 일으킬 때 왜 착하고 어질고 참 순박한 사람이 왜 언약 모른다고 지옥 가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원래 언약이 오기 전까지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일반 사람하고 똑같습니다. 똑같은 거예요. 정 나누고, 그저 친하게 지내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사람 사는 목적이고 그런 겁니다. 하나님은 물론 하나님을 천대하지는 않고 있는 그대로 소박하게 수확을 하면 추수감사를 드리면서 언약이라는 신학적인 골치 아픈 거 필요 없이 마음에 우러나오는 대로 신에게 성의를 표하고 감사하는 것, 이게 뭐가 잘못된 겁니까?

 

무식한 할머니가 글자도 모르고 성경도 모르는데, 그냥 마음속에 ‘하나님 고맙습니다.’ 해서 뭔가 강단에 고구마나 포도를 바치고, 이게 뭐가 허물이고 뭐가 탓할 일이냐 말이죠. 그것도 하나의 성의 표시고 정성의 표시인데.

 

여기서 퇴락은 무너지는 거죠. 무너졌다는 게 그 할머니한테는 무너졌다는 게 누락된 게 문제입니다. 와장창 무너지고 망가지고 이렇게 착하고 이렇게 어질고,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우리 어머니를 옛날 사람들은 천심이라 했어요. 천심(天心), 하늘같은 마음 이예요. 시집에서 시키는 대로 다 했으니까 하늘같은 마음 이예요. 지금도 안 착하다는 것은 아니고 말조심해야 돼요. 지금도 천심인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 천심은 죕니다. 이건 무너져야 마땅합니다.’라는 요소가 있느냐 이 말입니다. 늘 천심인데.

 

이 특수한 경험을, 체험을 이스라엘은 있게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고맙다고 여겨야 됩니다. ‘우리나라를 망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돼야 돼요. 이스라엘 나라 국가는 이렇게 져야 됩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우리를 망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이렇게 죽 나와야 돼요. ‘영원하리라.’이러면 안 된다니까요.

 

성전은 이렇게 내부에 무너지게 되는 구조로 돼 있습니다. 그것을 그들은 성전에 그 내막을 그들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그 무너짐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무너지고 다시 짓는 것, ‘설마 무너질 집을 지으라고 한 적이 없겠지?’라고 그렇게 그들은 오해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오셔서 탕자 비유했습니다. 탕자 비유할 때 항상 맏이를 의식했죠. 이 맏이는 한 번도 부모의 말을 거역한 적이 없었다. ‘니 거역한 적 없지?’ ‘예, 저는 아버지 말씀을 거역한 적 없습니다.’ ‘고뤠~’ ‘예’  ‘지옥 가거라.’ 요거거든요. 이게 도대체 신학을 하던 안 하든, 신학을 해도 이 말을 못 믿습니다. 신학자들 이 말 못 믿습니다. 신학을 함으로써 나의 가치가 더 업 되었다. 나의 가치가 돋우어졌다고 여기지, 일반 교인들이 교회 와서 제자 훈련 받으면 자기의 가치가 품위가 더 높아졌다고 생각하지, 이게 아무 소용이 없고 오히려 나의 죄를 노출시킨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거예요. 아니 죄 지을 걸 뭣 때문에 고생해서 유학까지 가서 공부하겠습니까? 아무것도 아닌 걸 가지고. 뭐라고 생각하고 갔을 거 아니에요?

 

서울에 있는 남OO교회에 박OO목사님은 미국에 유학 가서 유학을 자진해서 접었습니다. 이게 복음하고 무슨 관련 있느냐, 이게 나의 가치를 높이는 거와 관련 있지, 이게 복음하고 무슨 관련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내가 똑똑한 목사 되기보다는 차라기 설교나 들으련다.’ 라고 그냥 왔어요. 아마 내가 보기에는 아파서 온 것 같은데. 몸이 아파서 그냥 오는 경우가 많거든요. 유학 갔다가 안 되는 것은 몸이 아파서 그냥 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그렇게 믿어줘야 되죠. 그렇다고 유학 하지 마라가 아니라 박사 학위를 받고 다 하세요. 하면서 제대로 하세요. 뭐냐 하면 어떻게 해서 이 깊은 학문이 나로 하여금 더욱 더 죄인 되게 하는 요인이 되는가를 아시면서 공부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걸 그대로 공부해서 그대로 한국 신학교에 와서 강단에서 또는 학교, 신학교에서 그대로 목사 될 사람에게 그대로 퍼뜨립니다. ‘신학 박사 이것도 소용없다. 목사 그게 뭐가 중요하느냐, 섬겨라, 죄인의 괴수로서.‘ 이렇게 외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신학교 보면 그런 교수들이 거의 없어요. 본인이 그런 믿음 없는 경우도 대부분이지만 만약에 그런 믿음을 가지고 섰으면 학교에서 커트되죠. 마귀가 도사거든요. 대번 잘라버립니다. 모든 현실이 그렇습니다. 그러니 ‘예수 이름으로 핍박을 받을 때는 오히려 기뻐하라. 선지자들도 너와 같이 핍박을 받았다.’

 

어제 제가 모임에 가서 한 것처럼 나 혼자 도를 닦고 마음을 낮추고 수양을 어떻게 하느냐, 이렇게 돼 버리면 나 말고 예수님 이름으로 받는 고난과 수단이 내 속에는 발생되지 않아요. 내가 열심히 하다 보니까 미움 받고 하는 그것은 일종의 자기 잘남의 재료로서 자꾸 들어오게 되는 거예요. ‘나 이렇게 고난 받았습니다. 나 핍박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훌륭합니다.’ 이렇게 되지만 성경에서는 너 말고 예수님 때문에 고난 받고 핍박받아야 너는 복 있는 자이지, 너 자존심 챙긴다고 믿음 지킨다고 고난 받는 건 그건 복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퇴락한 것을 회복할 때 어떻게 회복하느냐, 이점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 이라는데 다윗의 무너진 장막이라는 것은 대전 강의에서 이걸 설명했습니다마는 다윗의 무너진 장막이라는 것은 다윗의 생활공간입니다. 우리가 이걸 보통 성전으로 알고 있죠? 다윗의 생활공간 이예요.

 

다윗의 생활공간이라는 것은 제가 친절하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드러 낼 때 자기 앞잡이로 다윗을 세워요. 다윗은 멋도 모르고 하나님께 택함 받아서 자기는 자기 인생사는 겁니다. 마치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해서 앞장세운 것처럼 다윗을 앞장세울 때 다윗은 그냥 자기 성질로 사는 거예요.

 

그런데 다윗이 자기 뜻대로 안 됩니다. 만날 사울에게 쫓겨 다니고 너무나 사는 게 힘들고 친구들은 다 떠나고 친구들이 원수가 돼서 돌아오고,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탄식이 저절로 나오는 식으로 한다고요. 그 말은 다윗이 생각하는 주께서 허용하지 않고, 배후에서 다윗을 조정 하는 겁니다. 인형이 흔들다가 스톱되는 것은 뒤에 테이프를 안 감아줘서 그런 거예요. 주께서 뒤에다가 테이프로 쪼이는 걸 만들어 놓고 시도 때도 없이 계속 쪼여 나갑니다. 니(다윗)는 내가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맘껏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다윗을 욕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 속에 숨어있는 세력, 곧 예수님이 주가 되시는 것에 대해서 반발심을 갖고 있던 숨어있는 요소를 다윗을 통해서 드러내게 하는 겁니다. 예수님 오실 때까지. 예수님 오실 때까지 아브라함과 모세와 이삭과 야곱과 많은 사람을 택해서 그 사람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낯선 인간 행태를 보게 하는 거죠.

 

그러면 선지자들은 본의 아니게 사람들과 어울릴 수가 없는 겁니다. 그리고 오해를 자꾸 받아요. 특히 대표적인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욥이잖아요. 욥은 가만히 있었어요. 가만히 있는데 주시고 가만히 있는데 뺏어갔습니다. 뭐 어쩌라고? 그런데 욥을 보고 친구들이 닦달 낼 때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서 욥에게 테이프를 감아주고 고난도 주시는 분이 나타나서 욥의 친구는 잘못 됐고 욥은 아무 죄가 없다. 이렇게 판결 내립니다. 그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너희들은 너 자신을 위한 너지만 욥은 하나님이 누군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쓰임 받는 하나의 대리자가 되는 거예요. 쓰임 받는 대리자.

 

물론 욥 같은 경우에는 옛날 아브라함 언약에 속하지만 다윗 같은 경우는 다윗 언약을 보여주기 위해서 다윗을 사용한 겁니다. 다윗 따로 있고 다윗 언약 따로 있는 거예요. 다윗은 앞에 있으면 뒤에 다윗 언약이 다윗을 다른 다윗으로 바뀌도록 조정을 해온 겁니다. 이 말은 어렵지 않아야 되는 이유가 오늘날은 우리 있으면 우리 뒤에 테이프를 감아 주는 것은 예수님의 피 묻은 새 언약입니다. 내 살과 내 피로 말미암아 너는 의인이 되어서 천국 간다. 그러면 졸지에 그 앞에 있는 우리 자신의 모든 선함과 착함은 졸지에 아무짝도 소용없는 게 되는 겁니다.

 

내가 나를 꾸미고 나를 치장하고 내가 남하고 비교해서 남한테 기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치고 애를 쓰는 이 모든 것은 뒤에서 조정하시는 주님께서는 ‘쓸데없이 니 힘이나 빼고 있나? 아이고, 해봐야 니 자랑밖에 더 돼? 니 기도 자랑하고 봉사 자랑하고 니 복 받은 자랑밖에 더 돼?’ 뒤에선 십자가로 이렇게 조정 당할 때 ‘주여 죄인 맞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럴 때 다른 사람들이 ‘저 인간 이상한 것 같아. 뭐 실컷 봉사해 놓고 난 죄인입니다. 앞뒤가 맞는 소릴 해야지, 저 사람 연결이 안 돼, 저 사람 혼자 있는 게 아닌 것 같아. 뭔가 배후에 조정자가 있는 것 같아.’라는 느낌을 주변에 줄 때 그 사람이 예수의 증인 되는 겁니다.

 

우리가 느끼는 게 뭐냐 만날 ‘너는 죽어야 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나니 나는 죽고 그리스도 안에 산다.’라는 이야기를 사도바울이 했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가서 ‘뭐? 작은 소리로 하지 말고 큰 소리로 하라고. 뭐라고?’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나니,’ ‘뭐라고? 큰 소리로 해 보라니까.’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죽고 그리스도 안에 산다.’ ‘무슨 소리야?’ 작은 소리로 하나 큰 소리로 하나 무슨 소리 하나 못 알아 듣기는 마찬가지예요.

 

또 사도바울이 궁시렁, 궁시렁 ‘뭔데?’ ‘내 안에 십자가의 흔적을 가졌노라.’ ‘뭐라고?’ ‘십자가의 흔적을 가졌노라.’ ‘무슨 소리야?’ 또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 ’뭐?‘ ’세상에 대해서 내가 죽고 세상은 나에 대해서 십자가 안에서 죽었다.‘ 이 말입니다. ’그래 그 말이 무슨 소리야?‘ 그게 무슨 소리냐 이 말이죠.

 

왜 우리가 납득이 되고 알아듣는 소리를 왜 안하고 있느냐 라는 식으로 해서 질타를 받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사도바울은 ‘나는 죄인 중에 괴수기 때문에 나는 퇴락해야 됩니다. 내가 퇴락해야 된다고 알려준 분이 나로 하여금 그날 그때 예수님 날에 아모스 9장 11절의 말씀을 내 안에 성취시킨 그날에 속했기 때문에, 그때에 속했기 때문에, 그 환경에 속했기 때문에 나는 궁시렁 궁시렁 지금 엉뚱한 성경 말씀이라는 용어를 입을 통해서 지금 돌출되고 있는 겁니다.

 

한마디 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과거라 할 때 심판받는 과거, 심판받는 현장이 있다 할 때 우리는 과거에 심판받는 것은 이미 우리 시간관념에서는 지나간 걸로 여깁니다. 옛날에 이스라엘이 심판받았다. ‘꼴좋다. 잘 됐다. 그래 심판받아 마땅하지.‘이런다고요. 우리는 과거에 아무리 험난한 재난을 받아도 지나간 것은 그렇게 위협적이지 않아요. 그런데 코앞에 연필 깎아서 코앞에 딱 들이대면 요거는 바로 현장에 있는 위협에서 무서워합니다.

 

꿈속에서는 절벽에 떨어져도 그건 꿈 깨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약간 식은 땀 닦으면 그만이지만 지금 당장 배 몰고 있으면 기가 막힐 상황이죠. 우리는 우리 시간대를 유지하기 때문에 만날 ‘겁난다. 겁 안 난다. 겁난다. 겁 안 난다. 해결 못 한다. 해결 됐다. 걱정 근심하다가 기뻤다가 근심하다.’ 이러거든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진짜 역사를 과거 역사에 있었던 일은 지금 현재 상태라. 현재 진행 중이라는 겁니다. 그때 위험하다. 험하다 험악하다. 이렇게 어렵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 원리와 그 기준이 뭐냐, 그 어려움과 위험스러운 것을 왜 이렇게 말하느냐 하면, 이미 그 모든 위험에서부터 벗어남을 너 속에 뒤에서 테이프로, 또는 파이프로 이미 에너지를 주고 있었다는 그 가치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 과거 위험했던 것들을 우리 앞에서 전경으로 펼치게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망했다. ‘아이쿠, 우리는 그렇게 망하면 안 되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너도 망해야 되는데, 뒤에 내 살과 피가 이런 위험에서 이미 너를 벗어나게 했다. 이미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는 요소를 계속 우리 속에 집어넣으니까 우리 속에 있는 나의 것이 아니고 우리 속에 있는 예수님의 것으로 인하여 어떠한 난처하고 위협적인 상황이 있더라도 ’아! 주님의 그 날과 그때를 위해서 우리를 도구로 사용하는구나.‘ 이런 것에도 겁내지 말고 당당하라고, 우리를 사용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어떠한 일을 당하더라도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을 내가 할 수 있습니다.‘ 하는 거예요. 이걸 잘못 생각하면 큰 일 납니다. 내가 어떠한 지경에 있더라도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렇게 답변해야 돼요. ‘주님이여, 제가 무엇으로 감사할까요?’ 요렇게 기도하시면 되는 겁니다. ‘무엇으로 감사할까요?’ ‘이거 해결해 달라.’고 하지 마세요. 이건 이미 해결 받았는데 뭘 해결해 달라는 겁니까? ‘무엇에 대해서 감사할까요?’ ‘차타고 오토바이 박았나? 고걸로 감사해야지, 무엇으로 감사할까요? 항상 감사할 준비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미 그것을 해결된 자로서 예수님을 증거 하는 존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환난과 핍박이 올지라도 그런 것이 이미 염두에 두고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다 가져가셨기에 우리는 어떠한 지점에서도 어떠한 상황에서도 당당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