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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호세아 12:11-14 / 야곱의 동질성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호세아

호세아 12:11-14 / 야곱의 동질성

정인순 2020. 6. 25. 13:17

야곱의 동질성

 

음성 동영상 Youtube

 

이근호
2020년 6월 24일

 

 

본문 말씀: 호세아 12:11-14

(12:11) 길르앗은 불의한 것이냐 과연 그러하다 그들은 거짓되도다 길갈에서는 무리가 수송아지로 제사를 드리며 그 제단은 밭이랑에 쌓인 돌무더기 같도다

(12:12) 야곱이 아람의 들로 도망하였으며 이스라엘이 아내를 얻기 위하여 사람을 섬기며 아내를 얻기 위하여 양을 쳤고

(12:13) 여호와께서는 한 선지자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고 이스라엘이 한 선지자로 보호 받았거늘

(12:14) 에브라임이 격노하게 함이 극심하였으니 그의 주께서 그의 피로 그의 위에 머물러 있게 하시며 그의 수치를 그에게 돌리시리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제단과 제사를 부정한 것으로 간주하십니다. 이는 제사나 제단의 요건에 맞지 않다고 보신 겁니다. 그렇다면 온전한 제단과 제사의 요건을 무엇일까요? 출애굽기 20:23-24에 보면,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인간들끼리의 종교 연출은 제사와 제단의 요건은 될 수 없습니다. 필히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그 현장에 계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내용은 ‘피’로서 나타납니다. 출애굽기 24:5-6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번제와 소로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리게 하고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번제와 소로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리게 하고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피’로서 다가오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피’라는 ‘육신의 파괴’의 모습으로 인간들에게 나타나시는 겁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진척이 되면서 점차 드러납니다. 이점은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평생에 걸쳐, ‘왜 하나님께서는 피흘림으로만 오시는가?’를 아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이스라엘 역사적 상황에서 왜 파괴적으로 요소를 불러일으키는지를 나타납니다. 그 예가 여호수아 7:26에 보면, “그 위에 돌 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날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 극렬한 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날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쟁에 훼방되는 요소가 외부 이방민족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내부에 있음이 드러납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정없이 쳐부술 적이 실은 이스라엘 내부에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언약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간이라는 내부 배신자를 죽여놓고 이스라엘은 그 시신 위에 저주의 돌무더기를 쌓아놓습니다.

여호수아 8:29에 보면, “그가 또 아이 왕을 저녁 때까지 나무에 달았다가 해 질 때에 명하여 그 시체를 나무에서 내려 그 성문 어귀에 던지고 그 위에 돌로 큰 무더기를 쌓았더니 그것이 오늘까지 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적의 왕이 처단하는 모습이 매우 잔인하게 보이겠지만 실은 우리 내부에 ‘나 자신’이 하나님 보시기에 이처럼 잔인한 처분을 받아 마땅한 요소가 들어 있었던 겁니다.

오늘 본문 11절이 바로 그 사실을 말해줍니다. 길갈에서 이스라엘이 자기 딴에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린다고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돌무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사를 형식적으로 치르는 것은 다소 번거럽지만 인간으로서는 얼마든지 반복해서 시행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그 제사에서 자신의 무너짐의 요소를 찾아야 하는 겁니다.

야곱 개인의 일생에 하나님의 언약이 찾아듭니다. 이는 언약의 보편성이 야곱이라는 개인에게 집중됩니다. 그 이야기가 12절에 나옵니다. “야곱이 아람의 들로 도망하였으며 이스라엘이 아내를 얻기 위하여 사람을 섬기며 아내를 얻기 위하여 양을 쳤고” 여기서 ‘도망쳤다’는 표현은 야곱이 개인적인 동질성을 추구하고 있다고 보시는 겁니다.

즉 야곱이 본인의 동질성을 지속하기 위해 아내를 소유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29장에서 야곱은 자기 뜻대로 되지를 못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가 있는데 현실에서는 자신이 사랑하지 않는 자와 결혼해야 했습니다. 여기서 야곱의 동질성을 깨어집니다. 즉 야곱은 본인이 언약을 소유하고 있기에 자신의 뜻을 하나님께서 이루어질 줄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야곱의 인생사에서, 본인이 소유하려는 그 아내들로 인하여 도리어 소유당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는 야곱이 갖고자 하는 것은 야곱이 미처 언약의 심연(깊이)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함부로 달려든 겁니다. 야곱이 얻고자 하는 것으로 인해 야곱의 역공을 당하게 됩니다. 야곱에게서 12아들이 태어나지만 모든 아들의 이름을 야곱이 짓는 것이 아니라 두 아내가 짓습니다.

이는 ‘야곱의 자식’이 아니라 곧 ‘여자의 자식’입니다. 언약은 야곱의 아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의 남편’으로서 야곱은 거기 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자와 혼인하고 싶었던 야곱이 기대는 무너집니다. 사랑하지도 않은 여자의 자식을 계속 낳아야 했습니다. 두 여자 사이의 질투와 다툼 속에서 시달려야 하는 것이 언약과 함께 있는 야곱의 처지입니다.

결국 야곱이 참으로 사랑했던 여자와 따로 살 기회는 없어지고 여인들의 다툼에서 사랑했던 아내는 아기 놓다가 죽고 맙니다. 여기에서 비로소 야곱은, 본인이 언약의 소유할 수 없음을 압니다. 반대로 언약이 자신을 소유했음을 알게 됩니다. 즉 언약 안에 두 계열이 있었던 겁니다.

육의 계열이 있는 반면에, 영의 계열도 있었던 겁니다. 육이 아내로 떨어져야 영이 부각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내부에서 야곱의 육적 기대와 욕망을 떨어뜨리시게 합니다. 창세기 35:18에 보면,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곧 라헬은 자신을 ‘슬픔의 여인’이라고 말하고 자신이 낳은 자식을 ‘슬픔의 자식’이라고 이름을 짓습니다. 하지만 비로소 야곱은 언약이 그동안 자신을 어떻게 다루어졌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슬픔의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이름짓습니다. 야곱이 지은 유일한 이름입니다.

이로서 두 아내에서 난 모든 자신들이 야곱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곧 언약의 아들입니다. 이런 결과를 낳기 위해서 야곱의 육은 죽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이스라엘’의 요소가 살아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27:46에 보면, “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셔야 언약이 예수님을 통해서 완성이 되는 겁니다. 이런 언약적 사실이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계속 발현됩니다. 그리고 오늘날 성도의 인생을 통해서 발현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통해서 나의 증인이 되지 말고 언약의 증인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녹취:오용익

47강-호 12장 11-14절(야곱의 동질성)20062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 12장 11-14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266페이지입니다.

호세아 12:11-14

“길르앗은 불의한 것이냐 저희는 과연 거짓되도다 길갈에서는 무리가 수송아지로 제사를 드리며 그 제단은 밭이랑에 쌓인 돌 무더기 같도다 옛적에 야곱이 아람들로 도망하였으며 이스라엘이 아내 얻기 위하여 사람을 섬기며 아내 얻기 위하여 양을 쳤고 여호와께서는 선지자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선지자로 저를 보호하셨거늘 에브라임이 격노케 함이 극심하였으니 그 주께서 그 피로 그 위에 머물러 있게 하시며 저의 수치를 저에게 돌리시리라.”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하나님이 등장하지요. 하나님이 계시는 그 맞은편에 세 종류의 부정적인 것이 나란히 나옵니다. 하나는 제단이 나오는데 11절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제단을 하나님께 제사하는 제단이라 그렇게 우기는데 하나님은 그걸 부정적으로 이렇게 봤습니다. “밭이랑에 쌓은 돌무더기 같도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제단이라 인정하지 못하겠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뭔가 제단이 될 수 없는 잘못된 요건이 거기에 설정되어 있다는 뜻이지요. 또 하나님 쪽이 아니고 그 맞은편에, 지적받는 제단처럼 그 같은 편에 누가 속해 있느냐 하면 야곱의 행위가 나옵니다. 야곱의 행위를 보게 되면 12절에 “아람들로 도망하였으며.” ‘아람 들’이란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나라, 지금의 시리아 그 나라지요.

그 북쪽으로 도망을 쳤는데 도망쳤다는 말 자체가 부정적이지요. 달아났다, 피했다, 쉽게 말해서 어떤 자기 인생 결정을 자기 맘대로, 자기 몸 하나 살리기 위해서, 자기욕구를 이루기 위해서 아무 생각 없이 자기 몸 이끄는 대로 그냥 달아났다. 달아난 이유가 뭐냐? 아내 얻기 위해서 달아났는데 아내를 얻기 위한 심히 인간적인 욕망에 이끌려서 사람을 섬겼다, 또는 양을 쳤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총각이 결혼하기 위해서, 여자 집안에 잘 보이기 위해서 양을 쳤고 사람을 섬긴 그것이 무슨 하자꺼리인가, 이렇게 생각이 들 것인데 야곱이 아내를 얻기 위해서 사람들까지 섬기면서 한 그 시도는 그 후에 길갈에서 제단을 쌓고 나름대로 제사 드렸다 하지만 아무 의미 없는 돌무더기 쌓아놓고 소 잡는 행위와 동일한 부정적인 행위라고 주님께서 호세아를 통해서 알려주시는 겁니다.

또 한 가지 요소는 뭐냐? 13절에 “여호와께서는 선지자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여기 선지자는 모세지요. 애굽에서 인도했다 하니까 이스라엘처지가 애굽에 갇혀 있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애굽에 갇혀 있는 이스라엘은 긍정적일 수 없으니까 부정적입니다. 머물지 말아야 할 곳에서 머물렀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보내서 “거기 있지 마. 네가 있을 곳은 그쪽이 아니고 이쪽, 하나님 쪽이야.”라고 조치를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애굽에 있었던 것과, 야곱이 아내를 찾는 것과 그리고 나름 저들이 제단 세워놓고 제사 드린다고 소 잡고 양 잡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제사로 인정하지 않고 부정해버리는 것, 돌무더기처럼 하는 그 세 가지를 14절에서는 “에브라임이 격노케 함이 극심하였으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인도해내서 보호를 했는데 그 보호막을 전혀 생각지 못하고 그들은 옛날 했던 행세 더러운 행세를 계속 이어나가니까 하나님의 보호라는 것이 무색하게 되니까 하나님께서 격노해서 어떻게 했느냐? 11절에 나오는 그 제단을 돌무더기 만드는 것과 똑같이 마지막 14절에 “그 주께서 그 피로 그 위에 머물러 있게 하시며 저의 수치를 저에게 돌리시리라.” 수치로 그들에게 덮어버린다. 돌을 덮듯이 덮어버린다. 그 위에 머물러 있게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에브라임의 부정적인 것을 지적하면서 예를 들으셨는데 그 예가 제단에 관한 것과 그리고 야곱이 아내 얻는다는 것인데 누구나 결혼하기 위해서는 아내를 얻어야지요. 그 일상적인 행위가 똑같은 사고방식에서 비롯되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사고방식을 현재 에브라임이 동일하게 시도하니까 하나님께서 안 받는다는 그 수치스러움을, 저주를 그대로 머물게 했다. 이렇게 호세아를 통해서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의 일관성을 우리가 같이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도대체 제단, 사람들이 제단에서 제사 드리고 하는 그 열성이 인간들 보기에는 상당히 성스럽고 거룩하게 보이지만 왜 하나님께서는 그걸 거부하느냐? 도대체 제단 되는 요건이 뭐기에, 어떤 요소가 빠졌기에 그들이 제사하는 것을 주께서는 제사로 보지 않는 것이냐? 그 이유가 뭔지를 알아야 되겠지요.

제단은 반드시 인간들이 열불 낸다고, 열성내서 고상함과 거룩함을 연출하고 쇼 벌인다고 제단이 되는 것이 아니고 제일 중요한 요소는 거기에 하나님이 참여해야 돼요. 하나님이 함께 해야 돼요.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고 인간들이 저희들끼리 떠들면서 종교성을 발휘한 그것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8장에도 그런 말씀이 나오지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있으면 그것이 바로 내가 원하는 교회고 그것이 바로 내 몸이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을 부르는 곳에 내가 함께 하겠다고 했거든요. 20절에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제단의 그 원칙은 출애굽기 20장 22-24절에 보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라 내가 하늘에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가 친히 보았으니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22, 23)

제단을 만들 때 너에게 어떤 복이 온다는 그런 기대를 하지 말고, 너 자신이 잘될 것이라 기대하지 말고 하나님이 함께 있을 자리를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기 백성에게 지시했다, 이렇게 생각하라 그 말이지요. ‘내 몸이 이 땅에 태어났다. 나는 행복해야 돼.’라고 생각하지 말고 이 땅에 태어난 것부터 해서 하루하루 일과를 보내는 것이 하나님이 너와 함께 있기 위해서 지시한 것이라, 이렇게 봐야 된다는 겁니다. 이게 요건이에요. 그게 조건이에요. 그게 제단의 조건입니다.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24) 내 이름을 기념하는 곳에서 강림한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강림하는 곳이 되려면,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거든요, 여호와께서 지상에서 하고 싶은 일을 그들이 하면 돼요.

그런데 그들의 요건은 뭐냐 하면, 제사를 지내고 양이나 소를 잡는 것이다, 그 말이지요. 그러니까 그 이야기를 듣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거 뭐 번잡스럽기는 하지만 굳이 못할 일은 아니다. 왜? 돌 쌓아놓고 양 데리고 와서 소 데리고 와서 잡으면 되지 않겠느냐? 그거 참 역시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맡겼구나.” 하면 되거든요.

하나님께서 그 일을 시킬 때 너희들이 양을 잡았다, 소를 잡았다, 에 핵심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24장 4-8절에 보면 이 제단 요건에 대해서 보다 확대해서 추가해서 설명을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 단을 쌓고 이스라엘 십 이 지파대로 열 두 기둥을 세우고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번제와 소로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리게 하고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모세가 피를 취해서 백성에게 뿌려버렸어요. 사람 위에 피가 얹히는 것이 요건이에요. 사람에게 피가 얹힌다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의 이름이 임하는 것, 그것을 피가 임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도 그런 말씀이 있지요. 53절에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영생이 없다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장차 하실 일을 구약은, 구약의 백성들은 신약이 아니니까, 모든 것이 다 드러난 것이 아니니까, 그들은 신약에서 오실 메시아가 어떤 일을 하실 분이라는 것을 제단을 통해서 묘사해야 됩니다. 희생양과 소의 피에 초점이 있어요. 피를 유출해서 끄집어내서 그 피와 백성들이 결합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그러한 요건에 충족된다, 그런 뜻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돌아와서 길르앗 그 사람들은, 소나 양의 피를 내서 제단에 바치는 그 정도 같으면 뭐 좀 귀찮기는 해도 할 수는 있는 일이잖아요. 고기 먹기 위해서 도살도 하는데 그것 못하겠어요? 그들이 길갈에 제단 세우고, 피를 흘리고 바르는 일을 했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걸 안 받겠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소의 피를 낼 때 그들은 물질적인 피만 봤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고 피라는 중간 매질을 통해서, 중간에 중재되는 물질, 살아 있는 동물성 피를 가져와야 만이 하나님께 함께 있을 수 있느냐? 그 이유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때는 모르고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그것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돌무더기와 관련되어서 반드시 역사가 흘러가야 돼요. 역사가 흘러가게 되면 여호수아 7장 26절에 보면, 거기에 돌무더기가 나오는데 그 돌무더기, 보통 돌무더기를 두고 아골골짜기라고 했는데, 아간이라는 사람이 돌에 맞아 죽습니다. 26절에 “그 위에 돌 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라고 되어 있어요.

이 아간이라는 사람은 한마디로 말해서 배신자지요. 하나님과 함께 한 전쟁에서는 모든 전리품은 일단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 하는 티를 내야 돼요. 하나님께만 바쳐져야 되지요. 그런데 하나님께 바쳐지는 그 모든 전리품을 아간이 탐이 나서 중간에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하였나이다.”(21)

빼돌린 겁니다. 빼돌렸다, 그 말은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하셨다.’에 대해서 아간이 수긍을 못하겠다는 겁니다. 전쟁할 때 인간들이 직접 나가서 전쟁을 했으니까 어떻게 그게 하나님이 하신 거예요? 인간이 설치는 것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설치는 것과 잘 연결이 안 되었던 모양이지요. ‘나도 고생했으니까 내 몫 챙기겠다. 다 가지겠다는 것이 아니고 일부만 챙겼다.’

그런데 그 사실에 대해서 다른 사람은 몰랐지요. 몰랐기 때문에 제비뽑은 겁니다. 사람들은 모르니까 제비 뽑아보니까 아간이 낙점 되었고 그리고 아간한테 이실직고 하니까 감춘 것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아, 지금 수사반장이 필요가 없습니다. cctv도 유전자검사도 필요가 없어요. 그냥 하나님이 전쟁한다, 싸운다, 함께 해서 이겼다는 것은 적들에게만, 적에 관한 전쟁인줄만 아간은 생각했는데 누가 적이냐 하면, 이스라엘 내부에 적이 있었어요.

이 전쟁이 뭐냐? 아이성 전쟁입니다. 여리고성에서 이겼던 그들이 작은 아이성에서 패배한 이유가, 적이 저 바깥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안에 적이 있었던 거예요. 이스라엘 안에 적이 있으니까 하나님의 제단의 요건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피로서 나타나요.

인간들이 깨끗하고 거룩하면 그냥 나타나도 괜찮아요. 천국이 그러니까, 같이 천사니까. 그런데 인간은 본인이 무슨 문제 있는 것은 모르지만 다만 하나님이 함께 있다고 하면서도 하나님 쪽에서 먼저 희생의 어떤 증거를 가지고 나타나거든요. 그러니 인간의 입장에서 좀 의아하지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제단 쌓았는데, 왜 하나님은 우리 앞에서, 나는 멀쩡한데 왜 하나님은 멀쩡하게 오시지 않고 피라는 망가진 모습으로, 깨진 모습으로 오셔야 되는지 그 둘 사이에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이해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점차 점차 지나가게 되면 뭐가 커지느냐? 이스라엘 내부에 하나님의 원수가 들어 있다는 사실이 점점 더 번지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더 깊어지고 더 확산되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역사가 끝날 때까지.

이유는, 왜 하나님께서 제단에 피를 발라야 되는지, 왜 피 바르는 것이 하나님과 함께 있는 유일한 요건 조건이 되는지를, 왜 피라는 그것이 하나님과 인간을 만날 수 있게 중재하는 중간 매질이 되는지 매체가 되는지, 연결고리가 되는지 그들은 역사를 통해서 알아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이라 하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예수님의 피가 나를 구원한다면 예수님의 피에 부합되는 피를 흘릴 수밖에 없는 요소가 내 안에 잠복되어서 죽을 때까지 계속 커진다는 사실, 요소가 커지는 거예요. 계속해서 살면 살수록 번져나가는 거예요. 별로 어렵지는 않은데 믿기지는 않지요.

사람은 잘난 맛에 살아가는데 성경은 그게 아니고 점점 더 내가 왜 못났느냐를 더 심오하게 봐야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8장에 들어가면 드디어 아이성을 공략하고 아이성의 왕을 잡아요. 여호수아 8장 29절에 보면 “그가 또 아이 왕을 저녁때까지 나무에 달았다가 해질 때에 명하여 그 시체를 나무에서 내려 그 성문 어귀에 던지고 그 위에 돌로 큰 무더기를 쌓았더니 그것이 오늘까지 있더라.”

아이성의 왕을 나무에 저녁때까지 달아놨다고 해서 ‘야, 참 너무 잔인하다. 승리했는데 좀 풀어줄 수도 있고 종으로 삼을 수도 있는데 어떻게 시체를 그렇게 해지도록 매달아 놓는가? 김 정은도 아니고 어떻게 그렇게 하는가?’ 하지만 남 이야기 하지 마세요. 내 안에 있는, 하여튼 해질 때까지 그 시체를 나무에 달아놔야 돼요. 내 안에 있는 나의 요소가 해질 때까지, 내가 나를, 나의 시체를 나무에 달아놔도 우리는 하나님의 성에 안찰 정도로 죄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 미화해요. 평생을 우리 자신을 변호하는데 급급하고 있습니다. 아이성의 왕이라 해서 그 적이 우리 내부에, 진짜 나를 바깥에서 보여준 것이 외부의 하나님의 적이에요. 하나님이 외부의 적을 칠 때 좋아하지 마세요. 지금 그 적, 왕을 잡아서 비참하게 시체를 저녁까지 매달아놓은 그 정도로 흉측하고 흉악한 하나님의 원수가, 동일한 그 적이 내 안에 들어 있다는 말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 적, 네 안에 있는 적, 네 밖에 있는 적, 그 동일한 적을 여기서 돌무더기로 만들어버려요. 이스라엘을 패배케 한 그 아간의 시체를 돌무더기 만드는 것처럼, 저주의 무게로 완전히 눌러버리는 것처럼 이제는 아이 왕에 대해서도 그 시체를 그 위에 돌로 큰 무더기를 쌓았다고 되어 있어요.

그리고 그 돌무더기가 오늘 본문 호세아 12장 11절에 동일하게 나옵니다. “너희는 제단이라고 지금종교적인 쇼를 벌이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것은 네 안에 있는 저주거리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제단을 거부할 때 어떤 요소가 빠져서 우리의 제사를 거부했는지를 그들은 몰랐고 그냥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제사를, 예배를 드렸어요.

파이프 오르간에다가 성가대 만들고, 예배당 짓고, 그렇게 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제사로 안 받는다는 말은, 나는 너를 안 받는다는 것과 똑같은 이야기에요. 저쪽을 전혀 안 받는다는 말은 네 안에 있는 그 요건 때문에 너를 안 받는다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게 호세아 12장 11절입니다. 받지를 않아요.

네가 수송아지를 제사로 드려도 안 받는다. 요새 수송아지 한 마리에 얼마 합니까? 수백 만 원 넘잖아요. 비싸잖아요. 안 받아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왜 찾아오시려고 하느냐? 그리고 멀쩡하게 찾아오면 되는데, 천사처럼 찾아오면 되는데 왜 피를 가지고 와서, 피를 앞장세워서 결합하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바로 오늘 12절에 보면 그 원리가 야곱에게 이미 알려져 있다는 겁니다. 야곱이 아내를 얻기 위해서 아람 쪽으로, 시리아 쪽으로 도망쳤다고 되어 있거든요. 도망쳤다는 야곱의 강력한 의지가 있지요. 다시 말해서 도망쳤다는 것은 ‘나는 나를 다치면 안 된다. 나는 나를 보호하고 싶다. 왜? 나는 건사할 가치가 있다.’는 그런 뜻이 다 포함되어 있는 거예요. 도망쳤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아! 나 손대지 마라. 나는 가치 있으니까. 나는 고귀하니까.’ 도망친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따냈으니까 나는 고귀해.’ 그래서 도망친 거예요.

그런데 “아내를 얻기 위해서 도망쳤다.” 이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야곱이 도망쳤다는 것이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께 부정적인 요소가 되어버렸는데 그러면 야곱에게 부정적인 요소는 야곱의 자기 내부의 어떤 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아내를 얻는다는 일상적이고도 평범한 일이 하나님 보시기에 부정적인지 야곱은 아직도 몰라요. 야곱의 개인사, 인생사가 아직 다 펼쳐지지 않았기 때문에.

창세기 29장에 보면 야곱이 아내를 얻고자 합니다. 야곱이 삼촌 집에 가서 취직을 하는데요. 취직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지요. 16-18절에 보면 “라반이 두 딸이 있으니 형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의 이름은 라헬이라 레아는 안력이 부족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야곱이 라헬을 연애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년을 봉사하리이다.” 이렇게 나와 있어요.

여기 언니의 안력 시력이 안 좋다. 손 혜진 시력 안 좋다고, 안경 꼈다고 못생긴 것은 아니지요. 이것은 시력이 나빠서 그냥 별로 마음에 안 땡긴다는 말이 아니고 동생하고 비교를 하는 거예요.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라고 되어 있거든요. 그러니까 언니는 안 곱고 안 아리따운 거예요. 안 곱고 안 아리땁다, 그 말이지요.

이 말은 뭐냐? 호세아 12장 “옛적에 야곱이 아람들로 도망하였으며 이스라엘이 아내 얻기 위하여 사람을 섬기며” 아내를 얻기 위하여, 아내를 소유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야곱이 아내를 소유하겠다는 것은, 좋은 여자, 자기 맘에 드는 여자를 만나서 결혼하게 되면 야곱 자기의 인생의 동질성이 그대로 유지가 돼요. 나는 계속해서 나다운 나로 줄곧 달려가게 돼요. 내가 좋아하니까, 내가 보기에 맘에 드는 여자와 결혼하게 되면 나는 안 다쳐요. 나는 깨질 이유가 없습니다. 나는 계속 괜찮은 내가 괜찮은 아내까지 얻었으니까 그 괜찮음이 유지가 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창세기 29장에 보면 첫날밤에 야곱이 칠 년 동안 죽어라 고생해서 그 대가로 자기 맘에 드는 결혼을 하게 되어서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그 일을 위해서 7년이나 고생한 것도 다 잊을 정도지요. 7년 동안 고생한 것을 두고 성경에 보니까 20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년 동안 라반을 봉사하였으나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칠년을 수일 같이 여겼더라.”

이게 사랑의 위력이에요. 시간조차 압축이 되어버린다고요. 사랑하는 사람하고 카페에 앉아서 이야기하다 보면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네?’ 7시간 이야기했는데 마치 10분 동안 이야기한 것처럼 후딱 지나가지요. 왜?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버리면 나를 잊어버리고, 나를 잊어버리면 내 시간이 중지가 되어버려요.

시간이 스톱이 되어서 시간 가는 줄을 모르지요. 푹 빠져버리면. 그래서 7년을 수일같이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계획이 어떻게 되었는가? 야곱은 분명히 레아의 여동생 라헬하고 결혼은 했는데 아침에 보니 레아라. 라헬이 아니고 언니 레아가 누워 있더라, 그 말이에요. 그냥 언니라 하지 맙시다. 못생긴 언니가 있더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야곱이 외삼촌에게 따졌어요. 25절에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 라반에게 이르되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께 봉사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찜이니이까.” 하니까 외삼촌 라반이 하는 말이 26절에 “라반이 가로되 형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그러면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 같이 산다는 이것은 7년이 7백년 같겠지요. 이것은 말이 안 되거든요.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 27절에 “이를 위하여 칠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그를 위하여 또 칠년을 내게 봉사할찌니라.” 이렇게 나온 거예요.

그러면 그 집안에서는 1+1이에요. 그래서 또 7년을 지냈습니다. 여기서, 왜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원치 않는 여자와 혼인케 했느냐 하는 문제와 오늘 하나님의 언약이 야곱과 더불어서 함께 어떻게 움직이느냐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언약을 자기가 소유했다고 생각했지요. 복을 소유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복마저 소유했기 때문에 소유한 소유자 입장에서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내가 원하는 여자를 하나님께서 뜻이 있어서, 뜻한 대로 줄 것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20대 아가씨들이 교회 와서 열심히 7년 동안 봉사하지요. 성가대 봉사, 주일학교 봉사, 전도사보다 더 늦게 퇴근하면서 온갖 일, 청년회봉사까지 다 하는 이유는 내 맘에 맞는 신랑감을 주시옵소서, 그거 하나 응답받기 위해서 그렇게 봉사하잖아요. 월급도 없이.

그런데 진짜 내 맘에 드는 총각은, 그렇게 봉사했는데, 그 총각이 다른 나라에 유학을 가더니 그곳에서 만난 어떤 여자와 결혼해버렸다. 그 총각을 흠모하고 있던 아가씨는 어찌 되었겠어요? 날벼락 맞은 거예요. 내가 뭐 때문에 교회 봉사했나 싶을 정도로. 내가 교회 봉사하면 그의 아버지 어머니도 이 교회 다니니까 ‘아이고, 이런 색시감 또 없다. 믿음도 좋고, 이렇게 해서 잘 보이면 되겠지.’ 그게 다 완전히 파탄 났잖아요.

그러니 왜 하나님께서 야곱이 원치 않는 다른 여자, 다른 여자를 왜 끼워 넣느냐 하는 것은 야곱자체의 동질성을 깨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왔다는 말은, 지금 야곱의 입장에서는 복의 근원이거든요. 그렇다면 보편성, 언약이라는 그 언약의 보편성이 개인에게 집중이 돼요.

그러면 하나님의 언약을 하늘에서 찾지 말고, 모호하게 찾지 말고, 허황되게 찾지 말고 어떤 언약이 집중된 개인, 하나님이 인간에게 임할 때는 어떤 식으로 인간을 다루는가를 네가 한 번 보라는 거예요. 내 뜻대로 안 되는 이유가 나 자신이 깨어져야 되는 거예요. 나 자신이 깨지게 되면 내가 원치 않는 인생을 살게 된다.

그렇다면 언약은 야곱 안에서 두 개의 계열을 만듭니다. 그 두 개의 계열이 바로 내가 사랑하는 여자와 사랑하지 않는 여자의 사이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서 자기 내부의 부정적인 것, 죄가 어떻게 나타나고 밝혀지는 가가 그 두 여인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어떻게 나타나는가? 처음에는 야곱이 여자를 통해서 소유니까, 얻고자 했으니까 오늘 본문에 “얻기 위해서” 아내를 소유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창세기 29장 30장 죽 보게 되면 여자가 남편을 소유하게 됩니다. 야곱이 자기 아내를 얻는 것을 개인적인 일로 봤는데 하나님은 개인적인 일로 쳐주지 않고 언약의 일로 봅니다. 언약에 속한 아내를 야곱에게 만나게 해줘요.

그러면, 언약이 다가서게 되면 야곱이 소유하고자 하는 야곱의 자기 기대는 역전이 되어야 돼요. 야곱은 어떤 것을 내가 소유할 때 자기가, 내가 소유한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그 소유하고자 하는 그 자체가 만약에 심연, 바탕이 없는, 토대가 없는, 그라운드가 없는, 마치 깊은 우물 같은 것이 심연(深淵)이거든요, 자기가 원하는 그 소유가 심연에서 나왔다는, 깊음에서 나왔다는 것을 모르고 자기가 소유하고 싶은 것을 우물 들여다보듯이 보게 되면 그 심연, 우물 속에서 손이 나와서 심연을 바라보는 그 야곱을 우물 속으로 잡아당긴다는 사실을 몰랐던 겁니다.

야곱은자기가 언약을 가졌으니까 언약을 가진 자 입장에서 내 뜻대로 아내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도리어 아내 쪽에 언약이 있어서 도리어 아내 쪽으로 야곱으로 하여금 두 조각 나게 만들었어요. 야곱이 저쪽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소유당한 그 쪽에서 도리어 야곱을 소유해버린 겁니다.

그러면 야곱이 낳은 열 두 명 중에서 야곱의 자식은 단 한명도 없어요. 거기에 야곱의 자식은 없고 다 여자의 자식들이에요. 왜냐하면 그 이름을 단 한명도 야곱이 짓지를 않습니다. 다 여자가 짓습니다. 쉽게 말해서 야곱은 그냥 들러리고 아무것도 못하고 여자 둘이 설쳐서 자식을 생산해요. 둘이 경쟁해서.

레아가, 그냥 레아라 하지 말고 ‘야곱이 꼴 보기 싫어한 레아’가 아들 낳으면 ‘남편이 날 사랑하겠지.’ 어림 반 푼어치도 없어요. 자식 낳는다고 못생긴 여자가 예뻐질 리가 없고, 사랑하지도 않던 여자가 사랑받을 리가 없잖아요. 첫 번째로 르우벤을 낳아요. “레아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권고하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창 29:32)

보라 아들이다. 자기자랑하고 있거든요. 두 번째가 시므온, “그가 다시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의 총이 없음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도 주셨도다 하고 그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33) 기도를 들었다. 자기 맘대로 이름 붙여요.

세 번째가 레위. “그가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이제는 남편과 나와 연합되었다.”(34) 네 번째가 유다. “그가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인하여 그가 그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생산이 멈추었더라.”(35)

남편과 내가 하나가 되었으니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레아가 애 넷 낳고 자식 끝났어요. 네 명으로 끝났습니다. “너는 자식 없지? 나는 자식 있잖아. 하나님께서 내 편이잖아.” 그러데 야곱은 그래도 레아가 꼴보기 싫어요. 결혼했으니 할 수 없이 애기 낳을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약이 올랐던 라헬이 자기는 애를 못 낳으니까 자기 종 빌하를 남편에게 집어넣어서 다섯 번째 아이를 낳는데 단, 내 억울함을 푸셨다. “빌하가 잉태하여 야곱에게 아들을 낳은지라 라헬이 가로되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소리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 하고 이로 인하여 그 이름을 단이라 하였으며”(창 30:5,6)

이름은 전부 다 여자가 지어요. 야곱은 입도 못 떼요. 완전히 마스크 했어요. 입에다 패드 붙여놨어요. 입도 못 떼게 만들어놨어요. 억울함을 푸셨다. 라헬 개인의 심성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하지만 남편이 아내를 소유한 것이 아니고 여자가 남편을 소유해버린 거예요. 소유하려던 것이 소유당해 버린 겁니다.

이것은 야곱이 언약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언약이 야곱을 소유하고 있는 거예요. 그 다음에 여섯 번째 역시 라헬의 종 빌하에서 납달리가 나오는데 내가 언니하고 경쟁해서 이겼다. “라헬의 시녀 빌하가 다시 잉태하여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라헬이 가로되 내가 형과 크게 경쟁하여 이기었다 하고 그 이름을 납달리라 하였더라.”(7,8)

맨 날 자매간에 머리 쥐어뜯고 싸우고 있어요. 자식을 놓고. 여전히 레아도 자식을 못 낳으니까 자기 종 실바를 남편에게 들여보냅니다. 네가 종으로 하면 나도 하겠다. 종대 종으로 하자. 자기 종 실바를 통해서 일곱 번째 아들 갓, 나는 복되었다. “레아가 자기의 생산이 멈춤을 보고 그 시녀 실바를 취하여 야곱에게 주어 첩을 삼게 하였더니 레아의 시녀 실바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으매 레아가 가로되 복되도다 하고 그 이름을 갓이라 하였으며”(9-11)

전부 다 아내가 자화자찬하고 있어요. 여덟 번째는 아 기쁘다. 이름을 아셀로 지었습니다. “레아의 시녀 실바가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레아가 가로되 기쁘도다 모든 딸들이 나를 기쁜 자라 하리로다 하고 그 이름을 아셀이라 하였더라.”(12, 13)

그러고 난 뒤에 둘이 휴전에 들어가지요. 르우벤이 합환채라 해서 부채 비슷한 것을 가져와서 자기 엄마 레아에게 줬다는 말이지요. “엄마, 받으세요.” 하고 주니까 “우리 큰 아들 르우벤이 나에게 이거 줬다.” 하고 자랑질을 했어요. 그런데 라헬이 그게 굉장히 갖고 싶었던 모양이에요. “그거 주면 오늘 밤 남편에게 들어가는 것 허락할게.”

그렇게 해서 그 값을 받고 레아가 야곱과 동침을 해서 낳은 자식이 잇사갈, 값을 받았다. “하나님이 레아를 들으셨으므로 그가 잉태하여 다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레아가 가로되 내가 내 시녀를 남편에게 주었으므로 하나님이 내게 그 값을 주셨다 하고 그 이름을 잇사갈이라 하였으며.”(17, 18)

그리고 또 애를 낳아서 이제는 영원히 내 남편과 거하게 될 것이다 해서 스불론. “레아가 다시 잉태하여 여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레아가 가로되 하나님이 내게 후한 선물을 주시도다 내가 남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거하리라 하고 그 이름을 스불론이라 하였으며.”(19, 20)

괜히 라헬이 쓸데없는 그것 부채 비슷한 그것 하나 탐내서 아기를 못 낳는 언니가 애를 더 낳게 되었어요. 숫자에 갈수록 밀려요. 자기는 제로고 언지는 6이에요. 6대 빵. 게임 끝났어요. 다른 네 명은 다 종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것은 정실의 자식도 아니지요.

그 다음에 레아가 남편하고 동침해서 디나라는 딸을 낳아요. 야곱의 아들 가운데서 아들이 열 두 명이에요. 세상에 dna가 잘못되었는지 순 아들만 내리 열 두 명이에요. 아들 편향적이에요. 딸은 그냥 딱 하나 나와요. 디나. 레아는 이제 끝났고요.

그 다음에 라헬이 요셉을 낳고 그리고 마지막에 라헬이 베노니를 낳습니다. 낳으면서 라헬이 죽어버려요. 라헬이 죽고 더 이상 언니와의 경쟁은 끝나버렸어요. 그런데 야곱은 14년 동안이나 애쓰고 힘들여서 고생하고, 20년 동안 삼촌하고 있으면서 그렇게 14년 동안 고생한 이유가 사랑하는 여인 그 여인과 함께 내가 좋아하는, 야곱이 좋아하는 언약이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야곱 내가 좋아하는 여자와 더불어 사랑하면서 살고 싶다는 그 희망이 결국 그 여자를 죽게 만듭니다. 여자가 죽어버리지요.

죽어버리니까 경쟁자가 없고 자식도 그만 낳습니다. 그 여자가 죽으면서 나는 당신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먼저 죽습니다. 슬픔의 아들이라 베노니라. 슬픔의 아들이라 하니까 야곱이 그 마지막 아들의 이름을 바꾸지요.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창 35:18)

슬픔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은 바로 슬픔을 통해서 출생한다는 사실. 다시 말해서 야곱은 둘로 쪼개져요. 자기가 언약을 가진 것이 아니라 언약이 나를 가졌을 때에 오늘 본문 12절의 말씀처럼, 내가 어떤 사랑하는 여자와 혼인해서 어떤 행복을 추구하겠다는 이 사실이 언약의 적이 되고 언약의 부정적이 요소라는 사실을 야곱은 몰랐어요. 그냥 나 하고 싶은대로 한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야곱의 내부를 언약을 통해서 다 뒤집어 놓는 겁니다. 그래서 이름이 뭐냐?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뀌잖아요. 바뀌면서 야곱은 죽고 이스라엘은 떠오르는 겁니다. 야곱은 죽고 이스라엘은 떠오르고. 이스라엘이라는 그 영적 요소, 하나님의 언약이 떠오르려면 그 조건이 뭐냐? 육의 요소 야곱이 죽어야 돼요. 이게 언약입니다.

특히 라헬과 빌하, 레아와 실바라는 것은 주인과 종의 관계인데 갈라디아서 4장 21절에 보면 하나님의 두 언약을 줘서 하나님의 참된 언약을 뽑아내는 방식이거든요. 육에 속한 것, 종에서 나온 것은 육에 속한 것이고 종에서 벗어난 것을 가지고 자유하는 여자라고 해서 갈라디아서 4장 21절부터 24절까지 되어 있어요. 두 언약이라고.

하나님께서 육에 찾아올 때 육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고 육의 동일성을 깨버려요. 육의 동일성을 깨버리고 언약 안에서 두 개의 계열을 만들어요. 하나는 저주받는 계열 또 하나는 진짜 언약대로 복 받는 계열을 만들어요. 그 만드는 그 현장을 위해서 야곱이라는 육의 본성대로 하게 해서 그 다음에 야곱의 뜻대로 되지 않도록 만들어야 되는 겁니다. 내부적으로.

제단은 뭐냐? 제단은 짐승이, 소가 죽는다, 양이 죽는다, 아니 그것은 모형이고요. 마지막 때에 정말 주님이 만든 제단은 하나님 자신이 육에 들어와서 죽고 영으로 다시 사는 거예요. 육에서 죽고 영으로 다시 사는 겁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십자가 지실 때 분명히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버림받음이 있어야 돼요. 예수님 안에 두 개의 요소가 있어요. 하나는 버림받아줘야 한쪽이 뜨는 거예요. 언약이 언약대로 나오려면 육이 버림받아야 돼요.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버림받을 때 우리 안에 언약이 구원받는 겁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거예요. 우리는 죽고. 바로 예수님의 피를 가지고 오신 이유가 있어요. 제단이 제대로 하나님의 제단이 되려면 우리 안에 버려야 될 요소, 하나님의 원수적인 요소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사적인 개인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믿습니다. 예수 믿습니다.” 이렇게 나오더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예수를 믿으면 우리 구원이 아니고 주님의 구원은 언약의 구원이에요. 예수님의 구원을 우리 안에서 뽑아내는 겁니다. 그 방식 외에 다른 구원의 방식이라는 것이 아예 없어요.

자꾸 언약을 허황되게 하늘에서 찾지 마시고, 몽상적으로 하지 마시고 실제로 야곱은 어떻게 움직이고, 실제로 이스라엘은 어떻게 움직였는가를 봐야 돼요.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은 어떻게 움직였는가를 보라는 말이지요. 버림받았기에 구원받았잖아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했잖아요. “너는 너를 버려야 돼. 아예 버리게 하실 거야.”

버림으로서 진짜 내 안에 있는 요소가 내 안에서 육에서 벗어나 영의 세계로 가는 겁니다. 바로 그 관계, 그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야곱이 있고 야곱이 이스라엘 된 겁니다. 오늘날 우리가 육에서 영으로 된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성도가 하나님의 제단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살아 있다는 증거인 것을 이제는 알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 탓 하지 말고, 남 탓하지 말고 세상보다, 남보다 더 저주스러운 것이 우리 안의 우리 자신인 것을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