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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아모스 1:3-5 / 선지자 계열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아모스

아모스 1:3-5 / 선지자 계열

정인순 2020. 9. 2. 22:06

음성 동영상

 

선지자 계열

 

이근호
2020년 9월 2일

 

본문 말씀: 아모스 1:3-5

(1: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다메섹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하였음이라

(1:4) 내가 하사엘의 집에 불을 보내리니 벤하닷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1:5) 내가 다메섹의 빗장을 꺾으며 아웬 골짜기에서 그 주민들을 끊으며 벧에덴에서 규 잡은 자를 끊으리니 아람 백성이 사로잡혀 기르에 이르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이방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이방민족이 하나님께서 생각하신 그 악의 선구자요 출발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이방민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충분하게 악이 된다는 선언입니다. 선과 악을 인간들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방민족인 아람나라는 이스라엘과 인접해 있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의 국가경영의 여파가 이스라엘에게 도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도 나름대로 살아야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어떤 국가 경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세상적 관점에서 보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인간 개개인이 자신에 대해 슬픔을 목표로 하여 인생을 살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자기 인생을 슬픔과 비극을 목표로 하지 않는 것으로 인하여 인간들은 필히 망상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비-현실적인 안목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과 인접해 있다는 단지 이유 때문에 자동적으로 국토 번영과 관련해서 양측 다 충돌이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서로의 입장에서 선과 악의 기준이 따로 설정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다는 점을 이방나라들이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이로 인해 이방나라는 자연스럽게 뭘해도 그 나라는 악한 나라가 되는 겁니다. 이점을 신약의 상황에서 보면 이러합니다. 요한복음 6:65에서,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모든 인간의 구원 의지가 모두 악하다는 것을 단정지을 수 있는 결정적 말씀입니다. 인간들의 구원시도 자체가 하나님의 일에 대한 도전이요 공격으로 간주된다는 말입니다. 구원이란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보낸 자에게만 해당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 오게 된 자들은 한결같이 다음과 같은 공통적인 고백을 하게 됩니다.

“나는 내게 주어진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저주의 심판을 통과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무서운 죽음을 예수님에 의해서 통과되었다. 따라서 내 인생에서 해야할 말은 오직 하나만 남게 되었다. 주님의 공로뿐이다!”라고 말입니다. 즉 자기 인생에 그 어떤 수난이 온다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소진되는 경우는 없다는 말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런 자들입니다. 그들은 사견을 말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따라서 선지자에게 구미가 당기는 그 어떤 것도 이 세상에 없습니다. 만약에 선지자의 말이 사견이라면 그 이야기가를 들을 이유도, 필요도 없습니다. 참으로 선지자 말의 사건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라면 선지자가 세상의 그 모든 것을 놔두고서라도 그 말에 기꺼이 목숨 바쳐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선지자의 계열은 신약에 와서 성령을 통해서 성사됩니다. 베드로전서 1:11에 보면,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7:55에 보면, “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망자, 즉 이미 돌아가신 분을 보고 있습니다. 거기에 비해 일반인들은 오직 살아 있는 자들만 보고 있습니다. 일반인들의 입장에서는 ‘죽은 자’는 더 이상 이 세상에 현존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런 일반인을 대표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스데반 집사님이 죽을 때 증인노릇했던 사울이라는 청년입니다.

하지만 이 청년에게 사도행전 9장에서 예수님이 찾아오시게 됩니다. 사울이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이로서 사도 바울은 스데반 집사님과 같이 이미 죽었다고 알고 있는 예수님의 현존을 감지하면서 살게 됩니다. 이것이 ‘선지자계열’입니다. 신약에서의 영적 위상이 구약에서는 지평적인 영역 구분으로 맞닥뜨리게 하나님께서 배치해놓으셨습니다.

악이 먼저 등장합니다. 그리고 의는 보이지 않지만 그 악이 악으로서 활동을 개시하면서 그 악의 모서리 아귀에 딱 맞쳐지는 방식으로 의가 근처에 등장됩니다. 그래서 전체 퍼즐이 갖추어지는 겁니다. 열왕기하 10:31-33에 보면, “그러나 예후가 전심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며 여로보암이 이스라엘로 범하게 한 그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이 때에 여호와께서 비로소 이스라엘을 찢으시매 하사엘이 그 사방을 치되 요단 동편 길르앗 온 땅 곧 갓 사람과 르우벤 사람과 므낫세 사람의 땅 아르논 골짜기에 있는 아로엘에서부터 길르앗과 바산까지 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열왕기하 13:1-3에 봐도, “유다 왕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의 이십삼 년에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십칠 년을 치리하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좇고 떠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노를 발하사 늘 아람 왕 하사엘의 손과 그 아들 벤하닷의 손에 붙이셨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아람나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치게 하신 겁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에게만 죄와 의를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체적으로 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방나라가 부러워서 그들을 닮고자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방나라는 악이 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자기에게 의미를 스스로 부여했기 때문입니다.

즉 무의미가 마땅한데 인간들은 허무하고 무의미하는 것들을 못내 참아내지 못하고 의미를 부여하려고 합니다. 성령 대신 그들은 자체적으로 윤리로 무장하는 겁니다. 인간들은 슬픔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재미나는 오락과 쾌락에 대한 신경질적으로 열광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집단을 이루게 되는 그 집단의 생각이 이념입니다.

이 이념과 이념과의 충돌이 전쟁을 야기합니다. 모두다 무의미에 의미를 찾고자 시도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남겨진 진정한 의미는 이웃 사랑입니다. 역대하 28:8-12에서, 하나님께서는 같은 형제인 유다 백성을 이스라엘 민족이 포로잡아서는 아니된다고 하십니다. 비록 유다 민족이 범죄해서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7:12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즉 이미 자기 자신이 멸망받아 마땅한 존재임을 아는 자들은 결코 타인을 나의 의미추구와 나의 정당함을 드러내는데 이용해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오직 예수님의 희생만이 증거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이미 폐허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 위주의 망상에서 늘 벗어나게 하옵소서. 주님만 보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녹취:오용익

2강-암 1장 3-5절(선지자계열)20090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아모스 1장 3-5절까지입니다.

아모스 1:3-5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다메섹의 서너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하였음이라 내가 하사엘의 집에 불을 보내리니 벤하닷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내가 다메섹 빗장을 꺾으며 아웬 골짜기에서 그 거민을 끊으며 벧에던에서 홀 잡은 자를 끊으리니 아람 백성이 사로잡혀 길에 이르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방금 읽었던 이것은 아모스 선지자가 이야기한 겁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을 하나님께서 파견하셨습니다. 선지자는 남들 보기에 개인적인 사견이라고 생각하지만 개인적인 사견이라면 이야기 들을 필요도 없어요. 그리고 교회에서 목사가 개인적인 사견을 이야기한다면 교회는 문 닫아도 괜찮습니다.

만약에 선지자나 목사가, 자기가 하는 이야기가 사견이 아니라면 거기다가 자기의 목숨을 걸어야 돼요. 이래도 교회 문 닫아도 괜찮고 저래도 교회 문 닫아도 괜찮아요. 자기 개인적인 견해 같으면 이것은 애당초 문 닫아야 되고요. 개인적인 견해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래서 목숨을 걸었다면 교회 문 닫고 없어져도 뭐 무슨 관계있어요? 그 전하는 말씀이 있는데.

이게 바로 선지자의 운명이고 이 선지자의 운명은 곧 신약의 예수님에 의해서 완성이 되는 겁니다. 성경을 보면서 여러 가지 충격적인 말씀이 많이 나오는데 그중에 충격적인 말씀이라 볼 수 있는 것이 요한복음 6장 65절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선지자 기능의 완성이라고 생각하시고 이 이야기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65절에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누구든지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인간구원 끝났습니다. 인간에게는 구원 없어요. 인간이 원하는 구원이라는 것은 애당초 개인적인 욕망에 불과합니다.

그런 것은 이 예수님 말씀에 의해서 전혀 하나님 앞에 인정받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했어요. “누구든지 내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참으로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보낸 자라면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냐 하면, 죄로 인하여 받는 그 처벌, 인간이 죄지었는데 그 죄에 대한 처벌이 하나님의 저주스러운 무거운 죽음인데 그 죽음을 통과하게 하셨다는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사람이 바로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보내서 간 사람이에요.

그 외에는 아버지께서 보내서 예수님께 간 사람이 아닙니다. 무슨 이야기하고자 하냐면, 성도라면 툭 건드리면 무슨 이야기가 나와야 되느냐하면, ‘그래, 내가 죽어 마땅해. 죽어 마땅한데 그 죽어 마땅함을 하나님 쪽에서 해결해주셨어.’라는 이야기가 흘러나와야 돼요. 어떤 경우라도 그게 나와야 돼요.

‘죽어 마땅함’이라는 것은 ‘새삼스럽게 내가 죽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전혀 나와 상관없어. 나는 거기에 개의치 않아. 나는 죽는다 할지라도 주님이 주신 내 감사와 고마움은 여전하다는 말이야.’라는 이야기가 나와야 된다는 말이지요.

십자가 마을에 제가 그런 글을 올렸습니다만, 코로나 19로 인하여 교회가 예배를 그만두고 교회 문을 닫는다 할 때에 교회 문을 닫든지 안 닫든지 간에 닫을 때는 닫는다는 것에 대해 설명이 있어야 되고 안 닫으면 거기에 대해서 또 설명이 있어야 돼요.

그 설명이 뭐냐 하면, 평소에 나는 이렇게 살아갑니다, 라는 자기선지자적인 견해가 나와야 돼요. 자기가 목숨 걸었던 견해, 그 견해가 뭐냐? 아버지께서,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보내줬기 때문에 왔는데 그 과정 속에서, 나는 예수님께 갈 수 없었는데 주님께서 그 죄로 인한 처벌을, 저주를 주님이 처리했기 때문에 올 수 있었다는 그 내용이 포함된 채 교회 문을 닫아도 되고 안 닫아도 돼요.

그런데 그게 빠져버린 거예요. 그게 빠지니까, 그게 빠지고 구구절절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구차한 변명들이 있으니까 제가 보기에는 그러면 저 목사는, 저 교회는, 저 성도는 도대체, 성도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도대체 그 사람은 무엇에 목숨 걸었는지 그게 상당히 수상한 거예요.

한국교회는 회개해야 된다는 거예요. 회개해서 뭐하려고? 회개해서 뭐하려고! 회개하면 교회 건진다? 그러면 그 사람은 이미 목숨 바친 것이 없어요. 선지자 이야기하는 겁니다. 선지자는 개인적인 견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에요.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에 의해서 더 이상 자기 목숨, 자기 운명, 인생에 대해서 거들떠 볼 시간여유 조차도 없어요. 내가 전한 말씀이 나를 죽이니까. 그 선지자의 완성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하신 그 말씀은 예수님을 죽이게 했어요. 그래야 예수님이 부활하실 게 아니겠습니까?

교회에서 설교하고 예배드려서 교회라는 것을 유지하려고, 그런 식으로 꼼수 쓰고 요령부리면 안돼요. 십자가마을에 올린 글에 보면 나오지요. 예배드린다는 것은 죽으려고 왔는데 하나님께서 뜻이 있어서 교회 예배를 안 드린다면 이것은 무슨 뜻이냐? 너는 예배 드려서 죽지 말고 다른 것으로 죽으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돼요.

이래도 죽는 것이 좋고 저래도 죽는 것이 좋아요. 왜냐하면 선지자는 어떤 마음자세냐 하면, 재개발 지역에 가면 기존의 허름한 집들이 재개발하면서 다 무너졌잖아요. 지붕위에 있어야 할 고운 기와가 땅 밑에서 흙으로 덮여 있다고요.

그러면 구두 신고 그 기왓장을 자근자근 밟아 보는 거예요. 그러면 기왓장 깨지는 소리가 나면서 밟히지요. 아모스 선지자부터 해서 모든 선지자들에게 이미 이 세상은 폐허에요. 재개발지역이에요. 집들이 다 폐허가 되어 있는데 그 폐허를 자근자근 밟아가는 그런 느낌 가지고 이 말씀을 전하는 겁니다.

이 땅 하등 아쉬운 것도 없고 부러운 것도 없고 그렇습니다. 어느 인간이, 슬픔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사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어느 인간이, 자기의 비극을 삶의 목적으로 정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목적도 아니고 대상도 아니지요. 슬픔이라는 것은.

그러니까 인간은 비현실적이고 망상 속에 있는 거예요. 선지자의 말에 의하면 이 세상은 전부 다 폐허고 멸망합니다. 그러면 선지자의 안목은 뭐냐? 미리 미래를 앞당겨 몸에 휘감고 있는 거예요. 만약에 선지자가, 고급진 대리석바닥에 기둥을 하고 있는 호사스러운 인테리어의 호텔에 들었다면 아모스 선지자가 그걸 부러워하겠습니까?

아모스 1장 3절, ‘호텔 가보니 부럽더라. 나 더 살고 싶어.’ 아모스가 그런 이야기를 했겠어요?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는다. 아무것도 미련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말씀 자체가 최종성이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하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는 그 말씀이 최종적인 말씀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부러워하는 것이 없어요.

다시 말해서 인간의 힘으로 갈 수 없는 곳에 주께서 가게 하셨다. 그걸로 인하여 평생 감사해야 될 감사거리는 넉넉합니다. 충분합니다. 더 이상 새삼스럽게 추가될 고마움이나 감사거리는 없습니다. 어떻게, 갈 수 없는데 어떻게 통과합니까? 저주라는 죽음, 네 죄로 너는 하늘나라 못가, 그 못 간다는 것을 어떻게 통과해서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보내서 가게 했습니까? 그 은혜가 얼마나 커요?

그래서 아모스의 이 말씀 한마디 한마디는 예수님의 그 십자가를 경유해서 다시 아모스를 보는 관점으로 보셔야 돼요. 그게 베드로 전서 1장 11절에서, 그걸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지요, 성령으로 이 세상을 다시 봐야 된다 했어요.

성령으로 본다는 것과 성령으로 안 보는 것과 어떤 차이냐 하면, 성령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은 그저 눈에 보이는 사람만 눈에 보는 것, 그게 성령으로 보지 않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사도행전 7장 55절에 보면 성령에 충만한 사람의 모습이 나옵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다른 사람 눈에는 안보여요. 같은 인간인데, 다 같은 눈을 갖고 있는데,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데 성령에 충만한 스데반 집사의 눈에는 보였던 거예요.

스데반집사님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둘 다를 보는 거예요. 희한한 존재지요. 어찌 인간으로서 이런 재주 이런 능력이 있느냐 이 말이지요. 보이지 않는 분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은 살아 있는 사람만 보지만 스데반집사님은 이 세상의 죽은 사람을 보는 거예요.

죽은 분, 그것도 특별나게 죽으신 분,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시대에 다른 모든 사람에게 이미 망자에요. 죽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 죽은 자를 지금 ‘죽은 게 아니야. 죽은 것 아니라고. 여기 우리와 더불어 살아 있어.’라고 볼 수 있게 하는 그 능력, 그 능력이 바로 성령 받을 때나 가능한 겁니다. 달라도 너무 다르지요.

그런데 이 스데반집사를 사람들이 죽일 때에 그 때 스데반집사를 이렇게 하게 했던 성령의 계열이 그 체인이 어떻게 되느냐? 사도행전 7장 57, 58절에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쌔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앞에 두니라.”

스데반 집사 죽을 때에 돌 던진 사람들은, 자신들은 하나님의 율법대로 제대로 살았다, 하나님의 법대로 시행했다, 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그 증인으로서 사울이라는 사람의 발 앞에 옷을 벗어 둔 거예요. 그러면 사울이라는 청년이 만약에 죽었던 스데반 집사와 동일하게 성령을 받아버리면 사울이라는 청년은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되느냐?

“전에 내가 성령 없을 때 성령 없는 사람의 대표였다.” 그런데 사도행전 9장에 보면 드디어 사울이라는 사람이 누굴 만나느냐? 죽었다고 알려진 예수님을 실제로 만나게 됩니다. 이게 스데반집사의 성령의 계열이거든요.

그렇게 되면 사울이라는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 하면, 내 발 앞에 옷 가져다 놓은 사람들은 전부 다 죄인이고, 저주받을 자이고, 성령 받지 않은 자이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보내지 않은 자들이라고 증언할 수 있는 증인으로서 사울은 자기 역할을 부여받은 겁니다.

어렵지요. 어려우니까 더 어렵게 해드리겠습니다. 악을 등장시켜놓고, 악의 그 모서리를 만들어서 악만 등장했기 때문에 악만 있어요. 그런데 그 악의 모서리가 등장함으로서 그 아귀에 맞춰서 의가 퍼즐 맞추듯이 서서히 딱딱 맞아떨어진다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더 어렵지요.

종말에 이미 이 세상은 폐허에요. 마지막에 다 멸망합니다. 멸망하는데 그 멸망하는 증거를 하나님께서 멸망 전에 등장시켰다면 이것은 악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의는 뭐냐? 의는 없어요. 악만 등장하는 거예요. 악만 우선 등장하게 해놓고 그 악의 횡포, 악의 공격을, 폭력을 받는 그런 자들이 그 모서리의 퍼즐이 맞춰지듯이 아귀가 딱딱 맞춰지면서 등장할 때 그 사람들이 의인이 되는 겁니다.

악이 먼저 등장하고 그 다음에 의가 등장하는 거예요. 세상에 아담이 먼저 등장하고 그 다음에 마지막 아담이 등장해서 아담 계열로 인하여 예수님이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지게 하시는 것 그게 하나님의 전략이에요. 성령 없는 자가 먼저 등장해서 태극기 흔들고 난리 안 죽입니까?

성령 없는 자가 먼저 등장하고 그 다음에 성령이 있는 자가 ‘왜 저 사람들은 저렇게 태극기를 흔들고 왜 저렇게 데모를 하느냐?’ 그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어요. 성령 안 받았기 때문에. 성령 안 받은 사람은 왜 그렇게 하느냐? 살고 싶어서. 지상에 지상천국을 건설하고 싶어서, 살고 싶어서 그래요. 예수님 덕분에 살고 싶어서, 하나님 덕분에 살고 싶어서.

그들보고 욕한다고 해서 구원받은 것 아니에요. 욕 하나 안하나 성령 받은 스데반 집사님은 이미 죽으신 예수님을 쳐다보고 삽니다. 바라보고 살아요. 보이는 것도 보고 보이지 않는 것 까지 보고 살아요. 그 사람이 바로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보낸 자에요. 성령 받은 자입니다. 아모스에요. 성신이 임한 아모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아모스 1장 1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다메섹의 서너가지 죄로 인하여……” 오늘 본문 보는 사람이 약간 마음이 귀찮다, 짜증나려고 한다, 그런 생각이 들 거예요. 왜냐하면 다메섹이라는 지명이 나오고, 그 다음에 길르앗이라는 지명 나오고, 하사엘이라는 사람 이름 나오고, 벤하닷이라는 호명하기도 어려운 사람 이름이 나오고, 아웬이라는 지명이 나오고, 벧에던이라는 지명이 나오고, 아람사람이라는 나라 이름, 지명이 나오니까 간만에 성경 한 번 보려고 하다가 짜증이 슥 올라오면서 ‘이 지명 꼭 모르면 지옥가나?’ 이런 식으로 튀어나오는데 이것을 이렇게 생각하시면 쉽습니다.

신약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만 보는 쪽과, 성령 받아서 이미 죽으신 분, 예수님마저 보고 있는 사람들 간의 만남, 만나면 다툼, 전쟁, 그 전쟁이 성령 받은 사람과 안 받은 사람의 전쟁이라면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해서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는데 이스라엘에 대해서 주변나라들이 어떻게 시비 거느냐의 만남과 다툼과 그리고 전쟁, 그것을 구약에서 보여주는 겁니다.

구약에서는 수평적이라면 신약에서는 두 차원적이지요. 초월적 차원,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세상 바깥에 있는 영적차원과 이 세상만 있는 그 차원의 영적전쟁이라면, 구약에서는 영적전쟁을 지평적으로 마주하면서, 이웃하면서 다투는 것으로 신약의 상황을 미리 앞당겨 묘사해주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 나오는 지명, 이름은 바로 이스라엘과 같이 붙어 있는 나라라고 보시면 돼요.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사람이 산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되고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 하나님이 약속한 땅, 그 땅 북쪽에 있는 나라가 다메섹 아람나라의 수도지요. 그 나라에 대해서 언급하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여러분이 어떻게 유념해야 되느냐 하면, 다메섹 나라는 악의 시발점, 선구자가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다메섹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 어떠한 정당한 이유가 있든 없든 간에 이스라엘의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감히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은 눈에 안보이니까 그냥 공격한 거예요.

하나님에 대해서 공격하면 이것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악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악이 먼저 등장하고 거기에 아귀 맞춰서 모자이크 퍼즐 맞추듯이 의가 등장한다고요. 이게 평지적으로 그렇게 설명하는 거예요. 신약에 오게 되면 영적인 차원이 수직적으로 구분되지만 여기는 구약이기 때문에 평지적으로 그렇게 하는 거예요. 모형으로서.

마치 2차 대전 다루는 영화 보면 독일 군 장군들이 정복 입고 작대기 가지고 모형 만들어서 탱크 2백대 이곳으로 집어넣고, 잠수함은 여기에 보내고, 이렇게 전략 짜잖아요. 마찬가지로 구약에서는 모형이니까 모형을 만들어놓고 하나님께서 선과 악, 악과 선을, 죄와 의를 이렇게 구분해 가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자꾸 이렇게 돼요. 우리는 하나님 편에 설래, 하는데 하나님 편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다메섹, 아람나라지요, 아람나라가 이스라엘을 쳤던 그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가 열왕기하 13장 1절에서 2절에 보면 “유다 왕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의 이십삼년에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십 칠년을 치리하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좇고 떠나지 아니하였으므로.” 이렇게 나오지요.

이 긴 것을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이 함께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이방나라를 사모함으로’ 이렇게 되는 거예요. 3,4절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노를 발하사 늘 아람 왕 하사엘의 손과 그 아들 벤하닷의 손에 붙이셨더니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학대하므로 여호아하스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셨으니 이는 저희의 학대 받음을 보셨음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이방나라를 그 근처에 포진시켜 놓은 이유는 이스라엘 본인이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그 죄라는 것, 본인들이 죄 지으면서도 죄를 몰라요. 그 모르는 것을 두고 악의 선구자 되는 이방민족이 이스라엘을 치게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치게 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에 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모르고 그냥 치게 하는 거예요. 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 이방나라를 쳐버립니다. 징벌해 버려요. 징벌할 때 뭐라고 규정하느냐 하면, 너희는 죄를 범했다, 이렇게 돼버려요. 죄를 범했다.

이렇게 되니까 듣고 있는 이 아람나라 다메섹 입장에서는 상당히 생뚱맞은 이야기에요. 왜냐하면 자신들은 모든 주변 나라를 칠 수 있는 권한이 본인들에게 있다고 여기거든요. 자, 하나님을 잠시 접어두고요. 이 인간세상에서 제국들이 많고 나라들이 많은데 그들이 어떤 식으로 전쟁을 일으키느냐, 폭력을 행사하느냐를 봅시다.

우선 인간이 사는 것이 무의미합니다. 뭐든지 아무리 좋은 것도 시간이 약간만 지나가면 다시 적막 속에 있어서 짜릿한 어떤 사는 즐거움이나 의미가 없어요. 무의미하고 답답한 거예요. 여기서 인간들은 신경질적인 열광을 요구합니다. 신경질적인 열광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들끼리 뭘 하느냐? 집단을 만들어요. 그룹을 형성합니다.

이 그룹에서 형성된 것이 뭐냐 하면, 이념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념논쟁 있지요. 이념이 생기면 거기서 이념과 이념의 충돌이 생기지요. 이게 바로 전쟁입니다. 처음에 시작한 게 뭐냐 하면, 사는 게 심심하다고 하는 거예요.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 아람나라가 이스라엘을 칠 때 그들이 시작한 게 사는 것이 답답하고 의미가 없을 때죠. 그러면 죄라는 것은 뭐냐? 원래 이 세상은 폐허가 되어야 돼요. 의미가 없어요. 의미가 없는데 의미를 주는 그것이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그냥 살다 죽어.” 이것이 인생인데, “그냥 아무 의미 없고 낙도 없어.” “그래, 그게 인생이야. 네 조상 아담한테 물어봐. 원래 그래야 돼.”

그런데 심심하고 답답하고 하니까 뭔가 자기에게 의미를 줘서 그 의미에 자기가 열광하고 싶은 거예요. 방탄소년단 ‘다이너마이트’가 드디어 미국 빌보드차트에서 1등 했다. 방탄소년단이 천국 갑니까? 아무 의미 없어요. 삼성 라이온스 또 졌다. 또 졌지 그래. 또 졌어. 미국프로야구 김 광현이가 2승했대. 2승한 그게 뭐예요, 그게!

모든 십계명에 나오는 모든 것은 전부 다 의미 없는데 의미를 줬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의미가 없는데 자꾸 의미를 주니까 살인이 되고, 간음이 되고, 도적질이 되고, 탐내고 싶은 거예요. 의미도 없는 것을 왜 탐을 내요?

길 가는데 앞에 가던 트럭에서 뭐가 와르르 쏟아졌더라. 보니 금괴 열두 개가 땅에 쏟아졌다. 이거 뭐 발로 툭 차고 집에 가라 그 말이지요. ‘오, 금괴, 역시 어젯밤 꿈자리가 좋더라.’ 그럴 필요 없어요. 살인하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왜, 상대방과 부딪혔으면 그냥 가지 왜 죽입니까? 화난다고 해서. “꼭 그렇게 다 가져가야만 속이 후련했냐!” 깡패세계의 대화, 영화에 나오는 것 있지요.

왜 화가 나느냐? 본인의 삶의 의미를 그런 식으로 찾은 겁니다. 움직여야 되거든요. 몸보다 생각이 먼저 드는 것, 이게 바로 의미 찾기, 이게 바로 죄인 거예요. 죄. 몸은 주님께서 움직일 때 움직여야 되는데 몸보다 생각이 먼저 움직이는 거예요. ‘나는 행복해야 돼. 나는 늘 기뻐야 돼. 나는 즐거워야 돼.’

인간세계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오락과, 놀이와, 그리고 뭐든지 즐기는 것. 슬픔이 아니에요, 인간은. 고통을 목표로 삼지 않습니다. 무조건 즐거워야 되고 행복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죄인 거예요. 하나님의 뜻은 안중에도 없고 내가 즐거워야 된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다메섹, 우리말로 하면 단군의 자손이지요.

다메섹이 이방민족 아닙니까. 단군의 자손도 이방민족이잖아요. 애국가를 보세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만세.” 왜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보호해야 되는데? 그게 다메섹이에요. 그게 이방민족의 특색입니다. 이유도 없어요. 다른 민족은 모르겠고 우리 대한민국은 무조건 의미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사는 가치가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고대전쟁은 국가대 국가의 전쟁이지요. 망원경 가지고 볼 때는 국가대 국가가 크게 보이지요. 신약에 와서 이걸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이것은 개개인의 다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개개인이 현대에 와서 자기 삶이 살아 있다는 것은 인정하겠는데 이왕 사는 거 재미나게, 즐겁게, 시간가는 줄 모르게, 유쾌하게 자기 욕심을 만끽하면서 그렇게 살고 싶다.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지 않으면 내게 아무도 올 수 없다는 그 말은 아예 들리지도 않아요. 성경말씀 백날 보니 뭐합니까? 태풍이 와도 두꺼운 유리창 문 닫아버리면 태풍의 물방울이 한 방울도 실내에 들어오지 않잖아요. 말씀을 그렇게 전해도 사람들 마음마다 개인마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유리창이 쳐져 있는 것 같아요. 말씀이 안까지 안 들어와요.

말씀이 들어오면 아모스 선지자처럼 나는 애초부터 의미 없고 폐허가 되어야 되고 나는 죽어 마땅하다는 이런 것이 있어야 되는데 말씀을 백날 들어도 자기 내부까지 안 들어오는 모양이라. 그 안에 뭐가 들었겠어요? 다메섹이 들어 있지요. 아람나라가 들어 있는 거예요.

아람나라는 자신의 나라의 의미를 키우는 것이 자기국가로서 왕으로 마땅하잖아요. 여기 나오는 길르앗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열 두 지파 가운데서 므낫세 반지파와 르우벤지파 갓지파가 살고 있는 그 동네에요. 요단강에서 동쪽, 요르단 그 동네인 길르앗지방을 다메섹, 아람나라가 공격한 겁니다.

공격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어요. 역대하 28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메섹으로 하여금 공격을 하게 하셨습니다. 5절에 “그러므로 그 하나님 여호와께서 아람 왕의 손에 붙이시매 저희가 쳐서 심히 많은 무리를 사로잡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갔으며 또 이스라엘 왕의 손에 붙이시매 저가 쳐서 크게 살육하였으니.” 이렇게 나옵니다.

그 공격을 한 것은 하나님께서 무조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악의 선구자, 악의 계열, 이방계열이라는 겁니다. 다메섹 입장에서는 이 세상에서 나름대로 국가가 운영되려면 세상을 판단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현실적으로 내 나라, 아람나라가 잘되기 위해서 많은 투자를 하고, 연구를 하고, 생각을 하고, 어떻게 하면 이 아람나라……, 내가 만약 아람나라 지도자라면, 내가 하사엘이고 그 아들 벤하닷이라면 내가 통치하고 있는 이 나라가 부강해서 이 백성들에게 오래 오래도록 행복하게 부국강병 하고자 하는 대안을 제시해야 그게 지도자답잖아요.

그렇게 할 때 어떻게 하느냐? 현실적으로 어떤 질서를, 현실적인 계열을 찾는다고요. 그 현실적인 계열, 이렇게 하게 되면 이 나라는 크게 되겠다, 그 현실적인 계열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 아람나라의 주관적 계열로 바뀌고 그것이 그 나라를 통치하는 국가이데올로기, 이념이 되는 거예요. 오로지 아람나라 잘되면 끝. 그게 정의고 그게 진리에요.

이게 신약에서 개인적으로 되면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죄, 전혀 모를 때 그 개개인은 아람나라 같은 사고방식이 뭐가 되느냐? 윤리가 그 이념을 대신합니다. 자, 처가식구가 있고 장모님 모시고 사위되는 내가 같이 앉아서 밥을 먹는다 합시다. 밥을 먹을 때 처가식구 세 명은 날 어떻게 주시하느냐?

그들의 주관적 계열이 있어요. 너는 이집 사위다. 사위가 해야 될 것은 뭐냐? 우리가 통합되어 있는 이 이념, 이데올로기, 우리 집안은 보통 집안 아니야, 라고 하는 그 주관적 계열에 사위로서 어떻게 동조하고 찬양, 찬양까지는 좀 그렇고, 칭찬하고 협조할 수 있는가를 주시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그 집안의 윤리라는 겁니다.

이것은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윤리가 성령을 대신하는 겁니다. 그 자체가 악인 줄 모르고. 왜 윤리가 있느냐? 그래야 우리 집안에 의미가 생기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 죄라고 했지요. 그런데 만약에 사위가 밥을 먹고 난 뒤에 “먼저 갑니다.” 하고 그냥 가버리면 이것은 그 다음부터 무슨 이야기를 하겠어요?

갈 때는 집안 어른에게 먼저 인사를 해야 돼요. “장모님, 저 먼저 갑니다. 천천히 드시고 오세요.” 이렇게 할 때 그 여섯 개의 눈동자가 쳐다봐요. 사위가 어떤 행동으로 우리 처가식구를 하대하지 않고 존대하는 모습을 보이기를 다 주시하고 있는 거예요. 깍듯이 인사하면서 “제가 사정 있어서 먼저 갑니다.” 할 때 ‘역시 사위 잘 봤다. 참 사위 잘 봤어. 그게 우리 사위지.’ 이게 성령을 대신합니다. 이게 성령을 대신해요.

상견례 할 때 기 싸움이 보통이 아니지요. 상견례 할 때 평화로운 방법 팁 하나 드릴까요? 어떻게 하느냐 하면, 한쪽이 먼저 항복을 해버려요. 거제도에서 결혼식을 하든 대구에서 결혼식을 하든 몰라, 다 맡겨버려요. 상대방 사돈집에 모든 것을 다 맡겨버렸어요. 얼마나 평화로운지 몰라요.

왜? 그쪽 가오를 세울 수 있도록 모든 것을 항복했으니까. 이게 전쟁입니다. 서로의 윤리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의로우냐로 싸우는, 이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신약의 시대에 서로가 잘난 집안이다, 그리고 더 세밀하게 말해서 나는 잘났다, 의롭다, 정당하다, 나는 살 이유가 있다, 행복해야 될 근거가 있어, 우리 집안은……, 또 나는……, 그것가지고 만인 대 만인의 싸움을 벌이고 있어요. 이 세상이.

전부 다 의미싸움이에요. 의미싸움. 모든 것이 의미싸움이에요. 여러분, 이걸 모르고 세상 뉴스 같은 것 보면 안돼요. ‘공부는 못하는 것이 추천해서 의사 된다, 아니면 전교 1등해서 힘들게 의사한다.’ 여러분 같으면 어느 쪽 의사에게 진찰 받으러 가겠습니까, 이 이야기.

전부다 뭐냐 하면, 아람나라에요. 그게 바로 전쟁을 일으키고 그 전쟁내부에는 뭐가 있느냐? 칼, 폭력을 갖고 있어요. 그 폭력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그냥 두지 않는다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죄라는 것은 뭐냐 하면, 감히 너희들이 하나님도 없으면서, 본인이 하나님노릇 하면서, 의미도 개뿔도 의미도 없으면서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보냄도 받지 못한 주제에, 멸망될 대상이면서도 마치 나는 의미가 영원까지 존속해야 된다고 일방적으로 우기면서 이스라엘을 하찮게 봐서 공격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유다나라가 아람나라에 공격받게 하신 것은 유다와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들이 모르는 죄, 하나님 뜻이 뭔가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이방나라를 통해서 일부러 공격하게 하신 거예요. 코로나 19도 바로 그거에요. 하나님께서 죽어 마땅함을 알려주는 거예요.

무슨 교회가 가치 있다고 그걸 붙들고 문을 여니, 예배를 하니 마니, 그런 소리를 합니까? 교회는 그런 가치가 없어요. 역대하 20장에 보게 되면 거기에 아람나라가 쳐들어왔을 때 유다나라 여호사밧이 어떻게 처신했는지가 나옵니다.

15절에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아람나라는 북쪽을 공격했고 남쪽나라 유다를 모압 암몬나라 자손들이 공격했을 때 여호사밧왕이 선지자를 통해서 알게 된 것은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17절에 보면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며 놀라지 말고 내일 저희를 마주 나가라.”

그리고 19절에 찬양대가 등장합니다. “그핫 자손과 고라 자손에게 속한 레위 사람들은 서서 심히 큰 소리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니라.” 찬양대 등장해서 이 전쟁에서 승리했어요. 이스라엘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 해도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도저히 이런 발상이, 세상을 조사하고 탐색해도 어떤 과학적인 질서를 찾는 그런 계열로서는 전쟁이 일어났는데 손 놓고 있는 이런 일은 없어요.

마치 신약성경에서 이미 죽은 예수님이 보인다는 것, 죽은 예수님이 살아 있다는 것, 이것은 인간의 지능과 능력으로서 학교에서 공부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걸 초월해요. 역대하 28장에 보게 되면 아하스 왕이 범죄 한 것이 맞아요. 아하스왕은 남쪽 유다왕이거든요.

바알을 섬겨서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기 위해서 아람나라와 북쪽 이스라엘이 남쪽 유다를 치게 하셨습니다. 8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그 형제 중에서 그 아내와 자녀 합하여 이십만명을 사로잡고 그 재물을 많이 노략하여 사마리아로 가져가니.”

여기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의 수도 지금의 평양이지요. 서울서 사람들 잡아서 평양으로 데려간 거예요. 지금 우리나라 사정하고 어쩌면 똑같은지. 그렇게 갔다 그 말이지요. 그 때 아마스라는 사람이 막아요. “하나님의 뜻은 같은 형제끼리 포로나 잡고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야. 그것은 하나님이 없는, 하나님이 택하지 않은 이방민족한테는 되는데 같은 하나님 믿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야.” 해서 말려가지고 도리어 어떻게 하느냐?

역대하 28장 15절에 “이 위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이 일어나서 포로를 맞고 노략하여 온 중에서 옷을 취하여 벗은 자에게 입히며 신을 신기며 먹이고 마시우며 기름을 바르고 그 약한 자는 나귀에 태워 데리고 종려나무 성 여리고에 이르러 그 형제에게 돌린 후에 사마리아로 돌아갔더라.”

이게 바로 마태복음 7장의 유명한 말씀, 12절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사랑이다. 모든 인간은 범죄 했어요. 범죄 했지만 하나님의 뜻은 뭐냐,? 아버지께서 내게 보낸자는 내가 받겠다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예수님이 대신 죽었다는 그 사랑, 그 사랑이 몸에 적셔 있는 사람은 어떤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서 묻지도 않고 그 사랑 때문에 받아준다는 거지요.

이게 하나님의 이스라엘, 택한 백성 안에 살아 있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뜻이에요. 그것을 누가 구현하느냐? 남과 북 이스라엘이 그걸 구현해야 된다 그 말입니다. 이방민족은 하나님이 벌하지만 형제지간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따라서 교회의 성도끼리 모든 대화가운데서 본인의 윤리라든지 본인의 가치, 의미, 그런 것 내세우면 이방인하고 대화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나 죽어 마땅한데 예수님의 피 때문에 살았습니다. 용서 때문에 살았습니다. 나 죽어 마땅해요. 주님의 피가 내 죽음을 극복하셨습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상대방도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바로 그러한 마음자세가 깔려서 세상의 어떤 단어, 어떤 시사, 어떤 소식이라도 밑에 그걸 깔고 이야기를 해야 돼요. 복음적인 설명을 깔고 교인들하고 같이 대화해야 되고 만약에 부부가 같은 성도라면 그걸 깔고 해야 돼요. ‘네가 나를 개무시했지?’ 그러지 말고, 그걸 깔고, ‘고맙소.’ 그 노래 부른 가수가 군대 간다는데 고맙소, 고맙소, 내가 세상을 몰랐습니다, 주님을 몰랐습니다, 나를 몰랐습니다…….

오직 주님 사랑만 증거 하는 저희들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을 보면서도 우리 안까지 들어오지 않았는지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됩니다. 이 시간 유리창 와장창 깨지고 이 주의 아모스 말씀이 폐허가 된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서 예수님 십자가의 희생하심만 담뿍 담겨질 수 있는 저희들의 새로운 영혼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