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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호세아 12:7-10 / 거짓 저울 / 200617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호세아

호세아 12:7-10 / 거짓 저울 / 200617

정인순 2020. 6. 17. 20:59

음성 동영상

 

거짓 저울

 

이근호

2020년 6월 17일

 

본문 말씀: 호세아 12:7-10

(12:7) 그는 상인이라 손에 거짓 저울을 가지고 속이기를 좋아하는도다

(12:8) 에브라임이 말하기를 나는 실로 부자라 내가 재물을 얻었는데 내가 수고한 모든 것 중에서 죄라 할 만한 불의를 내게서 찾아 낼 자 없으리라 하거니와

(12:9) 네가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내가 너로 다시 장막에 거주하게 하기를 명절날에 하던 것 같게 하리라

(12:10) 내가 여러 선지자에게 말하였고 이상을 많이 보였으며 선지자들을 통하여 비유를 베풀었노라

하나님 믿는 사람도 일상 속에서 얼마든지 경제 활동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어디까지나 인간에게 속한 일이라고 간주되는 그 경제 활동까지 하나님께서 지적하고 나서십니다. ‘거짓 저울’을 사용해서 부자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이 북이스라엘은 자부하기를, “나의 일상에 허물된 바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일상생활까지 지적해서 얻고자 하는 게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답게 되는 것은 그저 생존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취지’가 살아나야 이스라엘다운 겁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한다고 해서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일상 경제활동 할 때는 온통 정신을 부자되는 것, 즉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데 쏠려있기 때문입니다. 돈 때문에 웃고 돈 때문에 우는 겁니다. 왜 마음이 온통 돈에 가있고 부자되는데 마음이 쏠리는 걸까요? 그것은 최종적 의미와 가치는 자기 자신으로 마감시켰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자기 자신과 견줄만한 가치자를 따로 자기 곁에 두지를 않는다는 말입니다. 용납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만약 자신의 최종성을 위협이 되고 경쟁자가 등장한면 가만 있지 않고 공격하게 됩니다. 호세아 12:3에 보면, “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행위가 언약의 취지가 전혀 맞지 않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처리하기로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논쟁하시고 야곱을 그 행실대로 벌하시며 그의 행위대로 그에게 보응하시리라”(호 12:2) 즉 야곱을 통해서 언약에 반대하는 근원적인 성향이 야곱에게서 나오고 있다는 말입니다.

언약의 시작은 처음 약속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이 대목에서 악마는 예수님의 발꿈치를 물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께서 피해자로서 등장한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창세기 32장 얍복강가에서 야곱은 하나님과 의도하지 않게 싸우게 됩니다. 하나님에게 달려듭니다. 나중에 야곱이 자신이 싸운 대상이 하나님인 것을 알고부터 자신의 성향을 심하게 탓하게 됩니다. 야곱에게 진정 야곱밖에 없었고 그 야곱을 지키기 위해 전부를 걸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 방식은 복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 죽음을 유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존재로 대하시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 야곱은 하나님 안에 있는 이스라엘을 공격한 바가 됩니다. 즉 자기에게 최종성을 두고 살던 자가, 언약을 최종성을 두고 사는 자를 공격하는 바가 되는 겁니다.

‘거짓 저울을 가지고 부자되려는 자’의 문제점은 그런 식으로 결코 언약 취지가 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언약은 필히 ‘이웃’이 있어야 합니다. ‘이웃’이 있어야 ‘이웃 사랑’이 성립되는 겁니다. 그러나 언약이 오기 전의 인간들은 이웃 사랑이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이 최종적 가치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공정한 추를 사용해서 정직하게 장사를 해도 그 목적성이 ‘자기 사랑’으로 마감되기에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언약, 즉 이스라엘다움이 나올 수가 없는 겁니다. 마태복음 22:37-40에서 율법은 다음과 같이 요약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문제는 이웃이 어디있느냐는 겁니다. 자기 자신에게 ‘최종성’을 둔 이상, 그 사람에게 ‘이웃’이 없습니다. ‘이웃’이 없으면 이것은 언약이 없는 자요, 언약이 없으면 인간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웃은 야곱이 둘로 쪼개져서 나옵니다. 언약에 의한 쪼개짐입니다. ‘야곱’과 ‘이스라엘’의 쪼개짐입니다.

전에 있던 ‘야곱’이 ‘이스라엘’을 붙잡고 물어 뜯고 공격한 겁니다. 이럴 때, 새로운 야곱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스라엘 입장에서 야곱은 ‘이웃’이 되고 그 야곱을 거두어주는 것이 바로 ‘이웃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약에 의할 것 같으면 ‘이웃 사랑’이라는 하나님께서 애굽에 있는 자기 백성을 탈출케 하므로서 나타납니다.

고아와 과부와 노예와 같은 자기 백성을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전혀 ‘값없이’ 탈출시켰습니다. 이는 그 값을 주님께서 대신 다 치뤄주셨다는 겁니다. 반면에 애굽인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에 의해서 응징받고 저주받습니다. 바로 이 이웃사랑이 나타나야 이스라엘이 언약의 나라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언약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은 지독스럽게 율법을 준해서 책임을 묻습니다. 율법이 주신 하나님의 취지에 조금이라고 모자라면 가차없는 저주가 퍼부어집니다. 마태복음 5:25-26에 보면,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지시하기를, 주변에 있는 고아나 과부나 나그네나 외국이나 빚을 진 자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너희들이 애굽에 있을 때 다같이 그러한 처지에 있었다고 하십니다. 이는 이웃사랑과 하나님 사랑이 이스라엘 내내 살려내기 위해서입니다. 호세아 같은 경우에 ‘값을 지르는 식’으로 이웃사랑을 보여줍니다.

만약에 이런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초막절의 생활처럼 광야에 내쫓기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호세아 3장에서, 호세아 선지자는 바람나서 집나간 아내를 값을 주고 데려오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자신이 예수님 보시기에 불쌍한 ‘이웃’으로 간주하지 않는 한 새로운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절대적인 죄값 자리에게 해결하시므로서 이 이웃사랑이 곧 이스라엘로 하여금 모든 이방나라를 척결하고 지옥보내는 기준이 됩니다. 이로서 아예 없는 새로운 이스라엘에 주님께서 호세아의 사랑으로 문을 따로 들어오시므로서 새로운 이스라엘이 생긴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더불어 있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46강-호 12장 7-10절(거짓저울)20061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 12장 7-10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266페이지입니다.

호세아 12:7-10

“저는 상고여늘 손에 거짓 저울을 가지고 사취하기를 좋아하는도다 에브라임이 말하기를 나는 실로 부자라 내가 재물을 얻었는데 무릇 나의 수고한 중에서 죄라 할 만한 불의를 발견할 자 없으리라 하거니와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내가 너로 다시 장막에 거하게 하기를 명절일에 하던 것 같게 하리라 내가 여러 선지자에게 말하였고 이상을 많이 보였으며 선지자들을 빙자하여 비유를 베풀었노라.”

7절에 보면 에브라임이 거짓저울을 가지고 사적으로 부당이익을 취한 것을 말하지요. 그렇게 해서 에브라임이 “나는 부자가 되고 재물을 얻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내가 수고한 것 중에서 죄라고 지적할 만한 것은 없다.” 이렇게 자부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부자들이 부당이득을 취한 것에 대해서 피해를 입은 서민들이 공격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부자들에 대해서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누구를 지적할 때는 지적할만한 자격이 있느냐, 그걸 따져야 되고 두 번째는, 지적을 해서 얻겠다는 것, 잔소리를 해서 얻겠다는 것이 무엇이냐를 생각을 해야 됩니다.

인간들이 이 땅에 살면서 경제활동 하거든요. 경제활동 하는 것 까지 주님께서 관여하시고 잘했니, 잘못했니, 지적을 해서 하나님께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이익이 뭐냐 하는 겁니다. 하나님 잘 믿고, 하나님 사랑한다, 하고 그 다음에 평일에는 자기들 경제활동을 마음대로 할 수 있잖아요.

교회 와서 간섭받고,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자기 가게에서 손님 대접하는 그것까지 다 관여 받으면 아무리 하나님의 백성이라도 숨이 막혀서 못살지요. 예를 들어서 교회 목사님이 주일에 설교 했어요. 그리고는 월요일 되어서 교인들이 자기 일터에서 자기 가게에서 영업을 한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목사가 검열단 완장차고 와서는 “집사님, 이거 원가 얼마입니까?” cctv 한 열 댓개를 달아놓고 “아까 그 옷이 허름한 손님한테는 왜 불친절 했습니까? 그리고 원가 얼마인데 얼마 받았습니까? 얼마 깎아줬습니까?” 하면 그 집사님이 목사한테 “네가 장사해라 네가. 네가 장사해서, 이윤 남겨서 우리 집 애들 공부 다 시켜라.”

목사면 목사지 네가 아는 것이 뭐가 있다고 경제 활동하는 것까지 간섭하느냐 이 말이지요. 참외장사나 수박장사 하면 목사가 검열단 완장 차고 와서는 수박을 다 두드려보면서 “이거 다 익지도 않았는데 이거 파나? 그리도 당도 한 번 봅시다.” 어디 농협에서 나온 거예요? 왜 본인이 그걸 관여하느냐 그 말이지요.

또 어물전 냉동실에 가서 “이거 갑오징어 수산시장에서 떼 온지 얼마나 되었어요? 세상에 이걸 시중에 유통시켜서 우한처럼 신종코로나라도 번지면 어떻게 하려고?” 아무리 교인들이라도 그렇게 관여 못하지요. 또 목사가 자기 교회 집사가 학교교사인데 학교에 가서는 교실 뒤에 앉아서 선생님이 수업 잘하는가 보고 있으면 이게 무슨 할 짓입니까, 이게.

왜 하나님께서 지적을 하냐 그 말이지요. 하나님 열심히 믿고 자기 밥벌이는 해야 될 것 아닙니까? 노동을 해야지요. 수면제나 먹고 아침에 눈 뜨면 집에 자장면 배달되어 있습니까? 안 그렇거든요. 긴급재난지원금도 한 두 번이지 계속 달라고 하네요, 계속. 말이 돼요 이게?

왜 하나님께서는 사소한 경제활동까지, 가정주부 같으면 검열단 완장차고 또 와서는 “설거지 잘했나? 여기 찌꺼기 좀 봐라.” 그리고 남의 애 교육시키는 것까지 간섭하고요. 애 초콜릿 먹이지 말라고 하고 기저귀 깨끗하게 빨았는지까지 간섭한다면 숨이 막혀서 살겠습니까? 도대체 주님은 왜 지적을 하느냐? 왜 남의 경제생활까지.

그 정도까지는 얼추 자율성을 줘야 인간들이 하나님께 신나게 주일에 봉사하고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거짓저울을 가지고 사치를 한다고 누가 화를 내느냐 하면 주님이 화를 내시는 겁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이런 뜻입니다.

인간들이 경제활동을 할 때 무엇이 죽느냐 무엇이 감추어지느냐, 무엇이 은폐되느냐? 8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에브라임이거든요. 에브라임이라는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그 이스라엘이 해야 될 본래의 목적과 괴리된 채, 끊어진 채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답게 그 원칙이 살아나야 되는데 성전에 와서 또는 제사드릴 때는 이스라엘 같아 보이지만 막상 세상에 나가서 경제활동을 하거나 개인적인 가정활동을 할 때는 하나님의 그 이스라엘 됨의 원칙이 죽어버리더라, 없더라는 그 말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경제활동까지 관여를 하는 거예요. 왜 관여하느냐? 도대체 이스라엘, 에브라임이 하나님의 언약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그 원인이 그들의 일상 속에서 언제든지 찾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에브라임이 뭐가 문제냐?

경제활동 하면서 본인이 경제활동의 주체자가 된 이것이 문제가 된 거예요. 여기서 7절에 보면 “저는 상고여늘 손에 거짓 저울을 가지고 사취하기를 좋아하는도다.” 거짓저울을 가지고 부당이득(사취)을 취했다고 하는 것은 주님의 뜻인데 그렇게 경제활동을 하는 그 당사자들은 뭐라고 하느냐?

“에브라임이 말하기를 나는 실로 부자라 내가 재물을 얻었는데 무릇 나의 수고한 중에서 죄라 할만한 불의를 발견할 자 없으리라.” 내가 부자 되기 위해서 수고하는데 죄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고 자부한다는 거예요. 죄라 할 만한 불의를 발견할 자 없으리라, 하고 자신만만해 하는 겁니다.

하나님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이여, 무엇을 근거로 제가 거짓저울을 사용해서 사취했다고, 개인적인 부당이득을 취했다고 일방적으로 하십니까? 제가 보기에는 거짓저울을 사용한 적이 없고 부당이득을 취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아무리 해도 죄가 발견되지 않습니다.” 라고 나오는 거예요.

만약에 여기에 호세아가 있다면, 그 당시 사람들이 그런 발언을 했으니까, 호세아를 붙들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까 제가 말한 것처럼 “네가 장사해라. 네가 채소장사하고 과일장사 해봐라. 왜 거짓저울을 사용하느냐, 라고 지적질만 하지 말고 내가 자리를 비켜줄 테니 네가 가락시장 가서 농산물 떼 와서 네가 여기서 장사해봐라. 너는 그러면 참된 저울이라는 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한 번 보여 다오.” 그렇게 나올 거예요.

여러분 이걸 알아야 돼요. 정직한 저울은 사람으로 하여금 살 수 없는 환경으로 이끕니다. 정직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 있는 거예요. 거짓저울을 사용하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 있는 거예요. 만약에 정직한 저울을 사용해 버린다면 우리는 도저히 이 땅에서 밥 먹고 못삽니다.

정직한 저울 또는 거짓된 저울, 거짓된 저울이라는 것은 정직한 저울이 아닌 것을 거짓된 저울이라 하지요. 주님께서 뭘 가지고 거짓된 저울이라 하느냐 하면, 장사를 하든지, 고기를 잡든지, 농사를 하든지, 가정주부로서 살림을 하든지 이 모든 것이 ‘너 자신을 위해서’ 그 활동을 한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거기서 하나님이 언약적인 취지가 나타나지를 않아요.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하고 다른 것은 하나님이 약속이 거기에 게재되어 있는데 그 약속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 약속이 나타나야 될 그 결과와, 생산과 그 토대가 뭔가 끊어져 있거든요. 그 끊어진 이유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 경제활동을 하기 때문에 그들은 거짓저울이라는 평을 들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정직한 저울에 대해서 레위기 19장 35, 36절에 나옵니다. “너희는 재판에든지 도량형에든지 불의를 행치 말고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부피, 체적을 재는 기구)을 사용하라 나는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 땅에서 나오게 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하나님께서 레위기 19장 35절에서 36절에 하신 말씀같이, 재판할 때는 항상 공정한 추를 달아라, 그 말이지요. 그런데 그 공정한 추를 다는 취지가 레위기 19장 33, 34절에 보면 “타국인이 너희 땅에 우거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너희와 함께 있는 타국인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객이 되었더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그렇게 나온 뒤에 공정한 추를 달라고 한 겁니다. 이 둘을 종합해 보게 되면 채소가게를 하든지, 어물전을 하든지, 농사를 짓든지 뭘 생각하느냐 하면, 나 자신을 위해서 일을 해서는 안 되고, 나 말고 내가 돌봐야 될 이웃을 고려해서 옷 장사를 하든지, 채소장사를 하든지, 교사를 하든지, 농사를 짓든지, 그렇게 일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이웃을 위해서,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고 이웃을 위해서.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기를 정직한 저울도 마찬가지고, 이 저울에 물건 달면서 이웃을 생각하면서 저울을 달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점에 대해서는 요즘도 그렇게 옛날 유대인들은 자신만만했어요. 신명기나 레위기나 하나님의 율법에 보게 되면 농사짓는 사람이 추수할 때 깔끔하게 하나도 빈틈없이 몽땅 다 베지 말고 어설프다 할 정도로 이삭 같은 것을 밭에 놓아두라는 말이지요.

“포도 수확할 때 깔끔하게 말끔하게 다 따지 말고, 숫자 하나하나 다 헤아려서 다 따지 말고 대충 따라.” 왜? 그래야 길가는 나그네나 없는 사람들 고아나 과부들 자기 토지가 없어서 생산물 없는 사람들이 주인이 대충 따고 나머지 그대로 있거나 흘린 것들 주워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고 신명기나 출애굽기 레위기에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 정도는 오늘날 유대인들이나 그 당시 이스라엘도 할 줄 알아요. 왜냐하면 율법이 그랬으니까. 율법대로 사는 것이 하나님을 복을 받게 되는 것이고 자기한테 이익이 되고 또 하나님 보시기에 참된 이스라엘이라고 자부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행위가 주님 보시기에 정직하지 않은 저울, 거짓 저울이 되는 겁니다. 그 이유가 율법을 처음 줄 때 사람들은, 야, 저것은 할 만 하다. 인심을 쓰는 것을 인간의 선한 양심상 본능이니 야박하다는 소리 듣지 않기 위해서 어설프게 추수하고 나머지기 가져가세요, 이렇게 하면 뿌듯하잖아요.

주님께서는 그것을 가지고 이웃사랑이라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래가지고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것이 아니에요. 율법에 대해서 마태복음 22장 35-39절에 보면 어떤 사람이 물어요.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사람들은 이 계명을 하나님께 마음과 뜻을 다하고 어, 이웃이 있네, 그 이웃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사랑하게 되면 그 율법을 이룬다,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그런 뜻이 아니에요.

누가복음 10장 25절에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니까 방금 마태복음 22장에서 읽은 것과 같은 말을 했어요. 누가복음 10장 26, 27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할 때 이 율법사가 뭔가 낌새를 찾았는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보통은 이런 질문을 안 하는데 그 율법사는 질문을 해요. 29절에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만약에 현장에 우리가 있다면 “네가 진정 이웃이 누군지 몰라서 묻냐?” 이웃이라는 그 단어 그 개념은 애들도 알고 있어요. 가까운 근처에 사는 사람. 아마 친구 같으면요, “물을 걸 물어라. 이웃이라는 걸 모르다니. 이웃 우리 알잖아.”

그런데 그 율법사는 진지하게 물어요. “예수님, 당신이 말하는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할 때 예수님 답변은 뭐냐? “이웃은 없다.”가 돼요. 이웃은 없다. 이웃은 없는 거예요. 율법은 이웃을 사랑하라, 하는데 막상 사랑할 이웃이 없는 겁니다. 왜 이웃이 없는가? “네가 없거든. 율법을 지킬 네가 없거든.”

옛날 그 당시 유대인들이나 지금의 유대인들이 모르고 있는 것은, 인간이 내가 없다는 사실을 몰라요. 본인 자체가 본인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본인이 율법을 지키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나는 있고, 있는 내가 천국가기 위해서는 율법 하나님의 말씀 이것을 지키면 있는 내가 천국 가서도 내가 있게 된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알다시피 예수님은 어떤 분이냐 하면, 문을 따고 들어오시는 거예요. 문을 따요. 예수님 쪽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리고 저쪽에 자기백성이 있다 할지라도 문이 잠겨 있는 상태기 때문에 저쪽의 자기백성은 이쪽 예수님에게 합류할 수가 없어요. 올수가 없어요.

그러면 예수님은 뭐냐? 자기가 문이거든요. 저쪽은 양이고. 양이 스스로 율법 지키고 올 수가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예수님 쪽에서 철커덕, 하고 문을 열어야 돼요. 문을 열고 내 음성을 들려줄 때 그들이 목자음성을 듣고 정말 양이라면 예수님께 합류가 되어서 천국 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문을 딸 때 주님만이 딸 수 있다는 말은 주님 쪽에 있는 사람은 이 세상 어떤 인간도 아무도 없다는 뜻이에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아무도 지킬 수 없다, 예수님만 지킨다, 가 돼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생각되어야 될 것은, 왜 인간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주신 언약을 이룰 수 없느냐?

그것은 인간의 본성상 그래요. 그 본성이 뭐냐? 호세아 12장 2절에 보게 되면 “야곱의 소행대로 벌주시며” 벌써 벌준다고 되어 있어요. 무슨 짓을 했는지 이야기하기도 전에 벌써 벌주는 것부터 이야기해요. 벌 받을 짓을 했다는 거예요.

호세아 12장 2, 3절에 “여호와께서 유다와 쟁변하시고 야곱의 소행대로 벌주시며 그 소위대로 보응하시리라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것을 지난번에도 설명했지만 이것이 뭐냐 하면 야곱은 독자적이다. 독단적이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야곱의 태생이에요. 야곱의 야곱다운 본성입니다. 다시 말해서 태생이다, 본성이다. 본성이 독단적이고 독립적이다, 그 말은 그에게는 어떤 이웃도 없어요. 이웃이 없으면 하나님은 그것을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이웃이 없으면 언약적 이웃으로 간주하지 않아요. 이웃이 없는 인간은 최종적으로 장사를 하든지, 저울에 달아서 청과물 장사를 하든지 어떤 장사를 해도 자기가 경제활동의 주체가 돼요.

이웃이 없으니까 최종목적, 목표가 모든 활동의 목표가 나가 돼요. 나에서 모든 것이 다 종결되어 버립니다. 나에서 종결되는 본성을 가지고 뜻을 다하여 마음을 다하여 정성을 다하여 목숨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해요? 있을 수 없지요. 그리고 자기가 최종적인 목적인데 무슨 이웃을 사랑합니까? 그런 것이 있을 수가 없지요.

저울에 공평한 추를 달아도 왜 그 추를 달아서 저울질을 하는가? 그 목적은 뭐냐? 나 잘되기 위해서. 나는 아무리 봐도 이 돈을 버는데 있어서 어떤 죄나 불의할 것을 발견한 바 없다. 8절 그대로에요. 나는 돈 벌 때 불의해서 돈 번적 없다. 어떤 사람이 있다가. “주식해서 좀 벌었잖아. 개미투자자로 뛰어들어서 좀 벌었잖아.” “내가 벌었나? 가만있는데 오르는데 어떡해?” “펀드 해서 재미 좀 봤잖아.” “내가 뭐 펀드 오르게 해달라고 기도라도 했나? 은행에서 다 알아서 해줬는데 뭐. 나는 불의한 것이 없어.”

왜 불의한 것이 없느냐 하면, 이웃이라는 것이 없기에 자기가 정당하다고 여기는 범위 내에서 자기가 정당한 자로, 불의가 없는 자로 일방적으로 간주해버려요. 그것은 언약이 아닙니다. 원래 언약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창세기 3장 15절 하나님의 약속에서 나왔어요.

창세기 3장 15절을 읽어보면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너의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 뱀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 달라붙어서 물어뜯는 거예요. 뱀이. 여자의 후손을 공격하는 거예요.

왜 뱀이 그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물어 뜯습니까? 존재하는 목적이 본인에게 최종가치와 의미를 두기 때문에 어떤 이웃도 없고 모든 것이 적이 되어버리지요. 마치 야곱과 같이. 야곱이,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 그분이 바로 약속을 가져오신 언약을 가져오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 때 통곡하고 후회하고 가슴을 친 것은 바로 야곱, 이 내가 야곱이라는 이 근성,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이 근성, 심지어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형의 발꿈치를 잡은 그 공격성향을 띤 것, 그 야곱성향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성향을 그냥 마귀처럼 물어뜯은 거예요.

다시 말해서 공격한 거예요. 발꿈치를 물은 거예요. 야곱이 이스라엘을 물은 거예요. 더 알기 쉽게 말씀드릴까요? 내가 나를 물어뜯은 거예요. 이전의 나가 이후의 나를 물어뜯은 겁니다. 야곱 당사자와 이스라엘 당사자가 동일 인물이니까. 주님의 약속에 의해서 태어날 나를 약속 없는 내가 물어뜯은 거예요.

물어뜯으면서 누가 물어 뜯기는가? 약속을 주신 하나님이 물어뜯긴 거예요. 야곱은 어릴 때부터 물어뜯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형 물어뜯고 달려들다가 이제는 그 야곱성향이 그대로 가요. 이웃은 없어요. 없고 자기가 최종적인 삶의 의미고 목적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은 뭐가 있는가? 이웃이 있어요. 이웃 없는 내가, 이웃을 모르는 내가, 이웃을 알 필요도 없는 내가, 이웃이 있는, 이웃이 있어야 이웃사랑이 성립되니까, 이웃이 있는 그 하나님의 새로운 약속의 백성을 공격한 겁니다. 내가 나를 공격한 거예요.

이 말은, 이웃은 어디서 생겨나는가? 옆집에 있다고 이웃이 아니에요. 나라는 것이 두 조각으로 깨져야 이웃이 생겨나요. 내가 야곱처럼 깨져서 야곱과 이스라엘이 구분될 때 그 이스라엘은 나 야곱에 있어서 이웃이 되는 겁니다. 이웃이 있어줘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그 언약도 같이 있게 되는 거예요.

인간이 최후 자기에게 의미를 줘버리면 율법 같은 것은 그 사람에게는 없는 겁니다. 물론 율법 없으면, 언약 없으면 언약의 하나님도 없지요. 하나님이고 뭐라고 구시렁거려도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가짜 하나님을 이용한 것밖에 되지를 않아요.

그래서 거짓저울이라는 것은 속인다는 뜻이잖아요. 속임은 야곱의 주특기잖아요. 야곱이 속이는 자에요. 그 야곱이 하나님께 대들었던 야곱의 본성을 주님께서는 확장시켜서 국가로 만들었어요. 그게 이스라엘, 에브라임입니다. 조상이 그런데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과 결합돼요. ‘야곱 + 언약’이라고 보면 돼요. ‘야곱 + 언약’, 또 다른 말로 ‘야곱 + 율법’이라고 보면 돼요. ‘야곱 + 율법’인데 성경구절 여러 군데 찾을 수가 있겠습니다. 예를 들면 출애굽기 21장 2절에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가 육년 동안 섬길 것이요 제 칠년에는 값 없이 나가 자유할 것이며.”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출애굽기 22장 21-24절에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이었었음이니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을찌라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

이게 뭐냐 하면, 너희가 애굽에 있을 때 너희가 구원받은 것은 율법에 의해서 구원받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구원받았어요. 무슨 언약이냐 하면,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언약에 의해서 그들은 애굽에서 자유를 얻어서 이스라엘나라가 된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 나라 안에 어떤 원칙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원칙이 계속해서 살아나야 돼요. 그러면 그렇게 계속해서 살아나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함께 애굽에서 나왔지만 살아가면서 어떤 형편상 본의 아니게 고아나 과부가 되는 가정들이 많이 일어나요.

전쟁에 나갔을 때 아버지가 전사해버리면 그 부인은 졸지에 과부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부모가 어떤 사고로 죽어버리면 고아가 등장하는 겁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이웃이라는 것이 진짜 하나님의 언약백성은 필히 이웃이 있어요. 그리고 그 이웃은 상대방을 도와주는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이 나에게, 야곱이 이스라엘에게 어떻게 했는가? 싸웠잖아요. 달려들었지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름이니까. 야곱이 이스라엘에게 달려든 거예요. 하나님께 달려든 거예요. 그 모습이라는 말이지요. 달려들었는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했는가?

출애굽기 21장도 그렇게 22장도 그렇고 애굽에서 나올 때 값없이 은혜로 나왔다고요. 값없이 나왔거든요. 따라서 전에 있던 나와 후의 인간 사이에 값없이……, 이 값없이 나왔다는 말은 뭔가 값을 치렀다는 그 말이에요. 내가 내 값을 치르지 않았다는 말은 누군가 대신 값을 치르고 나로 하여금 언약백성이 되게 한 겁니다.

그 과정 속에, 이웃사랑이 거기에 담겨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변의 고아와 과부가 있을 때 그 모습은 뭐냐? 그 처량하고 처참한 모습은 과거 자신의 형편을 주께서 수시로 반복해서 우리 주변에 보여주는 거예요. 그 이웃이 나에요. 내 모습이에요. 그렇다면 그 하나님의 율법은 더 안 찾아봐도 전부 다 그거예요.

출애굽기 22장에 더 보게 되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25, 26절에 “네가 만일 너와 함께한 나의 백성 중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이거든 너는 그에게 채주 같이 하지 말며 변리를 받지 말 것이며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왜냐? 옛날 너희도 이방민족에게서 학대받았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계속 유지시키려는 이유는 이방민족을 이스라엘을 기준으로 해서 심판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그들 나라는 영원한 나라가 되면 안 되거든요. 아주 작살내야 돼요.

심판을 하기 위해서는 심판 기준이 있어야 되는데 그 심판기준으로 이스라엘을 뽑아낸 거예요.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로 그들도 야곱의 소행처럼 자기가 최종의미고 자기밖에 모르지요. 그럴 때 주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율법대로 주어지게 되면 그들은 모든 율법을 다 지키지 않는 한 하나님께 무서운 징벌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율법에 그렇게 되어 있어요.

마태복음 5장 26절에 보게 되면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네가 만약에 제대로 율법대로 하지 않으면 하나를 어기더라도 제대로 지키지 아니하면 다 갚지 못하면 너는 나오지 못한다. 엄중한 율법을 그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적용시켜버립니다.

그리고 방금 그 예를 마태복음 18장에는 이렇게 되어 있어요. 베드로가 예수님보고 “내가 몇 번 용서하면 됩니까? 일곱 번이면 충분하겠지요?”라고 하니까 “일곱 번의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면서 예를 들었어요. 23-26절에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어떤 신하가 있는데 임금에게 빚을 졌어요. 그 신하는 갚을 길이 없어서 봐달라고 비니까 임금이 봐줬다는 말이지요. 본인이 임금에게 그 막대한 죄 값을 다 용서받았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자신의 처지를 알아야지요. 자기한테도 종이 있거든요. 돈 십 원 안 갚는다고 개 패듯이 팼어요.

그 소리 듣고 임금이 화가 나서, 내가 용서했던 그 신하 잡아들여서 다 갚지 않으면 큰 벌을 내린다는 식으로 예수님이 비유를 했습니다. 그래서 33절에 보면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모든 이야기가 반드시 뭐가 구비되어야 되느냐 하면, 이웃이라는 것이 있어야 돼요. 그런데 이웃은 내가 독자적으로 최종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어버리면 아무리 남을 사랑하고 동정하고 불쌍히 여기도 그것은 하나님의 이웃사랑이 아닙니다.

나 자체가 깨져서 내가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죄인인 것을, 갚을 길이 없는 죄인인 것을 아는 그것이 하나님의 율법의 시작이에요. 그것이 바로 율법의 시작입니다. 호세아의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호세아가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삼아서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고 해놓고 3장에 보면 호세아의 아내가 또 집을 나간 모양이지요.

그래서 하는 말이 호세아 3장 1-3절에,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 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하시기로 내가 은 열 다섯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저를 사고 저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값을 치르고 바람난 여자를 집에 데려오라는 거예요. 값은 누가 치르고? 간음하지 않은 남편이 값을 치르고 바람나서 집나간 그 음란한 아내의 죄 값을 남편인 깨끗한 호세아가 치르는 거예요. 치르고 데려오는 겁니다. 이게 호세아 목사님 부부의 세계에요.

이것은 보나마나 호세아는 예수님이고요, 그 음란한 바람난 여자는 이스라엘이지요. 호세아부터 이웃이 있어요. 그 이웃은 하나님의 율법에 준해서 도저히 이것은 철저하게 심판을 다 해도 그 값을 갚을 수 없을 정도로 더 이상 스스로 자기의 죄 값을 치를 수 없을 정도의 음란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이웃으로 준 거예요. 왜? 그 이웃이 있어야 언약이 살아 있으니까. 이웃사랑이 살아있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진정한 약속이라는 것은 율법을 통해서 죄를 계속 끝까지 가는 거예요. 스스로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나 때문이라고 자기 단독자, 독립적인 사고방식, 모든 인간이 다 그러니까요, 다 야곱이니까 그런 인간에게 율법이 철저하게 추적해서 기어이 율법의 그 저주로서, 완전히 너 스스로 율법에 위반한 죄에 대해서 값을 치를 수 없음을 고발해버립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기능이고 역할이에요. 약속은 죄의 무게만큼 값을 치르기를 요구를 하는 거예요. “값을 치러! 값을 치러! 호세아 봐라. 값을 치렀잖아. 네가 이웃사랑 한다고? 그럼 값을 치러봐. 나한테 이웃사랑 못한 값을 치러봐.”

못 치르면 어떻게 되는가? 오늘 본문에 봅시다. 호세아 12장 본문에 9절에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내가 너로 다시 장막에 거하게 하기를 명절일에 하던 것 같게 하리라.” 7월 15일부터 22일까지 일주일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막절이라는 것을 지켜요. 그 초막절 지킬 때는 텐트생활 합니다. 아주 불편하기 짝이 없는 생활을 하게 되어 있어요.

레위기 23장 39-42절에 나와 있습니다. “너희가 토지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 칠월 십오일부터 칠일 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 첫날에도 안식하고 제 팔일에도 안식할 것이요 첫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 가지와 무성한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칠일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 너희는 매년에 칠일 동안 여호와께 이 절기를 지킬찌니 너희 대대로의 영원한 규례라 너희는 칠월에 이를 지킬찌니라 너희는 칠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찌니.”

또 다른 구절 여러 곳에 있습니다. 초막절에 그들은 일부러 자진해서 광야시절의 고행을 체험하는 기간을 가져요. 1년에 한 번씩. 그게 초막절이에요. 초막절 하는데 거기에 스마트 폰 들고 가면 안돼요. tv 45인치 들고 가면 안돼요. 초막절은 뭐냐? 그냥 광야 때, 아무것도 없을 때, 아무것도 자기가 살길이 없을 때, 나라는 인간은 하나님의 언약 앞에서 언약은 안중에 없었다. 나는 하나님 없이 광야에 살았다.

그런데 그 광야에 누가 문을 따고 들어온 거예요. 구원의 주님께서 값을 주려고 따고 들어온 거예요. 그 값을 봐야 돼요. 값이 없으면 우리는 이 율법의 무게에 눌려서 지옥가야 돼요. 그 값을 치를 수 없음을 알아야 값을 누가 대신 치렀다는 것이 온 천하 보다 귀한 것인지를 알아요.

사람이 혼자서 어떤 자기 의미와 가치를 결정하려고 할 때 아무리 세상 살아봐야 어둠속의 방황밖에 안됩니다. 어떤 노래 이런 가사가 있어요. “당신 눈 속에 여명 있음을 나는 느낄 수 있었소. 오 주여 당신께 감사합니다. 실로암 내게 주심을.”

논산훈련소에서 배우는 노래 아닙니까? 실로함이 뭐냐? 눈을 뜨는 거예요. 혼자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혼자서 장님이 아니라고, 소경이 아니라고 자부했던 겁니다. 인생은 내 힘으로 개척하고 내 힘으로 다 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모든 것을 다 내원대로 하는 거예요. 김 여정처럼. 모든 것을 내 뜻대로 다 하는 거예요. 만사가 제 뜻대로 안 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심지어 교회 다녀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그동안 나는 깜깜한 밤 속을 해맨 거예요. “오주여 당신께 감사합니다. 왼 발! 왼발!” 하면서 배우는 노래. “실로암 내게 주심을…….” 실로함, 진흙 발라서 눈을 뜨는 거예요. 눈을 떠보니 혼자가 아니에요. 그리고 나를 위해서 세상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언약을 위해서 내가 백성된 거예요.

이것이 바로 불신자를 지옥 보내는 심판기준으로 활용됩니다. 이스라엘이 이방민족의 심판기준으로 활용되는 거예요. 우리에게는 뭐가 있느냐? 피 값이 있어요. 예수님이 주신 그 십자가의 피 값이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그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사랑을 해주는 자가 아니라 늘 이웃사랑을 주님에게 받고 있고,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피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도 또한 받고 있고.

그래서 나는 죄인이지만 주님의 이런 사랑을 받았어요. 그 사랑 받은 것을 증거 하는 것 그것이 오늘날 새로운 이스라엘, 이미 야곱에서 이스라엘 새로운 이스라엘 된 사람의 주님의 존재케 하는 이유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거짓되지 않았다고, 인생 돌아보건대, 장담하건대 나쁜 짓 하지 않았다고 우기는 그것이 율법 앞에서 얼마나 크나큰 주님에 대한 모독이고 저주받을 짓인가를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주께서 대신 치른 그 사랑의 값, 그 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