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아모스 2:4-5 / 유일한 의 본문
유일한 의
이근호
2020년 9월 9일
본문 말씀: 아모스 2:4-5
(2:4)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유다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그의 조상들이 따라가던 거짓 것에 미혹되었음이라
(2:5) 내가 유다에 불을 보내리니 예루살렘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서너 가지’의 죄라는 것은 어떤 특정된 한 가지 죄로 인하여 벌을 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만약에 특정된 한 가지 죄로 인하여 어느 민족이 멸망한다면 그 특정한 죄를 범하지 않는 민족이 멸망 당한 근거가 성립되지 않는 바가 됩니다. 이스라엘을 둘러싼 주변의 모든 나라들이 공통적으로 ‘서너 가지 죄’로 인해 멸망당한다는 말은 하나님 보시기에 애초부터 멸망 대상이라는 뜻입니다.
굳이 열 가지, 백 가지 죄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들이 멸망당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보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서너 가지 죄’에 대해서 유다나라도 해당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다른 이방나라에게 지적하는 ‘서너 가지 죄’는 그 죄가 나올 수 밖에 없게 하는 근원적인 중심성이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는 곧 이방민족들은 망하면서도 망하는 이유도 해답도 모르면서 그냥 망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이방민족은 ‘망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등장해야 될 나라라는 겁니다. 망하는 것은 망해야 하는 목적에 충족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운명입니다. 하지만 유다 나라에 대해서 분명하게 하나님께의 죄를 지적하는 이유가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거짓 것’에 주목하라는 겁니다. 즉 유다 나라가 이방민족들의 강성이 부러워서 그들의 신을 관심을 가졌는데 바로 그 그들의 신이 ‘거짓 것’이라고 규정될 수 있습니다. 거짓 것이 그들의 본성을 대변하기에 그들은 멸망될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유다 나라에게는 ‘거짓 것’이라는 점을 밝히시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유다 나라가 하나님의 율법을 멸시하고 율례를 지키기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거짓 것’을 신봉하는 것은 그저 그들이 행하는 일 중에 하나를 추가시킨 경우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무시하는 행위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유다 나라와 율법과의 관계를 알아야 합니다.
이방민족은 하나님의 약속없이 출현된 나라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원래 없던 나라인 것이 약속을 구현하기 위해서 등장된 나라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내부에 약속이 품어 있다는 말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사람들이 사람을 낳고 그 사람들이 또 사람들을 낳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스라엘은 약속이 약속을 낳고 약속이 약속을 이어가는 식입니다.
그 약속 안에는 ‘하나님의 의’가 담겨 있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즉 하나님께서 ‘의’가 되는 조건을 가지시고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셨고 그래서 생긴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이 의가 있는 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에게 하나님의 거주지가 됩니다.
하나님의 거주지의 특징은, 오직 거기에서만 거룩이 있고 의가 있고 용서의 능력이 흘려나옵니다. 이는 그 어떤 사적 영역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개인적으로 평생 쌓고 끌고 지니고 온 그 의를 가지고서는 결코 하나님의 거주지 노릇을 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약속이 없는 이방민족에서는 오로지 자신의 의를 가지고 자기를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내려주신 율법이라는 것은 죄가 있는 곳이기에 주어지는 겁니다. 마치 어느 평화로운 마을에 수배된 범죄자가 숨어들어왔다면 경찰 인력이 그 마음을 포위할 수밖에 없습니다. 범인을 색출해내기 위해서 동원된 경찰입니다. 이 경찰의 기능이 율법의 기능입니다.
특히 유다나라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성전이 있습니다. 이 성전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는 곳입니다. 이 이름에게만 하나님의 의와 거룩이 있습니다. 따라서 참으로 유다나라가 이 성전의 의의를 안다면 자기 이름을 익명으로 돌려야 하는 겁니다. 즉 개인이 자신의 이름에 걸고 살아가서는 아니된다는 말입니다.
이사야 6:5에 보면,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사야 본인만 죄인이 아닐 자기 나라 모든 자들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겁니다. 바로 그 가운데 하나님의 보좌가 계시는 겁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성전 중심성 앞에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이름을 부정해야 하는 겁니다. 개인적인 사적 영역이 자신의 최종점이 아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방나라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자기에게 발휘되는 그 힘으로 최종 자기 자신이 잘되는 쪽으로 쓰여진다는 겁니다. 유다나라도 이런 이방민족에 현혹되었던 겁니다.
즉 ‘최종적으로 마주하는 것은 결국 나 뿐이다. 그래서 나는 나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 이게 이방나라의 한계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결국 자신들이 왜 망해야 하는지 해답을 모르고 사는 겁니다. 열왕기상 8장에 보면, 솔로몬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것은 이 이스라엘에게 일어나는 그 어떤 일이라도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하나님의 영광된 그 자리를 위해서 지켜주신다는 약속을 받게 되는 기도입니다.
인간들이 자기가 보기에 참으로 거룩한 것 같지만, 막상 나의 것이 잃게 되면 분노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의 혜택을 입은 사람이라면 더 이상 이 현상세계를 떠나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을 약속의 세계로 넘어가 버리게 됩니다. 누가복음 16:26에 보면,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천국을 알고 구원받는다고 자부하더라도 여전히 사적 영역에 머물러 있는 자라면, 결국에는 그의 마지막은 ‘최선을 다한 자기’에게로 막혀버리게 됩니다. 성도가 세상에 살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끝은 어디를 닿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유일하신 의(義)인 ‘피’와 닿는 자라면 다시 이 현상 세계 사람으로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이 오셨을 때, 사람들은 자신의 의를 지켜내기 위해서 예수님을 죽음으로 추방시켰습니다. 이로소 이 세상은 거짓의 세계입니다. 이 세상을 사는 나도 가짜요 부부도 가짜요 교회도 가짜요 국가도 가짜요 우리의 목숨도 가짜입니다. 그 이유는, 이 축적된 의로서 자신의 영원히 거주지를 얻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나라를 깍아냅니다. 우상요소를 깎아낼 때, 비록 유다나라를 멸망하지만 그 안에 진실로 약속과 닿아있는 자는 그 멸망 자체를 감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거주지가 있음을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용서를 운반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3강-암 2장 4-5절(유일한 의)20090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아모스 2장 4-5절까지입니다.
아모스 2:4-5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의 서너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그 열조의 따라가던 거짓것에 미혹하였음이라 내가 유다에 불을 보내리니 예루살렘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여기 보면 “서너 가지 죄”가 나오는데 이 서너 가지 죄, 아모스1장에 ‘반복구’처럼 쓰이는 문장이 “서너 가지 죄”입니다. 1장 3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다메섹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그 다음에 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사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9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두로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11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에돔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13절에 “암몬 자손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그리고 2장 1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모압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여기 나오는 다메섹, 그 다음에 가사, 그 다음에 두로, 그 다음에 에돔, 그 다음에 암몬, 모압. 이 나라들은 전부다 이스라엘과 인접했던 나라였습니다. 북쪽의 나라가 다메섹, 그리고 서남쪽에 있는 나라가 가사, 지금은 가자지역이라 하지요, 블레셋 나라.
그 다음에 9절에 나오는 두로는 이스라엘의 서북쪽의 나라, 지금의 티로라고 하는 지중해 연안의 나라입니다. 그 다음 11절의 에돔은 이스라엘 동쪽에 있는 나라, 지금 이스라엘에 속하고 그 다음에 암몬은 요르단에 속하고, 2장 1절에 나오는 모압도 역시 요르단에 속하는 겁니다.
이 나라들을 하나님께서 멸망시키는데 멸망시키는 그것이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전부 다 멸망시킵니다. 서너 가지 죄, 다섯 가지나 열 가지, 백가지가 아니라 왜 서너 가지 죄로 굳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망시킬 때는 서너 가지 죄만 해도 충분하다는 겁니다.
이것은 멸망되는 것을 기정사실로 여기시고 멸망시킬 때 멸망시키는 구실을 주님께서는 각자 서너 가지 죄만 찾아내는 거예요. 서너 가지 죄라는 것은 멸망되어야 될 이유에서 파생된 죄들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그 나라가 가사인지 두로인지 모압인지 암몬인지 에돔인지 구분하지 않고 똑같이 서너 가지 죄로 통일성을 갖춰서 주님께서는 그들에 벌을 내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방민족의 운명은 어차피 소멸되라고 하나님께서 만든 나라라는 겁니다.
때가 된 거예요. 때가 되어서 소멸시키는 겁니다. 없애버리는 거예요. 없앨 때 3절에 보게 되면 지금의 시리아지요, 다메섹이 길르앗이라는 그 동네를 철 타작하듯이 잔인하게 압박했다 해서 그걸 구실로 멸망시키고 그 다음에 1장 6절에 보면 가자지역, 요새 블레셋지역에 대해서는 “저희가 모든 사로잡은 자를 끌어 에돔에 붙였음이라”고 해서 이스라엘 사람들 잡아다 에돔나라에 노예로 판 그것이 서너 가지 죄에 해당이 되는 겁니다.
두로에 대해서는 9절에 보면 역시 “모든 사로잡은 자를 에돔에 붙였음이라.” 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에돔에 노예로 팔아먹었고, 나중에 헬라사람에게도 노예장사를 했고, 10절에 “내가 두로성에 불을 보내리니 그 궁궐들을 사르리라”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11절에 나오는 에돔은 “긍휼을 버리며 노가 항상 맹렬하며 분을 끝 없이 품었음이라.”
그래서 12절에 “내가 데만에 불을 보내리니 보스라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이렇게 되어 있고 13절에 암몬자손은 “길르앗의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갈랐음이니라.”라고 해서 잔인하게 죽였다는 것을 죄의 핵심으로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2장 1절에 모압에 대해서는 “이는 저가 에돔 왕의 뼈를 불살라 회를 만들었음이라.” 해서 서쪽으로 옆에 있는 에돔나라의 죽은 왕을 끄집어내서 잔인하게 가루로 만드는 그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멸망시킨다고 되어 있습니다.
방금 언급한 죄를 그들이 만약에 안 지었다고 한다면 그 나라는 오랫동안 번성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나오는 모든 행위들은 어떤 힘, 자기가 그 나라를 건사하기에 뭔가 힘을 발휘하게 되어 있고요, 그 힘은 또 다른 힘을 만나가지고 상대를 죽이지 아니하면, 그것도 잔인하게 죽이지 아니하면 내가 잔인하게 당한다는 그 원칙이 이미 모든 이방민족에 다 자각되고 있었던 거예요.
잔인하게 죽이고 싶어서 죽인 것이 아니고 내가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저쪽에서 똑같은 입장으로 내가 당한다는 거예요.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이방민족자체가 어떤 한계에 놓여 있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올림픽경기 보면, 작은 보드를 타고 반원으로 되어 있는 벽을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하면서 공중에서 재주 두 바퀴 돌고 그렇게 한 3분하다가 내려오면 메달 주는 그런 경기 있어요.
반원의 골짜기에서 보드를 타고 재주를 부려봤자 그 반원바깥으로 나가면 실격이 되는 거예요.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어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항아리 안에 담긴 신세가 되어서 아무리 그들이 바르게 살고자 해도 결국은 하나님 보시기에 멸망할 수밖에 없는 그런 처지에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어야 되는가? 오늘 본문에 보면, 여호와께서 다른 말로 하면 이방나라를, 아무런 대책도 없고 아무런 해답도 없이 다만 소멸시키기 위해서 그들로 하여금 힘을 이리저리 발휘하게 하시는 하나님, 멸망될 수밖에 없는 운명으로 그렇게 만드신 그 여호와 하나님께서 유다에게도 마찬가지로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벌을 돌이키지 아니한다, 너희들도 똑 마찬가지로 멸망당해야 된다.
그러나 이 유다민족과 다른 이방민족과의 차이점이 어디에 있느냐? 구체적으로 4절에 “이는 저희가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그 열조의 따라가던 거짓것에 미혹하였음이라”라고 되어 있어요. 유다민족에게만 무슨 단어를 쓰느냐 하면, 거짓 것, 진실 되지 않은 거짓 것을 섬겼기 때문에 이방민족이 서너 가지 죄로 멸망하는 것과 동일하게 너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서너 가지 죄에 의해서 멸망해야 된다.
서너 가지 죄만 해도 충분하게 유다든 이방민족이든 멸망하는 데는 하나님이 그만한 정당성을 가진다는 거예요. 서너 가지 죄. 차이점이 뭐냐? 이방민족은 해답이 없어요. 그들이 멸망당하면서도 왜 멸망당하는지, 왜 소멸되는지 이유가 없어요. 그들은 자신이 거짓 것이라는 조차도 몰라요. 그냥 태어나서 최선을 다하여 살 뿐이에요.
우리 자신이 살아가는 자체가 거짓이라는 생각을, 그들은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는 어떤 기준점이 없어요. 태어나서 살다가 그냥 죽지요. 그것뿐이에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네가 서너 가지 죄, 그보다 더 많은 죄를 지었지만 서너 가지만 따져도 너는 불바다 되어도 마땅한 그러한 존재야, 라고 질책을 당하는 대상이 되는 겁니다.
유다도 거짓 것을 섬겼기 때문에. 그 거짓 것이 이방민족의 것이거든요. “이방민족 것을 동일하게 섬겼기 때문에 이방민족의 운명대로 너희들은 가야 된다. 그런데 너희들은 알아야 된다. 그게 바로 거짓 것이었다. 진실이 아니다. 진실이 아니었다. 거짓이었다.” 라고 유다지파한테만 그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그 거짓 것이 왜 벌을 받아야 되느냐? 그 거짓 것으로 인하여 4절에 보면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가 되고 말아요.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고. 그러니까 거짓 것의 용도가 뭐냐? 율법도 지키고 거짓 것, 우상도 섬기면 되지 않겠느냐 하지만 우상을 섬기는 그 자세가 바로 율법 율례를 무시하고 지키지 아니한 자세고 모습이라는 겁니다. 거짓 것에 마음을 둔다는 자체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유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도대체 율법이 뭐냐, 율례가 뭐냐, 를 다른 민족은 망해도 모르지만 유다지파에게는 해답을 이야기하는 거지요. 미리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율법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원하는 의가 단 하나로서 유일하게 존재한다는 것, 하나님이 원하는 의가 단 하나로서 이미 하나님께서 율법 속에 제공했다는 그것이 바로 율법의 목적입니다.
이래가지고는 제 말의 취지를 잘 모르겠지요.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인간은 자기 의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구원에 있어서 인간세계에서 가르치는, 기독교나 모든 종교에서 가르치는 그 교리가 근본적으로 다 우상적이고, 엉터리고, 거짓이라는 뜻이에요.
인간의 모든 종교라 하는 것은 네 의로 네가 구원 받는다, 이것과 관련되어 있어요. 네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네가 의로워야 돼. 이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유다나라에서는 애초부터 하나님의 율법이 주어졌고 그 율법에는 어떤 중심지를 만들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성전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다나라에 다윗을 통해서 약속을 줬는데 인간은 인간을 낳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약속을 낳아요. 계속해서 유다나라에 약속에서 약속이 이어져 가는데 그 약속의 핵심부분이 성전입니다. 우리가 미리 아모스 마지막 결론부분 9장 11절에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에요. 유다나라의 존재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자기가 살만한 거주지를 만들기 위해서 유다나라를 만든 겁니다. 이방나라는 애초부터 하나님의 거주지 대상이 안돼요. 그래서 하나님의 계획은 이래요. 하나님의 거주지가 완성이 되게 되면 이방나라는 어떤 구실을 대서라도 이건 다 제거되어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거주지가 아닌 것은 다 삭제시켜 버리고 없애버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제 목숨 걸고 자신 있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거주지가 생기면 거주지가 아닌 것은 다 없애버려요. 다 불로서 이 핑계 저 핑계 죄지었다는 핑계로 다 없애버립니다. 핑계정도가 아니지요. 진실인데, 왜냐하면 하나님이 거주하려면 하나님의 만족스런 의가 있는 그 현장이어야 해요. 하나님의 의가 만들어지는 현장이어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는 모든 율법이 거기에 집중돼야 돼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모여져야 돼요. 약속이 그 안에 다 모여져야 돼요. 그렇다면 이 유다나라의 특징은 뭐냐? 다른 나라는 나라가 있고 “똑바로 해. 이렇게 똑바로 안 해? 그러면 멸망당한다.” 이렇게 되지만 유다나라의 경우,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특징이 뭐냐?
이 나라를 하나님이 친히 먼저 세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친히 먼저 만들고 이미 만들어진 그 나라에서 하나님께서 깎아내는 작업을 하는 겁니다. 옛날 중세 때 조각가들이 조각을 어떻게 했느냐 하면 깎아내는 거예요. 직육면체 대리석을 놓고 외부에서부터 깎아내는 겁니다.
깎아내면 뭔가 작품 하나 나오지요. 유다나라에 주님의 거주지가 이미 들어 있는데 유다나라 이 사람들이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 나라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거짓 것, 이방민족들이 하는 버릇대로 ‘우리도 저 사람들처럼 잘 살아보자’ 해서 여호와를 버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버리고 하나님의 법도와 율례를 무시하고, 율법을 멸시하고 저쪽 법대로 그냥 따라간 거예요.
왜? 번창하고 잘 먹고 잘사니까요. 그들은 잘 먹고 잘사는 것이 복을 받아서 잘 먹고 잘 산다 생각한 겁니다. 두로같은 지방은 너무너무 잘 살았어요. 모든 나라가 다 흠모했어요. 무역, 장사를 해서 이윤을 많이 남기니까 여분의 소득이 굉장히 많은 거예요. 두로가 지중해의 무역항이니까.
이사야서 같은 경우에 두로가 너무 잘사니까 남부러울 것이 없어요. 그런데 그 두로 나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노예 무역하다가 아모스 1장 9절에서 서너 가지 죄에 걸려서 소멸해 버리잖아요. 소멸하면서 그들의 비극은 왜 소멸되어야 되는지, 왜 멸망되어야 되는지, 아무 이유도 모르는체 그냥 멸망당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유다나라를 깎아내릴 때 “바로 이런 점이 이방나라하고 동일한 점이야”라고 깎아내리는 거예요. 불 싸지르고. 그러면 유다나라는,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 나라를 멸망시킬 때 도리어 감사해야 돼요. 고마워해야 된다고요.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께서 계획하는 바는 인간의 어떤 범죄라도 절대로 흔들림이 없이, 차질 없이 이루어짐을 도리어 기뻐해야 됩니다.
자기는 서너 가지 죄로 멸망당하고 자기 나라 고향에서 떠나서 포로생활 하더라도 그렇게 해답을 알고 포로생활하고, 해답을 알고 망해야지요. 그러면 되는 겁니다. 코로나 19가 예수 믿는 사람 안 믿는 사람 구분 안하잖아요. 다 잘라버리지요. 인간의 육신자체가 소멸되어야 돼요. 그러나 성도도 역시 죽습니다.
죽으면서 성도하고 비성도하고의 차이점은, 성도는 해답을 알고 죽는 거예요. 그래서 죽어도 괜찮은 거예요. 그 하나님의 의가 있는 자리, 성전의 자리인데 그 성전에서 의가 나옴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의 특징은, 다윗언약의 특징은 개개인의 사적인 의는 아무짝도 소용없음을 천명하는 거예요.
개인이 평생 수집한 자기 의로움 있잖아요. 착함, 그런 것은 너의 멸망과 함께 없애버리라는 겁니다. 기쁘지 않습니까? 내신 성적을 안 받는 거예요. 천국에서. 내신성적이라든지 수능시험을 일체 치르지 않는 거예요. 이거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무시험합격이라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미 우리 안에 합격이 들어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이방사람, 세상사람 따라가다 보니까 그냥 주시는 천국합격증이 얼마나 좋은지를 몰랐어요. 얼마나 고귀한지를 알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런데 유다나라만큼은 이방나라 닮았던 그 부분을 잘라내고 잘라내니까 이게 안에서 느껴지기 시작한 거예요.
그러면 다윗언약의 유다나라에서 중요한 것이 성전이거든요. 모든 의는 성전에서 나오고 그 의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복이 있어요. 하나님의 복이 있으니까, 하나님이 거룩이 있으니까, 하나님이 함께 있으니까, 하나님이 자기영광을 위해서 만든 환경을 감히 인간이 공유가 되게 되면 그 환경, 하나님 자신의 명예와 자존심을 위해서 만든 그 찬란한 영광스러움에 감히 우리가 거기에 끼어들었다는 것이 얼마나 이게 황공한 고마운 일입니까?
그걸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바로 익명성이에요. “너는 이름이 없는 사람이 되어라.” 내 이름으로 하는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래서는 잘 실감이 안 나지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만약에 지금 여러분 자신이 나이가 한 50가까이 되었다고, 혹은 50 조금 넘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런데 자식도 없고, 아내나 남편도 없고, 집도 없고, 차도 없고, 아파트도 없고, 돈도 없던 그 시절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 시절이 어떤 시절이냐 하면 10대 시절입니다. 내 명의로, 내 이름으로 되어 있는 아무것도 없어요. 심지어 여자 친구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집에 강아지 있는데 그건 언제 죽을지도 모르고.
하여튼 잠자다, 꿈꾼다고 상상해 보자 이 말이지요. 내 것이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여러분의 목숨을 위해서 여러분은 뭘 갖고 싶습니까? ‘그저 뭐 이참에 딴 것은 원하지 않고 내가 나중에 20대 어른이 되었다면 그저 조그마한 집, 강남의 37평정도, 아파트 33평짜리 있으면 더는 소원이 없겠다.’ 그게 바로 이방민족이에요.
왜냐하면 자신을 흐릿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내가 없다는 것 때문에 나는 더욱더 강렬하게 내 자아가 공고히 되는 거예요. 강하게 집착이 되는 겁니다. ‘돈은 많이는 필요 없고 한 7억 정도만 은행에 잔고로 뒀으면 좋겠다. 차는 그저 굴러가는 것, bmw정도, 굴러만 가면 되는 정도, 영국산 랜드로버, 산길도 막 올라가는 4륜 구동차, 그리고 여자 친구하고 결혼하는데 여자는 다 귀하니까 아무 여자나, 손 예진 정도의 얼굴……’ 그렇게 플러스, 플러스 다 해놓고 그렇게 되면 나는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하지요.
그러니까 이 사람은 자기로부터 자기가 없는 세계를 상상을 못하는 겁니다. 아까 말한 보드타기, 반원경기장에서 맨 날 올라갔다 내려갔다. 올라가면 좋다고 하다가 사업 망하면 내려가 좌절하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코로나 때문에 좌절하다가 또 재난지원금 1인당 10만원 주면 잠시 32분 동안 좋아했다가, 올라갔다 내려갔다가 항상 집착합니다. 뭐냐하면, 내가 소멸한다는 것은 내 사전에는 없다.
그게 바로 이방민족입니다. 왜 네가 있어야 되는지는 그것보다 더 큰 배후의 이유를 몰라요. 그러니까 사적인 영역뿐이에요. 내 사적인 영역을 떠나는 어떤 공적인, 하나님이 만든 공적인 영역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겁니다.
창세기18장에서 아브라함이 그렇게 생각했던 때가 있었어요. 자기 조카가 사는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다 하니까 아브라함이 다급하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50명만 있어도 그래도 심판하셔야 됩니까? 50명이 아깝지 않겠습니까?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 “50명 없다.” “그러면 45명?” “45명 없다.” “40명?” “40명 없다.” “30명?” “없다.” “20명?” “없다.”
왜 아브라함이 그런 기도를 합니까? 아브라함은 신약시대의 그 원리를 몰라요. 신약시대는 하나님께서 멸망한다는 그 말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원하는 그 의는 이미 만들어졌다는 거예요. 단 한분에 의해서. 너, 너, 말고 너의 사적인 의 말고, 네가 각자 만들었던 자기의 말고 따로 하나님께서 모든 말씀과 율법을 다 집중시킨 그분에 의해서 하나님의 의가 이미 마련되어 있어요.
의가 있기 때문에 멸망하는 거예요. 의가 있기 때문에. 코로나 19를 전 세계를 한 식구로 해서 다 보낸 이유는 이미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의가 있기 때문에 이 지구상의 모든 인간은 죽어도 상관없어요. 왜? 의가 있으니까. 그게 바로 다윗언약으로 형성된 유다나라 이스라엘의 특징이 그거예요.
이스라엘이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의 인구가 아니라 성전이 있다는 거예요. 그것도 여러 군데가 아니라 단 한군데. 그 성전이 하나님의 거주지가 되고 거기에 하나님의 거룩과 의가 있어요. 그러면 그 의는 어떤 작용을 하느냐 하면, 이방인들처럼 자기 의로 자기가 구원받고자 하는 그것과는 차이 나게, 차별되게 유다민족 다시 말해서 성전이 있는 유다민족만큼은 어떤 자기의 잘못이 있을 때는 그냥 간직하지 말고 어디로 오느냐?
서너 가지 죄가 있을 때는 그냥 있지 말고 어디로 오느냐? 성전, 하나님의 거주지, 하나님의 의가 유일하게 있는 곳, 그곳을 향하여 자기 자신의 자기생각을 거기다가 포기하는 거예요.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만이 계시는, 주님의 해답으로, 정답으로. 내 이름 말고, 없어져야 될 이방이름 같은 내 이름 말고.
익명성이에요. 내 이름 말고 주의 이름으로. 그 다음에 “내 죄를 용서해주옵소서. 그 의가 내 죄를 이겼다는 그 사실을 저에게 확인시켜 주옵소서. 그렇다면 저희들도 그 하나의 의에 집중하겠습니다. 그것만 쳐다보고 나를 잊어버리겠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라고 열왕기상 8장에서 솔로몬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야기했어요.
“네게 재해가 오고, 전쟁이 나고, 병으로 아프고, 그런 것은 늘 있기 마련인데 그럴 때마다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게 되면 용서될 것이다.” 이 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신 거예요. 율법이라 하는 것은 뭐냐? 죄가 있는 곳에 율법이 오게 되어 있어요.
만약에 어떤 평화로운 마을이 있는데 갑자기 그 마을을 경찰이나 군대가 포위해서 “범인은 들으라. 너희는 포위되었다.” 하고 경찰이 형사들 앞장세워서 수색영장 들고 오게 되면 이장이 나서서 “경찰 분들! 왜 이러십니까?” “이곳에 우리가 찾던 범인이 숨어들었습니다. 색출할 테니 협조 부탁합니다.”
왜 경찰이 몰려오겠어요? 왜 율법의 정죄가 있겠습니까? 왜 유다의 서너 가지 죄 때문에 주님께서 이렇게 불을 지르겠습니까? 불 지른 그것이 경찰 온 거거든요. 율법에 합당한 벌을 내리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네 안에 정답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이방인들은 정답도 모르고 그냥 소멸해 버려요. 왜? 이스라엘과 근접해 있으니까. 이스라엘 옆에 있다는 그것 때문에 그들은 이 핑계 저 핑계 대고 다 멸망해 버려요.
“왜 형제나라를 건드렸으냐? 왜 이스라엘을 노예로 잡았느냐?” 노예로 안 잡았으면 그들이 멸망 안 해요? 아니에요. 다른 서너 가지가 또 생겨요. 그들은 해답을 모르는 겁니다. 해답을 모른다는 그 점에서 유다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유다나라도 망하는 이유는 이방나라를 그냥 본받았어요. 이방나라를 본받았다는 말은 모든 것이 제가 아까 예를 든 것처럼, 모든 생각이 내가 어떻게 잘되겠는가, 내가 어떻게 건사 되겠는가, 오직 자기 이름을 포기할 줄 모르는 거예요. 나 외에 다른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했건만 그들은 계속 자기 이름만 불러대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해서 범인을 잡아내는 거지요. 그 범인이 오늘 본문에 보면 거짓 것, 거짓 것이에요. 거짓 것이라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현상 안에서만 해답을 얻는 것을 거짓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히브리서 11장 3절에 이런 말씀 나오거든요.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것이 아니니라.”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다. 보이는 것을 설명할 때 보이는 것을 나타난 것으로 설명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무엇으로 해야 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약속으로 하나님의 법으로 설명해야지요. 약속으로 설명해야 돼요. 인간은 인간을 낳지만 약속은 약속을 계속 흘려내리는 거예요. 약속은 스텔스기 같아서 레이더에 걸리지를 않아요. 비행기인데 스텔스 비행기가 레이더에 안 걸려서 보이지도 않는데 어디서 폭격을 막 하는 거예요.
지금 사람이 사람을 때리면 그 사람을 고소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저 사람이 나를 때렸다고 지목을 해야 되는데 신종코로나 주신 분한테 왜 고소 안 합니까? 이게 스텔스기거든요. 눈에 안보여요. 말씀이거든요. 나타난 것이 아니에요. 보이는 것도 아니에요. 나타난 것, 보이는 것, 서로 서로 해명이나 설명, 해석, 아무리 해봐야 그것 이방민족이에요.
설명이 안돼요. 내가 나에 대해서 나를 설명 못한다는 말이지요. 우리는 나 자신에게 해답이 없어요. 그런데 유다나라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보여주기 위해서 유다나라가 서너 가지 죄로 해서 하나님의 율례, 율법이라는 것을 제공하는 겁니다. 그래서 범인이 잡혔을 때에 보통 범인이 잡히면 이런 이야기를 하지요.
‘미란다고지’를 하는 겁니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으며, 당신의 진술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잡아가!” 이거 친절한 거예요, 당신 범인이라는 뜻이에요? 당신이 범인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당신 이제 죽었어. 변호사 선임해도 소용없고, 불리하건 유리하건 당신이 따질 문제가 아니야. 이유도 없이 당신은 무조건 아니다.” 아니 이유가 있구나. “무조건 죄가 당신을 지배해.” 이게 바로 ‘미란다고지’거든요 율법이 그 기능을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의 좋은 예가 열왕기하 4장 18절에 나옵니다. 참 좋은 예가 되는데요. 거기에 보면 선지자 엘리사가 나오고 수넴여인이 나옵니다. 이 수넴여인에 대해서 8절에 보면 “하루는 엘리사가 수넴에 이르렀더니 거기 한 귀한 여인이 저를 간권하여 음식을 먹게 한고로 엘리사가 그곳을 지날 때마다 음식을 먹으러 그리로 들어갔더라.”
저는 언젠가 이거 강의하면서 이 수넴여인을 정경부인이라 칭했어요. 덕이 있고, 배운 사람이고, 인품이 한없이 크고, 그리고 선지자에게 대접할 줄 알고, 진짜 영적세계의 정경부인이에요. 최고의 덕성을 가진 고귀한 여인의 상의 향기가 나오는 그러한 여인. 향기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 여인 열왕기하 4장 18-20절에 보니까 “그 아이가 저으기 자라매 하루는 곡식 베는 자에게 나가서 그 아비에게 이르렀더니 그 아비에게 이르되 내 머리야 내 머리야 하는지라 그 아비가 사환에게 명하여 그 어미에게로 데려가라 하매 곧 어미에게로 데려갔더니 낮까지 어미의 무릎에 앉았다가 죽은지라.”
이 이야기가 뭐냐 하면, 원래 이 정경부인에게 아이가 없었는데 엘리사가 그 집에 가서 아이가 생긴다고 예언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아주 고매한 품격을 가진 이 여인이 감사하면서 더욱더 선지자를 섬겼겠지요. 그런데 아이는 없었고 남편은 늙었는데 선지자가 와서 예언한 뒤에 아이를 얻게 되었는데 그 아이가 나중에 죽었어요.
죽고 난 뒤에 그렇게 성격이 고매하고 품위 있던 여인이 이제는 선지자에게 악담을 늘어놓기 시작합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자기의, 이스라엘의 자기의라는 것이 언젠가는 한계가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구원이 뭐냐? 나의 의의 한계가 드러나는 것이 바로 내가 구원의 세계로 넘어간 유일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의에 의해서 연결되어 있는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한 번 그쪽나라로 넘어가게 되면 이 현상의 세계에 있다가 세상을 있게 하는 그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 세상 배후의 말씀의 세계, 약속의 세계로 넘어가버리면 두 번 다시 약속의 세계에서 현상의 세계로 넘어올 재주가 우리에게 없다는 것, 이게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고 기적인지 몰라요.
누가복음 16장 26절 보게 되면, 이런 말씀 나오거든요. 거지 나사로하고 부자 비유에서 예수님 말씀입니다. 거지 나사로가 천국 간 것 여러분 아시지요. 낙원에 갔습니다. 낙원에 가니까 지옥 간 부자가 보니까 자기가 시시하게 봤던, 아주 우습게 봤던 거지가 천국 가 있거든요.
천국은 에어컨이 얼마나 빵빵한지 지금 시원해요. 자기는 지금 뜨거워서……, 꼭 반대라. 지옥의 꼭 반대치가 천국의 기쁨이거든요. 완전히 약 올리기에요. 지옥의 반대치라니까요. 그런데 거지나사로는 아브라함 품에 안겼어요. 다시 말해서 거지 나사로의 사적인 자기의가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의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자기를 포기한 거예요.
자기가 의롭다 함, 그 자기를 포기한 거예요. 쉽게 말해서 너의 끝은 어디냐? 너의 끝이 너로 닿으면 이것은 이방나라, 이방민족이에요. 해답도 없어요. 왜 사는지도 몰라요. 그러나 우리의 끝이 예수님의 피와 닿아져야 돼요. 예수님의 피, 용서의 피. 지옥 간 부자가 주제파악도 못하고 부탁하기를 “나사로가 손가락으로 물 한 방울 찍어서 나에게 줄 수 있게……”
아주 많이 겸손해졌어, 애비앙 한통, 아니야, 아니야, 그것도 욕심이 너무 많아, 그냥 물 한 방울만 손가락으로 찍어서 보내달라고 하니까 하는 말이 26절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이게 신약에서는 성령을 통해서, 이미 성령이 있는 사람은, 성령이 주님의 거주지거든요, 우리가 몸은 허접하지만 우리 안에 성령으로 주님의 거주지가 되어버리면 우리 신세가 어떤 신세냐 하면, 이미 천국 간, 그래서 천국의 세계에서 다시 현상의 세계로 눈에 보이는 세계로 올수가 없어요. 주께서 올 수 없게 하신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걸 확인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신종코로나 19부터 해서 모든 마귀로 하여금 성도를 흔들기를 하나님께서 허락한 거예요. 다시 현상세계로 돌아오는지. 쉽게 말해서 “예수 50년 믿었는데 쓸데없더라.” 이런 이야기를 하게끔 막 흔드는 거예요.
“내가 신학박사가 되어도 역시 예수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그냥 착각이고, 예수 이야기나 부처 이야기나 내가 보기에 똑같다.” 이런 식으로. 다시 말해서 보드 타는 올림픽경기 이야기 했잖아요. 백날 올라가봐야 도로 미끄러져 내려오고, 이쪽으로 올라가봐야 역시 미끄러지고.
‘역시 인간이 믿을 것은 나의 의로움과 나의 착함 나의 성실함밖에 없다. 십자가는 다 옛날 이야기고 흘러간 이야기다. 홍해 이야기도 다 옛날 구라고. 인간은 너는 네 인생 살고, 나는 내 인생 살고, 내 인생이라도 내가 붙드는 것이 그래도 남는 장사다.’
여러분이 리포터가 되어서 요양병원마다 순회하면서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이야기해 해보세요. “할머니, 할아버지! 평생 어떻게 사셨습니까?” “남는 것은 역시 나밖에 없다.” 이것은 99.99퍼센트입니다. 순도가 높아요. 거의 대부분입니다. 교회 권사고 장로고 별로 없어요. 교회 권사고 뭐고, 예수고 뭐고 다 전부 나 위해 살았어요.
마지막 끝이 예수가 되었든, 삼위일체, 신학박사, 뭐가 되었든 마지막은 뭐냐? 내가 살아남아야 되고 나를 잃어버리기 싫다는 거예요. 나를. 그게 바로 이방민족이에요. 나 외에는 해답이 없어요. 나 외에는 해답이 없다고. 바로 그 세계에서 주님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누가복음 23장 34절에서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이 땅에는 해답이 없어요. 해답이 없으니까 ‘나’라도 해답으로 잡아야 되는 거예요. 이 ‘나’라도 해답으로 잡아야 되는 거예요. 대학교수라도 소용없어요. 이 세상은 해답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유다나라의 대표로서, 의의 대표자로서 이 땅에 오셨는데 사람들은 필요 없는 존재라고 죽여 없앴잖아요.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우리는 왜 삽니까? 우리가 뭐 부부라고? 이거 부부 아니에요. 가짜에요. 왜? 부부라는 자체가 나 위주거든요. 교회라고? 교회 아니에요. 가짜에요. 왜 교회가 내가 다니니까 내 교회 위주 아닙니까? 나의 행복, 나의 건강, 전부다 가짜입니다. 그게, 그게 해답이 없어서 구시렁구시렁 거리는 소리에요. 해답이 없어서!
이미 의는 확정되었어요. 그러면 남은 것은 내가 어떻게 되는가가 아니라 날 없애버리면 되는 겁니다. 이사야 6장 5절 거기보면 이사야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자기만 입술이 부정한 것이 아니고 내가 살아보려고 애썼던, 이 세상에 몸담았던 전부가 해답을 주님을 만나고 보니까 전부다 해답이 아니라 오히려 해답을 추방하는 세계, 각자 세계, 엉터리 세계, 나도 엉터리, 그들도 엉터리, 엉터리밖에 없는 거예요.
엉터리니까 엉터리 안 되려고 하지 마세요. 그냥 엉터리 되세요. 주님의 용서가 흘러오는 지점은 어떤 지점이냐? 십자가 그 지점밖에 없어요. 그 지점,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말과 행동에서 마지막 닿는 곳은 피, 검은 피, 주님의 흘리신 그 피 피가 뚝뚝 떨어진 그 길, 피가 보이는 그 길, 그 앞에 우리는 결국 닿아져야 돼요.
만남이 있어져야 돼요. 매사가. 그러면 어떻게 그 피가 닿아지는가? 주님의 거주지, 천국에서 성령이 오게 되면 이제는 우리가 다시는 지옥으로 올 수 없이 넘어와 버린 그 경계선,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경계선을 우리로 하여금 목격하게 만들고 그걸 느끼게 만들어요.
어떻게 느끼는가? 그게 만남이지요. 여러분, 세상에 나가서 많은 사람을 만나세요. 만나면서 그것만 보세요. 당신의 말, 언어, 단어, 행동의 끝을 통해서 당신은 지금 무엇과 닿아져 있습니까? 당신 자신의 잘남과 의와 닿아져 있는가, 자기의 윤리 도덕과 닿아져 있는가, 아니면 당신은 ‘나는 아무 소용없어요. 나는 이미 산자가 아니고 죽은 자에요.’라고 이야기하면서 예수님의 피를 자랑하고 피와 닿아져 있는지, 그걸 살필 수 있는 눈.
그것은 바로 본인도 모든 것이 깎였고 주님의 해답을 운반하고 있는 이 땅에서 해답을 증거하고 있는 성령 받은 진짜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의, 십자가로서 의인이 된 이상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의를 우리 자신과 함께 버리게 하여 주옵소서. 쓸데없고 필요 없는 것으로 하여금 우리가 너무 매여 있었습니다. 주여, 세상에 너무 집착했고 사랑한 것은 우리 자신을 사랑한 것임을 깨닫게 해주시고 우리가 이제는 잃어버려도 되는 자인 것을 오히려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 > 아모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모스 2:11-16 / 하나님의 폭주 (0) | 2020.09.23 |
---|---|
아모스 2:6-8 / 경제와 언약 (0) | 2020.09.16 |
아모스 1:3-5 / 선지자 계열 (0) | 2020.09.02 |
아모스 1:1-2 / 개념의 노예 / 수요예배 (0) | 2020.08.26 |
아모스 9:11-15 / 무너진 천막 회복 (0) | 2012.04.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