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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호세아 13:1-3 / 언약과 우상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호세아

호세아 13:1-3 / 언약과 우상

정인순 2020. 7. 1. 21:51

음성 동영상

 

언약과 우상

 

이근호
2020년 7월 1일

 

본문 말씀: 호세아 13:1-3

(13:1) 에브라임이 말을 하면 사람들이 떨었도다 그가 이스라엘 중에서 자기를 높이더니 바알로 말미암아 범죄하므로 망하였거늘

(13:2) 이제도 그들은 더욱 범죄하여 그 은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부어 만들되 자기의 정교함을 따라 우상을 만들었으며 그것은 다 은장색이 만든 것이거늘 그들은 그것에 대하여 말하기를 제사를 드리는 자는 송아지와 입을 맞출 것이라 하도다

(13:3) 이러므로 그들은 아침 구름 같으며 쉬 사라지는 이슬 같으며 타작 마당에서 광풍에 날리는 쭉정이 같으며 굴뚝에서 나가는 연기 같으리라

“하나님께서 그토록 싫어하는 우상은 왜 인간들은 자꾸 섬길까?”라는 질문을 다음과 같이 바꿔야 합니다. “인간이 자기가 좋아하는 신을 만들어 섬기겠다는 데 왜 그것이 문제거리가 되느냐?”라고 말입니다. 인간은 본인의 원하는 신인 경우에만 충성을 하고 싶어합니다. 그 이유는 그 신이 인간 자신의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을 신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본성이란 옛날에 인간의 조상이 하나님의 금지시킨 과일을 따먹은 일을 잊고 자기로부터 새로운 자아상을 구성하고자 합니다. 근원적으로 하나님 앞에 약점이나 지적받을 일이 없는 나를 기반으로 해서 평생 자아됨을 키우고 싶은 겁니다. ‘헛점이 없는 자아상’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처음 범죄한 그 일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도리어 그 일을 인간들 속에 운송하고 싶어합니다. 이 역할을 위하여 택함 받은 민족이 등장했으니 바로 그 민족이 이스라엘입니다. 인류의 조상이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행동했는지 그 사실을 줄곧 세상 끝날까지 운반해야 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존재 취지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싫어하신 바가 있어주어야 그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취지가 살아나는 겁니다. 약점을 감추고 약점 없는 사람으로 살고 싶어하는 자들이 찾는 신, 그것이 바로 우상이라면, 우상은 결코 인간을 근원적으로 무너지게 하지는 않고 도리어 격려하고 위로하고 다독거려줍니다.

즉 우상은 인간에게 위기를 조성하지 않습니다. 붕괴를 획책하지 않습니다. ‘너의 너다움으로 계속 밀어붙여라’고 힘을 실어줍니다. 하지만 정작 천국은 지상의 인간들의 자기 정체성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언약취지에 부합되는 자들만 모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찾아든 언약으로 인하여 자신의 정체성이 우상적으로 기울고 있음을 발각당하는 자만이 천국의 백성이 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상숭배적 성향의 자아는 천국에 부적격자로 노출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우상 정립을 제대로 하시려고 합니다.

그 적절한 지파로 등장된 지파가 에브라임지파입니다. 창세기 49장에서 신명기 33장에서, 이스라엘 12지파는 각각 야곱과 모세로부터 축복을 받는 대목이 나옵니다. 12지파 가운데 유난히 주목을 받는 지파가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유다지파요 다른 하나는 요셉(에브라임)지파입니다.

이 축복된 예언대로 이스라엘 남부는 유다지파가 장악하고 북쪽은 에브라임 지파에 의해서 다스려집니다. 다른 군소 지파들은 이들 강력한 두 지파로부터 혜택을 입는 관계입니다. 땅도 넓고 인구도 많습니다. 그만큼 다른 지파에 비해서 힘이 센 겁니다. 그만큼 ‘말빨이 센게’ 됩니다.

오늘 본문 1절 말씀인 “에브라임이 말을 하면 사람들이 떨었도다 그가 이스라엘 중에서 자기를 높이더니”가 그 뜻입니다. 이는 곧 에브라임 지파가 이스라엘을 대변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곧 에브라임 지피가 같은 지파, 같은 인간들과 상대하면서 상대적 우월성을 지녔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 상대적 우월이 곧 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시범지파로 최후까지 남게 됩니다.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이제 에브라임 지파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직접 상대하게 됩니다. 그 결과는 이러합니다. “이러므로 그들은 아침 구름 같으며 쉬 사라지는 이슬 같으며 타작 마당에서 광풍에 날리는 쭉정이 같으며 굴뚝에서 나가는 연기 같으리라”

즉 같은 사람이 보는 에브라임 지파의 영향력이 하나님께서 인간 세계를 지적하는데 어떤 식으로 다루어지는 가를 에브라임 지파를 통해서 보여주십니다. 우상이란 따로 신을 만드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명기 4:23에 보면,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어버려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아무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우상이란 ‘언약을 잊게 되면’ 저절로 떠오르는 것이 우상성향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언약이 등장된다는 말은 우상경향이 떠오르는 절차를 통해서 진행됩니다. 곧 인간의 정체성은 언약 등장을 위해 필수적으로 무너지고 붕괴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역대상 21:16-17에 보면, “다윗이 눈을 들어보매 여호와의 사자가 천지 사이에 섰고 칼을 빼어 손에 들고 예루살렘 편을 가리켰는지라 다윗이 장로들로 더불어 굵은 베를 입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하나님께 아뢰되 명하여 백성을 계수하게 한 자가 내가 아니니이까 범죄하고 악을 행한 자는 곧 내니이다 이 양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컨대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시고 주의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지 마옵소서”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는 자입니다.

그 사람이 사단의 격동에 따라 인구조사를 실시하게 됩니다. 이것은 왕 자신의 정체성과 이스라엘 전체의 정체성이 얼마나 건재하고 싶은 스스로 위로하고 싶었습니다. 즉 무너지고 와해되는 경우를 사전에 점검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러나 이런 정신이 곧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에 관심이 없을 경우에 나오는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무너지게 합니다. 이스라엘의 인구도 전염병에 의해서 사흘만이 7만 명을 줄게 만들었습니다. 왕 자신과 이스라엘 자체를 언약에서 멀어지게 하게 되면 곧 이는 곧 자신의 취약점과 근원적인 죄악성을 고려하지 않는 태도를 보여주는 바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오르난 타자마당을 구매해서 거기에 제단을 쌓게 했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추진하는 언약적 결과성입니다. 역대상 21:26에 보면, 드디어 다윗의 무너짐 위에 하나님의 응답이 내려옵니다. “다윗이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 여호와께 아뢰었더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부터 번제단 위에 불을 내려 응답하시고” 우리 성도 안에 제단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망가질 요소를 의도적으로 지속시키시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망가짐을 기반으로 해서 언약이 나타나는 시발점으로 삼기 위함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성도입니다. ‘자아 있음’이 곧 ‘우상 여기 있음’으로 이해하는 겁니다. 우상을 찾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지적받지 않는 자아를 위해 대체물을 찾는 행위입니다. 안 무너지겠다는 것이 우상 심보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48강-호 13장 1-3절(언약과 우상)20070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 13장 1-3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266페이지입니다.

호세아 13:1-3

“에브라임이 말을 발하면 사람이 떨었도다 저가 이스라엘 중에서 자기를 높이더니 바알로 인하여 범죄하므로 망하였거늘 이제도 저희가 더욱 범죄하여 그 은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부어 만들되 자기의 공교함을 따라 우상을 만들었으며 그것은 다 장색이 만든 것이어늘 저희가 그것에 대하여 말하기를 제사를 드리는 자는 송아지의 입을 맞출 것이라 하도다 이러므로 저희는 아침 구름 같으며 쉽게 사라지는 이슬 같으며 타작마당에서 광풍에 날리우는 쭉정이 같으며 굴뚝에서 나가는 연기 같으리라.”

에브라임이라는 지파 이름이 먼저 나오지요. 이스라엘은 열두 지파로 되어 있습니다. 열두 지파가 균형 있게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고, 그 열두 지파에서 특별히 두 지파가 영토도 넓고 인구도 많고 영향력을 그만큼 크게 행사합니다. 두각을 나타난다 하거든요. 두각을 나타내는데 투톱입니다.

축구에서 제일 전방에 장신 두 선수 앞세워놓고 윙에서 센터링이 올라오면 머리로 득점하는 작전, 투톱이지요. 이스라엘 열두 지파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투톱을 설정했습니다. 한 지파는 유다지파입니다. 야곱이 창세기 49장에서 열두 지파에게 축복을 하는데 유다지파, 10절에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해서 유다지파를 부각시키고 또 한 지파가 야곱이 축복하는 가운데 49장 22절에 나옵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야곱의 축복이 신명기 제일 마지막 대목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명기 33장 13-16절에 보면, “요셉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원컨대 그 땅이 여호와께 복을 받아 하늘의 보물인 이슬과 땅 아래 저장한 물과 태양이 결실케 하는 보물과 태음이 자라게 하는 보물과 옛산의 상품물과 영원한 작은 산의 보물과 땅의 보물과 거기 충만한 것과 가시떨기 나무 가운데 거하시던 자의 은혜로 인하여 복이 요셉의 머리에, 그 형제 중 구별한 자의 정수리에 임할찌로다.”

이렇게 각종 보물과 은혜가 “그 형제중 구별한 자의 정수리에 임할”것이라고 하지요. 17절에 “그는 첫 수송아지 같이 위엄이 있으니 그 뿔이 들소의 뿔 같도다.” 이것은 에브라임지파를 통해서, 뿔이니까 열방에 대해서 들이받는 거예요. 들이받으면 자연적으로 영토가 넓어지겠지요. 남쪽은 유다가 차지하고 북쪽은 에브라임이 차지해서 다른 열 지파는 두각을 나타내는 두 지파의 혜택을 입는 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했습니다.

1이 아니고 2가 되지요. 1이 아니고 2가 되는데 결국은 2는 1로 정리가 돼요. 요셉지파가 등장하는 역사는 나중에 이스라엘 나라가 둘로 쪼개질 때 북쪽을 차지하게 됩니다. 북한입니다. 땅이 남한보다 더 넓지요. 더 넓은 북한을 차지하고 남쪽은 유다지파가 차지하게 됩니다. 어느 지파가 더 하나님께서 보기에 둘에서 하나로 모아지겠느냐 하는 그것은 놀랍게도 어느 지파가 일찍 망했느냐로 결정하는 겁니다.

북쪽 에브라임, 에브라임은 요셉의 둘째 아들이거든요. 요셉지파, 요셉지파의 에브라임과 므낫세, 므낫세가 장자고요. 에브라임지파가 먼저 망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망하는 것이 두각을 나타낸 지파가운데 유다지파입니다. 따라서 모세나 야곱이나 축복이라는 것은 바로 망함을 통해서 축복이 어디서 오는가를 하나님께서 설명하시겠다는 겁니다.

이 땅에서 잘되는 것을 통해서 복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붕괴되고 무너지는데 무너지면서 마지막 무너지는, 대표로 무너지는 지파를 통해서 대표로 복을 설명하겠다는 겁니다. 에브라임지파를 통해서도 하지만 마지막은 유다지파를 통해서 복을 설명하는데 그것은 유다지파가 가치 있는 것이 아니고 마지막으로 망한 지파가 유다지파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나중에 유대나라가 됩니다. 유다지파가 대변자역할을 하고 대표지파로서 망합니다. 여러분이 <터미네이터> 영화 보면 미래에서 온 구원자, 인공기계 구원자가 쇳물에 몸통이 녹아들어가지요. 녹아들어가면서 마지막 장면이 엄지손가락만 남기면서 “I' ll be back!(다시 올게).” 그 마지막 침몰되는 쇳물에 잠기는 부분이 손가락이지요.

그 손가락에 해당하는 지방이 바로 유다지파에요. 그래서 메시아는 유다지파자손입니다. 온 인류를 대표해서 유다지파가 왜 망해야 되는가를 보여주는 역할을 하게 되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에브라임지파도 마찬가지인데 에브라임지파가 먼저 망하지요. 역시 에브라임지파도 북쪽에서 마지막 내려가는 손가락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지요.

그런데 이 말은 곧 우상이라는 것, 우리같이 이방민족에게 우상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설명해도 그것은 의미 없어요. 우상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독점적으로 이스라엘 역사를 경유해야 우상의 실체가 드러나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경유해야 돼요. 이스라엘 말고 다른 사람이 우상을 설명하면 그것은 우상이 아닙니다. 설명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에브라임지파가 결국 망하는데 망하는 이유가 에브라임지파가 이스라엘로서 우상을 섬김으로서, 다른 나라에서는 우상을 섬겨도 망하지 않는데 이스라엘이라는 이유 때문에 우상을 섬김으로서 드디어 이스라엘이 망합니다. 이 망하는 가운데서 도대체 우상이라는 것이 뭐냐? 뭘 두고 우상이라고 하느냐가 제대로 밝혀집니다.

2절에 보면 에브라임이 우상을 섬기게 되지요. 우상을 섬기게 되고 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 에브라임을 아침구름같이 쉽게 사라지는 이슬로, 타작마당에서 광풍에 날리는 쭉정이로 만들었고 굴뚝에서 나는 연기같이 만들었지요. 흩어졌다, 그 말이지요. 실체가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 실체가 없어요. 뭐가 있었나? 없어요. 아무것도 없게 만들겠다는 거예요.

마치 우상과 같아요. 우상이라 하는 것은 번듯하게 뭔가, 큰 미륵보살 같은 것이 서 있으면 뭔가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만져보면 돌덩어리지요.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나라가 되는데 그것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이스라엘 중에서도 에브라임이 그 역할을 맡게 되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1절에 보면, “에브라임이 말을 발하면 사람이 떨었도다.” 그만큼 말빨이 서는 겁니다. 에브라임이 말빨이 그만큼 선다는 말은, 북이스라엘, 전체 이스라엘에서 특히 북쪽 이스라엘에서는 에브라임지파의 혜택과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가장 큰 나라에서 군사적으로 많은 힘을 다른 작은 나라한테 부여할 수가 있는 겁니다.

같은 교단 안에 교회가 여러 곳 있으면 ‘같은 교인이니 평등하겠지’ 하고 일반인들은 안일하게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교단에서 그 교단을 대표하는 교회는 항상 그 교단의 군소교회가 기대하게 되고 숭상하게 됩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괄호 열고, 합동, 괄호 닫고.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그 교단의 대표교회는 승동교회, 대한예수교장로회 괄호 열고, 통합, 괄호 닫고.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대표교회는 영락교회 연동교회 새문안교회,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대구 같으면 제일교회, 대한예수교 합동측 대구의 대표교회는 서문교회, 서현교회, 동부교회 같은 곳, 그런데 반야월교회가 요새 또 뜨지요. 이게 뭐냐 에브라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 교회는 자부심이 있으니까 원래 힘 있는 곳에 더 힘이 모아진다고 자본이 모인 곳에 더 자본이 모이잖아요. 투자가 더 된다고요.

힘이 있기 때문에 힘이 모여서 교회가 점점 더 커지고 군소교단은 코로나 때문에 해체되어버리지요. 자본금이 있을 때 끝까지 살아남는 교회가 되는 겁니다. 그러한 교회가 우상을 왜 섬길까, 라는 생각이 들겠지요. 큰 교회가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대표적인 대표지파가 돼요. 사람들이 흠모하는 대표지파가 됩니다.

대표지파가 무슨 말을 하면 떨었다, 하니까 대표지파들이 자긍심이 있어요. 그 자긍심이 어디서 생겼는가? 자기보다 못한 지파, 약한 지파, 자기한테 도움 받는 지파에 대해서 큰소리를 치고 있고 그쪽에서 벌벌 떨게 되는 겁니다. 그들의 지시에 따르기 위해서. 이것은 곧 인간 대 인간을 상대하는 거지요.

에브라임지파가, 호세아 13장 1절에, “저가 이스라엘 중에서 자기를 높이더니” 하는 이유가 사람과 사람을 상대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3절에서는, 네가 그동안 사람 대 사람, 또는 다른 지파와 상대해서 네가 굉장히 으스댔는데 3절에서는 “내가 직접 너를 상대해줄게. 그런 만만한 인간과 상대해서 ‘내가 이정도 힘 있다.’ 그러지 마. 너는 나하고 상대해.” 나하고 상대하게 되면 너는 대표적인 우상숭배지파가 되는 거예요.

따라서 우상숭배지파, 이것은 망해야 되지요. 그러면 여기서 왜 이스라엘이 우상을, 하나님을 잘 믿는 그 이스라엘이 왜 우상을 섬기게 되느냐? 도대체 뭐가 아쉬워서 우상을 섬기느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질문자체를 고쳐야 돼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는 것은 그들이 우상 안 섬겨서, 그들이 잘 먹고 잘 사는 그것이 이스라엘의 목표가 아닙니다.

신명기 4장 23절에 보면,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어버려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아무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지 말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우상을 섬기는 경우는 언약을 잊어버리면 전부 다 우상 지향적으로 나가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우상과 언약섬기는 것이 중립지대가 없어요. 언약을 잊어버리면 그 때는 무조건 우상 쪽으로 마음을 빼앗겼다. 그렇게 단정 지을 수가 있는 거예요. 언약을 잊으면, 언약에 관심 없으면 언약을 잊어버린다고 되어 있으니까. 신명기 4장 23절에 언약을 잊어버리면 그 쪽으로 다 가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내가 우상이 좋아서 ‘우상 섬겨야지’가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이스라엘 지파 속에 언약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지면 자동적으로 우상 쪽으로 마음이 다 돌아섰다. 또 서서히 돌아섰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도대체 여기서 그들은 왜 우상을 섬기느냐 하는 질문을 하기 전에 먼저 도대체 언약이 뭐냐, 하는 것부터 생각해야 되겠지요.

언약이 뭐냐? 언약이라는 것을 복잡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단정적으로 결론부터 먼저 하게 되면, 언약이란 옛날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게 된 그 타락사건을 유지시켜 주는 것이 언약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에게 범죄 한 그 경우, 그 일을 그대로 지속시키는 것이 언약이에요. 인간의 역사 속에 하나님의 트라우마를 심어놓은 것이 언약입니다.

‘과거는 잊자.’ 안돼요. 하나님의 아픔인 동시에 인간의 근원적인 취약점, 약점,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중도에 취소시키는 것이 아니고 역사 끝 날까지 계속 운반시키는데, 운반하고 수송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언약을 심어놓은 이스라엘이라는 그 나라를 만든 거예요. 도대체 인간이 무슨 짓을 하나님 앞에 했던가가 이스라엘에게 가야 그것이 밝혀집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선악과를 따먹게 된 그 경우를 어떤 식으로 운반하느냐 하면, 인간은 금지한 것을 대체하려는 성향을 하나님께서는 유지시켜놓고 하나님께서는 닦달내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금지한 것이 뭐냐?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했잖아요. 따먹지 말라는 그 금기사항을 위반해놓고 금기가 없는, 따먹지 말라는 것이 아예 없이 살고 싶은 거예요. 누구한테 간섭질 당하지 않고 살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자신의 정당성을 위해서, 지적할 수도 없고 뭘 해도 괜찮은 대체물 찾기에 인간이 나선다는 그 악마적 속성을 이용해서, 그 인간들을 대표해서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운반하게 만들었습니다. 인간은 이미 범죄 했지만 범죄 했다는 그 금기사항을 강제로 떼 내버리고, 그것을 지워버리고, 약점이니까 지워버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계속 ‘뭐 어때? 이정도면 착실한 편이지.’ 하면서 자신의 괜찮은, 누가 보기에도, 하나님 보시기에 나쁜 짓을 했다는 그 사실은 떼 내버리고, 또 내가 나를 괜찮은 인간으로 만들고 그것을 모아서 나의 나다움, 나의 정체, 본질로 삼고 싶은 것을 인간 나름대로 유지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천국, 천국, 하지만 하나님 나라, 하나님이 계신 곳은 인간이 현재 자기의 정체성으로 그 천국에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지금의 나의 나됨으로 들어가지를 못해요. 대전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지만 하나님은 내편 아니에요. 하나님은 내가 아닌 내편이에요. 무슨 방언이냐, 하겠는데 나라는 것은 예수님과의 만남으로서 다른 나가 되어야 돼요.

보통 이름이 바뀌거든요. 사울에서 바울로, 그리고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그 바뀜 자체를 보여주기 위해서 기존의 우상성향의 우리를 보존시켜 주는 겁니다. 보존시켜주고 거기에 언약을 실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언약이라는 것은 뭐냐? 약점을 유지함으로서 내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한 채 나중에 죽어서 구원받겠다는 내 고집과 나의 본성을 붕괴시키는 겁니다. 무너뜨리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은 뭐냐? 나를 무너뜨리는 것이 목적이에요. 나 자신을. 나 자신을 무너뜨릴 때 그냥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고 너 “우상 섬겼어”라는 쪽으로 무너뜨리는 거예요. 그러면 우상은 뭐냐? 나의 붕괴고, 나의 위기가 초래하지 않고 나를 나의 정체성을, 나 자신을 건재하게 만드는 대체물로 등장한 신, 그게 바로 우상입니다.

나에게 어떤 위기를 주지 않는 신, 나에게 항상 희망과 소망을 불어넣어주는 신, 나를 위로하는 신, 나를 다독거려 주고, 나를 안심시켜 주고, 나를 지켜주는 신, 그게 바로 우상이에요. 거기에는 과거에 인간이 범죄했다는 사실이 남아 있지 않으니까. 희망적인 신, 그게 바로 우상이 되는 겁니다.

에브라임은 열 두 지파 가운데 자기가 우두머리에요. 이 우두머리를 유지하고 싶은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그 우두머리 잘됐다. 그 우두머리부터 내가 우상 섬겨서 망하게 할게.” 이스라엘백성은 우상만 섬기는 것이 아니고 혼합주의를 채택했어요. 북쪽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1세가 그랬거든요. 1세라고 한 것은 같은 이름의 왕이 후대에 나오기 때문에 앞의 것을 1세라 합니다.

여로보암 1세가 이스라엘 제일 북쪽과 남쪽, 단과 벧엘, 신의주와 휴전선에 송아지를 딱 세웠어요. 그 송아지는 여호와에요. 우상입니다. 그게 아니고 그냥 여호와인데 형상으로 송아지를 만들었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도 “제사를 드리는 자는 송아지의 입을 맞출 것이라.”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과거의 전통에서 나온 겁니다.

전통이라는 말은 인간의 선배들의 업적에 대한 존경심을 말합니다. 어떤 신에 대해서 해석을 할 때 전통에 의해서 해석하는 것은, 선배들의 지혜에 대한 존경심을 후대가 보존하고 더 그것을 발전시켜서 보다 더 정확하게 하나님을 해석해보자. 이렇게 되거든요.

특히나 여로보암 1세라 하는 것은 북 이스라엘의 시조에요. 초대대통령 미국의 워싱턴, 한국에서는 리 승만, 이 승만이 아니고 리 승만. 그 사람이 없었으면 대한민국이 없었고 워싱턴이 없었으면 미국이 없었으니까. 따라서 그 뿌리가 같다는 말은 우리의 정체성, 우리의 본질은 하나라는 것을 백성들에게 설득시킬 수가 있거든요. 그것을 하나의 이념으로서 강요할 수가 있어요. 우리는 하나다 그 말입니다.

현재 북한의 정체성은 김 일성입니다. 죽은 김 일성이가 지도해요. 그걸 귀신이 통치한다 해서 ‘유훈통치’라 합니다. 죽은 귀신이 북한을 통치하고 있어요. 김일성 사진이, 죽은 고인이 아직도 산채로 있다고요. 마치 기독교가 죽은 주 기철, 한 경직 섬기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천주교가 죽은 김 수환 섬기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산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영웅이고 우월하다는 거예요. 왜 그분이 기초를 닦았으니까. 송아지를 송아지로, 바알로 보지 않습니다. 그들은 여호와로 본 거예요. 여호와에 대한 해석은 전통적인 해석을 그들은 고수하고 있습니다. 왜 그래야 되는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붕괴되지 않기 위해서, 뭔가 나의 나다움이 무너지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언약은, 너는 무너져야 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에 언약을 주신, 다윗에게 주신 언약의 원칙이 바로 그겁니다. 역대상 21장 1절에 보면,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다윗과 어떤 계약 어떤 약속 어떤 언약을 맺었는가가 이게 참된 이스라엘의 정체성이에요.

다윗으로 하여금 사단에게 넘어가게 만드는 그런 요소가 다윗에게 있어요. 그게 있어야 돼요. 그게 있어줘야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답게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속에 죄악 된 요소가 없으면 이스라엘이 될 수가 없어요. 충분하게 죄악스러워야 돼요. 넉넉하게 죄스러워야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일을 왕인 다윗이 하는 거예요.

사단이 격동해서 다윗이 인구조사를 하게 됩니다. 인구조사를 하려 드니 요압이 말리지요. “임금님, 이런 짓은 옳지 않습니다.” 말려도 안 되지요. 이미 사단에 격동되었으니까 내 명령대로 하라고 재촉을 하게 됩니다. 역대하 21장 4절에, “왕의 명령이 요압을 재촉한지라.” 그래서 인구센서스를 한 거지요.

해보니 5절에, “이스라엘 중에 칼을 뺄만한 자가 일백 십만이요.” 백십만 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다른 나라 보더 월등하게 많았습니다. 백십만, 왕의 명령에 한 몸 같이 뛰어들 사람이 백십만, 그리고 “유다 중에 칼을 뺄만한 자가 사십 칠만이라.” 다윗은 대단히 만족했는데 이 만족스러움이 하나님과의 만남의, 언약의 실체를 보여주는 시발점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윗 속에 우상적인 요소가, 도리어 악한 요소가 언약을 이루는 시발점으로 작용하기 위해서 그 안에 잠복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벌을 내리시지요. 이스라엘, 또는 이스라엘 왕 다윗의 정체성, 하나같이 ‘나는 이런 사람이다’ 하고 안심했던 그 정체성의 위기가 찾아오고 그게 무너집니다.

사흘 동안 죽은 자가 칠만 이었습니다. 백 십만에서 7만 명 빼야 되겠지요. 그러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다윗을 꿇어앉힙니다. 다윗의 정체성의 붕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에브라임이 사람 대 사람으로 상대했다만 다윗은 지금 사람과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처음에는 악마하고 상대했지만 사단인줄도 몰랐지요, 그 사단의 일에 협조하다가 이제는 직접 하나님과 대면해서 하나님 앞에서 주저앉게 됩니다. 무너지게 돼요.

바로 이러한 절차와 과정 없이는, 이러한 자기정체성의 해체 없이는 천국에 못갑니다. 기존의 내가 유지하고 싶은 나의 나됨으로서는 천국에 안 넣어줘요. 누구 맘대로요? 못 들어갑니다. 천국은 언약의 나라기 때문에 언약이 완성된 모습을 지녀야 천국갈 수 있어요. 그 언약이 완성된 모습을 ‘의’라고 하고 그 언약 속에다 인간적인 요소가 삽입된 것을 우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상은 만들기가 가능해요. 왜? 인간의 자기의 생각이 거기에 섞일 수가 있기 때문에. 송아지도 그렇게 다 인간이 만들어낸 거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타작마당에 섰으니까 다윗이 눈을 들어 보니 천사가 있고 다윗은 엎드렸지요. 조치를 이야기합니다. 오르난이라는 집에 가서 땅을 구매하게 해요.

그게 타작마당인데 오르난의 타작마당, 지금의 예루살렘 황금돔이 있는 그 자리에요. 모리아산,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바친, 이삭을 바친 그 지점이에요. 지금은 이슬람이 거기를 장악해서 황금사원을 세웠고 이스라엘은 그 밑 서편 장벽, 일명 통곡의 벽에다 종이 꽂아놓고, 모자 쓰고, 머리를 벽에다 박듯이 몸을 앞뒤로 움직이면서 간절한 모습으로 기도들을 하지요.

그 때 그 모자 쓰라고 하는데 나는 안 썼습니다만. ‘빨리 저 황금돔 사원이 우리 손으로 다시 들어오기를.’ 1967년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이스라엘 땅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미국대사관이 예루살렘에 옮겨와 있지요.

다윗이 그 땅에 가서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제사를 드리니까 역대상 21장 2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하늘에서부터 번제단 위에 불을 내려 응답하시고.” 이게 바로 다윗언약 그 수준의 완성이 되는 거예요. 다윗언약, 그 시대 다윗을 통한 언약은 이런 식으로 표출되는 겁니다. 하늘에서 응답했으니까. “바로 그거야.” 바로 그거라는 말이지요.

나는 다윗 네가 구원받고, 이스라엘이 구원 받고, 가 아니라 이스라엘 안에 언약완성의 모습을 보이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언약이라는 것은 인간이 협조한 것이 아니고, 인간이 자기노력이 추가되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인간은, 언약 앞에서 인간은 무너져야 된다는 그 사실을 배경으로 해서 하나님의 용서라는 것이 수립이 돼요.

전적으로 인간이, 우상의 요소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음을 노출시키는 가운데서 언약도 동반해서 같이 노출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용서받습니까, 하는 것은 빠지는 거예요. 어떻게 죄인을 사용하시는가가 중요해요. 나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죄인 되게 해서 사용하시거든요.

그러면 내가 죄인 되는 것은, 바로 우상이라 하는 것은, 아까도 했지만 하나님이 지적하는 것을 빼버리고 남에게 지적받기 싫은 나는, ‘남에게 괜찮다. 하나님 보시기에도 괜찮지요?’라는 것을 기어이 유지하고 싶어 하는 이 악마적 본성, 이것이 계속 껄떡거리면서 우리 안에서 살아 있는 겁니다.

그게 살아 있는 것을 아는 자는 바로 언약 속에 구원받은 자요, 그걸 모르는 자는 언약에 의해서 저주받을 자지요. 내가 무너지는 것은 하나님의 조치의 당연한 필수적인 요건인 것을 인정하는 거예요. 그것도 정말 고맙고 놀랍고 감사한 마음으로. 자기 자신이 무너지지 않으면서 은혜 받았다는 말은 전부 다 거짓말입니다.

인간이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 모습, 나는 이랬으면 좋겠다, 하는 것이 있지요. 그걸 유지하면서 신에게 빌어서, 뭔가 이런 내가 감동받을 수 있는 거리를 주옵소서, 맨 날 이것만 노리는 겁니다. 그게 바로 무너지기 전의 인간의 모습이지요. 인간은 뭐 날마다 무너져야 되겠지만.

이러한 우상적인 요소, 안 무너지고 버티겠다는 그 요소를 무너지게 하기위해서 예수님께서 먼저 시범조로 마귀와 상대 했어요. 다윗도 사단과 상대했잖아요.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악마와 상대하도록 주선을 누가 주선했는가? 성령께서 의도적으로 주선한 거예요. 악마가 어떤 공간에 있으면 성령께서 뒤에서 미는 거예요.

“가서 만나라. 만나라.” 하고 뒤에서 등 떠미는 거예요. 엉덩이 떠밀어서 “싫어요!” 해도 할 수 없어요. 그냥 만나야 돼요. 악마를 만나야 돼요. 우리는 늘 만나고 있으니까. 그렇게 만나는 거예요. 만나 보니까 첫 번째 시험이 뭐냐? 물질적이고, 두 번째가 신비이고, 세 번째가 권세였습니다.

첫 번째가 뭐냐 하면, 자기 자신을 물질로 보는 거예요. 물질이라는 떡으로만 생명이 부지된다고 생각하는 안목, 이게 악마가 인간에게 집어넣은 거예요. 네가 떡이 있어야 무너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너는 너 다운 너를 유지하고 싶지? 그러면 밥 먹어라. 떡 먹어라.” 왜? 너는, 물질에는 물질이 필요한 거예요. 나 자신을 물질로 봤다는 말은 우리가 만든 신도 나 같은 물질로 만든 신일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지요.

아무리 인격적인 하나님이라고 해도 내가 나를 물질로 여기는 한 하나님도 물질이에요. 물질로 이해된다는 말은 하나의 대상이 되고, 대상이 된다는 것은 다룰 수 있는 똑 떨어진 대상이 된다는 뜻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옛날 신학자들이 할 일 이 없어서 ‘예수님은 하루에 화장실 몇 번 갔겠는가? 예수님도 하품 했겠는가?’ 연구했어요.

이것은 뭐냐? 본인이 본인을 물질로 이해하기 때문에 그걸 그대로 주님한테 적용시키는 겁니다. 두 번째가 뭐냐 신비에요. 어떤 신비인가? 물질이 높은데서 뛰어내렸는데 그게 다치지 않을 때, 물질을 물질로 그대로 유지하면서 다치지 않을 때 “와, 놀랍다.” 이렇게 되지요.

그 신비로움. “높은데서 뛰어내려라. 그러면 천사가 와서 다치지 않게 해줄 것이다. 네 물질성 있는 육체는 다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뭐냐? “물질에서 그냥 물질이 아니고 신비로운 것까지 더 포함하게 되면 너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기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악마가 요구하는 거예요. 인간은 물질로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 앞에 인기를 얻는 물질 또는 신비함을 능력을 갖고 있을 때 그래서 세 번째, 물질과 신비가 결합되면 그게 세상의 모든 힘을 얻는 거지요. 권세를 얻는 겁니다.

이게 바로 인간은 자기가 안 무너지려는 이유에요. 자기 자신이 붕괴되지 않으려는 이유가 있어요. 왜? 사람 사는 보람이 물질의 힘과 신비로움과 권세가 눈앞에 있는데 그걸 마다하고 포기하고 뒤돌아서는 것은 본인이 용납하기 싫은 거예요. 이왕 이 땅에 태어난 것 성공하고 싶은 겁니다.

문제는 어느 인간도 이 유혹에서 돌아설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확 당기지요.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우상성향성의 몸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우상에서 벗어나서 나는 이제 우상 안 섬길래, 할 위인이 없어요. 다윗도 마찬가지였거든요. 다윗이 우상에서 돌아서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다윗을 무너지게 하셨습니다. 그 우상 섬김, 인구조사해서 자신의 그 힘, 권세, 물질, 물질이라 하는 것은 하나의 대상이 되니까 숫자 헤아림이 가능하잖아요. “칼을 빼는 자가 우리나라에는 백 십만이다.” 요새말로 하면 우리 교회 교인이 몇 명이다. 유-튜브에 몇 명이 들어왔고, 댓글이 몇 명이 들어왔고, ‘좋아요’가 몇 개다.

이게 숫자로 헤아릴 수 있다는 것. 숫자라는 것은 물질을 개체화시킬 때는 숫자가 딱딱 대응이 되거든요. 그러나 무너지게 되면, 우유처럼 물처럼 액체처럼 무너지게 되면 숫자 헤아릴 것이 없지 않습니까? 주님이 요구하는 것은 그거에요. “제발 좀 무너져라. 무너지면서 너라는 것도 같이 없어지도록 좀 무너져버려라.” 왜? 그것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요소거든요. 나의 정체성, 나의 나다움이라는 것은.

누가복음 10장 20절, 지난 낮 설교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다시 읽어보면,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여기 내가 귀신을 상대해서 내가 이겼습니다, 해서 이겨버리면 나의 정체성은 무너지는 것이 아니고 더 굳건해져요.

그러나 우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려면 누구를 경유해야 되느냐 하면, 십자가 안에서 우리가 죄인으로 드러나야 돼요. 그것도 죄인이니까 우상숭배자로 드러나는 거지요. 아까 말했지요. 언약에 관심 없으면 자연적으로 우상으로 돌아선다고요. 그러니까 우리는 우상숭배자일 수밖에 없어서 우리는 천국가지 못함을 분명히 할 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기쁨이 비로소 유지가 돼요.

내가 만약에 안 무너지게 되면, 내게 기쁨이 되고 내게 감동되는 것을 자꾸 찾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내가 무너지게 되면 나를 무너뜨린 그 분을 기뻐하게 돼요. 나보고 죄인이라고 지적하신 그 지적이 감사가 된다고요. 정말, 남편, 자기가 생각해도 보잘 것도 없고, 못생기고, 내놓을 것도 없고, 본인이 생각해도 아무것도 아니고, 어느 여자가 나 같은 것을, 나랑 결혼하겠나 싶고, 그게 평강공주와 바보온달 이지요, 바보온달처럼 느끼고 있는데 만약에 평강공주가 “자기하고 결혼해 듀오. 결혼해주오.” 이렇게 나온다면 그 사람은 결혼하고 난 뒤에는 자기자랑 하겠습니까, 자기 못난 것 때문에 결혼했다고 자랑질을 하겠습니까?

아니지요. 누가 자랑 하겠어요? 자기 마누라 자랑하겠지요. 그뿐만 아니고 평소에 부부사이에 그 평강공주가 자기한테 계속 지적질을 해도 그걸 잔소리로 여기지 않고 사랑의 관심으로 여깁니다. 아 그런 남편이 있을까 싶은데 기가 차다. 아내의 잔소리를 사랑의 속삭임으로 받아들여서 잔소리 들을 때마다 감격의 눈물을 흘려요. ‘아직도 나를 남편으로 여겨줘서 그것만으로도 감사하오. 임이여 요단강 건너지 말고 계속 잔소리 해주오.’ 이렇게 나올 수 있다면 대단한 사람이지요.

그게 바로 성도의 모습이에요. 성경을 통해서 지적해 줄 때 그 지적질 해주는 자체만 해도, 주님 안에 내 이름이 있기 때문에, 하나의 예수님의 신부로 간주하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너는 네 구원에 대해서 나대지 마라. 네가 보탰다 하지 마라. 너는 우상숭배자였었어.” 그걸 되새겨주고 확인시켜 줄때마다 계속해서 그 기쁨, 주님덕분에 우리 이름이 천국에 갔다는 것, 언약의 나라에 이미 이름이 명단에 있다는 그 자체가 세상의 어떤 기쁨보다 더 기쁘지요.

우상숭배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상숭배를 하는 나를 뭉개버리는 그 주님의 놀라운 사랑에 늘 감사하고 탄복합니다. 요한1서 5장 21절에 보면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 요한 일서 마지막 구절이 이거예요. “우상에서 멀리하라.” 우상이 아닌 것은 뭐냐?

요한1서에서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의심하는 자들이 다 우상 숭배자에요. 요한 1서 4장 1, 2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찌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그러면 그냥 “예수님은 육체로 왔습니다.” 하고 믿으면 그게 우상숭배자 아닌가요? 아니에요. 예수님이 육체로 왔다는 말은 피와 물과 성령을 주셨다는 겁니다. 특히 피를 주셨다는 겁니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요한 1서 5:6-8)

요한 1서 1장에서 피가 없이는 구원될 수 없는 이유는 너희는 거짓말쟁이기 때문에, 너희가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나와요. 죄 없다 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든다. 요한 1서 1장 8절에,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그렇게 되어 있어요.

말씀을 정리합니다. 인간은 남한테 속는 것이 아니에요. 나한테 속아요. 내가 뭐 된 양 늘 본인을 본인이 속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장차 천국 갈 나의 자리에, 예수님이 먼저 그 자리를 선점해서 주님의 십자가 가지고 “너는 지금 마귀에서 속고 있다. 네가 되지도 못한 인간이, 천국 가지도 못할 인간이 자꾸 추진하는데 너에게 속지 말라. 내가 너를 죽여주고 천국 넣어줄게. 네 무너짐에 대해서 섭섭하게 여기지 말고 도리어 감사하라. 네가 평생 동안 질질 끌어왔던 나다움은, 그것은 우상이었다. 네가 너에게 우상이었다. 너는 너 자신의 우상에 그동안 속아왔다.”라는 그런 지적질 자체에 대해서 고마워하는 자가 바로 성령 받은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적받아야 마땅하고, 그래야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제단, 모리아산의 제단, 십자가가 또 다시 역동하고 있음을 우리가 깨닫게 되는 사실을 저희들이 잊지 말고, 그저 십자가만 밝혀지고 나타난다면 그것으로서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