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호세아 11:12-12:6 / 야곱의 울음 본문
야곱의 울음
이근호
2020년 6월 10일
본문 말씀: 호세아 11:12-12:6
(11:12) 에브라임은 거짓으로, 이스라엘 족속은 궤휼로 나를 에워쌌고 유다는 하나님 곧 신실하시고 거룩하신 자에게 대하여 정함이 없도다
(12:1) 에브라임은 바람을 먹으며 동풍을 따라가서 날마다 거짓과 포학을 더하며 앗수르와 계약을 맺고 기름을 애굽에 보내도다
(12:2) 여호와께서 유다와 쟁변하시고 야곱의 소행대로 벌주시며 그 소위대로 보응하시리라
(12:3)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12:4)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12:5) 저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여호와는 그의 기념 칭호니라
(12:6)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라볼지니라
세상 사람들이야 자기 편하게 되면 그게 자연스러운 겁니다. 자기 행복을 위해 인생을 사는 것이 하등 이상할 것이 없어 보입니다. 더구나 모두 이들이 다 그렇게 사니까 자신이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문제 있다고 여겨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분명 사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겁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는 산다는 말은, ‘정말 하나님이 누구신가’하는 바를 세상을 널리 나타내야 하는 이유가 있는 민족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이 이방나라를 닮아갑니다. 세상 돌아가는 시류에 대해서 합세하고 있습니다.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이스라엘이 건재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거기 있음’으로 하나님됨을 나타내는데 충분치 않다는 겁니다. 이스라엘과 이방민족과의 차이남은 이스라엘을 이방나라처럼 살지 못하도록 강력하게 질책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이스라엘이 세상 나라와 결탁하는 식으로 생존하려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찾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원래 뜻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을 질책하면서 기준이 있을 겁니다. 그 기준에 맞지 않기에 하나님께서 나무라시는 겁니다. 그 기준으로 제시되는 것이 바로 과거 야곱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즉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실 때 그냥 오신 것이 아니라 언약을 제시하면서 오셨습니다.
오늘 본문 12:5에 보면, “저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여호와는 그의 기념 칭호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여호와라는 이름은 인간들이 그냥 호칭한다고 해서 지상에 실현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름이란 그 이름의 부름에 의해 관계가 정상적으로 연결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인간이 연결은 실제로 언약이 성취되어야 가능합니다.
언약을 통하지 않고서는 참 하나님과 통할 수가 없습니다. 야곱의 출생에 있어 하나님의 계약 실현 차원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가로되 이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동이가 있었는데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갖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이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창 25:22- 26)
이 계시 대목에서 에서의 묘사와 야곱의 묘사가 다릅니다. 에서는 그냥 몸이 붉고 털이 많다는 식으로 외형적으로 설명되어 있지만 야곱은 어떤 동작으로 그 사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행위는 미완료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태 중의 두 사람을 ‘나눈다’고 하셨지만 야곱은 근성이 있어 “아직 나는 누가 섬길 자인지 누가 강자 인지 정해지지 않았다”고 고집부리고 있는 겁니다.
야곱의 야곱됨은 현재진행중인 겁니다. 그 누구에게 지기 싫은 근성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여전히 형의 발꿈치를 붙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름이 ‘야곱’입니다. 이러한 어릴 때의 근성은 장년이 되어서도 여전합니다. 야곱은 그간 인생 여정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형을 제치고 복을 따냈다고 자부했습니다.
즉 자기에게 주어진 언약은 자력으로 달성할 요량으로 인생을 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얍복강 가에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과 씨름합니다. 안 지려고 싸우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새벽녘에 상대가 자신이 천사임을 밝히자 야곱은 경악해 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야곱 본인은 언약에 준해서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하는 장자라고 자부했기 때문입니다. 장자이기에 아버지의 복을 마땅히 자신이 차지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계약을 주시는 분과 본인이 밤 새도록 싸움을 벌렸던 겁니다. 마치 자신의 적인 것처럼 말입니다.
이는 곧 자신의 존재 토대가 언약 자체를 자신이 파기하는 바가 되는 짓인 겁니다. 언약이란 인간에 의해서 깨어지는 그 지점에서 본격으로 완성 노선이 시작이 됩니다. 출애굽기 32:19에 보면, “진에 가까이 이르러 송아지와 그 춤 추는 것을 보고 대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약이란 이 깨어진 돌판을 상자에 삼아 ‘증거궤’이라는 이름으로 성소 가장 깊숙한 곳에 안치하고 그곳을 속죄하므로서 완성되는 겁니다. 곧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성사되는 겁니다. “그 장을 갈고리 아래 드리운 후에 증거궤를 그 장안에 들여 놓으라 그장이 너희를 위하여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하리라 너는 지성소에 있는 증거궤 위에 속죄소를 두고”(출 26:33-34)
즉 인간은 결코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언약을 성취하신다는 바로 그 일을 통해서 영원히 하나님의 이름만이 기념되게 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겁입니다. 증거란 바로 인간의 모든 죄의 극한은 인간쪽에서 증명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쪽에서 언약을 가지고 증명하시는 겁니다.
야곱은 사태를 파악하고 웁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붙들고 운다는 것은, 자기로 인해 깨어져버린 언약을 하나님에 의해서 계속 이어하게 해달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울음과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시게 되는데 그것은 기세 등등한 야곱적인 근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야곱이 죽고 난 뒤 ‘다른 야곱’의 간곡함으로 받아들이십니다.
그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즉 야곱 안에 ‘다른 야곱’이 있었던 겁니다. 기존의 야곱은 언약을 깨지만 ‘다른 야곱’이 깨진 야곱의 죄를 이기고 언약을 완성해나갑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십자가 지셔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히브리서 2:10-11에 보면,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고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도 우시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그리고 그분의 기도로 언약이 완성됩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 7:25)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예수님만이 언약 완성자임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야곱의 울음에 동참해서 우리 자신이 여기에 존재한다는 것은 참으로 심각하게 기이한 현상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언약을 완성하신 하나님의 이름임을 인정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45강-호 11장 12-12장 6절(야곱의 울음)20061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 11장 12절에서 12장 6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266페이지입니다.
호세아 11:12-12:6
“에브라임은 거짓으로 이스라엘 족속은 궤휼로 나를 에워쌌고 유다는 하나님 곧 신실하시고 거룩하신 자에게 대하여 정함이 없도다 에브라임은 바람을 먹으며 동풍을 따라가서 날마다 거짓과 포학을 더하며 앗수르와 계약을 맺고 기름을 애굽에 보내도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쟁변하시고 야곱의 소행대로 벌주시며 그 소위대로 보응하시리라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저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여호와는 그의 기념칭호니라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라볼찌니라.”
세상 사람들과 이스라엘의 차이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홀로 살아갑니다. 믿을 것도 자기밖에 없고 사랑할 것도 오직 자기자신 밖에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지만 궁극적으로 세상사는 이유와 목적은 자기 잘되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그것을 두고 하나님이 찾아가지 않은 이방민족이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방민족 입장에서 볼 때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은 전혀 거짓도 아니요, 사기도 아니요, 책망 받을 일이 전혀 아닙니다. 왜냐하면 너도 그렇게 살고 나도 그렇게 살기 때문에. 원래 인간이라 하는 것은 자기뿐이고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이다. 전혀 이상할 것이 없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드시고 난 뒤에는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과는 전혀 상관없이 늘 하나님과 상대해야 되는 민족입니다. 자기가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자기에게 찾아온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스라엘 나라가 이 땅에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북쪽 이스라엘, 그리고 남쪽 이스라엘, 유다지요, 그것을 책망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만든 목적에 너는 왜 부합되지 못하느냐, 라는 것을 따지는 대목입니다. 그렇게 따졌을 때 따지는 기준은 간단합니다. 이방나라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따지는 책망하는 이유가 됩니다. 이방나라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이방나라는 자기를 위해서 사는 그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하지만 너희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그것을 분명히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이방민족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저 하늘에 계셔서 인간들 입장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인간들로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신은 그냥 하늘나라 계시고 우리는 땅에서 우리 마음대로 살면 된다. 우리 하고 싶은 대로 살면 된다.’ 그렇게 편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통해서 진짜 하나님이 나타났을 경우에는 이방민족이라도 그런 소리 하면 안 되지요. 하나님께서 지상의 이스라엘 내부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드러냈잖아요. 그렇다면 진짜 하나님에 대해서 모른다는 것은 이방민족이 멸망당해도 마땅한 결과를 자기가 떠안게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만약에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게 되면 그것은 어떤 결과가 나오느냐 하면, 이방민족화 돼요. 이방민족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모른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이방민족하고 다를 바 없는 게 돼요. 그래서 우리 이방민족 입장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벌 받는 모양새가 좀 이상해요.
왜 그러냐 하면, 우리처럼 되니까 그게 원래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다 이 말이지요. 어떤 사람이 신천지 가입했는데 신천지가 엉터리인 것을 알고 거기서 탈출을 시도한다 이 말이지요. 그러면 신천지가 이렇게 협박해요. “네가 만약에 우리 말 안 들으면 너는 신천지 외에 다른 사람들하고 똑같이 된다.”
이렇게 할 때 신천지 안에서 그것이 옳다고 하는 사람들은 “어머 무서워라” 이렇게 되지만 그 밖에 다른 사람들은 “그래, 빨리 나와 빨리 나와. 아직도 그런 협박공갈을 듣고 있냐?” 그렇게 되는 거예요. 탈북자들이 왜 생깁니까? 북한 당국자들이 “너 만약에 우리 김일성 족보, 이 가문 말 안 들으면 남한처럼 거지꼴 난다.” 이래요.
북한주민들은 “제발 그것만큼은 안돼요. 제가 말 들을게요.” 그렇게 되는 거예요. 바깥의 정보를 통해서 남쪽이 어떻게 산다는 것을 아는 사람 같으면 ‘그것은 복이지. 그것은 땡잡은 거지.’ 하고 오히려 다행스럽게 생각할 겁니다.
그래서 이 호세아 말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로 남을거냐, 그게 맘에 드느냐? 아니면 이방나라처럼 자기편한대로, 자기가 목적이 되어서 살아가는 그것이 편하냐? 어느 쪽이 편하냐?”라고 할 때 12절에 12장 1절에 “에브라임은 바람을 먹으며” 유행 따라서, 시류에 따라서, 분위기 따라서 살아간다, 그 말이지요.
그 당시 주변나라에 편승해서 그냥 살아가는 거예요. “동풍을 따라가서 날마다 거짓과 포학을 더하며” 그러니까 12장 1절에 나오는 거짓과 포학이라는 말, 우리가 이걸 안 봤다고 치면, 그냥 이스라엘은 다른 이방민족하고 다를 바 없이 그들과 똑같이 살아간다. 그렇게 보시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 보기에는 그게 뭐냐? 거짓과 포학이라고 그렇게 규정할 수가 있는 겁니다.
“앗수르와 계약을 맺고” 계약이라는 것은 수출계약이지요. 수출계약을 하고, “기름은 애굽에 보내도다.” 애굽에게 잘 보여야, 선물을 줘야 자기나라를 침범하지 않지요. 강대국이니까 잘 보호해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러한 삶이 이미 이스라엘도 편하게 된 겁니다 이상한 것이 전혀 없어요. 자기의 본성에 부합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방민족들이, ‘나는 나다. 나는 나를 위해서 산다. 나는 나로 인하여 산다.’ 그것이 너무나 부자연스럽지 않고 자연스럽게 된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찾아왔다는 것이 문제지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찾아온 정도가 아니고 아예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만드셨지요.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님의 나라다, 그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가만두지 않고 하나님 자신의 존재함을 드러냅니다.
12장 2절에 “여호와께서 유다와 쟁변하시고” 논쟁하신다는 말이지요. “야곱이 소행대로 벌 주시며” 야곱의 소행대로 벌을 주신다. 이건 뭐냐 하면, 지금 나쁜 짓을 하고 있으니까 너 벌 받을 각오하라, 그런 뜻이에요. 이스라엘이 애굽사람들처럼,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보시기에 맴매 당할 일, 벌 받을 일이라, 그 말입니다.
“야곱의 소행대로 벌주시며 그 소위대로 보응하시리라.” 이스라엘이 현재 이방나라하고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살아가는 그 모습은 이미 야곱의 본성에 그게 들어 있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본래 이름이 야곱이거든요. 12장 3절에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이렇게 되어 있어요.
지금 우리가 발견하고 싶은 것은 뭐냐? 지금 야곱이 매를 맞는데 야곱이 무슨 나쁜 짓을 했느냐를 보고자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이런 나쁜 짓을 했으니 벌을 받았다는데 그 나쁜 짓이 뭐냐 하는 거예요. “야곱의 소행대로”라고 해서 야곱이 나쁜 본성대로 행했는데 그것이 태에서 태어날 때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다는 거예요.
이게 무슨 나쁜 짓입니까? 형의 발꿈치도 못 잡습니까? 그거 잡으면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죄를 지었다고 어떤 지적을 하시더라도 납득이 되는 것을 지적해야 될 텐데 특이한 행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주목하시고, “하나님이 원치 않는 짓을 야곱이 한 것처럼 야곱의 후손되는 이스라엘도 지금 똑같은 나쁜 짓을 하고 있으니 벌 받아야 마땅하다.” 그렇게 나오시는 거예요.
야곱이 태중에서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던 그것이 왜 벌 받을 짓인지? 창세기 25장 24절에 보면 “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둥이가 있었는데 먼저 나온자는 붉고 전신이 갖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세이었더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에서하고 두 번째 태어난 야곱하고 차이점이 뭐가 있느냐 하면, 에서는 외형적인 묘사를 합니다. 외형적으로 붉고 전신이 ‘갖옷’ 같았다고 했어요. 전신에 털이 많은 몸이라는 거지요. 아기를 볼 때 붉었다. 털이 많다. 이것은 눈으로 보면 누구든지 알 수 있는 거예요. 그 이름이 에서에요. 붉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외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동작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동작인데 둘이 태중에서 싸운다, 그 말은 22절에 나와요. “아이들이 그 태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런데 태중에서 싸우더라도 일단 자궁 안에서 나올 때는 휴전기간을 갖든지 좀 한 템포 쉬고 나와서 싸워도 싸워야 되는데, 나올 때부터 동생은 에서의 발꿈치를 잡은 거예요.
이 동작은 모든 마무리가 미완료된 동작을 보여줍니다. 미완료된 동작. 그런데 아기 낳을 때 하나님의 계시가 나타났어요. 23절에 보면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자를 섬기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쌍둥이를 낳게 하고, 그 쌍둥이가 복중에서 서로 싸우게 만들었습니다. 싸우는데,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너희 인간들끼리는 서로 싸우더라도 그걸 나누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복중에서부터 나누겠다는 거예요. 나누는데 이게 나올 때 나눠져서, 너는 너, 나는 나, 딱딱 나눠져야 되는데 나눠져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아직까지 나는 덜 나눴다는 식으로 야곱이 에서의 발꿈치를 딱 잡고 나오는 거예요.
“우리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하나님은, “손 떼.” 야곱은 “못 놓겠습니다. 아직까지 게임 안 끝났습니다.” “한쪽은 강하고 한쪽은 섬겨야 된다.” “강한 자, 섬김을 받는 자가 누구냐에 대한 그 결정은 아직 나눈다고 하지 마세요. 제가 그걸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 시합은 아직 안 끝났고 나는 여기서 멈출 의사가 없습니다.”라고 야곱이 에서 곧 자기 형의 발꿈치를 잡은 거예요.
야곱 이름 자체가 발꿈치를 잡았다는 그 뜻이 야곱이에요. 여기서 다시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이스라엘에 대해서 하나님이 책망하시는 이유가, 세상 사람하고 다를 바 없다고 책망하시는 거예요. 세상의 시류, 기류 따라 저 나라 이 나라 똑같이 사는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이방나라 민족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냥 편한대로 살면 되지만 내가 만든 나라 이스라엘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입장에서 생각할 때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이방민족과 같아서는 안 된다는 말은 그러면 뭘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그것은 이미 에서와 야곱을 줄 때에 하나님의 언약을 줬던 거예요. 하나님의 약속, 언약이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만들 때 이스라엘 좋으라고, 이스라엘을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살게 하려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장 15절에 보면,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하나님의 이름은 누구십니까, 할 때 ‘여호와’라고 호칭되지만 사실은 그 내용은 여호와라고 호칭된다고 여호와가 아니라, 실제로 이 지상에, 인간사는 세상에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던 약속이 주어지고 성취되는 그 과정에 개입하시는 하나님, 또 이삭에게 약속을 주시고 그 약속을 스스로 이루어 나가시는 그 일에 개입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야곱에게 계시를 주시고 야곱에게 주신 그 약속을 하나님이 친히 야곱을 통해서 이루어내시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보통 이름이라 하는 것은 호칭을 이야기하는데, 단지 호칭이 아니고 이게 실질적인 효력을 발생하는 이름, 여호와 이름 부른다고 이름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벌인 일을 다 하신 그 일을 보면서 인간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자기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일을 보면서 뒤늦게, 사후적으로, 새삼스럽게 ‘아, 하나님은 이런 분이로구나.’ 나중에 깨닫게 되는 그 하나님,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드러내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 야곱을 통해서 무슨 일을 하느냐? 야곱이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지 못하는 존재로 만드시는 거예요. 못하는 존재로 만들어서 하나님의 언약과 어떤 점에서 위배되는가를 의도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인물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으로 하여금 언약을 주면서도 언약을 받은 야곱이 언약을 깨는 그 지점을 남들에게 소개하는 용도로서 야곱을 이 땅에 계속해서 이끄시는 겁니다. 언약을 깨게 하는 거예요.
출애굽기 32장에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오니까 이스라엘의 진영에서 우상을 섬겼습니다. 송아지 만들어놓고 춤추고 뛰노는 것 보면서 모세가 대노해서 손에 든 판을 던져서 깨트려 버렸어요. 모세가 돌 판을 하나님께 받아서 들고 온 목적은 하나님은 아시지요. 모세는 처음에는 몰랐고 나중에는 알게 되지만 그 돌 판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그 돌 판이 깨어지는 용도로서 물질로 만든 사물로 만든 말씀 판을 준 거예요. 깨트리라고 준 거예요.
물론 그것을 일부러 “아이고 무거워라.” 하고 깨트리지는 않지만 밑에 있는 상황을 보고 모세가 화가 나서 성깔대로 깨트려 버렸는데 그게 하나님께서 의도한 거예요. 왜냐하면 언약은, 깨트려짐이 없으면 언약은 완성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은 중간에 깨트려지는 지점이 있어줘야 돼요.
그래야 인간 힘으로 언약은 달성되는 것이 아님을 인간 세상에 알릴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대표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깼다는 말은, 이스라엘뿐만 아니고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막혀 있다. 하늘나라와 끊어져 있다. 자기의 노력과 어떤 신의 이름을 불러도 그들은 천국갈 수 없다. 그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겁니다.
이미 창세기 3장에서, 에덴동산에서 조상 아담을 내어보낼 때는 생명나무로 가는 길은 끊어져 있어요. 그 끊어짐에 대해서 분명히 하나님께서 일관되게 일을 벌여 나가시는 거예요. 이방민족은 이미 언약에서 끊어졌어요. 그래서 이방민족의 특징은 뭐냐?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찾아온 하나님이 없어요.
찾아온 하나님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계약관계가 없습니다. 계약관계가 없으니까 인간들이 무엇 때문에 사느냐? 본인을 위해서 살아요. 하나님의 계약과 약속을 위해서 사는 존재가 아니고 자기편한대로 자기 행복하면 그만이에요.
그런 사람들 찾아보라면 굉장히 많습니다. 유 시민 있지요, 문 재인 있지요, 전 두환 있지요. 보면 숱해요 숱해. 거의 대부분이에요. 김 정은도 있지요. 국회의원들 거의 다지요. “왜 삽니까?” “나의 행복을 위해서 삽니다.” 아이고, 그게 잘났대. 그것도 큰소리칠 일이라고. “인간은 왜 삽니까?” “나의 잘남을 위해서 산다.” 성철스님도 그렇지요. 전부다 개인적인 행복을 위해서 사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계약은요?” 이러면 무슨 소리인지 몰라요. “왜 나에게 계약이야기를 해요? 하나님의 계약이 왜 거기서 나와?” 왜 거기서 계약을 논합니까? 아무 논할 필요 없어요. “각자 자기 편한대로 몸 편하고, 몸 건강하고, 가족 평안하고, 돈 잘 벌고, 행복하고, 늘 웃고, 기쁘게 살고, 죽을 때도 안 아프고 죽고, 그거 외에 무슨 사는 이유가 있고 재미가 있느냐?” 이렇게 이야기해요. 세상 사람들이.
문제는 이 세상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니고 교회 교인들도 다르지 않아요. 물론 들은 풍월은 있어서 주님 십자가는 이야기하지만, 진짜 그 마음, 몸에 익혀진 몸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내 행복이에요. 오늘 본문에 보면 아주 특이한 것이 있지요. 4절에 보면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이게 이상하다 이 말이지요.
이겼으면 웃어야지요. 이겨놓고 울기는 왜 웁니까? 야곱이. 운다는 것은 뭔가 내 쪽에서 잘못됐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문제가 있다는 거지요. 아까 출애굽기 32장에서 모세가 돌 판을 깨잖아요. 깨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깨진 돌 판을 대신해서 돌 판을 만들고 40장 20절에 보면 하나님의 증거궤 속에 넣습니다.
“그가 또 증거판을 궤 속에 넣고.” 증거하는 궤,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하나님의 계약이 왔을 때 그 계약을 중심으로 해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를 증거 할 수 있는 물체, 그 물체를 아카시아 나무 상자에 넣는데 그 상자가 그냥 상자가 아니라 증거 하는 궤, 인간은 언약에 실패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궤, 그게 증거궤에요.
출애굽기 26장 33절에 “증거궤를 그 장안에 들여 놓으라 그 장이 너희를 위하여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하리라.” 증거궤가 있는 곳은 지성소가 되고, 그곳에는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밖에 못 들어가고, 증거궤가 없는 곳이 성소가 되어서 이곳은 제사장들이 늘 매일같이 들어오는 거예요.
34절에 “너는 지성소에 있는 증거궤 위에 속죄소를 두고” 그러니까 속죄소라는 것이 죄를 사해주는 거예요. 죄를 사해주려면 인간의 죄의 최후 모습을 담은 어떤 증거가 있는 곳이어야 하거든요. 그게 뭐냐 바로 인간이 죄지은 것, 자기가 죄지은 것을 자기가 끌어 모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인간이 죄의 극한의 모습, 인간의 죄가 다 최종적인 어떤 형태를 갖출 때 이것이 인간의 죄의 마지막 모습이라고 알려줄 수 있는 증거를 인간 쪽에서 제시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쪽에서 제시하는데 그게 뭐냐?
하나님 쪽에서 가져온 돌 판이 깨어져버렸다는 그 사실이에요. 인간이 죄 지었다는 것은 죄지은 인간이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쪽에서 미리 마중 나와서 증명해 버렸어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증거궤, 언약궤입니다. 그 언약궤는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늘나라까지 가 있어요. 물론 실재하는 언약궤는 없지만 사도요한이 보니 언약궤가 하늘나라에서 보인다고 되어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생긴 예수님의 십자가 보좌지요. 자리에요. 그 자리가 주님이 주님으로 계시는 자리가 돼요. 그 자리 앞에 어떤 인간도 할 말이 없는 거예요. 왜? “저는 착한 짓만 했지 나쁜 짓은 안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쁜 짓 착한 짓을 묻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약을 성취하지 못하면, 계약을 달성하지 못하면 그것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사람입니다.
이스라엘한테는 그 계약이 주어졌지요. 그래서 야곱으로 하여금 벌준다는 것은 무슨 이야기냐? 설교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 것은 한마디로 이거예요. “이스라엘아, 내가 너에게 계약관계에 있잖아. 그런데 너희는 내 계약은 안중에도 없네. 생각 안하고 있어? 너희들이 계약 위반하면 그것으로 끝인 것을 몰라?” 이런 이야기를 하고 계신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계약이 있는데도 왜 자꾸 이방나라와 계약을 맺었느냐는 말이지요. 12장 1절에도 나오지요. “앗수르와 계약을 맺고” 앗수르 이야기와 관련된 것이 이사야 8장에 나와요. 이사야 선지자가 아들을 낳게 돼요. 아내와 동침해서 아들을 낳는데 동침하기 전에 아들의 이름부터 먼저 지어줬습니다. ‘마헬살랄하스바스’, 이름이 굉장히 길어요. 일곱 자인데 ‘마헬살랄하스바스.’
무슨 뜻이냐 하면, 노략이 신속하게 추진될 것이다. 빼앗음, 다른 이방민족이 와서 모든 귀한 것들을 빼앗는데 있어서 지체하지 않고 속히 시행될 것이다. 머뭇거리지 않고. 이것은 뭐냐 하면, ‘과연 이방민족이 와서 하나님이 계시는 유다나라를 그렇게 신속하게 처결할 것인가?’라는 증거 하나가 뭐냐? 그것이 바로 이사야 선지자가 아들 낳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사야는 하나의 계약관계에 있습니다. 이사야에 나오는 그 자식하나 이름조차도 하나님의 계약과 연관된 자식이고 이름을 거기에 부여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이름은 이사야 아들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누구의 이름이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 계약대로 하실 일을 보여주는 일들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 이름이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여호와 이레’ 그런 것이 대표적이지요. ‘여호와 닛시’, 하나님은 깃발이다. 여호와 이레는,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십니다.
이사야 8장 4절에 “이는 이 아이가 내 아빠, 내 엄마라 할 줄 알기 전에” 아빠, 엄마, 아빠, 엄마, 이렇게 되면, 그 애가 이름도 참 긴데 ‘마헬살랄하스바스’가 아빠, 엄마, 라고 그냥 이야기해버리면 내 새끼 예쁘게 크네, 이렇게 되잖아요. 그러면 본래 이사야의 아들이 소개하고 보여줘야 될 기능은 없어지고 남들처럼 그냥 평범한 이사야 가정의 아들밖에는 안되잖아요.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 “이는 이 아이가 내 아빠, 내 엄마라 할줄 알기 전에 다메섹의 재물과 사마리아의 노략물이 앗수르 왕 앞에 옮긴바 될 것임이니라.”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통해서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를 공격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이방나라가 이스라엘을 쳐버리면 이방나라가 강자가 되지요. 이방나라하고 이스라엘과의 차이성이 없이 되어버려요. 이스라엘은 이방나라하고 같이 종속됩니다. 그러면 이방나라는 뭐가 없느냐? 언약이 없어요. 언약이 없고, 하나님의 약속이 없고 그냥 자기 행복대로 살아가는 자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했다는 말은, 현재 이스라엘의 형편이 하나님과의 계약이 깨진 상태라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계약이 깨지면 이스라엘은 끝장났네. 이스라엘은 더 이상 존속할 이유도 없네.’ 할 때에 야곱이 갖고 있는……, 옛날 이스라엘의 조상, 이스라엘을 처음 이스라엘 되게 했던 그 야곱에게 어떤 일이 있었느냐? 오늘 본문 12장 3절을 봅시다.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야곱이 태에서부터 형의 발뒤꿈치를 잡는 이 행위는, 하나님께서 큰 자와 어린 자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야곱 내가 비록 어린아이지만 내가 절대로 형한테 지거나 약자가 되는 것은 용납 못하겠다는 근성 같은 것이 이미 타고난 거예요. 어릴 때부터 타고났어요. 어릴 때는 모르는 것 같지만 애들도 다 알아요. 할아버지가 자기를 심하게 밀면 항상 할아버지 생각할 때는 ‘할아버지는 날 위험에 빠트린 인물이다.’ 몇 년 지나도 아직도 그걸 기억해요. 앞으로 한 80까지 기억할지도 몰라요.
야곱의 근성, 본성, 형을 공격하는 그 근성, 나중에 장년이 되어서 본문에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라고 해서 하나님과 겨뤄서 안 지려고 하는 이 본성이 이미 형한테 써먹은 근성이에요. 써먹었던 그 근성으로 하나님께 달려든 겁니다. 달려드는데 야곱에게 뭐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자기에게 복 주기로 계약을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계약을 유지하고, 지탱하고, 그걸 내 소유화하고 보존하는 것은 내가 알아서 내 힘으로 하겠다는 그 근성이 있는 거예요. 그 근성을 갖고 있는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언약대로 찾아옴으로 말미암아 야곱의 근성은 근성대로 고스란히 다 노출시키고, 그리고 또 언약은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그 사실도 야곱을 통해서 나타나게 하는 두 가지 일을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야곱이 하나님을 이겨요. 천사를 이깁니다. 물론 그 때만 이기지 그 다음에는 못 이겨요. 천사를 이기고 그 다음에 울었다는 말은, 야곱이 천사를 이길 때는 자기한테 복을 준, 계약을 준 그 계약의 당사자라는 사실을 몰랐고, 그냥 내 축복,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훼방하고 빼앗아가는 어떤 사람, 형이라든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쉽게 말해서 야곱은 계약상대자를 통해서 내가 하는 행위가 계약을 파기하는 행위라는 것은 상상도 못한 거예요. 막상 천사하고 씨름을 했지요. 씨름을 하고 난 뒤에 천사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네가 나에게 이겼다고 해요. “야곱아, 나는 하나님이거든. 네가 하나님을 이겼어.” 라고 다툼의 결과에 대해서 야곱을 찾아온 방문자가 일방적으로 결정해버립니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야곱은 내가 건들지 말아야 될 자를 건드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존재의 근원은 하나님의 계약, 하나님의 언약에 있지 나에게 있지 않다는 그 정도는 야곱이 알고 있어요. 자기의 원천과 근원을 본인이 공격해 버린 거예요. 내 존재를 내가 깨트려버린 거예요. 내가 형에게 이기고, 그래서 언약대로 복 받는 자, 섬김을 받는 자 되고 싶어한 그 모든 시도로서 누가 그걸 깨버렸느냐 하면, 시도하는 내가 나를 깨버린 겁니다.
모든 축복은 계약대로만 주어져야 되는 그런 조건이 있었는데 조건을 지키겠다는 내가, 그 조건을 유지하겠다는 내가 그 조건의 뿌리를 완전히 부숴버린 것이 돼요. 그걸 어떻게 아느냐? ‘네가 이겼다’ 하는 순간, ‘너 잘났어. 너 대단해’라고 하는 순간 대단하다, 이겼다, 하는 그 순간 이미 그 결정을 야곱 본인이 안 내리고 있다는 점이 중요해요. 본인이 그 결정을 내린 것이 아니에요. 자기에게 져버린 하나님 쪽에서 결정을 내려버렸어요.
만약에 천사가 아니고 형이 와서 “아이고 동생아 역시 한 솜씨 어디 가겠나? 잘하네.” 이러면 야곱은 아무 걱정 안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는구나.’ 이렇게 나오겠지요. 그게 아니고 나를 지켜준다는 하나님이 나에 의해서, 그 지킨다는, 그 복주는 원천을 내 손으로 파괴시킨 것이 되니까 야곱은 여기서 절망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자기의 파탄으로 여겨져서 울어버리지요.
“다시 나의 원천을, 깨진 원천을, 깨진 언약을, 깨진 계약을 다시 처음부터 새로 원상복귀해 주세요.”라고 간절히 우는 거예요. “나의 뿌리를, 나의 근원을 다시 멀쩡하게 해 주옵소서.” 다시 시작하게 해 달라. 그래서 야곱이 우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은혜 받고 울었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제가 생각했어요. 그분이 왜 울었을까? 제대로 은혜 받았으면 이런 생각이 옳아요.
내가 여기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심각할 정도로 이상한 일이다.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이 이유가 날라 가 버린 거예요. 내가 여기 있기에 내가 살아야 된다. 이것은 이방민족이에요. 하나님의 계약과 언약이 형성되지 않은 사람이에요. 내 뿌리는 나다. 우리 조상이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가 내 뿌리다. 대한민국 사람이다. 내 뿌리는 아주 건재하다. 이렇게 할 것 같으면 울 일이 별로 없어요.
인간이 운다는 것은 다시 자기존재에 대해서 질문을 하는 거예요. ‘없어야 되는데 왜 내가 여기 있지? 설교하는 내가 여기 왜 있지 이상하네? 내가 왜 여기 서서 설교해 ? 내가 여기 왜 있지?’ 다른 이방민족은, 계약이, 언약이 없는 사람은 그 질문을 못하는 겁니다. ‘태어났으니 살아야지.’ 그렇게 되는데 ‘왜 태어나야 되지 왜? 왜 태어나야 했지?’
그런데 자기에게 오신 분이 하나님이거든요. 그러면 야곱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언약을 앞장세워서 일하시고 언약 없이는 일하지 않는 분이 하나님이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의 그 언약에 대해서 ‘내가 하나님과 맞짱 떴다. 나의 원수로 생각해서 나를 공격하는 자로 여기고 내가 물리쳤다.’ 이렇게 되면 결국 뭐도 물리쳤느냐 하면, 나의 뿌리가 되는 계약도 내 힘으로 내가 쫓아낸 것이 되어버린다는 말이지요. 박살낸 것이 돼요.
그러면 나는 뭐냐? 하나님의 계약의 방해자가 되고, 하나님의 언약의 반대자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언약대로 하려고 하는데 내가 바로 언약의 훼방자가 되어버려요. 아까 모세가 돌판 깨는 이야기 했지요. 언약이 깨어져야 비로소 깨진 자리에서 언약이 새롭게 되는 거예요. 왜? 그래야 인간의 노력과 행함으로서 언약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먼저 죽는 작업이 필요했던 거예요. 그 죽음으로 모든 인간은, 계약을 성취할 사람은 아무도 없고 아무도 천국 갈 자격자는 없음이 분명히 드러나야 되는 겁니다. 야곱이 울었습니다. 울 때 하나님께서는 그 야곱의 소원을 들어준 것이 아니고, 울며 간구할 때 야곱 말고 야곱 안에 또 다른 분이 계셨어요.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 이름이 이스라엘이에요. 이미 야곱은 깨어졌어요. 언약의 위반자로 벌써 발각 되었습니다. 발각된 입장에서 새삼스럽게 간구하고 우는 이것은 간구하고 울만한 자격자가 야곱 안에 따로 들어 있는 거예요. 그게 누구냐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뀌면서 이스라엘 덕분에 야곱이 살아요.
내 안에 그리스도 때문에 성도가 산다고요. 그러면 예수님이 어떤 역할을 하느냐? 히브리서 2장 10,11절에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예수님께서 친히 아버지를 향하여, 인간은 배제하고 친히 아버지를 향하여 간구하고 그리고 우셨어요. 우셨다는 것이 히브리서 5장 7절에 나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히브리서 7장 25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그러니까 성령을 받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나는 계약 위반자요, 내가 계약을 방해하는 자요, 계약을 깨는 자인 것을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깨닫게 하셨다는 겁니다. 나라는 인간은 하나님에 반대하는 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언약에 의해서 깨닫게 하심으로서 깨닫게 하시는 그 분이 내 안에서 내 대신 기도하고, 간구하고, 눈물로 통곡을 하심으로서 우리가 예수님과 형제가 되어서 하나님과 영원히 사는 겁니다.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나는 누구냐? 나는 왜 있느냐? 언약의 위반자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아담계열에서의 나는 있어야 되고, 위반했는데 그 위반한 것에 대해서 오직 주님만이, 예수님만이 그 언약을 완성시켰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예수님 계열로 우리는 새피조물로서 살아야 되는 겁니다.
복합적인 요소가 있지요. 하나는 언약위반자, 다른 하나는 언약완성자가 함께 동거하는 그러한 존재, 그것이 바로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뀐 이유고, 그 근거에 의해서 오늘 본문 호세아 12장 5절에 보면 “저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여호와는 그의 기념 칭호니라.” 여호와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 속에 담을 그 때가 올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그렇게 활용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냥 나 행복하고 편하면 될 줄 알았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일의 훼방자요, 방해자고, 그로 인해 우리 자체가 저주받아야 마땅함을 깨닫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자로 삼으시니 이점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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